황제의 검 – 124화 : 전사총에 묘지기들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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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검 – 124화 : 전사총에 묘지기들이 없다.


전사총에 묘지기들이 없다.

전사총은 말 그대로 전사들의 무덤이었다. 처음 이곳이 생긴 연유를 따져 올라가 보면 의외의 사건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때만 해도 무한계 남부권에 전사라는 개념은 생소했다. 수련자가 되기 위해 몇 번인가 메덴에 들어갔던 한 영자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는 매번 실패하는 자신을 돌아보며 대체 무엇이 부족한가를 따져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의 부족한 점을 떠올릴 수 없었다. 그러던 그가 한 숲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였다. 분명 수련자로 보이는 영자가 지나치는 것이 아닌가. 그는 다짜고짜 그에게 엉겨 붙어 자신의 옆자리에 앉혔다. 가리고는 자신의 사정을 얘기하고 대체 어떻게 해야 수련자가 될 수 있느냐고 했다.
자세히 그를 살펴보던 수련자가 한다는 말이, ‘그대는 앞으로 수생을 살며 남을 위해 헌신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 마음을 알겠거든 다시 메덴으로 오십시오. 반드시 수련자가 되실 수 있을 겁니다’ 라는 것이다.
그때만 해도 수련자에 대한 존경은 대단할 때였다. 수련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 섞인 말에 그는 고마워하며 그 구체적인 방법을 물었다.
‘무엇이 헌신이며 그 구체적인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잠시 고민하던 수련자가 엉뚱한 제안을 그에게 했다.
‘중부권을 떠돌며 전사들을 따라다니십시오. 그러다 그들이 죽으면 영체를 떠메고 이곳으로 가져와 묻어 주십시오.’
‘정말 그것만으로 수련자가 될 수 있다는 겁니까?’
‘제가 약속을 하죠. 반드시 수련자가 되실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해서 그 영자는 이후로부터 죽은 전사들의 영체를 떠메고 와 땅에 묻어주었다. 첫 생이 지나고 두 번째 생이 되자 무덤의 규모가 꽤나 커지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무덤을 혼자서 관리하기엔 너무 벅차게 되었다.
고민하던 영자는 다른 영자들에게 도움을 청해 보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결국에 그는 고민하다 두 가지 묘책을 짜냈다. 그 하나는 전사들의 영체에서 수확한 갖가지 보물들을 고용한 자들에게 일종의 수고료로 지불하는 안이었고, 도 하나는 한 가지 소문을 퍼트리는 것이었다.
‘수련자가 말씀하시길, 전사총에서 몇 생을 봉사하면 누구나 수련자가 될 수 있다고 하셨다. 그 분이 장담하셨다. 만약 그것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모든 걸 책임지겠다고 하셨다.’
이 소문은 수련자가 되고는 싶은데 될 수 없었던 자들을 전사총으로 모아들였다.
“그래서 전사총이 만들어졌단 말야? 참 어처구니없네. 그럼 묘지기들은 모두 수련자가 되었겠네?”
아레나의 말에 파천은 코를 찡긋했다.
“그럼 어떻게 된 거야?”
“뭐, 어떻게 되긴 새로운 말썽꾸러기 집단이 생겨난 거지. 당시 그 말을 했던 수련자는 결국 그것 때문에 제명되었는데, 그가 바로 도나투스야.”
“뭐?”
파천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웃을 수만은 없었다.
“지금까지도 전사총의 묘지기들은 도나투스라면 이를 갈지. 그들은 심지어 도나투스를 잡아 오면 지금껏 모아 둔 전사총의 모든 보물의 절반을 주겠다고 공표했지. 그런데도 그건 그러 쉽지 않은 일이었어.”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어. 아무런 보상이 돌아오지 않는데도 뮤지기들이 떠나지 않고 남아 있단 말인가? 그 이유가 뭐지?”
“물론 예전보다는 많이 줄었지. 그 가장 큰 이유는 조직을 이루고 있다 보니 예전에 혼자서 무한계를 떠돌 때보다는 상대적으로 형편이 나아졌기 때문에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거고, 또 하나는 중부권의 전쟁이 치열해지자 그만큼 수확물이 풍성해졌기 때문이지.
전사들도 전사총의 묘지기들이 죽은 시체를 거두어 다니는 건 건들지 않거든. 이러다 보니 지금까지 전사총이 이어져 오게 된 거야.“
‘도나투스를 나무랄 수만은 없군. 따지고 보면 좋은 의도를 지니고 했던 말인데 그걸 제 마음대로 해석하고 이용한 그 영자가 나쁜거지. 게다가 어쨌든 좋은 일이지 않은가?“
“그런데 왜 그들이 골치 아프다는 거야?”
너울이 파천을 향해 골을 내며 톡 쏘아 붙였다.
“너도 만나 보면 알게 될 거다. 그놈들이 얼마나 괴팍한 위인들인지를.”

전사총에 당도해 보니 큰 묘가 몇 개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큰 숲 안에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건 거대한 석전들이었고, 석전들 안에는 저마다 미로를 방불케 하는 복도가 끝없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일정 간격마다 똑같이 생긴 석실들이 있었는데 벽엔 구멍을 파 시체를 담아 보관해 두는 석관들을 넣어두고 있었다.
죽음을 당한 전사들의 영체는 상당 부분 훼손되기 마련이었기에 그들은 처음 시체를 가져오면 형체를 복원하는 데 주력한다. 대충 형체만 갖춰지면 곧바로 석관에 담으면 끝이었다. 예전엔 땅에 묻었지만 많아지다 보니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화장을 하는 게 나을텐데. 공간만 많이 차지하는군. 글너데 라만들이 이곳을 습격하지 않는 건 참 용하군.’
영체를 가장 손쉽게 챙길 수 있는 곳이 이곳 말고 또 어디 있더란 말인가?
그러나 그런 아레나의 설명을 듣고 보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영체라고 해서 다 같은 영체는 아닞. 굳이 따지자면 죽은 지 오래 지나 부패하기 시작한 건 라만들이 차지하지 못해. 그것뿐만이 아니야. 이 영체들은 묘지기들의 실험 대상이 된지 오래야.
이들은 영체를 이용해 갖가지 실험을 하기 때문에 귀령이 들어가도 버티지 못하고 퉁겨 나올 수밖에 없는 거야. 이들의 영력 사용은 그런 실험 덕분에 가장 괴이한 수준에 올라 있어.
이제는 일반 영자들이 상대하기 무척이나 까다로운 걸로 일반에 인식될 정도로 묘지기들은 독특한 경지를 이뤘어.“
하나의 석전을 모조리 뒤졌는데오 묘지기들은 단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대체 어쩐 일일까요? 이럴 리가 없는데. 모두 한꺼번에 손을 맞잡고 시체 수거하러 간 것도 아닐테고 말이죠.”
아난다는 그 자리에 멈춰서더니 주변의 움직임을 감지해 나가기 시작했다.
“지하로군요. 지하에 움직임이 포착됩니다.”
“지하라뇨?”
아레나는 금시초문인 듯 했다. 이때 너울이 자신의 경험을 최대한 살려 아는 척을 했다.
“석전은 지하에서 모두 만나게 되어 있어. 큰 광장을 중심으로 해서 그들의 처소가 나뉘어 있지. 그런데 좀 이상하군. 단 하나도 남겨 두지 않고 모두 거처로 들어가지는 않았을 텐데……. 정말 무슨 일이라도 있나?”
그들은 곧장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는 너울의 말처럼 광장을 중심으로 해서 석실들이 촘촘히 배열되어 있었다. 그곳 어디에서도 묘지기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 넓은 전사총이 텅텅 비어 있는 것이다.
“도무지 알 수가 없군.”
지하를 샅샅이 뒤져 보아도 누구 하나 걸려들지 않으니 참으로 답답한 일이었다. 선발대는 결국 더 이상 찾기를 포기하고 밖으로 나온다.
“무슨 일인가 있는 게 분명하지만……. 더 이상 이곳에서 시간을 허비할 수 없으니 그만 여기서 떠나죠.”
너울은 아직까지도 이곳에 자신이 다시 오게 된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아레나와 아난다는 막무가내였다. 이제는 의혹을 풀기 위해서라도 남아 있어야만했다.
“이 넓고 큰 전사총에 살아 있는 생명체 하나 없는 걸 보니 무슨 큰 일이 나도 단단히 난게 분명한데……. 그렇다고 누가 침입해 전투를 벌인 흔적조차 없으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네요.”
아레나는 그 말을 하고서는 뭔가 짚이는 게 있었던지 석전의 벽면을 유심히 살펴 갔다. 권터가 아레나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다가 괜한 헛수고하지 말라며 하는 얘기가 흥미로웠다.
“나도 혹시나 라곤이 침입해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해서 지하에서부터 벽면을 살펴봤지만 아무런 흔적도 없었소. 그건 아닐 거요. 게다가 이 먼데까지 그들이 왔을 리는 없지 않겠소?”
선발대에는 묘지기들의 실종이 타의에 의한 것이라고 단정 짓는 분위기가 흘렀다.
“묘지기들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거늘 분명히 괴이한 일이긴 하군요.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몽땅 사라진 것도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지만……. 그들 모두가 당했다 해도 작은 흔적이라도 남아 있어야 할 텐데 너무 깨끗하다는 게 더 기이한 일입니다.”
아레나는 몇 가지 가정을 설정해 놓고 추론을 거듭해 보았다. 그래도 딱 꼬집어 이거라고 할 만한 경우가 나오지 않자 답답했던지 아난다를 쳐다본다.
그들은 이곳에서 더 있어 봤자 의문이 풀리지 않음을 알고는 그곳을 벗어났다. 한참을 벗어나고 있을 때였다. 파천이 그 자리에 멈추더니 선발대 모두가 들을 수 있게 말했다.
“바로 그거야!”
파천의 어깨에 여전히 걸터앉아 있어 아그립바가 그의 고함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머리칼을 확 움켜쥐었다. 아그립바는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었다.
“우리가 살펴보지 않은 곳이 한 군데 있었어.”
“이미 볼 것 다 봤는데도 또 왜 그래?”
너울은 울상이 되어 파천을 쏘아본다. 정말이지 다시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우리가 보지 않은 딱 한 곳, 그곳은 바로 관 안이야.”
그랬다. 전사총은 어쨌든 묘다. 묘를 뒤지면서 관을 들춰보지 않았으니 이처럼 어설픈 수색이 어디 있을까. 모두의 얼굴이 급변했다. 그들 중 일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갔다.
“그렇군요. 돌아갑시다.”
먼저 튀어나가는 아레나의 앞을 아난다가 막아섰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아레나 님.”
“왜 그러세요?”
“제 생각에는 묘지기들은 관 안에 있을 것 같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이해를 하지 못하겠군요.”
아난다의 얼굴은 침중했다.
“그들 모두가 흔적 없이 당해서 관 안에 누워 있다면……. 흉수가 없다면야 상관없겠지만 만약에 아직 흉수가 남아 있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을 직면하게 될까요? 그리고 또 하나, 남아 있는데도 우리가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 전혀 느끼지 못했다는 것 역시나 간과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좀 더 생각을 정리해 볼까요?”
파천은 아난다의 생각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우리가 그곳에 들어갈 때 공격할 의지가 없었다. 그런데 묘지기들의 시체가 발견되었을 때 공격한다. 그렇다면 묘지기들의 영체는 발견되어서는 안될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거겠군. 그걸 지켜내기 위해 쓸데없는 충동을 피했던 거고. 그럴 듯한데? 그렇지만 완전히 자취를 감출 수가 있나?”
“특별한 결계를 사용했다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 정도로 강한 자들이라면 우리 쪽의 피해도 예상되는군. 혜능, 그럼 어쩌자는 거지? 이대로 포기하고 우리 가던 길을 계속 갈까?”
“솔직히…… 그러고 싶은 맘이 간절하죠. 그러나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곳에 묘지기들을 살해하고 은폐한 흉수가 있다면 설사 우리측 피해가 예상된다고 해도 그냥 묵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 조심해서 다시 가보자고.”
“아뇨, 모두가 가볼 필요는 없습니다. 아레나 님은 여기 남으십시오. 저와 권터 님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졸지에 지목된 권터가 떫은 감 씹은 표정이 되었다. 그 역시 그다지 가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이때 아레나가 반대하고 나섰다.
“아닙니다. 아난다 님은 가시면 안 됩니다. 만약 제가 없다 해도 선발대의 여정은 계속될 수 있겠지만 아난다 님은 틀립니다.
더군다나 아레나나 아난다가 자신을 지목해 주지 않은 것이 무엇보다도 고마웠다. 서로 가겠다고 우기는 둘을 보며 너울은 속으로 참 대단들 하네, 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아레나는 이런 너울의 여유를 산산이 부셔 버린다.
“대신 너울을 함께 데리고 가겠습니다.”
“뭐, 뭐, 뭐라고?”
기겁한 너울을 더욱 절망하게 하는 소리가 아난다에게서 흘러나왔다.
“으음, 그렇다면 안심이 되긴 하지만……. 좋습니다. 대신 우리도 근처까지는 같이 가겠습니다. 안에 들어가시는 건 세 분뿐이지만 만약에 위기에 처하게 될 경우 영언으로 전달해 주십시오.”
“그러겠습니다. 자, 출발들 하지.”
씩씩하게 앞장 서는 아레나와는 달리 너울은 정말이지 죽을 맛이었다. 차라리 전투가 한창인 중부권의 가운데다 혼자 떨궈지는 게 더 마음 편할 것 같았다.
권터는 떨떠름한 표정이긴 했지만 역시 당당하게 아레나의 뒤를 따른다. 너울은 어쩔 수 없이 발을 떼어 놓긴 했다. 그러나 못내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왜 하필이면 나야, 아레나! 너,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나를 이렇게 곤경에 처넣는 거냐? 생명의 은인만 아니라면 저걸, 어휴.’
속으로 화를 삭이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게 너울이 지금 할 수 있는 처방의 전부였다.
선발대 전원은 어쨌든 다시 전사총으로 왔다. 석전 안으로 들어서려는 아레나를 향해 파천이 다급하게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봐.”
너울은 반색했다. 내용이 뭐든 간에 누군가 다시 불러 줬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반갑기 그지없었다.
“왜 그러지?”
“위험 부담이 있으니 아그립바를 보내 보지 그래?”
“그래, 그러면 되겠다.”
너울은 체면 불구하고 박수까지 치며 좋아했다.
아레나는 동그란 눈을 반짝이고 있는 아그립바를 한 번 쳐다보고 다시 파천을 바라보았다.
“아그립바는 어떤 경우에도 바져 나올 수가 있잖아? 도나투스 수련자에게 들으니 아그립바는 가둘 수 없는 영물이라 했어. 숨어 있는 놈들이 아무리 대단한 자들이라 하더라도 설마하니 잡히기야 하겠어?”
묘책이었다. 아그립바는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으쓱해졌다. 간만에 시선 주목을 받으니 그 이유가 어쨌든 너무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어그립바, 할 수 있니?”
“뭘 하면 되는데?”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말하는 모습을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엽다고 미타는 생각했다. 자기도 모르게 파천 곁으로 다가가 아그립바의 머리에 손을 갖다대고 쓰다듬었다.
“저 안으로 들어가서 관을 열어봐. 지하까지 샅샅이 뒤져 봐야 한다, 알았지? 내부의 상황을 상세히 알아 오면 된다. 이왕이면 주변에 다른 자들이 있느지까지 알아보면 더욱 좋고. 할 수 있지?”
“그런 거라면 잠깐이면 돼. 정말 그것만 하면 되는 거야?”
“그래.”
“알았어.”
아그립바가 파천의 어깨에서 내려온다 싶은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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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석전 안으로 들어가는 아그립바. 그에겐 너울과 같은 근심이나 걱정 따위는 전혀, 눈꼽만큼도 없는 것 같았다. 기나긴 세월 동안 무한계의 온갖 영자들의 추격을 아주 수월하게 따돌렸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골탕을 먹였다는 아그립바. 그의 진가가 드러나려 하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면 됩니다. 뭔가 불쑥 튀어나올지도 모르니 각오들 단단히 하세요.”
아난다의 충고를 가장 깊이 그리고 충실히 받아들이는 이는 역시나 너울이었다. 자신을 곤란하게 했던 묘지기들마저 손쉽게 잠재워 버린 놈들이 안에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니 그가 느끼는 부담감은 다른 대원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아그립바는 빠르게 복도를 지나쳐 갔다. 그 와중에도 전방위에 걸친 세밀하고도 촘촘한 프리즈마의 그물망을 쳐두는 걸 잊지 않는다.
그가 지금껏 먹어치운 영물이 한두 개 였던가. 그 많은 것들의 태반은 남들 눈에 띄지 않는 깊숙한 심처에 감춰져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거기다 별 짓을 다해 그의 앞길을 막아 보려 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아그립바의 행진을 막지는 못했다. 그가 원해서 먹어치우지 못한 건 지금껏 파천이 지니고 있던 신편이 유일하다 할 수 있었다.
그것 때문에 파천이 지니고 있는 신편이 유일하다 할 수 있었다.
그것 때문에 파천의 곁에 남게 된 아그립바였지만 지금은 파천의 충실한 조력자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그렇게도 그를 얻기를 원했던 자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땅을 치며 배 아파할 일이 분명했다.
그는 어느새 선적의 관들을 모두 들춰본 뒤였고, 지하까지 내려갔다 올라왔다. 그럼에도 아그립바가 발견한 건 특별한 게 없었다. 그는 다시 파천에게로 돌아와서 자신이 본 것을 얘기해 주었다.
이상한데? 묘지기들이 관안에도 없다는 말이야?“
“응”
“그럴 리가…….”
너울은 속으로 생각했다.
‘괜한 추측을 해 고생시키고 있군.’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가 고생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지만 너울은 전사총의 영역에 두 발을 딛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었다.
“그런데 아그립바, 너 묘지기들은 알아 볼 수 있어?”
“아니.”
두 눈을 깜박거리며 태연하게 대답하는 아그립바. 그걸 대한 파천은 할 말을 잃고 마주 쳐다볼 뿐이었다.
“곤란한 일이네요. 결국 우리 중 일부가 들어가 보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습니다.”
너울은 또다시 그 얘기가 나오자 귀를 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닙니다. 분명 방법이 있을 겁니다. 아, 맞아. 저번에 했던 것처럼 하면 되지.”
너울이 말하는 건 자하린의 광장을 비쳐 주던 영상 출현이었다. 너울은 스스로가 그걸 생각해낸 것이 너무도 대견스러웠다.
그러나 얼굴에 희색이 가득하던 너울은 아그립바의 냉정한 한마디에 또다시 우거지산이 되고 만다.
“그건 생명체가 있을 때만 가능하지. 모두 죽어 있다면 할 수 없어.”
‘그랬던가?“
그렇지만 너울은 끈질겼다.
“한번 해봐. 놈들이 숨어 있다면 넌 얼마든지 충분히 단번에 아주 보란 듯이 찾아낼 수 있을 거야.”
그가 얼마나 다급해 하는지를 알게 해 주는 대목이었다.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정말 오랜만이라 할 수 있었다. 이 정도로 열심인 걸 보자 모두의 관심은 그가 예전에 전사총에서 대체 어떤 일을 당했기에 저러나 하는 것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어쨌든 지금은 그걸 아는 게 그다지 의미는 없는 일이었다.
“좋아. 한번 해볼게.”
아그립바는 손을 슬쩍 흔들며 영상을 출현시켰지만 거기엔 아무것도 잡히지 않고 있었다.
“누가 안에 들어가서 움직여 주면 안을 비춰 주기 쉬운데…….”
여러 개의 석전 모두를 감지하고 난 아그립바가 말했다.
“아무것도 없어.”
아그립바는 다시 파천의 어깨에 올라탔다. 파천은 수고했다는 듯 아그립바의 머리를 한 손으로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데 이상해.”
“뭐가?”
“지하 광장 바닥 밑으로는 전혀 감지가 안 돼.”
“혹시 그곳에 또 다른 공간이 있는 건 아닐까?”
“감지력을 자꾸만 방해하는 것이 가로막고 있어. 지하 전체가 다 그래.”
아그립바의 그 말은 결정적이었다. 이제 모두는 거의 확신에 사로 잡혀 있었다. 전사총의 지하에서 무슨 일인가가 벌어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이제는 어찌해야 할지를 결정하는 일만 남았다.
“어쩌지?”
“그냥 가지. 아무래도 우리 힘만으로 거길 들어간다는 건 자살 행위 같단 말야. 저 정도로 치밀하게 진행시키는 일이라면 대단할 게 아닌가?”
너울의 생각은 동의할 부분이 많았다.
아난다 역시나 이 이상 무언가를 알아본다는 게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 않겠어?”
파천이었다. 권터가 파천의 의견에 동의하고 나섰다.
“이놈의 호기심이 언제나 말썽이라니까. 아난다 님, 조사라도 한번 해보죠. 벅차다면 잠입했다 나오면 그만이잖습니까?”
“누가 그 일을 하죠? 잠입하기도 쉽지 않을 텐데요.”
아레나가 손을 번쩍 쳐들었다.
“제가 하죠. 아그립바와 권터. 이렇게 셋이서 해보겠습니다.”
“나도 같이 가면 안 될까? 안 되겠지?”
파천이 포함되고 싶은지 그렇게 운을 떼어 보았지만 아난다가 승낙할 리가 없었다.
“좋습니다. 아레나 님과 권터 님이라면 안심하고 맡겨도 될 것 같군요.”
“나는?”
“아그립바, 너도 물론 같이 가는 거다.”
“히히, 좋아. 파천이 함께 가면 더 좋을 텐데…….”
“그건 안 돼, 아그립바.”
이렇게 해서 조사단이 급조되었다. 그들은 모두의 염려를 뒤로 하고 석전 내부로 당당한 걸음을 내디뎠다. 제일 앞장서는 건 아그립바였다. 그들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아난다는 주위를 환기시켰다.
“혹시라도 모르니 긴장을 늦추지 마세요.”
파천은 과연 지하에 무엇이 있을 건지를 생각해 보았다.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 왜 그들은 묘지기들을 모두 잡아 간 거지? 대체 저 곳에서 뭘 하고 있을까?’
그는 정말이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다는 게 체질에 맞지 않았다. 어떤 위기가 있다 해도 일단은 부딪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지만 그럴 수 없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소음을 최대한 줄여서 움직여.”
아레나의 신경질적인 지적에 아그립바가 움찔한다. 그는 마치 재미있는 놀이라도 하는 양 신이 나 있었다. 맨 앞에서 소란스럽게 움직이자 아레나가 지적한 것이다.
뒤로 슬쩍 고개를 돌린 아그립바가 뚱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알았어. 너무 그러지 마.”
지하 광장까지 다다른 일행은 중심으로 이동했다. 광장 중심에서 사방을 쳐다보면 기나긴 복도들이 거미줄처럼 방사형으로 뻗쳐 있는 것이 보인다.
아레나는 그 복도들을 스쳐보며 아그립바를 향해 말했다.
“이 밑이란 말이지?”
“아니.”
“무슨 뜻이야?”
“난 이 밑에 무언가가 있다고는 말하지 않았어. 단지 감지할 수 없는 힘이 가로막고 있다고만 했지.”
“그래, 알았다, 아랑ㅆ어. 그 말이 그 말이지.”
권터가 손바닥을 펼쳐 바닥에 대본다.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탐지해 보려는 것 같았다.
아그립바가 퉁명스런 목소리로 권터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렇게 해서 알 수 있을 것 같았으면 진즉에 감지했겠다.”
머쓱해진 권터가 힘없이 일어서는 걸 보며 아레나는 주변을 꼼꼼하게 살펴 갔다. 그녀는 작게 중얼거렸다.
“어디로 해서 들어가지? 쉬운 일은 아니로군.”
“아레나는 싸움만 잘하는 말괄량이 여전사. 아무도 그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지. 인상을 쓰고 근엄한 표정만 지으면 모두들 그런 줄 안다네. 크크크…….”
아그립바가 장난을 걸어오는데도 아레나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그럼에도 아그립바는 포기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연신 재잘 대며 시비를 건다.
“아레나의 파라슈는 무섭지만 그녀의 무리는 그리 날카롭지 않다네. 바닥을 부수거나 일체화시키는 방법 중 하나를 써야 하는 걸 아직까지는 모르고 있으니, 참 한심한 노릇이라네. 나도 아는 걸 아레나만 모르지. 그녀는 지금쯤 그 사실을 알았겠지만. 자존심이 상해 먼저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지.”
“아그립바, 그만 까불고 몰래 들어가 봐. 그런데 나는…… 영 그런게 싫던데. 물질과 일체화시키는 건 스스로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인걸.”
“헤, 그럴 거야. 천하의 아레나가 어련하시겠어?‘
“너 자꾸 이죽거릴 거야?”
“알았어. 알아서 모시죠, 아레나 전사님.”
“너…….”
피슈슛
아그립바는 아레나를 향해 혀를 날름 내밀고는 말할 새도 없이 바닥으로 스며들어 갔다. 바짝 마른 땅에 물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퉁겨 나온 아그립바가 인상을 있는 대로 쓰고 있었다.
“맞아, 이건 결계가 분명해. 미세한 틈조차 없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실패한 것이다. 아그립바의 말처럼 결계가 쳐져 있는게 틀림없었다. 그럼 결론은 부수는 방법밖에는 없다.
“힘으로 부술 거야?”
“난 그렇게 미련하지 않아, 아그립바. 우리가 왔으니 모두 보아 주시로, 라는 것 밖에 더 되겠어?”
“그럼 어쩔 건데?”
“좀더 생각해 봐야지.”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권터는 생각해 봤자 마땅한 방법이 없음을 알고는 돌아가자고 했다. 아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수는 없어. 생각해 보면 방법은 있을 거야.”
아그립바가 갑자기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다 좋은데……. 저것 먼저 처치해야 할 것 같은데? 놈들이 우리가 온 것을 알았나 보다.”
아그립바가 가리키는 건 지하 광장으로 연결되어 있는 복도들이었다. 그곳을 가득 메우고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는 것이 있었다.
“저것들은 뭐지?”
시커먼 연기처럼 보이는 것들이 복도를 통으로 메우고 다가오고 있자 아레나와 권터는 얼굴을 찡그렸다. 들킨 건 명백했다. 이제는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어졌다. 몰래 잡입해 조사만 하고 나오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쳇, 틀렸군. 좋아, 뚫고 나간다.”
아레나가 단순하게 상황을 결정해 버리자 아그립바가 신이 나서 호응했다.
좋았어. 내가 앞장서지.“
슈우우웅

드드드드
쩌저정
아난다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대지가 흔들리더니 갈라진다. 이런 게 우연히 일어 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걸린 건가?”
너울이 손을 들어 가리키더니 정색하며 외쳤다.
“저것……이 뭐죠?”
그그그그긍 끼기긱
“우어어어억.”
땅이 갈라지며 솟아나온 건 보기에도 끔찍하고 괴상망측하게 생긴 괴물이었다. 멀리서 본다면 흙덩이로 빚어 놓은 거인이라 하겠지만 안타깝게도 선발대와는 거리는 지척간이었다. 눈, 코, 입이 다 달려 있었으나 그것이 영체라고 믿기는 어려웠다.
흙덩이를 대충 뭉쳐서 빚어 놓은 듯한 형태에다 전신 곳곳에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것들이 보였다.
“저것들은…… 시체다.”
그랬다, 전신에 불쑥불쑥 솟아나 있는 건 시체의 일부분이었다. 머리가 팔이, 다리가 전신에 주렁주렁 달려 있는 놈은 보기에도 흉측했지만 지르는 소리는 더 듣기 거북했다.
“우어어어억,”
선발대 주변에 다섯 놈이나 출현해 있었는데, 인모들은 분명한 목표를 지니고 나타난 게 분명했다. 다짜고짜 선발대를 향해 그 큰 팔을 휘둘러 왔기 때문이다.
“조심들 하세요.”
아난다의 경고가 없었어도 선발대는 벌써부터 긴장하고 있었다. 놈들의 팔과 다리게 중앙에 갇힌 선발대를 향해 쏟아져 내리자 저마다 각각의 방법으로 힘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너울은 튀어 올라 무리의 대열에서 이탈했으며 곧장 두 손을 활짝 펼쳤다.
“이 흉악한 괴물들, 모조리 부셔 주겠다.”
그 동안 억눌린 감정을 분출시키기라도 하듯 맹렬한 공격을 뿜어낸다. 그의 손이 지휘하는 공간은 날카로운 프리즈마의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괴물들의 몸통을 공격한다.
퍼퍼퍼퍽
너울뿐만이 아니었다. 괴물은 오직 타격기만 사용할 줄 아는지 막무가내로 두 팔과 다리를 휘둘러 올 뿐이었다. 선발대원들은 침착하게 상대해 갔다.
그들의 공격은 어김없이 괴물의 몸통 곳곳에 보기 좋게 작렬했다.
퍼퍼퍼퍽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저, 저럴 수가.”
찬다마나는 눈으로 보면서도 도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된다. 작은 산 하나는 허물어 버렸을 정도의 힘이었다. 그것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도 꿈쩍하지 않는 가공함에 할 말을 잃어버린 것이다.
역시나 이번에도 아난다가 나설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약간 앞쪽으로 나서서 허공중으로 몸을 띄어 올렸고 곧장 사방을 향해 거대한 프리즈마의 그물을 형성해 뿌렸다.
파지지지직
다섯이나 되는 괴물들을 하나로 엮어 버리는 거대한 뇌전이 오갔다. 놈들은 뒤로 몇 발짝이나 성큼 물러서 있었으나 잠시간 떨어댔다. 그렇지만 그놈들의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었다.
“키키키키.”
파천은 선발대의 가운데 갇혀 그 장면을 보고 있었는데 좀 전의 공격력에도 전혀 타격을 받지 않는 것 같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놈들의 신체를 하나하나 분리시켜 버려.”
파천이 언뜻 떠오르는 생각대로 외친 소리였다. 그가 하는 말의 의도를 깨달았던가. 아난다의 두 손에서 거대한 화염검이 출현했다. 길이만도 언뜻 보아 3장에 달할 만한 크기였다.
“모두 안쪽으로 모이세요.”
그의 지시에 모두는 군소리 없이 순순히 따른다. 너울은 아쉬움을 접고 선발대의 대열 가운데로 합류했다. 서서히 다가서고 있는 놈들의 동공은 휑하니 비어 있어 그놈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는 없었다.
아난다는 천천히 허공중으로 떠오르며 선발대의 2장 위까지 올랐다. 그 상태에서 화염검을 회전시키면 정확하게 괴물들의 목 부분에 닿을 만한 높이였다.
아난다는 양 팔을 쫙 펼쳐 놈들이 더 접근하길 기다렸다. 그놈들은 위험 따위는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 일정한 보폭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가라!”
아난다의 신형이 허공에서 맹렬한 속도로 돌아갔다.
쇄애애액 화르르륵
그러자 화염검의 불길이 사방으로 뻗어가며 괴물들의 목과 몸통을 분리시켜 갔다.
퍼퍼퍼퍼퍽
소리가 계속 들려 온다는 건 아직까지 부딪힐 것이 있다는 걸 의미했다. 기이한 일이었다. 아난다의 화염검은 괴물들의 머리통을 몸에서 완전히 분리시키지도 못했다. 파도가 바위를 타넘듯이 상처를 내며 스쳐 지나가고만 있었다.
아난다 또한 의외의 결과 앞에 어처구니없어했다. 그렇지만 그는 멈추지 않는다. 괴물들의 거대한 팔이 화염검의 진로를 막아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울퉁불퉁한 외면에 가로막힌 화염은 여전히 거세게 타오르고 있었지만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아난다가 화염검을 거둬들인 건 당연했다. 괴물들의 압박이 거세지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난다의 손가락이 세워진다. 손끝에서는 밝은 빛이 맺혔다. 그가 손을 털었다. 그러자 빛이 공중으로 오르며 화려한 폭발을 일으켰다.
선발대도, 괴물도 일시지간 움직임을 정지했다. 급작스런 발광이 모든 이들의 시야를 차단시킨 결과였다. 형체의 구분조차 가능하지 않는 강력한 발광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그 짧은 순간이야말로 아난다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호의 기회였다.
아난다가 허공으로 떠오르며 화신했다. 이미 한 번 보였던 아난다의 화신체, 쿠사누스의 출현이었다. 그는 아예 작정을 하고 있었다. 그가 외쳤다.
“파천 님과 함께 여길 벗어나세요.”
파천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레나와 권터는 어쩌고?”
파천은 왠지 아그립바는 걱정되지 않았다. 그를 가둘 수 있는 힘은 흔한게 아님을 알기 때문이었다.
“아난다 님의 지시에 따르자. 그들은 금방 쫓아 올 거다.”
너울의 말처럼 선발대는 또다시 도주해야만 했다.
‘매번 이런 식이어야 한단 말인가? 위험이 오면 도망가고, 아난다를 남겨 두고, 그가 해결하지 못하면 기대할, 강구할 수단조차 없는 무기력함이…… 선발대의 전부란 말인가?“
파천만이 이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일단 위험은 피하고 봐야 한다는 것 또한 모두는 동일하게 알고 있었다.
화신체가 된 아난다의 금빛 찬란한 날개가 활짝 펼쳐졌다. 그는 그 상태로 괴물들에게 부딪쳐 갔다. 날개에 스치기만 해도 그처럼 견고함을 자랑했던 괴물의 몸이 찢어지며 잘라졌다. 발길이 머문 곳은 썩어문드러지기라도 한 것처럼 짓물러졌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두 날개를 퍼덕이는 순간 그 거대한 덩치로도 지탱하지 못하겠는지 자꾸만 뒤로 밀려 나가는 것이었다. 화신체의 위력이란게 역시나 대단하단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선발대원들은 넋을 놓고 그 광경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차마 발길을 떼어 놓지 못했다. 바로 그때였다. 아난다조차 예상치 못한 돌발적은 상황이 벌어졌다. 선발대가 모여 있는 지면이 터져 오르며 다른 괴물보다 배는 더 큰 놈이 불쑥 솟아났다. 그놈은 이리 저리 날아다니는 선발대 중에 몇을 손아귀에 움켜 잡은 뒤였다.

아레나는 빠르게 복도를 갈라오는 놈들을 쳐다보았다. 몸조차 움직일 수 없도록 결박당해 버린 건 솔직히 위험을 경시했기 때문이었다. 위기 앞에서 초연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차분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장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로 인해 기회를 놓쳐 버리고야 말았다. 성질을 파악하지 못한 위험은 피하거나 부셔야 하는 게 정상이다.
아레나는 급하게 뛰어들었고 권터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 생명체로 느껴지던 검은 안개가 그들의 몸을 더욱 두껍게 감싸며 꼼짝 못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 이후로 나타난 놈들을 대하는 순간 아레나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저놈들은 또 뭐란 말인가?”
작은 새였다. 날개는 검고 두 눈은 붉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지니고 있었는데 매우 날카로워 보였다. 크기래봐야 고작 손바닥 정도에 불과했지만 지금의 상태라면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아레나는 프리즈마를 증폭시켜 어둠의 힘을 물리치려 했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더 조여든다. 도무지 성질을 알 수 없으니 어찌해야 할 지를 모르고 당황한다. 자유로운 건 아그립바 하나였다.
쐐액
“키익.”
기이한 소리를 내는 괴조들은 빠르게 날며 아레나와 권터를 공격해 왔다. 그걸 지켜보고만 있을 아그립바가 아니었다.
“이것들은 대체 뭐야?”
아그립바가 그 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지는가 싶었더니 곧장 아난다와 권터의 앞에 버티고 섰다. 허공중에 둥둥 떠 있는 아그립바의 작은 신형은 빠르게 변화를 보였다. 석 자 정도 크기의 검. 희뿌연 광채가 나는 검으로 변신한 아그립바는 허공중에 떠서 다가오는 새들을 휩쓸어 버렸다.
촤악
어김없이 괴조의 중심이 잘라져 바닥으로 떨어진다. 놈들은 바닥에 떨어지자 곧바로 불꽃이 되더니 급기야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는 안개를 타고 순식간에 복도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린다.
팽 촤악
아그립바가 움직이면 어김없이 괴조는 퇴치되었지만 그럴수록 불길은 더욱 거세졌다. 권터가 아그립바를 재촉했다.
“아그립바, 어서 불길을 막아.”
아그립바는 툴툴대기 시작했다.
“그깟 것에도 당한 주제에 주문도 많군.”
권터는 입을 꾹 다물고 수모를 감수할 수 밖에 없었다.
아그립바의 말이 틀리지 않을뿐더러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레나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언제 이런 경우를 당해 봤던가. 이렇게 어이없이 속수무책인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아그립바를 채근하기엔 그녀의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는다. 가만 거서 아그립바의 활약상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아그립바는 신이 나서 이리저리 휩쓸고 다녔다. 그가 서 있는 곳으로 불길이 침범하지 못하는 것을 확인한 권터는 안심하는 눈치였다. 자신의 몸이 움직이지 않는 건 여전했다.
이때 아레나가 두 눈을 감으며 집중하더니 프리즈마의 기운을 빠르게 충돌시켜 갔다.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라 밖에서는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 아그립바도, 권터도 아레나가 이 순간에 무엇인가를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고 있었다.
“네가 잘난 척하도록 내버려 둘 수만은 없지.”
무슨 소리인가 싶어 그 와중에서도 아그립바가 고개를 돌려 쳐다본다.
“엥, 뭐야? 분신을 한 거야?”
그랬다. 아레나의 또 하나의 몸이 아그립바 앞에 떡 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일종의 능력분신에 해당하는 고급 기술을 사용한 것이다. 또 하나의 아레나는 고기가 물을 만난 듯 복도를 가득 메우고 퍼덕거리는 괴조들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아레나는 화신체와 버금가는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빠른지 움직임을 파악하기도 쉽지 않았다.
이에 뒤질세라 아그립바도 덩달아 속도를 내기 시작하자 권터가 죽는소리를 했다.
“나만 놔두고 가면 어떻게 해?”
둘이 떠난 빈자리를 불길이 채워 갔으니 권터로서는 다급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그제서야 아그립바가 슬그머니 다시 돌아온다.
“보채기는. 설마하니 널 내버려 두고 혼자 갈까 봐 그래?”
다시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아그립바가 히죽 웃으며 한마디 하자 권터는 심장이 벌렁거릴 지경이었다.
“이것 어떻게 좀 해봐.”
자신만 묶여 있으려니 죽을 맛이었다. 그렇지만 아그립바라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나도 어쩔 수 없어. 기다려 봐. 일단은 저것들로부터 처리하고 나서 대책을 세워 보자고.”
팔자 편한 소리였다. 아레나는 화려한 동작을 보여 주고 있었다. 회오리바람을 연상시키는 움직임을 보이며 복도의 끝에서 끝까지를 휩쓸어 버리자 괴조들이 우수수 낙엽 지듯 떨어진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손에서 바람을 일으켜 안개를 한쪽으로 계속 밀어내기도 했다.
반대쪽으로 손을 흔들자 아그립바의 작은 몽뚱어리가 바람에 휙 날아간다. 그는 간신히 권터의 머리털을 붙잡고는 목에 매달렸다.
“뭐 하는 거야?”
“이것들은 끈적거리는 성질이 있어서 몸에 달라붙으면 떨어지지 않고 조여 버려. 그러니 바람으로 날려 버리는 수밖에.”
과연 그 방법이 통할까 싶었지만 그건 의외로 기가 막히게 적중했다.
권터는 순간 자유로워진 걸 알고는 두 주먹을 꽉 움켜쥐고 기마 자세를 취했다.
그걸 보며 아그립바가 고함을 빽 질렀다.
“뭐하는 거야? 설마하니 이곳을 통째로 날려 버릴 셈이야?”
“그러면 안 되나?”
아레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지 마라, 제발.”
어느새 아레나의 공격으로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던 괴조들이 모조리 없어진 뒤였다. 아레나는 여전히 바람을 일으켜 안개가 다가오는 걸 막고는 있었지만 계속 그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자, 여길 빠져 나가자. 빨리 움직여.”
아레나는 본신과 합치고 나서 곧바로 먼저 뛰어나갔으며, 그 뒤를 아그립바가 따른다. 권터가 다급하게 둘을 불렀다.
“같이 가자, 같이 가.”

아난다의 화신체를 괴물들이 가둬 버린 건 보고서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 떨어진 팔들이 바닥에서 다시 솟아 오를 때는 그러려니 했었다. 그렇지만 그 크기가 예전과 다름이 없음을 보고는 뭔가 일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아난다. 더군다나 선발대 중 몇은 괴물의 손에 잡혀 있는 실정이었다.
아난다는 이것 저것 재볼 것도 없이 막무가내로 힘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화악 파앗
번쩍하는가 싶더니 사방을 휩쓸어 버리는 화신체는 여전히 그 무엇이든 닿으면 잘라 버리고 부셔 버렸지만 그럴수록 괴물의 수를 늘여 주기만 했다. 아무리 아난다가 강하다 해도 앞으로 전진하는 데 애를 먹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혼자 도망가는 거라면 지금도 당장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파천과 몇은 적의 공격 사정권 밖으로 물러나 있었기에 다소 안심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괴물의 손에 잡혀 있는 대원들이었다. 놈의 손아귀에 잡힌 대원은 자그마치 넷이나 되었다.
늘어난 괴물들은 큰 괴물의 앞을 차곡차곡 채워 나가며 아난다의 접근을 막았다. 아난다의 신형이 공중으로 공격 방향을 바꿔 봐도 통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놈들의 팔이 주욱 늘어나며 눈앞을 가득 메우는가 하면 심지어 몸에서 분리되어 날아다니기도 했다.
일이 이쯤 되고 보니 아난다로서도 정신을 수습하지 못하고 허둥 댈 수밖에 없었다. 가능하다면 한 번에 쓸어 버리는 게 좋겠지만 그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군다나 지금 상황에서 전력을 뿜어낸다면 사로잡힌 대원들까지 위험에 처한다.
이제 몇 놈들은 시선을 돌려 파천이 서 있는 곳으로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아난다를 둘러싼 놈들이 팔들을 서로의 어깨에 걸쳤다. 놀라운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놈들의 몸이 한덩이가 되어 갔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아난다가 볼 수 있는 하늘은 한정되기 시작했다.
쉬쉬식
‘이놈들의 정체가 대체 뭐란 말인가?’
아난다는 처음 대하는 기이한 존재들에 대해서 궁금증이 일어났다. 듣도 보도 못한 것들은 큰 곤란을 줄 정도로 강하다고 할 수 없었지만 처리하기엔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들이 더 이상의 공간을 점유해 버리기 전에 아난다는 서둘러야 했다. 아난다의 날개가 어느 꿈결에서나 보았음직한 휘황찬란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하자 그를 가두고 있던 괴물들의 몸이 마른 대지가 버석거리며 깨어져 분리되듯 떨어져 나간다.
정면돌파를 시도하는 아난다. 빛에 감사인 그의 모습은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고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런 걸 감상하고 있을 처지가 못 되었다. 공간을 일시간에 단축하여 폭발적인 가속을 하자 잔영만이 본체에서 떨어진 빛의 파편을 떨구었을 뿐이다.
아난다의 화신체보다 더도 덜도 아닌 크기만큼 괴물들의 벽에 구멍이 뚫렸다. 아난다는 가운데 우뚝 버티고 서 있는 가장 큰 놈을 노리고 신형을 날렸다. 그놈의 손에 옴짝달싹 못하고 잡혀 있는 대원들의 모습이 시선 가득 차오른다.
‘놈의 팔을 먼저 잘라낸다. 그런 연후에 구출해내는 것이다.’
아난다의 머릿속에 그려진 건 단순한 계획이었다.
뒤쪽에 다른 일행들을 향해 놈들의 발길이 다가서고 있음을 알기에 마음은 더 조급했다. 아난다의 손이 슬쩍 허공중에 그어졌다.
파팟
본신의 빛을 얼마간 데어내서 발광한 듯 순수하고 몽료한 빛이 그의 손 끝의 움직임에 따라 출현하고 그건 이내 중앙에 버티고 선 괴물의 팔을 어깨에서부터 분리해 버렸다.

바닥에 떨어진 팔을 향해 아난다가 다가설 때였다. 그놈의 팔이 또 저 혼자 꿈틀거리며 살아 움직였다.
‘저것이 또 커지겠지?’
그러나 아난다의 생각을 완전히 뒤엎어 버리는 쪽으로 전개될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파천은 멀찍이 떨어져서 그 모든 전경을 하나 남김없이 상세하게 살피고 있었다.
“안 돼!”
파천의 외침은 일행 중 누군가에게 위험이 닥쳤음을 의미했다. 괴물의 몸에서 분리된 팔은 다시 형체를 이루지 않고 땅 속을 파고 들어갔다. 아니 녹아들어갔다는 게 더 어울리는 말이었다. 손에 여전히 선발대원들은 움켜쥔 상태로 거짓말처럼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아난다 또한 그 장면을 똑똑히 보았다. 그는 두 손을 하늘로 힘껏 끌어올리는 시늉을 했다. 흙덩이가 치솟아 오르고 주위의 단단한 돌들도 함께 딸려 올라왔다. 그렇지만 괴물에게 사로잡힌 선발대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파천은 허탈한 심경이 되었다. 눈앞에서 그들을 놓친 것이다. 동료들을 도둑 맞은 것이다. 아난다도 분로라는 걸 아는 걸까. 자신의 실책이라 한탄하는 건가.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의 주변을 엄밀히 감싸던 금빛 광채가 마치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건 새롭고 이색적인 전경이었다. 빛이 넘실대며 공간을 핥아 가서 처음으로 상대에 대한 적개심이 표현되고 있었다.
“모두 사라져 버려!”
화악
빛의 기둥들이 최적단을 택해 저마다 힘차게 분사되어 갔다. 아난다가 서 있는 일정 공간 안의 내용물이 흔적 없이 소멸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넘쳐나던 괴물들 중 파천이 서 있는 곳으로 향하기 시작한 몇 놈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아난다만 홀로 우뚝 허공중에 서 있을 따름이었다.
잠시의 정적이 모두의 동의하에 허락되고 조성된다. 그때 석전 안에서 아레나와 권터가 튀어나왔다. 아레나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큰 소리로 외쳤다.
“모두 피해요.”
그녀의 뒤쪽엔 다급해 하는 얼굴이 역력한 권터가 뒤따랐다. 그들 역시 좋지 못한 상황을 맞았음을 느끼게 했다. 제일 뒤쪽에 처져서 나온 건 아그립바였다. 그의 뒤를 힘차게 따르는 것은 찰랑대는 수면을 간직한 물줄기였다.
입구를 막 빠져 나온 물줄기는 세차게 뿜어지며 공간을 갈랐고 곳곳으로 떨어져 내린 물기둥들은 형체를 이뤘다.
“저건 또 뭐야?”
파천이 중얼거리듯 묻자 막 한 괴물을 양단해 가던 아레나가 대답했다.
“저건 독물들이야. 닿으면 뭐든 녹여 버린다.”
아레나의 말대로였다. 석전의 일부가 시커멓게 변색되어 있었으며 일부는 걸죽하게 녹아들었다. 그들이 딛고 선 땅도 점차 녹아들다가 멈춘다.
그놈들은 공중에 떠서는 아레나와 아난다를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 아난다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등하고 있는 중이었다. 네 명의 대원이, 지켜보는 앞에서 버젓이 끌려간 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곳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이것들은 다 뭐란 말인가?’
일단 철수했다가 다시 계획을 세우고 돌아올 것인지, 아니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을 가야 할 것인지 얼른 판단이 서지 않는다. 그의 임무는 선발대원들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파천을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인도하는 것이 맡은 임무의 전부였다. 만약 파천의 안전을 위해 대원들을 희생시켜야 한다면 아난다는 절대로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그의 시선은 막 두 놈째 괴물을 처리하는 아레나에게로 머물렀다. 권터 역시나 두 주먹을 움켜쥐고 괴물들을 쳐부수고 있었다. 아그립바는 놈들의 내부에 스며들어가 파괴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놈들은 부수면 부술수록 늘어나는 존재들임을. 분열을 무서운 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게다가 독물들마저 선발대를 노리고 움직여 간다.
“이곳을 벗어납니다. 서두르세요.”
아난다의 최후 명이 떨어졌다. 아레나도 너울도 반대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파천은 아난다의 지시에 불응하고 나섰다.
“그들은 어쩌고? 안 돼. 그럴 수 없어.”
아난다는 단호했다.
“지금은 내 지시에 따르세요. 일단은 안전 지역까지 물러섭니다. 그들에 대해서는 차후에 결정하겠습니다.”
아난다는 그 와중에도 괴물들과 독물들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독물들은 아난다의 화신체를 매우 두려워하는 듯했다. 그가 다가서기만 해도 반대 방향으로 몸을 빼내기 바빴다.
“어서!”
최후의 재촉이 있자 선발대는 더 이상 이곳에서 망설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남겨진, 사로잡힌 동료들의 안위가 염려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망설임은 더 큰 화를 재촉할 것임을 모두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붙으며 끝끝내 귀찮게 하는 놈들은 아난다와 아레나 그리고 권터가 맡았다. 아그립바는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다른 공격에 대비할 심산인지 파천의 머리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뭐해? 빨리 가.”
아그립바의 재촉이 있고 나서야 파천은 움직였다. 옆에 있던 너울이 파천의 손을 힘차게 끌었다.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속도를 붙여 갔다.

안전 지역까지 벗어난 선발대원들은 바닥에 널브러지듯 아무렇게나 앉아 있었다. 저 멀리서 아난다와 아레라게 날아오는 게 보였다.
그들이 도착하자 파천이 아난다에게 빠른 속도로 물었다.
“그들을 이대로 내버려 둘 생각은 아니겠지?”
아난다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선발대 중 사로잡힌 이는 무령, 대오, 야다, 헵슬론이었다. 선계의 선인 둘과 이사나천의 아라한 둘이었다. 같은 이사나천의 이레네는 작금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당황하고 있었으며, 그 와중에도 아난다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 나머지 대원들은 어느 정도 그들을 포기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다시 전사총에 들어가 사로잡힌 자들을 구해 내 ㄹ가능성의 희박하다는 걸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아레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들어가기가 쉽지 않아요. 막상 들어간다 해도 그들을 구해내는 건…… 솔직히 불가능할 것 같기도 하고, 전사총 지하엔 정체조차 파악 되지 않는 놈들이 진을 치고 있으니 위험 부담은 예측하기 힘들어요. 성급하게 진행시키다간 모두가 사로잡힐지도 모릅니다.”
아난다의 망설임이 더 커지는 순간이었다. 이때 너울이 떠듬거리며 자신의 뜻을 밝혔다.
“아무래도…… 구출은 무리입니다. 벌써 죽음을 맞았을지도 모르고……. 그렇지 않다 해도 구해내는 건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이레네는 당황해 소리쳤다.
“네가 잡혀 있다고 생각해 봐. 그들을 이대로 내버려 둔다는 건 말도 안돼.”
“내가 잡혀 있다 해도 마찬가지야. 아니 이 중에 파천을 제외하고 누가 잡혀 있다 해도 마찬가지야. 그런 소리는 하지 마.”
파천은 아레나의 말이 신경에 쓰였다. 불가능하다는.
‘그녀의 판단이 아마도 맞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대로 동료들을 두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괜한 호기심이 이런 결과를 낳은 건가?
파천은 스스로를 나무랐다.
“그들은 우리가 구해 주길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파천의 말에 모두는 흠칫했다. 파천은 구하러 가자고 강경하게 말할 수 없었다. 그로 인해 더 큰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지금은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대로 물러서는 것 또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진퇴양난에 빠진 선발대. 그렇지만 아난다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어떠한 순간에도 그가 생각해야 할 목표는 분명했다. 그 목표를 거스르는 결정은 그래서 할 수 없었다.
“그들을…… 포기합니다.”
그의 결정을 비난하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반갑게 받아들이는 이도 없었다. 모두의 마음은 똑같이 무겁고 아팠다.
이레네가 한숨과 함께 자신의 심경을 토로한다.
“이렇게 되려고 선발대에 들었더란 말인가. 대체 우리가 왜 선발대에 들게 된 거죠, 아난다 님. 말씀해 주세요. 왜 우리가 선발되었냐구요? 이렇게 될 걸 예상치 못했단 말입니까?”
아난다로서는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었다.
‘수호자님의 결정이었습니다. 저도 모릅니다.’
그렇게 말해 줄 수는 없었다. 너무 무책임한 말이기 때문이었다.
“저 혼자서라도 가겠습니다. 절 말릴 생각은 마세요. 난 이 순간부터 선발대의 일원임을 스스로 포기하겠습니다. 저는 그들을 구할 능력이 없습니다. 저도 잡히겠죠. 뭐, 상관은 없습니다. 난 그들을 이대로 두고 갈 수 없습니다. 적어도 내게는 광명을 가져오는 일보다 제 동료들이 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냉정하게 몸을 돌려 세우자 너울이 손을 잡아챘다.
“이러지 마라. 네가 이러면 우리는 뭐가 되니?”
“이것 놔라, 너울. 그런 생각따윈 하지 않아도 돼. 난 말이다. 처음 선발대에 합류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 무척 기뻤다. 과분한 책무에 가습이 뛰었지. 내게는 지나치게 과분한 영예였여. 그 생각엔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졌어. 내가 감당할 수 ㅇ벗는 부분을 이제는 포기하기로 했어. 이건…… 애초부터 무리한 결정이었고 잘못된 선택이었어.
아난다 님, 그리고 여러분들. 전 누구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제가 할 일을, 해야 할 일을 제 의지로 결정하는 것일 따름입니다. 괜히 저로 인해 마음의 짐을 지우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럼, 저는 이만…….“
아무도 그를 잡을 수 없었다. 스스로 선택한 것에 대해 그 누구도 강제력을 동원할 수 없다. 파천은 마음이 착잡했다.
이레네가 하지 못한 말이 있었는지 데어 가던 걸음을 잠시 세웠다. 돌아서지 않은 채 그는 진심어린 부탁을 했다.
“꼭 성공하시길 바랍니다. 파천, 넌 취후까지 살아남아서 반드시 광명을 가져오길 바란다. 이건 부탁이기도 해.”
다시 발길을 떼어 가는 이레네.
선발대가 남부권도 벗어나지 못하고 이런 위기를 맞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그건 파천이나 아난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걱정거리는 언제나 중부권에만 맞춰져 있었다. 파천을 포함한 총 열 넷의 선발대 중 이레네를 포함하면 다섯이 남부권을 벗어나 보지도 못하고 이탈하는 무척이나 당혹스런 결과 앞에 모두는 할 말을 잃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레나가 이레네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향해 말했다.
“정말인가? 할 수 있겠나?”
무슨 말일까?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걸어가던 이레네까지 발길을 잠시 멈춘다. 단순히 목소리가 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정도로 아레나의 말은 지금 상황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엉뚱한 것이었다.
“원하는 대가는?”
‘아레나가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 같은데 대체 누굴까?’
파천만이 궁금해 하는 건 아니었다. 이번엔 아난다가 아레나의 말을 이었다.
“자세히 말해 보세요.”
공중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자들이 보였다. 그들을 발견한 너울은 의외의 인물을 대하자 조금은 놀라는 눈치였다. 바닥까지 내려선 자들은 총 여섯이었다. 선발대의 주변을 맴돌던 라치오와 친구들이 드디어 선발대 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라치오가 한발 나서며 정중하게 전사의 예를 표한다. 그러고 나서 똑바로 아난다를 직시하며 거침없이 제 의사를 밝혀갔다.
“저희들이 사로잡힌 선발대원들을 구해내겠습니다. 그 이을 저희들에게 맡겨 두시고 여러분들은 갈 길을 가십시오.”
파천은 별 대수롭데 않게 말하는 라치오를 다시 한번 주목해 바라 보았다.
‘저 자가 누구길래 대원들을 구하는 걸 저리 쉽게 말한 단 말인가? 보아하니 앞뒤 상황을 제대로 아는 것 같은데도…….’
“자신있나, 라치오?”
아레나는 미심쩍었다. 그들 일행이 조직적이고 아주 짜임새 있다는 건 인정하던 터였으나 전사총에서 대원들을 쉽게 구해낼 정도로 뛰어나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혹시 저 자가 자신의 능력을 감추고 있는 것인가?“
일부 영자들 중에서는 스스로의 능력을 일부 제한해 주목을 받지 않으려는 자들도 있었고, 그 반대로 과장되게 보이려는 자들도 있었다. 거기까지 이레나의 생각이 미친 건 어쩌면 아주 자연스런 것이었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어려운 일도 아니오.”
아난다의 눈은 라치오가 감추고 있는 걸 캐내기 위해 더욱 깊숙이 가라앉는다. 만약 라치오의 장담대로 대원들을 구해낼 수 있다면 아난다나 선발대의 입장에서 주자할 일은 아니었다. 관심은 다른 데 있었다.
“그대들이 원하는 건 무엇이죠?”
라치오는 별 일 아니라는 듯 슬쩍 웃었다.
“그건 나중에 말씀드리죠. 그다지 특별히 원하는 건 없습니다. 예전에 아레나 님께 말씀드렸다시피 우리는 선발대의 선발대 노릇을 하고 싶을 따름이지요. 보이지 않는 음지에서 궂은 일을 하는 저희들의 가치를 인정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누군들 지금 라치오가 한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아무런 의심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 봐라. 대가없이 그런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이유를 납득시켜 보란 말이다.”
아레나는 그들의 저의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영체소멸을 당한다 해도 다시 영체 회복을 하면 되는 영자들이라고는 하지만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대면할 자들은 그리 많지 않다. 소멸 이후에 겪게 되는 정화의 고통이 극심하기에 그것만으로도 꺼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는 성공의 확신이 서 있다는 얘기. 그렇지 않고서는 저런 태도를 보일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좋습니다. 정 그러는 게 편하시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죠. 저희들에게 작은 빚이나마 졌다고 인정하신다면 나중에…… 저희들이 요구하는 한 가지 청을 들어주시면 됩니다.”
“그것이 뭔데?”
“그건 그때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직…… 생각해 놓은 것이 없어서요. 하하하,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설마하니 아레나 님의 생명을 달라고야 하겠습니까?
어찌 보면 라치오가 이런 식으로 제안하는 것은 매우 시건방진 태도일 수도 있었다. 적어도 선발대 입장에서 본다면 그럴 것이었다.
그 위험성 대문에 선발대 내부에서도 포기하기로 결정한 일을 이미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이 말하는 것도 그랬고, 거침없이 자신이 할 말을 쏟아내는 라치오의 태도도 그랬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중함을 잃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주눅이 든 것도 아니었다.
‘저 자, 거래를 하자는 건가?’
파천은 결국 다물고 있던 입을 열어 놓고야 말았다.
“만약 그대들이 이번 일을 성공해서 나중에 어떤 청을 한다고 합시다. 글너데 그것이 도저히 우리 입장에서 들어 줄 수 없는 얼토당토 않는 것이라면…… 우리가 거부해도 되는 것이오?”
“물론입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여러분들의 마음이 무거울까 봐 형식적인 거래의 형태를 위하는 것뿐입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우리가 원하는 건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얻습니다. 그럼에도 굳이 선발대의 동의를 구하는 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습니다.
우리가 선발대의 곁을 떠나지 않는 건 역시나 우리가 얻어야 할 것을 좀더 쉽게 얻고자 함입니다. 그렇게만 이해하시면 됩니다. 괜히 우리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실 것도, 굳이 신뢰하셔야 할 이유도 없지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선발대 입장에서 결코 해로운 일이나 부담스런 일은 없을 것을 약속드리지요.“
파천은 라치오라는 인물에게서 매우 독특한 느낌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종잡을 수 없는 신비로움에다 거침없고 당당한 태도, 끝없이 의혹을 가지게 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사람을 끌어들이고 신뢰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게다가 호탕하고 깔끔한 성격까지 군더더기가 없어 보였다. 서로를 잘 알게 된다면 친구가 되거나 가장 확실한 적이 될지도 모를 그런 종류의 유형이었다.
파천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라치오도 파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맑고 깊숙한 눈빛은 잔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눈빛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특별한 대상에게 이처럼 의미 있는 눈길을 그것도 오랫동안 던진 예는 찾아 볼 수 없다는 걸 파천은 진정 모르고 있었다.
“이제 의심이 좀 가십니까?”
“어떻게 구해내겠다는 건지 물어 봐도 되겠소?”
파천은 그와 좀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아쉽게도 그러지 못해 죄송합니다. 우리의 밑천까지 드러나게 되니 양해를 바랍니다. 그럼, 저희들은 그렇게 알고 이만 가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계획대로 여정을 계속하시면 될 겁니다.”
“그럼 앞으로도 이런 경우를 당하면 똑같은 계약 조건이 성립되는 거요?”
“물론이지요. 대신 반드시 요청을 받아들여야만 저희들은 움직일 겁니다. 언제든 저희들을 부르십시오. 여러분 곁에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저희들의 눈과 귀가 머물고 있을 겁니다.”
‘저 한마디의 대답만으로도 저들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이 가는군.’
라치오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지만 파천은 비교적 상대를 파악하는 직감이 뛰어난 편이었다.
‘내가 만나 본 인물 중에 손에 꼽힐 정도로 특별하다. 저런 자가 적이 된다면 여간 골치 아프지 않겠어.’
라치오와의 거래 아닌 거래로 인해 이레네의 입장이 매우 난처하게 되었따. 파천이 그런 이레네의 팔을 슬쩍 끌어당기며 장난스레 말했다.
“이레네, 이제는 우리와 함께 할 수 있겠지? 왜, 이미 한 번 꺼낸 말을 주워담으려니 쑥스러워?”
이레네의 얼굴이 빨개졌다. 생각지도 못했던 라치오의 개입으로 선발대에 감돌던 암울함이 어느 정도는 가시는 듯했다. 라치오는 다시 한 번 파천을 시선 속에 담아 두고서는 발길을 돌렸다.
그들은 등을 보인 채 천천히 선발대의 곁에서 멀어져 갔다. 그들이 장담한 대로 성공할지 아니면 실패해 다시는 그들을 볼 수 없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선발대는 그들을 다시 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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