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25화 : 루딘족 족장 미스바의 초대
루딘족 족장 미스바의 초대
선발대의 여정은 계속되었으나 예전과는 다른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그건 대원들의 패배의식과 열등감이 빚어낸 현상이었다. 별로 말들도 없고, 얼굴들도 굳어 있거나 어둡기만 했다.
아난다와 아레나는 이런 선발대의 분위기를 매우 염려했다. 그렇지만 딱히 개선안이 없기에 도리가 없는 일이기도 했다.
이러자 파천이 말을 많이 하기 시작했다. 그마저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 선발대에는 단 한마디의 말도 오가지 않을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대화의 상대는 딱히 정해 놓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주로 그 역할을 해야 하는 건 아그립바나 아난다였다. 아그립바는 파천과의 대화를 오히려 제 쪽에서 즐기는 편이었다.
“그래서 그걸 다 먹어치웠단 말야?”
“응! 난 아직도 배가 고파. 난 굶주려 있어. 영물의 영성을 먹지 못한 지가 꽤 되었거든. 치사하게 아예 기운마저 감춰 꽁꽁 숨겨 두고 있으니.”
‘네가 치사한 거지, 그들이 치사한 거냐?“
파천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내색하지는 않는다.
“네 선택의 기준이란 게 있어?”
아그립바는 당연하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파천의 어깨에서 머리로 올랐다가 다시 등을 타고 겨드랑이 사이를 오간다. 아그립바는 파천의 옆구리에 매달려 그를 빤히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물론이지. 똘똘한 놈, 강한 놈, 신선한 놈, 특별한 놈, 에…… 그리고 매력적인 놈, 뭐 이정도면 내 기준에 적합하지.”
“그놈이란 게 영물일 테고, 다른 건 다 알겠는데 똘똘한 놈이란 것도 있어?”
“그럼! 영물이 띠는 영성이라는 것도 가지가지야. 나야 뭐 모든 걸 다 갖추었으니 가히 영성의 최종 완성판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다른 것들은 대부분 한 면만이 부각되기 마련이거든.
처음 만들어질 때의 의도나 차차 받아들인 영력의 성질에 따라 그 놈의 성격도 판이하게 달라져. 상당한 수준에 오르면 영물들은 상황을 이해하는 능력이 먼저 생기지. 그건 기본이야.
이를테면 말을 알아듣는다든지, 주인이 뭘 원하는지 따위를 이해하게 되는 거야.“
“그 다음엔?”
“그 다음은 각기의 특성을 하나씩 갖춰 가는 거지. 나처럼 팔방미인이 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면 돼.”
파천은 아그립바의 말을 들으면서 주변의 풍광을 감상했다. 그들이 지금 지나쳐 가는 곳은 넓은 구릉의 경사면에 난 길이었다. 길 아래쪽은 강이 완만하게 흐르고 있어 보는 이를 매우 편안하게 만들었다. 그다지 넓지 않은 강폭의 너머로는 끝도 알 수 없는 대평원이 하늘과 맞닿은 곳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파천은 영계의 풍광이 너무 아름답고 근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든 거길 딛고 사는 이들이 문제로군.’
“계속 얘기해봐.”
“웬만한 영물이라면, 그놈이 좀 세월을 거쳤다면 주인의 말을 이해하게 되고, 그것이 지나치게 되면 말으 ㄹ하고, 더 단계가 높아지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다 그 다음엔…….”
“주인을 차버리지. 헤헤헤…….”
“그래서 너는 주인을 차버린 거냐?”
“아니지. 나는 주인이 원래 없었던 거지. 그리고 누가 감히 나를 자기 소유로 할 수 있겠어?”
그러더니 파천의 눈앞에 둥둥 떠서 작은 손을 허리라 짐작되는 곳에 척하니 갖다댄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노려보는 듯했다.
“파천, 너에게도 경고하는데 그런 욕심일랑 애초에 가질 생각도 말아라. 난 너와 친구로 지내고 싶지 네 노예가 되고 싶지는 않단 말야.”
“알았다. 그런 걱정일랑 붙들어 매둬라.”
“에구.”
그는 갑자기 풀이 죽어 파천의 머리에 다시 찰싹 달라붙었다.
“내 좋던 시절도 다 가고 이제는 그야말로 이 바닥을 떠나는 일만 남은 건가?”
“말하는 것 하고는…….”
“그렇잖아? 내가 떴다 하면 모두들 감추기 급급하고 아예 기운마저 결계로 가둬 버리니 내가 무슨 맛으로 살아가겠어? 네가 지닌 신편의 힘을 느꼈을 때 내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알아?”
아그립바가 신편에 대해 언급하자 파천이 궁금한 걸 물었다.
“그런데 이놈은 왜 말을 못하는 거지?”
자기 팔을 툭툭 치며 하는 말에 아그립바가 대뜸 설명을 늘어놓는다.
“원래 못하게 해놓은 거야. 그놈은 프리즈마 사용에 국한시켜 영력을 주입한 거야. 그런 것 말고 술법 위주로만 능력을 향상시킨 영물도 있어. 나야 이것저것 다하고 덤으로 영성과 영력도 먹어치우지만 말야, 히히.”
“그래, 너 잘났다.”
“그럼. 나 잘난 거야 영계가 다 아는 일이니까…….”
“그렇게 대단한 녀석이 신편에게도 못 이겨?”
잠시 말을 끊은 아그립바가 뚱한 표정으로 다시 파천의 앞으로 슬쩍 내려왔다.
“그건 내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그놈이 대단한 거지. 그리고 내가 반드시 방법을 생각해 내서 그놈의 힘도 모조리 뺏어 버릴 거야. 기대 해도 좋아.
“제발 그러지 마라. 지금 이것마저 없으면 내 신세가 무척이나 처량해진까.”
“좋아, 잠시의 시간을 주지.”
파천과 아그립바가 나누는 대화는 선발대 전원이 듣고 있었다. 그들은 파천을 행렬 가운데 두고 있으면서 귀를 활짝 열어 듣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것이 가능할 만큼 선발대는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이들이 이처럼 속도를 늦추어서 움직이는 건 라치오 일행이 선발대를 구출해 올 것에 대비해서다. 예상되는 시간이 지나서도 오지 않는다면 오지 않는 것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행렬의 제일 앞에는 권터가 거대한 백사의 머리를 타고 움직여 가고 있었다. 파천이 백사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놈도 영물이잖아?”
“내가 아까 그랬잖아, 기준이 있다고. 저놈은 하등한 놈이라 먹을 것도 없어. 순수하지 않고 매우 탁해. 저런 걸 먹어치웠다간 오히려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지. 내 수준을 깎아 내리는 짓은 나도 하지 않는다고.”
“저놈이 들으면 매우 기분 나쁘겠다.”
“감히 제 놈이 내 말에 기분 나빠할 수 있어? 잘 봐, 내가 하는 걸.” 그러더니 백사를 가리키며 조용하게 말했다.
“거기서 멈춰.”
장난스럽게 한 소리였으나 파천은 놀라 눈이 동그래질 지경이었다. 정말로 백사가 그 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멈춰 버렸기 때문이다.
“햐, 대단한데.”
“야, 아그립바! 빨리 안 풀어?”
권터가 뒤돌아보며 지르는 소리에 아그립바의 손이 슬쩍 휘저어졌다. 그제야 백사가 다시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었다.
“대단하긴. 이정도야 기본이지. 웬만한 영물들은 내 앞에서 꼼짝도 못해. 발락이 타고 다니는 혹호 중에 가장 크고 강한 놈이 있어. 그놈의 꼬리와 눈썹는 타는 듯 붉은데 성주가 타는 거야.
전에 언제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었거든. 내가 그놈을 끌고 사라지자 성주가 노해 따라왔지. 성주의 속도가 워낙에 빨라 잡힐 것 같자 내가 어떻게 한지 알아?“
“어떻게 했는데?”
“혹호를 나와 다른 방향으로 달리게 했지. 그러니 혹호를 따라갔겠어, 나를 따라 왔겠어?”
“호오, 너 앞으로도 발락 성주를 만나면 조심해야겠다.”
“하도 오래 된 일이라 잊어먹었을지도 모르지. 하여간 난 그 정도야.”
아그립바는 제 자랑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이때 파천이 아그립바를 긴장시키는 발언을 했다.
“제왕의 유물은 좀 다르지 않나?”
아그립바는 신경이 예민해져서 목소리마저 딱딱해져 버렸다.
“그놈들은 좀 다르지. 내 생각엔 이놈 신편도 제왕과 관련이 있는 놈이 분명해. 그러니까 내가 못 먹었지.
나도 실제로는 제왕의 검을 단 한 번도 대면해 보지 못했어. 들어 보기만 했지. 예전에 좀 오래된 영물을 먹어치운 적이 있거든. 자신이 섬기던 옛 주인이 기억 소멸을 당해 새로운 주인을 찾아 떠돌아다니던 놈인데, 재수 없게도 나한테 딱 걸린 거지.
그때 놈이 한 말을 아직까지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어. 제왕의 검을 딱 한번 대면한 적이 있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어느 정도냐고 물었지. 나와 비교해서 말해 보라고 했더니 날 막 비웃더군. 그때만 해도 지금보다는 훨씬 수준이 낮았거든.
그놈의 말에 의하면 나 같은 건 비교도 안 된다고 했어. 기분이 나쁘더군. 그래서 놈을 삼켜 버렸어. 그 때부터 난 미친 듯이 영물들을 찾아 다녔어. 언젠가 그놈들 중 하나와 만난다면 한번 제대로 힘을 겨뤄보고 싶었기 때문이야.
영물들간에도 나름대로의 독립된 세계가 있고, 통용되는 법칙 같은 게 있어. 두 개의 영물이 부딪치면 그 중의 하나는 나머지 하나에 귀속당하게 되어 있지. 그게 우리 세계의 유일한 강자존의 법칙이야.“
‘이제 보니 아그립바가 제왕의 검에 경쟁심을 지니고 있었구나.’
“난 언젠가는 영물들 중에 최고 최강이 되고 싶어. 세상의 모든 영물들을 모조리 쇶ㅂ시켜서 내 왕국을 건설할 거야. 생각만 해도 멋지지 않아?”
“허.”
그 말에는 선발대 전원이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이제 보니 너야말로 위험한 놈이었어. 그럼 그 소집시킬 영물 중에 마계의 마수들도 포함되는 거냐?”
“그놈들은 예외지. 그놈들은 메타트론의 권능으로 만들어졌으니 메타트론이 누군가에 의해 제압되지 않는 한 꿈도 못 꿀 일이지. 그리고 놈들은 아주 불량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아. 그래서 제외시키기로 했어, 헤.”
아그립바의 표정만으로는 그냥 해보는 소리만은 아닌 듯했다.
파천은 아그립바에 의해 다스려지는 영물의 왕국을 상상해 보았지만 잘 그려지지 않자 포기했다. 제일 앞서가던 권터가 아그립바가 꿈속을 헤매고 다니는 걸 용납하지 않는다.
“그런 허튼 꿈은 괜히 심력만 낭비하는 거란다. 네가 누군가의 지배를 받고 싶지 않듯 다른 영물들도 마찬가지지. 왜 그걸 생각하지 못하는 걸까?”
“그건 절대강자가 아직 출현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만약 내가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영물들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내게 복종하게 될거야. 그러기 위해선 파천, 네가 지닌 신편은 무슨 일이 있어도 넘어서야 할 관문이야.”
가만 내버려 두었더니 아그립바의 상상은 제약 없이 끝간데 모르고 부풀어 오른다.
‘세상에 광명을 먹어치우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니…….’
파천은 너무 어이가 없어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꾹 참고 입만 쩝쩝 다셨다.
그때 아난다가 행렬을 정지시켰다. 그는 전방이 아닌 하늘을 향해 시선을 주고 있었다. 그러자 선발대원들의 눈도 자연스레 아난다의 시선이 향한 곳을 함께 바라본다.
“뭐가 있어, 혜능?”
“누군가 우리를 향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파천은 그가 바라보는 곳을 꼼꼼히 살펴보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강렬한 햇빛은 보이지 않았으나 밝은 광채를 내는 공간은 하늘의 축복인 양 눈부셨다. 백지와도 같은 공간에 그려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기다림은 곧 무언가의 형체를 모두에게 선사했다. 아직은 작아 형태를 분명하게 파악하기는 어려웠지만 빠른 속도로 하강해 오는 게 있었다. 나무를 통으로 깎아 만든 것으로 보이는 새하얀 말을 탄 사내였다.
말이라고는 하지만 파천이 알고 있던 일반적인 것들과는 사뭇 모양새부터가 달랐다. 네 개의 다리는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고, 그 자리에 대신 붙어 있는 건 바퀴였다.
목마는 비행의 목적으로 만든 것으로 보였다. 굳이 그걸 타고 다녀야 할 이유는 없어 보였기에 궁금증을 자아낸다. 파천은 목마 위에 의젓하게 앉은 자의 행색을 자세히 살폈다.
가까이 다가선 자는 여전히 허공중에 떠 있었으나 폴짝 뛰면 닿을 정도로 낮은 위치였다. 전신을 촘촘한 은빛 사슬로 싸고 있어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한동안 선발대를 찬찬히 살펴보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러기까지 모두는 일체 침묵하고 있었다. 파천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새로 나타난 이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족장님의 명을 전하겠습니다. 아난다 님과 아레나 님 그리고 생령이신 파천 님을 초대하셨습니다. 바쁘시지 않다면 초청에 응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정도의 여유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중 일부만이 초대되었다면 응할 수가 없습니다. 가서 족장님께 그렇게 전해 주십시오.”
아난다의 대답에 사내는 잡시 동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파천이 그 자를 향해 정중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특별히 제외시켜야 할 이유가 없는 이상에야 선발대 전원은 언제나 함께 동행합니다.”
“정 뜻이 그러시다면 여러분 모두를 초청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내의 그 말은 자신의 권한이 이 정도의 사안에 대해서는 임의적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정도는 된다는 의미였다. 이때 아레나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루딘족은 외부에 대해 상당히 폐쇄적인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런 초청은 좀 뜻밖이네요. 우리를 초청하는 이유를 들어 봐도 될까요?”
파천은 그제야 사내가 누군인지를 알게 되었다. 스메이 부족과 함께 무한계에서 가장 이름난 장인들이라 불리는 바로 그 루딘족이었던 것이다.
그 뛰어난 재능 때문에 항시 다른 이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지만 또한 그 능력으로 인해 정착하지 못하고 무한계를 떠돌아야만 하는 비운의 영자들이기도 했다. 만약 누구든지 루딘족이나 스메이족을 사사롭게 이용할 수 있다면 그 활용도는 전사단 한둘을 휘하에 두는 것과는 차원이 다를 것이었다.
‘듣기로 루딘족은 비행매소를 만들어 정착하지 않고 떠돈다 들었다. 그렇다면 저 위 어딘가에 이들의 비행매소에 와 있다는 뜻인데……. 이들이 우리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파천이 의문에 사로잡혀 있을 때 루딘족의 전언자가 말했다.
“여기서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지금 저희 비행매소에는 상당수의 외부 영자들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들은 각지에서 소식을 듣고 몰려들거나 초청받은 자들입니다.”
외부 영자를 들이지 않는 걸로 정평이 나 있는 비행매소였다. 거기에 상당수의 외부인이 와 있다는 건 매우 특별한 경우였다. 루딘족의 초청을 선발대는 받아들이기로 한다. 계획에 없던 일이지만 무한계 신비 부족으로 알려진 루딘족의 터전을 대한다는 건 모두에게 매우 특별한 경험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몇몇 대원들의 표정엔 감출 수 없는 흥분이 서려 있기도 했다.
비행매소의 규모는 파천의 예상보다 더 대단했다. 까마득한 공중을 유유히 날아다니는 매소는 전체가 회색 빛이 감도는 암석이었다. 여기저기 성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건축물이 바닥과 구분 지을 수 없는 일체감과 안정감을 지니고 세워져 있었으며, 그 형태는 하나같이 독특했다. 그 중 하나의 밀폐된 궁으로 들어선 선발대는 내부 전경에 혀를 내둘러야만 했다.
아름다운 전경에 모두 감탄을 연발하고 있을 때였다. 안내를 하고 있던 자가 고개를 숙여 보이며 아난다에게 말했다.
“이 복도를 따라 들어가시면 막다른 곳이 나올 겁니다. 그곳의 문을 세 번 두드리십시오. 그럼…… 즐거운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파천은 그 자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했다. 그건 다른 대원들도 마찬가지다.
‘다른 곳들과는 달리 이 궁만은 매우 조용하다. 다른 기척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이 거대한 건물 내에 움직이는 생명체가 전혀 포착되지 않는다.’
지금껏 선발대가 지나쳐 온 다른 건축물들 주변에는 꽤나 많은 자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들은 대체로 평온한 듯 보였으며 생동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돌 활기에 차 있었다. 그런데 이곳만은 그렇지가 않았다. 망자들의 묘역에 들어선 것 같은 고요함은 온몸을 감싸며 기분 나쁠 정도로 칙칙하게 감겨 들어왔다.
아난다는 그런 것에는 전혀 개의치 않고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그가 발을 떼어 놓자 다른 대원들도 어쩔 수 없이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뚜벅뚜벅
좌우 벽면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문양들을 자세히 살펴 가던 파천의 눈이 이채를 띠기 시작한다. 벽면과 바닥과 천장은 하나의 매우 사실적인 그림을 양각으로 새기고 화려한 채색으로 물들여 놓았다. 대상이 누군지 모르지만 그건 틀림없이 전쟁의 한 장면을 매우 세밀하게 묘사해 놓고 있었다.
온몸에 화려한 문신을 한 자들과 손에 방패와 검을 든 자들, 머리칼이 모조리 하늘로 솟구쳐 올라 기괴하게 ㅂ이는 자들, 태양을 한 손에 쥔 듯 밝은 빛을 뿜어내는 자들이 한데 뒤엉켜 있었고, 그들은 서로를 향해 공격하면서도 한 방향을 노리고 진격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앞으로 나갈수록 더 다양한 자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들이 목표로 삼은 곳은 복도의 끝에 다다라서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부조 속에 살아 있는 인물들의 시선은 지금 선발대가 향하는 곳과 일치했다.
기나긴 복도가 끝이 나고, 안내자의 말처럼 막다른 곳에 다다랐다. 전면을 막고 있는 건 문이 분명했다. 거의 3장이나 될 법한 거대한 문에는 세 개의 의자가 새겨져 있었고, 거기 앉은 자들의 팔은 각기 네 개씩이었다. 그들은 저마다 손에 한 가지씩을 쥐고 있었다. 그들의 눈은 자신들을 향해 몰려오는 자들을 관찰하고 있었으며, 입가에는 조소가 가득했다.
‘마치 나를 비웃는 것 같군.’
파천만이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가운데 앉은 자의 무릎을 아난다가 힘차게 세 번 두드렸다.
쾅쾅쾅
파천은 안에서 들려 올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문 전체에 새겨진 조각을 다시 한번 세밀하게 살펴 갔다. 가만 보니 가운데 앉은 자의 무릎 아래에 한 아름다운 여자가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여인의 눈은 세 명 중 하나의 손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놀랍게도 피가 뚝뚝 흐르고 있는 잘린 머리가 들려 있었다. 그 여자의 손은 무엇인가를 갈구하는 듯 허공으로 들려져 있었고, 다른 한 손은 등 뒤로 돌아가 있었다.
‘손에 쥔 것이 검인가?’
파천은 복도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그림이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때 안에서 맑은 음성이 들려 왔다.
“들어오세요.”
그그그그긍
왠지 열릴 것 같지 않던 거대한 문이 힘차게 활짝 열렸다. 그 사이로 눈부신 빛이 쏟아져 나온다. 파천은 실눈을 하고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밝은 빛을 등지고 있는 자의 형체가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몸의 굴곡을 보아서는 여자인 것처럼 보였다. 아난다르 ㄹ위시해 선발대 전원이 안으로 들어서자 문은 다시 잠겼다.
잠시 있자 두 눈을 크게 뜨고서도 분간이 갈 정도로 적응이 된다. 파천은 다시 안을 자세히 살폈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선발대 앞에 선 여자는 파천의 머리색처럼 금빛으로 온몸을 장식하고 있었다. 빳빳하게 세운 옷깃이 목 위로 솟아나 있고,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닮은 문양이 걸치고 있는 옷 전체를 수놓고 있다.
금발에 금안을 한 매우 특별한 외모의 소유자는 유독 파천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그녀는 파천을 향해 천천히 다가섰다. 날아갈 듯 가벼운 발걸음 뒤에 한 손이 내밀어졌다.
“어서 오세요. 그대가 파천인가요?”
“그렇소.”
조금은 차가운 응대에도 상대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더욱 화려한 미소로 대해 왔다.
“모두 이리로 오세요.”
팔각의 면을 지닌 방은 백여 명이 앉을 수 있을 만큼 넓었다. 가운데로 선발대를 이끈 여인은 손을 슬쩍 흔들었다. 그러자 평평했던 바닥에서 돌의자들이 영자들의 수만큼 솟아 나왔다.
‘신기한 장치를 해놨군.’
선발대원들은 전원이 앉고 나자 그 여인은 여전히 선 채로 하나하나를 주목하며 바라보았다.
“저는 루딘의 맥을 잇고 있는 미스바라고 해요. 여러분들을 만나게 되어 무척 기쁘게 생각해요.”
“우리를 초청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파천의 직설적인 물음에 미스바는 가만 그를 내려다보다 매우 슬픈 눈빛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파천을 향한 시선을 움직이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았다.
“그걸 말씀드리기 전에 제가 한 가지 질문을 해도 될까요.”
이번엔 아난다가 대답했다.
“그러세요.”
“여러분들은 왜 이런 위험한 일을 하시는 거죠?”
파천은 미스바의 질문이 무슨 뜻인지 얼른 이해하지 못했다. 아난다는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제 생각을 말하죠. 여러분들은 지금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고 계세요. 광명을 가져오는 일이 가능하리라고 보시나요? 설사 성공해 그것을 가져온다고 가정해도 그것만 있으면 모든 상황이 좋아지리라 믿나요? 진정 그렇게 생각하세요?”
맑고 고운 음성은 나직했다. 파천은 뜬금없는 미스바의 발언에 적잖이 당황했다.
“이 모든 게 누군가에 의해 계획된 일이고, 그 마지막을 여러분이 장식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 결과가 모두의 파멸과 맞닿아 있다면 어쩌시겠어요?”
아난다는 고집스레 고개를 저었다.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는 모르지만 전혀 근거 없는 의견에 전 동의할 수가 없군요.”
아레나가 짜증 섞인 어조로 미스바를 공박한다.
“그대가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하는 근거를 대지 못한다면 우리를 기만하는 것으로 밖에는 받아들일 수 없다. 대체 뭘 말하고자 하는 건가?”
미스바는 아레나의 거친 언사에도 전혀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녀느 깊은 한숨을 토했을 뿐이다.
“제가 여러분들을 이곳에 초청한 이유는 몇 가지가 있어요. 그 첫째는 하나의 정보를 주기 위해서고, 또 하나는 그대들의 여정에 작은 도움이나마 주기 위해서죠. 그렇지만 실제로 제가 원하는 건 여러분들이 지금이라도 여정을 중단해 주십사 하는 부탁을 드리기 위해서랍니다.”
파천은 미스바가 말하는 내내 두 손을 모아 쥐고 있고 손가락이 가늘게 경련으 ㄹ일으키고 있다는 걸 놓치지 않았다.
“근거를 대라고 하셨나요? 만약 설득력이 있다면…… 여정을 중단하실 건가요?”
“그건 들어보고 나서 결정할 일이오. 그렇지만 어떤 말로도 여정은 중단되지 않을 거요.”
파천의 단호한 의지를 대하자 미스바의 얼굴이 더욱 처연해졌다.
“영계에는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죠. 여러분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영자들은 보이는 세계의 속하는 분들. 제가 염려하는 건 결코 드러나서도 만나서도 안 될 두 세계가 여러분들로 인해 그 베일이 벗겨지고, 나아가서는 대충돌을 일으키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그 징조들은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건 마계와의 싸움이 가져올 결과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큰 파장을 불러 오겠죠. 마치 누군가 꾸며 놓은 각본처럼 왜 이번에 그 모든 일이 한꺼번에 벌어지려는지 그 배경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릅니다.
분명한 건……. 선발대의 여정이 여기서 중단된다면……. 중부권으로 들어서지 않고 걸음을 돌이킨다면 모든 건 다시 잠잠해지리라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세죠. 보이는 세계는 뭐고 보이지 않는 세계는 또 뭡니까? 그리고 선발대의 여정이 왜 그 모든 위험을 촉발시키는 원인이 되는지……. 도무지 이해하기가 힘이 드는군요.”
아난다는 미스바의 발언에서 한 가지를 깨달았다.
‘미스바는 꽤 많은 비밀에 접근해 있는 듯하다. 루딘족이 떠돌게 된 이유가 외부에 알려진 것과는 다를 수도 있다.’
파천의 질문에 미스바는 난처해한다.
망설이던 미스바가 결심을 굳히고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미스바 님, 굳이 알려질 필요가 없는 얘기라면 하지 않는 것이 나을 듯싶군요.”
아난다였다. 미스바는 흠칫하더니 입을 굳게 다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이 모호한 변화는 대원들에게 의미심장했다. 그러니까 그들은 선발대의 여정에 자신들이 모르는 일이 개입되어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챈 것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그것이 어떤 범주의 일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자 당사자라 할 수 있는 파천은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갈 지경이 된다.
“혜능, 너 잠자코 있어라. 대체 무슨 소리들이야? 광명을 가져와야 하는 이유가 마계로부터 전차원계를 지켜내기 위해서라더니, 그런게 아니었나? 마계의 침략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일이라는 게 대체 뭐야? 혜능, 넌 뭔가 알고 있자? 미스바, 말해 주시오. 대체 좀 전에 하려 했던 얘기가 무엇이었고?”
파천이 빠르게 쏟아낸 말은 다른 대원들 역시나 간절하게 알고 싶은 의문이기도 했다.
권터가 거들고 나섰다.
“숨긴다고 될 일이 아닌 것 같군요. 선발대의 여정에 감춰진 비밀은 뭡니까? 현 중부권의 움직임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손길들은 또 뭐란 말입니까?”
“이것 점점 기분이 나빠지려 하는군. 내가 모르는 일이 있다는 건데……. 이런 일에 동참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어. 말하지 않을 거면 아예 꺼내지를 말든가.”
아레나는 불쾌한 기색을 여실히 드러냈다.
잠시 아난다와 눈을 맞춘 미스바가 파천을 다시 쳐다본다. 그녀의 눈가가 미세하게나마 떨리고 있다는 건 파천만의 착각인지도 몰랐다.
“좋아요, 말씀드리죠.”
“미스바 님.”
아난다가 그녀를 제지하고 나섰다. 그러자 파천이 아난다를 무서운 눈으로 쏘아본다. 이렇게 되자 난처해진 건 아난다였다.
“어차피 제가 아는 것 또한 부분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니 발설한다고 해서 달라 질 건 없을 겁니다. 그리고 다른 누구도 아닌 파천 님만은 진실을 알 권리가 있을 듯싶군요.”
아난다는 침통한 표정으로 어렵게 입술을 열었다.
“이후의…… 혼란은…… 누가 책임집니까?”
“그것 또한 계획된 것일지도 모르죠.”
아난다는 현 상황이 스스로도 막을 수 없는 일임을 깨닫는다.
‘모든 게 너무 빠르다. 대체 어디서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한 걸까?’
루딘족 족장 미스바는 자세를 다시 고쳐 잡고서는 파천을 깊숙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선발대를 안배한 분이 누군지에 대해서는 아시죠?”
“수호자라고만 알고 있소.”
“네, 맞습니다. 수호자라고 불리는 분이시죠. 마계의 뒤에 도사리고 있는 자가 누군지도 아시죠?”
“메타트론이라고 알고 있소.”
“그렇습니다. 마계와 다른 차원계의 대립은 사실상…… 겉으로 드러난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심지어 마계의 지도자인 루시퍼조차…… 보이는 세계의 속해 있지요. 그 둘 간의 차이점이 뭔지 아십니까?”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구분을 말하는 거라면…… 난 모르겠소.”
“영자들 중 비밀에 접근한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의 구분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이해가 빠르실 겁니다. 그 비밀이란…… 별다른 게 아닙니다.
지금의 영계 이전의 세계들에 대한 비밀이기도 하고…… 신의 비밀이기도 하며 장차 벌어질 우주의 운명에 대한 비밀이기도 합니다.
거기에 결부되어 있는 자들은 과거세의 완전자들로부터 각 차원계의 절대자들, 메타트론과 수호자, 세계윤회에서 살아남아 존재하는 자들, 완전자가 될 수 있었음에도 스스로를 봉인시킨 자들, 우연히 비밀으 ㄹ알게 된 불운한 저와 아난다 님같은 분들로 포함되겠지요.“
아난다는 미스바의 얘기가 진행되어 갈수록 파천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파천은 미스바를 보지 않고 아난다를 직시하고 있었다.
“세계 윤회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뭐고 스스로를 봉인시킨 자들이란 또 뭡니까?”
각시의 반짝이는 눈은 그 모든 얘기들이 처음 듣는 것임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영자들이 윤회를 거듭하듯이 우리가 터전으로 삼는 이 세계 역시나 똑같은 윤회를 합니다. 소멸과 회복을 반복하고 있죠. 세계가 소멸하게 되면 그 안에 존재하는 영혼들이 무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살아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스스로 존재하는 자들이라 합니다.”
“그건 전설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각시의 반문에 미스바는 고개를 저었다.
“영계 내에 떠도는 모든 전설들은 거의 대부분이 사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근거 없이 그냥 생긴 소문은 제가 판단하기에 단 하나도 없습니다. 아주 정확한 사실만이 전해지는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비슷하겠지요.
어쨌든 그런 자들이 있다는 건 분명합니다. 그들은 인간계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존재했으며, 영계의 영자들이 말하는 태초부터 있어왔던 자들입니다.
그들이 신에게서 창조되었는지 아니면 그들을 지칭하는 말처럼 스스로 존재하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그들은 현재에도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고 앞으로도 세계소멸과 관계없이 존재할 겁니다.“
충격적인 증언이었다. 미스바가 그런 사실을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을 만큼 확신에 차 있다는 걸 파천은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스스로를 봉인시킨 자들은 완전자가 될 수 있음에도 신의 비밀을 엿보고 광명세에 들기를 거부한 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의 선택 자체가 어찌 보면 신의 권능에 저항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그들은 봉인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지요.”
“그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파천의 심장은 평소보다 배는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음성이 조금 떨려 나오고 있었다.
“봉인구에 스스로를 가두고 때를 기다리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 모든 자들이 알게 모르게 이 세계의 영향을 끼쳐오고 있었던 거지요.
영계의 굵직굵직한 사건들 이면에는 이들의 간섭이 있어 왔습니다. 서로간의 대립은 철저하게 인간계와 영계를 통해 간접적으로 치러졌죠. 제왕의 지배에서 현 영계를 해방시킨 이가 메타트론이었듯이 그 이전의 세계들에도 그들간의 대립은 늘상 있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지켜졌던 묵계가 처음으로 깨어졌습니다. 마계의 인간계에 대한 직접적인 침략에 이은 소멸. 신에 대한 메타트론의 직접적인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는 대사건이라 할 만하죠.
그런데 천궁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그야 순리에 맡기기 위함이 아닙니까?”
“순리라……. 순리란 어느 한 관점에서만 다뤄질 수밖에 없는 매우 모순적인 입장입니다.
신의 반대편에 서 있는 자들에게는 순리를 역행하는 것이 그들의 순리죠. 신의 침묵. 모든 존재자들 가운데 절대자인 신이 참고 기다리고 있는 이유가 뭐라 생각하십니까?“
‘그 속에 들어가 보지 않았으니 알 수가 없지.’
“때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것을 새로운 질서로 재편할 때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 결과가 어찌되든 이제 싸움은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선발대의 여정이 이 모든 사건의 핵심을 건드리는 기폭제가 된다는 점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의 반대편에 서 있는 자들을 하나로 연결시켜 주는 구실이 되기도 하구요.“
“그건 또 무슨 말이죠?”
“서로간의 약속이 있었습니다. 어느 한쪽이 약속을 어기지 않는 한 누구도 전면적으로 도발하지 못합니다. 마계가 먼저 약속을 깼습니다. 그렇지만 그 결과는 마계에 국한된 일입니다. 이번에는 선발대로 인해 하나의 약속이 깨지려 합니다.”
“또 하나의 약속?”
“완전자만이 들 수 있는 곳, 완전자만이 대면할 수 있는 광명을 자격이 없는 생령이 공공연하게 보란 듯이 가져오겠다고 나섰고, 그 모든 걸 안배한 이가 수호자라는 사실이지요. 수호자가 누군지 아십니까?”
‘그걸 알고 있단 말인가?“
파천은 이 대목에서 초긴장 상태로 돌입한다. 그건 다른 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수호자는…… 신의 편도 신의 반대편도 아닌 그 모두에 함께 속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신의 뜻을 실현하는데 더 주력해 왔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것 자체만으로는 그다지 큰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문제는 파천님과 관련이 있습니다. 생령인 파천 님이 영계에 들어서서 광명을 가져오는 일을 수행하고 있음에도 천궁에서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다는 것. 그건 신의 뜻을 직접적으로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한쪽에서 화살을 쏘았고 또 다른 쪽에서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겨 놓고 살을 메웠다는 의미입니다.
광명을 가져오는 데 성공하는 순간, 아니 그 전에 광명에 파천님이 다가서는 순간 한 번도 없었던 대 전쟁은 시작됩니다. 서로간의 약속이 깨어지고 그 동안 숨죽이고 있던 보이지 않는 세계에 속한 자들이 모두 쏟아져 나올 명분이 생깁니다. 과연…… 그 결과가 어찌 되리라 보십니까?“
“신이 이기거나 지거나겠지요.”
“아닙니다. 신의 존재 자체가 이 세계를 존재케 하는 이유입니다. 신의 권능이 훼손되고 반역자들에게 권한이 주어지면 모든 세계는 붕괴됩니다. 완전한 소멸. 무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럼에도 반역을 가능하게 해주는 건 그들의 오만이 불러온 시도지요.
그들은 신과 영혼들이 소멸되어 무로 돌아간다고 해도 여전히 존재할 거라 믿는 자들입니다.
그럼 제가 다시 묻겠습니다. 파천 님이 선발대의 여정을 중단한다면 어떤 결과가 빚어지리라 여기십니까?“
“어차피 벌어질 일이라면 제가 중단한다고 해서 멈추기야 하겠습니까?”
“파천님이 여정을 중단한다면 이번 일은 마계에만 국한됩니다. 천궁과 마계 또는 마계와 수호자를 비롯한 다른 차원계의 일로 일단락 되겠지요. 제 뜻을 알겠습니까?”
파천은 몇 가지 궁금증이 일었다.
“그건 이치에 맞지 않군요.”
“뭐가 말입니까?”
“제가 광명에 드는 것이 약속 위반이라는 건 그렇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마계나 보이지 않는…… 세계에 속한 자들이 오히려 내가 성공하길 바래야 하지 않소? 그럼 선발대 앞을 막는 자들은 대체 뭐란 말이요?”
“그들 중 대다수는 이런 것을 전혀 모르는 자들일 겁니다. 아니면 중도적인 입장에 있는 자들이겠죠. 대 전쟁이 발발하는 걸 두려워하는 자들 말입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들 중에도 그런 자들은 존재합니다. 이 상태로 우주가 지속되는 걸 원하는 자들이지요. 대답이 되었습니까?”
“그럼 수호자는 왜 이런 일을 안배한 겁니까? 그가 원하는 건 설마 하니……. 이 세계의 붕괴란 말이오?”
“그건 저도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신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에 기인하고 있거나 그도 아니면 신의 지시에 의한 것일 수도 있죠.
신이 스스로 약속을 깰 수 없으므로 마계의 시도를 묵인했고, 수호자의 시도조차도 묵인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약속이 철회되게 되는 것이죠. 그렇지만 이건 제 추측일 따름입니다.“
“그렇다면 그 보이지 않는 세계에 속한 자들 중에는…… 내가 성공하길 기대하는 자들이 더 많다는 얘기인데, 왜 그들은 나를 돕지 않는 것이오?”
“그건 미묘한 문제입니다. 우선은 신의 속성과 성품에 관련된 얘기를 해야겠군요. 결과적으로 신의 뜻을 따르는 일일지라도 현재 파천 님의 여정만 놓고 보면…… 신의 뜻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질서에 반하는 행위죠. 만약 이 일에 직접적으로 누군가 개입해 돕게 된다면 차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파천은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신의 뜻에 위배된다는 점에 충격을 받았다.
‘그 책임을 져야 한다고? 나뿐만이 아니라 선발대 모두가 그렇다는 얘기잖아. 그런데도…… 수호자는 이런 일을 안배했다는 건가? 게다가 천상천의 천주들과 선계의 태상까지 동의하고? 이걸 믿으란 말인가?“
파천은 아난다의 말처럼 혼란을 느꼈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그 경계마저 이제는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런 다른 대원들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신과 대적하기로 작정한 자들이 그런 걸 저어한다는 건 이해할 수 없군.”
권터의 지적은 쉽게 가질 수 있는 의문이었다.
금제 때문에 영계에 들 수 없다면 모를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들에게 신과의 약속을 지켜야 할 이유는 없어 보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데까지 이른 자들이라면 그건 더더욱이나 그럴 것이었다.
“또 하나의 보이지 않는 세계에 속한 자들의 태반이 이 세계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없다는 점도 작용하고 있습니다. 신의 최소한의 권능이 그걸 제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런 금제가 없었다면 영계는 벌써부터 혼란지경에 직면했을 겁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신에게 대항하고자 하는 자들이라 해서 서로의 뜻과 이상이 일치하는 건 아닙니다. 서로의 견해가 지금껏 달랐기에 신의 반대 노선을 점하고 있음에도 서로 간에 힘을 합할 수 없었습니다. 그건 서로의 진실 된 뜻에 대한 확신과 신뢰가 없었기 때문이었겠죠.
그들은 신의 절대적인 권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껏 때를 기다려 왔던 겁니다. 이번 선발대의 여정 중에 서로간의 입장은 분명히 가려지게 됩니다. 또한 신의 뜻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야말로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선발대의 여정을 통해 명분을 얻게 될 것이고 서로간에 연합을 추진하게 될 테지요. 그 다음엔 마계를 앞세우고 영계를 혼란 속에 몰아넣고 천궁과 마지막 싸움을 치르려 하겠죠.
선발대 앞을 막아서려 하는 일부의 시도는 어쩌면 신의 적극적인 개입을 유도하는 행위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신은 스스로의 성품에 의해 약속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그 어떤 시도도 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그 일을 대신 수행하는 자들이 필요했고, 그 역할을 수호자가 자임한 것 같습니다.
선발대의 여정이 이대로 계속된다면 그 결과는 뻔합니다. 신과 적대자들이 모두 원하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 직접적인 피해는 무관한 영자들의 몫으로 던져지게 됩니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아난다가 미스바를 향해 포문을 열었다.
“미스바 님은 이런 일들을 누구에게서 들었습니까?”
“누굴까요? 아난다 님도 만나 본 적이 있었던 수호자, 바로 그 분으로부터 들었습니다.”
미스바의 그 말에 아난다는 곤혹스러워한다.
의외의 대답을 듣자 파천이 미스바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미스바 님이 일곱별 중의 하나요?”
“아뇨, 그건 아닙니다. 아주 오래 전에 그 분을 만나는 행운을 얻었고, 그 당시에 들었던 얘기입니다. 그러다 최근에 접한 정보들 때문에 제 견해를 정리하게 된 것입니다.”
아난다는 이제야 자기 입장을 밝히기 시작했다.
“미스바 님의 말씀처럼 선발대의 여정엔 여러 복잡한 입장들이 뒤엉켜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아는 건 순수하게 광명을 가져와야 할 이유뿐입니다. 지금 미스바 님이 하신 말씀가운데 개인적인 추측이 상당부분 포함되어 있음을 부정하실 수는 없겠지요.
아직은 그 무엇도 확실한 게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이 사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현 단계에서 미스바 님의 제안에 따라 저희가 광명을 가져오는 여정을 중단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진정 모든 환난들이 미뤄질거라 여기십니까?
천만에요, 지금 당면한 상황들 중 우리가 특히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우주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던 인간계의 소멸입니다. 앞으로 완전자는 더 이상 나올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윤회의 목적이 결여되어 버렸고 신의 권능은 벌써 훼손되었습니다. 당연히 그 후속조치는 따르게 될 겁니다. 문제는 그 범위겠죠.
제 생각에는 신의 침묵은 그 범위를 결정하기 위한 잠시간의 유보일 듯합니다. 선발대의 여정과 상관없이 그 범위에 속한 자들은 신에게 대적하게 될 것이고, 새롭게 확정되는 자들 또한 신과 싸울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선발대의 여정 자체가 신의 약속 위반이라고 하셨는데 그건 틀린 말씀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대전쟁은 시작되어야 옳습니다. 광명을 가져오는 여정 자체를 방관한다 해서 신이 약속을 파기한 것도 아닙니다. 완전자만이 광명을 대할 수 있었던 건 결과만으로 판단하신 것이고 자격제한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어쨌든 현 상황은 이대로 간다면 마계와 수호자와의 문제로 끝이 납니다. 또한 그 동한 침묵했던 보이지 않는 세계에 속한 자들은 앞으로도 여전히 침묵할지도 모릅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약속은 벌써 파기되었습니다. 그건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천궁이 나서든 침묵하든 마계는 차원계들을 정복하려 할 것입니다. 또한 각각의 입장을 지니고 있던 여러 부류의 영자들 역시 두 가지 중 하나만을 택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잠깐, 혜능.”
파천이 아난다의 말을 중단시켰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집중되자 파천은 크게 십호흡을 했다. 이어 천천히 한마디씩 뱉어냈다.
“미스바 님.”
“말씀하세요.”
“수호자는 선발대에게 광명을 가져오라고 지시했습니다. 미스바님께서는 선발대가 광명을 가져오는 건 보이지 않는 세계에 속한 자들을 끌어들일 명분을 주는 일이라 하셨습니다. 맞습니까?”
“그래요. 분명 그렇게 말했어요.”
“우리가, 아니 내가 광명을 가져오는 걸 그들 또한 원한다고 말씀하셨죠? 그리고…… 신의 뜻을 수행하는 수호자가 선발대를 조직하고 이런 일을 안배한 건 순전히…… 망설이고 있는 자들을 끌어들이려는 의도고……. 이것도 맞습니까?”
파천의 목소리가 점차 낮아지자 미스바는 고개만을 끄덕여 동의했다. “이 모든 것이 미리 안배되어 있었다는 것은……. 인간계에 대한 마계의 침략을…… 수호자도, 신도 예상했던 일이며 그들은 묵인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속한 자들을 끌어들이고 심판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명분을 주기 위해서, 그들 중에 반대자들을 가려내기 위해…… 나와 선발대와 그리고…… 인간계에 희생당한 것인가요? 순전히 그 이유 하나로?“
“제 생각에는…….”
“그렇군요. 우리가 멈춘다면…… 모든 걸 포기한다면 적어도 보이지 않는 세계에 속한 자들은 영계에 들어서지 못하겠군요. 그래서 중단하라고 하신 것이고?”
“네.”
“신이 자신들을 심판하고자 하는 확신이 들지 않는 한 그들은 뭉치지 못하고, 그들 스스로 승산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나서지 않을 거란 말씀이시죠?”
“네, 모든 건 파천 님이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더 중요한 건 파천님의 광명을 가져와 봐야 별 소용이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신의 권위를 대산 한다는 이유 때문에 즉각적으로 영자들의 복종을 요구할 수 있지만 그걸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파천 님이 광명을 얻는 건 신의 허락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에 그것만으로도 신의 뜻은 명백해지는 거죠.
얻는 것에 비해 잃을 것이 너무 크죠.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 뜻에 따를 건가요?“
파천은 생각했다.
‘지겹군. 모조리 똑같아. 원하는 걸 얻기 위해 남을 이용하고 희생시키고……. 숨어서 검은 속내를 감추고 음모를 꾸미고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협잡이나 하고…… 그런 것인가? 영자들의 삶을 담보로 그들은 승부를 내려 하고 있다. 난 결국…… 꼭두각시에 불과했군요. 그래, 그랬던 거야. 그러나 나로서는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옛 추억의 편린들이 주마등처럼 파천의 뇌리 속을 스쳐 갔다. 기쁨 보다는 슬픔으로, 희망보다는 절망으로 채색된 그림들은 파천이 갈 길을 한곳으로 몰아 갔다.
“미스바 님의 말씀이 모두 사실이라 해도…… 난 포기하지 않습니다.”
“왜죠.”
“왜냐고 물었습니까? 그대가 나라면…… 포기하겠습니까? 모진 목숨을 ㅇ녀명해 가는 단 하나의 이유와 목적을…… 그대라면…… 그리 쉽게 포기할 수 있겠소?
모두가 그만둔다 해도 난 앞을 향해 전진해 나갈 수밖에 없소. 내가 어딜 가겠소? 내 목적은 오직 하나. 마계 놈들을 내 손으로 끝장내는 것. 그러 이루기 위해서라면 난 그 누구하고도 손을 잡을 수 있고 그 무엇도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놈들은 관심이 없소. 내 삶을 송두리째 파괴시켜 버린 그놈들을 내 손으로 처치할 수 있다면…… 신과도 대적할 수 있소. 아무도 날 이해해 주지 않고, 아무도 날 따라 주지 않는다 해도 난 이 길을 따라 갈 것이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선발대 모두가 날 버린다 해도 나는 홀로서라도 끝까지 갈 것입니다. 여파가 어떤 식으로 미치든 현재의 내게 그런 걸 따져 볼 만큼의 여유는 없습니다. 사실이어도 사실이 아니어도 내 발걸음에는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을 겁니다.“
파천의 서글픔을 다른 이들도 느꼈다. 그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외길을 가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 길의 끝까지 미쳐야만 작은 희망이나마 바라볼 수 있는 처지도 이해하고 있다. 그 길만 바라볼 수 있는 자에게 길 밖의 세상은 너무도 먼 얘기다.
미스바는 그래서 준비한 얘기들을 텋어 놓는다.
“제가 한 가지 제안을 하겠습니다. 이대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을 겁니다. 아무리 튼튼히 방비한다 해도 허점은 있기 마련이죠. 힘이 모자라니 결국엔 좌절하게 될 겁니다. 마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에 속한 자들이 파천 님의 성공을 바란다 해도 결국은 아무도 도와주지 못합니다.
그런 반면 막으려는 손길은 도처에 도사리고 있고 매우 막강합니다. 힘을 모아야 합니다. 수호자의 안배만을 믿고 있기엔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제가 급히 여러분들을 이곳으로 모셔들인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단언하거니와 지금 상태라면 중부권에 들어서 보지도 못하고 실패합니다.“
미스바는 꽤나 많은 정보를 지니고 있었다.
“매소 자하린이나 전사총의 일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난다 님이나 아레나 님이 강하다 해도 다수를 막을 수는 없죠.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이대로 무작정 전진하는 건 너무도 무모한 일입니다.”
미스바는 선발대에 일어났던 일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앞에 더 큰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으며 이곳을 벗어나는 순간 닥칠 것이라 말했다.
“이런 말씀드려서 죄송하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다른 대원들은 현실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건 인정하셔야 합니다. 결국 여러분들 중 파천 님에게 힘을 보탤 수 있는 분들은 아난다 님과 아레나 님 그리고 권터 님 정도입니다.”
이때였다. 문밖에서 미스바에게 전하는 말이 들려 왔다.
“그들은 성공했습니다.”
미스바의 표정이 다소 밝아지는 것 같더니 선발대를 향해 반가운 소식을 전한다.
“그들이 큰일을 해냈군요. 전사총에서 사로잡힌 분들을 구출해냈다는 소식입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아난다는 라치오가 그 정도였나 싶었다. 그건 다른 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뒤이어 전해진 말은 모두를 긴장케 했다.
“그렇지만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추격당하고 있고 앞뒤에서 몰려드는 자들도 있습니다. 어찌해야 할까요? 도와줘야 합니까?”
미스바가 밖을 향해 말했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전혀 파악이 되지 않은 건가?”
“그렇습니다.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의외로 라치오 일행이 강하긴 하지만 이대로 둔다면…… 어떻게 될지 예상할 수 없습니다.”
미스바는 생각했다.
‘아직은 우리가 나설 때가 아니다. 그들의 촉수에 벌써부터 걸려 든다면 상황은 더 악화된다.’
“내버려 두어라. 그들이 알아서 하겠지.”
미스바의 명령에 대답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파천도 아난다도 다른 대원들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루딘족이 희생을 감수하며 선발대원들을 위험에서 구해야 할 의무가 있을 리 만무했다.
“자, 이제는 시간이 촉박합니다. 몇 가지 제안하겠습니다. 여러분들께 리가 공들여 만든 병기들을 한 가지씩 선물하겠습니다.
더불어 파천 님이 지니신 힘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게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선발대의 여정이 성공적으로 완수될 수 있도록 뜻을 함께 하는 자들을 끊임없이 모아 보도록 하죠.
전 현재의 선발대를 둘로 나눠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격 목표가 단일하다면 오히려 적들을 도와주는 일입니다. 파천 님과 아나다 님 그리고 아레나 님과 권터 님을 제외한 다른 선발대원은 주변을 경계하며 은밀리 따르다가 결정적일 때 도움을 주는 게 더 효과적일 듯 싶습니다.
중부권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빠른 속도를 유지하고, 특별한 일이 아니면 매소도 지나쳐 가시는 것도 좋을 듯싶군요. 제 제안에 따르실 용의가 있으신지요?“
선발대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는 제안이었다.
아난다느 미스바의 특별한 관심에 감사의 뜻을 표한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더 이상 바랄게 없습니다. 그렇지만 선발대를 나누는 문제는 좀더 생각해 봐야 할 듯싶군요.”
너울은 아난다의 그 말이 다른 대원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힐까 염려해서 판단했다. 그렇지만 너울은 그런 것쯤 감수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어차피 파천이 무사하면 되는 것이다.
“아난다 님,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미스바 님의 제안은 매우 합리적입니다. 따르는 게 좋겠습니다만…….”
각시 또한 동의하고 나섰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좀더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과 같은 모습이어서는 곤란하겠죠. 여러 안들이 제시될 수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미스바 님의 제안이 가장 적절합니다.”
아난다는 할 말을 잃었다. 그들이 그렇게까지 말해 주는 게 고마웠다.
선발대원들의 구성은 순전히 수호자의 지명에 의지하고 있었다.
아난다 또한 어떤 의도가 내재되어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무슨 특별한 기대를 가지기는 커녕 그들은 어떤 면에서 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은 냉엄하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왔었다.
‘저들이 비록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해도 엄연히 선발대원들이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는 한 모두는 함께여야 한다. 잠시간의 나뉨이 있을지라도 반드시 하나로 성취해야 한다.’
미스바의 제안은 결국엔 받아들여졌다. 선발대를 향한 손길들은 처음의 예상보다도 복잡한 성격들을 띠고 있었고, 감당하기에 벅차다는 걸 모두가 동일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미스바는 파천을 따로 불러 한 영자를 소개시켜 주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그는 이름난 현자였다. 그에 대한 소개는 그것뿐이었다.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어디에 적을 두고 있는지, 어떤 일을 해왔었는지, 현재 어떤 일을 성취하고자 분투하는지에 대한 간략한 언급조차 피했다.
꼭 그래야만 하는 것 같아 파천도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그렇지만 미스바는 ‘그에게서 얻을 수 없다면 그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상대는 파천을 대하고서도 스스로에 대한 얘기는 단 하나도 입밖에 내지 않는다.
“네가 지금 할 수 있는 것, 이해하고 있는 것, 근시일 내에 성취할 수 있는 걸 알아 봐야겠어. 물으면 대답하고, 지시하면 행하면 돼. 아직도 결정된 건 없어. 내가 널 도울지 조차도 말야.”
둘을 가두고 있는 공간은 무연이 존재하던 백색의 방처럼 느껴졌다. 어디선가 불쑥 무연의 소리가 들려 올 것만 같았다. 그처럼 닮아 있었다. 협소한 곳임에도 벽은 아주 멀리 느껴질 정도로 거대해 보였다.
‘눈에서 광채가 나는구나.’
파천의 느낌은 그것뿐이었다. 현자의 얼굴이 뼈가 두드러질 정도로 말랐다는 것도, 그가 걸친 의복이 올이 굵은 투박한 재질이라는 것도 그를 특징 짓는 것이 될 수 없었다.
눈빛은 따스했으나 흔들림 없이 차갑다. 매우 이질적인 느낌을 동시에 주는 그 자는 ‘당신을 뭐라고 부르지요?’ 라는 질문에 ‘아무렇게나 불러’라고만 했다.
“술법을 배우기엔 주어진 시간이 부족해. 그래서 난 지금부터 프리즈마의 사용법에 대해서만 집중해서 가르치도록 하겠어.”
파천은 그가 어느 펠라모의 교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프리즈마는 체내의 것인가, 외부의 것인가?”
가장 기초적인 것부터 시작할 참인 것 같았다.
“내부에도, 외부에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내부에서 비롯됩니다.”
“자세히 말해 봐.”
“의지적인 개체프리즈마와 원형의 외부 프리즈마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주가 프리즈마로 가득 찼으니 그 어디에도 있는 셈이지요.”
“들어서 아는 거야, 아니면 겪어 보고 깨달은 거야?”
“둘 다입니다.”
“그럼 어떻게 사용하지?”
“내부의 프리즈마를 의지의 개입으로 외부와 결합해 사용합니다. 그렇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반대의 경우? 무슨 말이야?”
“외부의 프리즈마를 내부로 가져와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일반의 경우 내부의 프리즈마는 외부의 프리즈마를 격발시키는 정도의 역할 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결합은 외부에서 이루어집니다. 내부의 의지가 발현되어 외부에서 구체적인 성질로 규정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반대의 경우도 가능합니다. 외부에서 가져온 프리즈마를 내부에서 결합해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그렇게 해본 적이 있어?”
“전 예전부터 그런 식으로 힘을 쓰는 법을 익혔습니다. 제게는 그것이 더 자연스럽지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런 식으로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한번 해봐.”
파천은 머뭇거리다 그가 시키는 대로 시현해 보였다. 손을 펼쳐서 살짝 흔들었다. 그러자 공간이 폭발하는 듯한 소음이 동반되며 강하고 바람이 몰아쳤다. 아주 작은 힘이었지만 밀폐된 곳이라서 더 과장되게 느껴졌다.
“현상만으로는 다른 걸 느낄 수가 없군.”
파천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했지만 그는 지금 상당히 고민하고 있는 중이었다. 전혀 얘기치 못한 문제에 부닥친 것이다.
생령인 점을 고려해 기초적인 부분부터 거슬러 오르려 했으나 그럴 필요는 없어 보였다. 문제는 파천이 사용하는 프리즈마의 결합 방식이 그에게도 생소하다는 점이었다.
파천이 사용하는 방식대로 계속 사용하게 할 것인지, 아니면 일반 영자들이 사용하는 방법을 습득시켜야 할 것인지, 고민은 좀체 끝나지 않는다. 그런 그를 향해 오히려 파천이 질문을 던졌다.
“처음에는 선인들에게서 배운 대로 사용했었고. 그러다가 좀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자 나름의 방법을 연구하게 되었소. 예전 내가 인간계에서 사용하던 방식으로 해보았소. 사용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내게는 더 편하게 느껴지더군요.
문제는 그 다음에 벌어졌지요. 내 몸이 그걸 견뎌내지 못한 겁니다. 들끓는 프리즈마를 다스리지 못하니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겁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신체가 견딜 수 있는 제한도니 양만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래서야 강적을 만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 방식을 고집한다면 그렇겠군. 지금 네가 하는 건 어찌보면 원령체 수련자들이 하는 짓과 흡사해. 자 이걸 봐라.”
그는 손끝에서 새파란 기운을 만들어냈다. 너무도 뚜렷한 색상은 아름답고 신비롭기까지 했다. 그건 점차로 커지면 자유롭게 형태를 바꿔갔다.
“지금 이 상태를 설명하자면 내부의 프리즈마와 외부의 프리즈마가 내 의지를 매개로 하여 결합되어 있는 것이지. 현재 내부의 의지적인 프리즈마는 영체와 원형프리즈마를 이어주는 역할만을 하고 있어. 익숙해지면 극히 제한적인 프리즈마만으로도 외부와 연결을 시도할 수 있지. 내부의 프리즈마란 그런 거야. 내 의지의 견고함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양에 한계가 있을 따름이지. 그런데 네 말대로라면, 넌 전혀 달라.”
스스스스스스
프리즈마를 거두어들인 현자는 심각한 표정을 했다.
“원령체에 대해서 들어 봤나?”
“알고는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일부에서는 원령체가 되기 위한 수련법이 남아 있고, 그대로 행하는 자들이 있어. 그렇지만 그들 역시나 프리즈마를 사용하는 방식은 마찬가지야. 크게 다르지 않아. 원령을 의지로 자유롭게 다스린다는 건 원령체가 아니면 불가능하고 완전자가 되지 않고서는 꿈꿀 수 없는 경지야.
원령체 수련을 하던 자들 중 일부는 그래서 편법을 사용하곤 하지. 체내에 단을 만드는 방법이다. 현재 이런 방식으로 힘을 일으키는 자들이 극히 소수인 건 그만큼 힘들기 때문이야. 영자들이라면 누구나 프리즈마를 사용할 수 있는데 반해 원령을 사용하는 건 특별한 술녀이나 깨달음이 없이는 아예 시작부터 할 수가 없어.
게다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기가 너무도 지난하기 때문에 대다수는 중도에 포기하고 말지. 네가 프리즈마를 사용하는 방식은 원령체가 되고자 하는 자들의 수련법과 흡사해. 원령체는 프리즈마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도 그 이상의 힘을 내기도 해.
원령체가 된다는 건 우주와 일체화된다는 의미. 과연 누가 있어 그 힘을 당해낼 수 있겠어? 그렇지만 내가 보기엔 그건 현실적으로는 도달하기에 불가능한 미친 짓이야.“
파천이 당면한 문제는 의외로 큰 것이었다. 일반적인 방법을 따르자니 그 수준이 너무 미미하다,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자니 신체가 견디지 못한다. 파천은 새로운 걸 얘기했다.
“신체가 견딜 수 있게 강화하는 방법은 없습니까?”
그가 생각해낸 단순한 물음에 상대는 난색을 표했다.
“영체 중 가장 견고한 것은 화신체. 그것보다 더 뛰어난 영체는 단연 원령체야. 그것 이외에도 다른 특별한 방법으로 영체를 단련시키는 방법은 많지만…… 모두 한계가 있어. 더군다나 그 방법들이란 게 인간인 네게는 적절치가 않아.”
파천은 그의 단호한 부정에 난감한 표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방식을 바꿔야 한단 말인가? 지금까지는 그나마 혜능이나 아레나의 도움으로 견뎌 왔다지만 앞으로는 어떤 문제에 봉착하게 될지 모른다. 언제까지 그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길 수는 없다. 근본적인 해결점이 없이 더 이상 전진한다는 건 위험천만이다.’
현자라는 영자 역시나 아난다와 도나투스처럼 속 시원하게 해결 방안을 내놓지는 못했다. 파천은 그가 현재의 방식을 탈피하라고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전혀 의외의 말이 나온다.
“이렇게 되면 할 수 없지. 애초의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겠군. 네 지금의 상태에 맞추는 수밖에. 이런 경우를 예상치 못했기에 무척 당황스럽긴 하지만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냐.
일반적인 방법은 안전하긴 하겠지만 별 진전이 없을 것이고 더딜 것이 뻔하니……. 기존의 방식을 고수해야지.“
파천은 일단은 그의 반응이 반가웠다. 만약 해결점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더 이상은 이 문제로 시름하지 않아도 좋았다. 더군다나 힘을 사용하는 데 제약이 없데 된다면 어떤 적을 만난다 해도 두려울 게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 내가 아는 원령체 수련법을 설명할 테니 잘 들어라,.”
파천은 엉뚱한 현자의 말에 뚱한 표정이 된다. 그가 대안으로 내놓은 게 원령체 수련법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프리즈마를 외부에서 내부로 가져오는 건 원령을 받아들이는 것과 동일해. 물론 내부의 프리즈마와 결합한다는 점에서는 차이점을 보이긴 핮. 원령체가 되려면 프리즈마를 일으켜서는 안 돼. 순수한 의지만으로 원령과 자신을 일체화 시키는 것, 이것이 핵심이야.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원령을 느끼는 게 급선무겠지.”
파천은 당황스러웠다. 자신이 원하는 건 프리즈마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이지 원령체가 되겠다는 건 아니다.
‘나보고 지금 그러 배우라는 건가? 자기 말로 힘들거라고 해놓고선 거기에 매달려 보라니……. 어처구니없군.’
파천의 이런 내심을 현자는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계속 자신이 알고 있는 원령체 수련법에 대해서 늘어 놓고만 있었다.
그의 입을 다물게 하거나 참고 듣는 것 중에서 파천은 손쉬운 후자를 선택한다.
“원령체가 되기 위해 수련을 하라는 건 아냐. 그 원리를 통해 현재의 문제를 풀어 보고자 하는 것이지. 솔직히 장담은 할 수 없지만 해볼 만한 가치는 있을 것 같군.”
이제야 파천은 현자의 말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이후 그가 지시한 대로 해보았으나 그건 무연을 만난 이후로 줄곧 사용해 오던 그 방식 그대로였다. 달라진 건 하나도 없었다. 파천은 근본적인 것에서부터 벽에 부딪쳤다.
‘원령이 대체 무어란 말인가?’
그는 어쩔 수 없이 원령에 대해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현자는 매우 친절하게 설명을 했다.
“원령은 프리즈마와는 성격을 달리하지. 우주는 프리즈마로 가득 차 있지만 그것보다 더 근원적인 힘인 원령으로도 가득 차 있어. 사실은 나도 잘 몰라. 내가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으니 어찌 설명하겠는가?
원령이 있다고 믿는 자들이 있고, 그들이 힘을 사용하는 방식이 일반적인 프리즈마 사용과는 성격을 달리한다는 건 알아. 하지만 그것이 딱히 원령이라고 주장할 만한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거든.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원령은 프리즈마보다 더욱 순수하고 핵심적인 힘이야. 그들은 전 우주가 원령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건 신의 의지가 깃들여 있는 신령스런 힘이라고 믿고 있어. 원령들간의 상호작용에 의해 프리즈마가 생성된다는 게지. 원령은 프리즈마를 낳는 태(아이 밸 태)와도 같은 것이란 말이야.“
추상적인 표현만으로 일관하는 것을 보니 그도 잘 모르는 게 확실한 득했다. 파천은 눈앞에서 진지하게 설명하고 있는 자가 현자라고 불려도 될지 마저 의심이 갔다.
‘혜능이 훨씬 낫겠군.’
파천은 묵묵히 현자가 쏟아내는 말들을 듣고 있다. 결국은 이렇게 말하고야 말았다.
“구체적인 대안은 없다는 말씀입니까?”
“흐음……. 그런 셈이지. 나도 몰라. 족장 년이 너를 만나 좀 도와주라고는 했지만 내게 그럴 능력 따윈 없어. 내가 뭘 할 줄 아는 게 있어야지. 프리즈마를 사용하는 법이야. 나 아니라도 얼마든지 가르쳐 줄 수 있을 테니 이만 가보는 게 좋겠어.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 말야.”
그리고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등을 돌려 버린다. 파천은 좀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인내심을 발휘해 다시 물었다.
“이대로 포기할 수 없으니 원령체 수련법에 대해서라도 다시 한 번 가르쳐 주시지요.”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이건 해도 너무 하는군. 미스바는 왜 이런 자에게 나를 인도해 왔단 말인가?“
“넌 꼭두각시야. 그것 알고 있나?”
난데없이 나온 말이었다. 그리고 그게 자신을 두고 하는 말임을 파천은 의심하지 않았다. 마계의 침입 이후 지금껏 자신의 의지대로 된 것이 무어가 있었던가. 그런 의미로 되새김질하지 않더라도 파천은 급작스런 현자의 말에 관심을 보였다. 그건 미스바가 했던 말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무슨 상관이겠소. 내 이루고자 하는 바와 일치하니 잠시 꼭두각시 노릇을 한들 무슨 상관이겠소.”
“속 편한 놈이군. 너로 인해 세상이 뒤집어질지도 모르는데 말이더나?”
“내게 의미 있는 세상이란 사라진지 오래요. 영계는 아직도 내게는 생소한 곳. 냉정하게 말하자면 어찌되든 나와는 상관이 없소.”
“독한 놈이군.”
“그렇소. 난 독한 놈이고 더 독해지고 싶소. 독해져서 원하는 걸 이룰 수 있다면 난 얼마든지 그럴 수 있소.”
“허, 그놈 말하는 것 좀 보소. 그래 네 놈은 원하는 게 뭐냐? 힘을 얻어서 무얼 할 참이냐? 네 팔에 들어가 있는 놈이나 네 손가락에 무멀고 있는 놈만으로도 큰 어려움은 겪지 않을 듯싶은데 말야.”
“아직 어림도 없소. 내가 가지길 원하는 힘의 한계란 없소. 할 수만 있다면 절대자가 되고자 하요.”
“그래서 뭐할 건데?”
“마계를 절단 내고, 그들을 배후에서 조종한 자들이 있다면 그들 역시나 처단하고 싶소.”
“호오, 대단한 놈이로구나. 욕심이 지나쳐. 충고하는데 이 정도에서 그만두거라. 너 아니라도 세상은 한 번쯤 뒤집어지게 되어 있으니 괜히 너까지 나서서 혼란을 재촉할 필요는 없다.
넌 몰라. 네게 그런 아픔을 준 자들이 진정 뭘 원하는지를 말야. 널 통해 무얼 하고자 하는지를 말야. 네가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알게 도니다면 당장 모든 걸 포기하게 될텐데……. 무척 아쉽군.“
“내가 어떤 일을 하게 될 거라 생각하는 겁니까?”
“두고 보면 알겠지. 머리로 이해해도 되지 않는 것을 가슴으로 느끼려 하니 되겠는가? 분노는 널 망치고 나아가서는 세상을 망치겠지. 널 막아서는 놈들이나 널 도우려는 놈들이나, 알고 하는 이들이나 모르고 개입한 자들이나 모두 하나야. 따지고 보면 모두 네 적이야.”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겠소.”
“너는 순리를 거슬러 오르려 하고 있어. 네가 하는 일에 명분은 분명할지 모르지만 그 결과는 모두에게 참혹해. 그걸 알고서도 하겠다면 너야말로 세상의 해악이야.”
해약이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자의 등은 완고해 보였다. 파천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대는 내게 뭘 가르치고 싶은 생각이 없구려. 그럼 더 이상 내가 이 자리에 있을 이유는 없는 듯하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하죠. 당신의 말이 모두 맞다고 칩시다. 내가 모든 걸 포기한다면 달라지는 게 있소? 현 상황에서 나아지는 게 있느냐는 말이오.”
“흐음, 그건 아니지. 어차피 거슬러 오르려는 자들이 있으니 물살이 알겠지. 그래, 네 말도 맞아. 허나…… 네게 아무런 유익이 없는 일을 넌 왜 하려고 하지? 그 결과로 인해 넌 지금 가진 것마저 잃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난 가진 게 아무것도 없소. 이 생명을 말하는 거라면 나는 동의할 수 없소.”
“넌 수호자의 안배에 따라 만들어진 인생이야. 어지 보면 참 가련하지. 네 선택은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렸고 그 선택마저 제한되었으니.
그 모든 운명에 넌 순응하고 있어. 이 길은 널 자유케 하는 것이 아니라 널 가두고 있어. 너에게선 단 하나의 전생도 느껴지지 않아. 참 무서운 일이지.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수호자는 널 통해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 걸까? 생각해 본 적이 있나?“
“물론이오. 답은 어디에도 없었소 멈추어 서서는 절대로 알 수 없다는 것만 알았소. 그래서 난 끝까지 가볼 셈이오. 설사 그곳이 지옥이고 내가 악마가 된다 하더라도.”
“미스바가 널 돕기로 했으니…… 이젠 돌이킬 수도 없게 된 건가?”
진의를 파악하기 힘든 말이었다.
“난 네가 힘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줄 수 있다. 그러나 그러면 안된다는 것 또한 알고 있어. 미스바는 널 보고 나면 내 생각이 달라질 거라 하더구나. 그래, 조금은 흔들리기도 했지. 네 맑은 눈동자와 어떤 어려움에도 흔들릴 것 같지 않은 굳건한 의지를 보았기 때문이지.
허나 그것 대문에 난 더 두렵구나.“
파천은 잘못 들었지 않나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분명 현자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럼 도와주시오.”
파천의 간절한 한마디가 현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는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확인하고자 하는 것 같았다.
“넌 신과 대적할 용기가 있느냐?”
“왜 그래야 하요?”
“세상에서 가장 큰 용기이기 때문이지.”
“…….”
파천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마계만을 생각해 왔다. 신은 그의 삶에서 별 의미 없는 먼 곳의 무의미한 소리와도 같았으며, 보이지 않는 곳의 화려한 불빛과도 다름없었다.
“너는 악마를 용서할 수 있나?”
“ 그래야 할 이유가 있소?”
“네 원수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절대로 그럴 수 없소. 난 복수하고자 신의 반대편에 설수는 있으나 신의 요구가 있다 해도 내 원수를 용서할 마음은 없소. 더군다나 악마를 용서하라니…….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하는군요.”
“그래서 안 되는 거야. 넌 규정되지 않은 미지의 존재야. 신의 뜻을 실현시킬 수도, 악마의 주구가 될 수도 있는 그 모든 가능성을 지니고 있지. 넌 보아하니 상당한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고 지닌 가능성을 실현시킨다면 어쩌면 넌 전설의 원령체가 될지도 몰라.
그럴 경우 넌 제어되지 않는 파괴자가 되겠지.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네 비중으로 인해 질서는 무너지고 순리는 거역되는 게야. 세상의 근심거리가 될 걸 뻔히 알고서 널 완성시켜 줄 수는 없다.“
단호한 한마디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파천은 그리 낙담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편안한 심정이었다.
“어차피 내 것이 아니었으니 욕심을 부리지는 않겠소. 그 방법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언젠가는 접근할 수 있을 것을 믿기에 난 절망하지 않소. 그대의 선택은 그대의 것. 어쩔 수 없다면 따라야겠지요.
난 이만 가보겠소. 불가능한 일에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가 않구려. 그럼.“
파천은 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그가 등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현자의 다급한 말이 이어졌다.
“한 가지만 약속해 준다면! 난 널 도울 수 있다.”
‘약속, 약속이라고?’
“무엇이오?”
둘은 서로를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네가 비밀을 알았을 때…… 그리고 처단해야 할 존재가 네 앞에 서 있을 때 그 결과에 대해 다시 한번만 생각해 다오. 그리고 만약 그 결과가 세상의 존폐와 맞닿아 있다면 신중해져랴. 네 원수를 처단하는 일이 세상의 멸망을 부추기는 일이 된다면 넌 모든 걸 포기해야 한다. 네 복수까지. 그럴 수 있나?”
‘뭔가를 알고 하는 말인가, 아니면 그저 하는 말인가?’
파천은 생각해 보았다. 원수가 앞에 있고 자신에게 그를 처단할 힘이 있느데도 포기할 수 있겠는가를.
‘내 원수는 마황과 대마신들 그리고 그들을 뒤에서 조종했을 메타 트론이다. 그들을 처단하는 일이 세상을 멸망시키는 일은 아닐 것이니 허락해도 무방하겠군.’
“좋소, 그건 약속할 수 있소. 그런데 내가 약속을 한다고 해서 날 믿을 수가 있겠소?”
“넌 적어도 한 번 한 약속을 어길 자는 아니다.”
“왜 그렇게 단정 짓는 겁니까?”
“네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흥미 있는 말이구려.”
“난 너와 계약을 했다. 이 계약은 네 영혼으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너와 내 영혼이 소멸하지 않는 한 이 약속에 대한 이행의 의무를 져야 한다.”
“그러겠소.”
그제야 현자는 돌아섰고 파천도 그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서로를 마주보고 섰을 때 다른 비행매소의 한곳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루딘족의 족장 미스바가 당황하며 말을 떠듬거린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수호자는 신의 뜻을 충실히 이행해 왔던 자입니다. 그가 배신자일 수도 있다니요? 확인된 사실입니까?”
“아직은 추측에 지나지 않아. 생명수의 흐름을 정간계로 돌려놓은 자. 그럴 가능성을 지닌 자는 그리 많지 않아. 능력이 그에 미치는 자들은 극소수거든. 지금으로서 가장 가능성이 높은 자를 꼽으라면 수호자 아니면 메타트론, 메테우스와 카라느 제왕들 중 하나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들은 왜 거론하지 않는 겁니까?”
“그들은 아냐.”
“그렇게 단정 짓는 근거라도 있는지요?”
“확인된 바로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대천사들이 그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을 완전하게 속일 수는 없었을 거야.”
“흐음, 그렇다면 봉인한 절대자들 중에 하나일지도…….”
“그들 역시 마찬가지야. 천사들의 감시는 그리 만만한 게 아니다. 천사들의 감시를 받지 않았던 유일한 자들이 내가 거명한 자들이다. 수호자 역시 용의선상에서 제외시키면 안 되는 이유가 최근에 발견되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가 사라지기 전 마지막 자취를 남긴 곳이 어디인지 아느냐?”
미스바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놀랍게도 옛용을 가두고 있는 용천을 비밀리에 들렀다고 한다. 왜 그가 그곳에 갔어야만 했을까? 미카엘은 왜 그를 순순히 보내 줬을까? 그의 허락이 없이는 갈 수 없는 곳인데 말야.”
“그, 그럼?”
“어쩌면 천사들 중에서도 반역자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런…… 일이…….”
미스바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결국 조사는 더 이상 아무런 소득도 없이 일단락 되었다. 지금 대적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잠자는 대지도 깨어나려 한다.
귀계는 대덕을 따르는 일부 귀령을 제외하고는 모두 마계의 수족이 되었다. 천상계의 천주 중에서도 배신자는 있을 터. 이런 시급한 시점에 가장 큰 변수는 수호자가 어느 쪽이냐 하는 것.
그와 메타트론의 실조 ㅇ이후 어둠의 천사들은 활동을 멈추었지만 메테우스와 카란이 돌아오고 봉인구가 깨어지는 때에 그들 역시 돌아온다. 이제 파천이 광명을 가져오는 것은 우리들의 관심권 밖이다. 만약 수호자마저 배신자라면…… 선발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무한계를 깨우는 일은 현재의 조건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럼 어쩌실 참입니까? 선발대르 ㄹ돕는 일은 중지해야 하나요?”
“아직 단정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일단은 계획대로 한다. 선발대의 여정을 통해 내부의 적을 가려낼 수 있을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바라기는…… 수호자는 우리편이었으면 좋겠어. 그가 적이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파천은 지금 뭘하고 있나?”
“그는 곧 힘을 얻을 것입니다.”
“그가 승낙했다는 말이냐?”
“아마도 그러지 않을까요? 그 역시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가 한 축을 담당해 줬다면 훨신 수월했을 텐데……. 고집스런자.”
“대적자들은 어찌해야 할까요? 이대로 내버려 두는 게 영 찜찜합니다.”
“내버려 둬도 돼. 당분간은 별 움직임을 보이지 않을 거다. 그것보다는 잠자는 대지에서 파견된 자들을 예의 주시해라. 그들은 쿠사누스들을 찾아내 회유하려들 것이다.
이미 밝혀진 아난다 수련자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겠지. 그들은 나타나는 즉시 처단해야 할 자들이다.“
“저, 외람 되지만 한 말씀은 드리겠습니다.”
“뭐지?”
“아난다 수련자는 일곱별 중에 하나입니다. 그는 수호자를 대면했던 자로 선발대의 구성에 직접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를 통해서라면 수호자에 대한 단서를 포착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다. 나 또한 일곱별 중 하나이지 않던가? 나 또한 수호자를 만났었지만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의 주의가 무엇인지조차.”
“그럼 어쩌실 겁니까? 수호자의 부탁을 따르실 참입니까?”
“그래야겠지. 그가 적이라는 확증이 들 때가지는 당연하다.”
“그럼 지휘는 누가 합니까?”
“내가 없는 동안 카발라와 마르쿠제가 모든 걸 결정할 것이다. 메덴과의 연락뿐만 아니라 천상계와의 연계에 대해서도 지시해 두었으니 당분간은 별 문제 없을 거야.”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마계에서 너무 조용한 것이 신경에 쓰여. 이번 일부 전사단과 펠라모의 회합도 그렇고.”
“그건 이미 손을 써두었습니다.”
“그래, 잘했다, 미스바.”
“네.”
“선발대를 그들과 만나게 해라.”
“네?”
미스바는 의외였던지 상당히 놀라는 눈치였다.
“위험하지 않을까요?”
“그건 모르지. 이렇게 된 것 선발대를 최대한 이용해 보는 수밖에.”
미스바가 대답이 없자 상대는 다시 말했다.
“왜? 내가 잔인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용서하십시오.”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지. 잊지 마라. 지금에 와서 선발대의 역할은 미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괜한 연민 따위로 일을 그르친다면 난 그 누구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너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미스바의 눈빛은 암울하기만 했다.
현자는 파천에게 많은 걸 요구했다. 그는 계속적으로 파천을 위험 상태로 몰고 갔다. 자연의 기를 받아들이듯 프리즈마를 내부로 끌어들여 결합을 시도케 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프리즈마를 파천의 내부로 밀어 넣고서는 마구 휘저으며 충돌을 유도하기까지 한다.
그는 대체 무엇을 하고자 함일까?
“세 개의 대침을 모조리 녹여 버린다. 명심해라. 그것이 녹고 프리즈마가 증폭되는 순간, 내가 지시한 대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시행해야 한다.”
파천은 긴장했다. 무엇이 말하길 대침이 모두 녹으면 자신은 소멸한다고 했다. 현자가 비록 방법을 알려 주었다지만 그건 위험천만한 시도였다. 만약 일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자신은 꼼짝없이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일을 시키는 자나 멀쩡한 정신으로 그걸 따르는 파천이나 정상은 아닌 게 분명했다. 현자가 가르쳐 준 건 의외로 간단했다. 인체가 지닐 수 있는 최소한의 억제된 프리즈마마저 완전히 연소시켜 비우는 것. 그것이 어찌 가능할지조차 파천은 의심이 갔다.
그렇지만 현자는 체내에 소량의 프리즈마도 남겨 두지 않는다는 건 인체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했다. 완전한 공의 상태가 되어야만 외부의 프리즈마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해괴한 논리를 파천이 의심 없이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현자의 설명을 다 듣고 나서야 어느 정도는 수긍하게 되었다.
그건 자연검을 터득하면서 깨달았던 심득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현자는 파천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계속적인 유입으로 네 내부는 포화 상태가 되고 여러 번의 시도로 인해 균형과 억제의 작용을 하는 대침들은 모조리 체내에서 사라진다. 대침이 완전히 녹는 시점에 프리즈마는 네 체내에 하나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 그 시점을 맞추는 게 가장 중요하다. 그때 내부에서 폭발하는 힘을 제어하는 건 비어 버린 체내로 끌어들이는 프리즈마로 가능하다.
그 순간만 넘길 수 있다면 넌 위험을 벗어날 뿐만 아니라 언제든 프리즈마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완전히 빈 내부를 향해 일시적으로 프리즈마는 거대한 힘으로 채워 갈 것이고 그 힘이야말로 널 견고하게 할 것이다.
그 동안 외부의 프리즈마와 너는 너도 모르는 사이에 일체화시켜가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것이 내가 도박을 하는 까닭의 전부다.“
이건 파천이 현재 자연스럽게 행하는 프리즈마의 독특한 사용법이 있기에 가능한 방법이었다. 그렇지마 문제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완벽한 균형을 맞추지 못하고 어느 한쪽이 우세를 점한다면 그것만으로도 파천은 위기를 맞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파천은 최대한 마음을 차분하게 진정시켜 갔다. 도박을 하는 심정이긴 했지만 무기력하게 끌려 다니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현자는 끊임없이 파천의 상태에 간섭하며 도움을 주고 있기 까지 했다.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도박이야.’
파천의 내부는 치열하게 들끓여 올랐다가는 식기를 여러 차례 거듭했다. 힘을 끌어들였다가 분출시키지 않고 소멸시키는 반복적인 시도에 대침들은 점차로 작아져 갔다. 언제라도 폭발을 일으킬 것 같아 파천은 조마조마했다.
점차 속도가 빨라지고 유입과 소멸이 반복되는 주기도 짧아져 갔다. 파천의 등과 머리에 대고 있던 현자의 손이 들썩 거리는 걸로 보아 외부로 뻗치는 힘은 생각보다 대단한 것 같았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면 초조함에 고개를 돌려 버렸을 것이다. 현자 역시 긴장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그는 성공을 확신하고 있었다.
‘만약 네가 위험해진다면 날 던져서라도 널 구해내겠다. 해결해 주겠다고 약속했으니 지켜야겠지. 수호자, 그대의 장담은 결국은 이런 식으로 이뤄지는구려. 내가 지금껏 쌓아온 내단을 이런 일에 사용하게 될 줄은 진정 몰랐구려…….’
파천에게는 숨기고 있었지만 사실 현자는 원령체를 수련했던 영자였다. 그는 오랜 기간 동안 시행착오를 거치며 어느 정도의 성취를 이루고 있었기에 파천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그 해결 방법을 제안할 수도 있었다.
언젠가 수호자가 했던 말을 현자는 다시 떠올려 보았다.
‘그대의 내단은 매우 유용하게 사용될 것이다. 지금은 비록 거부하지만 그때는 분명 허락할 것이다. 그때를 대비해 지금 그대를 도운 것임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현자는 그의 말대로 되었음에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파천의 등과 머리에 대고 있던 두 손에서 지금까지와는 달리 찬란한 금빛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그는 두 눈마저 감고 파천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프리즈마의 움직임과 대침의 상태를 민감하게 살피며 내단의 기운을 조절해 갔다.
‘안전 장치까지 마쳤다. 만약 네가 공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실수라도 한다면 내가 지금껏 쌓아 왔던 내단을 이용해 널 구해 줄 수는 있겠지만 나는 무사할 수 없다. 너 또한 한낱 쓸모없는 자로 전락하고 말겠지.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해야 한다. 수호자, 그는 진정 무서운 자다.
케플러! 수호자를 얕잡아 보지 마라. 그는 적어도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치밀하고 무섭다. 난 그가 파천을 선택했다는 것 하나만으로 이 생면부지의 놈에게 내 모든 것을 던지려 하고 있다. 이 사실을 잊지 마라. 만약 네 말대로 그가 적이라면 우리 모두는 너무도 불행한 자들이다.‘
파천과 현자는 내부의 격정과는 달리 표면상으로는 점차로 고용함 중에 잠겨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