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26화 : 파천의 프리즈마 실전 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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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검 – 126화 : 파천의 프리즈마 실전 대결


파천의 프리즈마 실전 대결

비행매소를 떠나는 파천의 심정은 각별했다. 그다지 많은 시간을 머문 건 아니었으나 영계에 들어선 이후 가장 기억할 만한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족쇄처럼 그를 묶고 있던 제약을 벗어 버렸다는 점에서 그는 홀가분한 심정이었고, 이름도 모르는 현자에게 빚을 졌다는 점에서 무거운 심정이기도 했다.
‘지금의 내 상태는 인간계에 있을 때와 같은 조건이 되었다 할 수 있다. 자연의 기를 받아들여 사용하듯이 프리즈마를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만으로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으나…… 이제는 해볼 만하다.’
그는 날아갈 듯 몸이 가벼운 걸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체내에는 단 한줌의 프리즈마도 지니고 있지 않았지만 오히려 충만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파천의 주위에는 아난다와 아레나 권터만이 함께 했다. 아그립바는 파천의 머리에 올라타고는 아까부터 작은 소리로 쫑알대고 있는 중이었다.
“시건방진 자, 제가 뭔데 날 함부로 대하는 거야! 다음에 만나면 그냥 두지 않을 거야. 에이, 짜증 나.”
아그립바는 현자에게 호되게 당한 기억 때문에 심사가 편치 않았다. 파천은 연신 웃기만 한다.
다른 대원들은 미스바의 청에 따라 비행매소에 남겨 두었다. 그들 역시 곧 뒤따라 나올 것이다. 그들이 파천의 앞에 다시 설 때는 예전처럼 나약한 모습만은 아닐 것임을 모두는 직감했다.
파천과 일행은 그날을 기약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남겨 둔 일행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쯤 아난다가 지금껏 참았던 질문을 했다.
“좋은 일이 있으셨나 보군요.”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파천이 제약을 완전히 벗어 버렸다고는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하는 파천을 보며 아레나가 의미 있는 물음을 던졌다.
“네게서 프리즈마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으니 대체 어찌 된 연유야?”
앞서가던 권터가 그제야 느꼈던지 의문을 드러냈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 뭐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모르긴 아난다도 마찬가지. 파천은 씩 웃으며 단 한마디만 했을 따름이었다.
“공의 도리를 절감한 것뿐이야.”
일행은 속도를 붙였다. 그들 중 뒤에 처진 선발대원들을 다시 볼 수 없을 거라 여기는 자는 단 하나도 없었다. 잠시의 어려움은 그들을 더욱 단단하게 결속시킬 것이고 강하게 키울 것이다. 그것을 믿기에 이들은 안심하고 전진할 수 있었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호수를 가로질렀다. 그런가 하면 그 끝이 어디인지 모를 거대한 숲도 단숨에 헤쳐 나갔다. 선발대의 여정은 순조로워 보였다. 남부권의 매소는 더 이상 거쳐가지 않고 대부분 우회하며 지났다.
마지막 떠날 때 미스바가 했던 말을 파천은 기억해냈다. 그녀는 할라스 부족을 통해 연락을 전하겠다고 했다. 유일하게 공간이동 후에도 힘을 상실하지 않는 기이한 부족으로, 공간적 제약이 있다고는 해도 영계에서 가장 빠르게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자들이다. 그들의 합류로 파천 일행은 그 어디를 가도 미스바의 전언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휴식은 지친 심신을 잠시나마 회복시켜 준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마음을 여유롭게 만들어 머리까지 맑게 해준다. 그건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 좀 더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런 이유로 파천 일행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이 멈춘 것은 남부권의 가장 긴 강인 루하스 중류 지역에 인접한 숲이었다.
급하고 빠른 물살을 내려다보며 파천은 심호흡을 했다. 그의 등 뒤에 있던 아레나가 불안하게 서 있는 파천을 불렀다.
“잠시 이곳으로 와 봐. 상의할 것이 있으니.”
그녀는 땅에 금을 그으며 앞으로의 여정을 설명했다.
“남부권의 매소는 이제 다섯 개가 남았을 뿐입니다. 이곳을 모두 우회하면 곧바로 중부권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 전에 우리는 중대한 관문을 거쳐야 합니다. 어디를 향해도 그곳을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남부권과 중부권을 가르고 지나가는 고요의 강 루하스에는 여러분들도 알고 있다시피 무법자들이 터를 잡고 있습니다. 그들ㅇ느 그곳을 지나는 모든 영자에게 한 가지씩의 요구를 합니다. 때로는 루딘을 주고 지날 수도 있지만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결코 건너게 해주지 않습니다.”
“그들의 눈을 피해서 건너면 될 것 아닌가? 하늘 높이 날아서 가면 될 텐데 뭐가 걱정이야?”
파천의 말에 권터가 코웃음 쳤다.
“그리 만만했다면 아레나가 저런 말도 꺼내지 않았겠지. 끝가지 드렁 봐라, 파천.”
“우리를 다른 일반적인 영자들처럼 대해 준다면 다행이지만 만약……. 특별한 의도가 있다면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닙니다. 그들의 감시망은 촘촘해 눈길을 피하기가 쉽지 않고 무단으로 건너려는 시도를 하다간 그들과 적을 지게 됩니다.”
아레나가 걱정하는 자들은 무한계에서 단일 조직으로 치자면 가장 많은 수를 자랑하는 페브론이었다. 그들은 전사들보다 더 전투적인 성향이 강하다.
개개인으로 보자면 별로 대단할 것 없다고 할 수 있으나 그들은 언제나 집단 전투를 즐겨 한다. 그들의 용맹성은 중부권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을 정도이며 강을 건너지 못하게 작정하면 메덴의 수련자라도 포기해야 한다.
“어쩔 수 없지요. 아직은 꽤 남았으니 가면서 걱정해도 늦지는 않습니다. 그것보다는 할라스의 지적이 마음에 걸리는군요.”
얼마 전 할라스의 전령이 다녀갔는데, 그는 강을 따라 가지 말고 동북방으로 길 머리를 잡으라고 했다. 누가 적으로 나설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할라스는 영자들의 특별한 움직임이 있는 곳을 피해 선발대의 방향을 지시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아레나는 아난다의 말에 잠시 생각하는 눈치더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여기서 동북방으로 간다면 곧바로 매소 뮤린에 맞닥뜨립니다. 그곳은 남부권에서 가장 다양한 종류의 영자들이 드나들 뿐만 아니라 예전부터 각종 분쟁이 많았던 곳입니다. 유일하게 펠라모가 공격당한 곳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할라스의 조언을 따르자니 뮤린을 지나쳐야 할 것 같고 강을 따라 오르자니 뭔가 찜찜한할라스이 있다.
“그들이 굳이 방향을 선회하라고 한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권터는 은근히 동북방으로 방향을 잡았으면 하는 눈치였다. 그의 입장에서는 어디를 방향으로 잡은들 무슨 상관이랴마는 쓸데없는 싸움에는 끼여 들고 싶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이 자리에 있는 것도 그리 마뜩치 않은 판이었고, 대체 무얼 보고자 이리 기를 쓰며 다라 붙는지 스스로도 이해불가다.
고집 빼면 자신을 내세울 것 없다. 그리 생각해 오던 터였는데 파천의 몇 마디 말이 그를 붙잡아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아직까지도 미스바가 했던 말에 은근히 동조하고픈 심정이었다. 그런데도 눈 앞에서 말들을 주고받는 이들은 전혀 멈출 기색이 없어 보였다.
속으로 마음을 다스리며 어찌 되어 갈까 지켜보던 권터는 슬쩍 일어나 강을 내려다 보며 섰다. 그가 그러는데도 다른 이들은 관심도 주지 않는다. 뒤로 들리는 소시로 보아서는 파천은 아그립바와 실랑이하고 있고 아난다와 아레나는 두런두런 의중을 나누는 판이다.
권터는 물살이 무척이나 세다고 느꼈다. 저곳으로 뛰어들어 시원하게 몸을 적셨으면 하는 바람도 들었다.
아그립바는 때로는 파천에게 떼를 쓰는 아이처럼 느껴진다. 아니, 때로가 아니라 대부분이 그렇다. 그렇다고 그것이 싫거나 귀찮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다.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신편을 나한테 줘보라니까. 너는 이제 이것 없이도 힘을 사용할 수 있잖아? 그러니 내게 주라, 응?”
아그립바는 이제 내놓고 신편을 원하고 있었다.
파천은 점잖게 타일러도 보고 윽박질러도 보았지만 이내 포기해야만 했다. 아그립바가 하는 양을 보니 이번엔 작정하고 덤벼드는 걸 금세 알아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신편을 쉽사리 건네 주기도 안심이 되지 않는다.
“나한테 줘봐야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아그립바는 몇 마디 말을 하면서도 족히 서너 번은 모습을 바꿨다. 눈알이 핑핑 돌아갈 정도로 요염한 여인의 모습인가 하면 귀여운 옥동자로, 때로는 검의 형상을 취하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결국은 파천이 두 손을 들고야 만다.
“그래, 옛다. 네 마음대로 해라.”
사실은 어느 정도 마음이 놓였기에 준 것이지 선심 쓰듯 먹어치우라고 준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조금은 안심이 되지 않았다. 파천의 손에 출현한 신편의 끝을 아그립바가 잡는 순간 지금껏 대화를 나누고 있던 아난다와 아레나 그리고 흐르는 강물에 하염없는 시선을 두고 있던 권터까지 주목하여 바라본다.
파천의 손에서 신편이 떠나는 순간이었다. 언제 다시 뺏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였을까, 아그립바는 날름 손에 감아쥐고는 멀찍이 떨어져서 희색이 만면하다.
“요놈, 오늘은 끝장을 봐야지.”
아그립바의 의뭉한 말에 파천은 불안감이 고조되어 좌불안석이다. 다시 뺏자니 체면이 서지 않고 내버려 두자니 뭔가 석연찮다.
‘왜 이런 불안감이 밀려오는 건지?’
아그립바가 성공할 확률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나 그것도 도나투스의 단정에 불과하지 확정적인 근거가 있는 예측은 아니었다.
“내가 네 기운을 빨아들이지는 못하나 내가 네 안에 들어갈 수는 있다. 히히, 요놈아, 그건 몰랐지?”
파천은 순간 아차, 하는 심정이 된다. 아레나는 부지불식간에 소리쳤다.
“아그립바, 그러면 안돼.”
그러나 늦어도 한참은 늦었다. 신편을 든 손이 새하얗게 변하는가 싶더니 아그립바의 작고 통통한 몸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바닥으로 툭 떨어진 신편은 모두의 눈을 아프게 찔렀다. 아직도 어찌 된 연유인지를 채 파악해내지 못하고 멀뚱 거리며 쳐다보고 있을 따름이다. 아레나는 탄식했다.
“바보같이! 저런다고 신편의 기운을 흡수할 수 있는 게 아니건만.”
아난다도 어처구니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영혼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지만 생명체로 보아 줄 수 있는 아그립바. 더군다나 이들에게는 엄연히 선발대의 한 자리를 꿰차고 있는 동지로 여겨지고 있다.
좀 엉뚱하고 사고뭉치에다가 고집스럽고 제멋대로이긴 하지만 귀여운 선발대의 청량제 노릇을 해오지 않았던가. 신편과 아난다를 번갈아 쳐다보던 파천이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아난다가 한숨을 내쉰다.
“갇혀 버린 겁니다. 봉인이 된 셈이죠. 신편의 단단한 각질 안에 갇혀 버렸습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돌발적인 상황에 모두는 망연자실했다. 파천이 손을 내밀자 신편은 그의 손 끝에 달라붙었다. 달라진 건 하나도 없었다. 매끄러운 윤기가 도는 것도, 들고 있어도 무게조차 느껴지지 않는 것도 예전과 다름이 없었다.
“이 안에 아그립바가 들어갔다니……. 믿을 수가 없군. 어떻게 다시 꺼낼 수 있는 방법은 없나?”
아난다는 고개를 저었다.
“원래가 스스로 한 봉인은 스스로 풀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신편을 훼손시킨다면 아그립바도 무사할 수 없습니다.”
아그립바와 이어져 있는 시간의 접촉점이 순간 왜곡되는 듯한 느낌을 파천은 가졌다. 그러나 그건 그리 길지 않았다. 낭랑하게까지 여겨지는 소리가 신편에서 울려나왔다.
“쳇, 계획대로 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지,”
봉인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팽팽한 균형은 누구의 승리라고 할 수 없었지만 아그립바가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만도 아니었다. 게다가 당장에 그는 자신이 이겼다는 걸 모두에게 보이기라도 하듯 변신을 시도했다.
설마 하던 모두는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의 아그립바의 모습을 대하자 파천은 어찌된 연유인지를 몰라 어안이 벙벙했다.
“신편은?”
아그립바의 모습이 멀쩡하게 눈앞에 버티고 있으니 신편이 그를 삼킨 것인지 그가 신편을 먹어치운 것인지 가리기가 난감했다. 그럼에도 아그립바는 실패라고 투덜댄다.
“역시 여간내기가 아니란 말야.”
신편은 보이는 현상만으로는 현실에서 사라진 것이라 파천은 여겼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파천이 손을 내밀자 다시 신편으로 화해 손에 달라붙는다.
“하하, 묘하게 되었군. 둘의 동거가 시작된 건가?”
그랬다. 신편이 되기도, 아그립바가 되기도 했지만 둘 모두는 어쨌든 무사했다. 생각지도 못한 이득을 파천에게 남기고서.
“결국 제 꾀에 제가 속아 넘어간 격이군. 아그립바는 이제 신편을 극복하지 못하고서는 파천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고 말았어.”
친절하게 아레나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파천도 실감하고 있는 바였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가 의도했던 건 아니지만 어지 보면 그로서는 하동 손해 볼 일은 아니었다. 때로 고집을 부려 파천을 난감한 지경에 몰아붙일 수도 있을 아그립바의 기행을 사전에 봉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도나투스가 그렇게도 봉인하려 했던 아그립바가 생각지도 않게 파천의 손아귀에 떨어져 버린 것이다.
아그립바가 고함쳤다.
“너 설마하니 나를 네 팔 속에 집어 놓고 다닐 생각은 아니겠지?‘
“필요하다면.”
다시 제 모습으로 돌아온 아그립바의 얼굴은 멀쩡히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애처로워 보였다. 세상의 영물들을 모조리 끌어 모아 제 왕국을 건설하겠다고 기염을 토하던 얼마 전의 당당함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아그립바는 처연한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몇 번이나 파천에게 당부를 했다. 그가 요구하는 건 매우 간단했다. 자신이 원해서 파천에게 속하기 전까지는 강제로 가두지 말아 달라는 것, 이것 한가지였다.
파천은 속으로냐 웃을 수 밖에 없었지만 겉으로는 매우 진지하게 대했다.
“당연하지. 너를 그렇게 함부로 대할 수 있겠느냐? 너는 여전히…… 내게는 친구인걸.”
파천의 다짐이 있고 나서야 아그립바의 표정이 풀렸다. 그는 작은 조막손을 움켜쥐고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언젠가는 이놈을 먹어치우고야 말겠어. 그러기 위해서라도 영물들을 속히 만나야 하는데, 그래야 힘을 기를 것 아냐.”
아그립바의 뜻하지 않은 재난 때문에 시간을 경과한 일행은 서둘러 길을 재촉했다. 그들은 현재 동북방으로 방향을 잡고 진행하던 중이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할라스 부족의 전령이 그들에게 와 한 가지 정보를 주고 갔다.
메덴의 원탁에서 일부 전사단과 펠라모의 회합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내놓았다는 것이다.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불법적인 단체로 규정하였고, 무한계의 이상에 정면으로 위배되기에 메덴의 확고한 의지는 해산한 것을 종용한다는 매우 강경한 입장을 밝힌 것이다.
이렇나 소식을 접한 아레나는 펠라모 회합의 배후에 메덴이 결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일단은 뒤로 미뤄 두고서 앞으로 그들 간에 격한 대립이 있지 않겠느냐는 신중한 에상을 내놓는다.
아난다도 걱정이 되기는 했다. 메덴에서 이런 식으로 공식적인 입장을 밝힌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현 원탁의 중심은 수련자 치앙마. 그의 채워지지 않는 야심을 생각하자 다른 저의가 숨어 있는 것이 아닌가 염려가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메덴은 무한계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느 수련자들의 모임이다. 그들이 이런 식으로 사건에 접근한 예는 예전 대적자들을 상대하기 위해 무한계 전체에 공표한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다. 그만큼 메덴의 원탁이 이번 일을 중대하게 바라본다는 걸 의미했다.
어쨌든 이 일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살얼음판 같던 중부권에 더 살벌한 냉기류가 흐르 ㄹ것은 자명했다. 팣너은 아난다 등에게 정색하며 말했다.
“혜능, 저번에 네가 했던 말을 이제는 결정할 때가 온 것 같다.”
별 연관 없이 던져진 말은 모두를 이해시키지 못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멈춰선 그들은 파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선발대는 이제부터 내가 이끌겠다. 내 결정에 따라 줬으면 좋겠어.”
예전에 이미 뜻을 밝힌바 있던 아난다와 아레나였으니 크게 당황할 말은 아니었지만 하필이면 왜 지금 시점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궁금증은 생겼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지.”
아레나를 빤히 쳐다보며 파천은 당당하게 말했다.
“내 일이니까. 너희들의 도움을 받아 여정을 하기는 하지만 결국엔 마지막까지 담당해야 하는 건 나니까.
지금까지는 수동적으로 참여하는 게 당연했지만, 지금부터는 설사 역부족이라 하더라도 내 힘으로 해보이겠다. 최근의 상황이나 앞으로 예견되는 것 역시 그리 좋지 않으니 언제 혼자가 되지 말란 법이 없잖아.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내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데 익숙해져야겠지. 그래서 내린 결정이다.“
다른 이들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도록 하세요.”
콰콰쾅
아난다의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는 듯 때를 맞춰 폭발음이 들려 왔다. 모두의 시선이 소리가 난 곳을 향해 돌려졌다. 그때 파천은 이미 신형을 날려 가고 있었다.
“어서 따라와.”
파천의 신형은 빛살처럼 허공을 쪼개 갔다. 아레나가 감탄한다.
“뭐가 저리 빨라?”
“예전의 모습을 되찾으신 것 같네요. 저 자신감까지도……. 우리나, 권터가 다가왔다. 그들의 아래쪽은 거대한 웅덩이가 입을 쩍 벌리고 흉하게 패여 있었다.
그 웅덩이로부터 시작된 고랑은 한 영자의 앞에서 끝났다. 풀빛 머릿결은 바람이 부는 대로 이리저리 흩날리고 있었다. 위에서 봐서는 그 자의 용모를 분간하기 힘들었다. 파천은 다른 이들에게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웅덩이 근처에 내려선 파천은 위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큰 규모에 혀를 내둘렀다.
파천의 시선이 아마도 이 웅덩이를 만들었을 것 같은 상대의 얼굴을 찾았다. 눈으 ㄹ아래쪽으로 내리깔고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상태로 돌이 되었던가? 파천의 옆으로 아레나와 아난다, 권터가 내려섰음에도 상대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금속제로 된 경갑을 가슴에서 어깨까지 두르고 오른손에는 번개의 형상을 한 검을 땅에다 내려뜨리고 있었다.
“뭐 하는 거지? 상처를 입었나?”
파천은 웅덩이가 격전의 결과물이란 걸 알고 있었다. 아마도 적은 흔적 없이 소멸했거나 도주했을 터, 주변에서는 훼손된 영체조자 발견되지 않는다.
“묵념하고 있는 것 같은데. 죽은 자를 기리는가 보지.”
아레나는 별 생각 없이 그렇게 말하다 화들짝 놀란 표정이 된다. 권터가 먼저 소리쳤다.
“빨리 여길 벗어나.”
그는 채 말을 끝맺지도 않고 몸을 날려 갔다. 아레나도 마찬가지였다.
“여기 있으면 골치 아파져.”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파천은 아난다를 쳐다보았다.
“그러는 게 좋을것 같군요.”
아난다 역시 같은 뜻인 걸 보니 심상치 않은 것 같았다. 아난다가 막 신형을 날리려는 찰나.
“잠깐, 왜 그러는 지는 가르쳐 줘야 할 것 아닌가?”
“일단은 가시면서…….”
“가긴 어딜 간단 말인가!”
파천은 천둥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뭐야, 저놈은?“
귀가 멍멍했다. 눈을 바라보니 조금 전 그 큰소리를 지른 인물인가 싶을 정도로 느낌이 부드러웠다. 이상한 건 아난다의 태도였다.
“으음, 이것 낭패로군.”
그런 아난다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파천은 상대를 마주 쏘아보며 천천히 말했다.
“조금 전 그 말은 무슨 뜻이지?”
“ㄴ가 허락하지 않는 한 너히들은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 뜻이었나? 그건 네 뜻은 아니지. 자, 그만가지, 혜능.”
파천 역시 신형을 날리려 했다. 그 순간 파천은 눈앞이 환해진다는 느낌에 놀라 몸을 빼냈다.
쩌저저정
뭐가 어찌된 연유인지도 모를 만큼 상대의 공격은 급작스러웠다.
아난다 역시 신형을 반대쪽으로 움직여 놓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파천과 아난다가 서 있던 땅은 파천이 땅을 딛고 손을 쳐들어도 될 만큼 깊이 패여 있다. 이때 먼저 떠났던 아레나와 권터가 돌아와서는 난처한 표정을 했다.
“누가 하겠는가?”
상대의 그 말은 위압적이라기보다는 친근한 속삭임처럼 들렸다
파천은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했다. 상대의 돌발적인 행동 때문이 아니었다. 무슨 연유로 일행이 저런 태도를 보이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처럼 강자란 말인가?’
그러나 그런 이유가 아님이 곧 밝혀졌다.
“하필이면 저 자를 여기서 만나다니…….”
“대체 누군데 그래?”
“누가 하겠느냐고 물었다. 모두 하겠는가?”
“누구냐니까.”
재차 독촉한 파천의 질문에 아레나가 간략하게 언급했다.
“싸움을 밥 먹는 것보다 좋아하는 놈이야. 자기를 이기면 스승으로 삼고 이길 때까지 따라니면서 괴롭히지. 결국엔 자길 가르친 자를 소멸에 이르게까지 만드는…… 별로 상종하고 싶지 않은 놈이야.”
“누가 하겠냐고 내가 지금 물었다.”
“시끄러워!:”
파천이 빽 소리 질렀다. 한 손에 든 검을 파천 쪽으로 들어올린 그 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로 결정되었다.”
파천은 기가 막혔다. 그러나 이때 아레나가 파천 앞으로 나서며 빠르게 말했다.
“발도바, 네 상대는 나, 아레나다. 혼동하지 마라.”
파천은, 그렇게 귀찮으면 소멸시키면 되지 않는가, 하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네가 하겠다고?”
“그래.”
“아레나라면 무명은 아니군. 나 발도바, 아레나와 싸운다. 네가 이기면…….”
“네 스승이 되고 네가 이기면 소멸을 당하겠지. 말 안해도 알아.”
“그래, 날 이기고 소멸시켜도 좋다.”
“그야 당연하지, 너와 엮였으니 결국 소멸시키는 수밖에 없게 됐군.”
발도바에 대해서 조금만 자세히 알았다면, 아니, 대충 소문만 들었다 해도 조금 전 도망치지 않은 걸 파천은 분명 후회했을 것이다. 찰거머리도 이런 찰거머리가 없다. 오직 승부에만 집착하는 떠도는 검사 발도바. 자신보다 강한 자를 용납하지 않고, 지면 상대의 제자가 되어 그를 이길 때까지 승부를 결한다.
그것가지는 이해할 수 있다. 만약 자신이 져서 소멸을 당하게 되면 그는 몇 생을 소모해서라도 복수를 하고자 쫓아다닌다. 얼마나 지독하게 쫓아다니는지 상대는 결국 대결을 승낙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또 이겼다가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그 짓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그에게 져서 소멸 당해 주는 것 밖에 없다. 그렇지만 누가 있어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려 하겠는가. 결국엔 그를 만나면 무조건 피하고 보는 것이다.
아난다의 설명을 들은 파천은 기가 찼다. 아레나가 대신 나선 것은 파천에 대한 배려였다. 저런 찰거머리로 인해 심력을 낭비하지 말라는.
둘은 슬슬 싸울 준비를 했다. 파천은 머리를 짚으며 아레나의 앞을 막았다.
“아레나, 나도 자존심이 있어. 저 자는 내 몫이야. 그리고 저런 놈은 내가 처리하는 게 낫다.”
아레나는 파천이 쉽게 뱉어내는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간단히 말할 수 있는 상대가 아냐.”
“그건 나도 알아. 그렇지만 나도 그리 만만하지는 않단 말이야.”
아레나는 파천의 눈을 뚫어질 듯 쳐다본다. 불굴의 투혼 정도는 아니라 해도 결코 쉽게 물러설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파천! 이건 장난이 아냐. 넌 할 일이 있잖아.”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내가 하려 하는 거야. 언제까지나 보호받기만 해서는 내 체면이 안 서지. 그리고 지금 나는 저 자와 꼭 싸워 보고 싶다. 이길 자신도 있어.”
아레나는 우물쭈물하며 아난다의 눈치를 살폈다. 아난다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서야 뒤로 물러 선다.
“좋아, 대신 꼭 이겨야 한다.”
“그럼. 앞으로 나는 그 누구에게도 적어도 패배는 당하지 않을 거다. 패하는 순간이 내 마지막이 될테니까 말야.”
각오를 새롭게 한 파천이 심호흡을 한후 상대를 바라보고 섰다.
“네가 할 텐가?”
“그래, 내가 한다, 발도바. 자, 와라.”
파천이 자세를 가다듬는 모습을 보며 발도바는 싱긋 웃었다.
“좋은데. 아주 좋아. 오랜만에 흥미로운 상대를 만났군.”
‘놈! 그 웃음을 울음으로 바꿔주마.“
파천은 나름대로 계산이 서 있었다. 자신의 실력을 가늠해 보고 부족한 점이 무언지, 시급해 채워야 할 부분이 뭔지를 실전을 통해 헤아려 볼 참이었다. 들어 보니 발도바란 사내라면 적당한 상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발도바는 파라슈가 아닌 검을 들고 있었다. 검을 무기로 사용하는 자들은 무한계에서 그리 흔하지 않다. 전사의 대부분은 파라슈를 쓰고 다른 이들도 맨손이 태반이다. 번개의 형상을 축소시켜 놓은 듯한 검신이 무척 이채롭다.
발도바는 서서히 검극을 하늘을 향해 세웠다. 파천은 두 손날을 앞으로 슬쩍 내밀었다. 발도바가 한 소리 기합성을 내지르며 하늘로 솟구치는 순간 파천도 따라 붙었다. 발도바의 검이 아래를 향한다고 느낀 순간 빛은 폭사해 왔다. 번개가 치는 걸 가까이서 본다면 이럴까 하는 심정이었다.
파천은 허공에서 수십 번이나 위치를 바꿔가며 발도바의 주변을 어지럽게 했다.
:무슨 짓이냐? 싸우지 않을 참인가?“
정면 대결만을 벌여 왔던 발도바로서는 파천의 행동을 싸우지 않으려는 것으로 오인했다.
“아니, 네 놈에게 새로운 걸 보여 주려고 그런다. 안계를 넓혀 주로.”
파천은 서서히 분신을 시도했다. 멀쩡히 보고 있는 눈앞에서 하나씩 불어나는 파천의 몸은 여덟 개가 되고 나서야 멈추었다. 발도바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여덟의 파천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마음껏 해보시지.”
발도바는 잠시 머리가 복잡했던지 인상을 찡그렸다. 그는 눈앞의 현상이 단순한 눈속임이 아님을 직감했다. 게다가 파천에게서 몰려나오기 시작한 프리즈마의 압력이 점차로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음에 긴장했다.
‘이놈은 대체 뭐란 말인가?’
한 번도 싸워 보지 않은 유형을 만난 것이다. 게다가 상대는 가만 서 있을 따름이었는데도 그 압력은 점차 그 자신의 움직임을 봉쇄하기까지 했다.
속으로 께름칙함이 척척 감겨져 오자 그는 떨쳐 내기라도 하려는 듯 기세를 돋궈 보았다. 고함을 지르고 검극을 힘차게 하늘로 향해 세웠다가 힘을 다해 사방을 향해 내뻗는다. 그러자 공간을 갈가리 찢어발기는 섬광이 사방을 마구 할퀴고 지나간다.
파천의 여덟 신형은 신바람이 도져 사방을 향해 튀듯 움직이는데 그 빠름이 족히 눈 깜짝 할 새다. 섬광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지, 공간에 녹아들기라도 했는지 파천은 어느덧 분신을 하나도 합하고는 발도바의 뒤쪽에 떡하니 서 있었다.
본능적인 느낌으로 발도바가 흠칙하는 순간에 파천의 손이 냅다 등을 후려친다.
그린 큰 힘을 쓰지 않았으나 앞으로 비틀거리며 고꾸라질 듯하다가 반듯이 몸을 세운 발도바. 그는 뒤쪽을 노려보던 파천을 공연히 윽발질러 본다.
“네 놈이 재주가 있다마는 그것만으로는 안 될 것이다.”
무슨 작심을 하여 힘을 더 돋우기로 한 것 같았다. 번개의 형상을 한 검신을 타고 밖으로 두 자나 더 뻗는 빛 뭉치가 아래위를 빠르게 오간다. 그러더니 하늘로 쭉 뻗어 올라가는데 그 기세가 만만찮아 보였다.
파천은 조금 전 어느 정도는 이득을 챙길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사실 지금 그가 원하는 건 상대를 이기는 것만이 아니라 프리즈만의 운용을 여러모로 알아보는 것. 그러니 급할 것도 서두를 것도 없었다. 상대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사뭇 긴장이 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바닥을 깊이 파 거대한 웅덩이를 만든 바로 그 공격이겠거니 했다.
파천은 프리즈마를 내부로 끌어들였다. 충만한 기운은 넘실대며 전신을 내달린다. 경맥이나 혈맥 따위의 정해진 경로가 아닌 그 모든 걸 포함하고 있는 충만함은 외부와 서서히 연결되어 가는 것처럼 여겨졌다. 자기 몸이 자기 것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은 신비스럽기 그지없는 체험이었다.
짧은 순간의 흥분은 쾌감을 넘어 무념의 상태로 몰아가기까지 한다. 한 손만 척 내밀어도 산 하나는 가뿐히 허물 것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마음속에 가득 차 오른다. 그런가 하면 전신을 산산이 부셔 버리고 싶다는 충동도 간간이 느껴진다.
파천은 현재 자신의 몸에서 은은한 금빛 광채가 내뿜어져 나오는 것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언젠가 천마가 보더니 금강신이라 했던 바로 그 현상이었다.
스파파파팟
파천의 신형이 하나의 위치에 자리잡지 않고 빠르게, 규칙 없이 마구 공간을 휘저어 놓자 발도바는 순간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 형체가 채 맺히지 않는 빠름은 그를 둘러싼 전 공간에 그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한창 끌어올려 긴장시켜 놓은 힘을 어떻게든 뿜어내야겠는데 그 목표가 분명치 않으니 곤혹스러워 한다.
이때 파천은 엉뚱한 지경에 처해 있었다. 오장 육부와 혈맥, 뼈로 되어 있는 인체에 무슨 막힘이 이리 많을까 싶게 그의 전신 곳곳에서 무언가가 터져 나가는 듯한 느낌이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 파천의 지나친 착각만은 아닌 것이 실제로도 퍼퍽, 하는 소리가 전신 곳곳에서 터져 나온 것이다.
사방을 휩쓸고 다님은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 파천은 이 순간 제 의지로 제 몸을 다스릴 수 없는 지경에 처하고야 말았다. 이런 걸 알리 없는 발도바나 지켜보던 일행은 번개가 무색한 파천의 빠름에 감탄을 넘어 아연 넋을 놓고야 만다.
이래서야 무슨 싸움이나 대결이 성립되겠는가. 발도바는 일단 상대의 움직임, 그 사정권 밖으로 몸을 빼내리라 작심한다. 그가 검으로 원형을 그리며 몸을 솟구치는데 어느새 단단한 방호막이 그의 주변을 두르고 있다.
파파팟
“헉.”
이리저리 퉁겨나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발도바는 아연실색한다. 이제 보니 그가 지금 점유하고 있는 공간을 제외한 외부는 단단한 껍질을 씌워 놓은 듯 비집고 들어갈 작은 틈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화가 났다. 분노는 그에게 전력을 쏟아내라고 유혹해냈다.
“부셔 버리겠다1”
쩌저저정
단단한게 언 빙산이 일순 갈라지는 듯한 소리. 그것은 그의 검 끝에서 기인했다. 푸르고 붉은 기운이 검 끝에 몽우리져 치열하게 부딪치는 것 때문이었다. 그건 점차로 커져 가더니 머리통 몇 개를 합쳐 놓은 크기가 된다. 지켜보던 아난다가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발도바가 천상계의 신장들과도 인연이 있었던가?”
발도바의 검 끝에 맺힌 기운은 누가 보아도 예사롭지 않았다. 기운 내에서 치열한 부딪침이 있음에도 그 형태는 비스듬히 눕히고 이어 횡으로 전진시키며 털어낸다.
원형의 기운이 검이 지나간 궤적의 연장선을 따라 전면을 향해 빠르게 튀어나갔다. 파천은 아직도 꿈속을 헤매는 양 상황을 인식치 못하고 있었다. 어찌 싸움에 임해 그럴 수 있는지조차 이해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자신을 향해 발도바의 야심찬 일격이 맹렬한 속도로 부딪쳐 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충돌의 순간은 예상보다 더뎠다. 주변을 엄밀하게 가두고 있는 파천의 움직임, 거기서 파생된 기운들이 단단한 막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발도바가 뿜어낸 원형의 기운이 전진하는 걸 일정 지점부터 방해했기 때문이다.
새빨간 기운이 원형의 표면에서 형성되는 걸로 보아 두 기운간의 힘 겨루기는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 같았다. 달군 쇠를 차가운 물에 담근 듯한 치지직, 하는 소리가 연신 사방으로 흩어져 간다. 발도바는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는다. 재차 힘을 결집해 기운을 형성하고 또 다시 떨쳐낸다.
이러기를 수 차례, 그를 가두고 있는 막이 점차 엷어져 가는 것인지 원형의 기운이 서서히 공간을 넓혀 갔다. 파천의 움직임이 멈춘 것은 발도바가 여섯 번의 공격을 끝낸 시점이었다. 파천을 둘러싼 금빛 광채가 이제는 짙어져 금으로 만든 조각상을 보는 것 같이 되었을 때였다.
분명한 공격 목표가 드러나자 발도바의 검극이 허공에다 기묘한 선을 그려 원형의 기운을 유도해 갔다. 전진을 방해하던 과중한 압력이 사라지자 원형의 기운들은 발도바의 의도대로 바른 속도를 내며 파천을 공격해들었다.
슈슈슈슈슛
여섯 개나 되는 원형의 기운이 파천을 향해 일시에 집중된다. 피할 수도, 피할 의지도 없는 파천은 위력조차 없는 적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었다.
콰콰쾅
연속된 폭발음은 파천의 전신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어졌다. 파천의 신형이 춤추듯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 보였지만 심각한 충격 속에서도 전혀 훼손되지 않는 건 뜻밖의 일이었다.
이때 파천은 오히려 발도바가 선사한 충격 때문에 정신을 차리고 있는 중이었다. 한여름 찌는 듯한 더위에서 잠깐 졸다 뜻밖의 소음에 화들짝 놀란 듯한 그런 표정이 된 파천.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의식이 잠시 끊어졌다 다시 이어지고 있음은 인식하지 못했다. 내부가 말할 수 없이 상쾌하다는 느낌과 내리던 비가 급작스레 개인 후에 시야가 무척 깨끗해진 듯한 유쾌함이 그의 기분을 안정시키고 있을 따름이었다.
파천은 발도바의 어이없어 하는 표정을 무시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
“자, 어서 시작해라.”
파천은 조금 전의 상황을 전혀 기억해내지 못하고 이제 막 발도바와 마주선 사람처럼 행동했다. 발도바는 지금 눈 앞에서 벌어진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당황한다.
‘아직까지…… 저렇게 쉽게 내 공격을 막아내는 이를 본 적이 없다. 이건…… 꿈이야.’
“네가 먼저 하지 않겠다면 내가 하겠다.”
파천은 그렇게 말하고는 얼이 빠져 있는 상대를 향해 다짜고짜 무찔러 들어갔다. 발도바는 아직도 혼란한 정신을 채 수습하지 못했지만 이대로 넋을 빼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지 검을 고쳐 잡는다.
그걸 본 파천이 손바닥을 전면으로 향한 채 밀어내는 듯한 동작을 취했다. 지금 파천은 무공을 펼치고 있었다. 자연의 기가 아닌 프리즈마로 대체되긴 했지만 그는 지금 분명 장력을 쏘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파천의 손에서는 푸른 프리즈마의 덩어리가 형태도 갖추지 않은 채 뿜어졌고 그건 곧장 발도바를 위협했다.
발도바가 검을 휘두르는 걸 본 파천은 생각했다.
‘너희들이 무시하는 인간의 무공으로 상대해 주겠다.’
파천은 방금 펼친 공격 정도로 발도바를 어렵게 하지는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건 시작이었다. 상대와의 간격을 좁혀 가며 파천의 두 손이 연신 허공을 휘저어 놓는다. 그의 손과 발이 동작을 만들어 갈 때마다 광포한 기운들이 사정없이 뿜어진다.
파파파팡
발도바는 놀라운 집중력으로 공격들을 죄다 막아내고는 있었지만 뒤로 접차 밀리는 것만은 막을 수 없었다. 압력과 속도가 시간이 지날수록 가파르게 상승하자 그의 손은 점점 어지러워져 갔다. 이대로 가다가는 승부는 뻔해 보였다. 그렇다고 달리 몸을 빼낼 시간마저 파천이 허락하지 않고 있으니 그로서도 답답한 노릇이었다.
파천은 여유 있게 상대를 몰아붙여 갔다. 전면에 있는가 했더니 후면으로 돌아가고 다시 머리 위에서 내리누른다. 파천의 움직임은 발도바로서도 불가해한 것이었다. 숨 돌림 틈 없이 몰아가고 있는 파천의 공격은 자연검의 위력이었다. 프리즈마를 이용한 자연검. 무형의 프리즈마를 유형화해서 다양한 형태로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영자들의 공격 수법은 파천이 터득하고 있는 자연검과 형태면에서 동일했다. 파천은 현재 자신이 펼치고 있는 공격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다. 발도바는 힘겨워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모조리 막아내고 있지 않은가.
‘힘이 부족하다.’
작은 힘이라도 속도가 빠르면 위력적이다. 빠르지 않더라도 강력하면 위협적이다. 빠르지 않고 강하지 않다 하더라도 상대의 예측을 허무는 변화를 숨기고 있으면 효과를 볼 수도 있다. 그 모든 걸 지니고 있다면 절대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파천은 자신의 상태를 냉정하게 가늠해 보았다.
‘힘도 속도도 변화도 기대에 못 미친다.’
빠르기에 중점을 두자면 힘이 달렸고 강력함을 주로 하려면 프리즈마 형성에 시간이 걸렸다. 변화는 경험 부족으로 다양하지 못한 건 당연했다.
‘결국엔 전투 경험을 더 쌓는 길 밖에 없다.’
파천은 수련을 쌓을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어쨌든 지금은 상대하고 있는 발도바를 꺾는 게 선결 과제였다.
파천이 예상보다도 더 강한 것 같자 아난다와 아레나는 흡족해한다. 권터는 솔직히 좀 놀라고 있는 실정이었다. 저번에 자신과 대결할 때는 신편의 위력 때문이라고 쳐도 지금은 본신의 능력만으로 상대를 곤경에 빠트리고 있으니 이제는 파천의 실력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아직은 이대로 인정한다는 게 용납되지 않는다. 권터의 눈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생령이라 무시하는 마음도 있었으나 지금은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고는 해도 생령이 파천에게 자신이 뒤진다는 걸 인정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저 자식, 갑자기 왜 저리 강해진 거야?’
시간이 지날수록 파천의 동작은 그가 보기에도 종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그 변화 또한 예측하기 쉽지 않았다. 권터가 긴장하는 것만큼, 아니 그보다도 더 발도바는 힘겨워하고 있었다.
“이, 이 빌어먹을 생령 놈이…….”
연신 욕설을 뱉어내면서 간신히 버티고 있는 모습이 일견 애처로워 보일 지경이 되었을 때였다. 파천의 손이 합장하듯 모아졌다가 연이어 떨어진다. 발도바의 사방에서 그가 손 안에 쥐고 있는 검과 같은 형상의 프리즈마가 수없이 생겨나는가 싶더니 발도바를 향해 소리도 없이 직격했다.
“헉.”
발도바는 기함했다.
“핫.”
피할 여유는 없었기에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프리즈마를 결집해 방호막을 쳤다.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프리즈마의 기운은 매우 두터워 보였지만 그것만으로 파천의 공격을 온전히 막아내기는 힘들어 보였다. 지켜보고 있던 자들은 파천의 승리를 예감했다. 눈마저 질끈 감은 발보바에게 파천의 조용한 말이 전해졌다.
“이번엔 네가 공격할 차례다.”
슬며시 두 눈을 뜬 발도바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 것만 봐도 조금 전 그가 얼마나 긴장했었는지를 알게 해주었다.
‘저놈이 미쳤나?’
발도바는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을 잘못 들었지 않나, 의심했다. 승기를 잡은 상황에서 저런 여유를 부리는 파천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권터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보니 사방에서 모여들던 검이 허공에서 딱 멈춘 채 더 이상 전진을 포기했고 부르르 떨다 사라지고 만다.
“파천, 대체 뭐하자는 거냐?”
아난다는 파천의 의도를 짐작하고는 빙그레 미소 짓고만 있다.
‘파천 님이 드디어 본신의 힘을 제대로 사용하실 수 있게 되었구나. 그렇지만 아직은 익숙지 않아 부족한 감을 느끼셨겠지. 아마도 발도바와의 실전을 통해 스스로의 능력을 점검하려는 듯싶다.’
아레나는 파천과 발도바의 대결을 흥미 있어 했다.
“파천, 잘하는데!”
아레나의 칭찬에 파천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발도바의 지금 심정은 말이 아니었다. 생령에게 밀리는 것도 억울한데 이런 조롱을 받고 있으니 참담하기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그가 조롱이라고 느끼는 건 당연했다. 조금 전 상황은 분명 승부를 끝낼 수도 있는 기회였다. 발도바로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건 분명 사실이었다. 전에 같으면 지금의 상황에서 파천을 스승으로 삼겠다고 했어야 옳았다. 그렇지만 그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생령을 스승으로 삼았다면 지금껏 쌓아온 이름은 땅에 떨어진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꽤나 대단한 걸로 착각하고 있었다. 영자들이 승부를 피하는 것이 귀찮음이 아닌 두려움에서 기인한다고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네 놈을…… 네 놈을 처참하게 패배시키겠다. 감히 날 조롱하다니…….”
치를 떠는 발도바를 보며 파천은 고개를 갸웃했다. 친근한 미소까지 띠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진정 네게 감사한다. 너와 후회 없는 한판 승부를 결하고 싶다. 자, 오너라.”
파천의 말에 오히려 분기탱천한 발도바는 앞뒤 가리지 않고 전력을 쏟아내리리라 작정한다. 그에게는 아직 남겨 둔 비장의 수가 있었다.
지금껏 그는 참으로 다양한 종류의 영자들을 스승으로 섬겨 왔다. 그건 다시 말해 그 많은 수의 영자들을 소멸시켜 왔다는 의미와도 같다. 그들의 비기들을 하나씩 배워 가며 지금의 악명을 만들어 왔던 것이다.
“놈! 후회하게 해주겠다. 네 놈을 짓이기고 조각내 무한계 전역에 흩어 놓고야 말겠다. 나 발도바를 우롱한 죄가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해주마.”
‘말은 그럴 듯하군. 저렇게 격분할 정도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나?“
발도바는 비장의 수를 쓰기 위해 준비를 했다. 웬만해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수법이란 건 그만큼 위력이 뛰어나다는 걸 위미하며, 그가 낼 수 있는 최고의 힘이란 뜻도 된다. 파천도 나름의 시도를 할 참이었다.
‘무공의 형태를 지니는 건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동안 생각해 왔던 걸 이번 기회에 써먹어 보자.’
파천은 영자들의 영력을 사용하는 형태가 자연검과 흡사하다는 걸 발견한 이후로 비록 생각만이었지만 이것저것 자신에게 적용시켜 보았다. 그러나 아난다의 화신체를 보고 나서 그리고 아그립바를 만난 이후로 한 가지 영감을 얻었다.
발도바의 검이 하늘로 향해 곧추세워지는 것이 시작이었다.
“만약 이것마저 받아낸다면 내 너를 스승으로 삼겠다.”
비장감마저 느껴지는 발도바의 한마디.
파천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외부가 아닌 내부로 눈을 돌렸다. 프리즈마가 오고 감이 자유롭게 느껴진다. 언제든 채울 수 있고 연결을 시도할 수 있다. 결합의 형태로나 원형의 형태로 사용함도 가능하다. 손끝이 찌릿지릿할 정도로 프리즈마를 충만하게 채웠다.
혈관이 팽창한 것일까? 묘한 흥분감이 전신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피부가 근질거릴 정도로 그 힘은 거대하게 여겨졌다.
“난 지지 않는다. 연유도 모른 채 모든 걸 강탈당해야만 했던 우리들. 이제는 갚아 줄 것이다.”
파천의 각오는 그 혼자만의 것일 수 없었다. 짧은 생의 기회마저 도둑맞은 모든 인간들을 대신한 분노이자 한풀이였다. 그 대상이 눈 앞에 있는 발도바가 될 순 없을지라도 이유가 분명한 적개심은 영계에 속한 다른 영자들에게도 조금은 향하고 있었다. 인간을 경시하고 천대하는 영자들의 오만함이 파천의 내부에 강한 반발로 잠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보여 주겠다. 너희들이 무시하는 연약한 인간의 힘을. 우리 삶을 송두리째 뺏어 버린 자들에게 그들의 선택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나를 보여 주고야 말겠다.”
발도바는 냉소했다.
“짓밟힌 벌레의 꿈틀거림인가. 인간계가 없어진 건 약자들이기 때문이다. 힘이 없어 스스로를 지키지 못했으니 누굴 원만하겠느냐.”
발도바의 쥐위로 프리즈마의 기운이 힘차게 소용돌이친다. 발 밑에서 시작된 움직임은 용틀임하며 머리끝을 지나쳐 검 끝으로 이어졌다. 검의 주변에는 좀더 세밀하고 강한 기운이 집중되는 것 같았다.
팔에서 비롯된 기운은 회오리치며 손을 거쳐 검신을 타고 흘렀다. 붉고 푸른 기운들이 서로를 의지해 꼬아 가는 것이었다. 발도바의 신형이 오르락내리락 할수록 바닥이 푹푹 꺼져 갔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공간을 찢는 소리가 파천의 귀에 기분 나쁘게 들려 오기까지 했다. 후끈한 바람이 파천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자 그의 금발이 일제히 뒤쪽을 향해 곤두서며 퍼덕였다.
파천은 가능한 한 많은 프리즈마를 끌어 모았다. 그는 금방이라도 전신이 펑, 하고 터질 듯한 기분을 느꼈다.
‘자, 어서 공격하라.’
파천은 기다렸다. 발도바가 전력을 기울여 쏟아낸 힘이 다가오길 기다렸다.
“으아아아!”
힘껏 지른 고함은 발도바의 것이었다. 그는 파천을 직시하며 검극을 빠르게 이동시킨다. 검극이 파천을 향하는 순간이었다.
슈슈슈슈 콰아아아
소음만으로도 위압적인 힘은 멀리 떨어져 있는 파천을 긴장시켰다. 파천도 이에 질세라 두 손을 통해 내부의 힘을 모조리 쏟아냈다. 금룡이 출현했는가? 꿈틀걸리며 튀어나가는 건 폭포수 같은 거대한 프리즈마였다. 두 힘은 굉음을 내며 충돌한다.
“으으으으.”
발도바는 충돌의 순간 어깨가 부서지는 듯한 느낌에 정신을 깜빡 잃을 뻔했다. 파천도 상당한 충격을 받고 상체가 뒤로 젖혀졌다. 그렇지만 둘은 힘을 거두지 않고 여전히 마주서 있다. 힘은 아직까지도 맞붙은 채 밀고 밀리는 상황을 연출했다.
누가 더 우세하다 할 수 없었으나 그건 금세 한쪽으로 급하게 균형을 잃어 갔다. 파천은 쏟아낸 힘을 끊임없이 보충해 더 강하게 밀어붙이는 반면 발도바의 지속력은 급격하게 흔들려 가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지금이다.’
파천은 내부와 연결된 힘의 고리를 완전히 해체시켜 버렸다. 그건 이해할 수 없는 어리석은 짓이었다. 조금만 더 버틴다면 그의 승리로 확정되는 순간이거늘 그는 또다시 이해할 수 없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저런 바보 같은…….”
권터는 마치 제 자신이 싸우고 있는 것처럼 흥분했다. 아레나 역시 위험하다고 느꼈던지 뛰쳐나가려 했다. 아난다가 제지하지 않았으면 아레나는 둘의 싸움에 힘을 보태는 비겁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을 것이다.
발도바는 파천이 견딜 여력이 없어 제풀에 지쳐 버린 것이라 단정했다. 비롯 처음의 힙차고 거대했던 프리즈마의 양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지만 모조리 파천을 향해 밀어냈다. 이제는 제삼자가 도움을 줄 수도 없게 되었다. 피하거 맞받아쳐야 하는데 파천은 맥 놓고 기다리고 서 있다.
권터가 주먹을 꽉 움켜쥐며 긴장한다. 발도바의 힘이 고스란히 무방비 상태의 파천을 가격했다. 아마도 형체조차 채 보전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다행해 운이 좋다면 마지막 한마디 정도는 남길 수 있을 것이다. 모두 눈을 부릅뜨고 마지막일지도 모를 파천의 모습을 지켜 보는데 그는 다른 이들의 예상을 깨고 멀쩡하기만 했다.
스스스스스
산들바람이 불어 땀을 식히는가. 파천에게로 향했던 그 거대한 힘은 모조리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파천은 여전히 허공중에 늠름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활짝 팔을 벌리고 있던 파천이 그제야 한껏 기분이 들떠 소리쳤다.
“역시 내 예상대로였어.”
발도바는 눈앞에서 벌어진 현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다.
‘이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대체 어떻게 한 거냐?”
파천을 굴복시키고 있다는 욕구보다도 당장의 의문을 푸는 게 그에겐 더 시급한 일이었나 보다.
“네가 쏟아낸 프리즈마를 받아들였다. 결합의 의해 변형되긴 했다지만 받아들이는 데는 무리가 없었어.”
파천과 발도바는 땅으로 내려와 있었다. 마주서 있는 그들 주위로 일행이 다가왔다. 아레나가 파천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본다.
“그게 가능하다니…… 신기한 일이군.”
권터가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빛이 역력했다.
파천은 조금 전의 상황을 다시 설명했다.
“내가 프리즈마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착안했다. 아그립바가 프리즈마를 먹어치우는 것처럼 나 또한 프리즈마를 체내로 받아들인 것 뿐이다.”
일행들은 그저 신기할 따름이라 몰랐지만 둘 사이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아그립바는 프리즈마를 받아들여 제 것으로 만드는 반면에 파천의 내부에는 조금의 프리즈마도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이제 어떻게 할 셈이지? 승부는 결정된 것 같ㅇ느데.”
파천의 지적에 발도바는 할 말을 잃었다. 그는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놈은 날 몇 번이고 이길 수 있었다. 조금 전 프리즈마를 의도적으로 거두어들이고서도 회심의 일격을 무위로 돌려 버렸다. 변명할 여지가 없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졌다.’
기가 죽은 발도바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파천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입 주위에서 시작된 잔경련은 얼굴 전체로 빠르게 확산된다.
“내가…… 졌다.”
그 말 한마디를 하는 것이 그다지도 힘이 들었는지 그렇게 답답하게 들릴 수가 없었다.
“지금부터 너는 내 스승이다. 널 따라다니며 네 모든 비기들을 배우겠다. 얼마가 걸리더라도 널 극복하고야 말겠다.”
그는 역시 발도바였다. 발도바의 기행이 파천을 목표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파천은 난감해했다.
“거절한다. 더 이상 귀찮게 하지만 않으면 돼. 자, 모두들 그만 가자.”
발도바를 향해 걷고 있는 파천의 뒤를 아난다와 아레나, 권터가 따른다. 막 파천의 어깨가 발도바의 어깨를 스쳐 지나갈 때였다.
“날 더 이상 비참하게 만들지 마라. 넌 거절해서는 안 돼.”
발도바의 손이 파천의 어깨를 움켜쥐려고 내뻗는 순간 파천은 어느새 출수햇는지 발도바의 손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이러지 마라. 더 이상 귀찮게 한다면 네가 지닌 프리즈마를 모두 뺏어 버리겠다.”
아나다는 그것이 가능한지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파천이 발도바를 위협하고자 엄포를 놓기는 했지만 실제로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조금 전 격돌 때 처음부터 프리즈마를 수용하지 않은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약화시키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였다면 과다한 힘에 당한 건 오히려 파천이었을 것이다.
그가 일시에 받아들일 수 있는 양은 아직까지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더군다나 확인되지 않은 사실에 모험을 하는 입장이었기에 위험을 줄일 필요도 있었다.
어쨌든 그 말은 효과가 있었다. 프리즈마를 빼앗길 수도 있다는 것은 소멸보다도 더 큰 두려움을 발도바에게 주었다. 움찔한 발도바의 모습을 확인하자 파천은 그의 손목을 풀어 주며 조용히 말했다.
“우리는 서로 갈 길이 다르니 이 정도에서 헤어지는 게 낫겠지? 인연이 닿는다면 다시 만날 수 있겠지, 그럼.”
파천 일행이 떠나고 혼자 남겨진 발도바는 한참 동안이나 땅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지금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처음 당한 패배도 아니었다. 지그까지는 졌을지언정 다시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번은 사정이 달랐다. 이렇게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저놈이 어디서 언제 패해 소멸할지도 모르잖는가? 이대로 포기한다면 영원히 패배하는 것이다. 그럴 수는 없다.’
발도바는 언제 의기소침해 있었는지 싶게 힘차게 몸을 돌려세웠다.
“나도 함께 간다!”
발도바가 파천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파천의 곁에 남아 기회를 엿보기로 작정한 것이다.
‘반드시 널 이기고야 말겠다. 그런 확신이 들 때까지는 네 곁을 떠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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