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27화 : 무한계 통합기구 전사평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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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검 – 127화 : 무한계 통합기구 전사평의회


무한계 통합기구 전사평의회

파천의 일행이 향하는 곳은 매소 뮤린이 있는 방향이었다. 그것이 염려가 된 아레나가 몇 번이나 모두에게 경고했다. “계속 가다가는 뮤린과 마주치게 됩니다. 이대로 향하는 건 좋지가 않습니다. 아직 뒤쳐진 선발대원들의 소식도 모르고 하니 여기서 좀 기다리는 게 어떨까요?”
아레나의 그 말은 아난다가 들으라고 한 것이었다. 그러자 아난다는 오히려 파천을 쳐다본다. 의중을 알고자 함이었다. 파천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럼 굳이 속도를 내지 말고 쉬기로 할 겸 천천히 가도록 하지.”
아레나는 멋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 그러지,뭐…….”
파천이 선발대의 행보를 처음으로 결정하는 순간이었다. 이제 좋으나 싫으나 모두는 그의 지시를 따라야만 했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건 내심으로 파천의 결정을 존중한다는 의미도 되었다. 유람이라도 나온 이들처럼 주변을 둘러보며 걷던 일행은 파천이 멈추면 함께 멈추고 그가 움직이면 따라 움직였다.
파천은 파천 나름대로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다른 이들도 모두 저마다 각자의 생각에 몰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서로들 말을 아끼는 분위기였다. 항시 떠들어대던 아그립바도 지금 여유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고집스런 신편과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팽팽한 균형을 깨고자 부단히 노력을 계속했으나 그 모든 시도는 허사였다.
“빌어먹을 놈, 갈기갈기 찢어 버릴까 보다.”
아그립바의 투덜거림에도 파천은 모른 척했다. 괜히 상대해 봤자 지금으로서는 좋을 일도 없었다. 이때 파천은 지금까지 자신이 듣고 보고 익혀서 알게 된 사실들을 하나하나 체계를 잡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간혹 가다 의문 나는 게 있으면 아난다에게 질문했고 아레나가 거둘어 주기도 했다. 권터는 그런 파천의 모습을 조의 깊게 살피며 감탄했다.
‘열정이 대단하구나. 나도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편이지만 저 놈의 집중력에는 솔직히 질리는군.’
무슨 일에든 열정이 남다르다는 건 좋은 이이다.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가 확고하다면 게으를 수가 없다. 뚜렷한 목표가 있고 그걸 이루기 위해 자신이 갖춰야 할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인식하는 파천으로서는 한시도 멈출 수 없었다.
매 순간이 그에게는 안타까운 시간들이었다. 지금의 노력이야말로 결정적인 순간에 성취하게도 실패하게도 하는 요인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에게는 다른 부담감도 있었다.
‘그들을 벌써부터 다시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그는 벌써부터 장차 만나게 될 친인들을 생각했다. 그들과 함께라면 그 어떤 것도 견뎌낼 수 있고 성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또다시 좌절을 되풀이 할 수는 없었다.
‘패배는 한 번으로 족하다. 내게 주어진 기회와 시간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끊임없이 노력한다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생길 것이다. 반드시!“
파천의 생각이 깊어져갈수록, 어려운 문제에 부딪힐수록 그들의 진행은 더뎌졌다. 그렇지만 누구 하나 불만을 토로하지는 않았다. 아난다는 그런 파천의 진지함을 대견스럽게 바라본다.
지금쯤 소식을 전해 줬어야 할 할라스측에서 아무런 언급도 없다는 것이 아레나는 마음에 걸렸다. 그녀의 위기를 감지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원래가 그랬던 건 아니다. 예전 돌이킬 수 없는 한 번의 실수를 경험한 이후로 생겨난 일종의 습관과도 같은 것이었다. 남들보다 위기에 민첩하다는 건 그만큼 상황을 낙관적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는 걸 의미했고 때로 끈질기게 주도면밀해질 수 있다는 걸 나타낸다.
지금 아레나는 문득문득 치솟는 불안감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녀의 본능은 무슨 일이 있어도 뮤린을 피해 가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강하게 자신의 뜻을 주장할 수가 없었다. 이미 결정된 사안에 대해 시시콜콜 떠들어대고 싶은 마음이 없기도 하거니와 정작 뮤린에 들어서기로 결정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길을 따라 걷던 일행 중 제일 앞서가던 권터가 손을 들어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앞서 가고 있는 자들이 보이느데?”
파천은 권터의 말에 고개를 들어 멀리 내다보았다. 그의 말대로 몇 명의 영자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별로 주의를 끌 만한 건 눈에 띄지 않는다. 대수롭지 않게 말한 건 그래서였다.
“여행이라도 하는 영자들인가 보지.”
그렇지만 권터는 엉뚱한 말로 파천의 주위를 환기시켰다.
“복장으로 봐서는 전사들 같은데……. 이상한 일이군.”
“뭐가 이상하다는 건가?”
“생각해 봐. 이곳은 뮤린으로 가는 통로와 같은 곳이야. 뮤린은 한 쪽 성향의 전사들만 이는 곳이 아니야. 무법 지대인 그곳으로 소속이 분명한 전사들이 들어설 때는 무리를 이루는 경우가 많아. 겨우 세 명으로 들어설 수 있는 곳이 아니란 말이다. 적이라도 만난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 위험천만한 짓을 하겠어?”
듣고 보니 그랬다. 파천은 권터의 말에서 한 가지 납득하기 어려운 걸 물었다.
“전사들이라 해서 반드시 소속이 있는 건 아니잖아. 저들이 소속이 있다고 단정하는 근거가 뭐야?”
“너 관찰력이 그래서 우리는 이끌 수 있겠냐?”
권터의 핀잔을 듣고 파천은 다시 앞서 걷는 영자들을 관찰했다.
‘이제 보니 저들의 손에 들린 건 문장기였다. 내가 다른 데 신경을 팔고 있어 미처 못 봤군.’
“저 문장기가 어느 전사단의 것인지 알아 볼 수 있겠어?”
권터는 가만있었다. 아마도 처음 보는 것인 듯했다. 아레나도 묵묵부답이다. 그렇다면 아난다도 모를 가능성이 많았다. 꼿꼿이 세우고 있지 않고 팔을 늘어뜨리고 있어 바닥에 닿을 듯했다. 구겨진 부분이 있기에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여러 개의 불꽃이 수 놓여 있는 것 같았다. 아레나가 말했다.
“불꽃을 문장기에 사용하는 전사단은 많아. 그렇지만 저렇게 작은 불꽃들을 여러 개 그려 놓은 건 처음 보는 것 같군.”
“그러게.”
권터의 말이 끝나는 순간 파천의 팔에서 아그립바가 튀어나왔다.
“저건 내가 알아.”
모두의 시선이 아그립바에게 모아졌다.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고는, 모두가 모르는 걸 자신만이 알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자랑스러운지 마음껏 잘난 척하기 시작했다.
“저건 누구나 알 수 있는 건 아니지. 그리 널리 알려진 곳이 아니기에 모르는 건 어쩌면 당연한 거야.”
“너 잘난 거야 세상이 다 아니까 그만 잘난 척하고 이제 얘기해 주시지.”
아그립바의 사설이 길어질 것 같자 파천이 재촉하고 나섰다.
아그립바는 그런 파천이 못마땅한지 파천의 머리털을 작은 손 안에 꼭 움켜쥔다.
“가만 듣고 나 있을 것이지.”
“하기 싫으면 하지 마라. 가서 물어 보면 되지.”
파천이 정말 성큼성큼 걸어가자 아그립바가 부리나케 입을 열어 놓는다.
“말하마, 말하면 될 것 아냐. 저 문장기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북부권의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전사단의 것이야.
바로크 전사단이라고 들어 봤어? 모르지? 전사의 수라고 해봐야 열 명도 채 되지 않았고 수준도 형편없어서 그다지 이름을 얻을 기회는 없었지. 그렇지만 그들은 진짜 전사라고 할 만한 자들이었어.“
“무슨 말이야?”
“실력은 별로였지만 명예를 중시하는 것이나 정의로운 것, 신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 약자를 보호하고자 노력하는 것 등, 모든 면에서 그들은 정통 전사의 기품을 승계한 진정한 전사들이었지.”
권터가 별일 다 있다는 듯이 아그립바를 쳐다본다.
“햐, 너 이제 보니 그런 생각도 할 줄 알았어? 말썽꾸러기인 줄만 알았더니 이제 보니 그게 아닌데?”
아그립바가 쏘아보자 권터는 얼른 고개를 돌리고는 딴청을 부렸다.
“더군다나 단장이 바로크는 실력도 출중했지. 당시 중부권의 이름난 전사단이었던 슐탄에서 그를 수석전사로 초빙했었지만 거절한 일이 있었어. 그가 거절한 이유는 단 하나. 수하들을 버려 두고 홀로 갈 수 없다는 것이었어.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생겼지. 슐탄에서 원할리 없는 바로크의 수하들마저 받아들이겠다고 제안했지. 이렇게 되지 난감해진 바로크는 자신의 심정을 솔직히 털어 놓았어.“
“뭐라고 했는데?”
이제는 권터가 흥미를 느꼈던지 아그립바를 재촉했다. 아그립바는 느긋하게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가지 않으려는 건 다름이 아니라…….”
“다름이 아니라?”
“우리의 뜻이 훼손될 것이 두렵기 때문이오. 다른 전사단에 속하게 된다면 우리의 숭고한 이상을 펼칠 수 없을 것이기에 가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라고 했어.”
“호오, 대단한 자로군. 슐탄이라면 지금도 유명한 곳인데……. 그런 곳의 수석전사라면 금방 유명해질 텐데 거절했다니.”
“그렇지. 너라면 이게 웬 횡재냐 하고 승낙했겠지만 그는 헛된 명예욕에 집착하는 속물이 아니었던 거야.”
“네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닌 것 같다. 네가 원하는 꿈은 헛되지 않단 말 같잖아.”
권터의 그 말은 아그립바가 언젠가 모두에게 자랑스레 털어 놨던 ‘영물의 왕국’을 걸고넘어지는 것이었다.
아그립바가 골을 내며 빽 소리를 질렀다.
“그런식으로 말하지 마.”
파천이 얼른 나섰다.
“그러니까 저 문장기가 분명 그 바로크의 것이란 말이지?”
“맞아, 분명해.”
“계속 얘기해 봐.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
“나중엔 슐탄이 몸소 나서서 바로크를 찾았지만 번번이 거절당했지. 결국 슐탄은 분노했고 바로크 전사단은 견디지 못하고 사라졌어. 듣기로는 바로크는 마지막까지 슐탄을 괴롭혔다는 거야.”
“그게 끝이야?”
“끝이야.”
파천은 의아했다.
“그럼 저들은 어떻게 살아 남았지?”
“그건 현생 이전의 일이니, 아마도 이번에 다시 만나 전사단을 재결성했겠지. 나도 몰라. 그건 저들에게 물어 봐야 알지.”
분명 흥미로운 얘기이긴 했지만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유가 선발대에 있을 턱이 없었다. 웬만하면 쓸데없이 선발대와 관련이 없는 데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게 여러모로 좋다는 교훈을 저번에 톡톡히 대가를 치르고서 깨달은 바 있었다.
그렇지만 이놈의 호기심이란 놈은 마음먹은 대로 제어가 쉽지 않은 괴물에 속하는 부류였다. 특히 파천이 이 괴물에게 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의 발걸음이 빨라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 파천의 상태를 파악했는지 아예 아레나가 못을 박고 나섰다.
“너 설마하니 또 실수를 반복하지는 않겠지? 그럴 여유가 없다는 것만 명심해 둬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걷는 속도는 점차 더 빨라졌다.
뒤에서 자신들을 향해 거리를 좁혀 오는 자들을 일찌감치 느끼고 있던 앞서 걷던 전사들이 오히려 걸음을 늦춘다. 그걸 알아챈 아레나가 파천의 앞을 막으며 앞서 걸어갔다. 아무리 파천의 실력이 예전 같지 않게 강해졌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우선 순위로 보호해야 할 대상이었다.
파천과 아레나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바람에 전사들과의 간격은 빠르게 좁혀져 갔다. 뒤에서 보기에도 그들이 긴장하고 있음을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파천은 경계심을 허물기 이ㅜ해 그들과 가까워지자 일부러 말을 건넸다.
“어디로 가시는 분들입니까?”
조금 전 다짐을 한 게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보고 아레나는 아미를 찡그렸다. 전사들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들은 일시에 돌아 섰을 뿐만 아니라 파천과 아레나를 경계의 눈빛으로 쳐다 보았다. 그들 중 하나가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떠듬거리며 말했다.
“왜 묻는 거요?”
전사들이라면 으레 무례한 줄 알았던 파천은 그의 모습이 오히려 생소하게까지 느껴졌다.
“같은 방향이라면 동행을 했으면 해서요.”
이제 그들간의 간격은 많이 잡아 줘도 스무 걸음 안팎에 불과했다.
“우리는 원치 않으니 먼저 앞서들 가십시오.”
극도의 경계심은 여전했다. 아난다와 권터가 가까이 왔을 때 파천은 말했다.
“바로크 전사단의 문장기인 것 같은데……. 맞지요?”
그 말이 화근이었다. 세상에 밝혀져서는 곤란한 일이기라도 한 걸까?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파라슈를 꺼내든다. 그들의 동작이 민첩하긴 했지만 파천이 대충 살펴보기에도 상대들은 그리 강해 보이지 않았다.
“너희들은 누구냐?”
급작스럽게 험악한 분위기가 되어 버리자 파천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뻔히 문장기를 꺼내들고 다니는 주제에 그걸 알아보는 게 그리 놀랄 일이고 경계할 만한 일인가 싶었다.
더군다나 생령이 끼어 잇는 행렬이라면 당연히 선발대라는 걸 짐작할 텐데 되묻는 걸 보니 한심해 보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파천은 정중함을 잃지 않는다.
“저는 광명을 가지러 가는 선발대의 일원인 파천이라고 합니다. 혹시 들어는 보셨는지요?”
놀란 빛이 역력한 걸 보니 역시나 선발대란 걸 미처 알아채지 못한 듯싶었다. 그들은 서로의 눈빛을 교환하더는 파라슈를 쥐고 있던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조금 전 물었던 자가 정중하게 답해 왔다.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근래 소문이 자자했던 바로 그 분들 이시군요. 그런데 우리들을 어떻게 알아보셨습니까?”
경계심이 많이 옅어졌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아직 친근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 건 바라지도 않는 파천이 빙그레 웃으며 머리 위에 앉은 아그립바를 툭툭 쳤다.
“이 놈이 바로크의 문장기를 알아보더이다.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일로 지나가시는 건지…….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물어도 될까요?”
이미 물어 놓고서는 그렇게 말하는 게 낯간지럽기는 했지만 파천은 시침 뚝 떼고 그들의 대답을 기다렸다.
“죄송합니다. 말씀드릴 수가 없음을 이해바랍니다.”
무슨 사정이 있는 게 분명했는데 도통 알 수가 없으니 궁금함이 증폭된다. 파천은 그들과 기필코 동행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같이 동행하는 건 상관이 없겠지요?”
그들이 거절할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 부리나케 다음 말을 이었다.
“자, 갈 길도 먼데 어서 길을 떠나도록 합시다.”
그리고는 그들 곁으로 성큼 다가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친근한 미소를 보냈다. 아레나와 아난다, 권터도 파천의 곁으로 다가왔다.
일이 이쯤 되고 보니 그들로서도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던지 별 말 없이 걸음을 뗀다.
파천은 일부러 한참 동안 말을 걸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지겨워 질 때쯤이었다. 파천이 슬며서 별일 아니라는 듯 지나가는 투로 말을 건넨다.
“슐탄이 보면 어쩌려고 문장기를 들고 다니시는 겁니까? 아무리 이곳이 남부권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위험한 일이 아닐까요?”
그들 중 하나가 별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대답했다.
“그런 게 두려웠다면 문장기를 다시 만들지도 않았을 겁니다.”
매우 당당한 말이었다. 적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의미의 자신감이 아니라 두려움을 극복한 자민아 나타낼 수 있는 당당함이었다.
“바로크 전사단이 다시 재건되었나 보죠?”
“아직은…… 아닙니다만……. 언젠가는 되겠죠.”
파천은 조금씩 알고자 하는 핵심에 접근해 갔다.
“그럼 현재는 여러분들이 전부입니까?”
“그런 셈입니다.”
“왜 굳이 문장기를 만들어 시선을 끌 생각을 하셨습니까? 꼭 그래야만 할 이유라도 있나요?”
“이 문장기를 알아보는 이들이 많지 않으니 상관없겠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지만……. 빨리 소식이 퍼져 가기를 바래서지요.”
“그건 왜죠?”
파천이 너무 집요하게 질문을 해온다고 여겼음인가 상대는 잠시 뜸을 들였다.
“혹시 다른 동료들을 불러모으기 위함인가요?”
“네.”
짧게 대답한 전사가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처연하게 말했다.
“무엇이 알고 싶으신 거죠? 세상의 이목도 끌지 못하는 보잘것없는 작은 전사단에 온 영계의 관심 대상인 당신이 관심을 다 보여 주시니…… 황송하네요. 더군다나 이름 높은 수련자와 최강 여전사의 동행이라니 저희들로서는 꿈도 못 꿀 일이지요.”
파천은 말문이 막혀 앞만 바라보았다. 전사의 어조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비감 어린 내용으로 가득했다. 그걸 안 파천이 위로한답시고 말을 꺼냈다.
“바로크 전사단의 전사들은 누구보다 훌륭한 의지의 사내들이라 들었소. 게다가 마지막까지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 참된 명예가 무언지를 아는 전사들이라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제가 영광입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네, 진심입니다.”
“그렇다면 말씀드리지요. 저희는 지금 단장님을 찾으러 헤매고 다니는 중입니다.”
“단장이라면 바로크 님을 말씀하시는 거겠군요.”
“네, 그렇습니다. 슐탄의 공격을 받고 마지막 순간이 찾아왔을 때 그 분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당부하셨죠. 후생에 다시 만나 못 다한 뜻을 이루자고요. 그리고 약속 장소를 모두에게 이르셨습니다. 전사단의 수는 전원을 통틀어 열하나. 시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모두는 한 자리에 모여들었지요. 단지 그 분만 빼고 말입니다.”
“바로크 님은 오시지 않았단 말이네요.”
“네, 무슨 사정이 생기신 것인지…… 아니면 기억소멸을 당하신 것인지는 저희들로서도 알 길이 없습니다. 단장님을 제외한 전어?이 모여 바로크 전사단의 재결성을 축하했습니다.”
“나머지 분들은? 혹시 따로 떨어져서 움직이고 있나요?”
“아닙니다. 모두…… 소멸당했습니다.”
“어쩌다가…….”
파천은 그들의 불행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운이 없었던 거죠. 우리가 모였던 곳이 하필이면 라만이 습격했지 뭡니까? 그들을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역부족이었죠. 간신히 저희들만 탈출하여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럼 지금은 바로크 님을 찾아 정처 없이 떠도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파천은 그들의 처지가 너무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 영자가 아닌 전사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건 위험에 쉽게 노출된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포기할 수 없는 꿈을 찾아 떠돌고 있는 셈이었다.
“지금은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가장 다양한 영자들이 모인다는 매소 뮤린으로 가고 있습니다.”
바로크를 얼마나 존경하고 신뢰하면 이들이 몇 생을 되풀이하며 그를 따를까, 하는 생각이 들자 바로크에 대한 궁금증이 한없이 솟구쳤다.
“바로크 님을 꼭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사실은 뜰에서 여러분들에 대한 소식을 접할 수 있었지요. 광명을 찾아 떠나는 선발대에 대한 영자들의 기대 어린 연호 소리까지도 말이죠.”
그들은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단지 선발대를 가까이서 보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그랬군요.”
“꼭 광명을 가져오시길 마음으로나마 신께 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들도 바로크 님을 꼭 찾게 되시길…….”
파천은 그들을 보며 서로가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염원하는 것이 있다는 건 그래도 행복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것이 좌절되기 전까지는 희망을 지닐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 셈인가. 이들은 바로크가 어딘 가에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란 생각만으로도 새 힘을 낼 수 있을 것이었다. 파천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광명을 가져올 수 있다는 한 가닥 기대가 없었다면 난 모든 걸 포기했겠지. 더군다나 나 또한 만날 이들, 그 기다림이 결코 지루하지 않은 친인들이 있지 않은가!“
파천은 결코 이들의 앞날이 순탄하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스스로를 보호할 힘을 갖추지 못한 약자들이기에 당할 수난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런 걸 모를 리 없는 자들이 당당하게 문장기를 드러내 놓는다는 건 큰 용기를 필요로 했다. 그만큼 스스로의 결정에 당당할 수 있다는 의미이리라. 파천은 전사들을 보며 많은 걸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순수한 의기를 지닌 자들이 마음껏 숨쉬고 꿈을 이룰 수 있는 세상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못했다.
‘바로크는 왜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을까? 착오가 있다거나 이들의 말처럼 기억소멸을 당한 거겠지. 만약 그런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약속을 파기한 것이라면……. 이들은 너무 불행하다.’
파천은 자신도 그렇게 될까 봐 불안했다. 그러나 그는 친인들을 믿었다. 그들은 말없이 길을 함께 했다. 서로를 충분히 이해한다는 연대감만으로도 그들간의 침묵은 더 이상 어색하지 않았다. 아레나가 파천의 발길을 붙잡지 않았다면 언제까지나 그들과 동행했을 것이다.
“더 이상은 곤란해. 여기서 결정해야 한다.”
바로크 전사들은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그들은 마지막까지 파천에게 당부를 잊지 않았다.
‘광명에 대한 기대가 그대들의 힘든 삶을 견디게 해주는 또 하나의 작은 희망이 될 수 있기를 바라오.’
멀어져 가는 전사들을 향한 파천의 시선을 아레나가 돌려세웠다.
“이제 어떻게 할 셈이냐?”
“글쎄, 아난다, 네 생각은 어때?”
“저는 파천 님의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빙긋 웃으며 하는 말에 파천은 난처해졌다. 계속 가는 건 그 역시 불안했기 때문이다.
“우회해서 가지. 길이 아닌 곳은 가지 말라고 했지만 어쩔 수 없지 뭐.”
장난스레 한 말에도 모두는 시큰둥했다. 파천은 두 손을 소리나게 마주치며 활기차게 말했다.
“나를 따르라.”
아무도 반응해 주지 않으니 파천도 맥이 빠졌다. 아그립바가 쫑알대는 소리만이 파천의 귀를 간질인다.
“너 심심하구나.”
파천은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매소 뮤린의 규모는 뜰을 제외하고는 남부권에서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었다. 그 넓은 곳을 우회해서 간다는 건, 더군다나 눈에 띄지 않고 간다는 건 생각처럼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자연 그들의 진행 속도는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가면서 느낀 건 사방에서 모여들고 있는 수많은 전사들의 행렬이었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전사들과는 달리 중부권 전사단 소속이 상당 비율을 차지하고 있어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레나는 그걸 보고 뮤린을 우회하기로 한 것이 얼마나 잘한 일인지에 대해 여러 번 강조했다.
파천도 어느 정도는 공감하고 있었으나 전사들이 많이 모인다는 사실은 그에게 새로운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걸 드러낼 수는 없었다.
아난다는 매우 심각해져서 혼자 생각에 잠기는 때가 많아졌고, 권터는 멍하니 있는 듯 없는 듯 행동하기 일쑤였다. 아레나는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주변을 감지하는 일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이러니 파천의 대화 상대는 오직 아그립바로 제한되었다.
“그러긴 싫다. 물론 네 도움을 전혀 받지 않겠다는 건 아니지만 그럴 필요를 아직까지는 느끼지 않거든.”
아그립바가 토라져 쏘아붙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아그립바는 파천이 힘을 어느 정도 갖춘 건 인정하지만 때로는 자신의 도움을 적절하게 이용하라고 충고했고 파천은 이를 거절했다. 그러니 자존심 강한 아그립바가 파천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으로 오해한 것이다. 파천으 토라진 아그립바를 달랬다.
“네 힘이 약해서가 아니라 굳이 너까지 나설 일이 그리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만약 네 도움이 필요한 일이람녀 네가 요구하지 않아도 그렇게 하겠지.”
그 말에도 아그립바는 좀처럼 화를 풀지 않았다.
‘하여간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라니까‘
“넌 영물의 왕국을 꿈꿀 만큼 강하잖아. 저번에 권터의 그 막강한 공격력도 무위로 돌려 버렸는데 널 무시할 리가 있겠어?”
괜히 권터까지 끌어들인 게 은근히 미안해지는 파천. 그렇지만 이미 일은 저질러 버린 뒤였다. 후회해도 늦은 것이다.
무감해 있던 권터가 발끈해 소리친 건 파천이 어느 정도는 예상한 일이었다.
“너 그 말을 한 저의가 뭐야? 지금껏 날 무시하고 있었던 거냐?”
“그럴 리가 있어? 괜히 예민해져 갖고 흥분하지 말고…….”
“그만둬. 이제 보니 네가 날 우습게 여기고 있었던가 본데 지금이라도 재대결을 펼쳐 볼까?”
어지간히 자존심이 상했나 보나, 라고 일축할 수만 없는 심각한 분위기를 잡아가는 권터였다. 파천은 이 단순 무식한 반응을 보며 아그립바와 똑같다고 생각했다. 이때 결정적으로 아그립바의 한마디가 권터의 속을 뒤집어 놓는다.
“우습게 볼 만하니까 그런…… 웁웁.”
파천이 아그립바의 입을 틀어 막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이것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그는 정말로 분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과장되게 행동하는 건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흥분해 소리쳤다. 바로 그때였다.
“쉿! 조용.”
아레나가 몸을 낮추며 모두에게 주의를 준다. 벌겋게 상기된 얼굴을 주체하지 못하는 권터도, 막 파천의 손을 제 입에서 떼어내던 아그립바도 숨죽이고 전면을 보았다.
전사들의 행렬, 족히 스무 명은 넘을 것 같은 전사들은 절도 있는 동작으로 주변을 경계하며 전진해 가고 있었다. 파천 일행이 숨죽이고 있는 곳은 그들과 불과 30여 장 정도 거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모두는 외부로 향하는 기운을 차단한 채 그들이 어서 빨리 시야에서 사라져 주길 기다렸다. 파천은 그들이 내뿜는 기운이 롬멜 전사들과 비등하다고 느껴질 정도라는 데 먼저 놀라야 했으며, 그 중에서도 최선두에 서 ㄴ자가 우연인지는 몰라도 슬쩍 고개를 돌려 정확하게 자신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는 사실에 더 크게 놀랐다.
그들이 멀리 사라지고 나서야 아레나가 입을 연다.
“저들마저 뮤린에 볼일이 있다는 건가?”
“일의 심각성이 생각보다 큰 것 같군요.”
아난다는 뮤린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궁금해했다. 권터도 그건 마찬가지인 듯했다.
파천은 그들이 누구냐고 물었다.
“중부권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전사단이야.”
“롬멜과 비교하며?”
“롬멜과 비등하지만 숫자에서 모자라지.”
아레나의 말에 권터가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롬멜보다야 유클릿이 낫지. 숫자도 그리 많이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니고.”
“유클릿?”
“그래, 저들은 중부권에서도 비교적 남부 지역에 치우쳐 있어 그리 많이 출전하지는 않지만 누구나 인정하는 최강 전사단 중 하나다.”
“제일 앞서 가던 자가 유클릿인가?”
“천만에. 유클릿에게는 네 명의 의제들이 있다. 그들 중 셋째인 마이어란 자로 매우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다.”
“저 자와 비교하면 유클릿은 어느 정도야/”
“비교한다는 자체가 말이 안되지. 중부권 유명 전사단의 단장들은 하나같이 중부권 최강을 다투는 전사들이다. 나는 웬만한 수련자들보다도 그들을 더 인정하는 편이다.”
권터의 설명에 파천은 고개를 끄덕이다 아레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아레나와 유클릿을 비교하면?”
참 곤란한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당사자가 있는 곳에서 다른 이와 비교한다는 게 그리 마음에 내키지 않았던지 권터가 우물쭈물한다. 아레나가 대신 답했다.
“대결해 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이지만……. 객관적인 평가로만 따지면…… 나보다 그 자가 우위에 있는 건 사실이야.”
여전사들 중 최강을 다투는 아레나보다도 객관적인 평가에서 우위를 점한다는 사실은 파천을 신선한 충격 속으로 몰아 넣었다.
‘영자들에게도 여자로서의 약점은 작용하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에 더 이상 골머리 싸매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파천은 유클릿이란 이름을 다시 한 번 머릿속에 새겨 놓았다.
“유클릿이 마이어를 파견할 정도라면 보통 일은 아니겠는데요. 혹시 펠라모간의 회합이 있을 거라는 장소가 뮤린이 아닐까요?”
파천도 막 그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아난다는 아레나의 말에 동조했다.
“정황을 보건대 그런 것 같군요.”
“그렇다면 우리도 가봐야 하는 것 아닌가?”
파천의 제안에 권터가 쐐기를 박는다.
“우리가 왜? 정신 차려라, 파천. 네가 할 일은 광명을 가져오는 일이지 무한계의 일마다 간섭하며 쫓아다니는 게 아니란 말이다.”
그걸 왜 모르겠는가. 그렇지만 이건 그냥 지나치고 싶지 않은 호기였다.
‘중부권의 흐름을 한 눈에 파악해낼 절호의 기회건만…….’
이때 아난다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내 모두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파천 님의 말씀처럼 가봐야 할 것 같군요. 지금으로서는 무한계에 가장 큰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냥 지나칠 수만은 없을 것 같습니다.”
아레나는 다급하게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뮤린에 들었다 뜻하지 않은 험한 일을 겪는다면……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걸 모르시진 않겠지요?”
“물론입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피해 갈 수 없습니다.”
“왜죠? 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거죠?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 아난다 수련자 님의 의중을 알고 싶군요.”
납득할 수 없는 결정에 아레나는 흥분했던지 말하는 속도마저 빨라졌다.
“지금부터 그걸 알아 봐야죠. 우리가 할 일이 무언지 말입니다.”
두루뭉실한 아난다의 답변에 만족감을 표시할 아레나가 아니었다.
“저는 반대합니다.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위험 감수라면 모르지만 이건 아닙니다. 오지랖 넓은 걸 과시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목적 없는 일에 제 생명을 헛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약 아난다 님께서 이 자리에서 절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전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아레나는 강경했다. 아레나가 아난다에게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건 최초의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그녀는 현재의 결정을 납득할 수 없었고 묵묵히 따르기엔 문제가 많다고 여겼다.
파천 역시 뮤린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궁금증이 누구보다 강했지만 아난다가 저런 결정으 ㄹ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기에 그 이유가 궁금했다.
아난다는 특유의 부드러운 어조로 아레나를 이해시켜 갔다.
“할라스가 이곳으로 우리를 인도할 때부터 전 한가지 생각에 골몰 했었지요. 할라스는 미스바 님의 의도대로 그녀의 지시를 따라 우리를 이곳으로 유도한 것입니다. 아마도…… 루하스 강을 따라 간다 해서 별다른 위험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전 왜 그녀가 우리를 이곳 뮤린으로 인도해 가는지, 그 이유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궁금증은 이제야 풀리게 되었죠. 뮤린에서 우리 예측처럼 펠라모와 전사단들간의 회합이 예정되어 있다면 그곳을 참관해야 할 필요성은 당연히 요구됩니다.
그들이 왜 회합을 가지며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장차 이 삭ㄴ어 중부권의 판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가늠해 볼 수 있음도 이유가 되겠지만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이들의 배후에 과연 누가 관련 되어 있는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아레나 님의 염려처럼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이 ㅅ너발대의 역할 중 하나이기 때문이죠.“
아난다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아레나는 처음의 입장을 고수했다.
“저는 가지 않습니다. 애초에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 미련스럽게 매달릴 만큼 전 어리석지 않습니다. 제가 선발대에 참여한 이유는 단 하나, 너울의 한마디 때문이었죠. 라훌라족을 멸족시킨 자들의 배후를 어쩌면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그걸 위해서라도 파천은 끝가지 살아남아야만 했고, 전 그 목적을 위해 지금껏 최선을 다해 왔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의 선택은 아무리 양보하고 이해한다 해도 저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전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제 생명을 마감하고 싶지는 않군요. 죄송합니다.“
선발대 내에서의 최초 분열은 전혀 의외의 인물에게서 시작되고 있었다. 아난다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역량을 지닌 대원이라 할 수 있었던 아레나. 아직 넘어야 할 난관도 많은 초기 시점에서 이탈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아난다가 다시 그녀를 설득했다.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실 수는 없겠는지요.”
“이번 일은 아난다 님께서 양보하셔야겠네요. 해보나마나 뻔한 일입니다. 다행히 저들은 우리들을 환영해 준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빠져 나갈 구멍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일곱별이라 불리는 영자들이 모두 참여한다 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인데 지금의 전력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전 빠지겠습니다. 결정된 사항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탈했으니 더 이상 선발대에 남아 있는 제 자리는 없겠죠. 아쉽군요. 끝가지 함께 가보고 싶었는데.“
둘의 팽팽한 대립은 쉽게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아레나의 말처럼 뮤린에 침투해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바져 나온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아난다는 해야만 하는 일이라 했다. 파천은 아레나가 저리 완강하다면 차라리 아난다가 이쯤에서 뜻을 접는 게 낫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아난다의 고집도 여간 아니었다. 둘의 한치 물러섬도 없는 대립을 본 권터가 헛웃음을 흘렸다.
“둘의 말이 모두 맞으니 어느 쪽을 지지해야 할 지 모르겠군. 이럴 때 파천, 네가 결정하면 되겠구나.”
해결점이 없어 보이는 난관을 두고 떠밀려 앞에 서게 된 파천이 마땅한 해결책으 ㄹ제시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최선의 방책을 내놓았다.
“둘의 의견을 모두 수렴하지. 먼저 혜능의 말처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중차대한 문제니 일단은 침투하는 것으로 결정한다.”
“뭐야? 생명이 몇 개라도 되는 줄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가만 있어 봐, 아레나. 네가 염려하는 게…… 만약 발각되어 탈출을 시도하게 되면…….”
“발각되면 그걸로 끝이야. 탈출이라니…… 꿈도 꾸지 마.”
“그래, 네 말 잘 알겠으니 그만 흥분하고 내 말부터 들어 봐.”
아레나는 팔짱을 기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인 것 같았다.
“그렇게 미리부터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지 않나 싶다. 어쩌면 우리 생각과는 달리 저들이 우리들을 환영해 줄지도 모르는 거고…….”
언제까지나 입을 열지 않을 것 같던 아레나의 입이 재차 열렸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그럼 그건 기대도 하지 말기로 하고. 발각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것 아니겠어? 기운을 감추고 변신을 하는 거다. 많은 수의 영자들이 뒤섞여 있는 곳에서 우리가 선발대임을 알아챌 수가 있을까? 어떻게 생각해, 내 의견이 그럴 듯하지 않아?”
문제는 파천이었다.
“조금 전도 보았듯이 마이어는 내 기운을 감지하지 못했다. 그가 그런데 다른 이들은 오죽할까?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 같은데 말야. 기운을 감추는 건 그리 힘들지 않고 변신도 가능하니 어때? 해볼 만하지 않겠어?”
그제야 아레나의 표정이 다소 풀리는 듯 했다. 그녀는 아난다의 변함없이 부드러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한마디 툭 던졌다.
“죄송해요, 무례하게 굴어서.”
그건 그녀의 잘 굽히려 하지 않는 자존심으로 볼 때 상당히 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아난다는 별로 개의치 않는지 가볍게 말을 받았다.
“천만에요, 제가 오히려 얼굴을 못 들겠군요.”
파천은 두 사람의 어깨를 툭툭 치며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그러면서 정드는 거지. 그렇지 않아, 권터?”
“그럼! 그런데 수련자와 여전사가 정분이 나도 되는 거야?”
“그런가?”
둘이 주고받는 가벼운 농담에 아레나가 발끈했다.
“말 다했어?”
어쨌든 선발대는 뮤린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한다. 파천의 제안대로 그들은 모습을 바꿨고, 특별하게 여겨질지도 모를 기운마저 일정 부분 차단했으며, 파천은 생령의 기운을 감추느라 전 기운을 봉쇄했다. 대신 아그립바가 파천의 체내에 숨어 일부러 기운을 내뿜었다.
이렇게 하고 보니 선발대임이 들통날 것 같지는 않았다. 다소 안심한 아레나가 매소 뮤린의 입구에서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는 소리만으로도 성공확률은 의외로 높아 보였다.
“생각 외로 영자들이 많으니 어쩌면…… 무사히 나올 수도 있겠어”

매소 뮤린은 좀 과장되게 얘기하자면 발 디딜 틈도 없이 많은 수의 영자들로 벅적거렸다. 그들 중 대다수가 전사라는 점이 더 큰 긴장감을 불러 일으켰다. 언제 어디서 예기치 않은 불상사가 벌어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파천은 이렇게 많은 수의 영자들을 처음 보는지라, 티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두리번거리게 될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을 주목해 바라보는 영자들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모습들이 완전히 딴판으로 바뀌어 있어 그들을 잘 아는 영자라 하더라도 쉽게 가려내기 힘들 정도였다.
그들은 점차 중심 지역으로 접어들었다. 그럴수록 공간은 협소해져 갔다. 중앙광장에 닿게 되자 아예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어질 지경에 이른다. 중앙광장에는 사방 3장 정도의 단상이 마련되어 있었고, 그 주변에 여러 부류의 인물들이 모여 있었으며, 그들이 이끌고 온 전사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 뒤로는 구름처럼 많은 수의 영자들이 숨을 죽이고 사태의 추이를 살피고 섰다. 이쯤 되고 보면 최근래에 이처럼 많은 수의 영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건 최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시간이 흘러 가고 있음에도 군중 가운데 소란을 일으키는 자는 보이지 않는다. 인내심을 발휘하기 위한 자리라도 되는 양 누구 하나 재촉하는 소리도 없다. 단상에 가까이 있는 자들은 그들끼리 작은 소시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고, 그것이 신호인 양 다른 이들도 서로 의중을 캐보느라 여념이 없다.
작은 소리들이었으나 주변은 금세 소란스러워진다. 그때 한 영자가 단상으로 뛰어 올랐다. 그는 큰 키에 어떤 짐승의 털인지 모르지만 매우 탐스럽게 윤기 도는 의복을 걸치고 있었다. 한 손에는 키를 훌쩍 넘는 문장기를 들었고, 다른 손에는 그 절반쯤 되는 창을 움켜 쥐고 있었다.
그가 단상으로 올라서자 사방은 다시 쥐 죽은 듯 고요해진다. 그가 입을 열어 큰 소시로 말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펠라모와 전사단의 회합이 시작됨을 알립니다. 먼저 이 자리가 마련되게 된 배경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현 무한계는 전에 없던 혼란기에 접어들어 있으며 오랜 분쟁으로 인해 중부권은 말할 것도 없고, 특정 지역 구분 없이 긴장감이 팽배해 있는 실정입니다. 이로 인해 어느 누구하나 불안해하지 않는 영자들이 없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더군다나 최근에는 마계가 인간계를 복속 시킨 일로 인해 그 긴장감은 갈수록 더해지고 있습니다. 무한계가 통합되지 않고서는 마계의 칼날을 피할 수 없음은 모두가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껏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관계로 하나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서로의 이해 관계를 떠나 뜻을 하나로 모아 마계의 야욕을 완전하게 분쇄하는 그날까지 서로간의 분쟁을 조정하고, 무한계의 전력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핵심적인 조직이 필요하다는 판단하에 이런 자리를 마련하게 된 것입니다.
누구나 필요성은 인정하고 있었지만 선뜻 추진하기가 쉽지 않았으나 정말 기적적으로 이 자리가 마련되었음에 먼저 감사함을 드립니다.
여러 영자들께서 알고 계시듯 마계의 전력은 막강하기 그지없습니다. 현재의 무한계는 사분오열 되어 그들과의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수련자들의 의사기구인 메덴은 제 역할을 못한 지 오래되었고, 영자들로부터의 신뢰도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중부권의 몇몇 뜻있는 전사단과 남, 북부권의 펠라모가 중심이 되어 전 무한께를 어우르는 통합기구를 창설하고자 합니다. 동참하고 그렇지 않고는 전적으로 여러분들이 선택하실 사안입니다. 앞으로 이 통합기구는 중부권을 빠른 시일 내에 하나로 통일하고 나아가서 마계의 침략에 대처해 나갈 것입니다.
여러분들 줄에서는 반대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이고, 혹시나 몇몇의 야심에 악용되는 것이 아닌가, 염려하시는 분들도 계시리라 봅니다. 전적으로 선택은 여러분들의 것입니다. 자유롭게 동참 의사를 밝힐 수 있으며 절대 강요는 하지 않습니다.
자유롭게 여러분들의 뜻을 표시해 주셔서 이왕이면 모두가 인정하고 납득할 수 있는 통합기구가 되었으면 하고 바랄 뿐입니다.“
그는 한참이나 더 자신의 뜻을 간절한 어조로 밝혀 갔다. 그의 말은 하나같이 모두가 심각하게 생각해 오던 사안들이었기에 대부분의 영자들은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그가 자신의 뜻을 웬만큼 피력한 이후에도 여러 영자들이 차례대로 단상으로 올랐으며 하나같이 간절한 호소를 토해 내었다.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지켜보는 이들이나 말하는 이들이나 동일한 열망으로 하나가 되어 갔다.
그럴 때쯤이었다. 파천은 그 자가 단상에 오르는 순간이 마치 정지 된 것처럼 매우 느리게 시야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착각에 머리를 흔들었다.
‘저 자가 드디어! 역시 이번 일을 주재한 핵심 세력 중의 하나란 말이겠지.’
마이어였다. 그가 오르자 지금까지와는 반응이 사뭇 달랐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것은 그에 대한 인지도가 높은 것임을 반증했다. 또한 그의 배경이 지니는 무게가 만만치 않음을 강변하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그야말로 지금의 혼란을 주도하고 있는 주역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자리에 참여했다는 것은 해석하기에 따라 여러 반응이 나올 수 있는 예민한 부분이었다. 그는 성급하게 열변을 토해 놓지는 않았다. 군중들을 쓸어보는 시선에는 여유가 넘쳤고 그 태도엔 오만으로 비칠 정도의 자신감이 묻어 있었다.
“나는 유클릿 전사단의 마이어라 한다. 날 여러 본 영자들도 있을 것이고 지금 이 자리에서 처음 보는 이들도 있겠지. 간략하게 말하겠다.”
그는 말하는 것부터다 다른 이들과는 틀렸다. 누군들 그의 말을 듣고 그가 겸손한 이라고 여기는 자가 있을까. 그는 시작부터 군중의 반발을 사기에 족한 행동을 했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그의 그런 불손한 태도를 지적하는 이는 없었다.
“난 사실…… 통합기구가 이 자리에서 창설되리라고 믿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난 이 자리를 경이롭게 바라본다. 이런 시도 자체가 기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 중에는 나와 유클릿 전사단과 적으로 서 본 적이 있는 영자들도 있으리라 본다.
많은 이들이 조금 전 말했던 것과 나 또한 별반 다르지 않지만 딱 한가지만 말하겠다. 만약…… 통합기구가 많은 이들의 염원에 따라 조직될 수만 있다면 그건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대세로, 감히 대항할 수 없는 절대적인 권력으로 우리 모두를 지배하게 될 것이란 사실이다.
반대자는 적으로 간주될 수 밖에 없고 단호히 그렇게 해야 한다. 나는 싸움을 좋아하고…… 끝가지 간다면 승자의 자리에 설 자신이 있지만…… 마계의 지배를 받고 싶지는 않다. 마계는 강하다.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그들의 지배를 받지 않으려면 힘을 합하느 수밖에는 없는데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 기구는 우리에게 너무도 절실하게 요구된다. 나와 유클릿 전사단은 통합기구 창설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며, 이후 모든 결정을 장차 발족될 통합기구의 지배층 의사에 따를 것을 이 자리에서 약속한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소속이나 신분에 관계없이 강자만이 그 지배층에 들 자격이 주어진다. 모두에게 기회는 공평하게 주어질 것이며 모두가 인정하는 자만이 지배자가 될 자격이 있다.
그리고 이후 그에 의해 중부권을 비롯한 수많은 이해 세력들은 평정될 것이며, 그에게 부한한 권력을 쥐어 줄 것이다. 그가 곧 마계와의 전쟁에 선봉이 될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 이후의 문제는 이후에 생각해 봐야겠지. 그를 그대로 인정할 것인지, 아니면 다시 끌어내릴 것인지는 말야.“
마이어의 말이 끝나자 지금까지와는 달리 지나치게 조용한 분위기가 흐른다. 더 이상 단상으로 오르는 자는 없어 보였다. 그때 파천에게도 낯이 익은 앙샹뜨가 단상 위로 올랐다. 그녀는 전사의 예를 취해 보인 뒤 밝고 고운 목소리로 군중들을 사로잡아 갔다.
“저는 펠라모 앙샹뜨를 책임지고 있는 앙샹뜨예요. 전 현실적인 문제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집단 지휘체제가 아닌, 단일 세력이나 한 영자에게 우리에게서 나온 모든 권력을 쥐어 준다면 문제가 발생할 것 같지 않은가요?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어 보이죠. 방금 말씀하신 마이어 님의 의형이시자 중부권 최강 전사 중 한 분이신 유클릿 님이 지배자가 되셨다고 생각해 보세요. 평소 그 분과 경쟁 관계에 있던 다른 네 분의 전사단장님들께서는 그걸 온전히 납득하고 받아들이실까요?
아니면 메덴의 수련자분들 중 한 분이 최고의 권력을 거머쥐셨다면 전사단들이 군소리 없이 수긍할까요?
결국 통합기구는 내분으로 몸살을 앓을 것이고 효과적인 전쟁 수행은 기대할 수 없을 테죠.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그 기준은 어떻게 결정되어도 좋습니다. 강자존의 유일 법칙만이 통용되는 중부권의 원칙을 따르듯, 다른 선별된 기준을 제시하든 그건 전혀 상관할 바가 못됩니다. 그 기준에 의해 선발된 일정 수의 영자가 공평한 지위를 지닌 채 집단 지휘체제를 구축하는 겁니다.
그건 물론 마계의 침략을 분쇄하는 시점까지라는 단서가 붙는 한정된 지위에 불과하죠. 여구적일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한 명에게 권력이 집중되면 남용이 되었을 때 견제하기도 벅찰뿐더러 설사 그렇게 할 수 있다 해도 소모되는 전력 손실이 만만찮죠. 그럼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전…… 집단체제를 통해 권력을 분산시키고, 그들간의 조율을 통해 마계의 침략에 대항했으면 하고 바랍니다. 그리고 반대하는 세력이나 영자들을 당장에 적으로 구분해 척결할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 동안 유예 기간을 두어 그들이 충분히 입장을 정리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랜 기간 동안 깊게 패여 고착된 지금의 상황을 하루아침에 바꾸는 건 서로간의 출혈을 감수해야 하는 무모한 일입니다. 좀더 현명한 선이 무엇인가를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여기에 대표를 보내지 않은 세력들이 더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 이 자리에서 성급하게 결정을 내리는 건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지금의 모임이 모두에게 설득력 있게 비쳐지고 받아들여지려면 좀더 유연한 결정이 내려져야 할 듯싶습니다.“
앙샹뜨가 그 동안 영자들에게 심어 준 영향력 때문일까, 지금까지 그 누구보다 더 큰 환호와 갈채를 받는다. 그걸 보며 파천은 속으로 역시, 하는 심정이었다. 이때다. 한 영자가 단상으로 뛰어 올라 메덴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이번 회합을 부정적으로 단정할 것이며, 해체할 것을 종용한 것 등을 말하는 자는 스스로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수련자들을 성토하기 시작했다. 그가 짧게 말하고 내려갔다고는 해도 모두에게 던진 의미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메덴과의 불화, 장차 이것이 가져올 파장은 작지 않을 것이다. 처음부터 극복하기 힘든 암초에 부딪힌 배는 좌초되지 않기 위해서 버둥거려야만 했다.
뒤 이어 단상에 오른 영자들은 주로 메덴과 칠대부족에 대해 언급하며 불만을 표시했다. 불씨로 남겨둘 것인지 정면 돌파를 할 것인지를 묻는 영자도 보였다.
이 자리에 모인 군중들에게는 어느새 통합기구 창설이 기정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동안 서로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던 자들, 아니 그보다는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기회조차 없었던 자들은 서로의 견해를 나누며 공감하였고 뜻을 같이해 갔다.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이들도 만만찮게 있었다. 북부에 잇는 펠라모는 이끈다고 자신을 소개한 영자가 한 말은 그 중에서도 가장 신랄한 비판이었고, 이번 회합 자체에 대해서도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었다.
“누가 지도자가 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근본적으로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는데 모양만 그럴싸하게 빚어 놓는다고 안의 내용물도 달라집니까? 마계의 침략이 시작되면 이런 기구가 없다해도 생존을 위한 투쟁에 나설 건 마땅하고 당연한 일.
모두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누가 있어 이 기구에 집중된 힘을 견제할 수 있겠습니까? 장차 그들이 저지를 온갖 패악이 눈 앞에 선하게 비쳐지는군요. 고스란히 세상을 갖다 바친 꼴이지 않습니까?
만약 우리 모두가 지도자로 뽑은 위인이 마계의 앞잡이라면, 그도 아니면 처음에는 아니었으나 마음이 바뀌어 그들을 지지하기로 작정한다면……. 그때는 어쩔 겁니까? 과연 무슨 기준으로 지도자를 선출할 것이며 선발된 그에게 어느 정도의 권한을 부여할 겁니까?
저는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애초에 이런 시도 자체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일시적인 감상에 젖은 자들의 허황된 이상 같기만 하군요.
잘 되면 좋겠지요. 저도 그걸 바랍니다. 그렇지만 그걸 누가 장담한단 말입니까? 모두가 하나같이 똑같거늘 우리 중에 깨끗하고 공정하며 정의로운 자가 있기를 바란다는 건 이뤄질 수 없는 섣부른 기대에 불과합니다.
꿈에서 깨어나십시오. 괜히 이런 허황된 짓에 심력을 낭비하지 말고 자신의 터전으로 돌아가 지금껏 그래왔듯 제 몫이나 챙기고 있으란 말이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사실을 상기시키겠소. 이 회합을 반대하는 세력이나 무리는 전 무한계를 따져 봐도 꽤나 큰 비중을 차지하오. 통합기구가 결성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치열한 싸움을 시작해야 할 것이오.
그건 어쩌면 마계와의 싸움보다도 더 우리에게는 지독한 것이 될 것입니다. 중부권의 전사들이 모두 힘을 합한다 해도 과연 메덴과 칠대부족을 힘으로 누를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제발 정신들 차려 줬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사방의 기류는 싸늘한 냉기를 품고 가라앉았다. 그걸 보며 파천은 생각했다.
‘저 자의 말대로 무리한 일이야. 현 단계에서 가능한 것을 시도해야지. 너무 많은 단계를 한꺼번에 생략하려 하고 있어. 그건 결국 모두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상태를 악화시킬 것이다.’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아니 일부러 외면하고자 했던 현실적인 문제들을 인식시키자 그 동안 잠자코 있던 반대 성향의 인사들이 앞다투어 단상으로 올랐다. 그들은 냉철하게 잠재되어 있는 문제점들을 하나 둘씩 들춰냈고 대안이 있냐고 물었다. 아무도 답하지 못한다.
심각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아난다의 표정은 어두운 것이었다. 아레나도, 권터도 관련 없다 할 수 없는 사안에 대해 자기들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때다. 그들 중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지고야 만다. 단상을 향해 파천이 날아오른 것이다.
그의 모습은 매우 평범해 특별히 주목을 끌 정도는 아니었다. 모두가 스스로의 신분을 자랑스레 밝혔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파천은 아무것도 밝히지 않았다. 일행은 돌발적인 파천의 행동에 놀람을 넘어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어이가 없다 못해 기가 차서 말을 맺지 못하는 아레나. 흥미롭다는 표정이 되는 권터. 파천을 걱정스레 쳐다보는 아난다. 그들의 심정은 착잡했다. 그들은 혹시라도 파천이 발각될 경우를 대비해 무리를 헤치고 단상쪽으로 다가갔다.
“나는 이름 없는 떠돌이에 불과하지만 한마디를 해야겠기에 이곳에 올랐습니다. 오늘의 회합 소식을 듣고 희망에 부풀어 한달음에 오게 된 이유가 저 또한 여러분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누구나 할 것 없이 기나긴 전투로 인해 지쳐 있습니다.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저조차 피해를 고스란히 받고 있으며, 그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해대는 파천을 보며 권터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었다.
파천은 정말로 그런 것처럼 처량한 표정을 지었다. 목소리마저 비감에 잠겨 있어 듣는 이들의 마음을 찡하게 한다.
“저는 복잡한 사정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할뿐더러 알고 있어도 별로 언급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 같은 하급 영자도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딛고 사는 이곳, 무한계는 우리의 삶이 보장되는 유일한 터전이라는 사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우리 힘으로 지켜내야 할 소중한 곳이란 점입니다. 각자가 그 동안 지녀왔던 생각들이나 입장들이 다른 것 따위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서로 다툼이 있고 메울 수 없는 깊은 골이 서로 간에 있다 한들 어떻겠습니까?
우리의 공동 목표는 마계로부터 우리의 삶의 터전을 지켜내는 것. 그걸 위해서라면 잠시간 서로가 양보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많은 얘기들이 오갔습니다. 지금껏 경청하며 제가 느낀 건 단 하나. 서로 의견이 다르지만 그 가슴속에 품고 있는 ㄱ느본적인 생각은 하나더라는 점입니다.
더 큰 목표를 위해 잠시 동안만 서로의 욕심을 자제하면 안 될까요? 모든 걸 잃고 나서 후회해 봤자 소용이 없고, 작금의 위기는 영계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위협적인 상황입니다.
힘을 모아야 합니다. 뜻만 하나로 합칠 수 있다면 그 과정은 얼마든지 지혜롭게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제안하겠습니다. 모두의 뜻을 대변할 대표자들을 선출해 그들로 하여금 통합기구를 결성하게 하고 그들이 내린 결정에 우리 모두는 묵묵히 따르는 겁니다. 이후 그들은 다른 여타의 독립 노선을 지향하는 세력들과 담판을 지어 하나의 세력으로 다져 가게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전횡을 미연에 견제하는 감시기구도 동시에 만들어져야겠죠.“
파천은 그다지 크지 않은 소리로 부드럽게 말을 이어 갔다. 그의 얘기는 한참이나 더 이어졌다. 모습이 달라져서인지 그의 말투조차도 어딘가 달라져 보였다. 어쨌든 그의 제안을 들은 영자들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파천이 단상에서 내려온 이후에도 몇 명의 영자들이 자신의 뜻을 표했지만 크게 다른 내용은 없었다. 결국 파천의 제안대로 소규모 대표자회의를 통해 모든 걸 결정하기로 한다. 곁으로 돌아온 파천을 보며 아레나가 한소리 했다.
[다시는 이런 경솔한 짓 하지 마.]
[아무런 문제도 없네. 날 알아보는 이가 하나도 없잖아?]
광장에 모여 있던 무리는 매소 뮤린의 각지로 흩어져 갔다. 모든 사안이 결정되려면 더 많은 시간이 소모될 것이었다. 모인 무리들 중 전사단이나 펠라모를 대표하는 자들만이 한 곳으로 향했다. 그들간의 회의가 있고 나서야 모든 걸 결정날 것이다.
분위기로 봐서는 통합기구가 결성되는 데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단지 그 방법론적인 면에서는 상당한 진통이 예상되었다. 아난다는 모든 사안이 결정돼 구체적인 형태를 드러낼 때까지 뮤린에 머물자고 했다.
아레나도 딱히 반대할 입장은 아니었다. 솔직히 그녀도 궁금한 건 마찬가지였다.
고여 있던 물이 한꺼번에 쓸려 나간 듯 광장은 썰렁했다. 그곳에 파천이 서 있었다. 그는 단상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 중이었다. 아레나가 옆에 와 말했다.
“그만 가자.”
‘이들을 한데 결집시킬 방법은 없을까? 단지 전사들만의 연합이 아니라 전 영자들이 힘을 합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진정 없단 말인가? 마계를 저지하려면 그러지 않고서는 불가능한데…….’
파천이 이런 생각을 하는 배경엔 마계에 대한 씻을 수 없는 원한이 크게 작용한다. 그는 마계의 침공이 인간들에게 어떤 변화를 주었는지를 잘 안다. 그 경험은 지금까지도 그를 괴롭혀 오고 있지 않던가.
‘내게 힘이 있다면……. 아니, 이들과 구별됨 없이 동등한 입장에서 힘을 합할 수만 있다 해도 좋을 텐데…….’
파천은 그런 점이 너무 아쉬웠다. 아레나가 파천의 어깨를 탁 쳤다.
“왜?”
“어디다 정신을 팔고 있는 거야? 그만 가자. 괜히 이곳에서 얼쩡거리다 의심을 받는 날엔 모든 게 끝장이니까.”
아레나는 아직까지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눈치였다. 기다리고 섰던 아난다가 일행을 이끌고 한 곳으로 안내해 갔다. 그가 향하는 곳은 뮤린에서도 외곽 지역에 속한 지대였다.
중심부의 모습과는 달리 한적한 분위기에 띄엄띄엄 허술하게 아무렇게나 지은 듯한 가옥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것들 중에서도 가장 작고 볼품없는 곳을 향하는 아난다. 파천은 의아했다.
‘이곳에 혜능이 아는 이가 있기라도 한가?“
그 의문은 잠시 뒤에 풀렸다. 변신한 모습의 아난다를 반갑게 맞아들이는 자그마한 체구의 영자는 얼굴에 갖가지 흉터가 가득했다. 특히 벗겨진 대머리에 몇 올 밖에 남지 않은 머리털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아난다와 상대는 서로를 부등켜안고 한참을 소리 내 웃었다.
“이게 얼마만이야, 그래? 얘기는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이곳은 들르지 않을 거라 여겼지.”
“그렇게 되었네. 그래 지낼 만은 한가?”
“그럼. 이제는 적응이 되어서 지낼 만하네. 그건 그렇고 전사들간의 회합 소식을 듣고 여기까지 온 건가?”
“이 근처에 와서야 알게 되었네.”
“선발대를 이끌고 있다는 건 들었네.”
아난다와 두 손을 마주잡고 정담을 나누던 인물이 파천을 슬쩍 쳐다보며 묻는다.
“저 친구가 파천이란 생령인가 보군.”
정확하게 짚어내는 걸 보고 파천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 변신하고 있고, 더군다나 기운까지 감추고 있는데도 짚어낸 것이다. 파천은 궁금했다.
“어떻게 그리 쉽게 맞춥니까?”
“그리 어려울 것도 없지. 많은 이들 가운데 섞여 있다면 모를까.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라면 생령이라는 건 금세 알 수 있지. 아무리 기운을 차단한다 해도 말이야.”
파천은 상대가 스스로를 낮추기 위해 겸손하게 말한 것임을 알았다.
‘혜능과 매우 친밀한 사이 같은데 누굴까? 평범한 인물은 아닌 것 같은데…….’
“자, 다들 이리 와서 앉지.”
그는 나무를 깎아 만든 의자 몇 개를 가리켰다. 체중이 실리는 순간 삐거덕 소리가 날 정도로 낡아 있었지만 그것이 또 별다르게 파천에게는 한없이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파천은 그가 누군지 무척 궁금해했다. 그렇지만 아난다와의 대화에 열중하고 있는 상대를 보고 있자니 둘 사이에 함부로 끼여들 수가 없었다.
“메덴이 그런 소리를 지껄인 걸 보니 치앙마가 아주 작정을 했나 봐.”
“그렇겠지. 치앙마의 야심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지금까지 참아온 것만 해도 사실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야.”
파천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
“헤능, 이 분도 수련자?”
“네, 그렇습니다.”
“아냐, 수련자는 무슨. 다 과거의 일이지. 이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한심한 놈이 바로 나야.”
“무슨 그런 말이 있나. 지금이라도 이 문을 박차고 나가면 세상이 떠들썩할 텐데 말야.”
“하하하, 아난다 자네야 그렇게 생각하지. 난 한물 갔어. 그리고 사실 별 관심도 없고.”
파천은 아난다가 특별한 설명을 덧붙여 주길 바랐다. 그러나 아난다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듯했다.
“도나투스가 여길 왔다가 갔네. 무슨 급한 일이 있는지 내게 몇 가지 부탁을 늘어놓고는 부리나케 사라졌지. 대체 무슨 일인가?”
“대적자들이 다시 세상에 모습을 보였네.”
“뭐라고!”
그는 정말로 놀란 듯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는데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허물어지듯 털썩 내려앉은 수련자의 얼굴에 절망이 가득 했다.
“이제…… 때가 온 건가? 그럼 혹시…… 도나투스를 그들에게 보낸 건가?”
“그렇네.”
“자네…… 모험을 하는군. 자신 있나?”
“모르겠네, 나도.”
“그들이라면 상당한 힘이 되겠지만……. 과연 그들이 자네 말을 따를까? 자네만이 그들의 금제를 풀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수련자임을 그들 역시 알고 있다지만……. 그들은 야수에 가까운 위인들이야. 아직도 예전과 달라진 게 없다면…… 세상은 그들의 파괴적인 행위에 또다시 전율해야 하네.”
“나도 알고 있어. 그렇지만 그들의 힘이라도 내게는 절실하게 필요해. 자네가 내 곁에 있어 줬다면 이런 모험은 하지 않았겠지. 어떤가, 지금이라도 다시 돌아오는 것이.”
“싫어. 다시는 돌아가지 않아. 족장은 날 내 쫓았고 메덴도 날 제명시켰어. 내가 지금껏 한 노력이 모두 허사가 된거야. 더 이상 내게 희망은 없어. 그냥 이대로 있고 싶어.”
아난다는 상대의 눈을 쳐다보다 깊은 절망을 확인하고는 침음했다. 둘만의 대화가 이어지자 아레나는 불편함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들썩였다. 그걸 알아챈 아난다가 황망히 말했다.
“이것 제가 실수를 한 것 같군요. 여기는 제 오랜 친구이자 한때는 수련자였던…….”
“그만두게.”
자신에 대한 소개를 단호하게 거부한다. 아난다는 고개만 끄덕일 뿐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이름이 알려지는 걸 지극히 꺼리는 걸로 봐서는 그에게 무슨 사연이 있는 게 분명했다. 대신 선발대원들이 스스로를 소개했다.
“전 아레나라고 합니다.”
“전, 권터…….”
서로간의 간략한 인사가 끝나고 나자 대화는 또다시 둘 사이에서만 이뤄졌다. 둘에 의해 소외된 셋은 멀뚱거리며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아난다가 입을 열었다.
“도나투스가 무슨 부탁을 했다는 말인가?”
“자네가 시켰다는 말은 하지 않고 두 가지를 해달라고 하더군.”
“두 가지/”
“하나는 무한계에서 가장 맛이 좋안 부르를 한 독 마련해 달라는 거였고, 또 하나는…….”
“그런 부탁을 왜 했을까?”
아난다는 모르는 일이었다.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 엉뚱한 부탁이지 않은가?
“제 놈이 먹으려고 그런 거겠지. 또 하나는 좀 충격적ㅇ니 부탁이었는데……. 뮤린에 숨어 사는 미친놈을 설득해 놓으라는 거였어. 여길 지나쳐 갈 때 같이 동행할 수 있게 말야. 그리고는 떠났어.”
“미친놈이라면 바로…….”
“그래 그놈이지.”
“그가 이곳에 있었나?”
“꽤 됐어. 광장 근처에 있는 주점에 가면 그놈을 항시 볼 수 있지. 그놈은 술에 절어서 살지. 그것이 없으면 한시도 제정신으로 돌아다니지 못할 정도가 되어 있네.”
“흐음.”
“그를 왜 데려 가겠다는 건지……. 자네가 시킨 일이 아니었나?”
“모르는 일일세.”
“그 친구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겠지. 그래, 언제 떠날 셈인가? 이곳에 오래 있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은데 말야.”
“금방 갈거야. 어떤 식으로 결정되는지만 보고 곧장 떠날 거야.”
“자네에 대한 소문이 이곳까지 퍼졌더군. 자네의 전신이 쿠사누스였다니……. 좀 의외였네.”
아난다는 한동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자네를 상당히 많이 안다고 자부했었는데……. 이제 보니 그런 것도 아니었어.”
“일부러 속이려고 했던 건 아니었네. 단지…… 말하기가 난처해서였을 뿐이야.”
“그랬겠지. 이곳을 떠나면 곧장 루하스 강변으로 길을 잡을 건가?”
“왜 그러나?”
“지금 루하스 강변에 용병 시장이 형성되어 있는 걸로 들었거든.”
“그들이 이제는…… 남부권에까지 손을 뻗칠 참인가?”
“욕심이란 원래 끝이 없지 않은가? 처음 비행선을 띄우고 용병 장사를 할 때만 해도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세력이 커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지금 그들의 힘은 중부권 오대전사단 중 둘을 합쳐 놓은 것만큼이나 대단해졌지. 그들이 이번에 남하한 데엔 분명 이유가 있을 걸세. 웬만하면 그들과 마주치지 않는 게 좋을거야.“
“잘 알겠네.”
“대적자들이 들어왔으니 조만간 큰바람이 불겠어. 그들이 지금껏 잠자코 있었던 것도 생각해 보면 기적에 가까운 일이지. 쉽게 움직이는 자들이 아니니 분명한 목표를 지니고 들어섰겠지.”
“그렇다고 봐야지.”
“이래저래 자네의 노고가 이만저만이 아니겠어. 어떻게 도울 수 있는 방법도 없고……. 어떤가, 내 아이들이라도 빌려 줄까?”
“그래 줄 수 있겠나?”
“그야 어려울 것도 없지. 언제든 녀석들을 써먹게. 내 미리 손을 써 놓을 테니 말야.”
“고맙네.”
“고맙긴. 우리 사이에 그런 말이 가당키나 한가.”
두 영자의 정겨운 대화는 끝이 없을 듯 했다. 아난다는 좀더 있을 참인 것 같았다. 아레나와 권터는 눈치를 보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슬며시 나온다. 파천은 상대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끈질기게 붙어 있었지만 결국은 단 하나도 알아내지 못해 실망감이 컸다.
파천이 알아낸 건 단 하나, 그가 예전에 수련자였고 현재는 무슨 일 때문인지 모르지만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정도였다. 아난다와 손을 마주잡고 배웅하는 영자의 모습에서 파천은 특이한 걸 발견해냈다. 두 손이 먹물에 담갔다 방금 배낸 것처럼 새카맣다는 점이었다.
“잘 가게.”
“정말 안 되겠나?”
“어허, 이 친구 참 끈질기기는…….”
“힘을 모아야 하지 않겠나? 이대로 모든 걸 내어 줄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아니어도 나설 자들은 많아. 솔직히 말해서…… 나 또한 자네를 돕고 싶은 맘 간절하네. 그렇지만…….”
“뭘 망설이는 건가?”
“약속은 아직 유효하네. 내가 먼저 약속을 깰 수는 없어. 내가 했던 말 아직도 기억하고 있나?”
“알겠어. 더 이상 미련을 가지지 않겠네. 대신 한 가지만 약속해 주게.”
“뭘 말인가?”
“자네가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되면 날 먼저 찾아와 주게. 그래 줄 수 있겠나?”
“물론이지. 그야 당연한 것 아니겠나.”
“그럼, 난 이만 가겠네.”
“그래, 수고래. 아, 그리고 선발대원 여러분들도 몸조심들 하시고……. 꼭 성공하시길 빌겠소.”
그는 집 앞에 나와 선발대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선발대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힘없이 손을 내린 영자는 폐부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한숨을 토해냈다.
그의 등 뒤에 새로운 인물이 나타났을 때 뒤돌아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저들을 보호해라. 함부로 나서지는 말고 결정적인 위기가 닥치면 도움을 주도록.”
“네, 알겠습니다.”
“아난다와 언제든 연락이 닿도록 조치하고.”
“네.”
“저들이 희망이 될지 절망을 던져 줄지는 아직은 속단할 수 없는 일이지만……. 쉽게 좌절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내 비록 직접 움직일 수는 없지만 내가 지닌 모든 영향력을 동원해서라도 저들을 돕겠어.”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인 것 같았다. 그의 이 한마디가 앞으로 어떤 의미로 선발대에 영향을 미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광장으로 다시 돌아온 선발대는 주변 여기저기에 무리를 짓고 모여있는 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회의는 좀처럼 쉽게 끝나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긴 그리 간단히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가벼운 사안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메덴과 칠대부족의 문제도 무시할 수 없는데다 이곳에 오지도 않은 전사단들과 펠라모에 대한 대책도 수립해 두어야 했다.
선발대는 몇 곳의 주점에 들어갔다가 빼곡히 들어찬 내부를 보고는 한 발도 들이지 못하고 되돌아 나와야만 했다.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였다. 주점이 아니더라도 광장 주변의 건물들 내부엔 그 어디나 마찬가지 풍경이 펼쳐졌다. 결국 그들은 광장 모퉁이 한 곳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을 수밖에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곳에 좀더 있는 건데 그랬어. 그 자는 누구지?”
파천이 아난다에게 지금까지 지니고 있던 궁금증을 털어놓았다. 아난다는 대답해 줄듯 줄듯 하다가 그만둔다.
“죄송합니다. 그가 원치 않으니 밝힐 수는 없습니다.”
역시나 파천의 예상처럼 아난다는 밝힐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미안해 할 이유는 없지. 그냥 좀 궁금해서 물어 봤던 거야.”
파천은 앞을 지나가는 전사들을 살피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만약 이들이 반대자들을 척결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는다면 그건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다. 참여한 자들의 면면을 보아서는 어느 정도가 이번 일에 참여하는지를 알 수가 없군.’
“중부권 전사들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어느 정도의 비율이 이곳에 온 거지?”
아레나가 대충 가늠해 보더니 약간은 자신 없는 투로 말했다.
“대포들만 보냈다고 봤을 때 아마도…… 삼분의 일 정도? 그보다 더 많을까?”
권터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정도는 넘지 않겠어? 절반 정도는 되겠지.”
“히야, 그 정도로 많아?”
“그러니 대단한 일이지. 이런 일은 아마도 처음일걸. 나도 한자리에서 이렇게 많은 전사들이 한꺼번에 대하는 건 처음이다.”
아레나는 오대전사단 중 유클릿만 참여한 것에 대해 언급하며 불안감을 표시했다.
“그들이 참여하지 않는 전사 연합이라면 별 의미가 없겠어. 게다가 그들과 비등한 수준의 이름난 몇몇 전사단들 중에서도 그리 많이 참여한 것 같지는 않고 말야.”
“그래, 그게 문제야. 숫자가 아무리 많으면 뭐하겠어? 속 빈 강정이지.”
맞장구 치는 권터에게 파천이 질문했다.
“만약 여기서 결정된 사항들을 이 자리에 참석치 않은 전사단들이 정면으로 거부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거부할 명분이 주어진다면 모를까, 그리 쉬운 문제는 아니지. 만약 분명한 명분이 있어 거부할 수 있게 된다면 글쎄…… 큰 일이 벌어지겠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게 혈투가 벌어질 거야. 서로의 생존을 건 치열한 전투가.”
무서운 일이었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것들이 무한계에 새로운 국면을 만들 것은 자명한 일. 그것이 파멸을 앞당기는 일일지, 화합으로 나가게 할지는 아직은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더 불안한 것이다.
“결국 메덴이 변수야.”
아레나의 말처럼 메덴이 변수였다. 그런데 그들은 전사연합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천명한 바 있다. 만약 전사연합체가 그 태도에 대해 감정적으로 대응하기라도 한다면 걷잡을 수 없는 비극이 발생할 것이었다.

선발대는 이곳에서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를 놓고 고민해야만 했다. 시간이 많이 소진될 것이란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로 걸릴지는 생각지 못했었다.
그 문제를 놓고 얘기하는 파천 옆에서 아난다가 한 곳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중이었다. 파천이 슬쩍 돌아보며 아난다의 의견을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
아난다의 굳은 얼굴을 대한 파천은 반사적으로 그가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가 쳐다보고 있는 곳은 주점 앞이었다. 웬 비렁뱅이처럼 보이는 영자가 비굴한 표정으로 전사 앞에서 굽신거리고 있었다.
‘아나다가 왜 저러지? 혹시 아는 자인가?’
그때 대머리 영자가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럼 저 자가?’
옷은 헤쳐 올이 벌어져 있었고 그 사이로 삐쳐 나온 살갗은 얼마나 씻지 않았는지 때가 덕지덕지 끼어 있구나.‘
‘영자들 중에서도 거지가 있구나.’
처음 알게 된 사실이 놀랍지는 않았다. 파천은 멀리 보이는 자가 아난다와 관련이 있는, 어쩌면 한 때는 수련자였을지도 모를 영자의 비참한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아난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아는…… 영자인가?”
아난다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의 ㄴ누가에 설핏 물기가 맺혔다고 느낀건 파천의 착각이었을 것이다.
“아닙니다.”
아난다는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파천은 그 말이 거짓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대체 무슨 사이일까? 아는 사이가 분명할 텐데 왜 아난다는 부인 하는 걸까?’
파천은 더 이상 의문을 이어 갈 수 없었다. 광장의 단상에 누군가가 올라서는 걸 보았고 그자의 입에서 큰 소리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드디어…….”
광장 주변에 있던 전사들이 빠르게 단상 주위로 몰려들고, 파천의 일행도 그들 가운데 뒤섞였다. 함께 걷던 파천의 눈에 낯익은 자들이 눈에 띈다.
‘저들은 바로크 전사들.’
어느새 몰려든 전사들 때문에 종적을 놓쳐 버리자 파천은 고개를 이리저리 빼보며 그들을 찾았다.
‘아직 이곳에 있었구나.’
단상에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앙샹뜨였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소를 간직한 여전사 앙샹뜨는 우아하게까지 느껴지는 몸짓으로 좌중을 돌아본다. 파천의 눈과도 언뜻 마주친 것 같았으나 알아보지는 못했다.
파천을 비롯한 선발대는 비교적 단상과 가까운 지점까지 다가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녀의 작은 표정의 변화까지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무척이나 밝은 것으로 봐서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결정이 된 것 같았다.
“우리의 염원이 이제야 이루어질 것 같네요. 전사단과 펠라모 대표들의 연석회의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먼저 무한계 전사들의 연합기구를 결성하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했습니다.”
“와아.”
광장이 떠나갈 듯한 함성은 한참이나 더 이어졌다. 아무리 전투가 업인 전사들이라 해도더 이상의 무의미한 분쟁은 원치 않았던 것이다. 그들의 반응에 앙샹뜨도 매우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인지 영자들이 마음껏 소리치며 좋아할 수 있게 잠시 입을 닫고 지켜본다.
뒤이어 몇 명의 인물들이 단상으로 올라 앙샹뜨의 뒤에 와 선다. 그들 중 하나가 앙샹뜨를 재촉했다.
“어서 마저 발표하시죠.”
“네.”
상대를 향해 살짝 웃어 준 앙샹뜨가 재차 군중들을 향해 회의에서 결정된 사안들을 발표했다.
“통합기구의 정식 명칭은 ‘전사평의회’로 정해졌습니다. 평의회에 들 수 있는 자격 요건에 제한은 없습니다. 굳이 전사가 아니어도 좋고 전사단에 소속되지 않은 개인 자격으로도 얼마든지 가입이 가능합니다.
평의회 소속 전사단은 앞으로 동일한 문장기를 사용하게 되며 평의회에서 내린 결정을 이행하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 일정 기한을 두고 우선적으로 평의회 가입을 받게 되며, 오늘 대표를 파견하신 전사단과 펠라모의 대표들께서 평의회의 발기인이 되시는 겁니다.
평의회 소속 전사단은 의무적으로 일정 수의 전사들을 본부에 파견해 일정에 차질이 없게 해주셔야만 합니다. 뿐만 아니라 특별한 명이 하달될 때에는 전사단의 그 어떤 일보다 우선적으로 이행해 주셔야 합니다. 평의회는…….“
그녀의 설명은 길었다. 대략 간추려 보면 이랬다. 펑의회의 본부는 임시적으로 중부권의 매소인 하룬에 두기로 했다. 평의회 본부에 주둔하는 마계와의 전쟁이 끝나는 시점까지 평의회의 명에만 따라야 한다. 평의회는 소속 전사단장과 펠라모의 대표들이 참여하는 의원들로 구성되며, 그들을 통해 의장을 선출한다.
의장의 권한은 의원들의 동의하에 그 무엇이든 결정할 수 있다. 형식면에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실제적으로 의장의 권한은 절대적이라 할 수 있었다. 모든 평의회 소속 전사들의 생사여탈권을 한 손에 틀어쥐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별한 공로가 인정되거나 평의회에 지대한 헌신을 한 자를 가려 장로로 선임하며, 그들의 수는 일정 수를 넘지 못하게 했다. 장로의 역할은 평의회 의장의 전횡과 독재를 견제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오대전사단의 단장들 정도가 그 직위에 적합할 것이다.
가입을 하지 않은 전사나 전사단은 유예 기간 동안 가부를 결정해야 하며 끝내 거부할 시에는 모든 자격과 권리를 박탁한다. 힘으로 제압하겠다는 의미였다. 일단은 전사들에만 국한되긴 했지만 분명 입회에 강제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도 충돌이 예상되었다.
평의회는 기본적으로 수련자나 일반 영자, 칠대부족 등 전사가 아닌 영자들에 대해서는 강제력을 가지지 않고, 서로간의 다른 노선을 인정하지만 만약 평의회의 행사에 불만을 가져 방해하거나 적대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하기로 했다. 어느 정도는 유연한 태도를 보이나 결과적으로는 그 어떤 반대 세력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재확인한 것이었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것들이 앙샹뜨의 입을 통해 모두에게 전해졌다. 앙샹뜨는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더 자세한 사항들은 각 전사단을 통해 통보해 드리겠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매소 하룬에서 전사대회를 개최해 평의회 입회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평의회 의원이 결정되는 대로 의장을 선출할 것이며, 그 자격은 의원이면 누구나 되실 수 있습니다.
후보자가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섯 이상의 의원으로부터 추천을 받아야 합니다. 후보자의 수가 둘 이상일 때는 그들간의 결투를 통해 선발하며 최종적으로 후보로 추대되었다 해도 평의회 과반수 이상의 동의를 받지 못하면 재선출하겠습니다.
전사대회에는 의원과 의장 선출 이외에도 평의회 산하 각 조직을 이끌 수장들과 평의회 소속 전사단에서 파견된 전사들을 실력에 따라 분류하여 직위를 부여하는 일도 겸하도록 하겠습니다.
소속이 없는 전사나 전사가 아니라 하더라도 누구든지 도전할 수 있으며 그 실력의 고하에 따라 적당한 지위가 주어집니다. 아무쪼록 많은 분들의 관심과 참여를 기대하면서 전사 통합기구 결성 대회의 공식적인 행사는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그녀의 마지막 말이 떨어지고 나자 단상에 있던 자들과 앙샹뜨가 서로 인사를 하며 비교적 환한 표정을 지었다. 파천이 보니 마이어가 앙샹뜨에게 뭐라고 말하는데 앙샹뜨가 난처한 표정을 짓느다.
마이어의 옆에는 또 다른 전사가 바싹 붙어 있었는데 그 풍기느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마이어는 그 자에게 뭔가 지시를 내리는 듯 했다. 그러자 고개를 숙여 보인 전사가 아래쪽으로 내려가기 위해 몸을 돌려세웠다. 바로 그때였다.
“단장님!”
누군가 단상에서 막 내려오는 전사를 향해 날아올랐다. 파천은 소리가 들린 쪽으로 급히 고개를 돌리다 깜짝 놀랐다.
‘저들의 바로크 전사들. 그럼…… 저 자가 바로크?’
의외의 사건 앞에 파천은 얼어붙었다. 그렇게 찾아 헤매던 자가 엉뚱한 곳에서 모습을 보인 것이다. 철석같은 약속마저 어기고 마이어 옆에 있었던 바로크. 그를 알아본 전사들 셋은 앞뒤 가리지 않고 단상으로 뛰어 올랐다. 너무도 갑작스런 일이라 아레나조차 잠시 어찌된 일인지 알지 못했다.
바로크 전사들이 뛰어 오르는 순간, 그들을 향해 사방에서 살기가 몰려들었다.
슈슈슈슈슈
마이어의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고 함께 동행하던 전사는 무슨 일인지를 몰라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걸 본 파천은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직감적으로 생각했다.
‘위험하다.’
사방에서 바로크 전사들을 향해 쏘아져 간 것은 주변에 있었던 유클릿 전사들이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바로크 전사들보다 빨랐다. 채 단상에 오르지도 못하고 바로크 전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내동댕이쳐지고야 만다. 파천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
파천은 다른 걸 생각 할 수 없었다. 스스로 기운을 차단해 다른 이들의 이목을 속이고 있다는 사시로, 지금 자신을 드러내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위험성도 그의 결정을 지연시키거나 막을 수 없었다. 유클릿 전사들이 바닥으로 떨어진 바로크 전사들을 향해 살수를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둬!”
파천의 외침이 입을 떠난 순간 그는 이미 허공중으로 도약했고 어느새 유클릿 전사들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아난다고, 아레나도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었기에 손도 쓰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다. 그 순간 어디선가 지른 듯한 소리들이 아난다의 귀에 들렸다.
“생령이다.”
“선발대가 여기 와 있었다.”
아난다는 가슴 한쪽이 덜컹 내려앉는 걸 느꼈고 아레나의 곱고 아름다운 얼굴은 긴장으로 잔뜩 찡그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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