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28화 : 머나 먼 루하스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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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검 – 128화 : 머나 먼 루하스 강


머나 먼 루하스 강

돌연한 파천의 등장은 잘 조화되어 어우러진 그림 속의 채색들을 하나의 색깔로 지워 버린 것만큼이나 전경을 돌변시켰다.
뜻밖의 놀람은 아난다나 아레나, 권터 만의 것은 아니었다. 광장에 모여 있는 전사들 모두가 동시에 겪고 있었다. 생령 하나가 앞을 막아섰다고 해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이끌고 진로를 방해한다 해서 하던 일을 주저할 유클릿 전사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속도를 늦추지 않고 파천까지 권역에 포함시켜 공격해 간다. 바닥을 기고 있는 볼품 없는 바로크 전사들과는 달리, 패기를 갈무리 한 채 고도로 절제된 최소한의 동작만으로도 그들은 막강한 힘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제 파천에게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 바로크 전사들을 보호하고 자신의 생명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태만할 수 없기에 전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다른 이의 도움이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위기를 극복해 내야 하는 것이다.
허공에 떠 있는 파천의 발끝에서 머리끝을 관통하는 기운은 땅바닥에서 공중으로 십여 장이나 치솟아 오른다.
유형화된 프리즈마의 기둥이 활짝 벌린 파천의 팔을 경계점으로 강력한 보호막을 형성한다. 형형색색의 기운들이 파천에게로 몰려왔고 그것은 이내 화려한 폭발을 일으켰다.
그 순간 모든 이들의 예상을 깨고 파천은 하늘로 더욱 솟구쳐 올랐다. 그러는가 싶더니 이내 새파란 불꽃에 휩싸인 채 유클릿 전사들에게로 돌진해 갔다. 그 빠름은 번개가 무색할 정도였다.
애초의 공격 목표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파천은 장내를 빠르게 오갔고, 그와 보조를 맞춰 유클릿 전사들의 움직임도 분주해졌다.
손에 든 파라슈를 허공중에 어지럽게 그어 갔다.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별 소득을 얻지 못했음에도 유클릿 전사들은 그다지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움직임의 반경을 사방에서 조밀하게 차단하며 서두름도 없이 파라슈를 매우 정교하게 손 안에서 놀리고 있었다.
그들이 파라슈를 사용하는 기술은 투박하지 않고 세밀했다. 잠깐 동안에 수십 개의 선이 전면에 그려지는가 하면 때로는 예측할 수 없는 파격적인 최직단의 선을 찔러 들어오기도 했다.
그들이 취한 자세로 공격로를 예상한다는 건 너무도 위험한 일이었다. 곡선과 직선이 어우러진 완벽한 포위망은 파천을 곤경에 빠트릴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그 정도로 간단히 파천을 굴복시킬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힘의 우위 면에서는 오히려 파천이 유클릿 전사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때 아난다와 아레나, 권터가 파천을 공격하는 유클릿 전사들의 배후를 노린다. 일이 이쯤 되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을 지경으로 치달아 갔다. 광장의 이곳 저곳에서 숨죽이고 대결을 지켜보던 전사들 중 일부가 격전에 참여코자 치솟아 오른 것이다.
막 아난다의 공격이 발동되려 할 때였다.
“물러서!”
파천의 외침과 동시에 십여 장을 휩쓸어 버리는 프리즈마의 폭풍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유클릿 전사들은 동일한 하나의 동작을 취했다. 파라슈를 가슴 앞에 세우고 보호막을 치며 뒤로 몸을 빼내는 것이다.
포위망이 느슨해진 틈을 타 아난다 등이 파천의 곁으로 다가갔다. 아난다는 전사들의 배후를 공격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파천이 안전한 거슬 확인한 이상 굳이 그드르을 살상할 필요성?지는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 간에 그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자연스런 정적이 잠시간 흘렀다. 조금 전 보여 주었던 파천의 위력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설마하니 생령이 이 정도로 강할 수 있으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십여 명의 전사들을, 그것도 중부권 최강이라 불리는 오대전사단 중 하나인 유클릿의 일급 전사들을 한꺼번에 밀어내 버릴 줄이야.
모두는 예상 밖의 결과를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대…… 단하군. 진정 의외야. 사로잡기 힘들면…… 재워라.”
마이어의 명령은 단호했다.
유클릿 전사들이 다시 움직였다.
그 움직임을 막아서는 것이 있었다. 앙샹뜨였다.
“기다려요.”
두 팔을 활짝 버리고 앞을 가로막는 앙샹뜨를 유클릿 전사들은 쉽사리 공격 못하고 주저한다. 멈칫거리며 마이어의 결정을 기다린다.
다른 전사들이 웅성거리지 시작했다.
“앙샹뜨 님, 어서 비켜나세요.”
“대체 왜 저래?”
“저들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 아냐?”
침묵하는 무리 가운데 여기저기서 이런 의문 섞인 중얼거림이 간헐적으로 터져 나왔다.
입을 굳게 다물고 앙샹뜨를 바라보던 마이어가 손을 올리는 듯하더니 슬그머니 내린다. 그러자 유클릿 전사들이 일사불란한 동작으로 마이어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렇다고 해서 앙샹뜨의 말대로 잠자코 따르고만 있을 심산은 아니었다. 잠시 수하들을 물렸을 따름이었다. 그는 아샹뜨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쳐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이들은 우리의 적이 아닙니다.”
“적이 아니다? 그럼 그들이 우리의 동지인가요? 더군다나 그들은 허락도 받지 않고 몰래 이곳에 잠입했으며 본 전사단을 공격하기까지 했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자기 방위였어요. 모두 진정들 하시고 제 말을 들어 보세요. 이들은 선발대 입니다. 광명을 가져오는 이유가 무엇이죠? 공동의 적인 마계를 견제하기 위함이 아니던가요? 도움을 주지 못할 망정 앞길을 막아서는 안 되죠.
그렇지 않은가요, 마이어님? 더군다나 전사평의회가 경성된 이 마당에 전체의 뜻을 모이지도 않고 독단적인 결정을 내리는 건 너무 성급한 것 같네요.”
내심으로야 동의하고 싶지 않은 마이어였지만 겉으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군요. 제가 경솔했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죠. 그들은 전사평의회가 영릴 매소 하룬?지 포박해 가는 겁니다. 이후 선출될 의장의 뜻에 따르면 되겠군요.”
전사들은 대부분 마이어의 의견이 적절하다고 느겼던지 고갯짓을 해 동의를 표했다.
아샹뜨가 파천과 아난다를 돌아보았다. 파천의 눈은 마이어의 의도대로 순순히 따르지 않을 것임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아샹뜨는 파천의 눈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느겼다. 파천만이 아니었다. 아레나가 허리에 매달려 있던 파라슈를 꺼내들며 마이어를 직시했다.
“아마 그리 쉽지는 않을 거야.”
마이어는 비켜달라고 했다. 그러나 앙샹뜨는 그럴 수 없었다.
“모두 잘 들어요. 전 끝까지 선발대와 함께 할 겁니다. 이들이 스스로의 유익을 위해 여정에 나선게 아니라는 걸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발짝도 물러설 수 없습니다. 다수의 힘으로 이들을 핍박하겠다면 저까지 포함시켜 주세요.”
앙샹뜨의 그 말은 마이어뿐만 아니라 광장에 있던 전사들 모두를 당황케 만들었다.
단상 바로 아래에 있던 자들 중에 하나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는 놀랍게도 슈트레였다.
“저 또한 선발대를 지지합니다. 전사평의회가 앞으로 어떤 노선은 걸을지 알 수 없지만 천상계, 선계와 적대하리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을 대하는 데 있어 좀더 신중해야 합니다.
존경하는 마이어 님께서 죽이라고 명하시다니요. 설마하니 그 뒷감당을 전사 평의회에 떠넘기실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평소 흠모해 왔던 마이어 님이 이런 경솔한 결정을 하시다니……. 실망을 금치 못하겠군요.”
옆에 있던 바이롬도 거든다.
“나도 같은 생각이오. 전사평의회가 결성된 이상, 그 누구도 저들에 대해 독자적으로 결정해서는 안 될 것이오. 선발대는 아직은 실체화되지 않았으니 희망의 그림자와 마찬가지요. 만약 그대 마이어가 끝까지 고집을 부리겠다면 나도 그대 앞을 막아서겠소.”
마이어는 내심으로야 기가 차ㅉ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태연한 모습이었다.
“다들 오해가 있는 것 같군. 저들이 무엇을 하건 나와 유클릿 전사단과는 상광이 없다. 만약 저들이 이 자리에 나타나지만 않았다면 굳이 이런 좋지 않은 만남을 가져야 할 이유는 없었겠지.
그러나 그대들이 보다시피 선발대는 전사들의 회합에 몰래 잠입했다. 그리고 우리와 대항할 뜻을 분명히 했다. 다시 한번 내 뜻을 밝히겠다. 저들을 사로잡아 매소 하룬까지 데려 간다.
이후 저들에 대한 결정은 전사평의회에서 내려질 것이다. 저들이 순순히 따르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겠지. 힘으로 제압할 수밖에.”
그는 고집이 센 자였다. 뜻을 굽힐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의 뜻에 따르는 자들은 그렇지 않은 자들보다 많았다. 그가 데려 온 전사들은 당연했고 평소 그와 여러 형태로 친분이 있던 자들, 장차 전사평의회의 구심절이 될 유클릿 전사단을 거스리지 않으려는 기회주의자들까지 동조하고 보니 그 수는 꽤나 되었다.
더군다나 심정적으로나마 동조하는 자들까지 더한다면 그건 무시할 수 없는 비율이었다.
“ 다 떠들었나? 좋아, 이렇게 된 이상 끝까지 가보는 수밖에.”
파천의 그 말은 상황을 악화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때까지도 중립적이었던 자들이 벌떼처럼 일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시건방진 놈!”
“감히 생령 주제에.”
“저놈의 기를 꺾어 버리자.”
의도를 염두에 두지 않고 뱉어낸 말이 전사들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호전적인 그들의 그의 톡쏘는 한마디에 잠자코 있을 리가 없었다.
이제 대결은 피할 수 없는 양상으로 치달았다. 앙샹뜨는 설마하니 선발대가 이곳에 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일촉즉발의 위기를 타개할 자는 이제 자신 밖에 없어 보였다.
그녀는 아난다에게 가까이 다가가 간절한 어조로 청했다.
“설마하니 저들 모두와 대결하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잠시만…… 굽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앙샹뜨의 말처럼 저들 모두와 상대하고 숭산을 기대할 수는 없다. 아마도 결과는 더 비참해질 것이다.
죽지 않는다 하더라도 수모는 감수해야 한다. 만약 지금이라도 고개를 숙인다면 어느 정도의 예우는 기대할 수 있다.
아난다는 고민했다.
“아난다 님, 고민할 것도 없습니다. 이건 억지예요. 저들이 결정하는 대로 따라야 한단 말입니까? 전사평의회가 선발대 하산을 경정한다면 그대로 따라야 하는 겁니까? 파천의 말대로, 이렇게 된 것, 끝까지 가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승산이 없지만 굴욕보다는 낫습니다.”
아레나의 자존심 역시 누구 못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이 파천으로 인해서였지만 누구 하나 그것 가지고 뭐라 하는 이는 없었다.
파천은 위기에도 불구하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바로크 전사들을 신경쓰고 있었다. 그는 마이어의 옆에 서 있는 자를 다시 할번 관찰했다.
‘평범한 자는 아니야. 마이어의 다른 수하들과는 분명 다른 점이 있다. 저 자가 바로크라는 얘긴데 왜 저 자가 마이어와 함께 있단 말인가? 저 태연한 신색으로 봐서는 자기 수하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은데?’
“아난다 수련자, 어떻게 할 텐가? 순순히 우리를 따르겠는가, 아니면……. 끝까지 대항하겠는가?”
쉬운 선택은 아니었다. 아난다가 경정을 못 내리고 망설이는 동안에도 전사들은 선발대 주변을 천천히 포위하고 있었다. 땅이든 하늘이든 이제 부딪치지 않고서는 도주하는 것도 불가능해진 것이다.
아난다는 결정권을 파천에게로 이양했다.
“파천 님의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우리를 포로로 잡겠다는 건가? 흥, 전사평의회가 앞으로 어떤 일들을 벌일지 보지 않아도 뻔하군. 파천, 생각할 것도 없다. 저들의 요구대로 따를 수는 없어!”
평소 지니고 있던 전사들에 대한 악갑정이 아레나를 지나치게 흥분시키고 있었다. 설사 이 자리에서 목숨을 잃는다 해도 아레나는 고개를 숙이지는 않을 것 같았다.
옆에 있던 권터가 한숨을 내쉬며 작게 중얼거렸다.
“결말을 보고 싶었는데……. 아쉽군.”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마이어, 우리를 보내 주면 안 되겠나? 공동의 적을 지닌 자로서의 부탁이다.”
“공동의 적이라면 마계를 말하는 거겠지. 그러나 그건 차후의 일. 당장은 전사평의회의 기틀을 세우는 게 우선이다. 시작부터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누가 우리의 존재를 인정하겠는가, 그렇지 않은가?
메덴이 그런 망발을 한 것도 우리를 쉽게 보기 때문이지. 앞으로는 그 누구도……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 첫 시도가 너희들 선발대에 대한 처결이다. 그래서 난…… 너희를 이대로 보낼 수가 없다.”
마이어가 재차 뜻을 분명히 하자 선발대를 둘러싼 전사들의 수가 급속히 늘어났다.
마이어가 공격명령을 내리는 순간 선발대의 우명은 결정될 것이다. 아난다가 아무리 이름난 수련자고 아레나와 앙샹뜨가 최강의 여전사들이라지만 저 많은 수의 전사드릉ㄹ 모두 상대할 수는 없다.
마이어는 다시 한 번 앙샹뜨에게 입장을 분명히 하라고 경고했다.
“선발대로 인해 우리와 적대하실 셈입니까?”
“어쩔 수 없네요. 저는 지금껏 제 신념에 따라 행동해 왔어요. 지금…… 제 마음송의 소리는 저로 하여금 용기를 내라고 말하고 있어요. 옳지 않은 일이란 걸 알면서 안위만을 염려하기엔 제 양심의 소리는 너무도 크군요.”
“모두 잘 들어라. 순순히 투항하면 포로로 예우를 하겠지만 대항하면……. 그가 누구라도…… 죽여라. 이후의 책임은 전적으로 내가 지겠다.”
앙샹뜨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마이어가 다시 말했다.
“바이롬, 너도 대항할 셈인가?”
“그야…….”
바이롬의 말을 슈트레가 가로챘다.
“우리는 빠지겠소.”
바이롬의 팔을 잡아당겨 뒤로 물러서는 슈트레. 파천의 그를 씁쓸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바이롬도 뭐라고 입을 열려다가 끝내 다물고 말았다.
“끝까지 대항하겠는가?”
파천은 대답하는 것도 귀찮았는지 간단하기 말했다.
“네가 그렇게 만들지 않았나.”
마이어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그려졌다 지워진다.
‘저들을 모두 죽인다면…… 새로운 전쟁을 수행해야 된다. 수련자를 공개적으로 죽였으니 메덴에게 우리를 칠 수 있는 명분을 주는 것이고, 선발대를 공격했으니 천상계, 선계와도 관계가 악화되겠지. 그러나 대가는 그보다 크다. 비로소 무한계는 전사들의 것이 될 것이다.’
“전사들은 들어라. 저들이 대항할 뜻을 분명히 했다. 전사평의회는 저들의 죽음 위에 흔들림 없이 견고하게 자리잡을 것이고 더욱 빛날 것이다. 대항하는 자는 모두…… 죽.”
“멍청이, 기다려!”
마이어의 입에서 살인 명령이 막 떨어지려는 순간, 광장의 끄트머리에서 그 소리를 집어 삼켜 버리는 더 큰 외침이 터졌다. 마이어뿐만 아니라 파천 인행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
‘저 자는!’
무를 뛰어넘어 다가오는 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이었다. 광장 입구 쪽에서 보았던 그 자. 의혹의 걸인이었다.
아난다와 안면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물이라고 염두에 두었었다.
그 걸인이 마이어의 입을 막아 버린 것이다.
단숨에 무리들을 뛰어넘은 비루한 행색의 인물은 그다지 넓지 않은 단상 위로 착지하려 했다. 마이어의 수하 중 하나가 앞을 막아서며 착지를 방해했다. 그때다.
슈팟
붉은 빛이 번쩍했다고 느낀 순간 유클릿 전사 하나가 목과 몸이 분리된 채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목 없는 유클릿 전사의 몸을 걸인의 손이 슬쩍 밀어낸다.
맥없이 단상 아래로 떨어지는 시체를 마이어는 노려보고 있었다.
수하가 죽은 것이다. 전사가 싸움터에서 죽어나가는 거야 대수로운 일이겠는가마는 지금은 달랐다. 자신이 지켜보는 앞에서 대항 한 번 못해 보고 살해되었다는 건 좀 다른 의미였다.
충격을 떨쳐내며 눈앞을 노려보는 마이어는 당장에 튀어나가려는 수하들을 제지했다. 그의 침착함은 상황을 진정시키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더 큰 살기를 불러 일으켰다.
“너는 누구냐?”
이 상황에서 그는 꼭 그 물음을 던졌어야만 했을까? 마이어는 제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마음의 부담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눈앞에 서 있는 자를 어디선가 본적이 있다는 희미한 기억 때문이었다. 그것도 그리 좋지 않은 기억.
그는 상대의 대답을 기다리면서 시간 깊숙이 침잠해 있는 기억의 실체를 건져 올리느라 안간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걸인은 마이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마구잡이로 말을 뱉어냈다.
“정신 나간 놈, 유클릿이 네게 전권을 일임했을 때는 매사에 신중하게 대처하라는 뜻이었을 터인데, 네 놈의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세상을 뒤흐들어 놓을 셈이냐! 네 놈이 뱉어낸 한마디가 어떤 재앙을 불러올지 생각이라도 해봤더냐!”
마이어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아 입을 벌릴 때마다 냄새가 나는 것 정도는 참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자리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내용들은 인내심 많은 그도 좀처럼 참아내기 힘든 것이었다.
“미친놈이었군. 죽여라.”
간단해서 좋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마이어의 얼굴이 하얗게 변색되며 황급히 손을 들었다.
“잠깐!”
막 튀어나가려는 수하들을 다시 잡아 둔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당신은 혹시?”
그의 눈동자가 머문 곳은 걸인의 두 손이었다. 바닥과 등이 온톤 새빨간데 그 가운데 선명한 검은색 선들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는 손. 그런 손을 마이어는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저 자가 왜 여기에?’
그는 좀체 정신을 수습하지 못했다.
“그래도 기억력은 좋구나. 길게 말하지 않겠다. 매소 하룬으로 가든 너희 본거지로 가든 빨리 여기서 철수해라. 저 떨거지들까지 몽땅 끌고.”
마이어는 무슨 말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원래 말 못하는 벙어리라도 되는 것처럼 단 한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가서 유클릿에게 전해라. 괜한 욕심으로 신세 망치지 말고 잠자코 때를 기다리라고 해라. 그래도 고집을 부려서 뭔가 해보겠다면 좀 더 신중하게 처신하라고 해.”
마이어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왜 그래야 하오? 나는 따를 수 없소. 방금 저들을 전사평의회의 이름으로 포로로 선언했소. 아무리 당신이라도 내 뜻을 꺾을 수는 없소.”
마이어는 그 말을 하기 위해서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야만 했다.
주변에서 둘을 관찰하던 자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특히 유클릿 전사들은 내심의 혼란을 감추지 못했다.
파천은 이때 아난다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그는 처음과 다름이 없었다. 걸인이 단상 위로 오를 때도 그가 유클릿 전사의 목을 잘라 버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설명을 바라나?”
“그렇소.”
“나까지 공격해 보지. 이 인원이면 나 하나 죽이는 것 그리 어렵지 않을 텐데 말야.”
“그럴 수도…… 있소.”
“호, 역시 세월이 많이 흘렀어. 야망이라는 게 무섭긴 무서운 것이야.”
“쓸데없는 소리 말고 날 납득시켜 보시오. 만약…….”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엔 당신이라고 해도 예외가 없소.”
“그런가? 그 정도로 절실하단 얘기겠지. 후후후, 좋다. 얘기해 주지. 저 생령 말이다.”
그가 파천을 가리키자 자연스레 시선이 파천을 향했다.
“저놈이 어쩌면 마지막 남은 생령일지도 모른다. 그게 첫 번째 이유고.”
“무슨 의미요?”
“너도 알다시피 인간계는 멸망했다. 현 인간계에 살아 있는 생령이 있는지 너는 혹시 알고 있나.”
그걸 마이어가 어찌 알겠는가?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멍청한 놈, 저놈이 만에 하나 마지막 생령이라면……. 저놈을 죽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은가? 넌 신을 대면할 자신이 있느냐?”
“빌어먹을…….”
이제야 마이어는 걸인이 하는 말을 이해했다.
“그 과정이야 어찌 됐든 저놈이 이곳에서 죽게 되면 아마 볼 만하겠지. 어쩌면 천궁의 천사들이 이 자리에 대거 출현할지도 모르지. 물론 저놈이 마지막 살아 있는 생령이라는 전제하에 말이다. 그걸 감당할 자신이 있는가, 너는?”
“그건 그렇다고 칩시다. 또 다른 이유가 있소?”
“물론! 네가 저 생령을 죽이기 전에 네 놈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란 걸 말해 주고 싶다.”
“내가 저놈 하나 당해내지 못할 거란 말이오?”
“그건 모르는 일이지. 그걸 떠나서 이곳은, 이 매소는 전사들이 설치고 다녀도 될 만큼 만만한 곳이 아니다. 이곳은 한 놈의 소유가 된지 오래다. 그놈은 저기 태연하게 있는 아난다와 떼어놓을 수 없을 만큼 밀접한 놈이고. 어쩌면 이 정도의 인원이라면 저들을 모두 죽일 수도 있겠지. 그 전에 너희들부터 절단이 날 거다. 이건 내 장담하마.”
“으음…….”
마이어는 가슴 한켠이 뜨끔해 광장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걸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또 하나 이게 결정적인 이유인데……. 어쩌면 너를 포함한 여기 있는 모든 이가 다시는 중부권으로 들어서지 못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건 또 무슨 말이오?”
“그건 가보면 알 일이지. 혹시라도 운이 좋아 중부권에 가게 된다면 유클릿에게 이렇게 전해라. 적은 가려졌고 그놈들이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또 하나! 칠대부족을 적으로 돌리기 싫다면…… 보물을 주인에게 돌려주라고 해라.”
“그, 그걸 어떻게?” “영원한 비밀이란 없는 법이다. 자, 어떻게 할 거냐? 이대로 발길을 돌리겠는가, 아니면 끝까지 해볼 셈이냐?”
“당신도 우리와 대적할 셈이오?”
“네가 끝까지 고집을 부린다면.”
마이어는 걸인을 노려보며 씹어뱉듯 말했다.
“내 수하를 죽인 것 결코 잊지 않고 기억하리다. 언젠가는 당신에게 돌려 받을 거요.”
“그래라.”
“돌아간다.”
마이어의 신경질적인 명령에 유클릿 전사들이 단상을 내려왔고, 무리를 헤치며 광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슬그머니 빠져나가기 시작한 전사들은 무리를 이뤄 광장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거짓말 같은 상황 반전에 파천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저 자가 누구길래.’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주인 없는 빈 단상 위로 아난다와 파천, 아레나, 권터가 내려섰으며 앙샹뜨까지 함께 했다.
아난다가 걸인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오랜만…… 이군.”
“그래, 그 동안 많은 세월이 흐른 것만은 분명해.”
걸인은 아난다와 달리 똑바로 시선을 맞추지 못했다.
“그 동안 죽 이곳에 있었나?”
“뭐, 그런 셈이지.”
“…….”
파천은 답답했다. 이때 걸인이 파천을 똑바로 주시해 왔다.
“네 놈은 참으로 대단한 놈이다.”
“무슨 말이오?”
“영계의 숨은 절대자들이 네 놈 하나로 인해 들썩거리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파천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좀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 보시오.”
“저절로 알게 될 일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할거야. 잠시라도 정신을 놓고 있다간 모든 게 엉망이 돼 버릴 테니 말야.”
“참 나!”
파천은 점점 짜증이 나려 했다. 무슨 소리인지 알아먹어야 대꾸라도 할 게 아닌가. 아난다가 말했다.
“조금 전…… 적이 가려졌다는 말은?”
“말 그대로일세. 놈들이 드디어 행동을 개시했네.”
“조금 이른 감이 있군.”
“모두 저놈 덕이지.”
“완전히 실체를 드러냈나?”
“아직은…… 꼬리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자넨 그럼…… 다시 돌아가겠군.”
“그래야겠지. 마지막 한풀이나마 해보려면…… 여기서 허송세월하고 있을 수는 없지.”
“…….”
“아난다!”
잠시고개를 숙였던 아난다가 걸인을 쳐다본다.
“그 때 일은…… 잊어버리게. 나 또한 잊어버렸으니. 실수를 만회할 마지막 기회지 않은가?”
파천은 이 두 작자의 묘연한 관계가 궁금해 속으로 열불이 나 미칠 지경이었다.
‘무슨 비밀이 저리 많은 거야?’
이때 걸인에게서 파천의 귀가 확 뒤집어질 만한 말이 흘러나왔다.
“라미레스가 메덴에 나타났다고 하더군.”
“정말인가?”
“그렇다네. 아마 저들이 서두르는 이유 또한 그 때문인 것 같고.”
“이제야……. 이제야 시작되는 건가? 그 오랜 기다림이 이제야 끝날 것인가?”
“그래, 시작된 거야. 흑백이 가려지는 일만 남은 게야. 더 이상은 그 누구도 숨어 있지만은 못할 거야. 자신의 정당함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말야.”
파천은 심장이 매우 빠르게 뛰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천마가 왔다는 겁니까?”
“천마?”
걸인이 고개를 갸웃하자 아난다가 설명했다.
“라미레스가 인간세에 있을 때 가졌던 이름일세.”
“그렇군. 힘의 균형이 어디로 기울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해볼 만은 할 거야.”
둘은 또다시 대화를 계속했다. 파천은 이제 그런 것 따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드디어 왔는가?’
얼마나 이 순간을 고대해 왔던가. 천마와 옛 수하들을 다시 만날 날을. 이제 머잖아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파천을 한껏 들뜨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메덴을 수습하는 일이 급선무겠군.”
“일단은 내부에 맡겨 둘 수밖에 없을 것 같네.”
“조금 전 아무도 중부권으로 들 수 없을 거란 건 또 무슨 말인가?”
“비행선의 배후가 바로…….”
파천은 걸인이 나머지 얘기는 영언으로 전달했음을 알아챘다.
“그랫던가! 으음.”
“지금 루하스 강은 폐쇄되었어. 루하스 강을 중심으로 남부권의 주요 지역에 그들의 전초 기지가 세워져 있었던 게야. 선계의 뜰과 이곳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말일세.”
“그 정도인가?”
“빠져나가는 것도 쉽지는 않을걸세. 자네를 비롯해 눈에 띄며 다들 곧장 죽이려 들겠지.”
아난다는 사안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걸 알았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인 셈이군. 핵심 전력이 당도하기 전에 빠져 나가야겠어.”
“방법이 전혀 없지는 않을 거야. 이럴 게 아니라 그놈에게 가보는 게 좋겠어. 분명 더 많은 정보를 들을 수 있을 걸세.”
파천은 누구를 지칭하는지를 알 것 같았다. 파천의 시선은 단상 주변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세 명의 전사를 향했다. 그들은 부상을 당하긴 했지만 몸을 일으키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죽은 듯이 누워 있는 건 심적인 충격을 다스리지 못해서였다.
그들을 하나하나 일으켜 앉힌 파천은 앙샹뜨에게 도움을 청했다. 앙샹뜨가 그들을 치료하는 동안에도 아난다와 걸인은 대화를 계속 이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들을 데려 가야 하나.’
그들은 광장을 빠져나가 외곽 지역으로 이동했다.

치앙마는 골이 지끈거리는 걸 느끼고는 머리를 짚었다.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다시 말해 줄 수 있나?”
“간단해. 나는 네가 들어 줄 수 있는 걸 요구했고 넌 들어 주면 되는 거야.”
“그건 안 돼!”
“그 말은 전혀 내 계획에 없던 말인데……. 이러면 내가 매우 곤란해져. 내가 곤란해지면 자네도 좋을 것 하나 없을 텐데. 잘 생각해봐. 내가 휘젓고 다니면 네가 어떤 처지에 처하게 되는지를 말야.”
수련자들의 성지라 불리는 메덴, 그곳의 의사집행기구인 원탁을 주재하는 치앙마였다. 그런 그를 난처하게 만드는 이는 의외로 전혀 그럴 수 없을 것 같은 수려한 용모의 인물이었다.
그런가 하면 도저히 수련자로 보여지지 않는 패도적인 기운을 뿜어내기도 했다. 붉은 머리를 등 뒤로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전신을 가린 의복은 동일한 붉은색이었다. 어지간히 붉은색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작정하고 설치고 다니면 너만 곤란해져. 너와 나 사이에는 다른 이들이 모르는, 밝혀지면 곤란한 비밀이 많잖아. 내입을 막으려면 넌 내 요구를 들어 줘야 해. 똑똑한 친구가 이럴 때 보면 전혀 다른 이를 보는 것 같다니까.”
싱그러운 미소를 보이는데, 치앙마는 그걸 보며 전신에 소름이 돋는 듯한 느낌을 가졌다.
‘지독한 놈! 오자마자 골치를 썩이는구나. 마음 같아서는 따돌려 버리고 싶다만 그러면 더 골치 아파진다. 아예 이번 기회에 이놈을 제거해 버릴까? 안 돼. 내 쪽의 출혈이 너무 심해. 더군다나 성공한다 장담할 수도 없다.
만약 시도했다가 실패한다면……. 그 순간 내 야망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전부를 걸기엔 내가 얻는 게 너무 미약해.’
“좋다, 라미레스. 대신 나도 조건이 있다.”
“조건? 네가 지금 그런걸 내세울 처지가 아닐 텐데……. 아아, 좋아. 말해 봐. 일단 들어나 보지.”
지금 치앙마를 곤란하게 하는 이는 다름 아닌 라미레스, 즉 천마였다. 그는 영체를 입고 메테우스 강을 건너자마자 메덴의 원탁으로 온 것이다. 그리고는 곧장 치앙마를 찾았다.
치앙마는 라미레스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피해 다녔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숨어 있던 얼음계곡의 별궁까지 찾아 온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그를 상대는 하고 있었지만 속은 시커매진 지 오래였다.
“내 조건은 간단해. 내가 지시하는 한 가지 일만 해주면 된다. 너는 두 가지를 요구했지만 나는 단 하나야. 어때? 해줄 수 있나?”
“뭐지? 들어 보고 나서 결정하지.”
“전사연합기구가 만들어지려 하고 있다.”
“그래서?”
“별로 놀라지도 않는군.”
“예상된 수순이었어. 오히려 늦은 감이 있군.”
“그들을 저지시켜 줘. 너라면 할 수 있을 거다.”
치앙마의 눈 깊숙한 곳에서 간교한 빛이 번뜩였다. 라미레스의 표정은 시큰둥하기만 했다.
“너…….”
“해주겠나?”
“미쳤구나.”
“뭐야?”
치앙마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런 소리를 듣고도 가만 숨죽이고 있는 성질 좋은 치앙마는 아니었다.
그러나 흥분도 잠시, 그는 어금니를 앙 다물며 다시 몸을 주저 앉혔다.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아도 전혀 통하지 않는 라미레스의 무신경을 예전에 익히 경험했던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걸 나더러 하라는 거냐? 전사들이 연합기구를 만드는데 네가 왜 열을 내고 난리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란 말야. 아 참, 그렇지 하긴 그들이 힘을 합하면 네 앞으로의 계획에 중대한 차질이 발생할지도 모르겠구나. 그걸 깜빡 잊고 있었다.”
라미레스는 치앙마를 약 올리며 그의 반응을 즐기는 것 같았다.
“불가능하지는 않지.”
“해줄 텐가?”
“이왕이면 직접 하지 그러나. 아니면 원탁을 통해 수련자들을 동원하면 간단하지 않은가?”
“원탁을 통해 무력을 사용하려면 단 하나의 반대도 나와서는 안된다. 한 번 부결된 사안은 다시 거론할 수 없고. 그걸 모르지는 않겠지?”
“참, 그랬지. 하하하, 내가 여길 꽤 오랫동안 떠나 있었더니 좀 멍청해진 것 같군. 뭐, 좋아. 그일을 해줘야만 내요구를 들어 주겠다는 말인가?”
“그래, 나도 그 이상은 양보할 수 없어.”
“재미있군, 치앙마. 오랜만에 인간계에 다녀와서 내가 배운 게 뭔지 아는가?”
“…….”
“세상엔 믿을 놈 하나 없더라는 게지.”
“무슨 뜻인가?”
“아냐. 좋아, 해주지. 자, 어서 줘.”
“뭘 말인가?”
“해준다고. 그러니 네 놈이 먼저 내놔야 할 것 아닌가?”
“먼저 자네가…….”
“치앙마, 정녕 네가 내 성미를 건들 참이냐? 생각 같아서는 확 뒤집어 버리고 가져가려고도 생각해 봤다. 더 이상 수련자 신분에 미련이 없는 내가 그러지 못할 것 같은가? 더군다나 내게는 전에 없던 훌륭한 조력자들까지 있다. 한번 해볼 텐가?”
“협박하는 건가, 지금?”
“좋도록 생각해. 너와 내가 싸우면 원탁이 모두 네 편을 들것 같나? 천만에……. 그들 중 대다수는 손 놓고 구경만 할 걸세. 결굴 네 수족들 몇을 제외하고는 굳이 나와 원수를 지려고 하는 이는 없을 거란 말이지. 차라리 잘됐네. 이 기회에 원탁을 갈아 치우는 것도 괜찮을 거야.”
치앙마는 라미레스가 괜히 으름장을 놓는 것만은 아님을 잘 알았다. 그라면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저놈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껄끄러운 놈. 언젠가는 내가 네 놈을 제거하고 말겠다.’
“좋다, 주지! 주면 될 것 아닌가. 대신 약속은 지켜야 하네.”
“그럼, 당연하지. 어쨌든 약속은 약속이니까.”
이렇게 해서 치앙마와 라미레스의 간단한 거래는 성립되었다. 그가 파천을 제쳐 두고 먼저 이곳에 온 데는 그럴 만한 이유와 목적이 있었다. 그가 치앙마에게 요구한 건 두 가지였다. 하나는 불꽃 연못을 외부에서 열 수 있는 열쇠였고, 또 하나는 파천과 자신에게 필요할 것 같아서 가져가는 메덴의 보물들이었다.
라미레스는 파천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가 지금 어떤 지경에 처해 있을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답답했다. 마주친 수련자 몇에게 대강의 얘기를 듣긴 했지만 여전히 안심이 되지 않는다.
‘아난다가 옆에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긴 하지만……. 그놈 성격은 내가 잘 알지. 지나치게 자비로운 성품이 아난다의 능력을 제한하고 있음을 말야.’
라미네스는 한시라도 빨리 파천에게로 가고 싶었다. 더군다나 대적자들이 나타났다는 것까지 들은 상황이고 보면 라미네스의 조급함은 극에 달한 셈이었다. 거기다가 그가 염려 하는 건 다른 데에 있었다.
‘그들이 활동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 그들을 상대하려면 하루 빨리 과거 문제를 정리해야 한다. 힘을 결집시키는 게 조금만 늦어져도 모든 건 끝장이다. 기다려라, 파천. 내가 간다.’

석실의 분위기는 진지한 대화로 인해 한껏 무르익어 무거운 감을 주었다. 아레나와 권터는 그다지 듣고 싶지도 않았던지 아예 밖에서 기다리고 섰고, 앙샹뜨와 파천만이 주고받는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대충의 내용 중 이해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았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전적인 배경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앙샹뜨와 자신은 안중에 두지 않고 저희들끼리만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을 나누는 것이 영 마음에 차지 않고 불만인 파천이 몇 번이고 아난다에게 눈치를 주었지만 어찌된 연유인지 이것만은 그 또한 섣불리 입을 열 수가 없는 듯했다. 그러다 보니 파천은 대충 미루어 짐작하고 있는 실태였다. 앙샹뜨 또한 파천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인 것을 보면 영계에 두루 알려진 이야기들은 아닌 듯했다.
“라미네스가 메덴으로 곧장 간걸로 보아 무슨 계획이라도 있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그곳을 들러야 할 이유가 있던가?”
“그렇겠지. 그 친구야 워낙 매사에 빈틈이 없으니 안심해도 되지. 아마도 그들이 서두르게 된 데에는 라미레스의 등장도 한몫 했을 거야. 시작은 그로부터니까.”
“어쨌든 이모든 결과가 파천 님의 여정 때문임은 분명해. 그들이 먼저 안달을 내주니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 하나?”
아난다의 말에 걸인 행색의 영자가 맞장구를 쳤다.
“이를 말인가. 어느 쪽도 확실한 걸 알지 못하는 상황이라 사실 따지고 보면 양쪽이 모두 몸이 달아 있지. 천궁이 아예 미동도 않는데 상황은 급변하고 있는 듯하니 먼저 움직일 밖에. 사실은 달라진 건 하나도 없는데 말야.”
석옥의 주인이 이상한 웃음소리를 냈다.
“컬컬컬, 그렇지. 스스로 수를 잘 읽고 미리 내다보는 자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함정이지. 움직임이 없는 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지레짐작으로 여러 변수들을 계산해대니 아무리 좋은 머리인들 견딜 재간이 없는 게야. 그러니 먼저 수를 놓아 이쪽의 동태를 살피고자 함이고.”
그들은 지금의 상황에 대해 비교적 낙관적인 견해들을 피력하고 있었다. 파천은 그이유가 궁금했다.
“현 상황이 우리 쪽에 유리하게 돌아간다는 말씀이십니까?”
말해 놓고 보니 조금 우스운 생각도 들었다. 뭘 근거로 ‘우리 쪽’ 이라고 모두를 동일하게 묶어 버릴 수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무엇하나 확실한 것이 없는 작금에 파천에게 동지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건 오직 아난다와 아레나 그리고 친인들뿐이지 않던가.
“유리한 건 애초부터 없었어. 모든 게 열악하지. 그러나 작은 틈이나마 생겼다는 게 우리에겐 반가운 거야. 천궁이 움직여 주면 이런 수고로움은 덜어지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거든.
결국 적의 실체를 우리가 잡아내야 하는데……. 그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란 말이야. 마계는 이미 적으로 규정되어 있으니 전면전에만 대비하면 되지만 나머지는 모든 게 혼란스럽단 말이야.
저쪽이 침묵을 지키고 있으면 끝까지 내부의 적은 가려지지 않지만 먼저 움직여 주면 그나마 가능성이 열리는 게지. 그 얘기를 하고 있었던 거야.“
“그렇군요. 어쩌면 간단한 일일 수도 있는 데 너무 복잡하게 만드는 게 아닌지…….”
“무슨 뜻인가?”
석옥의 주인은 파천의 표정을 유심히 살핀다.
“적이 될 가능성이 있는 부류를 일단 구분시킨 뒤에 나머지만으로 전력을 형성하고 이후에 제외된 자들의 성향을 점차로 좁혀 가는 것이지요. 내부에 감싸안고서 가려내려면 힘들지만 외부에 그대로 둔 채 대응한다면 그만큼 안전하다는 겁니다.”
“흐음, 일리가 있긴 하지만 그것마저도 쉽지가 않으니 문제지. 굳이 일례를 들면 메덴의 수련자들은 마계와 힘을 합하는 짓은 하지 않아. 그러나 치앙마와 그 일당들의 속셈이 더해지면 그 이외의 부류들과 협잡을 벌일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어.
그렇다면 그들은 동지인가, 적인가?
천상계에서 서른 세 개의 하늘이 있지만 그 중에 어디가 저들과 연계하고 있는지 아직까지는 미궁 속이란 말이지. 라미레스가 일부 알고 있는 것 같긴 한데 말이야.
선계라고 다를까? 게다가 외부의 적이라고 해서 반드시 끝까지 적으로 남으란 법이 없다네. 끝까지 가보지 않는 한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다는 말일세. 이 중에도 서로 적으로 마주칠 자가 없으란 법이 없을걸세.“
파천은 설마하니 그 정도인가 싶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걸인이 긴 한숨을 내쉬며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얘기를 꺼냈다.
“이러니 저러니 해봐야 결국은 몇몇에 의해 가려지지 않겠는가? 전사들이 연합기구를 만든다 한들 무엇 할 것이며, 메덴의 힘을 온전히 합일한들, 칠대부족이 하나로 합해 힘을 더한다 한들 승산을 기약할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결국은 몇몇 절대자들에 의해 결정될 일이야. 수의 많고 적음보다는 절대자들의 비율이 어느 정도로 분배되어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리라는 게야.”
파천은 기이한 심정이 되었다. 일반 영자들이 볼 때 전사들은 특별한 자들로 취급된다. 그만큼 힘의 격차가 크기 때문이다. 일반 전사들의 수준에서 수련자들은 대단한 경지로 비춰질 것이다. 이런 자들의 입에서 거론되는 절대자란 누구를 지칭하는 걸까 싶었다.
그들 몇몇에 의해 대세가 가늠될 것이란 말은 파천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다.
“말씀하시는 절대자란 마계마황인 루시퍼 정도를 이르는 겁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러고 보니 자네도 궁금한 게 많겠군.“
‘그걸 말이라고 하나.’
“언젠가는 모두 알게 될 일! 너무 조급해하지 말게. 자네야말로 좋든 싫든 언제든 가장 핵심에 있을 테니. 알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될 거야.”
걸인은 끝내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이후에도 한참이나 그들간의 대화는 이어졌는데 파천은 더 이상은 견디고 있을 여력이 없었다. 인내에 한계를 느낀 것이다. 하나가 풀리면 또 하나가 꼬여드니 머리만 복잡해지곤 했다.
밖으로 나와 보니 아레나와 권터가 바닥에 엉덩이를 붙인 채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아레나가 파천을 보며 물었다.
“언제 떠날 거란 얘긴 없었어?”
“없었어.”
아레나의 옆에 앉으며 파천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레나.”
“왜?”
“네가 두려움을 느껴 본 자는 얼마나 되지?”
“두려움? 난 누군가를 두려워해 본적은 없어.”
“질문이 잘못되었군. 네가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다고 느끼는, 절대자라고 불릴 만한 자는 얼마나 될까?”
“절대자……. 그런 자라면 꽤 있겠지. 무한계만 놓고 따져 보면 수련자들 중에서도 상당할 거고, 전사들 중에서는 없지는 않을 거야. 칠대부족의 족장들도 그 정도로 여겨지고……. 그런데 그건 왜 묻지?”
“그런가? 그 정도로 차이가 많이 나나?”
“아무지 탁월한 재능이 있고 혼신의 노력을 다한다 해도 뛰어넘을 수 없는 게 있어. 그게 뭔지 아나?”
“뭐지?”
“바로 세월이야.”
“이해할 수 없군. 동일하게 주어졌을 텐데?”
“물론 처음엔 그랬겠지. 그러나 그 격차는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로 벌어졌고 나중엔 넘을 수 없는 한계로 굳어 버린 거야. 기억소멸을 극복한 자들은 더 이상 처음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좋으니까, 다시 시작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들이 축적시킨 힘은 상상을 초월하지. 어쩌면 이 세상이란 것도 그들에 의해 움직여지는 걸지도 모르지. 그 몇몇의 뜻에 의해 말야. 그래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 많은 건지도.”
“그런가? 내가 루시퍼나 대마신들을 고꾸라뜨릴 일은 애당초 기대도 말아야 된단 말로 들리는군.”
“내가 보는 입장에서는 솔직히…… 불가능해.”
“광명을 가져 와도 말인가?”
“광명이 과연 그런 힘을 네게 줄 수 있을까?”
“라미레스는 대마신 출신이었으니 대단하겠군.”
“그렇다고 봐야지. 무한계 전체를 놓고 따져 봐도 최강을 다툴 정도겠지.”
“그런가……. 천마와 나 사이에도 격차는 벌어진 거군. 예전과는 다르단 말이로군.”
꿈꾸든 중얼거리는 파천의 말에 아레나는 왠지 모를 허탈감을 공유했다.

아난다와 파천 일행은 신비한 두 영자와 이별하고 매소 뮤린을 빠져나왔다. 어쩌면 여기서 모든 걸 접어야 했을지도 몰랐던 위기는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지만 그건 다시 바랄 수 없는 행운과도 같은 것이었다.
파천은 이번 같은 위기를 앞으로도 수도 없이 겪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무림에서는 잠시간의 어려움은 있었을지언정 이렇게 막막해 본 기억은 별로 없었다. 뛰어넘을 수 없을 만큼의 한계 상황이란 것도 없었다.
그가 의도하고 계획했던 일은 별 무리 없이 진행시킬 수 있었고 성공시켰다. 혼자서 세상 전체와도 싸울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으로 가득했었다. 그런데 지금의 자신은 어떤가?
오도가도 못하는 깊은 늪 속에 발 하나쯤 빠져 있는 느낌. 다른 한 발이 디뎌야 할 곳은 허공인 듯 텅 비어 있다.
‘그러나 내게는 친구들이 있지 않은가. 그들과 함께라면 두려울 것 없다.’
그들이 지금 향하는 곳은 루하스 강변이었다. 이제야 드디어 중부권으로 들어설 수 있게 된 것이다.
루하스 강변이 멀리서 보이기 시작하자 아난다는 걸음을 멈췄다.
강 위에 붉은 구름 떼가 낮게 떠돌고 있는 게 보였다. 파천은 신비한 전경을 잠시 취한 듯 바라본다.
“어찌하실 셈이죠?”
아레나의 질문에 아난다는 고개를 저었다.
“기다려야죠.”
아레나가 기다리는 건 할라스였다. 지금쯤이면 나타나 새로운 소식을 전해 줘야 했다. 그들말고도 아난다가 기다리는 이들이 또 있었다.
‘아무 일이 없었다고 해도 도나투스가 당도하기엔 아직 이르다.’
파천이 강변 쪽으로 가려 하자 아난다가 그의 팔을 잡았다.
“안 됩니다.”
“왜지?”
아난다의 표정이 굳어 있는 걸 보고 파천이 의아해 질문했다. 아레나가 붉은 구름을 가리키며 심각하게 말했다.
“저것 때문에 그러는 거야.”
“저게 뭔데?”
“루하스 강은 이제 저들의 허락을 받아야만 건널 수 있어. 저 비행선은 아름답게 보일지 모르지만 저기에 타고 있는 이들은 고약하거든.”
파천은 아레나가 가리키는 곳을 다시 쳐다보았다. 안력을 돋워 보니 타는 듯 붉은 구름이라고 생각되던 것이 이제 보니 그녀의 말처럼 거대한 비행선이었다. 주변을 감싸고 있는 두꺼운 안개 때문에 그렇게 보였던 것이다.
“엄청난 크기로군. 루딘족의 비행매소보다 작지 않겠는데.”
“거대한 모선 주위로 몰려다니는 소형선 보이지? 저놈들은 원래 한곳에 머물지 않고 여기저기를 떠돌며 용병을 거래하거나 노예 시장을 열어 이득을 챙기던 지저분한 놈들이었지. 아난다 님, 저들의 배후가 누구라는 말이죠?”
걸인이 했던 말을 기억해내고 아레나가 묻자 아난다는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대적자들입니다.”
“…….”
아레나도 할 말을 잃은 것 같았다.
권터가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다.
“이제는 멀쩡히 드러내 놓고 행세할 셈인가?”
앙샹뜨가 말을 받았다.
“메덴도 이 사실을 알까요?”
“아마도 알겠죠. 그 친구가 알고 있는 일을 메덴이 모를 리가 없지요. 곧 메덴에서 무슨 조치가 내릴 겁니다.”
파천은 아난다의 두 친구를 생각했다.
‘그 자들은 범상한 자들이 아니었다. 무한계 전체의 일을 제 손바닥 뒤의 일처럼 자세히 알고 있지 않은가? 그건 조력자들이 많다는 뜻. 과연 어떤 자들일까?’
파천이 느닷 없이 물었다.
“네 친구들의 정체는 뭐지?”
아난다는 머뭇거리며 쉽게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말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그냥 평범한 것 같지는 않아서 말이야.”
“그들이 알려지는 걸 꺼려 하니 저로서도 밝힐 수가 없군요. 죄송합니다.”
이 때 앙샹뜨가 파천이 솔깃할 만한 얘기를 했다.
“라미레스 님이 영계에 드셨다면 연락을 취해 볼 수도 있겠네요.”
“가까이 오면 먼저 연락을 해올 겁니다.”
아난다나 라미레스쯤 되는 영자들은 멀리서도 서로의 의사를 전달할 수가 있다. 그러나 수준에 따라 그 거리의 차 역시 분명했다. 이들이 있는 곳에서 메덴까지라면 아난다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난다는 멀리 강변 둑에 서 있는 전사들을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다. 자신들보다 먼저 떠난 전사들이 아직도 저곳에 있는 걸로 봐서는 그들 역시 마땅한 수가 없는 것 같았다.
“벌써 한바탕 했는가 본데.”
아레나의 말처럼 강변 둑의 일부가 여기저기 패여 있고 그 근처에 죽어 있는 영체도 여러 구 보였다.
그런가 하면 허공에 떠 있는 많은 수의 영자들도 보였는데 그들은 강변 둑에 모여 있는 전사들과는 복장부터가 판이하게 달랐다. 긴 머리를 하나로 땋아 늘어뜨렸고, 어깨와 가슴에만 보호대를 하고 있었다. 맨살을 거의 드러낸 자들은 손에 기형적으로 큰 활들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대치하고 있는 셈이었다.
파천은 그들을 살피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편히 앉아서 기다리지. 뭘 기다리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이 때 아레나가 상황을 자세히 알아보겠다며 강변 쪽으로 간다. 아나다는 말리지 않았다.
잠시 뒤 그녀가 돌아와서 하는 말을 듣고 대충의 돌아가는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마이어가 담판을 지으려고 비행선 안으로 들어갔다네요. 일부 전사들이 도강을 시도하다 저지당했고, 보다시피 저러고 기다리고 있답니다.”
“공간 이동을 하면 되지 왜 저러고들 있는 거야?”
그 점이 파천은 궁금했다. 영자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까닭에 대해서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이런 경우라면 굳이 피할 이유가 없어 보였던 것이다.
“그게 가능하면 저러고들 있겠어? 영계에서 몇몇 곳, 이를테면 메덴이나 칠대부족의 영토나 슈메르 산 같은 데는 아예 공간이동이 안돼. 공간이도을 억제하는 결진이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야.
저곳도 마찬가지야. 비행선 주위로 붉은 안개가 흐르는 것 보이지? 저게 바로 결진이 설치되어 있다는 걸 나타내는 거고.“
“아난다 님, 어떻게 하실 작정이시죠?”
“건너야죠. 그 전에 만나야 할 자가 있습니다.”
“혹시 뒤처진 선발대 때문인가?”
“네. 라치오가 저 강을 건넌게 아니라면 분명 나타나겠지요. 아직 무사하다면 말입니다.”
잠시 잊고 있던 일이었다.
“그들은…… 무사하겠지?”
누군가 대답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중얼거린 말은 아니었다. 파천은 다른 이들의 표정이 그다지 밝지 않은 걸 보았다. 파천이 고개를 완강하게 저었다.
“무사할 거야. 미스바가 그랬잖아. 그들을 라치오가 구출해냈다고. 설마하니 다시 무슨 일이야 있었을까.”
그러나 그 말이 얼마나 허황된 건지 파천 역시나 알고 있었다. 구출해냈다면 벌써 선발대와 합류했어야 옳았다.
그들은 추적당하는 중이라 했다.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는 건 그들의 안전에 문제가 발생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강변 쪽에서 한 영자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저 자는 라치오! 그런데 왜 거기서?”
아레나의 외침처럼 라치오가 누구도 생각지 못한 방향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비행선이 떠 있는 방향에서 선발대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 더군다나 그는 혼자였다. 주변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까지 온 라치오의 몰골은 그가 겪은 일을 미루어 짐작케 할 정도로 형편없었다. 그를 바라보는 파천과 동료들에게서 불안감이 증폭되며 동요가 물결쳤다.
라치오가 입을 열려는 순간 아레나가 먼저 물었다.
“어떻게 된 거지?”
“보다시피…… 실패했소.”
이번엔 파천이 다급하게 물었다.
“동료들은?”
“라치오가 고개를 슬쩍 돌리더니 강 위에 떠 있는 비행선을 쳐다본다.
“저기에…….”
권터가 피식 웃는다.
“자신감이 넘치기에 기대를 했더니……. 역시나 별볼일 없는 치들이었군.”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우리는 최선을 다했소.”
“그런가? 그렇지만 결과가 형편 없잖은가?”
“미안하오. 역부족이었소.”
아난다가 비교적 침착함을 유지하며 어찌된 연유인지를 물었다.
“내 동료들까지 저들에게 사로잡혔소. 설마하니 전사총에 그들이 있을 줄은…….”
“누굴 만났나요?”
“대적자들을 만났습니다.”
아난다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랬군요. 그들이라면 힘겨웠겠죠. 용케 그들의 손아귀에서 탈출하셨군요.”
“아직은 혼자가 아니오. 그리고 거래 역시 유효합니다. 반드시…… 그들을 구해내겠습니다.”
라치오의 자신감은 여전했다. 아난다는 그런 라치오를 좀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
‘그들을 맞닥뜨리고도 무사하다니……’
아난다는 라치오가 만난 대적자가 누군지 짐작이 갔다.
‘플로렌서 앞에서 탈출할 정도라면……. 여태껏 라치오를 과소평가한 건가?’
이런 걸 생각하고 있는 건 아난다 혼자였다. 앙샹뜨는 물론 프로렌서를 잘 알았다. 그럼에도 설마하니 라치오가 만난 대적자가 그녀일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젠 어떡할 거지?”
아레나의 질문에 라치오는 별일 아니라는 듯 싱긋 웃었다.
“다시 잠입해야죠. 저는 단지……. 소식을 궁금해하실 것 같아 잠시 빠져 나왔을 따름입니다. 약속한 이상 무슨 일이 있어도 구해냅니다. 믿고…… 기다려 주십시오.”
‘정신 나간 놈!’
권터는 아예 시선을 돌려 버렸다.
“아난다 님, 몇 가지 알아낸 것이 있습니다.”
“뭐죠?”
“저들이 귀계와 손을 잡았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귀계와요?”
“네.”
아레나가 이마를 찡그렸다.
“결국 그 말은 마계와 손을 잡았다는 거잖아?”
아레나의 지적에 고개를 젓는 라치오.
“그건 아닐 겁니다. 귀계와 마계가 한통속이 되었다지만 이들은 귀계와 거래 관계일 뿐인 것 같았습니다.”
“그건 어떻게 알아냈죠?”
“비행선에서 모두 알아낸 사실입니다. 그들의 대화를 좀 엿들었죠.”
라치오가 비행선에 잠입했다 빠져 나온 것만 해도 놀랄 일인데 여러 가지 정보를 입에 올리자 권터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된다. 모든 게 날조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 말을 믿으라고? 이제 보니 허황될 뿐만 아니라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서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 위인이었군.”
“사실입니다. 굳이 믿어달라고 애걸하고 싶지도 않구요. 또 하나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실패에 대한 변명으로 들리겠지만……. 저 비행선 안에는 대적자들 말고도 전혀 정체를 알 수 없는 엄청난 강자들이 있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경계하는 건 그들입니다. 그들만 아니었어도 벌써 임무를 완수했을 겁니다.”
“좀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군요.”
뜻밖의 말에 이번에는 아난다도 당황했다. 좀체 볼 수 없는 태도였다.
“저도 그다지 상세한 걸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 단지 그들을 느꼈을 뿐 다른 정보는 일체 얻지 못했습니다.”
아난다는 굳이 초조함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누굴까? 내가 생각하는 그들이라면…… 일은 더 심각해진다. 그들이 대적자들과 함께 있을 리는 없을 텐데…….’
“전해야 할 말은 다했습니다. 친구가 기다리고 있어 이만 가보겠습니다.”
완고한 뒷등을 보이며 걸어가던 라치오는 열 발짝도 채 딛지 않아 형체가 희미해지는가 싶더니 곧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흔적 없이 자취를 감춰 버렸다.
“저것 공간이동 아냐?”
파천이 벌떡 일어날 만했다. 분명 공간이동을 사용하지 못하게끔 방비결진을 해놨다 들었는데 라치오는 태연하게 펼쳐 보였기 때문이다.
“아냐.”
아레나가 딱 잘라 부정했다.
“그럼?”
아난다는 파천이 알아듣기 쉽게 설명했다.
“중원에서 쓰는 은형술이나 잠형술과 같은 겁니다. 그것보다는 완성도가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체를 투명하게 만들고 공간과 일체화시켰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저 친구 이제 보니 재주가 여러 가지였군.”
권터는 내심으로는 솔직히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사실 그런걸 펼칠 줄 모른다.
“저걸로 다른 이들의 눈을 완전히 속일 수 있는 건가?”
앙샹뜨가 직접 눈앞에서 시범을 보여 주었다.
그녀의 영체가 희미해지는가 싶더니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앙샹뜨의 기운은 여전히 감지되었다.
“눈은 속일 수 있지만 기운까지 감추기엔 무리가 있죠. 그렇지만 조금 전 그 자가 펼친 건 이것과는 좀 다른 것 같아요.”
앙샹뜨의 추측은 틀린게 아니었다. 라치오는 영체를 최소 단위의 입자로 분해하여 기운까지 감춰 버린 것이었고, 앙샹뜨는 형태만 보이지 않게 한 것이었다. 이중에서 라치오가 했던 동일한 방식으로 펼칠 수 있는 건 아난다뿐이었다.
파천은 무척 신선한 충격에 빠져 있었다. 상당히 응용할 부분이 많은 기법을 발견한 데서 오는 흥분이었다.
‘연구해 볼 만한 가치가 이겠어.’
주위를 환기시키며 아난다가 모두에게 의견을 구했다.
“어떻게 했으면 좋을까요?”
정면돌파는 힘들다. 그건 분명했다. 사실 아난다가 바라는 건 전사들과 비행선측과의 전면전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혼란한 틈을 타 빠져나갈 기회가 생길 터. 그 이외에는 달리 마땅한 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마디씩 하긴 했지만 남점은 극복되지 않는다.
이때 파천이 의견을 내놓는다.
“마이어처럼 우리도 타협을 해보면 어떨까?”
권터가 곧바로 핀잔을 준다.
“되도 않은 소리 마라. 그들과 우리는 다르다. 더군다나 아난다 님은 수련자이시니……”
대적자들과 수련자는 천적이다. 그들을 몰아낸 건 메덴이었다. 일반 영자들이나 전사들과는 대하는 입장이 다를 것이라는 건 상식 수준의 예상이었다.
“아냐. 지금 저곳의 책임자가 혹시……. 전에 만났던 그 여자라면……. 어쩌면 가능하지 않을까?”
플로렌서를 말하는 것이었다. 아난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플로렌서가 와 있을 가능성이 많긴 합니다. 아직 핵심 전력이 당도하지 않았으니 아마도 그녀를 능가하는 지위를 지닌 자는 없을 겁니다.”
“그녀라면 담판도 가능할 것 같은데.”
무슨 근거로 파천은 그런 기대를 하는 걸까? 궁금하긴 했지만 아난다가 조심스럽게 의견에 동의한다.
“달리 방법이 없겠군요.”
아레나는 생각이 달랐다.
“그건 너무 위험한 발상입니다. 그냥 뚫고 나간다면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겠지만 그들과 마주앉은 채로 도주하기는 더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사로잡힌다면 모든 게 끝장이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저번에 했던 경고도 마음에 걸리고…….”
아레나는 망설여졌다. 앙샹뜨도 달갑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권터는 강경하게 반대했다. 바로크 전사들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차라리 전사들과 저들 사이에 싸움을 붙여 보는 건 어떨까요?”
아레나의 제안은 성공한다면 그보다 좋은 수가 없겠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결과를 기다록 있는 입장에서 굳이 위험을 감수하려 하는 자들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사로잡현던 대원들도 저곳에 있다 하니 들어는 가봐야 할 것 아냐. 일단 마주치고 보자고. 무슨 수가 생기겠지.”
파천이 결론을 이렇게 내버렸다. 언제나 그랬듯이 파천의 결정에 아난다가 동조하자 다른 이들은 달리 반대할 수가 없었다. 모두는 무거운 마음으로 강변 쪽으로 다가갔다.

“아난다가 널 보냈다고?”
“그렇다.”
“페드로! 이건 무슨 뜻이지?”
“가만있어 봐라. 아난다가 달리 전한 말은 없었나?”
잔잔한 음성이었지만 도나투스는 좀 전보다 더 긴장했다.
“일의 성사에 따라 너희에게 내려진 금제를 풀어 줄 수 있다고 했다.”
“아난다가…… 그렇게 말했단 말이지? 흐흐흐……. 브라함, 들었느냐?”
브라함은 뛸 듯이 기뻤다. 그는 그 자리에서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놈이 실성을 하지 않은 다음에야 그런 약속을 할 릭가 없는데.”
그럼에도 그는 뭔가 미심쩍었는지 재차 확인을 하려는 듯했다. 도나투스는 진땀을 흘리며 그들을 설득했다.
“그만큼 상황이 어렵게 됐기 때문이다. 너희들의 도움이 필요할 정도로.”
페드로와 브라함은 서로의 시선을 교환하며 음흉한 웃을을 지었다.
“놈이 그렇게 말했다면 거짓은 없을 거야. 드디어……. 드디어 자유롭게 되는 것인가?”
“아직은 아니다, 페드로. 우리 운명을 아직은 그놈, 아난다가 쥐고 있다는 걸 잊지 마라. 족쇄를 풀어 줄 수 있는 건 그놈 하나뿐이다.”
브라함의 원한에 찬 시선을 도나투스는 진저리를 쳤다.
‘기분 더럽군. 저놈들을 다시 세상에 내보내는 게 잘하는 짓인지를 모르겠어. 설마하니 정말 이놈들을 완전히 풀어 줄 생각은 아니겠지.’
아난다의 평소 성정대로라면 그럴 가능성도 농후했다.
브라함과 페드로.
이들은 무한계에서 모르는 이들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아니 유명했었다. 이들은 슈메르에 신전을 세운답시고 영자들을 납치하고 억류해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영자들을 죽이거나 고통을 가하기 일쑤였고, 슈메르 산의 일부 지형을 바꿔 버리기도 했다.
슈메르 산은 칠대부족에게는 성지였기에 그들과의 충돌은 불가피 했다. 이들은 결국 그들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남부권으로 도주했는데, 그런 와중에도 악행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하지 말아야 할 실수를 저질렀다. 천상계의 아라한과 수련자 몇을 모욕 주고 그것도 모자라 잡아다 노예로 부렸으며, 수하들이 지켜보는 데서 극심한 고통을 가하며 죽여버렸다.
이 일은 메덴과 천상계를 분노케 했고, 결과적으로 그들과도 싸우게 됐다. 천상계의 삼십삼천 중 하나인 화천의 천주가 신장들을 끌고 찾아왔으며 메덴에서도 수련자들이 급파됐다.
브라함과 페드로는 강했다. 수하들은 모두 도주하고 둘만 남았음에도 이들은 끈질기게 도주하여 중부권으로 접어들었다.
그곳에서는 소식을 전해들은 칠대부족 중 발락의 족장이 직접 행차해 기다리고 있었다. 앞뒤로 포위 당한 브라함과 페드로는 결국 제압 당하기는 했지만 마지막까지 그들이 보여 준 신위는 주위를 놀라게 할 정도였다.
화천의 천주와 아난다, 발락이 이들에 대한 처결을 의논하게 되었는데 화천의 천주가 이들을 자신이 데려 가겠다고 했고, 발락은 양보할 수 없다고 했다. 아난다의 끈질긴 설득에 결국은 화천의 천주가 금제를 가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이후 화천의 천주는 존경받는 수련자 아난다에게 그들을 맡겼다.
수많은 악행을 저질러 비록 그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브라함과 페드로였지만 그들을 대하는 아난다의 생각은 다른 이들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런 그들에게도 자신들의 잘못을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금제 때문이겠지만 이들은 아난다가 지정한 곳에서 꼼짝 않고 순한 양처럼 조용히 지냈다. 그들은 아난다를 두려움으로 대했고, 무슨 말이든지 순종했다. 물론 자발적인 건 아니었다. 분명한 건 이 둘이 아무리 제멋대로에다 포악하다고 해도 아난다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점이었다.
“아난다가 우리 도움을 필요로 한단 말이지? 클클클…….”
브라함은 흐뭇한 표정을 해보였다.
“더군다나 부탁을 들어 주면 금제를 풀어 주겠다고 했고!”
페드로가 맞장구를 친다. 둘은 죽이 맞아 한참이나 떠들어대더니 도나투스를 차가운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사자갈기를 연상케 하는 곤두선 머리털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흉기처럼 느껴진 도나투스는 노려보는 브라함의 시선을 슬쩍 외면했다.
“지금 아난다는 어디 있나?”
“중부권으로 들어서기 전일 것이다.”
“흐음, 그런데 궁급하군. 대체 무슨 일이기에 아난다가 우리를 불러낸 거지?”
도나투스는 대략적인 내용을 설명했다. 대적자들이 출현했다는 대목에서는 뜻밖이라는 표정과 더불어 흥미를 동시에 나타낸다.
도나투스의 설명이 모두 끝나자 페드로가 더 이상 들을 것도 없다는 듯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가늘게 뜬 눈빛이 매섭게 번득였다.
“한바탕 폭풍이 몰아치려나 보군. 이것 재미있겠는데.”
그는 정말로 신이 나 있는 것 같았다. 도나투스는 직접 입밖에 낼 수는 없었지만 속으로나마 둘에게 연신 욕을 퍼부어댔다.
‘빌어먹을, 재수 없는 놈들. 번갯불에 지져 먹을 놈들 같으니라고. 재앙만 몰고 다니는 이놈들을 풀어놓다니……. 이것만은 아난다, 네 실수인 것 같다.’
“가자! 제명된 수련자 도나투스, 푸하하하.”
에즌 ㄴ자신을 조롱하기까지 한다. 기가 막혀 할 뿐 화도 내지 못하고 잠자코 있으려니 도나투스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어깨에 팔을 두르자 도나투스는 화들? 놀랐다.
“자, 안내해라.”
“잠깐, 페드로. 기다려 봐라.”
페드로는 무슨 일인가 싶어 브라함을 쳐다본다.
“한 가지 더 확인할 일이 있다. 아난다가 우리 힘을 필요로 한다면 우리 무기를 감춰 둔 곳도 말해 줬겠구나. 그렇지?
“아, 그렇군.”
도나투스는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물론…….”
“그곳이 어디냐?”
이때 페드로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없어도 별 상관은 없을 것 같은데. 금제를 풀고 나서 받아도 되지 않겠어?”
“아니다.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닐 거야. 어쩌면 대적자들과 드잡이질을 해야 할지도 모르잖는가?”
그 말에 페드로는 심각한 표정이 된다.
“그놈들은 만만찮지.”
“어디냐?”
브라함의 재촉에 도나투스는 힘없이 대답했다.
“아쉽게도 그건 가져 올 수 없다.”
“뭐라고?”

브라함이 슬쩍 손을 흔들었는데 석벽이 너무도 힘없이 터져 나갔다. 산 하나를 통째로 뚫어 깊숙한 곳에 만들어 놓은 석벽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구멍이 머리통만하게 외부까지 뻥 뚫렸다.
도나투스는 모골이 송연해 빠르게 대답했다.
“메덴에 있다고 들었다.”
“이런…….”
페드로가 도나투스의 이마를 소리나게 탁, 탁 쳤다.
“그럼 그것부터 네가 가져 왔어야지. 빈손으로 오다니……. 죽고 싶나?”
도나투스는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이들의 성미가 불같은 뿐만 아니라 괴팍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음을 알기에 그냥 하는 소리에도 저절로 몸이 반응했다.
“으음, 하필이면 메덴이라니. 할 수 없지. 그냥 가자.”
이 순간 도나투스는 브르함에거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페드로는 도나투스의 등을 토닥거리며 은근한 어조로 속삭였다.
“자, 어서 길 안내를 해라. 잘난 아난다의 얼굴을 빨리 보고 싶다. 그놈의 얼굴에 입맞춤이라도 해야지 못 견디겠단 말야.”
도나투스는 그의 팔을 슬쩍 뿌리치며 앞서 나갔다,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도나투스는 귀를 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여길 나가는 기념으로 저놈을 묻어 버리고 갈까?”
“안 돼! 아난다의 심기를 건드리면 골치 아파져.”
“그렇겠지? 에이, 그래 내가 선심 썼다.”
“상황을 보아 하니 나가면 재미있는 일들이 많을 것 같으니 조금만 참아라.”
“클클클클…….”
‘내 신세가 처량하군. 저런 놈들과 앞으로도 동행해야 하다니……. 도나투스의 삶에 이런 날이 있을 줄이야.’
도나투스는 아난다를 원망했다.

비행선이 루하스 강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떠 있다. 대형 모선을 중심으로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크기의 비행선들이 주위를 맴돈다. 제각기 형태가 조금씩 다르지만 전체적으로 모선보다는 길쭉하게 쭉 빠져 날렵하게 생겼다.
비행선에는 적게는 십여 명에서 많게는 서른 명 안팎까지 타고 있는데 그들 중 일부는 전사들 쪽을 예의 주시했다. 대치로 인한 팽팽한 긴장감은 찾아 볼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로 전혀 긴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강둑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는 전사들. 그들은 편한 자세로 휴식들을 취하고 있었으나 실상은 그 주위를 맴도는 비행선에서 단 한 순간도 시선을 떼어놓지 않는다.
전사들 무리 가운데서도 조금 뒤로 처져 있던 파천 일행은 어느새 그들 가운데로 가까이 다가서고 있었다. 아난다가 걸음을 늦추며 말했다.
“정면 돌파는 아무래도 다시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그 순간 모두는 멈추어 섰다. 부딪쳐 보는 수밖에 없다고 우겼던 파천도 망설여지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무모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달리 마뜩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좀더 신중해질 필요는 있었다. 이때 아난단가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다.
“저 혼자 비행선 안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협상의 여지가 있는지를 먼저 알아보고 나서……. 그때 움직여도 늦지는 않습니다.”
반대하기도 찬성하기도 난감한 제안이었다. 위험천만인 적지로 그 혼자만이 들어가는 걸 간단히 허락할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것보다 좋은 방법도 생각나지 않는다.
아레나가 걱정스레 아난다를 쳐다본다.
“위험하지 않을까요?”
아레나는 말해 놓고 나서 후회했다. 어리석은 질문이었던 것이다.
파천은 아난다의 누구 때문인지 알고 있었기에 아무런 말도 못했다.
‘아난다의 능력이라면 비행선 안으로 침투하거나 빠져 나오는 건 어렵지 않겠지 문제는 그들과 마주앉은 뒤에 일이 벌어졌을 때다.’
파천의 염려처럼 아난다의 결정은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만큼이나 위험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일이었다. 선발대가 루하스를 지날 수 있게 길을 열어달라는 요구를 대적자들이 들어 줄 리가 없었다.
그나마 정면 돌파보다는 그쪽이 성사 확률이 높기에 이런 결정을 했다. 그러나 그 역시 현실적으로 만에 하나라도 기대하기 힘든 일이었다.
어쨌든 아난다는 모두의 기대와 염려를 한 몸에 걸머지고 비행선으로 향했다. 그가 사라져 가는 뒷모습은 파천의 마음을 더욱 쓰리게 했다. 아그립바가 파천의 머리 위에 앉아 생뚱맞게 지껄여댔다.
“어차피 싸우게 될 텐데 저런 짓을 왜 하는지 모르겠어. 일을 어렵게 만드는 게 취미인가 봐.”
“이게 무슨 뜻이오?”
사슬의 끝을 잡고 있던 둘 중에 딜타이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네 놈의 처지를 상기시켜 주려 함이다.”
다른 하나의 사슬을 손에 쥐고 있던 메르센느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부탁을 하러 온 주제에 뻣뻣하게 고개를 쳐들고 잇다는 게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제야 제법 어색하지 않군.”
대전의 좌우를 가득 메운 자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었는데 그들 중 하나가 단상 쪽을 보며 말했다.
“명령만 내리십시오. 전사들을 쓸어 버리겠습니다.”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겨 있던 플로렌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감히 날 이렇게 대점한단 말인가! 후환이 두렵지 않단 말이더냐?”
마이어의 분노에 찬 음성은 쩌렁쩌렁 울렸으며 대전을 넘어 밖에까지 퍼져 나갔다. 마이어는 이곳에 오먀 단 하나의 수하만 대동했다. 그는 지금 대전 밖에서 마이어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소리를 들었음인가?
콰당
대전 문이 박살날 듯 세차게 열리며 한 인물이 안으로 쏘아져 들어왔다. 그는 대전 내의 전경을 확인하고 다짜고짜 손을 쓰려 했다. 마이어가 수하에게 다급하게 명령했다.
“기다려!”
짧은 명에 바로크는 거짓말처럼 동작을 멈추었다. 그때 플로렌서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턱을 괴고 있던 한 손이 다른 한 손을 감쌌다.
“제법…… 흥미로운 놈이로군.”
딜타이는 대전 안으로 뛰어든 사내에게 하는 말임을 알아채고 그를 다시 주시했다. 사내의 눈은 마이어의 두 손목을 옭아매고 있는 사슬을 훑어 가다 딜타이와 마주쳤다. 그 순간 딜타이는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기분 나쁜 눈이다.’
플로렌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아래쪽으로 걸어 내려왔다.
계단을 밟아 내려오던 그녀가 우뚝 멈춰 서더니 조금 전 전사들을 쓸어 버리겠다고 말했던 자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쓸어 버릴 필요는 없고 쫓아 버려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대전에 있던 자들이 우르르 밖으로 몰려가는 걸 지켜보던 플로렌서가 딜타이와 메르센느에게 말했다.
“그를 그런 식으로 대하다니……. 너무 한 것 아니냐?”
마이어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오르는 걸 간신히 참고 있었다. 손목을 감은 사슬을 통해 막대한 기운이 몰려 들어왔지만 견딜 만했다. 그가 가만있는 건 아직은 참아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확실한 승산이 보장되기 전에는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신중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플로렌서의 입에서 최종 결정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참을 수 없는 수치도 견딜 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풀어줘라.”
딜타이와 메르센느는 군말 없이 쇠사슬을 회수했다. 그제야 자유롭게 된 마이어가 몸을 일으키며 플로렌서의 의중을 물었다.
“전사평의회와 적대할 참이오?”
조금 전 내린 명령은 분명 그런 뜻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플로렌서의 입에서는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거절할 수 없는 흥미로운 조건을 제시해 온다면 상황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네게 그런 게 있나?”
“대화를 해보면 알게 될 것이오.”
“그래?”
플로렌서의 눈이 흥미를 담고 반짝이다 마이어의 등 뒤쪽으로 다가온 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네 수하인가?”
마이어는 두 손ㅁ녹을 어루만지며 짧게 대답했다.
“그런……. 셈이오.”
“무슨 말이지?”
“지금은 내 명을 듣고 있으니 수하라고 할 수 있소.”
플로렌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제 말해 봐라. 너는 내게 뭘 줄 수 있지?”
“전사평의회가 앞으로도 그대들의 앞길을 막지 않을 것을 약속해 줄 수 있소.”
딜타이가 냉소하며 마이어의 말을 비웃었다.
“같잖은 소리!”
마이어는 개의치 않고 하고 싶은 말을 마저 했다.
“서로간에 아무런 이익도 없이 대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소. 무한계 전사들의 연합기구가 어느 정도의 전력을 발휘할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오.
그대들의 목표는 메덴인 것으로 알고 있소. 괜히 우리를 적으로 만들어 어려움을 자초할 이유는 없으리라 보는데……. 그렇지 않소?“
“그래서? 계속 해봐.”
“그대들이 우리와 대적하지만 않는다면 우리 또한 모른 척하겠소. 불가침 협정을 제안하는 거요.”
“네게 그런 권한이 있는가?”
“지금은 없소. 그렇지만 곧 생길 것이오. 차후 제대로 형식을 갖춰 협정을 맺을 수 있도록 추진시키겠소.”
플로렌서는 손가락을 이리저리 돌려 보이며 마이어의 곁으로 다가온다. 고작 한 걸음 앞에 선 플로센스가 마이어를 직시하고 입을 열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한데……. 또 없나?”
마이어는 할 말을 잃었다.
“이런 건 어떠냐? 너희 전사평의회가 우리와 힘을 합해 메덴을 치는 거지. 그정도라면 내쪽에서도 매우 흡족할 만한 조건이데.”
마이어는 기가 차 가만있었다.
“그건 실은가 보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무한계 전체 여자들에게 공분을 살 일. 그럴 수는 없소. 내부적으로도 반대에 부디힐 게 뻔하오.”
“호오, 그래?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메덴이 너희들을 인정하지 않노라 선언한 걸로 알고 있는데……. 그 정도면 명분은 충분하지 않은가?”
‘그러나 어찌 너희들과 힘을 합해 메덴과 싸울 수 있단 말이냐?’
마이어는 차마 내심의 생각을 입 밖으로 흘리지는 못했다.
플로렌서는 마이어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다 등을 보이며 돌아섰다. 마이어는 플로렌서의 등을 가격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계단을 올라가 자리에 다시 앉은 플로렌서가 손끝으로 턱을 매만지며 매혹적인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한 가지 알려 주지. 곧 루하스 강 아래쪽, 다시 말해 무한계 남부권은 우리 손에 떨어진다. 우리의 막강한 본진이 이동을 시작했다.
누구도 그 앞을 막지 못해. 머잖아 중부권으로 진입하게 되면 그제야 세상은 우리의 실체에 대해서 알게 되겠지.”
무한계의 세 축은 너희 전사들과 칠대부족 그리고 메덴이다. 그들 가운데 우리의 제일적은 메덴이니 우선적으로 그들을 치겠지만 그 과정 중에 우리 앞길을 막는다면 너희와 칠대부족이라고 해서 무사할 수는 없을 거야.“
‘저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건가? 대적자들이 그렇게도 강한 힘을 비축해 두었단 말인가? 믿을 수 없다, 이건…….’
마이어는 무한계 전체와의 싸움도 불사하겠노라 호언하고 있는 상대의 말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어쨌든 통행세치고는 너무 무리한 요구요. 나로서 최대한 제시할 수 있는 선은 그대들이 우리를 먼저 치지 않는 한 우리 또한 가만있을 거라는 것, 이것 한 가지요. 결정을 내려 주시오.”
마이어는 그리 큰 기대를 갖지는 않았다. 이들이 끝까지 고집을 부린다면 전사들을 끌고 정면 돌파를 시도할 생각이었다. 성공보다는 실패 쪽이 더 확률이 높지만 그리 쉽게 허물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이 소식이 중부권에 알려지면 후속조치가 내려질 테고, 구원군이 보내질 것은 당연했다. 그때까지만 버텨내면 되는 것이다.
“어쩔 수 없군. 널 죽여 봐야 내게 이익이 없으니 너를 포로로 잡아 두고 차후 가치를 따져 봐야겠다.”
한마디로 거절이었다. 마이어는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자신을 포로로 잡아 둘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비겁하군. 협상하러 온 자를 포로로 삼으려 한다는 말인가? 진정 전사평의회와 적을 지고 싶은건가?”
“너도 알고 있는 일일 텐데? 결국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걸. 얼마간 이용할 가치가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바에야 서로 불편한 심기를 감추고 굳이 애써 가며 부드러운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지.
강한 자는 살아남을 것이고, 그가 모든 걸 증언하게 될 테지. 나는 이제 널 이곳에 잡아 둘 참이다. 너는 어떻게 내 앞에서 도망 갈 셈이냐?“
마이어는 상대의 눈이 웃고 있다 느꼈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음을 던지는 태도는 여유의 반증이었다. 네가 아무리 용을 써도 안 돼, 라는.
반대로 마이어는 절박한 편이었다. 여유를 누리는 상대를 앞에 놓고 절박해 있는 건 지금껏 그가 익숙하게 된 경험해 오던 것이 아니었다.
생소한 모습이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마이어는 가슴이 떨리는 걸 숨길 수 없었다.
‘강하다. 그러나 나 또한 약하지 않다.’
유클릿 전사단의 명예와 스스로의 야망을 위해서라도 여기서 좌절할 수는 없었다. 한 번의 침몰이 지금껏 쌓아 왔던 모든 걸 뺏어 갈 거란 건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두 다리에 힘을 주고 가슴을 활짝 폈다. 그리고 당당한 목소리로 거침없이 음성을 토해냈다.
“나, 유클릿 전사단의 마이어는 그대 플로렌서에게 정식으로 도전하겠다. 너와의 승부에서 내가 이긴다면 나와 전사들의 앞길을 열어 달라. 어떤가, 해볼 텐가?”
그가 던진 마지막 수는 그리 적절한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최선이었다. 갑자기 터져 나온 웃음소리가 대전을 가득 채운다.
그건 딜타이와 메르센느의 것이었다. 플로렌서는 여전히 마이어만 쳐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가 잔잔한 목소리로 말해싿.
“그것 재미있겠군. 그런데 이를 어쩌나. 나는 그리 한가하지 않단 말이야. 널 이겨 봐야 내게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거든.”
“나와 대결해 질 것이 두려운건가?”
“좋도록 생각해 넌 지금부터 포로다. 널 살릴지, 죽일지, 아니면 노예로 부릴지는 내 뜻에 달린 거다.”
“내가 거부하면!”
“그건 네 자유기도 하지. 딜타이!”
“네, 명령만 내리십시오.”
고개 숙인 딜타이의 머리 위로 플로렌서의 단호한 명령이 떨어져 내렸다.
“둘을 가두고 축제일까지 감시에 만전을 기하라. 만약 이들이 탈출을 하는 일이라도 생긴다면 네 죽음으로 책임을 물을 것이다.”
“명을 이행하겠습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딜타이의 대답은 시원스러웠다.
마이어는 순간 망설였다. 이대로 순순히 포로로 잡힐 것인가, 아니면 마지막 발악이라도 해볼 것인가를 놓고 그는 짧은 시간 동안 치열하게 고민해야만 했다.
‘기다리자. 아직은 때가 아니다. 기회는 분명 찾아올 것이다.’
그의 가슴속은 차갑게 식어 갔고, 그 순간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마이어 뒤에 서 있던 바로크는 다름 명령이 없어서인지 잠자코 가만있었다. 딜타이와 메르센느는 마이어가 반항할 것을 대비해 신중하게 다가섰다.
그걸 보고 마이어가 웃으며 말했다.
“긴장하지 않아도 돼. 난 그리 어리석은 놈이 아니거든.”
딜타이가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잘 생각했다. 반항해 봤자 고통만 가중될 뿐이야.“
쉬이익
촤르르륵
메르센느와 딜타이의 손에서 조금 전 보였던 은빛 사슬이 다시 튀어나왔다. 그저 빛이 번쩍 하는 듯했는데 어느새 마이어와 바로크는 옴짝달싹 못할 정도로 포박되고 말았다.
그들은 사슬의 끝을 잡고 둘을 모처로 데려 갔다. 그들이 대전에서 사라지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언제까지 숨어서 얘기만을 엿듣고 있을 텐가? 아직 더 기다릴 일이 있나?”
“다시 만나는군요.”
“생각보다 빨리 만났어.”
플로렌서의 그 말은 스스로에게 하는 독백 같았다.
“그런 셈이죠.”
“내가 저번에 분명히 경고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더군요.”
조금 전까지 마이어가 서 있던 자리에 아난다가 나타났다. 그의 출현을 눈여겨보던 플로렌서가 별안간 소리내 웃기 시작했다. 그녀의 웃음은 쉽사리 멈출 것 같지 않았다.
“선발대를 막으실 겁니까?”
재차 아난다의 질문이 이어지자 그제야 웃음을 그친 플로렌서는 의자에 상체를 깊숙이 묻으며 두 손을 깍지꼈다.
“겁이 났던가 보지? 본체는 어디다 두고 분신을 해서 온 건가? 의외로군, 천하의 아난다가 말야. 호호호호.”
그것 때문이었던가. 플로렌서의 말처럼 아난다는 현재 본체를 두고 분신을 한 상태였다. 아난다가 이번 일을 얼마나 큰 고비로 여기는지를 알게 해주는 대목이었다.
“좋아, 하고 싶은 말이 뭔가? 너도 마이어와 같은 소리를 하고 싶나?”
“그렇습니다.”
“내가 왜 그걸 들어 줘야 하지? 아니, 다시 말하마. 내가 네 요구를 들어 줄 거라 여겼나?”
“그렇습니다.”
아난다가 천연덕스레 대꾸하자 플로렌서의 고개가 갸웃 기울어진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아난다의 질문이 비집고 들어온다.
“파천이 광명을 가져 올 거라 여기십니까?”
플로렌서가 흥미를 가질 법한 물음이었다. 대답은 그러나 대수롭지 않았다.
“흐음……. 그리 쉬운 일이었다면 우리가 벌써 훔쳐 왔다.”
“그렇죠. 그런데 뭐가 두려운 거죠?”
“천만에……. 내가, 우리가 두려워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깟 광명 따위가 우리 앞에 장애가 될 정도로 대단한 것도 아니지.”
“그렇데 왜 굳이 우리 앞길을 막는 건가요. 플로렌서 님이 선발대를 제거하려 한다면 영자들은 모두들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보라, 저들 역시 천궁의 광명은 두려워하는도다. 광명을 가져 오면 무한계를 통일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이죠.”
“그럴 듯하군.”
“메덴을 치는 게 목적이 아니던가요?”
“메덴만이 우리의 적은 아니야. 우리가 도모하고자 하는 걸 너 또한 알고 있지 않은가? 내가 선발대를 내버려 둘 수 없는 이유를 누구보다 아난다 네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쓸데 없는 희망! 그래, 그것이 나는 두려운 거야. 무한계가 하나로 똘똘 뭉친다면 여간 성가신게 아니거든.”
“그것이 가능하리라 보십니까? 당장 전사들이나 메덴의 움직임만 보더라도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기에는 서로가 바라보는 시선이, 그 출발점이 너무도 상이하다는 게 문제죠.”
“천만에……. 우리가 왜 쫓겨났다고 생각하나? 다른 놈들이 생각하듯 우리가 메덴의 힘에 눌려서 도망갔다고…….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웃기는 소리지. 우리가 두려워하는 건 단 하나야. 수호자! 언제나 그놈이 문제였어. 그때도 그랬었다.
마지막에 그 자의 개입만 없었더라면……. 우리는 무한계에 우리의 왕국을 건설했을 거다.
그런데 그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그놈이 어디엔가 숨어서 또 무슨 꿍꿍인가를 부리고 있단 말야. 다시는 그런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다. 수호자와 관련된 일은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싹이 자라나기 전에 캐버린다.
이제 알겠나? 내가 선발대를 제거하고자 하는 이유를 말야.”
아난다는 쉽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설득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그럴듯한 말로 유혹해 본다 해도 씨도 먹히지 않을 일이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쉽게 물러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난다, 너 또한 내가 곱게 바라볼 수 없는 수련자의 신분. 마음만 먹는다면 비행선 어딘가에 숨겨 놓았을 네 본체쯤 찾는 건 일도 아니다.
돌아가라!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내가 쳐놓은 그물을 뚫어 보아라. 너라면 나도 꽤나 애를 먹겠지. 나 역시 최선을 다할 것이다.”
“어리석구려. 그대들은 무대의 주역이 아니오. 그걸 모르시오?”
“헛소리하지 마라. 예전엔 어쨌는지 모르지만 이제는 아니다.”
“메타트론과 루시퍼 조차 파천을 그대로 보내야만 했었소. 그런데 당신들이 파천을 죽이겠다고? 그게 가능하리라 믿소?”
플로렌서의 어조는 사뭇 심각해져 갔다.
“무슨 뜻이지?”
“그것도 모르면서 이번 일에 나선 거요?”
“상관없다. 마계든 천상계든, 아니 천궁이 개입되어 있다 해도 우리는 멈추지 않는다. 멈추기엔 이미 늦어 버렸어.”
“함부로 나서지 마시오. 이건 절대자들가느이 싸움이지, 무한계를 놓고 벌이는 세력 다툼 따위가 아니오.“
플로렌서는 쉽게 입을 떼어놓지 못했다. 뭔가를 깨달은 듯했다.
한참 뒤에 그녀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네 말도 일리가 있어. 좋아, 다 좋아.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어. 우리는 결국 이길 테니까.”
“플로렌서 님, 한 가지 제안을 하죠.”
플로렌서는 침묵으로 아난다의 다음 말을 재촉했다.
“파천을 포로로 잡으세요. 그리고 전 영계에 그 사실을 공표하십시오.”
순간 플로렌서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수호자가 안배한 일곱별뿐만 아니라 음지에 숨어 있던 진실을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플로렌서는 앉아 있다 벌떡 일어서고야 만다. 그리고 아난다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자신이 없나요?‘
힘없이 무너진 플로렌서의 신형이 의자 위로 더욱 깊숙하게 자리 잡는다.
“일곱별이라……. 그래, 나도 궁금하긴 해. 파천을 잡아 두고 있으면 그들이 나타나겠지. 그러나 파천을 제거해도 그들은 어차피 나타날 거란 말이야. 굳이 그런 수고를 할 필요가 있을까? 하긴 포로로 잡힌 이상 탈출은 불가능한 일이긴 하지.”
플로렌서는 아난다의 속내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일단 잡혔다가 탈출을 시도해 보겠다는 거겠지? 그건 불가능하다, 아난다.’
“그래서 너는 순순히 포로로 남겠다는 건가, 저항도 없이?”
“한 가지 약속만 해준다면!”
“계속해 봐.”
“모든 게 드러나 그대가 흥미를 잃을 때까지는 선발대의 그 누구도 해치지 마시오. 더군다나 파천은 절대 안 되오. 그것만 약속해 준다면 순순히 포로가 되겠소.”
뜻밖의 제안이었다. 플로렌서는 갈등이란 걸 해야만 했다. 무엇이든 그리 오래 생각하지 않는 그녀로서는 참으로 오랜만에 겪는 번거로움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그리 오래 가지는 않는다.
“좋다.”
명쾌한 답변에 아난다의 표정이 상당히 누그러진다.
그걸 본 플로렌서가 아차, 하는 심정이 된 건 당연했다. 그것조차 아난다의 속임수 같은 생각이 더 강하게 드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플로렌서의 명대로 전사들은 루하스 강이 멀리 보이는 곳까지 쫓겨나야만 했다. 대신 선발대는 비행선 내부로 지나치게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인도되었다.
뜻밖의 일을 겪고 있는 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찾으며 무슨 영문인지 몰라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에게 비행선 안을 마음껏 활보하고 다녀도 될 자유까지 보장된 건 아니었다. 서로간의 대화조차 조심해야 할 정도로 감시는 철저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플로렌서는 이런 저런 이유를 붙여 선발대를 대전으로 오가게 했으며 특히 파천과 아난다는 그 빈도가 월등히 잦았다. 시간은 이러한 사소한 변화를 동반한 채 조용히 흘러 갔다.
비행선이 루하스 강 중심으로 이동해 갔을 때였다. 강변 쪽에 배치되었던 소형선들마저 모선쪽으로 옮겨간 뒤였는데 강변 북쪽을 향해 소리 없는 움직임이 아무도 감지하지 못한 채 이뤄지고 있었다.

대전에서 물러나오던 파천이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툴툴댄다.
“언제까지 여기서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거지?”
“때가 되면 나가게 될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심사가 뒤틀려 있던 파천이 아난다를 쏘아붙였다.
“그때가 그러니까 대체 언제냐고? 차라리 한번 속 시원하게 붙어 보기나 했으면 억울하지는 않지……. 이게 무슨 꼴이람.”
“대단한 친구지 않습니까?”
뜬금없이 엉뚱한 화제를 입에 올린 아난다를 파천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쳐다본다.
“무슨 소리야?”
“라치오 말입니다.”
굽어진 복도를 막 돌아가던 파천이 별소릴 다 듣겠다는 투로 되물었다.
“허 참, 대체 뭐가 대단하다는 거야? 아직까지 소식도 없는데.”
“그러니까 대단하다는 겁니다.”
맡은 일을 무슨 일이 있어도 성사시켜 놓겠다 호언했던 자가 지금껏 아무런 움직임조차 없다. 그 점에 대해 선발대 내에서도 부정적인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그건 파천도 마찬가지였다.
“아직도 시도를 하지 않았다는 점, 그것이 그를 높게 평가하는 부분입니다.”
“알아듣게 설명해 봐.”
“기회란 그리 자주 오는 게 아닙니다. 단 한 번의 기회, 그것을 포착하는 데는 끝없는 인내심과 냉철한 판단력이 요구되죠. 성패는 일을 도모하기 전에 대부분 결정됩니다. 완벽한 확신이 들 때, 그 확신을 끌어내기 위해 상황까지 조성해 두고 나서, 이미 이겨 놓고 나서 시작하는 거죠.
그 자는 성공할 겁니다. 이 정도로 신중한 자라면 실패보다는 성공의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파천의 얼굴에 묘한 변화가 일었다. 아난다의 말을 듣고 나서야 자신이 간과하고 있던 부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흐음, 그렇게도 볼 수 있는 거로군.”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위험한 승부수는 도저히 다른 방법이 없을 때 마지막에나 던지는 겁니다. 아직은 그럴 때도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기 때문이죠.
조급해 하시면 안 됩니다. 노한 파도를 거슬러 오르기보다는 물결의 흐름을 읽고 몸을 맡기는 게 순리일 테지요. 몸의 균형을 잡고 파도와 자신이 향하는 곳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여유쯤은 가지셔야 할 겁니다.”
아난다의 충고는 그 음성의 부드러움에 비해 매섭게 파천의 심금을 때렸다.
‘아난다는 나보다는 더 깊고 넓은 시선으로 상황을 살피고 있었던 거야.’
파천은 아난다의 조용한 심연과 같은 눈빛 가운데 흔들림 없는 든든함을 느꼈다. 파천과 아난다가 처소로 들어서자 다른 일행들이 가운데로 모여들었다. 대책 없이 시간만 흘러 가는 것에 대해 모두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표정만 봐도 그건 쉽게 드러난다. 아레나가 탁자를 짚으며 물었다.
“어쩌실 셈이죠?”
“기다려야죠.”
“누군가 와서 휘저어 줄 때까지 말입니까?”
“네. 상황이 변하지 않고서는 섣부른 행동을 취할 수가 없습니다.”
자리에 힘없이 주저앉은 권터가 사방을 둘러보며 이를 갈아붙였다.
“저놈들의 감시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란 말야.”
사방에서 느껴지는 기운들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음파야 차단시켜 놓았다지만 감시의 눈길만은 피할 수가 없었다. 앙샹뜨는 파라슈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비교적 평온한 얼굴이었다.
검지손가락 위에 파라슈를 세워놓았다가 허공으로 던져 올리며 말했다.
“아난다 님이 기다리는 자들이 누구죠? 대충 살펴보아도 이 비행선의 전력은 대단한 것 같더군요. 시도조차 해보지 않고 포로를 자청하실 만했다고 판단되었습니다. 그런데도 희망을 가지시는 걸 보니…….”
“일곱별이겠지.”
아난다가 단지 그들만 기다리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쪽을 더 기다린다는 게 맞았다.
‘그들은 반드시 온다. 도나투스와 같은 때에 도착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지만……. 그들만으로도 기회는 생길 것이다.’
아난다가 기다리는 건 적어도 세 부류의 영자들인 셈이었다. 도나투스, 일곱별 그리고 ‘그들’.
“일곱별 중에 과연 몇이나 올까요?”
앙샹뜨가 허공중에 던져 올린 파라슈를 중간에 낚아채며 파천이 신중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내가 만약 그들 중 하나라면 그리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을 걸. 나타난다 해도 스스로가 일곱별 중에 하나임을 밝히지는 않겠지. 그런 점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자들 중에 하나일지도 모르는 일이고.”
파천의 추측은 그럴 듯했다. 아난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한다.
“제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와 라미레스 님이야 이미 드러나 있으니 제외하더라도 나머지는 스스로 밝히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일이죠. 전혀 의외의 영자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누가 오더라도 이곳의 전력을 감안하면 뒤흔들기는 쉽지 않을 텐데. 중부권의 전사단들이 떼거지로 밀려오기 전까지는 끄떡도 하지 않을 것 같단 말야. 더군다나 플로렌서가 그러지 않았나? 곧 본진이 도착한다고. 그들이 온 뒤엔 상황 종료야.”
“그 전에 도착해야 합니다. 파천 님의 말씀처럼 대적자들의 본진이 합류하면 탈출은 힘들어집니다.”
파천 등이 염려를 더해 가며 대화에 열중하는 바로 그 시간, 비행선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대전에서도 심각한 대화가 무르익고 있었다.
메르센느가 차분한 어조로 플로렌서에게 보고를 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아직까지는 별다른 상황 변화는 없습니다. 몇몇 전사들이 강을 건너려다 헤브론들에게 당한 걸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았습니다. 제 생각에는…….”
“내가 아난다의 술책에 놀아났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그렇다기보다는…….”
말을 흐리는 메르센느와는 달리 딜타이는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그렇습니다. 메덴이나 전사단들이 쳐들어온다면 가능성이 있겠습니다만 그들은 그리 쉽게 도발하지 않을 겁니다. 일곱별이라고 해봐야 일곱 놈이란 얘긴데……. 되도 않은 소리죠. 그들이 최고의 강자들이라 가정한다 해도 우리의 전력은 그 이상입니다.”
“딜타이, 그 중의 하나가 라미레스인 걸 잊었느냐! 상부에서 서두르는 이유가 그 자의 등장 때문이기도 하거늘 그리 쉽게 말할 수 있나?”
“하긴…… 그렇군요.” 딜타이는 라미레스라는 이름에 자기도 모르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알고 있던 사실이었건만 다시 들으니 새삼스러웠던 것이다. 언제 들어도 여전히 기분나쁜 이름이었다.
“아무리 강자라고는 해도 그는 혼자입니다.”
어느새 자신감을 회복한 딜타이의 목소리가 꽤나 당당해지자 메르센느는 입가에 미소를 만들어냈다. 플로렌서가 혀를 끌끌 찼다.
“일곱별이 모두 그 자 정도의 강자들일 경우엔?”
“설마 그럴 일은…….”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만큼 라미레스의 명성과 위치는 대단한 것이었다.
딜타이는 예전 딱 한 번 라미레스를 대면한 적이 있었다. 한창 무한계를 휘젓고 다닐 때쯤이었는데 결국엔 대결하게 되었고, 딜타이는 등을 내준 채 도주를 택해야 했다. 그는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무지막지한 강자였었다.
‘중요한 건 나는 아직까지도 그 자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모른다는 점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제발 라미레스만은 오지 않았으면 하는 심정이 된다. 이러한 걸 눈치라도 챈 듯 플로렌서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미리 움츠려들 필요는 없다. 우리 쪽도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준비가 철저하다. 안심해도 돼. 만약 예상이 빗나가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엔…….
파천을 먼저 제거하는 것 잊지 마라. 아무래도 내버려 두기엔 찜찜하단 말야.”
“그야 당연하죠.”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핵심 전력만 남겨 두고 모두 소진해도 좋다.”
“그 정도가 된다면 퇴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딜타이는 말하면서도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첫 출전이 될 텐데 그런 불명예를 남길 수는 없지. 마지막까지 여기는 사수한다.”
플로렌서의 의지는 단호했다. 그녀가 덧붙이는 말은 비장감마저 흘렀다.
“이왕이면 라미레스가 직접 왔으면 좋겠군. 받아내야 할 빚도 있고 말야.”
자신감 넘치는 플로렌서와는 달리 딜타이와 메르센느의 어깨는 축 처져 보였다.

무한계의 소식은 그 넓은 지역에 비하면 지나치게 빠르게 전달된다. 제한적이긴 하나 영언으로 소식을 전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비행선의 주인이 대적자들이며, 그들이 선발대를 억류하고 있다는 사실이 빠르게 무한계 전체로 퍼져 나갔다. 여기에 회합에 참여했던 전사들이 루하스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음도 덧붙여졌다.
그 동안 표면적으로는 평온을 유지하고 있던 무한계가 서서히 들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저마다의 입장 차이는 있지만 이 일에 무관심한 자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가장 먼저 움직임을 보인 건 역시나 자존심 강하고 호전적인 전사들이었다. 오대전사단들을 중심으로 그들은 재차 모임을 가졌고, 갑론을박 많은 얘기들이 오갔으나 결정된 건 하나였다.
구출대 파견! 일단은 대화를 전제로 하나 필요하다면 무력 사용까지도 염두에 두었기에 정예를 선발해 파병했다.
결과적으로는 이번 비행선 사건으로 인해 전사단 통합에 회의적이던 자들까지 힘을 합하는 계기가 된 셈이었다. 메덴의 입장 표명에다 대적자들의 등장까지 겹쳤으니 위기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오대전사단이 뜻을 하나로 합한 건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이것 또한 영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어떻게 될 것인가? 모두의 시선은 이제 비행선이 위치한 루하스 강으로 모아졌다. 어떤 천지개벽할 일이 벌어져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수군대는 자도 있었고, 별일 없이 마무리 될 것이라 낙관론을 펴는 이들도 있었다.
어쨌든 대적자들이 다시 무한계에 나타났고, 마계 침략이 곧 있을 터이니 좋든 싫든 대규모 전쟁은 피할 수 없을 거란 데에는 모두가 동의하는 부분이었다. 세력에 속한 자들은 자신이 속한 조직이 어느 노선을 걸을 것인가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그 어디에도 매인 곳이 없는 자들은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영격수련에 매진하며 세상사에 초연했던 부류들은 결국엔 천궁이 나서서 모든 일을 매듭 지을 것이라 위안하며 불안감을 떨쳐내려 애썼다.

루하스 강 북쪽, 무한계 중부권의 첫 관문에 작은 매소가 하나 있다. 중부권의 끝머리에 위치하기에 다른 중부권의 매소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온한 곳이었으며, 상주하는 영자들의 수보다 잠시 거쳐가는 영자들의 수가 월등히 많은 곳이었다.
매소 라훔의 서북방에 검은 윤기가 흐르는 질 좋은 마호석으로 지은 석전이 자리하고 있다. 나지막한 언덕에 고양이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는 듯한 모양의 석전은 라훔의 영자들에게 신비와 외경의 대상이 되는 곳이었다.
비교적 이곳에 오래 거주한 이들도 이 석전이 언제 지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었다. 석전의 주인에게 라훔의 영자들은 현자라는 뜻의 ‘바쉬’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주었다.
라훔이 큰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바쉬는 거처를 떨치고 일어섰고, 그때마다 어떤 어려 운 난제도 쉽게 풀곤 했다. 그래서 라훔의 영자들은 바쉬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석전이 위치한 현자의 언덕 주변에는 그 무엇도 짓지 않았으며 출입도 삼갔다.
그 언덕이 보이는 곳에 한 인물이 서 있었다. 푸른색이 감도는 장포를 걸치고 멋들어진 긴 수염을 바람에 휘날리며 석전을 바라보는 중이다. 행색을 보아서는 수련자처럼 보였다.
몇 걸음 뒤에 또 하나의 영자가 서 있다. 루딘족이 만든 것이 분명한 전사복을 걸쳤는데 가슴에 황금빛 문양을 새겨 넣었다.
투구의 양쪽으로 손바닥 크기 정도의 뿔이 매달린 것이 이채롭다.
“여긴가 봅니다.”
전사로 보이는 이의 말에 수련자는 모리를 쓸어 올렸다.
대답대신 그는 걸음을 내딛었다. 전사의 얼굴에 미세한 긴장감이 서리기 시작했다.
“그냥 들어가실 겁니까?”
“따라와라.”
전사는 허리에 매여 있는 파라슈를 습관인 듯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제가 먼저 가서 의사를 타진해 보겠습니다.”
수련자가 처음으로 전사를 돌아보았다.
“이미 우리가 온 것을 알 텐데……. 그런 수고를 할 필요는 없다. 부담스럽다면 여기 있어도 좋다.”
전사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체념하며 수련자의 뒤를 따른다.
석전은 매우 단조로운 형태로 지어져 있었다. 귀한 마호석을 재료로 사용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특징조차 없었다. 어찌 보면 거대한 마호석을 다듬어 통째로 갖다 놓은 듯했다.
“이렇게 큰 마호석이 있을 리가 없지.”
전사의 중얼거림에 수련자는 실소를 흘린다. 그들이 문이라 짐작되는 곳 앞에 섰을 때였다.
“들어오지 마라!”
안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밖으로 흘러 나와 막 안으로 들어서려던 둘의 움직임을 결박했다.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내가 나가겠다.”
그그그긍
돌과 돌이 마주치는 소리는 그리 듣기 좋은 것은 아니었다.
석문이 밀려나며 한 영자가 문 앞을 막으며 버티고 섰다. 그 역시 수련자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매우 아름다운 얼굴의 소유자였다. 남성인지 여성인지조차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였지만 전사는 장대한 체격만으로 그가 남성일 거라고 생각했다.
바쉬가 밖으로 걸어나오자 수련자는 그 만큼 뒤로 물러섰다.
“여긴 웬일이지?”
“당신의 힘이 필요합니다.”
간단한 물음과 짧은 대답.
그것만으로는 둘의 신분과 관계를 짐작키는 어려웠다.
“다른 용건이 없다면……. 이만 돌아가라.”
그 말을 끝으로 매정하게 돌아서는 바쉬.
수련자는 그를 붙잡지 않았다. 단지 한마디만 했을 뿐이다.
“로메로 님께서 말씀하셨소. ‘붉은 용이 불을 뿜으면 세상은 끝이 난다. 푸른 용이 춤추면 세상은 빛을 보리라. 그대는 어느 용이 출현하길 바라는가?”
바쉬는 걸음을 멈추었다. 수련자는 다시 말했다.
“또 로메로 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진실은 세상에 드러날 것이고 그때는 멀지 않았다. 과오를 참회하는 것보다 진실을 똑바로 볼 수 있는 용기가 더 훌륭한 것이다!’”
“그게 다인가?”
바쉬의 음성은 처음과 다름없었지만 수련자는 알고 있었다. 상대가 지금 얼마나 격동하고 있는가를.
“로메로 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친구여, 세상으로 나와라. 이제 때가 도래했노라. 우리의 지난날이 오늘을 위해 존재했도다!’”
“그런가? 그가 내게…… 친구……라 했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바쉬는 돌아섰다.
“로메로는 지금 어디 있나?”
“제왕의 파견자를 찾아갔습니다.”
“무엇이? 이런 바보 같은 놈. 거길 혼자 갔단 말인가?”
“아닙니다. 혼자 간 것은 아닙니다. 동행이 있소.”
“누구지?”
“모릅니다.”
바쉬는 잠시 깊은 사색에 잠겼다.
수련자는 그가 입을 떼기를 기다렸다. 뒤에 서 있던 전사는 라훔의 영자들에게 바쉬라고 불리는 자를 유심히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저 자가 바로 전설의 전사 불칸!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로군.’
라훔의 영자들이 현자로 추앙했던 바쉬가 예전 카란과 함께 메테우스의 최측근 중 하나이자 경호를 책임졌던 대전사 불칸이었다니.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불칸의 이름은 지금도 전설로 남아 있었다. 오죽하면 남부권의 유명 전사단 중 하나인 불칸이 제 원래의 이름을 버리고 이걸 사용하고 있을까. 그가 작은 매소 라훔에서 원래의 신분을 감추고 숨죽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뭘 하면 되지?”
승낙이었다. 수련자의 얼굴이 한결 밝아 졌다.
“나와 함께 루하스 강으로 가면 되오.”
“거기는 왜?”
“그곳에 대적자의 무리가 나타났소.”
“그래서?”
수련자는 할 말을 잃었다. 불칸의 표정에서 대적자라는 이름이 주는 부담감을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그들이 포로로 잡고 있는 자를 구해내야 합니다.”
불칸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귀찮은 일이군. 그가 누구지?”
“파천이라는 생령입니다.”
불칸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계속 말해 봐.”
“로메로 님은 그 자가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자의 신변을 보호해야만 진실이 드러날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생령이 무한계에 왔다는 얘기는 들었다만……. 이것 참……. 내가 나서면 모두의 주목을 받게 된다. 그것쯤 알고 있겠지. 그런데도 그런 일을 하라고 했단 말인가?”
“그렇소.”
“저어…….”
수련자의 뒤에 서 있던 전사가 입을 달싹이며 머뭇거리고 있자 불칸이 그제야 처음으로 시선을 주었다.
“뭐냐, 할 말이 있냐?”
전사는 거의 부동의 자세로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대적자들의 비행선을 향해 여러 부류의 영자들이 몰려들고 있다 들었습니다. 그러니 크게 드러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이번 일에는 라미레스와 아난다 등의 수련자가 관련된 일이라 큰 주목을 받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수련자가 뒤를 이었다.
“라미레스가 생각보다 빨리 도착해 준다면 우리는 나서지 않아도 될 겁니다.”
불칸은 정색하며 말했다.
“라미레스가? 이것…… 의외로군. 그 고집불통 망나니가 누군가를 구출하기 위해서 움직인단 말인가? 그런데도 날더러 가보라는 건 그만큼 적이 강하다는 의미인가?”
“그렇습니다. 예상치 못한 적들을 만날 수도 있을 거라 하셨습니다.”
“흐음, 좋다. 앞장서라. 곧바로 출발한다. 가서 부딪쳐 보면 알게 되겠지.”
셋은 석전 앞을 떠났다.
불칸은 정든 집을 돌아보며 작게 중얼거려다.
“다시 돌아 올 일은 없겠지.”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견고한 마호석은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현자의 언덕에 바쉬의 석전이 사라진 것을 라훔의 영자들은 곧 발견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난다와 파천은 또다시 대전으로 불려 갔다.
대전으로 이르는 ㅌㅇ로는 다른 곳에 비해 더 고요했다. 파천은 주변에서 그 어떤 존재감도 느낄 수 없었다. 몇 번 오가며 익숙해진 파천은 여유가 있어서인지 주변을 살피며 걸었다. 파천은 한 곳을 바라보다 그 자리에 멈춰서고 말았다. 별안간 걸음을 멈춘 그를 아난다가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쳐다본다.
“저것……. 루딘의 비행매소에서 보았던 건데…….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
파천은 충격에 휩싸였다. 아난다가 파천의 시선을 따라가다 그의 시선이 머문 게 무언지를 알게 된다.
“저것 때문에 그러시는군요.”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아난다가 파천은 이해되지 않는다. 루딘의 비행매소에 있던 벽화가 여기에도 있다는 점. 그것을 어찌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저건 유명한 그림입니다. 이들이 사용했다고 해서 이상한 일은 아니죠.”
전쟁의 한 장면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 부조였다. 부분적으로 다르긴 하지만 루딘의 비행매소에서 보았던 것과 흡사했다.
특히 모든 이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 팡이 네 개씩인 인물이 앉아 있다는 점과 그들의 손에 여러 가지 물건이 들린 것, 가운데 앉은 이가 손에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잘린 머리통을 들고 있는 것, 그것을 바라보는 한 여인이 그 앞에 꿇어앉아 있는 부분은 정확하게 일치했다.
심지어 등 뒤에 감춘 단검까지도 똑같았다.
“이 그림이 유명하다고?”
“네. 이건 메테우스의 석탑에 그려져 있는 그림입니다. 루딘족의 비행매소에서도 그랬지만 여기도 굉장히 흡사하게 조각해 놓았군요.”
파천은 그제야 의구심을 떨쳐낼 수 있었다. 그는 그 부조를 보는 순간 혹시 이들과 루딘족이 무슨 연관성이 있는 건 아닐까, 라는 의심을 했던 것이다.
대전 안으로 들어서니 여전히 세 명이 전부였다. 플로렌서가 반갑게 아난다와 파천을 맞이했다.
“갇혀 있으려니 따분할 것 같아 불렀다.”
“포로인 주제에 이 정도면 황송할 따름이지.”
파천의 빈정거리는 말에도 플로렌서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딜타이는 달랐다.
“이죽거리지 마라. 다른 포로들에 비하면 네 놈들은 칙사 대접을 받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호, 그러셔?”
“이놈을 그냥…….”
급한 성격의 딜타이지만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쯤은 구분할 줄 안다. 그저 속만 끓일 뿐 다른 행동은 취하지 않았다.
“언제까지 우릴 여기다 잡아 둘 셈인가?”
“기다려 봐라. 너희들 때문에 누군가 와주길 빌어라. 그런 일이 없다면……. 내게 아무런 흥미도 주지 못한다면 그 순간이 바로 너희들의 마지막이 될 테니.”
“만약…… 우리가 탈출을 시도한다면?”
“그러다 잡히면 빨리 죽을 수 있겠지.”
“이래 죽나, 저래 죽나 마찬가지인데 탈출하다 죽는 게 낫겠군. 긴장하고 있어야 할 거야. 우리가 언제 탈출하지 모르니까 말야.”
파천의 말에 메르센느가 가당치도 않다는 투로 말했다.
“그럴 능력이 있었으면 포로로 순순히 잡히지도 않았겠지.”
그 순간 파천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과연 그럴까?”
별 의미 없이 한 말이겠지만 그걸 보는 메르센느는 왠지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묘한 놈! 저놈과 상대하고 있으면 괜히 나도 모르게 흥분하게 된단 말야.’
딜타이 역시 메르센느와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는 훨씬 더했다. 예전 마계의 대마신들도 그러지 않았던가. 파천의 그런 기질은 천부적인 건지도 모른다. 적들로 하여금 근거 없는 불안감에 몸 닳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딜타이는 결국 찬지 못하고 한마디하고야 말았다.
“네 놈을 꼭 내 손으로 잠재우고야 말겠다.”
“많이 듣던 말이군. 잘나신 분이 오죽하겠어. 능력이 되시는데 당연히 그러셔야지. 그런데 내가 보기엔 네 놈은 아니란 말야. 너는 날 어떻게 할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은 없어 보이는데……. 혹시 능력을 감추고 있는 거라면 기대해 보겠어.”
“이이이이…….”
플로렌서는 눈을 가늘게 뜨고 파천을 응시한다. 그녀의 머릿속은 파천에 대한 가치를 따져 보고 있는 중이었다.
‘왜 저놈에게 모두 안달이 나 있는 건가? 왜, 마계가 저놈을 순순히 보내 주었을까? 형편없어 보이는 저 따위 생령이 왜 내게 불안감을 주는 거지? 알 수 없다. 알 수 없어. 기분 나쁜 놈.’
처음 봤을 때와 지금은 또 달라 보였다. 그런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아난다에게 말을 건넸다.
“아난다, 어떻게 된 건가? 아직도 아무런 소식이 없는데……. 난 그리 오래 기다릴 수 없어. 내 인내심의 한계는 거의 바닥이 났다.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제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저놈부터 처치할 거야. 그 다음은 너고!”
“불안한가 보군요. 하긴 비행선을 버리고 도주해야 할지도 모르니 당연하겠지요.”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버러지 같은 삼류 전사들은 겁을 집어먹고 옴짝달싹 않고 있다더군. 전사단들이 구출대를 보냈다고 하던데……. 그대들을 향한 손길은 아직 포착되지 않는단 말야.”
파천도, 아난다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파천은 알고 있었다.
‘천마와 수하들은 분명히 온다. 그러나 그들이 오기를 기다리고만 있어서야 내 체면이 말이 아니지. 그 전에 할 일이 있다.’
파천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았다. 아난다조차 짐작 못하는 계획이 파천의 머릿속에서 제 모습을 갖춰 가고 있었던 것이다.
플로렌서는 모두가 귀길우여 들을 만한 얘기를 꺼내놓는다.
“지금껏 비행선을 통해 모아 온 용병들과 노예들은 상당한 수에 이르지. 거기다가 헤브론의 전력까지 치면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한 전력이지.
객관적인 기준으로 따져 봐도 오대전사단 중에 두 개 정도는 거뜬히 상대할 수 있을 정도다. 어떤가, 직접 겪어 보고 싶지 않나? 무료함도 달랠 겸 말야.“
딜타이와 메르센느조차 예기치 못했던 제안이었다. 파천은 달리 거절하고 싶지도 않았고 플로렌서의 말처럼 궁금하기도 했다. 대충 규모는 짐작하고 있었지만 정예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실제로 겪어 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었다.
“그것 흥미로운 제안이군.”

파천의 생각과는 상황이 전혀 다른 쪽으로 전개되어 갔다. 플로렌서는 파천 일행을 마계의 원형 경기장과 흡사한 곳으로 인도했다.
판에 박은 듯 비슷한 구조물에 파천은 일시 옛 기억으로 전율했다. 친인들과의 마지막 헤어짐이 있던 마계의 원형경기장을 방불케 하는 곳에 파천이 다시 서게 된 것이다. 단지 마신들이 득실대던 그 곳과는 달리 객석이 텅텅 비어 있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들어와라.”
플로렌서의 명에 따라 전면에 보이는 계단 하층부가 둘로 갈라지며 열 명이 동시에 팔을 벌리고 지나갈 수 있을 만큼 넓은 통로가 나타났다. 그 안에서 나오는 이들은 비행선이 전략적으로 키워낸 용병들이었다.
그들은 전사들과는 조금 다른 복장을 하고 있었다. 얼굴 전면까지 통으로 막은 투구 때문에 용모는 알아 볼 수 없었고, 나머지 부분도 금속제의 갑옷으로 완전하게 가렸다.
그들의 손에는 손바닥 정도의 두께를 지닌 긴 칼이 들려져 있었는데, 겉표면을 은으로 도금해 놓았다. 다른 손에 든 방패는 단순한 방어의 목적만 지니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전체적인 형태만을 놓고 보면 날이 날카로운 륜과 흡사했으며 두께는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얇았다. 눈구멍조차 은사로 처리돼 있어 눈을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 조차 구분이 가지 않는다.
약 스무 명의 용병들이 두 줄로 정렬해 들어오고 그 뒤로 헤브론의 전사들이 따른다. 그들은 가죽띠 몇 개만을 두르고 있어 확연하게 용병들과 구분이 갔다. 용병들도 작은 체구는 아니었는데도 그들의 두 배는 됨직 할 정도로 체격이 우람했다.
모두 합해 쉰 명 정도가 장내로 들어섰다. 그들은 들어오자마자 플로렌서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어 보였다.
플로렌서는 손으로 그들을 가리키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저들은 이 비행선의 정예 중의 정예다. 저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시험해 보고 싶지 않나?”
“그다지…….”
파천이 별 흥미를 보이지 않자 플로렌서가 또다시 명을 내렸다.
“그들을 데려 와라.”
딜타이가 플로렌서의 명을 받고 사라지자 파천은 이유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설마…… 아니겠지. 루시퍼 같은 악종은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파천의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설마 했던 바로 그 장면이었으니.
딜타이가 데려 온 자들은 파천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선발대에 포함되어 동행했던 최초의 동료들. 전사총에서 사로잡혔던 그들이 피곤에 지친 모습으로 힘없이 끌려 들어온 것이다. 파천은 침착하려 애썼다.
먼저 아난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항의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 아이들의 실력이 궁금하지 않은가?”
“이건 너무하는 것 아닙니까! 아무리 포로라고는 하지만 이런 식으로 대한다는 건…….”
“닥쳐라! 그 동안 필요도 없는 것들을 살려 둔 것만도 나로서는 최대한의 자비를 베푼 것이다. 내가 내 소유물을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무슨 말이 그렇게 많은가!”
‘소유물이라고?’
파천은 그 말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파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의 이름을 천천히 불렀다.
“플로렌서, 이제는 궁금해졌다. 내가 시험해 보겠다.”
“안 돼. 귀하신 몸에 흠집이 나서야 되겠나.”
파천이 같은 식으로 응수했다.
“네 하찮은 소유물 따위가 내게 흠집을 낼 수 있을 것 같은가?”
메르센느가 발끈하며 파천의 팔을 낚아챘다. 그녀의 억센 손아귀가 파천의 팔을 파고들 듯이 힘차게 눌렀다.
“앉아!”
그러나 아무리 메르센느가 힘을 써보았지만 파천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저들을 내가 상대하겠다. 네 소유물들이 훼손될까 봐 두려운 건가?”
플로렌서는 파천과 메르센느의 보이지 않는 싸움을 주의 깊게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괜찮겠군. 좋아, 허락하마.”
파천의 왼손이 오른팔을 쥐고 있는 메르센느의 손을 으스러뜨릴 듯이 움켜잡았다. 그리고 작게 으르렁거렸다.
“지저분한 손을 내 몸에 갖다대려면 최소한 물어는 봐야지. 안 그런가?” 메르센느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이, 이놈이…….’
메르센느의 손은 거역할 수 없는 힘에 의해 파천의 팔에서 떨어져 나갔다. 거기에 메르센느의 의지는 전혀 없었다. 믿을 수 없었지만 당장 코앞에서 확인하고 있는 엄연한 완력이 그리했던 것이다.
메르센느는 잠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했다. 너무도 간단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이, 이게 아닌데…….’
멍한 표정으로 넋을 잃고 서 있는 메르센느의 등을 딜타이가 소리나게 두드리며 말했다.
“뭐 하는 거야? 편히 앉아서 구경이나 하자고. 잘난 척하는 놈의 얼굴이 무참하게 구겨지는 꼴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을 거야.”
자리로 막 돌아온 딜타이는 메르센느와 파천 사이에 오갔던 힘겨루기를 눈치 채지 못했다. 그러나 플로렌서와 아난다는 알고 있었다. 둘은 모두 파천의 힘이 생각보다 강한 것에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저놈이 메르센느를 당황케 만들 정도였단 말이지? 이것…… 의외인데.’
그럼에도 플로렌서는 파천의 행동을 막지 않았다. 파천이 아무리 생각 외의 강자라 할 지라도 한계는 뚜렷할 것이었다. 용병 한 둘은 모르겠지만 그 이상은 힘들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플로렌서는 안심하고 있었다.
‘딜타이도 저들 중 다섯을 한꺼번에 상대해 이기지는 못한다.’
파천은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 원형 경기장으로 들어섰다. 바닥 전체가 부드러운 모래로 되어 있어 걸음을 뗄 때마다 발자국이 남겨졌다.
바닥에 힘없이 쓰러져 있는 자들을 파천은 하나하나 일으켜 세웠다. 그들의 눈에 생기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어떤 험한 일들을 겪어 왔는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파천이 그들을 한꺼번에 안아 경기장 구석으로 데려 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레나가 입매를 비틀며 말했다.
“고약하군. 여기서 더러운 악취가 난단 말야. 이런 곳은 재조차 남지 않게 태워 버려야 되는데.”
권터가 뒤를 이었다.
“하는 짓들을 보니 마계에 들어가도 환영받겠어.”
그들의 상식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적이라면 깨끗한 죽음을 선사해 줘야 한다. 그리 믿는 자들이기에 받아들이기 힘든 전경이었다. 그래서 분노는 더 큰 것이었다.
상황이 이쯤 되고 나니 딜타이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는 편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던지 손을 슬쩍 흔들었다. 그러자 원형 걍기장 객석 상층부로 수백의 헤브론들이 겹겹이 둘러싸는 게 보였다. 플로렌서는 그런 건 전혀 개의치 않고 파천의 하는 양만 살피고 있었다.
사로잡혔던 네 명의 선발대원들 중 선계의 대오가 특히 상태가 좋지 않았다. 뭘 어떻게 했는지 눈에서 시커먼 액체가 고여 흐르고 있었으며, 여기저기 뼈가 보일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헵슬론에게 물었다.
“견딜 만한가?”
“괜찮아. 우리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무사한 걸 보니 안심이 되는 구나.”
헵슬론은 그 지경이 되어서도 파천을 걱정하고 있었다. 파천에 대한 애정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시느이 임무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미안…… 하다.”
파천은 더 이상의 말이 올라 주지 않았다. 그는 그들에게서 돌아섰다. 저쪽 멀리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자들을 향해 걸어나갔다.
메르센느에게 잡혔던 팔이 욱신거렸다. 감추고 있었지만 사실은 통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파천은 슬쩍 팔을 비틀어 보았다. 견딜만 했다. 적당한 간격에 다다르자 파천은 양발을 어깨넓이로 벌리고 섰다.
“나서라!”
위에서 지켜보던 프로렌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용병들 중 하나가 앞으로 섰다. 겨우 하나가 나선 것이다. 파천은 고개를 저었다.
“너 하나로 날 상대할 수 없다.”
딜타이가 위에서 비웃는다.
“얼뜨기 네 동료들보다는 훨씬 강할 테니 그런 소리는 하지도 마라.”
그때 플로렌서가 명령했다.
“아니다. 둘이 상대하라.”
비아냥거리던 딜타이는 순간 어이없어하며 플로렌서를 쳐다보았다. 메르센느는 당연하다는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인다.
두 명의 용병들은 사이좋게 나란히 서서 파천을 향해 다가섰다. 그들의 보폭은 일정했으며 걸음을 딛으면서도 어깨의 움직임이 거의 없었다. 자세히 보면 그들은 땅 위를 스치듯 날아오고 있었다. 파천이 두 주먹을 소리 나게 말아 쥐며 소리쳤다.
“네 놈들이 뒤집어쓴 갑옷이 쓸모 없는 것임을 깨닫게 해주마, 각오해라.”
파천이 강호에서 배운 것 중 하나가 적 앞에서 자신의 전부를 내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건 거의 본능적인 것에 가까웠다.
더군다나 힘겨운 적들로 가득한 무한계에서 파천은 더욱 그런 점에 주의했다. 동료들의 상태를 보고 분노한 지금에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감춘 그 작은 부분이 위기의 순간 자신을 지켜 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었다.
용병들의 공격은 매우 단순했다. 가까이 접근하면 칼을 위로 쳐들었다가 직단으로 내리긋는다. 그럼에도 경시할 수 없엇따. 그 속도라는 게 눈으로 판단하고 어쩌고 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빨랐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속도가 일정하지 않고 점차 가속된다. 나중엔 검의 형체마저 사라지고 새파란 빛줄기만 번쩍 할 뿐이다. 파천은 그들의 공격을 몇 번의 움직임만으로 피해내고는 여유 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로는 내 그림자도 밟기 힘들다.”
파천은 용병들이 한 번도 보지 못했을 법한 어지러운 보법을 보여주었다. 현란한 파천의 움직임에 위에서 지켜보던 딜타이도 감탄성을 연발했다.
“재빠르긴 하군.”
아레나가 피식 실소했다.
“그것뿐이라면 그 눈도 갖다 버려야겠군.”
“이것들이……”
적당히 참아 주고 대우해 줬더니 마구 기어오르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빠진 질타이가 플로렌서에게 말했다.
“저놈이 뻗으면 나머지는 제게 맡겨 주십시오.”
대결을 허락해 달라는 뜻이었다.
“그것도 재밌겠군.”
이때다. 막 양쪽으로 갈라져 협공을 펼치는 용병들 사이에서 파천이 홀연히 자취를 감춰 버렸다. 순간 공격 목표를 잃어버린 용병들이 그 자리에 딱 정지했다. 여전히 그들의 칼은 잔뜩 허공으로 들려져 무엇이든 베어 버릴 기세를 취하고 있었다.
“여기다,”
파천은 어느새 하나의 용병 뒤쪽으로 돌아가 있었고, 그자의 등을 발뒤꿈치로 강하게 찍어 갔다. 거대한 바위도 한 순간에 가루로 만들어 버릴 수 있을 정도의 막강한 힘이 실린 공격이었다.
그러나 파천은 그 공격을 성공시킬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뒤로 몸을 빼내는 것도 모자라 허공으로 다시 도약해야만 했다. 돌아서 있던 용병의 칼이 엿가락처럼 늘어나며 뒤쪽을 공격한 데다 마주보고 있던 자의 칼도 정확하게 파천이 피하는 곳으로 날아왔기 때문이다.
간신히 위기를 넘긴 파천은 그들과 간격을 벌리고 멀찍이 떨어져 위치를 잡았다. 이제야 파천은 용병들이 들고 있는 칼의 실체를 깨달았다. 그건 보이는 것처럼 금속을 사용해 만든 것이 아니었다. 프리즈마를 뭉쳐 유형화시켜 놓은 힘의 덩어리였던 것이다. 어떤 형태로도 변형이 가능한 매우 신묘한 병기였던 것이다.
“역시 그리 만만한 놈들은 아니란 말이군.”
파천은 히죽 웃었다. 그 역시 상대가 그리 쉽게 당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플로렌서는 분명 정예 중의 정예라 하지 않았던가. 뭔가 장기가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고 있었다.
문제는 방금 보여 줬던 것이 전부인가 하는 점이었다. 파천은 좀 더 상대해 보며 적들의 장기가 무언지 밑천까지 거덜나게 해볼까도 생각했지만 별로 그러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다.
‘이렇게 된 것 한 번에 승부를 본다!”
파천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두 손을 활짝 펴 가슴 앞에 끌어당겨 세웠다. 그러자 지금까지와는 달리 주변의 공기가 요동치며 마구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얼마나 그 힘이 대단했던지 바닥에 깔린 모래알갱이가 회오리를 일구어 사방을 맹렬한 속도로 맴돌기 시작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파천의 주변 공기가 펒펒 터져 나가는 소음까지 동반한다.
“하앗!”
파천의 신형이 공중으로 빠르게 솟아오르더니 몸을 뒤집었다. 가슴 앞에 모으고 있던 두 손이 아래쪽으로 향했다. 그때 용병들도 두 칼을 위로 쭉 그어 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역시나 칼이 길게 늘어나며 빛줄기가 확 위로 솟구쳐 올랐다.
파천의 손에서 뿜어진 건 수십 개는 족히 넘을 것 같은 원형의 고리들이었다. 일시 두 방향으로 쫙 퍼져 나가며 용병들을 노렸다. 각기 두 방향에서 시작된 막대한 힘이 어느 지점에서 마주치는 순간.
원형경기장 전체가 들썩거릴 정도로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콰쾅
파천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전해진 충격의 정도를 가늠해 보아 이 정도로 쓰러질 자들이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파천의 손이 허공에서 휘저어지자 이번엔 용병들의 주변을 맴돌던 모래알갱이가 일시에 그들을 향해 쏘아져 갔다. 그건 더 이상 흔한 모래알갱이가 아니었다.
그들은 처음으로 칼을 종으로가 아닌 횡으로 휘저었고 몰려오는 공격을 막고자 방패를 들어 막았다. 그들은 연신 뒤로 밀려나면서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으며, 속도는 점차로 가속되었다.
방패의 크기가 작아 다 막지 못했음에도 그들은 그다지 큰 타격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파천은 이 정도의 공격으로도 상대들을 쓰러뜨릴 수 없음이 확인되자 모든 공격을 일시에 중단했다. 그는 여전히 허공중에 떠 있는 상태였다.
“좋았어. 이 정도는 되어야 싸울 맛이 나지.”
파천의 손에 어느새 크기가 석 자에 달하는, 프리즈마로 응축된 검의 형상이 자리잡아 갔다.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용병의 주변으로 두 자 크기의 검들이 십여 개나 두둥실 떠다니는 것이었다.
그들 역시 상황이 좋지 않게 돌아간다고 느꼈음인지 서로의 등을 맞대고 파천의 공격에 대비한다. 지켜보고 있던 아레나가 감탄하며 딜타이를 향해 말을 건넸다.
“저렇게 할 수 있나?”
딜타이는 쉽게 대답하지 못하다가 간신히 한마디 했다.
“겉모양만 그럴싸하다고 실제로도 그런 건 아냐.”
“인정하기 싫은가 보군.”
플로레너가 아난다에게 물었다.
“아난다, 네가 생령을 가르친 건가?”
“아닙니다. 원래 갖추고 있던 실력을 이제야 드러내는 것이지요.”
상황은 별다른 진전이 없었으나 파천은 적의 능력을 가늠하고 있었고, 공격의 의미를 달리 전개하려 하였다. 그는 마지막 경고를 잊지 않았다.
“막을 수 있다면 막아 봐라.”
파천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이 빛을 뿜는 것이 시작이었다.
용병들의 주변을 맴돌던 무형검들이 파천의 손에 들린 검의 진로가 바뀔 때마다 갖가지 다른 방향에서 공격을 감행했다.
어찌 보면 애처로운 전경이었다. 벌집을 건든 꼬마들이 벌들의 무차별 공격에 얼굴을 감싸쥐고 바닥을 뒹구는 모습과도 흡사했다. 그들은 손에 든 칼과 방패로 막았고, 그것도 모자라 갑옷의 견고함으로 버텨내야만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모든 몸부림이 쓸데없는 짓임이 드러난다. 지금껏 파천은 사정을 보아 주고 있었던 것이다. 속도가 빨라지고 변화가 다양해지자 용병들은 단 하나의 검도 막아내지 못했고 모조리 허용하는가 싶더니 갑옷의 이곳 저곳이 흠집 나기 시작했다
놀라운 건 그들이 걸친 갑옷의 견고함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 조금씩 벌어지더니 급기야는 걸레쪽이 되고 만 갑옷. 과도로 사과의 껍질을 벗기듯 그들이 걸친 갑옷은 작은 조각이 되어 흩어져 가기 시작했다.
손에 든 방패도 부서진 지 오래였다. 역공을 취할 엄두도 내지 못할 지경인데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칼을 휘둘러 오는 끈질김만은 칭찬해 줄만 했다
파천의 검이 빛을 뿜은 순간 그들의 얼굴을 가린 투구마저 벗겨지고, 그들은 칼만을 손에 쥔채 굳어 버린 듯이 서 있었다. 그러나 전신이 굳은 건 파천도 마찬가지였다.
“이럴 수가……. 여자였다니!”
우락부락한 사내들이라 여겼다 드러나고 보니 전혀 딴판이었다. 파천은 손에 든 검도, 허공을 맴돌던 검도 거두었다. 잠시 망연자실해 소녀들을 쳐다보다 고개를 저었다.
“승부는 끝났다.”
굳이 죽여야 할 이유가 없었다.
너무도 간단히 갈린 승부에 플로렌서는 머리를 짚었다. 꽤나 야심차게 준비했던 용병들이었다. 정성 들여 키워 온 만큼 자부심도 대단했다. 최정예 용병 백 명이면 오대전사단 중 하나 정도는 상대할 수 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 둘이 협공을 하고도 생령의 공격을 견뎌내지 못하고 참패를 당한 것이다. 물론 흔히 볼 수 있는 공격 수법은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토록 쉽게 당해서는 말이 안 되는 것이다. 단지 이질적인 공격 수법이 참패의 원인이라면 더욱 낭패스러운 결과였다. 그렇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저놈, 생각보다 훨씬 강할지도 모른다.’
플로렌서의 결론이었다. 물론 스무 명의 용병들이 한꺼번에 덤빈다면 파천 하나쯤 못 이길까 싶었지만 그건 수치스런 일이라 여겨졌다.
“제가 상대해 보겠습니다.”
딜타이가 나서는 걸 보며 메르센느는 생각했다.
‘이긴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파천……. 웬만한 수련자보다 강하다.’
그녀의 단정처럼 플로렌서의 생각 역시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의 대경은 무의미했다. 이긴다 해도 쉽게 이길 상대는 아니었고, 진다면 딜타이는 패배를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결코 이득이 없는 무의미한 대결이었다.
“한심한 것들!”
플로렌서는 일어나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 뒤를 메르센느가 뒤따르고, 딜타이는 용병들과 헤브론들을 지휘해 장내를 빠져나간다.
그는 제일 마지막으로 나가며 파천을 한 번 더 돌아보는 걸 잊지 않았다.
사로잡혔던 선발대 동료들은 또다시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비행선 주위의 상황이 돌변했다. 루하스 강변에는 전에 보다 몇 배는 족히 넘을 숫자의 영자들이 몰려들었으며, 제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강변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워낙에 많은 수의 영자들이 몰려들었기에 비행선의 헤브론들도 공격을 하지는 못했다
그들 중 태반은 소식을 듣고 달려온 남부권의 영자들이었다. 이제 곧 대적자들의 본진이 남부권을 장악할 것이란 소문 때문이었다. 숫자는 계속 늘어날 것으로 예측되었다.
이와는 달리 반대편 강변은 아직 조용했다. 특별한 지시가 있었던지 헤브론들은 손에 활을 든 채 영자들을 감시하고만 있었다. 이 정도의 수라면 한 번 진형이 흐트러질 경우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돌변할 가능성이 항상 잠재되어 있었다.
간혹 비행선이 있는 강으로 접근하는 자들이 보이면 헤브론은 어김없이 화살을 날려 제지했다.
회합에 왔던 자들 중 대표격인 인물들이 한 자리에 모여 회의를 거듭하는 중이었다. 이들은 오대전사단 소속을 아니어도 비교적 명성 높은 전사단에서 파견된 자들이었다.
이미 비행선 안으로 들어간 마이어로부터 몇 번인가 영언으로 지시를 받은 상태였다. 그러나 이대로 손놓고 기다릴 정도로 이들의 인내심은 대단치가 않았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전사가 언성을 높였다.
“이 정도의 병력이면 해볼 만하지 않소? 이대로 기다리다간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될 겁니다. 한번 부딪쳐 봅시다.”
“아직은 아닙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언제까지 말이오?”
“오대전사단을 비롯한 전사단주님들이 모였다고 하니 무슨 기별이라도 오겠지요.”
“나 참, 붙어 보지도 않고 지레 겁을 집어먹는다는 게 말이 되는 거요?”
“그래요. 한 번 해봅시다.”
“잠깐.”
마이어의 수하인 유클릿 전사가 그들을 진정시키고 나섰다.
“마이어 님의 말씀대로라면 저 비행선 안에는 대적자들의 것 외에도 막강한 힘이 흐로고 있다고 했소. 정체가 파악되기 전까지는 기다려야 할 거요.”
“그러니까 그게 대체 뭐라는 거요? 설마하니 마계의 마신들이라도 타고 있다는 거요?”
“그럴 수도 있지…….”
잠시 정적이 흐른다. 마이어가 경고를 할 정도라면 그로서도 상대하기 벅차다는 얘기다.
그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비행선으로 향했다.
“성급하게 결정할 일은 아닌 것 같소. 본진이 움직이게 되면 그 전에 소식이 전해질 거요. 그러니 그때까지만이라도 기다려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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