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30화 : 제왕의 파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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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검 – 130화 : 제왕의 파견자들


제왕의 파견자들

파천은 복도를 빠른 속도로 지나치다가 그 자리에서 멈췄다.
‘감옥은 지하에 있겠지. 이렇게 찾아다닐 게 아니라……. 차라리 뚫자.’
파천의 한 손이 바닥을 향해 쭉 뻗었다.
푸슝 푸슝
콰콰콰쾅
몇 개 층이 동시에 뚫렸는지 알 수 없었다. 파천은 바닥을 뚫으며 계속 내려갔다. 거칠 것이 없었다. 아무리 단단한 금속과 돌로 견고하게 지어졌다 하더라도, 측정할 수 없는 엄청난 두께를 자랑한다해도 프리즈마를 집중해 만든 무형검에는 종잇장 찢어지듯 연약하기만 했다.
막힘 없이 내려가던 파천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바닥을 향해 있던 고개가 위로 들려졌고 두 눈은 앞면을 향해 고정되었다.
‘왔는가?’
그랬다. 복도에는 아무런 형체도 없었지만 분명 누군가 서 있었다. 파천은 그걸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막강한 기운……. 원형경기장에서 느꼈던 바로 그 기운이다.’
전신에 소름이 쫙 돋는 듯한 기분에 전율하며 신형을 꼿꼿이 세웠다. 전면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며 다가서는 게 느껴졌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너무 상투적인 말이로군.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한다. 라치오, 네 놈이 조금만 현명한 놈이라면 지금의 상황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네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말야.’
라치오는 어리석은 자는 아니었다. 파천의 바람대로 그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쿤사와 함께 동료들과 선발대를 가로막고 있는 감옥을 부셨고, 파천이 머물고 있는 반대쪽으로 방향을 잡고 움직였다.
이러한 움직임도 신비인들의 예민한 촉수에 걸려들었다. 아난다 일행을 뒤쫓던 자들 중 하나가 방향을 틀어 라치오가 향한 쪽으로 움직였다.
이제 승부수는 던져진 셈이다. 정면 대결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힘 대 힘이 격돌하는 일만 남은 것이다. 결국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파천은 라치오의 것이라 짐작되는 움직임을 포착하고는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여유를 되찾은 파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우리 서로 통성명이나 해볼까?”
“…….”
대답은 없었지만 전신에 대한 압박이 조금 가셨다.
‘오장 앞에 서 있다. 놈은…… 강하다.’
전신이 한껏 당겨놓은 활처럼 팽팽하게 조여지는 듯한 적당한 긴장감. 파천은 되려 기분이 무척이나 흡족해졌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기분인가.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어디 하나 기댈 데 없는 막막함. 오직 내 힘만으로 위기를 타개해야 한다. 바로 이거야.’
“너는 예의도 모르나?”
파천은 상대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지 상대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기분 나쁜 놈이로군.’
그러던 상대가 말문을 열었다.
“생령이 분명한데……. 이해할 수가 없군.”
“뭐가 말인가?”
“프리즈마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게 납득이 안 가.”
“그거였나? 내가 좀 돌연변이라서 말야. 그런데 너는 항상 이런 식인가?”
“…….”
“모습이 얼마나 흉하기에 드러내지도 않는 거지?”
“까불지 마라.”
“호, 화를 낼 줄도 아는군.”
“곧 죽을 놈이 말이 많구나.”
“누가? 내가? 네가 아니고?”
“…….”
“좀 솔직해지시지. 넌 지금 날 겁내고 있다. 아닌가?”
“두렵나, 생령?”
“내가 아니고 네 얘기를 하고 있는 거다.”
“난 두려움을 모른다. 내가 두려워하는 건 오직 하나. 내 주인 밖에 없다.”
“네 주인이 누군데?”
“넌 알 자격이 없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아. 자, 이제 슬슬 시작해 보는 게 어떻겠나?”
“네 놈을 주인께 데려 가면…… 좋아하실 것 같다. 널 죽이려고 했지만 생각을 바꿨다.”
“네가 내 운명까지 마음대로 할 수 있을 정도라면 차라리 홀가분하겠군. 더 이상 발버둥치지 않아도 되니 말야.
그런데 아쉽게도 너는 아냐. 네 정도에게 내 목숨을 맡길 것이었으면 진작에 포기했을 거다. 내 운명은 이제부터 내가 지배한다. 자, 와라!“
“넌 내 주인을 닮았구나. 주인께서는 그러셨다. 이 세상에는 세 가지 부류의 영자가 있는데 하나는 운명에 묵묵히 순응하는 자요, 또 하나는 운명을 거역하려 발버둥치는 자요, 마지막 하나는 그 운명이라는 놈을 인정하지 않고 지배하려는 자라고 했다.”
파천은 뜬금 없는 말에 어리둥절해졌다.
“내 주인은 그 중에 세 번째. 운명을 지배하여 세상을 바꾸려는 분이시다. 너도 그런 것 같다.”
“하하하하!”
파천은 도무지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상대가 한 말이 지금 상황에 너무도 어울리지 않아 웃은 게 첫 번째 이유였고, 두번째는 상대의 말과 스스로의 처지를 빗대어 본 결과로서의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왜 웃나?”
“넌 참 별난 놈이로구나. 어울리지 않게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어. 이제 싸울 수 있겠나?”
“어리석구나. 제 능력이 상대에게 미치지 못함을 안다면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
“넌 날 몰라. 날 온전히 파악하고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난…… 누구에게도 절대로 지지 않는다. 질 수가 없는 몸이야.”
“내 이름은 파샤. 네게 내 모습을 보여 주고 싶다.”
파천은 오히려 상대가 시간을 끌어 주는 게 고마울 지경이었다. 예상했던 것과는 상대의 태도가 너무도 다른 것 같자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파천의 오장 앞에서 무엇이 터진 듯 어둠의 장막이 일시에 거둬졌다.
“으음…….”
파천은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그게 원래의 네 모습인가?”
“그렇다.”
“그럴…… 듯해.”
파천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예전 루시퍼를 보았을 때도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그때와는 또 달랐다.
루시퍼는 너무 완전해 오히려 추해 보일 정도의 거부감이 들었지만 지금 눈 앞에 있는 이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언젠가 동정호를 화려하게 채색하던 갖가지 색깔의 폭죽을 보는 것 같았다.
간단한 차림이었으나 오히려 더 깔끔하고 신선했다. 재질이 가죽으로 보이는 것으로 어깨에서부터 무릎가지를 가렸는데 기이하게도 일렁이는 오색의 빛을 갈무리하고 있었다. 긴 푸른색 머리를 허리까지 치렁치렁 내려뜨렸으며 머리에 공작의 깃털 같은 관을 썼다.
오른손에 홀을 들었고 다른 손을 주먹을 꼭 쥐고 있었는데 양 옆으로 날카로운 칼날이 삐죽 삐져 나와 있었다.
“파샤, 너는 누구지?”
“나는…….”
그때다. 동료의 것으로 생각되는 큰 음성이 복도를 웅웅 울렸다.
“대체 뭐 하는 거냐? 어서 빨리 놈을 죽이고 합류하지 않고.”
파샤의 얼굴이 치울해졌다.
“동료들이 내게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구나. 이제 널 제압하겠다.”
상대는 곧 공격을 시작할 것 같았다. 파천은 상대의 정체가 너무도 궁금했다.
‘전사는 아니다. 칠대부족 중에 저런 자들의 있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천상계도, 귀계도 아니다. 그렇다고 천사도 아니다. 대체 누군가? 아난다가 보면 알까?’
“이걸 막아낸다면 널 인정해 주마.”
파샤의 한 손이 활짝 펼쳐지자 손에 꼭 쥐고 있던 기이한 병기가 허공으로 서서히 떠오르는 것이었다. 두 개의 단검을 붙여 놓은 듯한 모습이었는데 그리 위협적인 느낌은 받을 수 없었다. ‘저걸로 뭘 하자는 것일까?’ 하는 난데없는 생각마저 들었다.
파천의 손에는 어느새 프리즈마로 형성된 빛나는 석 자의 검이 들려 있었다.
“자, 받아라.”
허공중에 떠서 부르르 떨어내던 단검의 주변이 황홀한 빛으로 감싸였다. 시선을 빼앗기고 영혼마저 녹아들 듯한 아름다운 발광은 파천의 경계심을 일시적으로나마 무너뜨리는 작용을 했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파샤의 손이 똑바로 파천을 가리켰다.
콰콰콰콰콰
파천과의 최직단 선을 따라 빠르게 돌진을 감행한다. 보고 판단하고 막아낼 성질이 아니었다. 본능적인 방어만이 살길이었다. 대치하고 있던 짧은 거리를 단숨에 가로지르고는 파천의 전면을 통째로 파괴시켜 왔다. 얼마나 강력한 힘이었던지 스쳐 지났던 공간이 일시에 터져 나갔다. 복도가 단검의 움직임을 따라 균열에 이어 한꺼번에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파천은 있는 힘을 다해 검을 내리그었다. 일단은 마주쳐 볼 일이었다.
콰앙
“헉!”
슈슈슈슈슈
파천의 신형은 그만 폭발력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한없이 날아갔다. 이대로 어딘가에 처박힌다면 그 충격이 상당할 것이었다. 더 이상 몸이 날아가지 않도록 안간힘을 써야 했다. 공중에서 팽글팽글 돌아가다 파천은 적당히 벌어진 거리에서 간신히 신형을 정지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이제 시작이었다. 또다시 파샤의 손짓에 따라 단검이 짓쳐 들어온다.
이번엔 정확하게 적의 단검을 쳐냈다. 전신이 터질 듯한 압박감에 파천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검은 퉁겨지는가 싶더니 더 빠른 속도로 파천을 위협했다.
파천의 손이 어지러워진 건 당연했다. 그는 몇 번을 더 쳐냈지만 그럴수록 단검의 속도는 더 빨라지고 위력은 더해졌다.
‘이런 식이라면 내가 당한다.’
무형검을 어지럽게 사방으로 형성해 파샤를 공격했다. 파샤는 작은 원을 허공에다 그려 보이는 것으로 파천의 공격을 무력화시켜 버렸다. 파샤는 파천이 생각하던 것보다도 더 강한 자였다.
파천이 서서히 뒤로 밀려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포기해라.”
파샤의 작은 소리가 끊임없이 그를 유혹했다. 파천은 결정해야만 했다. 단검을 쳐내는 순간 몸을 빼내 위로 솟구쳐 올라갔다.
“소용없는 일이다.”
단검은 파천의 뒤를 어김없이 뒤따랐다. 한번씩 쳐내고 그 여유를 빌어 도망간다. 지금으로서는 그 방법 외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행히 파샤 역시 뒤를 따르며 단검을 날렸을 뿐 다른 공격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브라함의 변화가 준 충격은 플로렌서에게도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반드시 상대를 죽이고야 만다는 저주의 환상수인가? 그럼 나도 이대로 있을 수는 없지.”
플로렌서의 손에 들린 홀이 손을 떠났다. 서서히 공중으로 오르던 홀이 붉은 빛을 뿜으며 하강하더니 플로렌서의 머릿속으로 쑥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 순간 플로렌서의 양손이 앞쪽으로 쭉 뻗었다.
휘르르릉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는 미풍과도 같은 붉은 기류가 플로렌서의 손바닥을 통해 밖으로 뻗어나왔다. 붉디붉은 장미꽃잎을 모아 강력한 바람결에 흘려 놓으면 저런 형상이 벌어질까?
기류들은 플로렌서의 전신을 은은히 물들이며 휘돌아 가고 있었다.
브라함이 소리쳤다.
“깊은 계곡 홀딘의 불사조를 본 적이 있느냐! 자, 보아라. 바로 이것이 홀딘의 불사조이다.”
꾸웨애액
브라함의 등 뒤로 무시무시한 괴성을 지르면 나타난 건 화염을 온몸에 두른 거대한 새였다. 도나투스는 멀리서 지켜보다 단발마의 괴성을 지르며 진저리를 쳤다.
‘깃털 하나만의 크기가 나보다도 크다니…….’
단지 그 새가 크기만 해서 도나투스가 놀라는 건 아니었다. 보라, 저 이글거리는 불꽃을. 영원히 꺼지지 않는 헤세시의 불꽃조차 저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부리와 발톱은 비행선조차 단숨에 파헤쳐 놓을 것 같았다.
홀딘의 불사조는 브라함의 뜻에 따라 플로렌서를 공격했다. 움직인다 싶은 순간 어느새 거대한 발톱으로 플로렌서를 움켲쥐려 하고 있었다.
뒤에서 지켜보던 딜타이가 염려 가득한 눈으로 메르센느를 바라본다. 메르센느는 눈빛을 반짝이며 확신에 차 있었다.
‘지지 않을 것이다.’
자ㅣ신이 알고 있는 플로렌서는 패배라는 걸 몰라야 했다.
이런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플로렌서의 전신을 감싸던 붉은 기류가 홀딘의 불사조를 단숨에 밀어냈다.
휘르르릉
부드러운 움직임 가운데 강력한 힘을 내재한 기류였다. 이어 불사조의 발톱에서 시작해 머리끝까지 칭칭 감아 가기 시작했다.
꾸웨애액
불사조가 한 번 울부짖자 기류가 끊어질 듯 약해진다. 그러나 단지 그렇게 보였을 뿐이다.
더욱 조밀하게 감아 가더니 급기야 불사조의 전신을 모두의 시야에서 가려 버렸다.
“홀딘의 불사조, 왔던 곳으로 돌아가라.”
플로렌서의 차갑고 무거운 한마디가 마치 불사조의 생명을 거둘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에 차 있었다. 기류는 한꺼번에 조여들며 불사조의 몸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붉은 불꽃 가득했던 곳에 푸르고 검붉은 불꽃이 더불어 뒤섞인다.
꾸웨애액
불사조가 날개를 퍼덕거렸다. 입에서 불을 토해냈다. 하늘로 솟구쳤다.
“홀딘의 불사조는 결코 죽일 수 없다.”
브라함의 자신감 가득한 말을 페드로가 맞장구쳤다.
“불사조를 죽일 수 있는 건 오직 한 가지 방법…….”
페드로는 말하다 말고 갑자기 제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그리고는 큰일날 뻔했다는 듯 조심스레 한숨을 토했다.
플로렌서의 두 손은 허공을 움켜쥐고 있었다. 잠시 후 그 손이 부들부들 떨기 시작한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간파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불사조를 압도하고 있지 못하다는 거시. 그리고 어떻게 될지 결과를 알 수 없다는 것.
여유 있는 시선으로 브라함이 넌지시 운을 뗐다.
“힘들지? 힘들 거야. 홀의 힘은 대단하지만 불사조를 제압하기엔 무리지. 이번엔 또 내 차례군.”
슬쩍 하늘높이 떠 있는 불사조를 쳐다보곤 플로렌서를 노려보았다. 브라함이 한 손을 앞쪽으로 들어올리더니 콱 움켜쥐었다가 뒤쪽으로 힘껏 뻗었다.
“어떻게 대처할 셈이냐? 흐흐흐.”
우우우웅
브라함의 손에서 시작된 진동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플로렌서는 잘 알고 있었다. 브라함은 끊임없이 프리즈마를 응축해 갔다. 그는 응축시킨 막대한 힘을 플로렌서를 향해 던질 셈이었던 것이다. 지금 플로렌서는 그걸 막을 여력이 없었다. 불사조를 상대하는 데만도 빠듯한 실정이었다. 위기는 플로렌서를 먼저 찾고 있었다.
“받아라.”
콰아아아아
프로렌서는 자신을 향해 직격해 오는 프리즈마를 똑똑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찌할 것인가? 방법은 단 하나였다.
“칫.”
플로렌서가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다. 그녀의 뒤를 따르는 프리즈마의 속도는 피하기에는 지나치게 빠른 것이었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음은 그녀 자신이 잘 알았다.
“핫.”
플로렌서의 양손이 마주쳐오는 프리즈마를 맞받는다.
푸확
이제 홀의 힘은 거두어졌다. 다시 말해 불사조가 자유롭게 되었다는 걸 뜻했다. 까마득히 높은곳에 있던 불사조가 맹렬한 속도로 하강하며 플로렌서를 위협했고 뒤이어 브라함의 공격이 이어졌다.
이렇게 되자 딜타이를 위시한 프로렌서의 수하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초조해할 수밖에 없었다. 믿었던 플로렌서가 밀리고 있다. 이건 그들에게는 충격적인 대사건이었다.
플로렌서는 불사조와 브라함을 동시에 상대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렇다고 어느 하나를 무시할 수도 없었다. 겉모습은 침착해 보였지만 그녀의 속마음도 극도로 초조해졌다.
그걸 숨기고 싶었던가? 플로렌서가 홀을 앞세우고 브라함을 공격해 들었다. 브라함과 불사조는 마치 한 몸이라도 된 듯 진퇴에 무리가 없이 플로렌서를 밀어붙인다. 이때였다. 승기를 잡아 가던 브라함조차 예기치 못했던 일이 발생한다.
콰쾅
비행선의 한곳이 부서지며 아난다 등이 뛰쳐나왔고 뒤 이어 무엇인가가 그들을 쫓아 나온다.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이번엔 라치오와 동료들이 선발대의 나머지 영자들을 들쳐업고서 뛰쳐나왔다. 그 뒤를 역시나 무엇인가가 따라 나왔다.
브라함은 일시 공격을 중단했고 플로렌서도 시선을 돌렸다. 도나투스가 다급하게 외쳤다.
“아난다가 저기 있다!”
그 소리보다 페드로가 먼저 움직였다. 그는 먼저 아난다의 뒤를 쫓고 있는 정체 모를 기운을 상대해 갔다.
“이건 또 웬 놈이냐?”
상대에게서 나온 말이었다. 페드로는 희미한 형체였지만 분명히 파악하고 있었다.
“페드로라는 놈이다.”
콰쾅
둘 사이의 첫 번째 격돌음이었다.
“헉.”
페드로는 뒤로 날려 가며 어처구니없어 했다.
“뭐 이딴 일이 다…….”
휘리리릭
몸을 바로 세우고 앞을 노려보는데 상대도 의외였던지 가만히 허공에 정지하고 있었다.
플로렌서가 큰 소리로 명을 내렸다.
“모두를 포위하라.”
용병들과 헤브론들이 넓게 공중을 포위한다. 그게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을지는 명령한 플로렌서도 의심이 가는 부분이었다.
도나투스가 아난다의 곁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어찌 된것이냐? 파천은?”
콰콰쾅
비행선의 옆구리가 또다시 깨지는 소리였다.
“저놈을 놓치면 안 돼!”
딜타이의 외침이 이번엔 제일 빨랐다.
“저놈이로군.”
페드로가 막 파천이 뛰쳐나온 곳으로 움직이려 하는데 앞을 막아서는 기운이 있었다.
“너는 나와 상대해야지.”
둘은 서로가 꼼짝할 수 없는 상황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서로를 누르기 전에는 다른 데 신경을 쓸 여력이 없게 된 것이다.
파천은 밖으로 나온 순간 상황이 상당히 꼬여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지만 그건 자신이 원하던 바로 그 상황이기도 했다.
쐐액
그의 신형은 번개처럼 빠르게 자기 쪽 진영이라 판단되는 곳으로 날았다. 그 앞을 아무도 막지 못했다. 파천은 의외였던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플로렌서! 잘난 척하더니 꼴 좋구나.”
플로렌서를 향해 다가선 신비인 하나가 뱉어낸 말이었다.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이제 어떻게 할 셈이냐?”
“달라진 건 하나도 없어. 모두 죽인다.”
파천의 곁으로 모여든 자들은 서로가 무사한 걸 확인하고는 만명에 웃음을 띄었다. 어쨌든 이제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난다, 오랜만이군. 흐흐흐흐.”
“오느라고 수고했습니다.”
페드로와 브라함은 무엇보다 아난다를 다시 만난 것이 반가웠다.
사실은 그를 만난 것이 무에 그리 반가울 게 있을까. 따지고 보면 그와는 한때 적이지 않았던가. 그러나 자신들에게 내려진 금제를 풀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그라는 것 그리고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소망을 이룰 수 있다는 게 그들의 가슴을 뛰게 했다. 달려들어서 입이라도 맞출 기세다.
“자, 어떻게 해주랴?”
브라함이 가슴을 펴며 말만 하라는 듯 아난다의 지시를 기다렸다.
이때 불사조는 순한 양이라도 된 듯 허공중에 두둥실 떠서 출격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플로렌서 주위로 모여든 신비인들 중 파천을 따라나왔던 파샤만이 본신을 드러내 놓고 있었는데, 그가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건 홀딘의 불사조 같은데? 누구 솜씨지?”
플로렌서가 대답했다.
“브라함.”
“아직도 저런 걸 사용하는 자가 있었나?”
‘아직도’라는 어감이 묘한 뉘앙스를 풍겼다. 그건 어찌 들으면 비하하는 뜻으로 들린다. 그걸 브라함이 놓칠 리가 없었다.
“저놈이 찢어진 주둥아리라고 함부로 놀리는구나.”
“네가 브라함이냐? 부끄럽지도 않나?”
“뭐, 뭐? 뭐가 부끄럽다는 거야?”
“환상수의 수법은 원래 너희들 것이 아니지 않은가?”
아난다는 아까부터 플로렌서의 주변을 면밀히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파샤는 처음 대하는 자가 분명했다. 도무지 상대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브라함은 파샤가 한 말의 진의를 헤아리지 못하고 멍청하게 굳어 있었다. 옆에 있는 친구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이냐?”
“그러게.”
“환상수와 환상력, 술법 등은 너희들의 것이 아니다. 훔쳐 배운 것에 불과하지. 원래의 너희는 아주 미개한 존재였다.”
아난다는 그 말을 되씹어보다 한 가지에 생각이 머물렀다.
‘혹시…….’
“그대들은 바로…….”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아난다가 브라함은 더 이상스러웠다. 이때 라치오가 다가오며 아난다가 하려던 말을 했다.
“환상수의 원조는 잠자는 대지의 것이라 알고 있소. 그러니 저들의 말은 자신들이 잠자는 대지에서 왔다는 것으로 풀이하면 됩니다.”
“저놈 똑똑하군.”
이미 알고 있던 플로렌서를 제외한 모두,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던 전사들까지도 라치오가 한 말로 인해 충격 속에 빠져든다.
잠자는 대지에서 온 자들. 제왕의 파견자들인 것이다. 언제까지나 전설 속에서만 존재할 것 같던 그들이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왜 그들이 대적자들과 함께인가 하는 점은 생각해 볼 여지가 많은 부분이었다. 모든 걸 파괴시키고자 도모하는 자들에게 힘을 보태고 있다는 것.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건 그랬다.
서로간에 얻을 것이 있는 자들은 서로의 등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다. 한계는 분명하지만 적어도 이해 관계가 유지되는 한은 신회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들이 함께 도모할 일이 무엇일까? 누구라도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제왕이 대리자를 파견했다는 건 이제 좋든 싫든 무한계가 인정하고 감당해야 할 사실이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구도에 상상치 못한 무게감이 실리는 현장이었다.
그 중량이 대적자들의 발치에 실렸다는 게 무한계로서는 비극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아직은 전모가 온전히 드러난 건 아니지만 상황은 뻔해 보였다.
파천을 위시한 선발대는 여길 빠져나가는 게 급선무였다. 이를 위해 브라함과 페드로라는, 후일을 생각하면 그다지 훌륭하다 할 수 없는 패까지 썼다. 아난다로서도 맥 빠지는 일이 분명했다.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간 셈이었다.
‘현 상황을 모르지 않을 대적자들이 자신 있게 모습을 보인 게 설마하니 저들 때문이라니…….’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엇다. 잠시 아프고 말 그런 충격이라면 이렇게 심각한 표정을 지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제왕께서는 현 영계의 상황을 자세히 알고 싶어하신다. 우리의 조사에 근거해 영계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파샤를 제외한 둘도 이제는 모습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그들도 미묘한 차이는 있었지만 파샤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들의 태도를 보아서는 아직까지 아난다에 대한 소식은 전해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난다의 전신이 쿠사누스임이 밝혀졌는데도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고 있잖은가.
아난다는 세 영자를 보며 묘한 심정이 되어 갔다.
‘한때는 같은 입장에서 서 있었겠지?’
파천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당신들도 우리 앞을 막을 셈이오?”
사실 그들이 제왕의 파견자들 중 일부라는 게 파천에게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가 궁금해하는 건 적이냐, 아니냐 하는 것뿐이었다.
입장을 밝히라는 파천의 다그침에 파샤가 답했다.
“조사 과정 중에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지. 생령인 그대 주변을 둘러싸고 암중에 벌어지고 있는 복잡 미묘한 사건 진행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관심을 기울이게 만들었다. 가능하다면 생포하고 그렇지 않으면…… 죽여야지.”
플로렌서가 아래르 향한 홀을 다시 세우며 말했다.
“내가 잘못 생각했던 것 같아. 괜히 일을 복잡하게 만들 필요 없이 회유할 수 없다면 처치하는 게 옳겠어. 이들을 처치하면 어차피 뒤에 있는 자들은 제 발로 나서게 되어 있으니까.”
정보의 교환처처럼 되어 버린 전투장에서 아난다는 적어도 무엇이 더 급한지를 통찰하고 있었다. 그는 현재의 전력을 면밀히 분석해 보는 중이었다.
플로렌서를 비롯한 대적자들은 브라함과 페드로만으로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제왕의 파견자들이었다. 아난다는 모르고 있으나 사실 이들은 하나하나가 제왕의 제일 측근이자, 군대 사령관인 쿠사누스의 심복들이었다.
영계로 출입이 가능한 잠자는 대지는 단 하나에 불과했고, 그곳의 제왕은 비교적 온건한 성향을 지녔다. 다른 제왕들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그는 쿠사누스를 직접 보내지는 않았다. 대신 쿠사누스가 추천한 자들을 파견자로 보냈다.
그들은 현재 영계 각지에 흩어져 나름대로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식적으로 이들이 정체를 드러낸 것은 이번이 처음인 셈이었다. 스스로를 드러냈다는 부분은 앞으로의 행보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었다.
잠자는 대지에 대한 영자들의 인식이 좋지 않다는 점을 감안할 때 웬만한 자신감이 없으면 이럴 수 없었다. 그 정도로 스스로의 능력에 자부심이 대단한 자들이라는 건 상대하기가 쉽지 않다는 걸 뜻했다.
아난다는 자신들의 진영을 훑어보았다.
‘저들을 상대할 수 있을 자는 우리 중에……. 없을 것이다. 나도 솔직히 말해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꽤 많은 수라고는 하나 나머지는 비행선의 전력을 상대하기에도 벅찰 것이다. 이렇게 되면 객관적인 평가에서는 열세가 분명했다.
아난다의 시선이 저쪽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전사들에게로 향했다.
‘저들이라도 가세해 준다면…….’
해볼 만은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태도를 보건대 그럴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결국 아난다의 결론은 단 하나였다.
‘죽을 각오로 싸우되 안 된다면 파천 님만이라도 탈출시킨다. 그건 가능할 것이다.’
앙샹뜨도, 아레나도, 권터도, 아직 몸도 채 회복되지 못한 선발대원들도, 라치오와 그의 동료들까지 싸울 태세를 갖춘다. 이제는 어느 쪽도 물러설 수 없는 상황. 획기적인 반전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도나투스가 툴툴거렸다.
“산을 넘었다 해서 한시름 놨더니 더 큰 산이 버티고 있을 줄이야. 이놈 따라 다니다간 곤죽이 나 죽기 딱 십상이군.”
브라함은 무슨 생각을 했던지 킬킬대며 제왕의 파견자들에게 딴지를 걸었다.
“너희들이 원조든 아니든 그런 건 상관없어. 난 지금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아. 예전엔 너희들이 우리를 노예로 삼았을지 몰라도 이제는 아니야. 내 기억에도 없는 그런 일 따위는 싸우는 데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난 브라함. 적어도 아직까지 승부 앞에서 겁을 내본 적은 없다.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더 힘이 샘솟지. 아난다, 고맙다. 이런 싸움에 불러 줘서.“
아난다는 브라함이나 페드로를 측은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다른 이들은 욕하고 멀리하고 때론 두려워할지 몰라도 자신이 겪어 본 그들은 전혀 달랐다. 물론 자신에게 약점을 잡혀 있기 때문이지는 모르나 때론 그 누구보다 순수한 면을 많이 보여 줬던 자들이었다.
브라함의 말에서 아난다는 그가 마지막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 정도의 강자가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제왕의 파견자들은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모두에게 거대하게 느껴졌다.
“자, 저 놈들을 상대할 운수 좋은 놈은 누구냐? 둘은 우리가 맡았다.”
페드로가 한 말이었다. 당연히 나머지 하나는 아난다일 수밖에 없었다. 이때 플로렌서가 브라함을 손가락으로 지목하며 말했다.
“넌 내 차지야. 도망갈 생각은 하지 마라.”
“그래, 끝장을 보자. 잠깐 싸우는 동안 정이라도 들었나 보구나, 킬킬킬.”
페드로가 브라함의 말에 당황하며 입을 연다.
“네가 빠지면 나머지 하나는 누가 상대하라고?”
“이 계집이나 저것들이나 마찬가지야. 정 안 되면 여럿이 합공을 펼치든가.”
그때 예상치 못한 인물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튀어나왔다.
“저들 중 하나는 내가 맡지.”
파천이었다. 그가 대수롭지 않게 나서며 말했다. 누구도 그가 자청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아무도 비웃지는 않았지만 수긍하는 눈치도 아니었다.
파천이 비록 생각보다 강한 면모를 보여 주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눈앞에 있는 거대한 산을 단숨에 오를 정도로 대단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아난다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그렇게 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겠네요.”
그의 말은 브라함과 페드로를 제외하고는 파천이 제일 믿을 만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도나투스가 자존심이 상할 만한 언급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수련자의 신분이었던 자신이 전혀 거론되지도 않는다니.
아까부터 라치오는 플로렌서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 따가운 시선을 느낀 플로렌서가 라치오를 슬쩍 쳐다보다 금세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이제는 싸울 일만 남았다. 강남 쪽 전사들을 공격했던 헤브론들이 비행선에서 무더기로 몰려오는 게 보였다. 그들의 가세로 포위망은 더욱 두터워졌다.
이때 지금껏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던 제왕의 파견자 하나가 입매를 비틀며 말했다.
“지켜보고 있자니 웃기는 것들이군. 누가 누구를 상대하겠다는 거냐!”
“그러게 말야. 플로렌서, 너는 뒤로 빠져라. 이제부터는 우리가 맡겠다.”
막 입을 열어 반발하려던 플로렌서의 입을 파샤가 나서며 다물게 했다.
“괜한 억지는 부리지 마라. 지금껏 네 방식대로 따랐지만 이제는 우리 식대로 한다. 이 자들은 우리가 맡는다. 너희는 단 한 놈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감시만 하고 있으면 된다.”
“캬, 멋은 있는 대로 다 내보는구먼. 난 언제 저런 말을 한 번 해보나, 그래.”
브라함의 빈정거림에도 페드로도 어처구니없어 하며 말을 더했다.
“제왕의 졸개 주제에 우리를 아주 졸로 보는구먼.”
단 셋이서 모두를 상대하겠다니……. 그것도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적어도 무한계에서 명성을 날리는 자신들로서는 용납하기 힘든 건방진 태도였다. 그렇지만 파천은 이 순간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수준 차가 많이 난다면 수의 많고 적음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된다. 무림에서의 나도 그랬다. 과연 저들이 그 정도로 강하단 말인가?
브라함이나 페드로, 아난다는 무한계에서도 최상급의 강자에 속한다. 몇몇 절대 강ㅇ자들을 제외하고는 상대할 자들이 많지 않다. 그런데 제왕의 하수인에 불과한 저들이 자만에 가까운 태도를 보일 수 있을 정도로 강자란 말인가? 아닐 것이다. 아니어야 한다.’
파천은 인정하고 싶진 않았다. 만약 사실로 드러난다면 일은 너무도 심각해진다. 제왕의 군대가 영계로 쳐들어오기라도 한다면 그 노도를 누가 막을 수 있을 것인가. 메덴도, 전사들도, 천상계나 선계도 아니 그 모두가 합한 힘이라 할지라도 제왕들의 힘을 막을 수 없다는 결론이 되는 것이다.
제왕의 파견자들이 강경한 입장을 누그러뜨리지 않자 플로렌서가 한 발을 거둬들였다.
“좋아, 이번엔 내가 양보하지. 대신 저놈은 남겨 둬라.”
그녀가 지목ㅎ나 건 볼 것도 없이 브라함이었다.
브라함은 킬킬대며 마냥 웃고만 있었다. 이때 파샤가 한 손을 든다.
“모두 뒤로 물러서.”
플로렌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딜타이와 메르센느는 수하들의 포위망을 뒤쪽으로 넓혔다. 이제 시작할 참인 것 같았다.
“내가 하지.”
페드로가 나섰다. 브라함이 응원의 소리를 보냈다.
“다시는 그런 시건방진 소리를 하지 못하게 보기 좋게 눌러 버려라.”
“나만 믿어. 나 페드로 아니냐!”
페드로와 브라함은 실력은 거의 비등했다. 힘에서는 브라함이 우세하고, 기교면에서는 페드로가 좀 나았다. 페드로는 다양한 영력 사용이 가능한 전천후 투사였다. 술법에도 능했지만 그는 전사들처럼 싸우는 걸 좋아했다. 특히 선호하는 건 화신체로 하는 박투였다.
그렇지만 그가 화신체를 사용하게끔 만드는 상대는 그리 흔하지 않았다. 지금은 페드로의 화신체를 분명 볼 수 있을 것이다.
“길게 끌 것 없이 화신체로 승부를 보자. 물론 화신체가 가능하겠지?”
페드로의 여유 있는 질문에 파샤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화신체? 너희들이 말하는 게 화신체 축에나 들어가는가?”
“으음”
모욕이었다.
“한 번 마음껏 해봐라. 그럴 만하다면 한 번쯤 보여 주지.”
“말 하나는 그럴 듯한데……. 과연 네 오만이 가당키나 한지 내 판단해 보겠다.”
페드로의 신형에서 미세한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얼굴부터 다리에 이르는 피부에서였다. 아주 작고 가는 미세한 기류가 뿜어지며 전신을 은은하게 물들여 갔다.
파샤는 별로 개의치 않고 지켜보고만 있었다. 페드로의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야아아…….”
고함인지 기합성인지 구분하기 힘든 괴성이 페드로의 입을 떠난 순간이었다.
푸확 파슛 퍼퍼퍽
빛이 확 뿜어지며 기류가 빠르게 전신을 휘돌았고, 그 순간 전신에서 무엇인가 부딪쳐 깨지는 듯한 소음이 동반되기 시작했다.
그건 잠시 동안이긴 했지만 너무도 빠른 변화였다. 이후 페드로의 신형이 점차로 커져 가더니 급기야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또 한 번의 변화가 그때 일어났다.

푸른 빛이 사방을 향해 쏟아져 나오는가 싶더니 골격이 뒤틀리며 전혀 다른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산발한 머리털이 어디로 갔는지 하나도 보이지 않았으며, 그리 볼품 없던 몸매는 오간 데 없어지고 우람한 체격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신장이 전체적으로 커졌을 뿐만 아니라 철골을 보는 듯 단단하고 튼실해 보인다. 가장 큰 특징은 가만있어도 저절로 뿜어져 나오는 푸른 빛이었다. 거의 한 자 정도 밖으로 내뻗치는 기운이었다. 거기에 가만 손을 대면 파랗게 물이 들지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강렬하고 짙었다.
“꽤나 복잡하군. 기다리기 지루할 정도야.”
담담한 파샤의 말에 페드로가 응대했다.
“곧 죽는 소리가 나오게 해주겠다. 기대해 봐라.”
“그러지.”
브라함은 팔짱을 끼고 지켜보고 있었는데 페드로의 상대가 변화없이 태연하자 왠지 불안하기만 했다. 뭔가 반응이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ㄹㄴ 게 보이지 않는다. 페드로의 화신체는 아난다와는 조금 다르다. 화신체는 본인이 낼 수 있는 최극의 힘을 집약시켰다는 점에서만 일치할 뿐 영자들마다 사용하는 법식이나 형태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났다.
지옥에서 막 탈출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흉악한 괴수로 변형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으며, 때로 성별을 구분하지 못할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 되기도 했다. 그걸 결정하는 건 역시나 잠재의식이 발현되는 방식의 차이였다.
판은 마련되었다. 다수간의 난투가 아닌 일대일의 겨룸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생명을 건 대결이라는 점과 다른 이들의 시선 집중 가운데 치러진다는 점에서 더 큰 긴장감을 유발시켰다. 특히 파천측의 진영으로서는 상대의 기량이 전혀 파악되지 않아 초조해진 상태였다.
페드로라면 쉽게 지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드는 한편으로 혹시나 하는 불안감도 적지 않았다. 페드로는 전력을 기울여 단숨에 적을 격살시킬 각오를 다졌다. 그럼에도 쉽게 출수하지 않는 건 상대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었다.
경지가 높은 초강자들일수록 한번 패색이 짙어지면 회복하기란 그만큼 더 어려운 법이다. 무작정 선공을 취할 경우 허점이 노출되기라도 한다면 승부를 뒤집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페드로의 속마음은 상대가 먼저 공격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역공은 수비 이후의 탄탄한 기세를 빌린다는 점에서 처음만 잘 풀어 나가면 더 유리한 법이다. 더군다나 박빙의 승부에서는 더 결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이런 걸 계산하고 있는 페드로와는 달리 파샤는 여유롭게 승부의 긴장감을 즐기고 있었다.
가끔씩 제왕들의 군대간에 작은 충돌이 있긴 했지만 마음 놓고 실력을 뽐낼 기회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는 자신이 내린 결정을 제한할 자도, 방해놓을 자도 없었다.
뒤에 있던 파샤의 동료 하나가 기다리기 지루했던지 재촉하고 나섰다. 클라인이었다. 그는 자신과는 동격의 지위를 지니고 있었지만 은연중에 명령권자 노릇을 하고 있었다. 사련관인 쿠사누스에게 누가 더 신임을 받고 있느냐에 따라 무리 중에서의 지휘권을 장악할수 있었다.
“빨리 끝내라, 파샤.”
클라인은 파샤가 대결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손을 쓰지 못한다. 서로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배려였다. 자신이 저 자리에 서 있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지.”
파샤는 한 손을 앞으로 내밀며 페드로에게 말했다.
“단계적으로 시험해 보겠다. 너희들의 영력 사용이 얼마나 치졸한 것이며 저차원의 것인지를 깨닫게 해주겠다. 힘의 차이를 분명히 인식시켜 주마.”
스르르릉
손에 꼭 쥐고 있던 단검이 손바닥 위 반 자 높이로 떠올랐다. 파천이 그랬듯 페드로 역시 그걸로 무엇을 하려 하는지 얼른 납득이 가지 않았다.
‘저까짓 쇠붙이로 날 어쩔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방심은 아지만 지나치게 긴장한 자신의 꼴이 우습게 생각될 정도였다.
푸확
속도든, 강력한 힘이든, 방비하기 어려운 변화든 한 가지가 월등하면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 파샤가 보여 주는 단순한 빠름은 그 무엇보다 위협적인 공격이었다.
“헉.”
상체를 힘껏 비틀어 피하긴 했지만 가슴 한 켠이 서늘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검날에 스며 있는 기운은 가까이 다가오면서 충만되었다. 위험을 감지한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처음엔 그냥 손을 내밀어 잡으려고 했던 페드로로서는 어리석은 선택을 할 뻔했던 것이다.
핑핑핑
연속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한꺼번에 폭발하는 듯한 속도에 페드로가 경각심을 돋운다. 파천에게 사용했던 것과는 또 다른 형태의 공격이었다. 공간을 파괴시킬 정도의 위력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 무엇이든 뚫어 버릴 것 같이 생각되었다.
공격을 피하며 페드로는 신형을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 갔다. 좌에서 우로, 위에서 아래로. 희미한 잔상조차 남지 않는 쾌속한 움직임으로 그는 점차로 상대와의 간격을 좁혀 가고 있었다.
자신감이 붙은 페드로가 끈질기게 따라붙는 단검을 손바닥으로 쳐냈다. 두껍게 형성된 기류는 프리즈마의 강력한 응축이라 할 수 있기에 그 정도쯤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으로 두 기운이 충돌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뭐, 뭐야?”
츄츄츄
단검이 닿는 순간 페드로의 손바닥을 통해 차갑고 이질적인 것이 몸 안으로 빠르게 유입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차가운 얼음이 일순간에 전신을 꿰뚫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는 힘을 결집해 손바닥에 달라붙은 것을 떨쳐냈다. 동시에 거대한 기운을 한꺼번에 뿜어냈다.
그 기운은 곧장 파샤를 향해 직격했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여전히 손바닥에 달라붙어 체내로 들어오려 하는 단검이었다. 그건 이제 더 이상 흔한 쇠붙이 따위가 아니었다. 파샤는 한 손을 슬쩍 흔들어 페드로의 힘을 무력화시키고는 만면에 웃음을 짓고 서 있었다.
“그 정도 집중력으로는 힘들지.”
기이한 대결이었다. 파천은 그렇게 생각했다. 페드로가 한 손으로 제 손목을 부여잡고 용을 쓰는 걸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되고 만다. 그러나 지금 페드로는 난감한 지경에 처해 있었다. 힘을 거두면 체내로 별 저항 없이 침투해 들어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된 연유인지 아무리 떨쳐내려고 해도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간신히 더 이상의 진행을 억제시켜 두는 게 고작이었다. 기존의 화신체 대결을 예상했던 아레나나 앙샹뜨는 이상하게 진행되는 대결에 곤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뭐 하는 거야, 페드로!”
브라함의 다그침에 페드로는 대답도 못하고 끙끙거리고 있었다.
“그만 끝내지 그러나.”
파샤는 클라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어. 이건 생각보다도 더 형편없군.”
무한계를 한바탕 소란스럽게 뒤집어 놓았던 그 유명한 페드로였다. 그가 제대로 힘 한 번 못 써보고 저런 소리를 들을 줄이야 누가 예상이라도 했겠는가.
파샤의 손이 앞으로 내밀어지는 순간, 그렇게 페드로를 난처하게 만들었던 단검이 거짓말처럼 후퇴했다.
“으으…….”
페드로는 넋이 빠져 있었다. 전의를 상실한 것이다. 하늘을 쪼갤 듯한 강력한 힘에 눌린 것이라면 차라리 받아들일 수 있었다. 마치 놀림을 당한 느낌이 들었다. 이때다. 파샤가 재차 공격하려 한다는 걸 알아챈 브라함이 페드로를 호통쳐 일깨웠다.
“정신 차려, 페드로!”
순간 정신이 번쩍 든 페드로가 앞을 보는데 파샤가 웃고 있지 않은가? 아름답게까지 느껴지는 싱그러운 웃음은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 분명했다. 파샤의 홀이 하늘을 향해 똑바로 세워졌다.
번쩍 우르르르 쾅쾅
번개가 치는가 싶더니 사방에서 강력한 회오리가 몰아쳤다. 그 뿐이 아니었다. 비행선 전체가 요동칠 정도의 압력은 멀리서 지켜보던 전사들의 몸도 들썩이게 만들 만큰 엄청난 것이었다.
“이것이 마지막이다.”
빠지지지직
홀의 끝에서 섬광이 번쩍하는 순간 페드로의 신형에 강력한 벼락이 부딪쳤다.
페드로는 정신을 추스려 공격을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미처 피할사이가 없었다. 간신히 가슴 앞을 두 손으로 방비하여 본능적으로 막는 게 고작이었다.
“크억!”
앙 다문 입술 사이로 고통스런 신음이 새어 나왔다.
빠지지지직
재차 벼락이 발생하고 그건 여지없이 페드로의 신형을 가격했다.
“페드로!”
브라함의 외침을 페드로는 듣지 못했다. 그는 지금껏 겪어 보지 못한 고통에 서서히 정신을 잃어가는 중이었다. 그 어떤 갑옷보다 견고하고 강력하다는 화신체의 상태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가루로 바수어졌을 것이었다.
“꽤나 버티는 군.”
파샤의 홀에서 다시 빛이 번쩍하는 순간이었다. 브라함의 손에서도 그와 비슷한 섬광이 출현했다. 목표는 파샤였다. 브라함의 공격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파샤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홀연히 사라지고 또 한번의 벼락은 어김없이 페드로를 찾았다.
이대로라면……. 페드로가 더 이상 견딜 재간은 없어 보였다.
“안 돼!”
브라함이 페드로를 향해 움직이기 전에 먼저 움직인 자가 있었다.
그건 페드로의 상태를 주의 깊게 사피고 있던 파천이었다. 또다시 격중되면 위험해지리라고 판단한 파천이 파샤의 공격이 있기 전에 미리 선수를 친 것이다.
간발의 차이로 페드로를 품에 안고 몸을 빼낸 파천은 아난다의 선발대가 서 있는 뒤쪽으로 움직였다. 헛되이 허공을 때린 공격을 지켜보던 파샤의 비웃음이 파천의 뒤를 이었다.
“그런다고 내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을 성싶으냐!”
슈슈 처음으로 파샤가 그 자리에서 이동했다. 목표는 파천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다급해진 건 아난다와 그 일행이었다.
“이놈!”
브라함의 두 손에서 거대한 원구가 생성되며 파샤를 향했고, 아레나의 파라슈에서도 빛이 뿜어졌다. 심지어 권터마저 가세해 그 특유의 자세를 취한 채 힘을 쏟아내니 상황은 파샤 하나를 놓고 여러 명이 동시에 공격한 꼴이 되었다.
“하하하, 모조리 다 덤벼라.”
파샤는 오히려 그것이 기쁜 듯 통쾌한 웃음으로 대신했다. 여전히 그의 동료들은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
플로렌서는 돌별한 상황에 몹시 놀라는 중이었다.
‘강한 건 알았지만 저 정도로 차이가 날 줄이야.’
딜타이와 메르센느는 파샤의 측정 불가능한 강력한 신위에 기가 한풀 꺾였으며, 심지어 주눅이 들어 슬금슬금 그들의 눈치까지 살폈다.

“이젠 사실을 털어놓을 때도 된 것 같은데? 내 아버지 메타트론은 어디 있는 거지?”
“모릅니다.”
“그 말을 날더러 믿으라는 건가?”
“믿으셔야 합니다. 거짓 없는 진실입니다.”
“언제부터였나?”
“종적이 묘연해지신 걸 물으신다면…… 꽤 되었다는 말씀밖에…….”
“한심한 일이야.”
루시퍼는 막 피기 시작한 꽃잎을 손끝으로 떼어내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둠의 천사는 잠자코 그가 하는 양을 살피고만 있었다.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만 있을 생각이었던가?”
루시퍼의 손에서 꽃잎이 잘게 찢어졌다.
“저희로서는…… 다른 방도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긴……. 너희가 찾기로 마음먹는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겠지. 짐작 가는 것도 없나?”
“아시다시피 저희는 주님의 뜻을 미리 앞질러 가지 않습니다. 명령에 순종할 따름이지요.”
돌아선 루시퍼의 시선이 잠시 동안 어둠의 천사에게 머물렀다.
쏘는 듯 따가운 시선을 어둠의 천사는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아버지는 내게조차 감추고 계신 것이 많으셨어. 뜻을 헤아린다는 건 불가능했지.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야. 부끄러운 얘기지만 난 그 분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무엇을 계획하고 추진하고 있는지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아들인 내게조차 숨겨야 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나? 네 생각을 듣고 싶다.“
“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이곳은 나의 세계다. 내 뜻이 다른 모든 가치에 우선한다. 그런데 말야…….”
루시퍼는 빈자리를 향해 걸었다. 자신만이 앉을 수 있는 곳. 마계에 속한 모든 이들이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하는 자리였다. 담담한 시선은 어찌 보며 공허함으로 가득한 것처럼 보인다.
다양한 세계의 갖가지 모습들을 치밀하게 묘사한 천장의 그림들에 루시퍼는 매우 흡족해 했다. 그의 시선이 어둠의 천사를 다시 찾은 순간이었다.
“여기조차 내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무슨 말씀이신지.”
“난 욕심이 많다. 현재 내가 지닌 것들만으로는 난 만족하지 못한다. 이것이 세상의 전부라면 난 흡족해 했을 거야. 그러나 세상은 넓고 안타깝게도 내가 가져야 할 것들은 내가 지닌 것들보다 더 많아. 난 그 모든 걸…… 내 손 안에 움켜쥐고 싶다. 바로 이 손 안에! 가장 높은 보좌에 앉아 모든 걸 굽어보고 싶단 말이다. 그런데…….”
어둠의 천사는 루시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오래 전부터 보고 겪어 왔지만 밑바닥을 알 수 없는 존재가 바로 루시퍼였다. 자신이 섬기는 메타트론의 아들이자 마계의 왕인 그가 무엇 때문에 고뇌하고 번민하는지를 그는 사실 알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의 관심은 오직 하나, 메타트론뿐이었다.
“그런데 내가 지니고 있는 것들마저 실상은 내 것이 아니더란 게야. 난 가지려고 했고 복종시켜 지배하려 했고, 내 영토를 무한정 확장시키려 했어. 그런데 그 분은…… 존재하는 것만으로, 단지 그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들 위에 군립하고 있었고, 그들의 마음까지 어느새 소유하고 계셨어.
나와 아버지의 차이가 뭘까? 내게 있는 저 많은 종들과 군사들이 진정으로 따르고 섬기는 존재는 내가 아닌 바로 내 아버지였다. 놀라운 일이지 않은가? 난 단지 그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대상일 따름이었어. 매우 재미있는 일이야.”
어둠의 천사는 루시퍼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주님의 것은 당신의 것이거늘. 상속자인 그대가 누릴 것들이거늘 왜 그런 번민을 스스로에게 지우는지를 난 알지 못하겠소.’
어둠의 천사는 루시퍼의 아름다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루시퍼 님이 어떤 일을 도모하든 주님은 변함없이 전적인 신뢰를 보내실 겁니다. 루시퍼 님을 위해서라면 세상 모두를 적으로 돌리시고도 웃으실 수 있는 분이시죠. 항상 그렇게 말씀하셨고 언제까지나 그러실 겁니다.”
“그래, 나도 알고 있어. 날 향한 내 아버지의 진실이 무엇이든 그 분은 언제까지나 내 든든한 후견자로 남아 있겠지. 그 분의 뜻을 묻지도 않고 독단적으로 인간계를 침략하고 내 것으로 만들었을 때도 그 분은 침묵하고 계셨다.
그랬어. 또 다른 차원계들과 전쟁을 벌일지라도 내 앞길을 막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내 뒤를 든든히 받쳐 주시겠지.”
“그런데 무엇이 걱정이십니까?”
“내 고민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
“내가 이룬 것들과 앞으로 성취할 모든 가능성?지도 메타트론이라는 위대한 이름 앞에서는 빛을 잃어버려. 내 기반은 그 분에게서 나왔고, 내가 지닌 힘과 지략과 아름다움까지……. 그 분을 벗어나서는 아무런 가치도 획득할 수 없다는 거야. 난…… 아무것도 아니었어.”
언제나 당당한 위엄으로 눈을 높이 들던 그가 사실은 그 누구보다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면 과연 누가 믿을 것인가. 어둠의 천사는 그걸 분명히 발견할 수 있었다. 확신이 강할수록 두려움도 커졌다.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
무어라 단정 지을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렸다.
“그래서 난 결심했었어. 그 분이 지금껏 이루지 못한 것을 내 이름으로 해보리라고. 그 시작이 인간계 침략이었다. 대마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아이들을 내 아들과 딸로 삼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 초라하기 짝이 없는 연약한 인간들일지라도 내 손을 거치면, 내 권위가 더해지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가를 모두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그들의 손에서 이뤄질 역사들의 뒤에는 항상 내 이름이 따라 붙을 것이다.
그걸 본 모든 이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보라, 저가 루시퍼의 영광 앞에 서 있노라’라고. 하하하하.“
“그런데…… 무엇을 주저하십니까?”
“아직은 기다릴 때다.”
“메타트론 님의 행방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까?”
“천만에……. 그 분이 반대하시지 않는 한 계획엔 변함이 없다. 그 동안 축적시켜 놓은 힘만으로도 전쟁 수행에 아무런 문제점도 없지.”
“그런데 왜?”
“때가 아냐. 완전한 승리의 확신이 들기까지는 기다린다. 무한계의 혼란이 그 시작점이 되겠지. 숨어 있던 자들이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고 모든 이들의 손에 분노의 횃불이 활활 타오를 때까지 난…… 기다린다.
멀지 않았어. 비밀에 접근하는 자들이 늘어날수록 영자들은 혼란 속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모르겠지. 그들이 지닌 욕망들은 서로 화합할 수 없다. 파멸이 눈앞에서 입을 벌리고 있음을 깨닫는다 해도 그들은 걸음을 멈출 수 없게 된다.
불씨는 던져졌어! 이제 타오를 때만 기다리면 되는 것이야.”
“생각과 다르게 진행 된다면……. 그때는 어쩌실 겁니까?”
“그럴 일은 없다.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야. 하하하하, 이제 아이들이 출관하면 무한계로 보내질 것이다. 그때부터 전쟁은 시작되는 셈이지.”
루시퍼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은 아까와는 또 다른 것이었다.
“잠자는 대지가 깨어났습니다. 그들이 비틀린 공간을 통해 무한계로 들어섰습니다. 변수가 아닐지요?”
“그들은 대적자들과 힘을 합했다. 대적자들은 귀계와, 귀계는 우리와. 그들의 최종 목적은 영계를 다시 지배하는 것이겠지. 그런 점에서 볼 때는 우리와도 부딪칠 수밖에 없지만……. 그 과정에는 얼마간의 일치점이 존재한다.
적당히 이용해야지. 그들이나, 우리나 마지막 순간까지 서로를 향해 이를 드러내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다.”
“그들이 방관하며 이익만을 챙기려 들 때는 어쩌실 겁니까?”
“그럴 수 없어.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뛰어들었고 우리는 아직 관망중이기 때문이지. 좋든 싫든 그들은 휩쓸릴 수밖에 없다.”
“다른 변수들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것도 마찬가지야. 결과적으로는 모두가 내게 이익이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들은 천궁을 아주 훌륭하게 견제해 줄 것이다.”
“그들과 손잡으신 게 실수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할 것 같은가?”
“언젠가 메타트론 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최후까지 적일 수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적도 적절히 이용하면 그 누구보다 훌륭한 조력자가 되는 법이지.”
“끝까지 신중하시라고 조언해 드리고 싶군요.”
“그러지. 그건 그렇고……. 너희들은 언제까지 지켜보고만 있을 셈이지?”
“주님의 명령이 없이는 우리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만약 마계가 위험에 처하게 된다 해도 말인가?”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이 종말을 고한다 해도 저희는 기다립니다.”
“아ㅓ지가 날 이자리에서 끌어내리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렇게 하겠군.”
“그렇습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었다.
루시퍼가 말했다.
“너희의 도움이 없이도 난 내가 원하는 걸 손에 넣을 수 있을 거야. 반드시…… 그렇게 하고야 말겠다.”
“부디 원하시는 걸 이루시길 바랍니다.”

루시퍼와 어둠의 천사가 대화를 나누는 동일한 시간, 다른 공간이었다.
어둠만이 존재하는 곳에는 시간의 변화를 느낄 만한 아무런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음성만이 공간을 흘러 다니고 있을 따름이었다.
“더디긴 하나 변화가 있소.”
“변화는 오래 전에도 있었소.”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오.”
“공간을 비틀어 놓은 게 메타트론이란 게 다를 뿐이지요.”
“그가 원하는 게 무엇일까요?”
“신념을 확인하는 것이겠지.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는 위험한 존재. 견제를 해야 하지 않겠소?”
“아닙니다. 오히려 내버려 두는 게 우리 뜻에 합당합니다.”
“신의 반대편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 합당하다 말할 수는 없겠지요.”
하나인지 다수인지도 모를 여러 소리들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루시퍼에게 힘을 준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는 이기려 하고 있소. 우리가 힘을 보탠다면 그는 우주를 다스리게 될지도 모르지요.”
“그 또한 위험하기는 마찬가지. 결국엔 우리의 세계까지 침범하려 들게요.”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지요. 그가 미칠 변화는 지루함을 한 순간에 날려 버릴 게 아니오?”
“생명수의 흐름이 예상 범위를 넘어서서 급변하고 있소. 다른 세계의 생명수들까지 영향을 받는 건 아닐지 걱정이오.”
“어차피 예상했던 바였소. 전 우주가 민감하게 반응하겠지요. 생명수의 흐름이 달라지고 있다는 건 그걸 의미하오. 서로간에 교차점이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잖소.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을 강구해야겠지요.”
“신은 아직도 침묵하고 있소. 우리의 개입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말이오.”
“우리가 자기와 싸우려는 게 아님을 알기 때문이지요. 신념의 부딪침은 진리에 대한 물음일 따름이오.”
“제왕들이 과한 욕심을 부리는 것 같지 않소?”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 메타트론이 그들에게서 영자들을 해방시켰듯이 이번에도 뭔가 대책을 강구하겠지요. 상관하지 않아도 되오. 그는 강하고 지혜롭소.”
“결과적으로는 제왕들을 불러들인 게 그라는 걸 잊은 건 아니겠지요?”
“잠시 이용만 할 거요.”
“과연 그렇게 될까요? 그들 또한 두번은 당하지 않을 듯싶은데.”
“우리가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게 있습니다. 영계에는 메타트론만 있는 게 아닙니다. 수호자도 있소. 이번엔 메타트론보다도 그에게 더 집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 혼란의 중심엔 그가 있습니다.”
“그는 천궁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야말로 신의 의중을 알아볼 수 있겠지요.”
“기다려집니다. 그와 맞서는 순간을 기다려 봐야겠군요.”
“만약 이번에도 아무런 소득이 없다면 차원을 괴멸시켜서라도 그를 끌어내겠소.”
“그럴 필요도 없을 겁니다. 그가 가장 중히 여기던 인간계를 루시퍼가 망쳐 놓았습니다. 그 분노는 어떤 식으로든 표출이 될 겁니다. 지금의 침묵은 폭풍전야와도 같은 것이겠지요.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쩌면…… 광명의 세계가 또다시 열릴지도 모릅니다.“
“그건 좀…… 부담스런 일이군요.”
“허허허, 그렇지요. 그들은 신과는 다를 테니.”
“영원히 세계를 분리시켜 버릴지도 모르지요.”
“그럼 신에게 빌기라도 해야 하는 겁니까? 그것만은 좀 말려 달라고?”
“허허허허…….”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그 아이가 잘 해낼 거라 믿소.”
“그럼요. 잘해내겠지요.”
“그는 메타트론이나 수호자와도 능히 비교될 수 있으니까.”
“모든 게 잘 될 겁니다. 이번에야말로 놓칠 수 없는 기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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