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31화 : 비행선 전투의 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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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검 – 131화 : 비행선 전투의 반전


비행선 전투의 반전

파샤의 힘은 모두의 힘을 간단하게 밀어 버릴 정도로 막강한 것이었다.
그의 홀에서 빠져 나온 벼락은 그의 반대편을 한꺼번에 휩쓸어 버렸으며, 그 위력은 다른 이들이 지금껏 겪어 본 그 어떤 힘보다도 놀라웠다.
콰르르릉 쾅
거대한 돌풍이 몰아쳤다. 바닥에서부터 비롯된 힘은 비행선을 기우뚱거리게 만들 정도로 파괴적이었다. 대지의 일부가 찢어지며 딸려 올라간다. 작은 먼지로 화해 소용돌이쳤다. 멀리 서서 관전하던 전사들은 황급히 몸을 날리며 그 힘에 말리지 않기 위해 저항했다. 거대한 회오리는 괴물처럼 느껴졌다. 그 가운데서 버티고 선 파샤의 웃음소리가 루하스 강 일대를 진동시켰다.
“거부하지 마라. 너희의 운명은 정해졌다. 제왕의 권능이 나타난 곳에는 오직 복종만이 살길이다.”
여전히 품에 페드로를 꼭 안고 있던 파천은 파샤의 불가해한 힘 앞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자신은 좀 멀리까지 떨어져 있어서 그다지 큰 위험은 없었지만 돌풍의 근처에 있던 아난다 등은 그 힘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아레나의 파라슈에서 시작된 프리즈마는 돌풍 앞에서 무력하기만 했고, 권터는 돌풍에 휩쓸리기 직전이었다. 그나마 의연하게 버티고 있는 건 브라함과 아난다 정도였다.
약간 뒤쪽으로 서 있는 라치오 등을 향해 파천이 다급하게 말했다.
“페드로를 부탁한다.”
라치오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파천은 페드로를 라치오에게 던졌다.
그리고 곧바로 신형을 움직였다. 그걸 본 도나투스의 외침이 파천의 귓가를 때렸다.
“그만둬. 괜한 짓 하지 마라.”
그 소리가 파천에게 들릴 리 만무하다. 조금 앞으로 나갔을 뿐인데도 신형이 갈가리 찢겨 나가는 듯한 파괴력이 전해졌다.
‘이 정도라니.’
파천은 제일 먼저 위급한 상황으로 판단되는 권터의 몸부터 끌어냈다.
“정신 차려.”
그때 아난다가 공격해들었다. 그는 화염을 생성해 세 방향으로 던졌다. 길게 꼬리를 끌며 다가선 화염은 돌풍의 중심에 다다르지도 못하고 속절없이 하늘높이 치솟아 올랐다.
브라함의 두 손이 파샤를 향하는 순간이었다. 공중에 머물고 있던 홀딘의 불사조가 돌풍을 뚫고 파샤에게 접근해 가는 것이었다.
“아!”
누군가의 감탄사는 희망의 소리였다. 그러나 파샤의 비웃음은 더 이상 꿈꾸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내 앞에서 환상수를 쓰다니.”
돌풍을 앞으로 전진시키며 홀을 쥐지 않은 다른 손을 하늘로 향해 쭉 뻗었다.
번쩍
홀딘의 불사조를 향한 빛줄기는 아래쪽에서 위로 뚫고 지나갔다. 홀딘의 불사조는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은 것 같았다.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 보인 파샤가 실낱같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어설픈 건 아니었군. 그렇다면 제대로 상대해 주마.”
돌풍을 일으키고 있던 홀에서 다른 변화가 보였다.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시작한 푸른색 안개가 내리꽂히던 불사조를 휘감아 버렸다.
꾸웨애액
불사조의 울음소리는 애처롭기까지 했다. 위로 솟구쳐 오른 불시조의 전신을 푸른색 안개가 휘감고 있었는데 그건 어느새 거대한 괴수로 변해 있었다.
홀딘의 불사조는 그놈에게 전신이 칭칭 감겨 속수무책으로 울부짖고 있을 따름이었다. 상황은 비관적이었다. 그놈은 번쩍이는 비늘을 가진 거대한 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머리에 관처럼 쓰고 있는 세 개의 뿔은 불사조의 목을 꿰뚫었고 강력한 힘으로 전신을 조여 힘을 빼내고 있었다.
브라함은 탄식했다.
“역부족이란 말인가?”
파천은 아직 낙담하기는 이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솔직히 이 상항에서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 셋도 아닌 단 하나를 상대하는데도 이런 곤욕을 치르고 있거늘 무슨 수로 그들 모두를 당해내겠는가. 파천은 어쨌든 최선을 다해 보기로 했다.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나서 있는 이는 파천을 비롯해 아난다, 브라함, 아레나, 앙샹뜨가 전부였다. 권터는 힘에 겨웠던지 뒤로 빠져나갔고 라치오는 아직까지 싸움에 개입하지 않고 있었다.
다섯 대 하나의 싸움. 그러나 다수의 진영 쪽이 밀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걸 멀리서 살피던 슐츠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기다리길 잘했어. 상대가 되질 않는구나. 저걸 보면 예전에 어찌 제왕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지를 모르겠군.”
전설이 전하는 내용을 따져 보면 분명 현 영계의 시초자들은 제왕에 대한 반란을 선공시켰으며, 그들이 지금의 영계를 건설했다고 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이 부분에서 슐츠가 한 가지 생각지 못하는 부분이 있었다. 예전의 주역들은 천상계를 연 초강자들이었다는 점이었다. 몇몇의 쿠사누스는 제왕보다 강하다. 지금 눈앞에서 강력한 힘을 뽐내고 있는 자는 그런 쿠사누스의 수많은 수하들 중 고르고 골라 파견된 자들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수련자요, 여전사 중 최고에다, 한 때는 무한계를 한바탕 휘저어 놓았던 강자라 할지라도 맞대결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게다가 지금 파샤가 손에 쥐고 있는 홀은 제왕의 권능이 머물고 있다는 잠자는 대지의 보물이었다. 영력을 상승시켜 주는 효과가 있기에 본신의 힘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걸 알 리 없는 슐츠와 전사들은 앞으로 당면케 될 무한계의 운명을 미리 보는 듯해 심정이 착잡해졌다.
파천은 모두가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말했다.
“포위해서 협공한다.”
한 방향으로 서 있는 목표를 분산시키려는 의도였다. 다급한 중에도 파천의 그 말에 모두가 따르는 게 신기했다. 사실은 그들도 달리 방법이 없음을 깨닫던 참이었다.
파샤의 주변을 둘러싼 영자들은 제각기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최고의 공격을 준비했다. 상항이 여기에 미쳤는데도 아난다는 좀체 본신의 능력을 다 발휘하지 않고 있었다. 그가 염려하는 건 화신체가 되면 자신이 쿠사누스였음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아직 그 부분에 대한 언급이 없는 걸 보아 상대들이 모르고 있다고 판단되었다. 단지 그 이유 때문 만일까? 아난다 또한 지금 속으로 갈등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파천이 제일 먼저 공격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다른 제왕의 파견자들과 가장 가까운 위치였다. 슬쩍 그들을 살핀 아난다가 고민을 이어 갔다.
‘달리 방법이 없는가? 이런 게 아니었는데……. 저들의 너무 빠른 등장에 모든 게 뒤틀려 버렸다.’
그가 예상하고 준비해 오던 수순은 이게 아니었다.
수호자의 안배가 무용지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아난다는 슬슬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제대로 나타내 보이지 않았던 본신의 진력을 드러내야 할지도 몰랐다. 최후의 순간이라 판단되기 전까지는 되도록 힘을 감출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과는 뻔하다. 모두의 합해진 힘도 저 자 하나를 이길 수 없다. 그렇다면…….’
파천의 전신에서 은은한 금빛이 뿜어지는 게 보였다. 두 손을 서로 교차했다가 양쪽으로 활짝 펼치더니 곧바로 합장을 취했다.
아난다는 파천이 지금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프리즈마를 모조리 끌어들이고 있음을 알아챘다.
‘무리한 공격!’
판단이 내려지기도 전에 다른 이들의 공격도 더불어 시작되었다. 아레나의 파라슈에서는 지금껏 보이지 않았던 현상이 빚어지고 있었다. 물고기의 비늘처럼 은은한 빛을 띤 초승달 모양의 프리즈마가 채찍을 휘두른 것처럼 비틀거리며 여러 방향을 동시에 점해 갔다.
앙샹뜨는 두 개의 파라슈를 모아 쥐고 하늘로 기원을 올리듯 똑바로 세웠다. 각기 하나씩의 기둥과 같은 기운이 쭉 뻗어 올라가며, 일정한 궤도에 오르자 뒤섞였다. 그건 이내 방향을 바꿔 아래를 향해 내리꽂힌다.
브라함의 공격이 제일 인상적이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아래쪽에서 위로 끌어올리는데 마치 어부가 쳐놓았던 그물을 힘겹게 끌어 올리는 것 같은 전경이었다.
드드드드
대지가 흔들리는 소리와 더불어 깡이 갈라지며 시뻘건 기류가 하늘을 뚫어 버릴 듯 치솟아 올랐다. 그 중심엔 파샤가 있었다.
막 셋의 힘이 파샤에게 집중되는 순간이었다. 파샤의 홀이 손바닥에서 빙글 돌아가더니 두둥실 떠올랐고 가슴 앞에 있는 홀을 잡아 양방향으로 힘껏 뽑는다. 그러자 한 자 크기의 홀이 쭉 늘어나며 기다란 봉이 되는 것이었다. 그건 이내 키 높이 정도에 수직으로 세워졌다. 봉의 양끝에서 비롯된 기운은 파샤의 전신을 감싸듯 둥그런 막을 형성했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세 기운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 막 위를 때렸다.
번쩍
콰콰콰쾅
퍼퍼퍼퍽
“으아아아.”
브라함은 마지막 힘까지 끌어올렸으며 연속적으로 힘을 쏟아 부었다. 막을 감싸고 치솟아 오르는 기운의 양이 훨씬 증가했다. 그러나 그걸 비웃기라도 하듯 파샤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모두의 시선에서 사라졌다. 연속되는 섬광이 조금 전까지 파샤가 서 있던 주위에서 터져 나왔을 따름이다. 여전히 파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거기에 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브라함의 공격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였다. 합장하고 있던 파천이 감고 있던 두 눈을 번쩍 떴다. 뒤이어 빠른 동작으로 두 팔을 앞쪽으로 힘차게 뻗었다. 눈을 뜨고서 직시할 수 없을 정도로 광휘로운 빛이 파샤가 점하고 있던 공간을 물들였다.
각기 다른 네 가지 성질의 기운은 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파샤에게 집중되었다. 거대한 비행선도 한 번에 두 쪽 낼 정도로 막강한 힘이었다.
여기저기서 ‘과연’이란 말이 흘러 나왔다. 아난다는 여전히 합류하지 않고 있었다.
모두는 숨죽이고 파샤의 상태를 확인해 갔다. 돌풍도 잠잠해졌고 환상수들도 사라졌다. 더 이상 대지가 흔들리지도 않았으며 귀가를 꽝꽝 때려대던 폭발음도 멈췄다. 전력을 뿜어낸 네 명은 기대 반, 염려 반의 시선으로 파샤의 상태를 확인했다.
스스스스
한 줄기 미풍에 가득하던 연기마저 사라졌다. 파샤의 모습이 드러난다. 모두의 시선을 받고 처음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나타난 파샤.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었는데 그의 입에서 작지만 또렷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하마터면 망신을 당할 뻔 했군. 꽤 대단한 공격이었어.”
고개를 든 파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는 게 보였다. 큰 타격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태연해 보이지도 않았다.
뒤에 있던 클라인이 짜증스런 심정을 고스란히 담아 파샤를 채근했다.
“장난은 그만두고 빨리 끝내라.”
클라인은 이 모든 상황을 단 한마디로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다. 장난이라니!
조롱당했으니 분노가 일어날까. 아니었다. 파천은 허탈했다. 전력을 기울인 공격이었다. 그 혼자도 아닌 다른 동료들의 힘까지 가세한 야심찬 일격이었다. 그런데도 저놈은 장난질 그만하고 제대로 하라고 말한다.
‘기분 더럽군.’
왜 그렇지 않겠는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그들 중에 본심의 힘을 숨길 만큼 여유 있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아난다가 함께 했다면 달라졌을까? 그런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파샤만 처리하면 끝나는 상황이 아니란 점이었다. 파샤가 클라인의 말에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은지 무시한 체 제 할 말만 했다.
“더 이상의 재주가 없나? 숨겨 둔 마지막 수가 없다면……. 이것 실망인데.”
그는 밑천을 모두 꺼내 놓으라고 한다. 그런데 그런 것이 있을 턱이 없다.
브라함이 성질을 내기 시작했다.
“저 놈의 입을 찢어 놓고 싶건만. 으아아아.”
또 다시 브라함이 두 팔을 휘저으며 공격해 들었다. 과감하였지만 무모한 공격이었고, 그래서 안타까운 몸부림이었다.
그 순간 파샤의 눈에서 악독한 기운이 스쳐 갔다.
쉬잇
파샤는 모두의 눈길을 너무도 쉽게 속이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파천은 파샤가 브라함의 뒤쪽으로 나타나는 걸 발견하고는 고함을 쳤다.
“조심해, 뒤에…….”

“끄억.”
봉에 등을 가격 당한 브라함이 파천이 서있는 곳을 향해 빠르게 날아왔다. 파천은 엉겹결에 그를 안아들었다.
“이, 이봐. 괜……찮아?”
브라함이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괜찮을 리가 없다.
“쿨럭, 쿨럭.”
울컥 쏟아지는 피가 파천의 가슴팍을 적셨다.
“빌어먹을……. 괜찮아.”
브라함은 입가를 쓱 닦아내며 파천의 품에서 벗어났다. 부상의 정도를 알 수는 없었지만 그의 눈은 아직까지는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
“그 험한 입에서 고분고분 얌전한 말들이 흘러나오게 해주지. 이번엔 계집들 차례다.”
쉬쉿
“조심해!”
파천도 같이 움직였다.
“타앗.”
모두 긴장하는데 파천이 향한 곳은 아레나의 뒤쪽이었다. 막 아레나의 등을 가격하던 봉을 파천의 발이 간발의 차이로 막은 것이다.
그걸 알아챈 아레나가 몸을 화급히 틀며 파샤의 복부에다 프리즈마를 작렬시켰다.

휘리리릭
뒤로 몇 번인가 회전하며 자리를 잡은 파샤는 어이없어하며 자신의 봉과 파천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건 신선한 충격이었다.
“네가 내 움직임을 따라붙었단 말이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파천 역시나 믿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설마하니 이렇게 쉽게 막을 줄은 예상 밖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봉이 발에 막히는 순간 그다지 큰 충격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도 지금의 상황이 얼른 이해가지 않았다.
“내가 방금…… 막은 건가?”
“이놈!”
쉬쉿
이번엔 파천을 노란 움직임이었다. 파천은 바짝 긴장했다.
‘왼쪽, 아니 오른쪽이다.’
“타앗.”
파천의 두 손이 번갈아 가며 봉의 진로를 방해했고 벌어진 틈 사이로 오른발이 쭉 뻗어 들어갔다.

“헉!”
파천의 일격이 보기 좋게 파샤의 복부에 명중했다.
파샤는 뒤로 몸을 황급히 빼내며 얼이 빠진 듯 파천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건 뒤에서 관전하던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예기치 못한 상황을 어느 쪽도 쉽사리 믿으려 하지 않았다. 정작 본인도 머리를 흔들고 있으니 달리 무슨 말을 하리요. 아무도 지금의 일을 설명하지 못하지만 단 한 명만을 이해하고 있었다.
전사들보다 더 멀리서 관전하고 있는 세 명이 있었다. 그들은 허공 높이 뜬 채 처음부터 쭉 하나도 놓치지 않고 살피던 중이었다.
그들은 루하스 강에서 그리 멀지 않은 매소 라훔을 떠나왔던 불칸의 일행이었다. 아까부터 수련자는 그를 재촉하고 있었지만 불칸은 좀더 지켜보자고 했었다.
브라함이 파샤의 봉에 얻어맞았을 때쯤 불칸은 나서야 할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그런데 파천이란 애송이가 제왕의 파견자들 두 번 씩이나 놀라게 한 것이다.
“저건 어찌 이해해야 합니까?”
멍한 눈으로 쳐다보는 수련자에게 불칸은 미소와 더불어 짧게 대답했다.
“저들이나 우리나 동일한 하나의 약점을 지니고 있지.”
“그게 무엇이죠?”
“비켜보면 알아. 대단한 녀석이야. 몸놀림으로만 따지면 누구도 쉽지 않을 정도야. 점을 간파해냈다면야 지금부터 볼 만한 구경거리가 되겠는걸.”
파샤는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지 않았기에 받아들이기가 힘겨웠다. 분노는 그래서 더 컸다. 그의 봉에서 또다시 강력한 힘이 발휘되려 하고 있었다.
파천은 한 가지 생각에 전신을 강타하는 전율을 느꼈다.
‘시험해 보자. 내 생각이 적중한다면…… 이건 의외의 소득이다.’
“모두 물러서, 놈은 내가 상대한다.”
파천의 호기 어린 외침에 아난다가 미소를 지었다.
파천을 제외하고 모두 한쪽으로 물러서는데 그게 더 파샤의 심기를 자극했다.
“너를 소멸시키고 실추된 명예를 되찾겠다.”
“웃기는군. 몇 방 얻어맞은 걸로 실추된 명예 운운하다니.”
번쩍 콰르르릉 쾅
또다시 시작된 벼락 공격이었다.
“그건 하도 여러 번 봐서 이젠 질린다.”
파천의 신형이 슬쩍 옆으로 움직이는 것 같더니 급속히 방향을 바꿔 위로 솟아올랐다. 파샤의 공격은 파천의 발 밑을 지나갔을 뿐이었다. 허무하게 허공을 때린 파샤는 침착함을 잃고 마구잡이로 공격해들기 시작했다.
‘빠르긴 하지만 단순하다.’
파천은 마음놓고 신형을 움직였다. 그의 몸놀림은 기본적으로 천마군림보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으나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고 변화무쌍했다.
공간을 통째로 억눌러 올 때는 멀찍이 떨어졌고, 빠른 공격에는 변화로 대처했다. 금방이라도 피를 토하며 쓰러질 거라고 생각됐던 파천이 의외로 간발의 차이로 피해내자 동료들은 새로운 기대감을 찾기 시작했다.
어쩌면, 어쩌면 파천이 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쓸데없는 것이 될지 적중될지는 아직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점차 공격이 거듭될수록 파천의 신형은 점점 더 종잡을 수 없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렇지만 피하는 것만으로는 상대를 제압할 수 없다. 그건 지켜보는 이들이나 파천이나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일이었다.
이때 파천은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자신의 생각이 적중된 것이다. 전혀 예기치 못했던 소득은 그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분명 파샤의 공격은 횟수가 거듭될수록 맹렬해졌고 위력적이었다. 그렇지만 단 하나도 적중시키지 못하니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 약점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공격이 솔직하다는 점이야.”
“무슨 말씀이시죠?”
“속임수가 없다는 말이지.”
이때 파천도 불칸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 자의 공격은 단순하다. 변화가 있긴 하지만 예측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위력은 비할 데 없이 강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날 잡을 수 없다.’
분명 그랬다. 불칸이 지적한 영자들의 약점은 파천이 파악한 것과 동일했다.
힘 대 힘의 격돌이 영자들의 싸우는 전형을 이룬다. 무공에서 말하는 허초라는 게 이들에겐 아예 무시된다. 내가 공격하니 네가 맞받아라, 라는 식이었다. 물론 다양한 변화가 가미되긴 하지만 그것 역시 일정한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또한 이들에게는 무림인들이 중시하는 신법이라는 게 전무한 실정이었다. 그 근원적인 형태에서의 발전, 이를 테면 라치오가 보여주었던 식의 고차원의 신법은 존재하나 실전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공격 수단으로서의 신법이란 게 없었다.
그냥 상대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게 전부였다. 파천이 지금 보여주고 있는 몸놀림은 천마군 림보의 신묘한 형식이 가미된 것이었다. 그건 상대의 예측을 허물어 버리는 엇박자를 지니고 있었고, 그 응용의 범위는 생각보다 더 크다 할 수 있었다.
게다가 파천의 움직이는 속도는 시선으로 따라 붙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이건 파샤에게는 의외의 복병인 셈이었다. 아직까지도 파샤는 봉을 움켜쥔 채 열을 내고는 있었지만 파천의 그림자조차 제대로 파악해내지 못했다.
파천은 상대가 뻔히 짐작할 수 있는 움직임과 공격 형태는 단 한번도 보이지 않았다. 파샤가 예측할 수 있게 되는 순간 파천은 낭패를 면키 어려울 것이다. 영리한 파천이 싸움을 어렵게 끌고 가는 건 당연했다. 단 한 번의 출수로 제압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분노와 당황감에 상대가 무모해지길 기다렸다.
결국 파샤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단 하나였다. 이리저리 쫓아다니며 심기를 낭비할 바에는 힘으로 주변 공간 모두를 공격 범위에 포함시켜 제압하고자 했다.
“어디까지 달아날 수 있는지 보겠다.”
콰르르릉 꽈꽝
지켜보던 자들까지 난리가 났다. 자신들을 향해 몰려오는 벼락 뭉치에 모두들 부리나케 몸을 빼내야만 했고, 미처 피하지 못한 자들은 속수무책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무슨 짓이야?”
수하들 몇몇이 고꾸라지는 걸 본 플로렌서가 정색하며 따졌다.
클라인이 대신 겸연쩍어하며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잖은가?”
그런데 정작 파천은 아무런 해도 입지 않고 있었다. 그들보다 빨리 피해낸 파천은 물러섰다 다시 다가와 있었다.
플로렌스가 이를 갈아붙였다.
“단순히 빠르기로만 따지면 저놈을 따를 자가 얼마 없겠어. 동시에 상대해야 별 수…….”
“기다려 봐. 지금 나서면 파샤의 공격이 널 향하는 수가 있으니까.”
파천은 여유를 확보한 채 상대의 허점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파천의 신형이 갑작스럽게 열두 개로 늘어나자 모두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분신을 저렇게나 많이…….”
딜타이의 외침이었다.
“단순한 분신은 아닌 것 같은데.”
플로렌서도 확신이 서지는 않았다.
메르센느가 놀람을 감추지 못하며 감탄했다.
“분신은 천산계의 사대천왕단이 최고인 중 알았더니……. 이제 보니 그게 아니었군요,”
“그것과 틀려.”
정확하게 뭐가 틀린지는 플로렌서도 알지 못했다. 단지 느낌이 그럴 뿐이었다.
십이지신으로 늘어난 파천이 여기저기에 출몰하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파샤. 그런가 싶으면 또다시 어느새 하나로 합쳐지고 여기 번쩍, 저기 번쩍 하니 당황스럽기 그지 없었다.
“훗, 좋아. 네놈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럼 이건 어떠냐!”
그가 무슨 기가 막힌 대책이라도 세워 둔 건지 그렇게 말했다.
파천은 막 허점을 파고들며 공격하려다 멈칫하며 신형을 뽑아냈다. 그 순간 파샤가 엉뚱하게도 뒤로 멀찍이 물러서 있던 파천의 동료들을 공격해들었다. 설마하니 그가 돌연히 그런 행동을 할 줄은 예상 밖이었다. 아난다가 튀어나왔다.
콰쾅
급하게 서두르느라 채 힘을 결집시키지 못한 공격이었기에 아난다는 살짝 밀려났을 뿐이었다.
이래저래 체면을 구긴 파샤가 종내는 머리꼭지까지 오른 화를 수습하지 못하고 제 힘을 모조리 뽑아내기 시작했다. 그건 쉽사리 접근조차 하기 힘든 파상 공격이었다.
뒤를 훤히 비워 둔 파샤에게 파천은 빠르게 접근했다. 그는 여전히 은은한 금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대가오는 기운을 파샤가 감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파천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오직 앞에만 적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난다가 드디어 결심을 굳히는 순간이었다.
‘이제 어쩔 수 없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구나.’
아난다가 화신체를 발동했다. 크고 아름다운 날개가 형성되며 상서로운 황금빛을 뿜어냈다. 그는 그 상태로 제자리에서 빠르게 회전했다.
콰콰콰콰쾅
파샤의 공격이 아난다의 회전 반경 내에서 모조리 부딪혀 터졌다. 이때 파천의 발과 손이 파샤의 등과 옆구리, 목 등을 무차별 가격했다.
“허억.”
파샤는 앞으로 고꾸라질 듯 기우뚱거리면서도 중심을 잡았다.
이 기회를 파천이 놓칠 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또다시 몸을 뒤로 후퇴시켜야만 했다. 파샤의 봉이 뒤를 향해 빠른 속도로 휘저어졌기 때문이다.
“저, 저건.”
놀람의 소리는 파천의 뒤쪽에서 흘러 나왔다. 클라인과 또 하나의 제왕의 파견자인 베네타는 아난다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얼어붙었다.
그건 파샤도 마찬가지였다.
“쿠사누스!”
상황은 그 외침과 함께 일순간에 정지해 버렸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제왕의 파견들은 지금이 전투중이라는 것도 잊었는지 한 동작으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분명 아난다를 향한 몸짓이었다.
그들에게 쿠사누스는 통치자인 제왕과 동격의 위치를 지니고 있었다. 오히려 제왕보다 더 존경하며 따르는 존재가 바로 쿠사누스였다. 그들에게 쿠사누스는 스승이자, 인도자였다. 자신들의 생사여탈권을 한 손에 틀어쥐고 있으며, 절대적인 충성을 자발적으로 끌어내는 존재였다.
그런 쿠사누스의 화신체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건 조금 전까지 자신들과 싸웠던 아난다임을 미처 못하게 할 만큼 그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본능처럼 즉각적이었다.
플로렌서가 그들의 하는 양을 보곤 어처구니없어 했다.
“정신 차려. 저 자는 메덴의 수련자야. 전신이 쿠사누스일 따름이다.”
그 말에 그제야 정신을 수습한 제왕의 파견자들이 슬쩍 고개를 드는데, 아직도 충격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듯 보였다.
파천은 그들이 그러고 있자 잠시 어찌해야 할지 상황 파악이 안되었다. 공격을 해야 할지 가만 지켜봐야 할지조차 얼른 판단이 안된다.
쿠사누스로 화신한 아난다가 파샤와 그 동료들에게 말했다.
“플로렌서의 말처럼 내 전신은 쿠사누스이다. 이제 어찌할 텐가?”
역시 화신하면 아난다의 말투는 달라진다. 눈빛도 부드러움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파샤가 고개를 돌려 클라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제왕에게는 각기 한 명씩의 쿠사누스가 있다. 예전 영자들의 반란이 있었을 때 서른 세 명의 쿠사누스들이 메타트론의 암계에 빠져 포로로 잡혀 간 걸 그들도 알고 있었다. 클라인은 쉽게 말문을 열지 못했다. 이건 자신이 섣부르게 판단할 일이 아니었다. 물론 자신의 직속사령관인 쿠사누스 베롬은 아니라지만 눈앞에 서 있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쿠사누스였다.
이제 어찌할 텐가, 라는 질문에 클라인은 생각했다.
‘어찌해야 하는가?’
그를 비롯해 현 무한계에 들어와 있는 제왕의 파견자들은 모두 여덟 명이었다. 그들 중에 그 누구도 쿠사누스의 처결에 대한 결정권을 지니고 있지는 못했다. 단지 예전에 포로로 잡혀 간 쿠사누스를 조사 과정에서 발견하면 그를 회유해 데려 오라는 명은 받은 적이 있다. 그걸 클라인은 기억해냈다.
일은 그렇게 처음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흘러 가고 있었다.
“쿠사누스, 당신을 제왕이 다스리는 성스런 대지로 이끌어 들이겠습니다. 그것이 저희들이 할 바인 것 같습니다.”
“난 그럴 수 없다. 내겐 해야 할 일이 있다.”
클라인은 잠시 뜸을 들이다 재차 강경하게 말했다.
“현재의 당신은 쿠사누스의 모습을 하고 있을 뿐……. 엄밀히 말해 저희들이 섬겨야 할 존재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희가 감히 쿠사누스를 향해 공격을 할 수는 없습니다. 저희들의 입장을 헤아리신다면 부디…… 저희들의 뜻을 따라 주십시오.”
파샤가 클라인의 옆자리로 돌아오고 파천이 아난다의 옆으로 가서 섰다.
“그럼, 한 가지 제안을 하겠습니다. 저희들을 따라 오신다면……. 저들을 무사히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양보입니다.”
“받아들일 수 없다.”
아난다의 말을 뒤이어 플로렌서도 외쳤다.
“나도 받아들일 수 없어. 너희들 뜻대로는 안 될 거야.”
클라인이 낮으나 묵직한 음성으로 잘라 말했다.
“닥쳐! 이건 중대 사안이야. 네가 나설 일이 아니다.”
“뭐라?”
“클라인, 잠깐만.”
파샤가 다른 견해를 피력했다.
“어차피 기억이 없는 상태인데 이럴 필요까지 있을까? 사로잡으면 모든 일은 깔끔하게 해결될 것 같은데.”
“뒷일은 네가 책임질 거냐? 그렇다면 나도 기꺼이 동의하지.”
파샤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미치지 않고서야 차후 쿠사누스에 대한 불경죄를 혼자 뒤집어 쓸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 입장으로서는 대단히 난감한 문제였다. 이때 가장 뒤에 처져 있던 베네타가 아난다에게 말했다.
“저희 뜻을 따르지 않으신다면 저희들은 저들 모두를 하나씩 차례대로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선택은 쿠사누스 님이 하십시오.”
그 말이 허투루 하는 말이 아님은 당연했다.
“그럴 수는 없지. 달라진 건 없어! 끝까지 싸운다.”
파천의 그 말은 흔들리던 아난다의 마음을 견고하게 만들었다.
“들었나? 내 모습은 쿠사누스일지언정 난 수련자 아난다다. 내 과거의 이름으로 날 옭아맬 수는 없다.”
과거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아난다의 모습에서 세 파견자들은 어떤 분노 같은 감정을 느꼈다. 그들은 예전의 패배에 대한 상처를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었다. ‘쿠사누스만 있었다면.’ 이게 제왕의 군대가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그들이 잠들지 않았다면 반란을 쉽게 잠재울 수 있었을 것이고, 서른 개가 넘는 대지가 파괴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아무리 기억이 없다지만 어찌 그런 말을.”
베네타가 분노의 일성을 토했다.
“당신은 반역자다. 더 이상 그대를 쿠사누스로 존중해 주지는 않겠다. 차후 불경죄로 처벌을 받는 한이 있어도……. 그대의 부정을 용납할 수 없다.”
클라인은 웃었다. 파샤 또한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 동안 절치부심 얼마나 노력하며 이 날을 기다려왔던가. 때는 무르익어 예전의 빚을 갚을 기회가 왔거늘 어쨌든 명색이 쿠사누스라는 자의 입에서 저런 말들이 나오니 어찌 참고 들을 수 있겠는가.
“할 수 없군.”
클라인의 그 말이 이번엔 파견자 셋이 동시에 덤빌 태세를 갖추었다. 그들이 모두 나서면 방법이 없어진다. 파천의 임기응변이나 아난다의 화신체로도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결국은 이 자리에서 모두는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게 될 것 같았다.
“플로렌서! 네 뜻대로 공격해도 좋다. 모두를 죽여…… 도 좋다. 단 쿠사누스만은 건들지 마라. 우리 차지니까.”
그들은 아직까지는 아난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결정한 건 아난다를 사로잡는 것이었다. 그 뒤에 제왕의 대지에 데려 가 기억을 회복시키면 된다고 생각했다.
플로렌서의 명이 모두를 향해 떨어졌다.
“모두 처치해라.”
멀찍이 떨어져 있던 비행선의 하수인들인 헤브론과 용병들이 전열을 가다듬고 공격을 시작했다. 활을 꺼내들고 중앙으로 화살을 집중해 날렸다. 용병들의 손에 들려 있던 칼도 빛을 뿜었다. 이렇게 되자 다급해진 건 이제 파천의 진영 쪽이었다. 가운데 갇혀 있어 고스란히 공격당하게 된 것이다.
이 때 까지도 세 파견자는 아난다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당할 수는 없지.”
파천의 외침처럼 선발대측도 힘을 냈다. 그런 중에 가운데로 접근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플로렌서를 필두로 딜타이와 메르센느 그리고 용병들이었다. 그들이 압박을 가하자 멀리서 활을 날리던 헤브론들까지 간격을 좁히며 몰려들었다.
파천의 염려는 그들 따위가 아니었다. 플로렌서는 모르지만 나머지는 그리 큰 골칫거리는 아니었다.
‘저 세 놈을 처리하지 못하면 오늘 여기서 벗어나기는 틀렸다.’
뻔히 예상되는 결과 앞에 고민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무신경하게 젖혀 두지도 못한다.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부상을 당해 기력조차 그다지 남아 있지 않은 동료들은 도나투스 같은 비교적 강자들에 의지해 근근히 버텨낸다. 아직까지는 팔팔해 힘이 넘치는 동료들은 그다지 큰 신경을 쓰지 않아도 좋았다.
아난다가 격전에 합류하려 하자 그를 포위하며 앞을 막아 버린 세 파견자들. 그들의 의지는 단호해 보였다.
“용서하시길.”
클라인이 제일 먼저 공격했다. 그리고 파샤와 베네타가 가세했다. 화신한 아난다라 해도 쿠사누스가 될 수는 없었다. 그가 진정 쿠사누스의 위력을 다 발휘할 수 있다면 제왕의 파견자 셋은 충분히 무찌를 수 있을 능력이 된다.
그러나 아난다에게는 현재 그런 힘이 없었다. 날개를 접었다 폈다 하며 분투하고 있었지만 금세 제압될 것 같았다. 그들은 매우 교묘하게도 아난다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점차 무력화시켜 갔다.
그걸 안타깝게 지켜보던 파천은 막 공격해 들어오는 딜타이를 따돌리고 파견자의 배후를 교란했다. 이때 멀리서 지켜보던 불칸이 고개를 저으며 안타까워했다.
“불가항력이로군. 결국 내가 나서야 한단 말인데…….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불칸은 옛 기억을 떠올렸다. 메테우스를 카란과 함께 경호하던 기억이었다. 메테우스도, 카란도 현재는 만날 수 없지만 언젠가는 그들을 다시 대면할 날이 올 것이다. 카란은 칠대부족을 남겼지만 그는 지금껏 한일이 없었다.
‘로메로, 네가 날 아직도 친구로 생각한다면 나도 네 부탁을 들어 주마.’
로메로가 제왕의 파견자를 만나러 간다고 했었다. 여기에 그들이 있을 것이라는 건 로메로도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불칸은 곁의 수련자에게 당부했다.
“여기서 기다려라.”
“혼자서……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는 괜한 말을 했다고 자책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무슨 보탬이 되리오.
불칸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또다시 내 손에 피를 묻혀야 하다니……. 이것도 내가 짊어져야 할 숙명인가 보군. 할 수만 있다면 외면하고 싶건만.”
솔직히 아직까지도 그는 망설여졌다. 그가 지금껏 라훔에 숨어 산 것도, 수련자와 현자 행세를 하며 위기에 빠진 영자들을 도운 것도 과거에 대한 회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어차피 나선 길이었다. 그때 불칸은 귀를 쫑긋 세웠다. 아주 미세한 소리였다. 그가 저 멀리 뒤를 쳐다본다.
수련자는 상황이 점차 나빠지는 걸 보며 불칸을 연신 돌아보았다. 왜 아직도 이러고 있느냐는 뜻이었다. 그가 저 멀리 뒤를 보고 있는 듯하자 수련자도, 전사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엇 때문에 그러십니까?”
우우우웅
아직은 작은 소리였지만, 그래서 수련자들도 전사도 듣지 못하고 있었지만 불칸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그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내가 나설 필요가 없을 듯하군.”
“네?”
영문을 모르는 건 둘 다 마찬가지였다.
“잠시 이곳을 피해야겠어.”
물어 볼 새도 없었다. 그들은 허공에서 자취를 감춰 버렸다. 불칸이 둘을 대동하고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파천은 다급하기 그지없었다. 벌써 여기저기 상처가 생겨났다. 아무리 빠른 동작을 자랑한다지만 파견자 셋의 움직임을 한꺼번에 파악하고 대처하기엔 힘이 겨웠다. 치명적인 건 아니지만 점차 상처가 생겨나는 빈도가 늘어났다.
“크억.”
가슴팍을 슬쩍 스친 것 같았는데도 숨이 턱턱 막혀 왔다. 얼마나 뻐근한지 등 쪽까지 고통이 몰려들었다. 타격이 전달되는 순간 동작이 둔해졌다. 아난다가 그나마 그들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았다면 진작에 쓰러졌을 것이다.
숨 돌릴 틈도 없이 파천은 요리조리 피해 다녀야만 했다. 정면으로 부딪친다는 건 역부족이었다. 파천과 아난다가 이런 위급한 지경에 처했어도 아무도 도울 수가 없었다. 나머지는 비행선의 전력을 상대하기에도 손과 발이 바쁠 지경이었다.
그들 중에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이는 건 의외로 라치오였다. 좀 뛰어난 전사겠거니 정도로 수준을 가늠했던 자들은 그의 신출귀몰함에 혀를 내둘러야했다. 그는 딜타이를 상대로 하면서도 간간이 다른 자들을 도왔고 때로 비교적 약한 헤브론들을 처치하기도 했다.
한참 열내며 싸움에 집중해 있던 무리 중에 가장 먼저 동작을 멈춘 건 파견자들이었고, 그 다음이 플로렌서와 아난다, 파천의 순서였다.
우우우웅
벌떼가 몰려드는 소리 같기도 했고 타종 뒤의 여음 같이도 들렸다. 그 소리는 급하게, 매우 가파르게 상승했으며 ㅏ중엔 헤브론들마저 동작을 정지할 만큼 크게 들려 왔다.
모두는 누가 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북쪽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무…… 엇인가가 다가오고 있다.”
파샤의 중얼거림이었다.
무엇이 다가온다는 게 이렇게 큰일일까? 그러나 이들의 큰일 난 듯한 태도에는 이유가 있었다.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데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는 발성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 아직 근처에 당도하지도 않았는데 고막이 울릴 정도의 속도로 무엇인가가 날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침을 몇 번 삼킬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극도의 긴장감은 갑작스런 혼란으로 변했다.
“이 엄청난 기운은?”
“대체 뭐냐, 이건?”
주로 떠드는 건 비행선측의 인물들이었다. 플로렌서의 이마에 작은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파샤는 중얼거렸다.
“누구냐? 누가 이런 기운을 뿜어낸단 말이냐? 무한계에 이런 자가 있었던가?”
제일 먼저 아난다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에게 영언이 전달되었던 것이다.
[아난다, 나다. 그 동안…… 고생했다. 지금부터 파천의 안전은 내가 맡는다.]
천마, 아니 라미레스였다. 아난다가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쳤다.
“라미레스 님이 오고 있습니다.”
파천에게 한 말이었다. 그런데 어찌 파천만 들었을까. 라미레스가 온다. 이 말은 모두를 한바탕 경악 속으로 몰아넣었다.
마계의 공포스런 대마신 바알세불에서, 수련자 라미레스로 대변신한 이 시대 최강자 중 하나. 그를 모르는 영자는 단 하나도 없다.
칠대부족의 족장도, 메덴의 원탁도 그 앞에서 큰 소리를 낼 수 없다는 무법자가 여기를 향해 오고 있는 것이다. 등장도 요란하게 ‘내가 가고 있다.’ 라는 걸 모두에게 강하게 경고하면서.
새 파견자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얼어붙었다. 때로 예전 영계의 전설적인 존재들인 메테우스나 카란 등과 같은 비중으로 취급되기도 하며, 천상계의 천주들과도 동격으로 치부되는 존재. 그가 오랜만에 무한계에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모두가 숨죽이고 있는 가운데 가슴이 한껏 부풀어 있는 자가 두 명 있었다. 파천과 앙상뜨. 이유는 서로 다르지만 그리움의 색깔은 동일했다. 선발대는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희망이 보이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를 세 파견자도 느꼈다. 그러나 그들은 라미레스를 잘 알지 못한다. 파견될 때 경계해야 할 자로 거론되기는 했지만 솔직히 피부에 와닿는 비중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들도 긴장하고 있었다. 파악되는 기운만으로도 상대가 막강한 강자임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드디어 상대할 만한 자가 나타난 셈이군.”
아직은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는 파샤를 향해 앙상뜨가 비웃으며 말했다.
“조금 있다가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을지…… 두고 보죠.”
쇄애애액
저 멀리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그것도 잠시, 어느새 공간을 단축한 신형은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듯 급작스럽게 모두의 시선에 잡혔다.
파천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알고 있던 천마가 아닌 웬 낯선 이가 천천히 하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빠르게 파천을 찾았고 다른 이들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천천히 다가섰다.
파천은 낯설지 않은 느낌이 들긴 했지만 진짜 눈앞의 인물이 천마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거의 두장 여까지 다다른 라미레스가 우뚝 멈춰 섰다. 그가 먼저 말했다.
“파천! 죽지 않고 살아 있었구나.”
다짜고짜 첫마디가 이랬다. 훤칠한 키에 강렬하면서도 뚜렷한 이목구비. 만인을 압도할 정도의 패기 가득한 모습에 어울리지 않게 미풍이 진하게 스며들었다.
“녀석! 나다, 천마.”
파천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전신을 휩쓸어 버리는 전율을 느꼈다. 폭풍에 휩쓸린 키 작은 나무처럼 몸이 떨렸다.
“너냐? 정말 천마, 너냐?”
둘은 서로를 향해 다가섰다. 한 발의 간격. 둘 사이의 거리였다. 눈빛이 마주쳤다. 파천도 라미레스도 그래야 할 것처럼 자연스럽게 한 손을 맞잡았다.
콰악
가슴 앞에서 마주잡은 손엔 상대의 것을 으스러뜨릴 것 같은 힘이 들어가 있었다.
“파천, 잘…… 견뎌 주었다. 네가 자랑스럽다.”
“내가 할 소리다. 널 다시 만나…… 반갑다.”
둘은 서로를 끌어안았다. 사내들의 포옹이라 더 격정적이었다.
둘은 웃었다. 한참이나 웃었다. 라미레스는 파천이 무사해 줘서 그것이 고마워 웃었고, 파천은 약속을 지켜 준 천마가 고마워 웃었다. 그 웃음은 한동안 더 이어졌다. 품에서 라미레스를 떼어놓으며 파천이 다시 말했다
“놀라워.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다니. 모습은 예전보다…… 한결 나은데.”
“하하하, 내가 원래 한 인물 하지. 그건 그렇고 파천, 저기 누가 와 있는지 봐라.”
어느새 도착한 걸까? 저쪽 멀리에 새로운 두 명이 등장해 있었다. 둘 다 파천에게는 낯선 모습들이었다.
멀뚱거리며 쳐다보는 파천과는 달리 둘은 격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거대한 바위를 보는 듯 단단한 체구의 인물 하나와 그와는 정반대로 가녀린 체구의 인물 하나. 둘은 사내였다.
‘천마와 함께 올 자들이라면…….’
그는 누굴까를 생각했다.
“이것 모습만 봐서는…….”
“지존!”
허공 중에서 철탑 같은 체구의 인물이 먼저 무릎을 꿇었다. 그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흘러내려 얼굴을 적셨다. 라미레스가 말했다.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눈물이라니. 파천, 광마존이다.”
“뭐?”
파천은 아무리 애써 보아도 도저히 눈앞에 버티고 있는 거구의 사내와 광마존을 연관해 생각해 볼 수가 없었다. 파천은 터질 듯한 가슴을 간신히 억누르며 짧게 말했다.
“와줘서…… 고맙다.”
“지존!”
광마존은 아직까지 파천을 지존이라고 불렀다. 인간세에서 맺어진 인연을 영계에서까지 이어 갈 것이란 의지의 표현인 셈이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 옆에는 율극이다.”
파천은 혹시, 하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라미레스가 그렇게 확인시켜 주자 반색했다.
“수고했다, 율극.”
“형님.”
율극은 씨익 웃었을 따름이었다. 형이란 호칭이 이렇게나 정감어린 것이었던가, 예전엔 미처 몰랐던 부분이었다.
이때다. 그들의 해후를 지켜보던 파견자 중 클라인이 툴툴 메마른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적당히들 하시지. 금방 헤어질 텐데 뭘 그리 소란을 피우나, 그래.”
그 말은 곧 죽여주마, 라는 말이기도 했다. 라미레스가 슬쩍 쳐다본다. 눈은 부드럽게 웃고 있었지만 입은 험하기 그지없었다.
“애송이! 깐죽거리지 말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라. 그렇게 안달복달하지 않아도 넌 오늘…… 죽었어.”
클라인은 어이가 없어 그만 말문을 닫고 말았다.
그 말을 듣고 있으니 꼭 그렇게 될 것만 같은 확신까지 심어주는 거침없는 말이었다.
라미네스는 그들에 대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제 할 말을 마저 했다.
“파천, 이 둘은 각기 페리칸과 카이로라고 한다. 앞으로는 그렇게 불러라.”
그들의 영계에서의 신분은 파천이 지금껏 기대했던 것보다 더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데 적루아의 말과는 그들의 신분이 달랐다. 광마존은 천상계의 천인이며 율극은 거신족의 일원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광마존은 메덴의 불꽃 연못에 갇혔다던 전사 페리칸이었으며, 율극은 거신족은 커녕 평균치도 안 되는 체구를 지녔다.
그 의문은 금방 풀렸다. 광마존이 전사가 되기 이전에는 분명 천상계에 있었던 게 틀림 없었고, 거신족은 원래가 평소에도 20척 정도의 큰 신장을 지녔지만 그들 중에 일부는 일반적인 영자들의 평균 신장에도 못 미치는 자그마한 체격의 소유자들이라고 했다. 족장을 비롯한 몇몇이야말로 거신족 콴의 핵심전력이라 했다.
간단한 대화들이 오가고 난 뒤 아난다와도 안부를 나눴다. 쿠사누스의 화신체인 걸 보며 페리칸과 카이로는 무척 놀라워했다.
그들 셋을 바라보는 다른 이들의 시선은 놀라움과 반가움이 서로 교차했다.
레미레스야 워낙에 잘 알려져 있지만 설마하니 너무 강해 견제를 받아야 했던 전사 페리칸이 이 자리에 함께 오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거기다 거신족 또한 칠대부족의 하나이니 오죽 하겠는가. 정말 조금 전까지 위기의 자리였던가 싶게 분위기는 반전되어 있었다.
의외인 건 이런 분위기를 모두가 당연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딜타이 메르센스에게 큰소리 땅땅 쳤던 플로렌서도 주눅이 들어 말을 아끼는 처지였다. 앙상뜨의 애틋한 시선을 의식하며 라미네스가 파천의 옆에서 앞쪽으로 한 걸음 나섰다.
“이 떨거지들부터 해결하고 나서ㅓ 담소를 나누자.”
졸지에 떨거지로 전락한 세 파견자의 입 주의가 씰룩인다.
“아난다, 이것들의 정체는 뭔가? 못 보던 것들인데?”
“제왕의 파견자들입니다.”
“흐음, 잠자는 대지가 긴 긴 잠에서 깨어났나 보군. 배가 고프기도 하겠어. 그래서 뭐 처먹을게 없나, 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있는 거냐?”
“라미레스라고 했나? 말을 함부로 하는 구나.”
“내가 입바른 소리만 한다는 건 전 영계가 아는 일이고, 딱 한 번만 기회를 주지.”
“알아듣게 말해라.”
“원래는 내가 이렇게 자비로운 성품이 아닌데……. 날이 날이다 보니 오늘 딱 한 번만 너희 무례를 눈감아 주마. 그냥 여기서 꺼져라. 그럼 살려 주마.”
“허튼 소리.”
“난 길게 말하는 성격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의 기회를 준다. 어이, 거기 플로렌서 아니냐?”
“…….”
플로렌서는 눈을 크게 떴을 뿐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너도 여기 있었나? 얘네들이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은 데 네가 대신 설명해 주면 안 되겠나?”
“그건…….”
“그 동안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겠지?”
어느새 그의 관심은 플로렌서에게 머물러 있었다. 옆에 있던 딜타이는 눈도 맞추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저런 쯧쯧, 저 덜 익은 놈은 무엇 하러 데리고 다니나, 그래?”
“그 입을 다물게 해주겠다!”
파샤가 앞으로 나섰다.
그런 그를 멀뚱거리며 쳐다보던 라미레스. 기지개를 켜며 한 마디만을 했다.
“너 쿠사누스 이기냐?”
엉뚱하고 뜬금 없는 말에 어찌 대답해야 할지를 몰라 가만있는 파샤.
그를 라미레스가 닦달했다.
“못 이기지? 너희 셋이서 덤비면 쿠사누스 이겨?”
대답할 가치가 없는 질문이었다. 굳이 대답해야 한다면 그들은 모두 고개를 저을 것이다.
“예전 루시퍼와 제왕이 중간계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명목상 회담이었지. 너희들도 알고 있을 거야.”
“…….”
그것도 대답할 수 없었다. 물론 알고는 있었지만 대답하기엔 난처한 질문이었다. 마계와 회담을 한 것은 극비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루시퍼를 수행한 대마신 중의 하나가 나였다. 당시 제왕의 쿠사누스는 크로마용인가 크로마뇽인가 하는 놈이었다. 맞지?”
역시 묵묵부답.
“그놈이랑 대마신 하나가 대결을 했다. 그때 누가 깨졌는지 알지?” 왜 모르겠는가. 그 사건은 한동안 제왕의 대지 내를 떠들썩하게 했다. 다른 제왕들에게 그 일로 비웃음을 샀으며 쿠사누스 크로마뇽은 이후 고개도 들고 다니지 못했다.
“그때 그놈을 작살낸 게 바로 나다. 이제 감이 좀 오냐?”
세 파견자들은 얼마나 놀랬던지 그만 표정으로 라미레스가 한 말이 모두 사실임을 긍정하고야 말았다.
“그건 아주 오래된 일이지. 그 이후로 내가 얼마나 더 발전했을 것 같은가? 다시 충고하지. 그만들 꺼져라.”
“닥쳐! 그때 대마신의 이름은 라미레스가 아니라 바알세블이었다. 어디서 거짓을…….”
성질 급한 베네타가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다. 모두의 얼굴이 급변하는 가운데 라미레스가 다시 말했다.
“내 옛날 이름이 바로 바알세블이다. 제왕 세 놈이 여기 와 있다면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겠지. 너희는…… 아직 여기서 뻗대고 잘난 척하기엔 한참 모자란다.
난 될 수 있는 한 생명을 아끼고 어쩔 수 없을 경우엔 되도록 고통을 주지 않고 죽이려고 노력하는 성품이다. 물론 그것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지. 특히 너희들같이 주제 파악도 못하고 까부는 종자들을 보면 말야……. 몸이 부들부들 떨리며 주체할 수 없는 살욕으로…….“
“경망스런 자! 날 이기고 나서 잘난 척해라.”
파샤가 먼저 움직였다. 그의 홀에서 예의 그 벼락이 뿜어졌다. 그건 고스란히 한참 말하고 있던 라미레스를 때렸다. 막 말을 이어 가던 라미레스의 입꼬리가 꿈틀했다.
꽈꽝
졸지에 한대 얻어맞은 라미레스.
뒤이어 터진 천둥소리보다 더 큰 소리가 라미레스의 입에서 폭발했다.
“이 버릇없는 놈!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입을 때려?”
파샤는 굳어 있었다. 어찌 벼락을 무방비 상태로 얻어맞고 저리 멀쩡한 자가 있단 말인가. 이것 때문이었다.
“조심해, 파샤.”
마치 파리라도 때려잡듯이 라미레스의 손바닥이 허공을 휘저었다.
쩌적
피하고 자시고도 없었다. 부드럽게 날아든 손바닥은 가뿐하게 파샤의 얼굴을 왕복하고는 다시 본래의 위치로 돌아가 있었다. 파샤의 입가가 터졌다. 다른 데는 멀쩡했는데 입술만 터져 있었다.
“으으…….”
언제 움직였는지, 어느새 얼굴 위를 쓰다듬고 사라졌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번엔 그러지 마라. 다시 얘기하마. 어디까지 애기했었지? 딜타이!”
“살욕으로…… 까지.”
마치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던 위인처럼 빠르게 대답했다.
파천은 생각했다.
‘어찌 천마만 끼어들면 장난 비슷하게 판이 돌아가는 걸까? 이해할 수없는 일이야.’
조금 전까지의 긴장감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공포심이 지나치면 이렇게 되는 걸까? 분위기를 완전 장악해 놓고 나서 마음껏 주무르는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비록 그 행동에는 장난기가 가득했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결코 장난일 수 없었다.
“그러니 내 살심을 부추키면 매우 너저분하게, 추하게, 참혹하게 뒈지는 수가…….”
“이놈!”
세 파견자가 동시에 움직였다. 그들간에 약속이 되었는지 그들의 전신에서 폭풍이 몰아치는 듯한 기운이 회오리치며 라미레스를 가둬 버렸다. 그 속에서 라미레스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있단 말이다. 이렇게.”
푸확
붉은 한 송이 장미가 피었는가? 아니었다. 세상을 온통 빨갛게 적실 듯한 붉디붉은 빛이었다. 새하얀 천을 적셔 가듯 붉은 빛이 다른 빛들을 물들였다.
꽈꽈꽈꽝
“끄억.”
“으흑.”
“으음.”
각기 다른 세 방향에서 제각기 다른 느낌을 주는 신음성이 아주 조그맣게 흘러 나왔다.
세 파견자들은 곧바로 위로 솟구쳐 올랐다. 뒤이어지는 공격을 대비해서다. 그런데 라미레스에게서는 다른 공격이 펼쳐지지 않았다.
“소심하긴. 그리 겁이 나면 잠깐 치욕을 당하고 말 것이지. 도망가는 것도 싸우는 방법 중의 하나란 걸 모르다니. 실패자의 특징 중 하나가 융통성이 없다는 거야. 응용력이 떨어지니 변화무쌍한 상황에 대처할 줄 모른단 말이야. 애처로운 것들.”
파팟
이번엔 라미레스가 튀어 올랐다. 그렇게 모두에게 비춰졌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다. 무리 중에서 한참이나 벗어나 허공중에 떠 있던 세 파견자들은 잔뜩 긴장한 채 준비하고 있었는데 아무런 변화도 없자 한동안 멀뚱거리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간이 있으면 너희들을 깨우쳐 주고 싶은데 아쉽게도 내겐 그런 여유가 없구나.”
위였다. 그들의 얼굴이 굳었다.
“어찌…….”
클라인은 그제야 조금 전 라미레스가 한 말을 믿을 수 있게 되었다. 바알세불이 바로 그란 걸 알게 된 것이다.
‘이런 바보 같은 짓을!’
라미네스의 한 손이 활짝 펼쳐져 있었다. 세 파견자들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움직이는 순간 적의 공격이 자신들을 꿰뚫을 것이란 것을.
“초조하지? 아마도 그럴 거야. 내말 잘 들어라. 마지막 말이니까 경청해야 할 거야. 다시 태어나거든 장소와 상대를 가려가며 설치거라. 그래야 오래 산다.”
“으으…….”
파견자들의 눈길이 서로를 찾았다.
[알려야 한다. 라미레스가 바알세블임을. 잘못하면 파견자들 모두가 이 자에게 당하게 된다.]
[그런데 누가?]
[하나라도 살아야 한다. 찢어져.]
그들은 세 방향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움직였다. 그들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였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날았다. 파샤도, 클라인도, 베네타도 잠시 뒤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그들이 생각한 건 똑 같았다.
‘내가 살았구나.’
그러나 그런 판단은 아직 시기상조였다.
번쩍
소리도 압력도 없었다. 그저 흔하게 볼 수 있는 발광이었다. 그런데 위력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빛은 그저 비추기만 한 게 아니었다. 빛이 도달한 순간 그들은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얼굴에 미소를 띤 채였다.
라미레스가 아래쪽으로 내려왔다. 떨어져 내리던 파견자들의 영체들이 중간에서 흩어지는 게 그의 등 뒤로 보였다. 갈라지고 부서지더니 급기야 티끌이 되어 허공중으로 사라진다. 허무한 죽음이었다. 파천은 제 눈으로 본 것을 믿을 수없다는 표정이 되고 만다.
‘말도 안 되게…… 강하다.’
라미레스의 얼굴이 천천히 굳었다. 그는 플로렌스를 차가운 시선으로 훑어 내렸다.
“플로렌서.”
“말…… 해라.”
“너희가 당당해진 게 겨우 저들 때문이었다니……. 실망이 크군. 뭔가 대단한 걸 가지고 올 거라 생각했는데 내 기대가 너무 컸던가?”
플로렌서는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예전보다 더 강해졌다. 아니, 이제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그녀의 판단은 정확했다.
“묻겠다.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나?”
“비행선을…… 퇴각시키겠다.”
“흐음, 그건 너무 심한 것 같군. 비행선은 두고 너희들만 가라.”
딜타이는 이게 웬 횡재냐 싶었다. 살려 준다고 하지 않는가. 별일이 다 있다 싶었다.
“헤브론들은 들어라. 너희는 지금 즉시 해산해 여길 떠나거라.”
파천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을 해산시켜 보았자 다시 뭉칠 건 뻔했다.
“대신 강남이 아닌 강북으로 가라. 유일한 너희 살 길이다.”
다른 형태의 사형선고였다. 강북 다시 말해 무한계 중부권은 전사들의 세상이다. 그곳에 간다면 죽음을 면키 어렵게 된다. 전사들을 핍박하고 죽인 것으로 알려졌으니 거친 중부권 전사들이 헤브론들을 내버려 둘 리가 만무했다.
그냥 죽이는 것보다 더 잔인한 짓이었다. 솔직히 이러나 저러나 죽는 건 마찬가지니 한 번 싸워 볼까, 라고 생각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당장의 죽음보다는 한 가닥 살 희망을 선택하는 자들이 훨씬 많았다.
그들은 플로렌서의 눈치도 살피지 않고 부리나케 강북을 향해 몸을 날렸다. 행여나 라미레스의 마음이 변할까 두려워하면서.
“플로렌서, 욕심이 과하면 추해진다. 적당히 향유할 줄 알아야 한다. 만족. 이걸 너희들은 먼저 배워라. 다시 만나게 되지 않기를 빌마. 그때는 나도 나 자신을 추하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가라.”
플로렌서는 이대로 한마디 반박도 하지 못하고 물러서야 하는 게 억울하고 분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최소한 어리석지는 않았다. 무모히 대항하다 모든 걸 잃는 것 보다는 잠시의 고통은 따르겠지만 패배를 인정하는 게 백 번 유익이었다. 다시 기회를 얻게 되지 않는가. 다음 번에 설욕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플로렌서는 잘 알고 있었다.
‘내 능력으로는 결코 뛰어 넘을 수 없는 자. 그대를 저주한다.’
“두고 봐라. 본진이 도착하면 너희 또한 무사하지 못할 테니.”
“날 앞으로 다시 만나기는 힘들 거야. 다시 만나는 순간이 너희들의 마지막임을…… 항시 잊지 마라.”
플로렌서와 딜타이와 메르센느와 용병들이 떠났다. 거대한 비행선을 버려 두고 강남을 향해 떠난 것이다. 그들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뛰어 넘을 수 없는 라미레스란 벽은 생각보다도 더 높고 큰 것임을 뼛속 깊이 절감해야만 했다.
파천은 일련의 사건들을 지켜보며 절실히 느낀 것이 있었다.
‘이것이 영계의 진면목인가? 일부의 절대자들에 의해 보든 건 결정된다고 했던 말이 이제야 실감이 나는구나. 어쩌면 영계 대전쟁은……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파천은 새로운 희망을 보고 있었다. 모두의 싸움이 아닌 일부의 대결로 압축해 나갈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그때 라미레스의 고개가 북쪽으로 향했다. 그는 한참이나 그 상태로 있었다. 마치 먼데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기울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라미레스의 때맞춘 출현으로 선발대는 별 탈 없이 위기를 넘겼다. 그것이 기뻐서였을까, 아니면 당분간은 위험이 없을 것이란 것 때문이었을까. 모두의 얼굴이 상당히 밝아져 있었다. 그들 모두가 비행선의 갑판으로 날아 내렸다.
라미레스의 출현은 전사들에게도 반가운 일이었다.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던 전사들이 비행선으로 날아올랐다.
그들 중 선두에 서 있던 슐츠가 반갑게 대했다.
“오랜 만이로군요.”
“어, 자네 슐츠가 아닌가? 유클릿은 잘 지내나?”
“네, 형님은 별 탈 없이 지내십니다.”
“그렇겠지. 그런데 듣자하니 전사들의 연합기구가 만들어진다며?”
“소식을 들으셨군요.”
“메덴이 한 헛소리는 잊어 버리게.”
“네?” “치앙마, 그놈이 정신이 나가서 그래. 메덴과 전사단이 싸우게 되면 좋아할 놈들 많을 거야. 그러니 서로가 자중하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요. 제 생각도 그렇지만 메덴에서는…….”
“아, 글쎄 잊어버리라니까. 전사연합기구 창설에 나도 지지를 보내지.”
“감사합니다.”
전사들의 얼굴이 한껏 밝아졌다. 초강자 중의 하나가 고작 지지한다는 말 한마디를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건 조금 의외였다. 라미레스는 치앙마와의 약속을 벌써 잊어버린 것이란 말인가. 전사들이 연합하는 걸 저지시켜 달라는 요구를 라미레스가 승낙하지 않았던가. 무슨 속셈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어디서 회합을 가지기로 했나?”
“하룬에서 모이기로 했습니다.”
“왜 하필이면 하룬이지?” “무슨 말씀이신지.”
“그곳은 칠대부족이 자주 왕래하는 곳이지 않던가? 카란이 머물렀던 페이룬트가 슈메르와 더불어 그들의 성지 중 하나임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괜히 그들과 충돌을 일으킬 수도 있을 텐데 왜 굳이 그곳을 택했느냐는 것일세.”
“지리적으로 그곳이 중부권위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흐음, 제발 그렇길 바라네. 그건 그렇고 자네들 전사들에게 한 가지 물어 볼 것이 있어.”
“말씀하십시요.”
“자네들은 선발대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할 셈인가?”
“그건…… 저로서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아닌 듯 합니다.”
“공식적인 입장은 자네로서도 알 수 없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충고 하나 하지. 이왕이면 서로 얼굴 붉히면서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선발대의 앞을 가로박지 마라, 라는 엄중한 경고였다. 슐츠는 몸을 움찔 떨었다.
“단주님들께…… 그렇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이만 가보시게들.”
“네, 그럼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슐츠는 떠나며 슬쩍 페리칸을 다시 돌아보았다. 전사지만 전사들과 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페리칸을 슐츠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너무 강해 견제받아야만 했던 비운의 전사.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남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그들은 루하스강을 건너 전사들을 수습해서 다시 강을 건넜다. 그들은 하룬까지 직행할 것이라 했다.
비행선은 텅텅 비게 되었다. 일부 감옥에 갇혀 있던 노예들까지 모조리 석방시킨 뒤라 파천의 일행만이 머물게 된 것이다. 그냥 길을 가자고 했지만 라미네스의 생각은 좀 다른 것 같았다.
“여기서 머물며 좀 정리를 하고 가자. 이보다 더 좋은 휴식처가 어디 있겠어?”
“무얼 정리하자는 거지?”
“선발대에 대해서 나눌 얘기들이 좀 있어.”
파천과 아난다, 라미레스, 페리칸, 카이로, 도나투스, 아레나, 앙샹뜨, 권터, 라치오와 동료들, 포로로 잡혔던 나머지 선발대원들이 모두 함께 한 자리였다. 거기에는 풀죽은 브라함과 페드로도 함께 있었다. 라미네스가 대화를 주도해 나갔다.
“거기, 너!”
“저 말입니까?”
라치오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너. 너는 여기 있을 자격이 없다. 좀 나가 있겠나?”
선발대가 아니니 나가라는 말이었다. 따지고 보면 앙상뜨나 도나투스, 브라함과 페드로도 관련이 없기는 매 한가지였다. 그럼에도 그가 라치오 일행만을 지목한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였다. 그들이 대전을 나가고 나자 그제야 라미네스가 입을 열었다.
“저 녀석은 왜 데리고 다니는 거지?”
아난다에게 한 질문이었다. 아난다는 그간의 사정을 간략하게 설명했고 라미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나쁜 놈은 아니군. 그런데 내 느낌은 그렇지가 않단 말이야. 특히 라치오란 놈. 그 놈은 볼수록 묘한 놈이야. 감추고 있는 게 많은 그런 부류의 영자야.”
“저도 그렇게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특별히 해가 될게 없기 때문에 허락한 것입니다.”
“흐음, 대충 넘어가지.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선발대를 이 상태로 유지할 것인가의 부분이다.”
돌발적인 발언이었다. 아직 상처가 채 낫지 않은 네 명의 영자는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무슨 뜻입니까?” 의미를 이해했지만 모른 척하며 되묻는 아난다를 라미레스는 빤히 바라본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지. 수호자의 안배라서 안 된다는 말이면 집어치워. 괘한 희생은 자신들을 위해서나 선발대 전체를 위해서도 좋지 않아. 더 알아듣기 쉽게 얘기 할까? 스스로 생각할 때 작은 도움이나마 된다고 생각하면 남고, 그렇지 않으면 당장 돌아가는 게 좋아.”
아레나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그 동안은 그다지 크게 마음에 부딪히는 부분이 없어서 가만있었지만 지금 한말은 너부 심하다고 생각되었다. 아무리 명성에 짓눌려 있다지만 가만히 듣고 있을 아레나가 아니었다.
“너무 심하시군요.”
라미레스가 아레나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뭐가?”
“그렇게 말할 자격은 그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이제 와서 짐밖에 안 되니 꺼져라, 라고 말하는 건 저로선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들은 라미레스 님보다 더 일찍부터 선발대 일원으로서의 책무를 다해 왔습니다.”
“그럼 어떻게 말할까? 우리 힘들지만 조금만 더 참고 잘해 보자고 할까? 까짓 죽기밖에 더 하겠냐고 할까? 아레나…… 라고 했던가? 이건 우리가 당면한 현실이야.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조금만 우리가 늦었어도 선발대의 여정은 여기서 멈췄어야만 했다.
이 실력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은가? 선발대의 임무는 파천을 무한계 끝까지 보호하는 것이다. 그가 제 힘으로 모든 걸 처리 할 수 있을 때까지 그의 곁에서 힘이 되어 주는 것이란 말이다.
난 이해할 수 없다. 왜 수호자, 그 잘난 인물이 선발대를 이딴 식으로 밖에 못 짰는지를 말야. 옆에 있다면 물어 보고 싶어. 짐이 된다는 건 여정이 더뎌진다는 이유 외에 또 하나의 문제점을 안고 있지.
그게 뭔지 아는가? 전체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피해 갈 수 있는 위험을 모조리 맞닥뜨리며 가야 한다는 점이야. 때로 그 잘난 동지애 때문에 다른 이가, 그러지 않아도 될 이가 생목숨을 헌납해야 할지도 모른단 말이다. 알겠나? 아직도 모르겠어?“
“압니다. 충분히 알아요. 그렇지만 어떻게 모두가 있는데서 그렇게 매몰차게 말씀하실 수가 있죠?”
“그러니까 자네의 항의는 내 태도에 대한 부분이었군. 진작에 그렇게 얘기하지. 앞으로 내 태도를 바꿀 테니 선발대를 재조정하지. 더 이상 다른 의견은 없겠지?”
아무도 이견을 내놓지 못했다. 단순히 기세에 눌린 것만은 아니었다. 감정적으로야 동의할 수 없었지만 따져 보면 그의 말에 틀린 구석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파천이 조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천마, 네 말이 모두 맞다. 하나도 틀리지 않아. 그럼 이렇게 물어 보겠네.”
천마교의 수하들 중에 상대적으로 약한 자들이 있어. 그들이 마계에 복수를 다짐하며 우리를 찾아 왔어. 그는 능력이 떨어져서 아무런 도움도 안 돼. 그는 거치적거리고 짐이 될 뿐이야. 때론 도모하는 일을 망쳐놓기 일쑤지. 그럼 자네는 그를 ‘넌 능력이 달리니 복수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그만 꺼져’라고 말할 수 있겠나?
모두를 하나로 이어 주는 건 함께 공유하고 있는 동일한 의지야. 같이 겪고 같이 헤쳐나갔던 그 시간들이고 기억들이야. 그들이 능력이 없건 어디 한 군데 모자라건, 매번 실수를 해 우리를 당황시킨다고 해도 그들이 모두 동지고 우리가 감당해야 할 부분이야.
좀 부족하면 어떤가. 능력이 뛰어난 자네 같은 이가 채워주면 되는 거지. 선발대도 마찬가지야. 내 생각엔 변함이 없네. 우리가 함께여야 할 이유가 분명히 있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또 어떤가. 서로가 내놓은 건 똑같은 가치야. 자기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생명들을 바쳤지 않은가.
그것이 가벼운 것이던가? 그거면 충분한 거지.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나. 우리끼리 만이라도 그런 걸로 서로를 구분짓지 말았으면 좋겠어. 어떤가, 내 생각이?“
라미레스는 할 말이 없었다.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파천의 눈을 들여다보며 차마 그 말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흐흠, 그러지. 네가 그렇게 말하는데…… 내가 반대할 입장은 아니군.”
라미레스는 역시나 파천에게는 약한 면모를 보였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파천이 한 말이 어느 정도는 마음에 와 닿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솔직히 지금도 현 선발대의 진용이 그리 탐탁치는 않았다.
“다른 이야기가 없다면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으면 하는데.”
중부권의 초입에 선발대는 위치하고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전 지역이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위험지역이라 할 수 있었다.
그간에는 주로 지나치는 매소만을 주의하면 되었다. 그렇지만 중부권의 사정은 전혀 다르다. 전사단의 활동 범위가 전 중부권에 걸쳐 있으며 제각기 입장 차이가 있다.
전사평의회가 정식으로 발족되고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한다 해도 그전 표면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기구가 진실로 중부권의 전체 전사들을 제한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건 너무도 순진한 생각이었다.
게다가 그들 말고도 위험 요소는 얼마든지 있었다. 칠대부족과 수련자들, 특색있는 다양한 부족들, 다른 차원계에서 비밀리에 파견되어 은밀히 활동하고 있는 자들까지. 어떤 위험이 앞길에 도사리고 있을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라미레스와 페리칸, 카이로가 가담한 건 선발대의 전력이 급상승한 걸 의미했다. 그런 점에서 예전보다는 상대적으로 안전이 확보된 셈이다. 그렇지만 마음을 놓을 수만도 없는 게 현 중부권의 상황이었다. 아난다가 이런 점을 강조하며 모두에게 다시 한 번 주의를 주었다.
“앞으로 우리가 거칠 곳은 중부권을 종으로 가르는 선로입니다. 그 가운데는 매소 하룬도 포함됩니다. 무한계 북부권으로 넘어가기 전까지는 단 한시도 마은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아난다, 계획을 수정하자.”
“어떻게…… 말입니까?”
“모든 곳을 거칠 필요는 없다. 수호자의 안배는 현실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아. 그가 지금의 복잡한 상황까지 미리 염두에 두었다고 볼 수는 없어. 제왕의 파견자들이 생각보다 빨리 도착한 것 하며 대적자들과 손을 잡은 것도 고려되지 않았다.
우리의 예상을 깨는 일들은 도처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질 것이다. 그러니 수호자의 안배는 지금부터 무시한다. 상황에 따라 가장 적절한 조치를 취하여 전진한다.“
“그렇지만…….”
“그리고 이참에 모두들 알아 두어야 할 게 있다. 일반 영자들은 말 할 것도 없고 선발대원 모두가 모르는 사실들이 많다. 일부의 소수 영자들만이 알고 있는 정보들을…… 나는 이 자리에서 공개하고자 한다.”
“그건 안 될 일입니다. 어찌 그런 무모한…….”
“그만, 아난다. 어차피 알려질 일이다. 모든 걸 알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알아 둬서 나쁠 것도 없다. 더군다나 이들은 수호자에 의해 안배되었기에 당연히 알아야 할 권리가 있다. 물론 내 얘기를 듣고 나서 혼란 중에 빠져드는 이들도 있겠지.
그건 스스로 이겨내라.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들은 모두 사실임을 먼저 밝혀 두겠다.“
파천은 라미레스의 태도에서 대단한 폭탄선언이라도 하려는 듯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아난다의 표정은 그 짧은 순간에도 시시각각으로 변화를 보였다.
“알아야 합니다. 감춘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카이로는 한 술 더 뜨며 그간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는 투로 말했다.
“저도 이번에야 알게 되었습니다만 이건 정말…… 해도 너무했다는 생각뿐입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저들이 저럴까. 모두의 생각이었다. 아난다는 라미레스에게 집중되어 있는 시선들에 호기심이 가득한 걸 보고 한숨을 흘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란 말인가? 파천 님이 감당해내실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그가 가장 염려되는 건 파천이 받을 심중의 충격이었다. 어차피 현실적으로 달라질 것은 없는데 갈등으로 인해 선택의 혼란을 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건 다른 영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부분이지만 받아들일 비중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이 얘기를 하자면 제일 먼저 생명수와 광명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생명수가 무언지 설명할 수 있는 자가 있나?”
앙샹뜨가 대답했다.
“생명수라면 천궁의 입구에 자리한다는 여래장의 지류가 아닙니까? 무한계 북부를 벗어나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중간계가 있고, 그곳 어딘가에 생명의 뜰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들었습니다.
그 정상에 여래장에서 시작된 생명수가 흐르고 그 가운데에 생명나무가 자라고 있지요. 그 위의 허공을 여래장이라 부릅니다. 천궁은 그곳을 통해서만 왕래할 수 있다고…….“
“비교적 정확하게 알고 있군. 그 생명수는 정해진 곳을 흐르지 않는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며 그 변화는…… 영계의 운명과 직결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생명수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면 영계의 운명도 더불어 예견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것만이 아니다. 생명수는 우주에 존재하는 전 생명체의 의식에 은연중 영향을 미친다. 현재의 영계에 이러한 혼란이 야기된 것도 따지고 보면 생명수의 흐름이 급작스럽게 변화했기 때문이다. 그 변화를 원한 자들이 있었다. 메타트론이 생명수의 줄기를 바꿔놨고 그걸 천궁에서 묵인했다.“
“그 말은?”
“어찌 보면 모두 한통속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그들은 영계와 영자들의 운명을 통해 무엇인가를 증명해 보이려 하고 있다. 그것이 정확하게 무언지 왜 그들이 그런 짓을 해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짐작만 할 뿐이다.
어쨌든 메타트론이 생명수의 지류를 바꿔놨다는 점과 그것이 고스란히 영자들에게 직접,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다.
메타트론은 우주에서 신을 제외하고 가장 강한 자다. 그건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야. 그런 그가 원하는 건 단 하나. 신의 완전성에 흠집을 내 현 체계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가 영자들을 지배하려고 한다고 생각지 마라. 그는 그 정도로 작은 그릇이 아니다.
자,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신은 그걸 용납할 수 없게 된 거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들은 서로 간에 직접적인 대결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서로의 견해를 비교해 보고 무엇이 진실이고 진리인지를 가려내길 원하는 거지.
졸지에 우리는 시험장에 던져졌고 그들의 만족을 위해 시험받는 입장이 되고 만 것이다. 그들의 방법,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단지 그렇게만 말씀하실 수는 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아난다가 끼어들자 라미레스가 웃었다.
“너는 아직까지도 수호자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어. 그는 환상과 같은 존재. 그는 신의 대리자도 아니며 우리를 해방시켜 줄 구세주도 아니다.”
“지금으로서는 그 이외의 대안이 없습니다.”
“그래서 너를 비롯한 네 친구들이 그런 비극을 겪어야 했던가!”
“그건…… 그만의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욕심이.”
“아니, 그건 예견된 일이었어. 수호자는 그 모든 걸 알고 있었어. 그렇게 되리라는 걸 말야. 그래도 너는 수호자를 두둔할 셈인가?”
“제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아난다의 단호한 뜻을 재삼 확인하자 라미레스는 더 이상 그 부분에 대한 언급을 피했다.
“그런데 우주에는 그들만 있는 게 아니었어. 스스로 존재하는 자들. 그들이 누눌까?”
“신과 같은 존재들이냐?”
파천이 지금까지 품어 오던 의문이기도 했다.
“그 말이 맞을 수도, 아닐 수도 있어. 단지 내가 알고 있는 건 그들 또한 세상 밖의 존재들이란 거지. 생명수의 지류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소멸도 심판도 없이 말 그대로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자들. 신의 간섭에서 자유로운 자들이다. 그들이 신과 메타트론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복잡하군.”
“그래 복잡해졌지. 메타트론이 제일 먼저 한 건 새로운 형태의 영계를 만들어내는 일이었어. 그들은 신에게 가장 복종을 잘 하던 자들을 대상으로 삼았어. 그곳이 바로 제왕의 대지들이다. 그의 명분은 지극히 정당했다. 제왕의 지배에서 노예와 같은 지위를 지니고 있던 영자들을 해방시킨 거야. 그게 현 영계의 탄생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수호자, 그가 메타트론의 일을 사사건건 방해하고 나선거지. 메테우스를 충돌질해 천상계를 분열시킨 것도 그였으며, 결국엔 독립해 무한계를 열게 만든 것도 그였다.
그것뿐만이 아냐. 귀계와 선계가 천상계에서 분리될 때도 그의 역할은 지대한 것이었어. 그가 원하는 게 무엇일까. 그건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메테우스는 어느 날 생각하게 되었다. 진실의 실체가 궁금했던 거지. 수호자의 눈을 피해 그가 목적지로 삼은 곳이 바로 망각의 강 너머였다. 지금은 메테우스의 강이라 불리지. 그는 수호자의 그늘을 스스로 벗어난 거야. 그는 그곳을 가게 되면 모든 걸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된 거야. 그 다음부터는 너희들도 익히 아는 영계의 역사다.“
“그리 충격적인 것도 없는데.”
“이야기는 지금부터야. 이면의 이야기들. 숨겨져야만 했던 이야기들이 있었어. 영체소멸과 기억소멸. 이건 원래부터 있던 게 아니었다. 적어도 메타트론과 신의 대립이 있기 전만해도 이런 저주의 제약은 없었어.
모든 영혼들은 광명세에 존재했으며, 그들은 처음부터 완전자였다.“
이 부분은 모두에게 조금은 충격을 던져 주었다.
“그런 그들이 완전자의 세계에서 내던져지게 된 거야. 무수히 많은 차원들이 생겨나고 영자들의 기억은 제한되었지. 그 이후부터 여래장에서의 공급이 미약해지자 지혜가 묻혀지고 점차 생명이 짧아지게 된 건 필연이었다. 영체소멸과 기억소멸을 천형으로 지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수호자가 몇 명의 수련자를 찾았다. 그는 말했어. 기억소멸과 영체소멸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며, 그 비밀을 간직한 곳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어.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어. 놀랍게도 그가 말한 게 바로 잠자는 대지, 제왕의 유물들이었다.
제왕들은 그걸 누구에게서 전해 받았을까? 내 생각에는 수호자거나 메타트론 둘 중 하나겠지. 그건 반란의 성공과 함께 영계에 스며들어 왔고 다시 일부 수련자와 천상계의 천주들에게 알려졌다.
비극의 시작이었어. 그들 중에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기억소멸을 극복한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이 원하는 건 영체소멸까지 극복하는 것이었지. 그들은 보물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그들 중에는 나도 있었고 여기 있는 아난다도 있었다.“
그랬던가? 파천은 아난다를 쳐다보았다. 아난다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쟁탈전에 참여한 자들 중 그 누구도 이 사실이 일반 영자들에게 알려지는 걸 원치 않았어. 비밀리에 싸움이 시작되었지.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가 이익 앞에서는 너무도 약한 모습들을 보이더군.
욕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동지와 친구를 배반하고 서로를 죽이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어. 드러나진 않았지만 그 때의 사건으로 영계는 사실상 분열되고 말았던 거야.
메타트론과 수호자는 적이면서 때로는 적이 아니다. 지금부터는 내 생각을 말하지. 메타트론은 제왕에게서 영자들을 해방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지만 다시 공간을 비틀어 그들을 무한계에 들어오게 했다. 마계를 통해 영계를 혼란으로 몰아넣으려 하는 한편으로 영자들을 해방시키겠다고 한다.
수호자도 마찬가지야. 천상계로 통일되어 있던 영계를 분열시킨 배후 조종자면서 영계의 평화를 지켜오는 수호자를 자처한다. 제왕의 유물을 통해 서로간에 분열을 부추겼으면서 이제는 선발대응 통해 서로의 일치를 끌어내려 한다.
대적자들에게 지혜를 가르친 이도 그며 천상천의 한 천주를 통해 날 마계에서 이끌어낸 것도 그다. 일곱별을 안배하고 선발대를 안배하고 거의 완전자에 이른 자들을 유혹해 스스로를 봉인시키게 만든 것도 그다. 지금에 와서 그의 안배가 집중되어 있는 건 파천 바로 너. 널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과 앞으로 일어날 일도 모두 그의 안배에 의해서다.
영계는 각양각색의 영자들이 뒤엉켜 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신과 메타트론과 수호자가 스스로 존재하는 자들의 대리전에 불과하다. 그들의 뜻에 의해 우리 모두는……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었던 거야.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은 어딘가에서 새로운 일들을 꾸미고 실행하고 있다. 단지 우리에게 주어진 건 선택일 따름이야. 최후의 승리를 안겨 줄 단 하나를 선택해야 한단 말이다.“
‘꼭두각시……. 내가 수호자의 꼭두각시라고?’
파천은 그 말에 충격을 받았다. 라미레스가 파천을 측은한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건 아난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런데 왜 넌 지금까지도 수호자의 뜻을 따르고 있는 거지?
왜 내 곁으로 다시 돌아왔느냐고 묻고 있었다.
파천의 물음에 라미레스가 대답했다.
“너의 전생을 누구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 이유가 뭘까? 전생이 없는 영자는 단 하나도 없다. 결론은 수호자가 네게 무슨 수작인가를 했다는 것을 의미하겠지. 그렇지 않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널 통해 그가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지……. 난 그것이 너무 궁금하다. 네 곁으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야. 난 결말을 내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고 싶었어.
그리고…… 난 널 지금까지 친구로 생각한다. 널 지켜주고 싶었다. 이건 진심이다.“
‘네가 수호자에게 이용당하게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파천, 난 다시 돌아올 수밨에 없었어.’
모두는 침묵했다. 아무도 입을 열려하지 않았다. 무슨 말이든 쉽게 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럼 천마 네 말은 인간계의 멸망도 단지 그들간의 대립에 희생당한, 큰 줄기 가운데 어떤 과정의 일부로만 여겨지는…… 그런 하찮은 것인가?”
“그건 아니다. 인간계의 역할은 신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곳을 통해 영격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게 한 거지. 완전자를 배출하고 그것을 보며 영자들은 희망을 품고 영격수련에 매진할 수 있었다. 나도 노력하면 언젠가는 완전자가 되어 광명세에 들 수 있다는 희망. 그것이 이제는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왜 신은 침묵하는 거지? 왜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었냐는 말이다. 네 말을 난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겠지요.”
아난다의 말에 라미레스는 동의할 수 없었다.
“다시 만들면 되니까. 신에게 인간계의 멸망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끝이 아니거든. 영혼은 소멸 당하지 않으니까. 그 간의 아픔이 오히려 성숙시키게 만든다고 믿으니까. 결과적으로 모든 영혼들이 다시 광명세로 들게 될 거라는 믿음. 스스로의 개입이 없이도 결국은 모두가 자신의 품으로 돌아올 거라는 단순한 믿음. 이것이 신의 유일한 의지며 우리를 향한 대답이다.
그걸 방해하고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는 게, 영자들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신의 오만에서 비극은 시작되었고 결국은 신은 홀로 될 수밖에 없다는 걸 증명하려는 게 메타트론이다.
수호자는 신의 뜻에 따라 일을 처결하는 듯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들은, 글쎄…… 모르겠다.“
라미네스는 그 외에도 많은 얘기들을 했다. 제왕의 검을 비롯한 유물들은 실상 광명과 동일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들이며 그런 이유로 여래장과 생명수의 기운을 통해 만들어졌다는 걸 의미한다고 했다.
이런 걸 따져 볼 때 제왕들에게 보물을 안겨 준 이는 천궁이거나 그들의 승낙을 받은 메타트론이나 수호자라는 결론이 난다고 했다.
거슬러 올라가면 지금껏 있어 왔던 영계의 사건들과 인간계의 멸망, 앞으로 일어날 대혼란조차 신의 묵인과 수호자의 개입이 있지 않고서는 설명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파천은 머리 한쪽이 뻥 뚫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정신은 멍해지고 어떤 생각도 이어 갈 수가 없었다. 단절된 단상들은 서로 이어 지지 못하고 머릿속을 맴돌다 흩어져 갔다. 마치 근 미래의 자신을 보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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