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37화 : 메테우스의 석탑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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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검 – 137화 : 메테우스의 석탑을 향하여


메테우스의 석탑을 향하여

라미레스와 파천은 곧바로 메테우스의 강이 흐르는 금역으로 향했다.
파천은 은근히 가슴이 떨리는 걸 억제치 못했다. 메티우스에 대한 존경을 넘은 경외감은 단지 수련자들에 국환 된 것만이 아니었다. 무한계의 영자들이라면 적든 크든 그이 영향을 받았고,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를 정신적으로 스승으로 여기고 있다.
무한계의 시초를 열었고,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가르쳤으며, 몸소 수련자의 이상적인삶을 살아 보인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만약 그가 망각의 강을 건너지 않고 카란을 비롯한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지금까지 무한계를이끌고 있었다면 마계가 기금과 같은 과욕은 부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무한계가 여러 부류의 흐름으로 나눠지고 고착되어 이런 혼란의 시기를 겪는 건 그와 같은 같은 역할을 지닌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어떤 이도메테우스가 남긴 빈자리를 채울 수 없었다.
“네가 본 메테우스는 어떤 영자였지?”
파천의 물음은 진지했다. 라미레스가 잠시 생가에 잠기더니 어렵게 말을 이었다.
“그는……마계가 가장 껄끄러워하던 둘 중에 하나였어. 하나는 수호자, 그렇지만 그는 실제조차 분명치 않은 숨은 거인이었던데 비해 메테우스는 눈앞에 버티고 있는 가시 같은 자였지.
루시퍼가 자주 하던 말이 있어. 그가 있음으로 해서 무한계는 영계의 중신이 된다. 그가 있는 한 우리와 그들은 싸울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는 묘한 존재였어. 희망을 전염시키는 인물. 그 어떤 어려움에 부닥쳐도그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희망을 품을 수 있게 하는 존재. 그를 따르던 이들에게 뿌듯한 자부심과 긍지를 심어 줬어.
루시퍼는 두려움으로 통치하지만 그는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했다. 그런 그가 사라진 무한계는 ……. 그래서 더 혼란스러운 거야. 그의 그림자가 너무도 컸기에.”
여러모로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영자였다. 파천은 그가 무한계가 가장 큰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돌아온다고 했다 그때 카란자신도 함께 돌아올 것이라 했다고 한다.
“과연 그가 돌아올 수있을까?”
“모르지. 어쩌면 완전장의 세상으로 간 건지도 모르지. 다시는 돌아올 수없는 세상으로 말야.”
둘은 그런 대화를 나누며 지금은 메테우스의 강으로 불리는 망각의 강가로 다가갔다.
파천은 처음으로 대지가 끝나는 지점을 보았다. 그리고 저 멀리 거대한 구렁이가 꿈틀거리는 것 같은 강이 은밀함 가운데 흐르고 있는 게 시야에 잡혔다.
그 앞에 보이는 석탑을 라미레스가 손끝으로 가리켰다.
“저곳이 메테우스의 석탑이다. 자, 가자, 파천.”
라미레스와 파천은 메테우스의 석탑 앞에 섰다.
석탑은 총 11개 층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한 개 층이 아홉 자에약간 못 미치는 크기였으니
당히 큰 대탑이라 할만 했다.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보이지 않는다. 라미레스가 손에 쥔 세 개의 붉고 푸르고 누런 구슬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날 따라와라.”
라미레스가 향한 곳은 석탑의 꼭대기였다. 탑의 윗부분은 다른 곳과는 달리 반들반들하게 윤이 나 있었다. 수련자들이 앉았던 흔적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원래와는 다르게 변색된 것같았다. 그 주위로 세 개의 흠이 보였다.
라미레스는 망설이지 않고 구슬들을 흠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르르르릉
탑의 윗부분이 새 등분으로 나눠지며 돌이 서로 부딪히는 마찰음이 한동안 이어 졌다. 맞물려 입다문 꽃봉오리가 활짝 만개하는 듯 한 전경이었다.
“이곳이 입구인가?”
“왜, 의외냐?”
둘은 안으로 들어섰다. 활짝 열린 공간은 그들이 들어섬을 감지하기라도 한 듯 저절로 입을 오므리며 닫혀 버린다.
파천은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본 적도 없는 희귀한 보석이 사방 벽 모서리 쪽에 가득박혀 있어 안은 광휘로운 빛 무리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벽면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 벽화는 정교하기 그지없는 찬탄을 금할 수 없게 했다. 인물의 머리칼 한 올마저 표현해 놓았을 정도로 세밀했다. 루딘족의 비행매소와 루하스 강의 비행선에서 보았던 바로 그 그림이었다.
“역시 그 두 그림은이곳의 일부분이었군.”
파천과 라미레스는 허공에 떠서 천천히 하강하며 벽면의 그림을 감상했다. 그런데 파천은 놀라운 걸 발견했다.
“이, 이것 좀 이상한데?”
라미레스는 파천이 왜 그런 반응을 나타내는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방긋 웃었다.
“그림이 자꾸 변하지?”
“그래, 어떻게 이런 일이…….”
“보는 각도에 따라 형태가 달라져. 우리가 천천히 내려가고 있으니 다르게 보이는 거다.”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 벽에 새겨진 조각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같았다. 치열한 전쟁터에 들어와 있는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귀를 종긋 세우고 들으면 금방이라도 함성과 비명소리가 함께 들려 올 것 만 같았다.
하나에 집중해 보니 얼굴의 표정도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지 않은가! 배에 칼을 꽂은 이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지는 것을 파천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정말……대……단하다.”
너무도 생생해 실제로 살아있는 자들을 벽안에 가둬 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바닥에 내려진 파천은 주변부터 살폈다.
바닥은 벽화의 화려함에 비해 특이할 것 없이 너무도 평범했다. 단지 가운데 지점에서 석 자 높이에 지름 일장 정도의 석대가 설치되어있는 것만이 눈에 들어왔다.
“메테우스가 강을 건너지전까지 3천 년 동안 꼼짝않고 머물렀다는 자리가 바로 여기다.”
“그렇게나 오랫동안?”
“그래.”
“그는 그 긴 시간 동안 무슨 고민을 했을까?”
“그야……나도 모르지. 어쩌면……강을 건널까, 말까를 고민했는지도.”
“뭐야? 하하하하.”
파천은 라미레스의 뜻밖의 농담에 한참을 웃다가 석대 위로 올라섰다. 그러자 라미레스의 눈빛이 묘해졌다. 파천이 두 팔을 펴며 위를올려다본다.
“햐, 이곳에 올라오니 전경이 또 달라지네. 라미레스, 이리로 와봐라. 모두가 내 쪽을 보고 있는듯…….”
파천은 라미테스를 돌아보다 입을 다물었다.
“왜 그래?”
라미레스의 표정이 약간 굳어져 있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수련자들은 절대로 그 자리에 오르지 않는다.”
“그건 왜지?”
파천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닫고 슬그머니 바닥으로 내려섰다.
“메테우스에 대한 존경의 념 때문이지. 그렇지만 너는 수련자도 아니니 개의치 마라.”
메테우스가 앉았던 자리에 서거나 앉는다는 걸 불경이라 생각하는 수련자들이 파천은 조금은 이해가 갔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경직된 방식이라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어, 이것 봐라.”
파천은 석대를 오르락내리락하며 한곳만 주시하고 있었다. 석대에 발을 올렸을 때와 내렸을 때의 각도 차이로 변화하는 형태가 유독 한곳을 중심으로 극심한 걸 발견했던 것이다.
파천은 좀더 자세히 확인하고자 위로 몸을 솟구쳤다. 벽면 가운데 지점쯤 되는 것 같았다. 그림의 전체적인 구도로 봤을 때도 중심에 해당하는 지점이었다.
모드 이들이 사방에서 가운데로 모여들고 있었는데그 가운데 팔이 네 개씩이나 되는 인물들 세 명이 거만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가운데 앉은 이의 손에는 피가 뚝뚝 흐르는, 금방 잘라낸 듯한 머리가 쥐어져 있었고, 그 앞에 처연한 표정의 여인이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다.
루딘족장의 처소 문에 새겨져 있던 바로 그 그림이었다. 여인의 한 손은 허공으로 들려져 있고, 다른 한 손은 등뒤로 돌아가 단검을 꽉 움켜지고 있었다.
“파천, 거기서 뭐해?”
“이 부분, 여기서 유독 좀 이상해서.”
“왜?”
파천은 그림을 자세히 살피고는 다시 석대 위로 올라갔다. 석대 위에 있으니 그다지 다른 점은 없었다. 가운데 앉은 이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졌을 따름이다.
천천히 상승해 보아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런데 석대 아래로 내려서니 그림은 확연하게 달라졌다.
“거 참, 희한하네.”
파천은 라미레스가 선 자리로 물러서 보았다.
처음과 다름없었다. 석대 바로 밑으로 내려온 바로 그 지점에서만 그림은 변화를 보인 것 이다.
파천은 궁금해 하는 라미레스에게 자신이 발견한 걸 설명해 주었다.
라미레스도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결국은 파천이 했던 것처럼 똑같이 따라 한다.
“으음, 그렇군. 유독 여기서만 그림이 확연한 변화를 보이는군.”
라미레스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여인의 손에 쥔 단검이 석대 밑으로 내려온 순간 사라지는 변화. 그러나 전체적인 그림의 내용을 볼때 단검이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해석된다.
단검이 없다면 그 여인은 단지 그들을 향해 찬사를 보내는 한 아리따운 추종자쯤으로 비춰질 뿐이었다. 단검이 쥐어진 상태라면 여러 가지 다른 해석이 가능했다.
파천은 석대를 빙 둘러 가며 다른 위치에서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조끔 씩 형태가 달라지긴 해도 크게 다른진 않았다.
‘파천은 중심에서의 변화는 어떨까?’
파천은 문득 그런 궁금증이 일었다.
라미레스가 파천에게 말했다.
“거기 앉아 내 얘기를 들어봐. 널 이곳에 데려온 건 수호자의 부탁도 있었지만 널 위해서는 이런 시간이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수호자도 굳이 이곳을 언급한 건 내 생각에는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는 예지력이 뛰어난 자였으니, 어쩌면 현재의 상황을 미리 예견했을지도 모르지.”
라메레스는 이곳에 파천을 위한 수호자의 특별한 안배가 있을 거라고는 솔직히 믿지 않았다. 그 동안 엄청난 수의 수련자들이 시시 때때로 들락날락하던 곳이다.
설사 수호자가 무얼 안배해 놓았다 해도 이미 수련자들에게 발견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아직까지 그런 얘기가 없는 걸로 봐서 그런 건 애초에 없었을 거라 라미레스는 단정짓고 있었던 것이다.
“전에 내가 했던 말을 넌 이곳에서 해결해야 한다. 물론 힘들겠지만 하는 데까지는 해봐야지.”
석대에 주저앉으며 파천이 물었다.
“분열과 융합에 대한 것 말이냐?”
“그래.”
파천이 사방을 다시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내게 좀더 시간을 다오. 난 이곳에 뭔가가 꼭 있을 것만 같단 말야.”
파천의 그림의 변화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저러한 변화가 우연한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그것이 메테우스가 했든, 수호자의 손길이 닿았든 벅별한 의도에 따라 그렇게 보여지는 것이라면…… . 그냥 넘겨서는 안 될 무언가가 있다는 의미였다.
라미레스는 파천의 부탁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는 벽 쪽으로 가서 편한 자세로 주저앉았다.
“마음대로 해라. 시작할 준비가 되면 날 깨워라.”
그 말을 끝으로 라미레스는 깊은 명상중으로 들어갔다.
‘이런, 몇 가지 질문할 것이 있었는데…… . 이렇게 되면 혼자 풀어 봐야지 별수 없군. 이곳에 글귀가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수호자에 대한 언급이 있다고 했는데……. 대체 그런 게 어디 있단 말인가?’
파천은 다시 위애서부터 찬찬히 살펴보기로 결심했다. 워낙에 새밀하게 표현된 방대한 분량인지라 꼼꼼하게 살피자니 상당한 시간 소모가 예상되었다.
그럼에도 파천은 포기하지 않고 그 일에 매달렸다. 바라보는 각도에 따른 변화를 다양하게 실험해 보기 위해 그는 천장에서부터 바닥까지 구석구석을 훑으며 관찰해야 했다.
한참이 지난 뒤 석대 위로 다시 오른 파천은 곰곰이 생각을 리했다.
‘그림 속 인물들의 자세가 조금씩 달라지긴 해도 그다지 특별할 건 없다. 가장 큰 변화는 역시 여인의 단검이 사라지는 것이다.
과연 저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단지 단순한 그림에 지나지 않는 건가? 아니면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걸까? 혹시…… .‘
파천은 여인의 단검이 그려져 있는 벽면으로 다가갔다. 표면을 만져 보았다.
“특이한 점은 없다. 기관은 아닌데.”
괜한 일에 심력을 낭비하는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분명 뭔가가 있어. 수련자들이 드나드는 장소에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단서가 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랬다면 진작에 발견되었겠지. 내가 수호자라면…… .”
“파천, 그만해라. 뭔가 특별한 것이 있기를 기대했다면, 서운 하겠지만 그런 건 없다. 나 또한 이곳을 몇 번 들러 살펴본 적이 있었다. 단검이 사라지는 건 이번에 처음 알게 된 것이지만…… . 그것에 특별한 의미는 없을 것이다.”
라미레스가 파천을 재촉했다. 이제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파천이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 다시 올 수 있다면 네 말대로 사헥T지만 여길 나가면 다시 올 기회는 없어진다. 수호자가 네게 날 이곳으로 인도하라고 했다면 거기엔 분명 뭔가가 있어야 한다. 내 생각이 맞을 거야.”
라미레스는 파천의 고집에 두 손을 내저으며 혀를 내둘렀다.
“마음대로 해라. 내가 도울 일은 없겠어?”
“그다지.”
파천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어떤 문제든 부닥치고서 풀지 않고서는 마음을 놓지 못하는 성격은 또다시 발동되려 하고 있었다.
그의 실험이 시작되었다.
그의 그림의 전체적인 내용을 먼저 해석해 보기로 했다.
‘전쟁터다. 영자들의 기억에도 없는 가상의 전쟁터. 아니지. 실제로 있었던 전쟁일지도 모른다. 저 그림에서 배경은 별 의미도 없다. 그저 다양한 전쟁의 양상을 상세히 보여 주고 있을 뿐이다.
내용의 중심은 전쟁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의자에 거만하게 앉은 저 세 인물과 그 앞에 주저앉은 여인이다. 네 개의 팔들을 지닌 기이한 모습의 인물들. 그리고 아름다운 여인. 손에 쥐어진 잘린 머리. 복장의 통일성은 없다. 전체적인 전세를 봤을 때 두 진영간의 싸움만도 아니다.
혼전. 그래 저들은 모두가 적이다. 그럼에도 저들이 향하고자 하는 방향은 중심, 세인물이 앉은 곳이다. 필사적으로 나아가려 하지만 그 앞을 막는 인물들. 상대헤 비래 그리 많지 않음에도 매우 효과적으로 무리들의 발을 묶어 놓는 가공한 능력의 소유자들. 세 인물의 수하들로 처정된다.
죽어 적의 손에 잘린 머리를 맡겨야 했던 저 비극의 주인송은 여인과 관련이 있다. 둘다 세 인물에게 제압당한 것일까?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살려 주었다. 여인이 내뻗은 손이 향하고 있는 곳은 잘린 머리가 들린 손. 그런데 뭔가 허전한 구석이 보인다.‘
“라미레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뭐가 말이냐?”
“여인이 앉은 위치의 뒤쪽을 봐라.”
“뭐가 어떻다고?”
“거기는 채워지지 않았다. 아니 공간을 비워 둔 듯한 느끼밍 들지 않은가?”
“흐음, 글게. 잘 모르겠는데?”
“분명 사방에서 적들이 모여들고 있다. 중심을 향해서, 그런데 유독 여인의 뒤쪽만은 허전한 느낌이다.”
“왜? 거기도 표현되어 있는데.”
“바닥에 닿은 여인의 다리와 겹쳐지는 부분에서 그 다음의 인물까지 상당한 거리다 있다. 배경조차 생략된 듯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듣고 보니 그렇군. 한 이삼 장 정도가 생략된 것 같군. 그런데 그게 왜?
파천, 이건 쓸데없는 짓이다. 저 그림에서 수호자가 남긴 뭔가를 찾으려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이 그림은 메테우스가 그린 것이다. 수호자가 새로운 걸 첨가시켰을 수는 있지만 원래는 메테우스의 작품이야.
나 또한 수호자가 네게 뭔가를 남겼기를 바라지만 보다시피 이곳은 빈 공간이다. 기관 같은 것도 없다. 아무리 자세히 훑어봐도 마찬가지다.“
“수호자…… 그는 대체 어떤 자일까?”
“그는 여전히 내게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그를 만나고 그와 대화를 나누었건만 기억되는 게 그다지 없다. 오래 전 꿈 속에서 잠시 스쳤던 것처럼 희미한 느낌뿐이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런 능력이 있었기에 여태껏 비밀에 가려져 있었던 거겠지.”
“라미레스, 솔직히 말해 난 저 그림을 두 번째 봤을 때 너무도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생동감 있는 표현들과 세밀한 묘사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그 모든 게 죽어 있고 단지 무엇인가 확연히 구분하고 설명 할 수 없는 한 가지만이 저 그림 속에서 살아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그 미묘한 느낌에 난 전율했었다. 내 영혼을 잡아끄는 무엇인가가 저 안에 감춰져 있다. 이건 맹목적인 확신이다.“
“좋아, 그럼 다시 한 번 풀어 보자. 여인의 단검이 사라졌다 나타나는 변화. 지금까지 발견한 유일한 단서지?”
“그래.”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어. 내가 수호자고 뭔가를 남겼다면 또 다른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 여인과 세 인물에게 좀 더 집중해 보자.”
파천과 라미레스는 허공에 뜬 채 그림들을 재차 자세히 살폈다. 중심을 집중해서 살폈다. 뒤로 멀찍이 떨어져서도 보고 아래쪽에서도, 위쪽에서도 관찰했다.
라미레스가 제풀에 지텨 두 손을 들었다.
“역시 내게는 이런 짓이 어울리지 않아. 난 포기했다, 파천.”
파천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그림에만 집중했다. 그러기를 얼마였던가. 라미레스 곁으로 내려온 파천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네 말대로인가 보군.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어. 어떤 위치에서도 다른 변화를 찾을 수 없다.”
“그만 포기할 거지?”
“그래야 할 것 같군.”
고개를 끄덕여 주는 파천이 라미레스는 고맙기까지 했다. 성과 없는 일에 매달려 언제까지 시간을 소모하고 있기엔 그들이 지닌 시간은 너무도 한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자, 그럼 우리 좀더 생산적인 연구에 몰두해 보자고. 너와 내가 함께 풀어야 할 숙제댜. 널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
“바로 그거야.”
파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라미레스가 일어선 파천을 따라 고개를 쳐들며 물었다.
“뭐가?”
“한 가지 안 해본 것이 있다. 이 석탑 안에 들어왔던 어떤 수련자도 해보지 않은 일. 절대로 그들에게 발각될 수 없었던 이유.”
“무슨 뜻이냐?”
“저, 석대. 바로 저것이 어떠면 열쇠일지도 모른다.”
“뭐야? 너 설마…… .”
“그래, 수련자라면 저 석대에 오르는 것조차 기피했으니 누가 감히 훼손할 생각인들 했겠어? 열쇠는 저기에 감춰져 있다.”
“저 안에? 저건 단지 돌일 뿐이다.”
“누가 뭐래? 저건 그냥 돌일 뿐ㅇ리지만 저걸 부숨으로써 새로운 게 나올지도 몰라.”
라미레스는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너 그랬다가 아무런 소득도 없으면 어쩌려고 그래? 저걸 파괴한 걸 나중에 다른 수련자들이 알면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닌데.”
“그래서 하지 말자고?”
“에라 모르겠다. 그래 네 맘대로 해라. 어차피 나야 벌써부터 찍힌 몸이고. 하긴 네 말을 들으니 나도 궁금해지는군.”
파천은 석대의 중심에 꼿꼿하게 섰다. 그리고 천천히 아래쪽을 향해 압력을 가해 갔다. 석대가 조금씩 주저 않기 시작했다. 미세한 돌가루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파천의 발 주위로 새파란 프리즈마의 기운이 스며 나오는 게 보였다. 파천은 조금씩 아래쪽으로 내려가며 그림의 변화를 주시했다.
“오, 역시!”
파천의 예상이 들어맞은 것이다. 그림의 중심이 변화하고 있었다. 단검을 쥔 여인의 손이 위쪽으로 천천히 휘둘려지는가 싶더니 괴인의 한 팔을 지나갔다. 그러나 괴인의 팔은 전혀 손상당하지 않았다.
파천의발이 완전히 바닥까지 내려온 순간. 그림은 확연하게 달라져 있었다.
괴인의 손에 들려 있던 머리가 여인의 손에 들어갔다 그리고 여인은 머리통을 쥔 손을 쥐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잘린 머리의 얼굴이 쥐쪽을 보도록 향해 있었다.
완전히 부서진 석대를 보며 라미레스가 소리쳤다.
“뭐가 보이냐?”
“바로…… 저것이었어.”
라미레스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파천의 옆자리에 함께 붙어 섰다. 그 또한 변화된 그림을 보고 있었다.
“이런 기막힌 일이.”
“라미…… 레스.”
“왜?”
“저눈, 바로 저 눈이다. 죽은 자의 부릅떠져 있는 눈. 그 안에 무엇인가가 있다.”
라미레스는 파천의 지적에 따라 눈길을 돌리다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파천의 전신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미약했지만 점차 격렬해졌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했던가? 그렇지만 그 자는 지금 파천과 라미레스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들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눈동자에 선명하게 자리잡고 있는 건 반듯한 모습의 한 영자였다.
뒷짐을 지고 어디 산책이라도 나온 것 같은 태연한 신색의 인물.
그는 죽은 자의 눈을 직시하고 있었다. 여인의 뒤쪽을 향해 있던 눈동자에 비친 자는 파천이 비어 있다고 말했던 바로 그 공간 안에서 있었던 것이다. 파천의 시선은 마력에 이끌리듯이 그 자의 눈동자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자신을 노려보는 듯한 눈동자.
신비인의 눈은 파천의 정신을 한없이 빨아들이고 있었다. 라미레스 역시 이 순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저, 저…… 자는…… 바로…… .”
파천이 전신을 부들부들 떨고 있음을 라미레스는 아직까지 느끼지 못했다. 그 또한 심적인 동요를 진정시키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라미레스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며 말을 만들어냈다.
“…… 수호자! 바로 수호자다.”
희미하세 잠재된 기억속에서 라미레스는 확연한 모습을 다시 꺼내 놓고 있었다.
“파천, 저 자가 바로 수호자야.”
라미레스는 파천을 급하게 돌아보았다.
“파천. 파천, 왜 그러느냐?”
라미레스는 그제야 파천이 이상해진 것을 알아챘다. 학질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전신을 떨어대던 파천의 동공은 풀어져 있었고 호흡은 거칠었다.
라미레스가 파천을 흔든 순간, 그는 밑둥이 썩어 버린 나무가 단번에 쓰러지듯 뒤로 넘어갔다 라미레스는 놀라 파천을 안아들었다.
“파천, 왜 그래? 정신차려봐. 파천, 파천!”
파천은 더 이상 호흡을 하지 않았다. 라미레스는 파천의 상태를 진단해 가기 시작했다. 그의 손 역시나 너무도 당황한 나머지 떨림을 멈추지 않는다. 호홉은 끊어졌고 심장 박동마저 멈췄다. 파천의 몸음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죽…… 다니. 이런 일이…… .”
라미레스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와와와와
“으악.”
“크악.”
비명과 함성.
파천은 전장에 서 있는 자신을 이해 할 수 없었고 굳이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다.
낯익은 풍경.
바로 그 그림 속의 전쟁터에 자신이 와 있었던 것이다. 그는 눈앞에 선 자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어서 오너라, 파천. 드디어 우리가 다시 만났구나.”
“그대…… 가 수호자였나?”
“의외인가?”
“그렇게도 나를 귀찮게 했던 바로 그대가 수호자였다니…… . 좀 어이가 없군.”
“마계의 환상지대에서 헤어지고 나서 처음이로군.”
“여기는 어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하게 진정되는 것이 파천은 신기했다.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전쟁의 마지막 싸움터다.”
“어떤 역사를 말하는 거지?”
“물론 인간의 역사지.”
“인간의 역사?”
“그래, 너를 비롯한 모든 영자들이 잊고 있는 과거세의 역사. 우리는 그 현장에 와 있는 거다.”
파천은 눈앞에 선 ‘그’가 수호자라는 사실이 놀랍기는 했지만 그 부분을 따져 물어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 외에도 물어 볼 것이 태산처럼 많았기 때문이다.
 “좀 시끄럽군.”
어디서부터 풀어 나가야 할지 몰라 그렇게 말하고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렇지? 다른 데로 옮길까?”
수호자의 말이 막 끝나는 순간이었다. 전경은 돌변했다. 소란스럽던 전쟁터는 오간 데 없이 사라지고 낮게 흐르는 구름이 한가롭기만 한 산 정상에 둘은 서 있었다.
시원한 바람에 풀잎이 흔들리고 어디서 우짖는지 모를 새소리가 정겹기만 했다. 산 정상에는 태산을 방불케 하는, 인공적으로 지어진 석단이 있었는데 지금 그 주위에 많은 이들이 무릎을 꿇고 얼굴을 땅에 바싹댄 채 절을 하고 있다.
석단 위에 수호자는 앉아 있었다. 파천은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여기는 또 어딘가?”
“제왕이 다스리는 대지 중 여덟 번째 대륙인 판드아. 몰론 과거의 모습이지.”
파천은 어리둥절해져 있다가 이렇게 물었다.
“이 모든 게 혹시…… 네가 만든 환상인가?”
“역시 판단이 빠르군. 그래, 내가 만든 환상지대다. 무엇을 보고 싶으냐? 네가 살던 중원을 보여 줄까? 아니면 영계의 초창기 시대? 그도 아니면 먼 먼 옛날 태초의 모습을 만들어 볼까?”
“그만! 그만해라. 그런 것 따위 보고 싶지도 않다. 넌 지금부터 내 질문에만 성실하게 답변하면 된다. 내가 지닌 궁금증을 모두 풀어 줘야 한다.”
“왜?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난…… 이런 말을 들었다. 내 삶이, 내 인생이, 나라는 존재가 네가 만든 꼭두각시 일지도 모른다고. 과연 그런가?”
“호, 누가 그런 말을 했을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수호자! 그런 식으로 성의 없이 대답하지 마라. 난 확실한 대답을 듣고 싶다.”
“그런다고 달라질게 있나? 진실을 알았다 해서 네 의지가 달라지기라도 한단 말이더냐? 넌 네 의지로 네 삶을 살았고 여기까지 왔다. 물론 내 개입이 상당 부분 작용했지만 모든 건 네 자유로운 의지자 선택한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파천은 수로자의 말에 전혀 분노의 감정이 일지 않는 게 이상했다. 파천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수호자는 파천을 다른 곳으로 안내했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다른 장소를 그가 새롭게 만들어냈다. 그곳엔 둘의 대화를 방해할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어둠뿐이었다.
“이곳이 바로 중간계다. 영자들이 머물고 있는 영계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곳이지. 우주는 원래 이런 빈 공간에 지나지 않았다. 내 의지가 환상을 만들어냈듯 신의 의지와 인간들의 의지가 만들어낸 세상이 바로 네가 실체라고 믿는 그 세계지.”
“무슨 뜻이지? 그럼 네 말은 그 모든 게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인가?”
“아니, 난 그렇게 말한 적은 없어. 정확하게 말하면 허상도 실상도 아니야. 존재하는 건 영혼뿐. 그 이외의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걸 말하고자 했던 것이니 오해 없길 바래.
파천, 난 너를 통해 한 가지를 증명해 보이려 하고 있다. 난 너무도 긴긴 세월 동안 치열하게 싸워야 했다. 그 상대도 너도 알고 있는 메타트론.
그와 나는 영원토록 갈등하도록, 대립하도록 저주받았는지도 모르지. 바로 신에 의해서 말야. 그렇지만 이것 또한 우리들이 원해서 하는 싸움. 난 그를 이겨야 하고 그는 내게 자신의 정상함을 입증해 보이려 한다. 그 싸움은 오랜 세월 동안 승부가 나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지금의 세계에 부단히 간섭하며 모종의 일들을 꾸며 왔지. 그 결과가 어떻게 결말지어질지, 이번엔 과연 승부가 날지 아니면 또다시 기약 없는 시간을 흘려 보내게 될지…… 나로서도 모른다.”
“무엇을 증명하겠다는 거지? 내게 무엇을 해줘야, 아니 내가 어떤 일을 하기로 결정되어 있나? 넌 내게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 거냐?”
“흥분하지 마라, 파천. 아무것도 결정된 것 없다. 미래는 그런 것이야. 우리가 끊임없이 인간들의 세계에 영향을 끼쳐 왔지만 우리 임의대로 역사를 조작한 적은 결단코 단 한 번도 없다. 모든 건 그들 스스로 내린 선택에 대한 결과물이었을 뿐이었다.”
“내가 듣던 것과는 많이 다르군.”
“라미레스가 그랬겠지. 그 친구야 원래부터 나에 대해 그다지 좋지 않은 감정을 지니고 있으니 삐딱하게 말했겠지.”
“너의 정체는 대체 무언가?”
“나? 나는 너다. 수도 없이 말했을 텐데.”
파천은 분명 예전부터 ‘그’에게서 그런 말을 여러 차례 들었다. 예전에 들었던 것과 수호자로 판명난 ‘그’가 해주는 말은 전혀 의미가 달랐다.
“내가 수…… 호자라도 된단 말인가?”
“천만에. 넌 수호자가 아니다. 넌 하나의 인간일 뿐이지. 그렇지만 넌 나와 같다.”
“무슨 의미지?”
“말해 줘도 이해할 수 없을 거야. 그리고 아직은 때가 아니다. 내가 네게 말해 줄 수 있는 건 한정되어 있다.”
“왜, 왜지? 그이유가 뭐야? 왜 모든 걸 감추려고만 하는 거지? 네가 나라면, 내가 너라면 난 최소한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알아야 할 게 아닌가? 그래야 이 빌어먹을 선택이라도 제대로 내릴 것 아니냐?”
“네가 알아도 될 것이 있고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미래에 미칠 영향 때문이야. 너는 아직 불완전하고 미약한 존재. 네 연약한 감성이 모든 걸 그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넌 어차피 모든 걸 알게 된다. 그때가 되면 지금 내가 한 말을 모두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때가 언제지?”
“광명을 얻게 되면 넌 자유롭게 된다. 광명을 얻으면 모든 진실을 알게 되고, 넌 완전해진다. 그럼으로써 넌 네게 지워진 운명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광명을 향해서 중단 없이 가라. 그리고 취하라. 그러면 모든 건 해결된다.”
“간단해서 좋군. 또 그놈의 광명! 너는 언제나 날 움직이게 하기 위해 미끼를 던져 놓는군.”
“미끼라…… . 그럴 수도 있겠어. 난 지금 너로 인해 자유롭지 못하다. 이런 방법밖에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답답한 건 오히려 나다. 그는 자유로운데 비래 난 이렇게 제한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이것 또한 내 선택이었으니 누굴 원망할 건 못된다.
광명을 얻어라. 그래야만 나 또한 자유로워진다.”
‘저건 또 무슨 말인가?’
“설명해 주지. 난 지금…… 봉인되어 있다.”
“뭐?”
“네 속에, 네 잠재 의식 속에 봉인되어 있다. 네가 죽거나 광명을 취하면 난 나로 돌아올 수 있다. 그렇지만 네가 모든 걸 거부하고 너로서 죽게 되면 난 영원히 봉인을 풀 수 없게 된다. 내 치명적인 약점은 바로 이것이다.”
파천은 혼란스러워졌다. 자신의 의식 속에 수호자가 봉인되어 있다는 건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이었다.
‘그래서 그가 나라고 했던 거였던가?’
“넌 내 꼭두각시가 아니다. 굳이 다른 표현을 빌리자면 대리자쯤 될 수는 있겠군. 메타트론과의 승부는 네가 끝까지 살아 있어야 추종하는 어둠의 천사가 널 도와준 걸 기억하나?”
파천이 그걸 잊을 리는 없었다.
“그래서 그런 거였군.”
“그래. 난 널 이용하고 있다는 말이 얼마간은 맞겠군. 그렇지만 나 또한 네 의지에 반해 내 결정을 강요한 적은 없다.”
파천은 그 부분은 좀 수긍할 수 없었다. 그렇게도 자신을 못살게 굴었으면서 뻔뻔스럽게 저런 소리를 한다 싶었다.
“모든 건 널 위해서. 널 준비시키기 위해서였다. 네가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건 일치한다. 네가 원하는 대로 행하라. 그러면 된다. 지금까지 해왔듯이. 의문은 품지 말고.”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파천의 알고자 하는 갈망은 힘차고 드셌다. 모든 걸 툴툴 털어 버리고 줄에 매달린 매끄럽게 깎아 놓은 목각 인형처럼 움직일 수는 없는 까닭이다.
의지가 그가 그여야 할 당위성을 꾸준히 요구하고 있어ZT고 이제는 당면한 어떤 대의 명분보다도 더 큰 갈증으로 다가왔음에야.
이대로는 안 된다. 이것이 수호자에 대한 파천의 강력한 요청이었다.
“좋다. 그렇게도 알고 싶다면 현 단계에서 네가 알아도 무방한 사실만을 들려 주마. 어차피 들려 주려 했던 것이니.”
그리고 수호자는 파천이 감장할 수 없는 내용들을 마구 쏟아내기 시작했다.
라미레스에게서도, 아난다에게서도 들어 보지 못한 내용들은 그를 전혀 다른 세상으로 자꾸만 밀어내고 있었다.
“모든 영자는 인간세의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이었다. 참인단. 네가 겪어 보았듯이 영자들 또한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부로안전하고 미숙한 존재들이지. 영계는 또 하나의 인간세에 불과하지.
진실에 접근한 정도에 따라 다르겐 하지만, 그 간격은 그리 크지 않다. 다른 것이라면 하나는 시간이 제한되었고 또 하나의 무한하다는 게 다를 따름이지.
참인간은 모두가 완전자였으며 신의 곁에 있었다. 신에게 포함되어 있었으며,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도 신의 곁에 있다.“
“…… .”
파천은 수호자가 한 말을 언뜻 납득할 수 없었다.
“내 의식이 중간계를 이용해 만든 것이 조금 전 네가 봤던 환상지대였다. 마찬가지로 그들의 본체가 만들어낸 의식이 지금의 현생이다.
모든 것은 집착에서 기인한다. 욕김. 지금의 영자들에게 재물에 대한 욕구가 있던가?”
“그다지…… ”
“그러나 권력에 명예에 대한 집착은 인간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지?”
“그…… 런 것 같군.”
“당장 내일이면 모든 게 끝난다는 걸 아는 인간에게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예가 큰 집착이 될 수 있을까?”
그럴 리는 없다. 죽는 걸 안다면 그는 다른 것에 한정된 시간을 소모할 것이다. 이를테면 소중한 가족들과 함께 그 시간들을 채우려 할 것 같았다.
“지금의 영계에도 처음엔 서로간의 구분이 없었으며 차별이 없었다. 그런데 점차 시간이 지나며 인간세의 인간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들 역시 무엇인가에 대한 집착을 보이기 시작했고, 서로를 구분하고 차별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허망하다는 걸 인식하면서도 쉽게 집착을 끊지 못했지.
신의 곁에 있을 때의 참인간들은 완전했다. 신을 의식하며 그와 함께 있음으로 해서 완전한 충족과 행복감을 느꼈다. 그런데 그런 의식이 단절된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신과 함께이나 그걸 느끼지 못한다. 소유에 대한 집착을 보이기 시작했고, 그 결과고 세상은 이처럼 혼탁해졌다.
지금의 영계는 허상은 아니지만 그것에 가깝다. 수 없이 많은 세계가 생겨나고 없어져 갔지만 그 속에서의 인간은 여전히 불완전했고 그들이 만들어 가는 세상 역시나 무질서하고 괴로운 곳이었다.
그렇지만 때때로 그 가운데 진정한 자아를 회족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곧 완전자다. 그들은 새롭게 태어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가를 깨달은 것뿐이다.
그렇지만 그건 너무도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지. 세월이 흐르며 서로의 의식 관계가 만들어낸 양상은 점점 더 복잡하고 다양해져 갔다. 영계에 존재하는 모든 영자들은 첫 시작은 하나였지만 지금에 와서는 판이하게 다른 성향을 보인다. 이것이 영계의 실체다.“
파천은 수호자의 설명이 이해가 갔다.
그러나 자신이 몸담고 있는 현생이 본체가 만들어낸 의시그이 투영일 뿐이라는 말은 좀체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었다.
“지금부터 내가 네게 알려 주는 건 너만 알고 있어야 한다. 다른 이들에게 발설하는 건 좋지 않다. 하긴 말해도 그들이 받아들일 리 도 없지만. 너와 가장 절친한 라미레스에게도 숨겨야 한다.
어디서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할까?”
“메테우스의 석탑에 날 부른 이유부터 얘기해 봐.”
“흐음, 그럴까? 너도 들어 알고 있겠지만 현 영계의 시초는 제왕으로부터 영자들이 놓이면서부터다. 천상계가 만들어지고 천주가 다스리는 세상이 도래하고 그 다음 다시 선계로, 서른 세 개의 하늘로, 그렇게 분화되던 시점에 메테우스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지.
그는 네 판단에도 전 영자들을 통틀어 다섯 안에 들어갈 정도로 뛰어난 자가 분명하다. 그를 부추겨 천상계를 떠나게 한 건 사실 나였지.“
“이유는?”
“오늘을 대비하기 위함이었어. 당시는 영자들이 너무도 경직되어 있었고 그 강태로는 다른 외부의 위협에 대적할 만한 저력이 없다고 판단해서였다.”
“제왕들을 말하는 건가?”
“아니. 그건 좀 있다 설명해 주마. 그는 내 뜻에 따라 무한계를 개척해 나갔고 그를 따르고 추종하던 무리들 까지 함께 따라나섰다. 그수는 시간이 지나며 점점 많아지더니 급기야 천상계와 선계보다도 더 방대해지더군.
그런데 그는 내 예상보다도 더 뛰어난 자였어. 그는 그가 지닌 고민들로 인해 스스로도 주체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던 거야. 급기야 거가 선택한 건 망각의 강을 건너는 것이었다.
무모한 용기였어, 나는 당시 무척이나 당황했다. 이직은 그가 필요했긴 때문이다. 사실은 그가 망각의 강을 건넌 건 영자들이 알고 있는 시점보다도 훨씬 그 전의 일이었다.“
“그럼?”
“후반기의 메테우스는…… 바로 나였다.”
이걸 다른 영자들이 들었다면 과연 어떤 표정들을 지을까?
수호자는 라미레스가 언급했던 것보다 더 깊숙이 영계를 막후에서 조종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난 메테우스 행세를 하며 차근차근 할 일을 해나갔다. 석탑을 지은 것도 오늘을 위한 안배에 지나지 않는다.”
“잠깐!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구석이 있다. 이런 사실이 어떻게 전혀 알려지지 않을 수 있지? 다른 이들은 몰라도 마계의 루시퍼나 대마신들은 알고 있어야 정상이지 않은가?
그리고 듣기로 그들이 신에게 반란을 도모한 시점과 영계의 시초가 맞물려 있어야 하는데 네 말대로라면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후후, 그 모두가 메타트론의 조작이야. 내가 그랬듯이 그 또한 여러 자기 일을 해왔었어.
때로는 둘이 함께 힘을 합한 적도 있었다.”
정말로 어이없는 일이지 않은가! 영자들이, 영계가 메타트론과 수호자라는 희대의 사기꾼들에게 마음껏 농락당해 왔던 것이다.
“그들의 기억을 제한한 건 우리들의 뜻이 아니었다.”
“그럼?”
“신의 뜻이야. 우리는 그 일을 대신해 왔던 것뿐이고. 나와 메타트론에 대해 알려진 것 중 상당수는 오해의 소지가 많아.”
“역시 그랬군. 계속해 봐.”
“현재의 난 아까도 말했듯이 네 잠재된 의식 속에 완전하게 봉인 되어 있다. 얼마간 활동할 수 있었던 여력이나마 사라진 시점이 네가 케타트론의 환상지대를 겪으면서였다. 그의 마력이 날 완전하게 잠재워 버린 것이다.”
“그럼 지금의 너는?”
“지금의 나는 미리 준비된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 굳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는 없다. 네 판단의 범주는 매우 유치한 수준에 불과할 테니 말야.
파천, 그 그림의 세 인물이 누군지 궁금하지 않은가?”
“그들이 실존 인물이었나?”
“그래, 나와 메타트론처럼 그들 역시나 꽤나 오랜 세월을 함께 해왔었다. 그들이 바로 아바돈의 세 총수인 하기오스다.
그들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들의 하수인들이다. 그들은 메타트론이나 나와는 달리 영계를 멸망시키려 하고 있어.
현 영계의 구도가 아무리 복잡해도 따져 보면 매우 단순하다. 메카트론의 마계와 어둠의 천사들, 천상계와 선계, 무한계의 세 축, 제왕의 대지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아바돈과 관련이 있다고 보면 된다.
아바돈의 뿌리는 가장 깊고 넓다. 그들이 그 동안 축적시켜 놓은 저력은 상상을 초월할 거야. 그리고 또 하나가 어 있긴 하지.
바로 그림에서 가장 치열하게 아바돈과 싸우던 자들. 그들은 옛용의 사주를 받은 조직이다. 라미레스도 그들과 약간의 관련이 있지.”
파천은 더 이상은 놀라지 않기로 했다. 그는 얼굴을 굳히고 수호자의 말을 귀담아 듣고만 있었다.
“그들은 때로는 메타트론의 지시를, 때로는 내 지시를 받기도 했다.
그들 중에는 전사도 있고 수련자도 있으며 천상계의 신장이나 심지어 천주까지 포함되어 있다. 수는 그리 많지 않으나 아바돈에 대해 가장 많이, 깊이 알고 있는 자들이니 나중에 꽤나 유용한 힘이 될 것이다.
널 이곳에 부른 건 두 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너를 죽이려는 자들, 다시 말해 아바돈이나 그들의 사주를 받은 자들로부터 널 비켜내기 위해서이고, 또 하나는 네게 알려 줄 것이 있어서였다.
너는 위기의 순간 널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힘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비록 잠재되어 있다고는 해도 넌 나의 분신이나 다름없다. 네가 노력하면 못 이룰 것은 없다. 그럼에도 한계는 분명히 있지. 그래서 네게 광명이 필요한 것이다.
라미레스에게 지시해 놓은 융합의 힘도 광명을 얻기 전에는 완전하게 사용할 수 없다. 광명은 널 완전케 할 것이고, 봉인된 날 자유롭게 할 것이며, 그 힘으로 특정의 영자들에게 기억회복을 시킬 수 있는 권능까지 부여해 준다.
광명을 찾기는 어렵지 않고, 광명을 얻기도 불가능하지 않겠지만 진정 네 것으로 만들기엔 반드시 넘어야 할 고비가 있다.
그것을 위해 넌 반드시 천부경의 뜻을 깨달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광명을 지닐 자격을 얻지 못한다.”
‘천부경!’
파천은 그 동안 잊고 있던 천부경에 대해 다시 들으니 새삼스럽기만 했다. 그렇게도 강조했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파천은 아직까지도 완전하게 해석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끝까지 걸림돌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간단한 이치가 담겨 있다. 너무 문자의 뜻에 매달리다 보면 넌 끝내 그 뜻을 알지 못할 것이다.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단계는 아니지.
일단은 넌 너 자신을 지켜내야 한다. 널 죽이려는 자들은 아바돈. 그들만 조심하면 된다. 난 널 도울 수가 없다. 여기를 나서게 되면 그때부터는 아무도 믿지 마라.”
“선발대도 말인가?”
“그래.”
“건발대는 네가 조직한 거라고 알고 있는데?”
“그렇긴 하지. 선발대는 널 지키기 위래 만든 것이 아냐. 그들은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앞으로 너와 관련될 이들도 마찬가지. 나중에 네가 광명을 억데 되면 그들의 기억을 회복시켜라. 그러면 자연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아바돈이나 마계를 상대함에 있어 가장 큰 힘이 될 거다.”
‘그런가? 그들의 원래 신분들이 뭐길래.’
“현재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자들도 과거세의 기억을 회복하면 놀라운 힘을 회복하게 된다.”
“그런데 왜 믿지 말라는 거지?”
“그들 중…… 틀림없이 메타트론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지.”
“뭐? 메카크론이…… 선발대원들 중에?”
“그래, 틀립없는 사실이다. 메타트론이 누구일지, 그가 어떤 음모를 꾸밀지는 나도 알 수 없는 부분이다.”
“그는 내 죽음을 원치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
“그랬지. 그러나 지금의 그가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는지는 모르지. 어쨌든 마지막에 맞서게 될 자는 메타트론. 그는 너로서는 적이 될 수밖에 없다. 당장에 위협을 가하지 않는다 해서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되지.”
수호자의 이어지는 당부는 애써 태연해지려 노력하던 파천을 격동시켜 놓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하나같이 생각지도 못했던, 뒤통수를 강타하는 비밀스런 부분들뿐이었다.
마지막으로 파천은 가장 궁금했던 걸 물었다.
“왜 넌 굳이 내 속에 널 봉인시킨 거지? 이런 방법을 취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네 스스로 문제들을 해결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랬다면 광명을 얻어야 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고.”
수호자는 잠시간 말을 잇지 못하고 파천을 빤히 쳐다만 보고 있다가 결국엔 입을 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나와 메타트론의 합쳐진 힘을 당해낼 자는 신을 제외하고는 이 우주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와 메타트론의 목적이 영계를 장악하거나 그 반대 세력을 섬멸하는 것이었다면 이런 어려운 과정을 거칠 필요도 없었겠지.
여기엔 밝힐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나와 메타트론간의 문제고, 신과 관련된 부분이다. 그 틈 속에서 서로의 입장이 달라 여러 복잡한 문제들을 야기시켰지만 결국은 나와 메타트론에게 종결된 것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나와 메타트론은 영계가 어찌되든 별 관심이 없다. 난 아직까지는 신의 뜻을 수행하려는 입장이기에 이왕이면 영계를 현 상태대로 지켜내고 싶지만…… . 만약 여의치 않게 되면 전에도 그랬듯이 포기할 수도 있다.
내겐 간절한 소망이 있다. 이번에야말로 그걸 확인할 수 있을 절호의 기회라 여기고 있으며, 그건 메타트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혹시 천궁의 침묵고 그와 관련이 있나?”
“잘 짚었다. 그래, 신의 묵인하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지. 내가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이 세상에 진실로 존재하는 건 영혼뿐이다. 다른 것들은 집착이 만들어 낸 허상일 뿐이야.”
파천은 뭐라고 반박하고 싶었다. 어찌 그렇게 쉽게 단정 지을 수 있겠는가.
“내 아이들은? 내가 광명을 찾아 내 것으로 만든다면 그들을 원래대로 찾아 올 수 있나? 인간세는 다시 회복되는 것인가?”
“네 능력이 그에 미친다면 가능할 수도. 그러나…… 큰 기대는 갖지 마라. 지나 버린 세월을 돌이키려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지. 그 아이들의 삶 역히 그들의 것. 그들의 선택이 그들의 운명을 결정한다.”
수호자는 이후 파천의 상태를 점검하겠다고 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따졌으며 그가 현 단계에서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것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그는 결국 파천의 예상대로 수련을 제안했다.
“먼저 이해하고 네 것으로 만든다. 익숙하게 될 때까지. 네 것으로 만들 때까지 끊임없이 반복한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있을까?”
“여기서 네가 느끼는 시간의 흐름 역시나 거짓에 불과하지.”
‘이건 또 무슨 말이람.’
“네가 다시 의식이 돌아왔을 때는 잠시의 시간이 흘렀을 뿐이야. 지금 말하고 행동하고 있으나 실제는 꿈을 꾸는 것과 다름없다. 네 의식의 세계 안에서 시간도, 공간도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마는 것.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파천의 새로운 수련이 시작되었다. 영계 최고의 신비인인 수호자를 스승으로 둔 다시 얻지 못할 좋은 기회였다.
수호자가 만들어낸 갖자기 환상들은 파천의 수련에 가장 적절한 환경과 조건을 제공했다. 파천은 스스로도 느낄 만큼 빠르게 변모되어 갔다. 수호자의 능력은 파천의 기대치를 훨씬 넘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수호자는 말했다.
“한계란 없다. 인간은 무한한 존재. 네 영혼에 스스로 채운 족쇄를 풀고 멀리까지 힘차게 날아라. 무엇으로도 구속할 수 없는 힘찬 날갯짓을 배워라. 하늘을 향해 네 꿈을 실어 보내라.”
수호자는 파천의 현 상태를 그보다 더 정확하게 진단하고 파악해 냈으며 그에게 지금 필요한 것들을 채워 주기 시작했다.
그 동안 겹겹이 쌓였던 모호함에 진의를 제대로 파악치 못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풀어 주었으며 그로 인해 파천은 전혀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있었다.
“위기에 처해 널 도울 수 있는 외부의 힘으로도, 스스로도 널 지켜 낼 수 없게 되면 선발대를 박차고 나가야 한다. 널 감추고 위럼을 피해 도주해야 하는 것이다. 당장에 맞섬으로 얻을 만족보다 앞으로의 더 큰 유익을 생각해라.”
그래서 수호자는 생령의 기운을 감추는 법과 신체를 공간중에 일치시키는 법을 가르쳤다. 탁월한 도주의 방법을 가장 먼저 가르친 것이다. 영자들이라면 쉽게 판별해 내는 파천 특유의 생령의 기운을 감추는 것과 신체를 분해시켜 공간중에 감추는 법을 가르친 것이다.
“원령을 다스리는 순수한 의지를 단련시켜야 한다. 알파이온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다.”
프리즈마의 분열에 이어 더 나아가 융합의 원리와 구체적인 사용법을 배웠다.
“너는 머지않아 금강신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다. 가장 순수하며 강하고 뛰어난 신체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의식이 동하면 저절로 원령이 융합하니 그 능력을 무엇이 있어 감당하겠느냐.”
파천은 광명을 통해 금강신이 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는 확신 가운데 마물렀으며 겨로 의심하지 않았다.
수호자는 잘 익어 입 안에 넣기만 하면 달콤한 과즙이 금방이라도 터져 나오는 것만 주지는 않았다. 이족을 열어 체험하게 했다. 적어도 파천이 겪은 건 지옥이라 할 만 했다. 그는 과거세의 무수한 전쟁터에 내동댕이쳐졌고, 그때마다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때로는 힘이 달려 죽기도 여러 번 했다.
그때마다 파천이 존재하는 공간을 달라져 갔다. 수호자와 파천의 의식 구분이 완전하게 허물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일체나 다름없이 서로를 공유하고 있었다.
“이 곳은 또 어디인가?”
또다시 전경이 변모하자 파천은 긴장했다. 그렇지만 살을 찌르고 가슴을 헤집을 듯 한 살기는 그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방을 빠르게 살폈다. 적의 기운을 감지하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상황 판단은 즉각적으로 이뤄졌다.
그런데 그 어디에서도 적의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는다. 잘 가꿔진 정원에 그는 서 있었던 것이다. 흐드러지게 핀 꽃들 사이로 하늘하늘 나비가 춤추고 그들의 날갯짓에 따라 진한 꽃내음이 코를 찔렀다.
파천은 그 자리에 멈춰 있지 않았다. 그는 전진했다. 정원은 한없이 넓어 그 끝을 알 수 없었다. 파천의 신형이 공중을 가른다. 속도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감각은 최고조에 달래 있어 그 어떤 작은 변화도 놓치지 않고 감지할 수 있었다.
얼마나 날아갔을까? 그의 눈에 비치는 전경이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정원은 끝이 나고 푸른 초장이 펼쳐졌다. 그 가운데 두 사람이 서 있었다.
그들은 마주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는데 파천의 다가섬을 경계하지 않는다. 그 중의 하나가 말했다.
“네 생각은 틀렸다. 비움으로 얻을 수 잆는 건 공허함뿐이다. 완전한 적멸이란 있을 수 없는 거짓이다. 채워야 한다.”
다른 이가 그 말을 받았다.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네가 지금껏 채워 온 것이 널 만족시켜 주었나? 그 만족이 널 새롭게 가두지는 않던가? 널 구속하고 억압하고 자유로운 영혼을 해치지는 않던가?
비워야 한다. 모든 것이 허상임을 깨닫고 내 본래의 자리로 돌아올 때 더할 수 없는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떠나라. 너와 나는 결코 함께일 수 없다. 너는 너를 따르는 자들을 데리고 하루 빨리 내 땅을 떠나라. 다시 만났을 때 너와 나는 더 이상 벗이 아니니 죽을까 염려해야 할 것이다.”
“결국은 이렇게 되고 마는가. 세상 사람들이 널 신으로 추앙해 준다 해서 네가 신이 되는 건 아니다.
참으로 어리석구나. 스승의 가름침을 넌 오만한 마음으로 해석했고 지금에 이르렀다. 강해졌을지는 모르나. 네 주변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 네 삶에 남은 것은 가여운 독선뿐이구나.”
“패배자의 초라한 변명이로군. 네 말대로 난 신이 될 수는 없겠지만 가장 고귀하고 뛰어나고 강한 인간이 되었다. 누가 감히 날 거스를 수 있으며, 누가 내 앞에서 고개를 뻣뻣이 세울 수 있겠는가.
내 군대는 강하고 내 통치는 완전하다. 사람들은 내 다스림에 만족하고 있으며 이 세상은 전에 없던 완전한 평화가 도래했다. 스승의 가르침은 실패자의 방식이었다. 난 내 방식대로 성공을 이뤄냈고 난 그런 내 자신이 자랑스럽다.“
파천은 두 사람의 대화에 어리둥절해 있었다.
‘저들은 누구며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파천, 저들이 누군지 궁금하겠구나.”
수호자였다. 수호자가 파천의 옆에 나타난 것이다.
“이 세계 또한 네가 지금껏 겪었던 것들과 진배없이 과거세 중 하나다. 이 세계는 저 두 사람의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
저들을 가르친 스승은 저들이 세상에 큰 것을 남기길 원치 않았다. 큰 진리는 받아들이기 버겁고 결국은 사람들을 구속하는 새로운 걸림돌이라 했다.
둘은 배운 것을 각자의 이상대로 펼쳐 나갔다. 하나는 적극적으로 세상을 정복해 나갔으며, 또 하나는 그런 그들을 다독이고 위로해 주었지. 사람들은 당장에 정복자에게 매달렸지만 결국엔…… 기억되는 건 정복자가 아니었다.
나중의 일이지만 저 둘은 다시 싸우게 된다. 떠났던 하나가 다시 돌아와 사람들을 정복자의 억압 중에서 해방시킨 것이다.
저 둘은 누가 더 강하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한 능력자들이었지. 세상은 항시 변화를 원한다. 고여 흐르지 않고 멈추어 있는 걸원치 않는다.
“어떻게 사람들을 해방시킬 수 있었지?”
정복자는 막강한 군대를 지니고 있었고 떠난 이는 혼자였다. 물론 그를 따르는 이들이 없지 않았지만 그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메타트론이 힘을 줬기에 가능했다. 그들의 선택은 정복자를 홀로 남겨 두기에 이른 것이다. 내가 왜 널 이곳으로 불러 들였는지 아는가?”
파천은 고개를 저었다.
“넌 저 둘에게서 한 가지씩 배워야 할 게 있다. 저들이야말로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강했던 인물들. 그 뒤로도 저들만큼 강한 자들은 나오지 않았다. 현재까지도. 천상계의 천주들도, 메테우스도, 하기오스도 저들보다 강하다 말하긴 어렵다. 이들로부터 후에 제왕들이 나왔다.
저들은 둘다 나중에 완전자가 되었다. 그래서 널 이곳으로 데려 온 것이다. 지금 세계는 인간세와 영계가 분리되기 전이다. 저들은 인간들이다. 그런 저들이 최강의 힘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를 넌 지금부터 알아내야 한다. 그 방법을 배워야 한다.
저들이 원령을 다스리고 거두는 기술들을 너와 같은 인간들에게서 배울 수 있다면 널 더 한층 강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파천은 고래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무작정 배우겠다고 나선다 해서 가르쳐주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방법은 네가 알아내야겠지. 그럼 잘해 봐라.”
수호자는 떠났다. 바로 그 순간 두 사람은 동시에 파천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넌 누구냐?”
정복자의 다그침에 파천은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난…… 나그네요.”
“너는 왜 날 보고서도 절을 하지 않느냐?”
“그래야 하오?”
정복자의 눈이 매섭게 변했다.
“넌 어떻게 여기를 들어왔느냐?”
“그냥……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흘러들게 되었소. 그건 그렇고 듣자 하니 두 분의 대화가 상당히 흥미롭군요.”
정복자는 파천을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꽤나 당돌한 놈이군. 넌 우리가 누군지 알 텐데도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구나.”
“그렇다 해서 두려워하거나 놀랄 이유는 없지요.”
“흐음.”
정복자와는 달리 그 앞에 마주선 이는 파천에게 친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파천도 그런 그에게 웃음을 보냈다.
둘의 하는 짓을 살피던 정복자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넌 둘 중 하나를 선택해라. 날 주인으로 섬기든가, 죽든가. 다른 선택은 없다.”
“주인? 허허허…… ”
파천은 어이가 없었다. 그렇지만 수호자에게 들었던 말이 있기에 내심으로는 상당히 긴장하고 있었다.
“왜 웃느냐?”
“울 수는 없지 않소. 그러니 웃었소.”
“묘한 놈이군.”
“혹시 수호자를 아오?”
“뭐하는 놈이냐?”
“흐음, 그럼 메타트론은 아오?”
“메타트론이라면…… . 신화에 나오는 악신의 이름이지 않은가?
그걸 왜 묻는 거지? 설마하니 네가 메타트론이라도 된다는 말이냐?“
파천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신화속의 악신이라?’
파천은 가슴을 활짝 펴고 당당하게 말했다.
“난 다른 세상에서 왔소. 그대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 왔소.”
“다른 세상? 도움?”
둘은 동시에 의문의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갑작스레 나타난 파천 때문에 상당히 당황하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들의 이목을 속이고 이렇게까지 근접하도록 몰랐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간략하게 말하겠소. 그대들이 지닌 능력을 네게 가르쳐 주시오.” 파천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미친놈이었군.”
파천은 그런 말을 듣고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당신들은 과거의 허상이며, 수호자가 만들어낸 환산에 불과하다고 말해 준들 상대들이 믿을 것 같지는 않았다. 파천으로서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파천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좀 전의 보니 당신들은 서로의 방식이 옳다고 서로 우기는 거 같던데, 내가 결정을 내려 주겠소.”
“같잖은 소리 하지 말고 꺼져라. 아니지. 이대로 보낸다면 내 체면이 말이 아니겠군. 너를 죽이겠다. 각오해라.”
파천은 그들과 설전을 벌이거나 싸움을 한다는 건 무의미하나는 걸 알았다. 그렇지만 실력을 보고 싶은 맘은 있었다.
“해보시오. 그대의 능력이 보잘 것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오.”
예전 같으면 할 수 없는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의 파천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내가 피하고자 마음먹으면 네게 당할 일은 없다. 또 당한들 죽는 것도 아니니. 좀 놀라게 해줄까?’
파천은 오히려 정복자에게 다가섰다.
“자, 죽여 보시오. 내 말을 못 믿는 것 같은데 난 그대들과 같은 사람이 아니오.”
파천은 이제 거짓말까지 하고 있었다.
“그럼 신이라도 된단 말이더냐?”
외침과 함께 정복자의 신형이 번쩍였다. 파천은 방비하려 했으나 이미 그럴 수 없음을 깨달았다.
‘너무 빠르다. …… 벌써 늦었군.’
정복자의 손이 자신의 심장을 통과했음을 알았다. 파천은 그 자리에 쓰르졌다.
“별것도 아닌 놈이.”
정복자는 돌아섰다. 정복자는 막 한걸음을 내딛다 황급하게 몸을 돌려 세운다. 그의 눈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는지 큼지막하게 커졌다.
“난 죽지 않소. 불사신이지. 이제 내 말을 믿겠소?”
툭툭 털며 일어서는 파천을 정복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것도 잠시 그는 파천을 죽이고 또 죽였다. 몇 번이고 죽였는데도 그때마다 벌떡벌떡 잘만 일어서는 파천을 넋나간 시선으로 쳐다보는 정복자. 그는 간신히 이렇게 말했다.
“네 놈의…… 정체는 뭐요?”
“자, 이제는 나와 얘기할 마음이 좀 생겼소?”

세 사람은 마주앉아 있었다. 파천은 둘의 얘기를 귀담아듣고 있는 중이었다. 둘은 서로의 의견을 다 말하고는 침묵중인 파천을 주시했다.
“듣고 보니 당신들의 얘기는 모두 옳소. 누구 한사람이 틀렸다고 볼 수 없소. 각각의 방법은 나름대로 장단점을 지니고 있소.”
사실 파천은 둘의 얘기가 지루했던지라 별로 귀담아듣지고 않았었다.
“중요한 건 두 사람 모두 한 가지 잊고 있는 게 있다는 점이오.”
“그게 뭡니까?”
정복자는 결코 오만하지도 않았고 굳이 파천에게 위엄을 보이려 하지도 않는다. 몇 번이나 죽이고 또 죽였건만 툭툭 털고 일어서는 파천을 두려워하게 된 것이다.
“굳이 왜 한 가지만을 선택해야 하는가, 라는 점이오. 사람이 제각기 틀리듯이 원하는 삶의 방식도 각기 다른 법이거늘 어느 한쪽을 강요함은 옳지가 않소.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면 만사가 해결될 것인데, 애써 서로의 생각을 상대에게 관철시키려하니 충돌을 일으키고 그로서 대립과 갈등이 생기는 것이 아니겠소?
그러니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옳다고 믿는 바대로 살아가면 되는 것이오. 서로가 방해가 된다면 적당한 절충을 하면 될 것이고, 전혀 그런 점이 없다면 서로를 존중하거나 아니면 무시하고 살면 되오. 그렇지 않소?”
“흐음, 딴은 그렇기도 하군요. 그래서 내가 이곳을 떠나라고 하는 겁니다.”
“그것이 당신의 방식이오?”
“그렇소. 내 통치에 이 녀석은 방해가 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 놈의 발을 듣고 혹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반역을 행하오. 그로써 평화가 깨지고 혼란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다스리는 땅을 떠나라고 하는 것이죠.
내 주장에 잘못 된 점이 있습니까?“
“없구려. 당신 말은 옳소.”
다른 이가 반박했다.
“그들에게도 다른 선택을 할 기회는 줘야 하지 않겠나? 너는 그 모든 기회를 그들에게서 빼앗아 버리고 강제하고 있다. 네가 진정 옳다면 내가 어떤 말로 현혹시켜도 그들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 말도 옳소.”
파천은 두 사람의 의견 모두가 정당하다고 했다.
둘의 시선이 동시에 파천에게로 향했다.
“당신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군요.”
“그럴 거요. 나는 솔직히 그다지 관여하고 싶지 않소. 그렇지만 내가 당신의 지배를 받는 입장이라면 난 자유를 꿈꾸게 될 것이고 설가 그로 인해 죽게 되더라도 포기하지 않겠소.
내가 당신과 같이 지배하는 입장이라면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들의 일탈을 막으려들 것이오.
서로의 입장이 이처럼 다르니 딱히 하나만 옳다고 할 수 는 없는 일이지요. 그러니 중도란 것이 필요한 게 아니겠소? 중도란 절대적이고 완전하지 않다는 걸 스스로 인정할 때만 가능한 법. 누구도 스스로의 불완전한 것으로 남을 판단하거나 강요해서는 안 되오. 당신의 통치를 자발적으로 원하게 만드는게 가장 좋은 일이고 그렇게 하려 면 당신은 지금보다는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거요.
그러기 싫다면 지금처럼 힘으로 눌러 놓으면 되겠지만 오래 가지는 않겠지요. 언젠가는 폭발하게 될 테니까.”
정복자는 파천의 걔기를 곰곰이 따져 보고 있는 중이었다. 뭔가 느껴지는 게 있었던지 표정이 사뭇 심각했다.
“두 사람이 힘을 합한다면 이곳은 꽤 살기 좋은 세상이 될 수도 있을 듯하군요. 그런 생각이 갑자기 드는구려.”
파천은 괜한 얘기에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내 얘기를 합시다. 난 당신들의 능력을 배우고 싶소.”
정복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당신은 누구도 죽일 수 없는 존재이거늘 왜 우리에게 가르침을 받겠다고 하는 것입니까?”
‘그야 이곳에서나 그렇기 때문이지.’
“아, 그건 말이오. 난 당신들이 사는 세상에서는 무적이지만 내가 사는 세상에서는 그렇지 않소. 나보다 강한 이들이 즐비하오. 그래서 난 강해지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고, 당신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사는 세상에서도 과연 우리의 힘이 통할까요? 보니 신과 다름없는 능력을 지닌 것 같은데.”
그들은 파천이 신들이 사는 세상에서 왔다고 믿고 있었다. 파천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거려 주었다.
“그대들은 신들의 세상에서도 상당히 유명하오. 그들 중에서도 당신들처럼 강한 자는 그다지 많지 않소. 솔직히 인간으로 그 정도로 강해질 수 있다는 게 믿기 힘든 일이지요.”
파천은 그들을 한껏 부추겨 주었다. 칭찬을 싫어할 사람은 없다. 정복자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파천은 이후에도 그들을 살살 꼬드겨 지닌 재주를 털어낼 생각에만 몰두했다. 처음에는 절대로 자신들이 지닌 바 능력을 내보이지 않을 것처럼 단호했지만 점차 대화가 늘어갈수록 태도에도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파천은 그들 간에 경쟁심을 유발시켜 놓기까지 했다.
결국 파천은 그들에게서 충분하지는 않지만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었다.

라미레스는 파천이 이렇게 어이없이 죽었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혹시…… 이것이 수호자의 안배가 아닐까?”
썩 확신이 들지는 않았지만 그런 생각으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파천을 반듯하게 누여놓고 차분하게 기다렸다. 수호자의 안배라면 파천은 다시 깨어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
“모든 게 헛 수고로 돌아간다. 파천의 죽음이 확실해진다면 내가 여기 머무를 이유가 없다.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갖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그때 파천과 수호자는 마지막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명심해라. 라미레스에게도 네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말하지 마라.”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내 뜻대로 따라다오. 약속해라, 파천.”
파천은 망설이다가 결국엔 승낙하고 말았다.
“알았다. 그렇게 하지.”
파천은 다시 제 몸을 되찾았다. 영혼이 제 집으로 돌아오자 파천의 신체는 차츰 기능이 회보가기 시작했다. 라미레스의 표정이 급변했다.
“파천, 정신이 드나?”
그는 파천을 흔들어 깨웠다. 파천은 두 눈을 슬며시 뜨며 라미레스를 쳐다보았다.
“시간이 얼마 지났지?”
“휴우, 살아났구나. 하여간 네 놈 때문에 내가 제 명대로 못 살 거다.”
부스스 일어난 파천이 힘없는 목소리로 다시금 물었다.
“얼마나 지났어?”
“지나긴 뭘 지나? 대체 어떻게 된거냐? 그 짧은 시간 동안 수호자를 만났을 리는 없고…… . 대체 왜 갑자기 그랬던 거야?”
“…… . 몰라, 나도. 그냥 정신이 깜빡 나갔다가 들어온 것 같다. 저자의 모습을 보는 순간 갑자기 머리가 띵해지며 어지러워졌던 것뿐이다.”
“수호자의 안배가 널 잡을 뻔했구나. 이제는 좀 괜찮아?”
“그런 것 같다.“
“다행이네.”
“이제 어떻게 하지? 이곳에 별다른 것이 없을 알았는데 더 이상 이곳에 머물러야 할 이유가 있나? 더군다나 수련자들이 애지중지하는 석대까지 이렇게 만들어 놨으니.”
“이왕 이렇게 된 것 여기서 좀더 머물다가 기회를 봐서 내빼야지. 자, 이제부터 너와 나는 수호자가 남긴 융합의 비결을 알아내는 데 주력해야 한다. 마음의 준비는 됐나?”
“그래.”
‘라미레스, 미안하다. 널 속일 수밖에 없는 날…… 용서해 다오.’
그렇다고 해서 수호자가 했던 경고가 라미레서를 향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선발대원들 중 포함되어 있을 메타트론이 라미레스라고 지목하는 건 아닌 것이다. 그럴 가능성은 다른 모든 가능성을 확인해 보고 나서 마지막에 가서야 도달해야 할 결론이었다.
그럼에도 조심하는 건 수호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사실 라미레스도 파천에게 하지 못한 말은 얼마든지 있었다. 둘 사이에 존재하는 비밀은 서로에게 애써 감추기 위함이 아닌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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