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38화 : 실종된 선발대의 흔적을 찾아라

랜덤 이미지

황제의 검 – 138화 : 실종된 선발대의 흔적을 찾아라


실종된 선발대의 흔적을 찾아라

마계도 오늘 따라 분주했다. 마신급 이상을 한꺼번에 소집했다. 물론 그런 명령을 내릴 자는 마계에서 단 하나, 루시퍼뿐이다. 마신들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을 하고서는 긴장 어린 빛을 보였다. 그들이 기대하는 건 한가지. 바로 영계에 대한 대대적이고 전면적인 침략이었다. 그 순간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마신들에게 그 보다 더 기쁜 소식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달콤한 기대는 흔적도 없이 녹아 버리고 만다. 루시퍼가 마신들을 소집시킨 이유는 정작 다른 데 있었기 때문이다.
루시퍼의 모습은 오늘따라 더 활기차 보였다. 대마신들을 뒤에 거느리고 나타난 루시퍼가 마신들을 쭉 둘러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기쁨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곤란한 일을 당한다. 그의 슬픔을 오해하면 죽을 수도 있다. 그가 화내는 장면은 외면하는 것이 좋다. 그의 외침소리가 들리면 하던 일을 주단하고 귀기울여야 한다.
마계에 속한 자라면 누구 할 것 없이 다들 명심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건 대마시들이라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도 마신들은 불안하다.
“드디어 내 아이들의 자랑스런 모습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소개한다. 내 아들들과 딸이다.”
이럴 때는 될 수 있는 한 하늘이 뜯겨 나가라, 땅이 찢어져라 외힘을 토해 줘야 아무런 불상사도 없다.
경험으로 미루어 익리 알고 있던 마신들은 본능이 시키는 대로 힘찬 외침을 토했다.
“와와와와…… .”
파천의 아들과 딸 그리고 천마의 아들을 자신의 소유로 둔갑시킨 루시퍼는 그들을 장성시켰고 힘을 부여해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안심이 안 되어 막강한 힘을 길러 주기 위해 수련을 시켰다.
그런 그들이 출관한 것이다. 단지 그것을 기념하고 함께 축하하기 위해 마신들을 몽땅 소집시킨 것이다.
그렇지만 누구도 루시퍼의 그런 모습을 한심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속으로일지언정 감히 그렇게 생각지 못한다.
루시퍼의 소개를 받은 주인공들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당당한 체구, 아름다운 모습. 그들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이들은 새로 태어났다. 그래서 내 친히 새 이름을 부여하노라. 이리로 오라.”
불칸, 세라핀, 루루라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잠시나마 가져야 했던 환아와 천아 그리고 화아가 루시퍼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루시퍼 앞에 가 작은 망설임의 순간도 없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런 그들의 머리를 루시퍼의 손이 감쌌다. 머리에 머물렀던 손이 어깨로 향하고 친히 그들을 일으켜 세운다.
“그 동안 수고들 했다.”
환아가 대표로 말했다.
“견딜 만했습니다.”
그가 살짝 고개를 든 순간 루시퍼의 눈이 반짝 빛났다. 환아의 이마에 선명하게 각인된 문양의 형태를 보았기 때문이다.
뱀의 형상은 예전과는 비할 데 없이 선명했고 뚜렸했다. 피를 머금은 듯 한 붉은 뱀은 서로의 입을 맞대지 않고 지나쳐 꼬리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거의 닿을 듯 가까운 위치. 환아는 더 이상 예전의 어리고 천진난만한 철부지가 아니었다. 거의 대마신에 가까운 능력의 소유자가 되었다는 걸 이마의 문양은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고 있었다. 아무리 루시퍼가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라고 해도 이처럼 짧은 시간 동안 이 정도로 놀랄 만큼 실력을 향상시킬 수는 없다. 그들의 몸과 정신을 성숙시킨 것과는 또 다른 문제였다.
그 비밀은 바로 환상지대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들이 최종적으로 머문 곳은 메타트론의 마력이 지배하는 마계의 환상지대였던 것이다.
루시퍼의 기대에 부응해 준 환아가 무척이나 흡족한 모양이다. 그는 뒤 이어 천아와 화아도 격려했다. 환아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들 역시 놀랄 만한 장족의 발전을 한 것만은 틀림없었다.
“너희 둘의 이름은 헤르파와 라아그, 그리고 내 딸아, 이리로 오너라. 너는 헤렘이라 하겠다.”
환아와 천아, 화아는 각각 그 이름을 기억했다.
루시퍼가 새롭게 준 이름. 그 진정한 뜻을 안다면 그들의 표정은 달라질 것이었다. 헤르파와 라아그는 둘 다 ‘훼방’ 이란 뜻을 지니고 있었고 헤렘은 ‘저주’란 의미였다.
그걸 알 리 없는 화아는 새로 갖게 된 헤렘이 마음에 들었던지 만개하는 꽃봉오리를 보듯 안색이 환해졌다. 정말 긱가 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루시퍼는 그들 3인을 마신들 앞으로 걸어가게 했다.
“장차 너희들의 왕이 될 존귀한 이들이다.”
루시퍼가 손짓을 하는 순간 그들은 바람결에 날리는 꽃잎처럼 허공을 선회하며 무리 가운데로 떨어졌다.
“와와와아아.”
비명인지 고함인지 모를 소리들을 지르며 마신들은 자신들의 손을 뻗어 세 사람을 받아들였다. 무리는 열광 중에 휩싸여 있었다. 전신을 태울 듯한 열기가 고스란히 그들의 손을 타고 헤르파와 라아그, 헤렘의 전신으로 스며들었다.
루시퍼 뒤에 서 있던 아사셀이 넌지시 물었다.
“저들은 어찌하실 셈이십니까?”
“영계로 보낼 것이다. 저들을 앞서 세우고 영계를 점령할 것이다.
저들이 장차 세울 전략에 따라 난 전쟁을 수행하리라.“
아사셀은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으나 다른 대마신들은 태연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개조를 시켰다고는 해도 여전히 그들에게는 적의 아들이자 딸일 수밖에 없었다. 신뢰할 수 없는 그들에게 너무 막중한 임무를 맡기는 것이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수뇌회의가 열렸다 루시퍼는 영계 침략을 선언하기 위한 마지막 회의가 될 것이라 했다. 대마신들을 제외하고도 라넷과 헤르파, 라아그, 헤렘이 회의에 함께 참석했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었다. 어둠의 천사. 그는 한쪽 벽에 기대서서 회의에 직접적으로 참석할 뜻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였다. 루시퍼가 말했다.
“이제 때가 무르익었다. 그들은 곧 알게 될 것이다. 마계의 힘이 얼마나 무섭고 대단한가를. 천상계와 선계 그리고 무한계를 접수 한다.
순종하는 자에게는 영광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형벌을. 그들 영혼에 낙인을 찍어 영원토록 지워지지 않도록 한라.
또한 자칭 절대자라고 떠벌리고 다니는 오만한 놈들을 모조리 잡아다 내 앞에 무릎을 꿇려라. 그들을 내 친히 정죄하겠다.
아버지 메타트론의 이름으로가 아닌 나 마계마황 루시퍼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영계 침략을 결행하겠다.” 드디어 루시퍼의 선언이 내려졌다. 그 동안 웅크리고 있었던 시간이 길었던 만큼 이들이 쌓아 온 저력은 파악하기조타 힘든 지경. 전영계가 똘똘 뭉쳐 대항해 온다 해도 결코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칠로의 마군 사령관은 대마신들이 맡을 것이며, 중앙의 마황군은 내 아들 헤르파에게 맡기겠다.”
충격적인 선언이었다. 그가 헤르파에게 그 정도의 중책을 맡길 줄은 대마신들도 뜻밖이라는 표정들이었다. 대마신 발리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루시퍼가 그냥 모른 척 넘어갈 리가 없었다.
“왜 불만인가, 발리?”
발리는 기겁을 했다.
“아닙니다. 제가 감히 어떻게…… .”
“헤르파.”
“네.”
“너는 이 전쟁을 어떻게 수행할 것이냐? 전략을 네게 맡길 참인데 좋은 계책이라도 있는가?:
전략이고 뭐고 그냥 무작정 밀어붙인다 해도 쉽사리 막을 수 없는 전력을 마계는 보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루시퍼는 신중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결코 져서는 안 될 싸움인 것이다. 모든 것이 걸려 있는 싸움이기에 그로서도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당장 출진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 반대합니다.”
“호오, 왜지?”
“그 동안 본…… 마계는 자신감이 지나친 나머지 적을 살피는 데 게을리 해왔습니다. 현재의 어떤 상태인지 그들의 잠재되어 있는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이기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황의 존엄을 그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해서라도 출전의 시기는 신중하게 판단해야 할 줄로 압니다.“
“그래서?”
“먼저 그들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천상계와 선계, 무한계뿐만 아니라 그 외의 복잡한 세력 구도까지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이 파악되었을 때 적절한 전략이 세워질 수 있으며, 그걸 바탕으로 일거에 적들을 섬멸해야 합니다.”
“흐음, 듣고 보니 그렇군. 그래서 네게는 마땅한 방법이라고 있다는 것이냐?”
“제가 알고 있기로도 언제든 본 마계의 수족 노릇을 할 수 있는 자들이 무한계 내에 흩어져 있다 들었습니다.”
“그건 네 말이 맞다.”
“제가 무한계에 갔다 오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영계를 낱낱이 파악하고 그 뒤 전략을 수립하겠습니다. 반드시…… 승리할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하도록 하겠습니다.”
“흐음, 네가 직접 가겠다?”
“네.”
루시퍼는 선뜻 허락하지 않았다. 마황군의 사령관을 맡길 정도로 헤르파의 역할을 중요하다. 그런 그가 적진이 틀림없는 무한계로 가겠다는 걸 쉽게 허락할 수는 없었다.
한참 동안 고민을 거듭하던 루시퍼가 말했다.
“너 혼자는 안 된다.”
“저도 혼자 갈 생각은 없습니다. 라아그와 헤렘을 함께 데려 가겠습니다. 대마신 브리트라의 눈빛이 묘해졌다. 신중한 성격답게 그가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건 지극히 당연했다.
“그건 안된다. 라아그뿐만 아니라 대마신 중 하나를 동행시키겠다. 누구를 선택하겠는가? 그리고 헤렘은 두고 가라.”
가더라도 헤렘은 남겨 두고 가라 했다. 헤르파는 루시퍼를 빤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대마신은 적당하지 않습니다. 저들의 관심을 집중시킬 것입니다. 정 그러시다면 라넷과 함께 동행하겠습니다.”
“흐음, 라넷이라면…… . 좋다,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겠다.”
헤르파와 라아그 그리고 라넷이 무한계로 침투하기로 최종 결정이 내려졌다.
그들이 다시 마계로 돌아오는 순간 전쟁은 시작되는 것이다.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그 시점은 점차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마계에서 헤르파의 일행이 무한계로 떠나던 그 시간. 천상계에서 무한계를 향해 떠나는 이들도 있었다.
선발대에 포함된 몇몇 아라한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었던 천상계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죽은 덧이 웅크리고 가만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서른세 명의 천주들이 회동을 가졌으며 그 회의에서 전체적인 전략이 논의되고 결정되었다.
그 결과 그들 역시나 준비를 서둘렀으며 군대를 새롭게 편성하기 시작했다. 천주들의 회의에 뒤 이어 신장들의 모임이 있었다.
신장들은 명실공히 천상계를 지탱하는 무력의 상징이자 중심 전력이라 할 수 있었다. 영계의 대연합군이 편성된다 해도 이들은 중심 역할을 해야 할 것이었다. 그런 그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각각 천주의 명을 받은 신장들은 서로의 주장을 펴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들이 내린 결론 중에 이런 부분이 있었다.
‘문제는 무한계다.’
무한계가 정리되고 연합되지 않은 지금의 상황은 그들로서도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자체적으로 해결하길 바라고 있던 이들로 서도 기다려 주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괜히 참견했다가 역효과를 유발할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그 동안 이들의 발목을 묶어 놓고 있었다면 이제는 더 이상 늦출 수 없다는 조급함이 이번엔 새로운 결정을 내리도록 했다.
신장의 파견. 그의 임무는 무한계의 상황을 파악하고 자체적으로 연합군을 편성할 여건이 조성되어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무한계 곳곳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외부 적들의 동태를 파악하는 것도 함께 부여되었다.
그 적임자는 여러 명이 거론되었다. 그런데 아무도, 설마 그가 관심을 보일 줄은 몰랐다. 천상계의 신장들 중 종잡을 수 없는 성격 탓으로 모두에게 골칫덩이로 주목받고 있던 유명한 자가 있었다. 천주를 보좌하고 천상천을 외부의 적들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신장의 주된 역할이자 임무이거늘 그런 것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자였다.
그러다가도 한번씩 요동을 하면 온 천상계가 떠들썩해지도록 큰 사고를 치곤 했다. 그럼에도 그가 여태껏 그 자리를 책임지고 있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던 신장들고 그의 고집을 꺽지는 못했다.
그는 반대하는 자가 나오면 당장이라도 싸움이라도 걸 기세로 제 주장을 폈고 결국엔 적임자로 파견되기에 이른다. 혹시라도 이 일로 인해 무한계와 문제가 불거질 것에 대비해 신장들은 그가 떠난 후 은밀히 다시 의견을 모았는데 그 내용이 너무도 황당했다.
무사히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와 준다면 다행이고 그렇지 않을 경우 천상계는 이 일과 무관한 것으로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 스스로 무한계로 들어섰으며 그 스스로 모든 걸 결정한 일로 그래서 그는 스스로 책임을 져야만 했다.

“우하하하, 내 말이 맞지 않았더냐? 너는 괜한 일에 고집을 부려 매를 버는구나.”
선계와 인접한 뜰의 한 주점 안이었다. 주점에 앉아 이런 저런 대화에 열중하던 자들은 주점이 폭삭 주저앉을 만큼 큰 소리에 모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들은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약간은 분노가 담긴 시선들을 방금 소리났던 곳으로 사정없이 던졌다. 저것들은 뭐야, 라는 시선들이었다.
“그, 그만 좀 하십시오. 여기는 뜰입니다.”
“시끄럽다. 네 놈이 먼저 내기를 걸어 놓고 이제 와서 지고 나니 딴소리더냐?”
둘이었다. 주점 제일 구석에 앉은 자들은 아까부터 한곳만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 중 하나가 별안간 소리를 질러댄 것이다.
둘 중 덩치가 작은 가녀린 체구의 영자가 우는 소리를 했다.
“정말 때리실 겁니까?”
“그럼, 때려야지. 약속은 양속인데 내가 어길 수가 있어야지.”
“너무하십니다.”
“너무하긴. 자, 갖다대라.”
둘은 아직까지도 주점 안 모든 시선이 자신들에게로 집중된 걸 모르는지 하던 행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때 참다 못한 한 영자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는 입구 쪽 가까이에 동료들 서넛과 함께 부르를 마시고 있던 중이었다.
“거 참, 자기들만 있는 자리도 아닌데 너무 시끄럽군. 이봐, 좀 조용히 있을 수 없어?”
덩치 큰 영자의 고개가 슬며시 그쪽을 향해 돌아갔다. 그제야 그는 은근한 분노를 담은 시선들이 자신들을 향해 모조리 몰려와 있다는 걸 깨달은 것 같았다.
비밀스런 짓을 하다 들킨 것처럼 그는 무안해 하는 미소를 지었다. 얼굴이 거뭇거뭇한데다 험상궂게 생긴 인물이 헤벌쭉 웃는게 보기 좋을 리 없었다. 그건 어떻게 보면 오히려 화를 내는 듯한 모습으로 오해될 소지도 있었다.
“헤헤헤, 내가 워낙 목소리가 커서 그러는 것이니 다들 이해해 줬으면 좋겠군. 이 저도쯤 못 참아 준대서야 어디 말이 되나?”
그리고서는 또다시 왕왕거리는 목청으로 한껏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자, 머리통을 갖다 대거라.”
“에구.”

머리통만한 주먹으로 그 보다 작은 뒤통수를 갈긴 거한은 흐믓한 얼굴을 다시 내기를 제안했다.
“이번엔 뭘로 할까?”
아직도 탁자에 엎어져 숨을 고르고 있던 가녀린 사내. 그가 간신히 고개를 쳐들고는 천천히 가로젓는다.
“싫습니다. 저 안 할래요.”
“듣기 싫다. 넌 무조건 해야 돼.”
또다시 눈앞에서 흔들리는 주먹을 보고 사내는 울상을 짓고 말았다.
“아니 이것들이 내 말을 뭘로 알고.”
입구 쪽에서 참다 목한 자들이 격분해 일어섰다. 그제야 가녀린 사내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챘다. 그는 갑자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내기에 져서 몇 대 맞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어이구, 이것 죄송합니다. 저희들이 너무 떠들었다 보군요. 오랜만네 주점에 오니 너무도 신이나서 그만…… .”
사내는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며 입맛을 쩍 다셨다. 기세 등등한 모습으로 근처까지 다다른 사내들에게 그런 말이 통할 리 없다는 걸 알아챈 까닭이다. 그는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섰다.
“하하, 죄송합니다. 여러분들의 심기를 어지럽혔으니 화를 내시는 건 당연하오나…… .”

고개를 숙이던 그는 그 상태를 입을 다물고 말았다. 머리 뒤통수가 또다시 화끈해진 때문이다.
“나도 미안하군. 네 뒤통수를 보니 나도 그만 때리고 싶어져서 말야.”
“하하하하.”
주점 안이 웃음바다가 된다. 고개를 속인 채로 굳어 버린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목을 꼿꼿하게 세웠다.
“지금…… 날 때렸나?”
“그랬다면 어떨 텐가?”
시비를 걸어오는 상대를 사내는 빤히 올려다보았다. 자신보다 키가 큰 자와 눈을 마주치려니 그는 자연 고개를 약간 위쪽으로 들 수 밖에 없었다.
“허, 이것 참. 아무나 내 뒤통수를 때려서는 곤란하지. 너는 오늘…… 잘못 건드렸다.”
“호, 그래도 기개는 살아 있구나. 그렇게 노려보면 어쩔텐가?”
그때까지도 덩치 큰 사내는 엉뚱한 짓을 하고 있었다. 동행이 본변을 당하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은 듯한 태도였다. 어찌 보면 겁먹고 미리 꼬리를 내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노려보면…… 별 수 없지요, 헤헤. 그저 고정하시고 수고스럽겠지만 오셨던 길을 다시 되짚어 가셔서 앉으셨던 자리에 착석해 주시며 감사하겠습니다.”
그는 또다시 굽신거리며 사내들의 화를 달래보려 애썼다. 은근히 긴장하고 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을 겪자 사내들은 어이없어했다. 그때 또다시 경쾌한 격타음이 주점 안을 울린다.

“이건 우리들을 수고스럽게 한 벌이다.”
또다시 뒤통수를 얻어맞은 사내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아아아, 이놈들이 감히.”
그렇게 비굴한 모습을 보이던 자가 갑자기 실성해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태연하게 앉아 있던 덩치 큰 사내가 벌떡 일어섰다.”
“내가 여기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지.”
그는 무슨 일이 있을 새라 후다닥 주점 안을 벗어난다. 그는 주점을 벗어나 멀찍이 떨어져서는 혀를 끌끌찼다.
“저놈이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으니 나도 몰라 볼 거야. 아암, 내 체면에 저놈하고 힘 겨루기를 할 수는 없고. 에구, 불쌍한 것들.”
그의 예측은 정확했다. 주점의 문이 부서지며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영자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제 발로 걸어나오거나 뛰어나오는 게 아니었다.. 던져지고 있었다. 밖으로 내동댕이쳐지는 자들에게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실신한 데다가 몇 군데씩 부러져 있다는 점이었다.
귀 기울이던 영자는 주점 안이 조용해졌다는 걸 알았다.
“이제야 끝난 건가? 이렇게 쉽게 끝낼 리가 없는데.”
대충 헤아려 보니 주점 안에 있던 영자들은 모조리 밖으로 던져져 얌전히 포개져 있는 것 같았다.
“으아아아아.”
또다시 비명성이 터져나오며 이번엔 주점의 건물이 박살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 건물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형편없는 몰골의 사내가 뚜벅뚜벅 걸어나오는 게 보인다.
“쯧쯧, 저놈의 성직은 고칠 방법도 없으니.”
가까이 오는 사내를 향해 버럭 고함을 지른다.
“네 놈은 언제쯤이나 그 버릇을 고칠 참이냐, 앙? 내가 네 놈과 함께 다니는 게 이제는 부끄럽기만 하다. 에잉, 소문 날까 무섭네.”
휙 몸을 돌려 걸어가는 자를 사내는 부릅뜬 눈으로 노려본다.
“빌어먹을, 내가 저 분의 꼬드김에 넘어가는 게 아닌데. 앞으로 또 얼마나 더 이런 꼴을 당해야 할지.‘
그는 자신이 저질러 놓은 사건 현장을 재차 확인했다.
“너희들은 내게 감사해야 한다.”
‘내가 미친놈처럼 설치지 않았으면 너희들은 죽은 목숨이었어.’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먼저 앞서가는 덩치 큰 자를 뒤따랐다. 주변에 도여든 영자들은 무슨 일이가 싶어 웅성거리고 섰다.

라미레스와 파천은 하룬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아무리 줄이 머리를 맞대고 노력해 봤지만 융합의 비밀에 대해 알아 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사실 파천은 벌써 수호자를 통해 그 비결에 상당히 접근해 있는 상태였다. 완전하게 익히거나 펼칠 수는 없었지만 광명만 얻는 다면 문제될 게 없었다.
지금 파천은 메테우스의 석탑에 숨겨져 있던 또 하나의 단서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석탑을 만든 이는 분명 수호자 자신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숨겨진 교모하게 새겨진 문자들은 또 뭐란 말인가? 굳이 그런 식으로 문자를 남겼어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파천은 그림 가운데 숨어 있는 묘한 형태의 문양이 글자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라미레스에게 물었더니 그가 가르쳐 주었다.
대충 들어보니 메테우스가 마지막의 심득을 덕어 놓은 것이라는 데 들어 봐도 무슨 의미인지 모를 소리들뿐이었다.
‘혹시 다른 이가 나중에 추가시켜 놓은 건 아닐까?’
파천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그만 두기로 했다. 머리만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확인할 수 없는 일에 매댤려 봤자 소득은 없는 법.
둘은 하룬을 향해 전속력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 종안 선발대에 다른 불상사가 없었기를, 실종된 대원들을 찾았기를 바라지만 왠지 불길함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파천과 라미레스가 하룬을 떠난 직후 전사평의회는 그럭저럭 잘 돌아가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조용했던 하룬은 또다시 벌컥 뒤집어지고 말았다. 이번엔 꽤나 명성 있는 전사들로부터 단주들까지 죽어 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소리 없이 시작된 살인은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 않았다.
전사평의회도 더 이상은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평의회 의장인 에이어는 즉각적으로 명을 내렸다. 절대로 혼자 다니지 말 것이며, 일개조 단위로 함께 움직이며 항시 주변을 경계하라는 명을 하달했다.
그리고 직속 부대를 하룬 전지역에 걸쳐 경계 근무를 세웠고 적들을 가려내기 위해 하룬 전지역을 샅샅이 뒤져 나갔다. 전사들 전체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더 이상의 살인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편 불칸과 몰간은 라미레스의 각별한 부탁도 있고 해서 선발대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그런 중에도 그들은 자신들을 외부에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페리칸돠 아난다 브라함과 페드로는 하룬 전지역을 돌며 실종된 선발대원들을 찾기 위해 애썼다.
“이렇게 흔적을 찾기 어렵다니. 너무 많은 자들이 몰려 있어서 더욱 그런 것 같군요.”
페리칸의 말처럼 실종된 선발대의 흔적은 고사하고 적의 자취조차 잡아내지 못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아난다는 생각했다.
“뭔가 이유가 있을 겁니다. 혹시 그들이 결계를 쳐놓고 숨어 있는 건 아닐까요?”
가장 가능성이 높은 추측이었다.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페리칸은 한 번 왔던 장소에 또다시 온 것을 깨달았다.
“이곳은 왔던 곳이로군요.”
브라함과 페드로는 말을 하지 않았다. 보이는 적들과 싸우는 게 백 번은 더 낫겠다는 생각을 막 하고 있던 참이었다. 영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아난다가 도와줄 것을 요청하니 따르기는 했지만 그리 적극적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결국 흔적을 찾고 여러 가지 가능성을 추측해 보는 건 아난다와 페리칸의 몫일 따름이었다.
페리칸이 갑자기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그는 높은 곳에 올라 하룬 전지역을 내려다보았다. 전사들의 움직임이 한 눈에 잡혔다.
사건 현장을 잡거나 구별되는 특별한 기운을 포착하기 전에는 단서를 얻어내기란 힘들다는 걸 페리칸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한 가지 희망에 집착하고 있었다.
‘카이로가 속수무책으로 그냥 당했을 리는 없다. 알릴 수 없을 정도로 급박했다 해도 무슨 단서를 남겼을 것이다. 나라면…… .’
페리칸은 자신이라면 어떤 단서를 남겼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그 때 한 가지 생각이 번쩍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는 자신이 지닌 생각을 아난다에게 알려 주었다.
“벽이나 바닥 등에 손바닥 자국이 깊이 남겨져 있는 곳이 없나 좀 살펴봐 주세요.”
페리칸의 말에 아난다도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싶었다. 거신족 콴들은 비상시 자신들간의 연락 수단을 삼는 표식이었다. 그 깊이와 형태에 따라 전달하는 의미가 달랐다. 주로 건물의 벽이나 단단한 돌 등에 흔적을 남기지만 때로 땅바닥에 남겨 두기도 한다.
그들은 습관적으로 별 의미 없이 남길 때도 많았다. 페리칸 역시 카이로와 동행하며 그렇게 하는 걸 여러 번 목도한 적이 있었다.
네 명은 흩어져서 찾아보기로 했다. 너무도 넓은 지역인지라 그들만으로 그 작은 흔적을 찾기란 무리였다. 그래서 그들은 평의회 본부로 다시 돌아왔고, 의장인 에이어에게 비밀리에 도움을 요청했다.
선발대 내에서도 비교적 강하다 할 수 있는 도나투스와 앙샹뜨도 함께 나섰다. 거기다 에이어의 밀명을 받은 직속대 중 일부도 동원되었다.
손바닥 자국. 그것을 찾기 위해 그들은 온 하룬을 뒤지고 다녔다. 전사들 전부에게 알리면 금방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소식이 퍼지면 발견되기도 전에 지워질 가능성이 더 컸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 방법이 가장 좋은 것이란 판단은 지금으로서는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이제부터는 시간과 인내심이 요구될 뿐이었다.

“이것 봐. 견딜 만한가?”
라치오가 가장 가까이 있는 동료 쿤사이에게 물었다. 쿤사는 고개를 떨구고 있다 간신히 대답했다.
“아직은…… .”
라치오는 시선을 옆쪽으로 주었다. 쿤사는 옆에 그렌달과 로이, 베붓과 벤살렛이 차례로 묶여 있었고 그 옆으로 아레나와 카이로가 보인다.
라치오는 손에 채워진 수갑을 쳐다보다 다시 정면을 노려보았다. 자신을 QKsgl 관찰하고 있는 이와 눈이 마주친다.
‘이놈들 분명 아바돈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 수갑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풀 수 없다. 더군다나 주변에 결계까지 쳐져 있다. 방심하다 이런 꼴을 당하다니.’
그들은 모두 벽에 묶여 늘어져 있었다. 양손과 발목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었고, 그 끝은 사슬에 묶여 벽 깊숙이 박혀 있다.
벽은 특수하게 제작된 금속이라 웬만한 힘으로는 부술 수도 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 정도쯤 어떻게 못할 정도로 이들이 약한 건 아니다. 문제는 수갑에 있었다. 수갑은 프리즈마를 억제하는 효능이 있어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더군다나 두 눈 빤히 뜨고 감시하는 눈길들이 있어 섣부른 짓이라도 할라치면 금방 고통을 가해 온다. 가장 치열하게 저항했던 카이로는 축 늘어져 있었다.
이들은 어쩌다 한자이레 모이게 되었다. 바로크를 몰래 따라왔던 카이로와 팡을 찾으려고 헤매던 아레나, 그 뒤를 쫓아오던 라치오 일행이 한 자리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그들은 비밀 통로를 발견했고 그것이 하룬 전역의 지하에 광범위하게 뚫려 있다는 걸 알았다. 적들에게 둘러싸여 치열하게 싸우던 그들은 한 순간 어둠에 휩싸였고 일시에 정신을 놓았다.
‘그건 뭐였을까? 무슨 수법에 당했는지조차 도통 알 수가 없구나.’
라치오로서는 전혀 방비하지 못하고 당한 것이다. 그는 족쇄에 채워진 자신을 발견하고서도 한 가지 희망을 가졌다. 쿤사는 술사다. 그렇다면 프리즈마를 억제하는 수갑과 상관없이 이곳을 탈출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런데 마지막 희망이었던 쿤사가 절망적인 어조로 말했던 것이다. 결계가 쳐져 있노라고. 도저히 손 써볼 방법이 없다고 했다. 그때부터 라치오는 초조해졌다.
덜컹
문이 열리며 누군가 안으로 들어서는 게 보였다.
“별일 없겠지?”
벌떡 일어선 프뉴마의 최말단급인 이아오마이가 상관인 싸나코스에게 목례를 했다.
“이상 없습니다.”
“좋아, 곧 다이모니온께서 여길 오실 것이다. 그때까지 한 순간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알겠나?”
“네.” 싸나토스가 카이로에게 향했다. 카이로에게 동료들을 가장 많이 잃은 싸나토스의 눈빛이 매섭게 번뜩였다.
‘지독하게 강했던 놈이었지만 지금은 손가락 까닥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을 거다.’
“이봐, 꼴 좋구나. 네 놈들이 살아 있을 시간도 얼마 되지 않는다. 대장께서 묻는 말에 충실하게 내답하면 좀더 편한 죽음을 맞을 수 있을 것이고, 그러지 않고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면 끔찍한 꼴을 당하게 될 것이다. 명심해라. ”
마지막 순간에 그는 모두를 쭉 훑어보며 말했다.
아레나가 감고 있던 눈을 치켜 떴다.
“팡은, 팡은 어딨나? 너희들이 데려 갔나?”
“팡? 아, 그놈 이름이 팡이라고 했던가? 그런데?”
“무사한가?”
“괴상한 계집이군, 네 걱정이나 하거라. 그놈은 무사할뿐더러 본아바돈의 성전에 참예할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지?”
“피곤한 계집이군. 네 처지가 어떻게 될지 생각해 봤나? 다이모니온께서 결정하시겠지만 너희도 운이 따른다면 성전에 참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기를 빌어라.”
카이로가 킬킬 웃기 시작했다. 그는 가장 처참한 꼴을 하고 있었는데 웃을 때마다 피가 입 주위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모진 꼴을 당한 게 틀림없었다.
“개소리…… 하지 마라.”
“뭐라고 했나?”
싸나토스는 카이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짖지 말란 말이다.”
물끄러미 카이로를 주시하던 싸나코스가 카이로에게 바싹 다가섰다.
“아직 맛을 덜 본 모양이군.”
“큭큭큭. 쿨럭, 쿨럭.”
카이로는 입밖으로 핏덩이를 연거푸 게워냈다.
“독한 놈! 좀더 심하게 다루고 싶은 맘이 간절하다만 지금은 참으마. 다이모니온께서 질문하는데 대답도 못하면 곤란하니까.”
“너희들 잘 기억해 둬. 난 빚지고는 못산다. 백 배로 같아 주겠다.
네 놈들의 껍질을 모조리 벗겨 버리겠다., 반드시.”
퍼퍼퍼퍽
“커억, 꺽, 쿨럭, 쿨럭.”
싸나코스의 주먹과 발이 사정을 두지 않고 카이로의 전신을 두드려댔다.
그때마다 카이로의 손에 채워진 사슬의 끝이 무세를 견디지 못하고 끊어질 듯 팽팽해진다. 그는 한참을 더 카이로를 못살게 굴다가 그제야 화가 좀 가란앉았는지 뒤로 물러섰다.
“내 심정 같아서는 네 놈을 당장 죽여 버리고 싶다만 그것이 널 위한 일인 것 같아 여기서 참는다.”
‘반드시 이곳은 발견된다. 그때까지만 기다려라. 그때까지는 살아 있어야 한다.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어. 시작도 못해 보고…… 이렇게 죽기엔 너무 억울하다.’
카이로는 강하다. 이렇게 쉽게 잡힐 인물이 아니었다. 그 또한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고 실신했었다. 사방이 갑자기 어두워졌다는 것만 기억했다.
그 뒤에 깨어나 보니 이런 꼴로 묶여 있었던 것이다. 그는 거신족 본래의 모습으로 화신하지도 않았었지만 상대하는 자들 중 그를 곤란케 할 정도로 강한 자는 없었다. 그것이 그만 방심하게 만든 것이다.
그는 아레나와 라치오 일행을 도와 적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있던 중이었다. 거기까지가 기억의 끝이었다.
문이 또다시 벌컥 열리며 한 명이 뛰어 들어왔다. 그 자는 빠른 어조로 말했다.
“다이모니온께서 오신다. 모두 준비해라.”
그 말이 끝나자마자 벽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활짝 열린 문을 향해 벽에 묶인 선발대원들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았다. 이놈들의 수뇌가 오고 있음에 틀림없는 것 같았다.
‘어떤 놈인가? 내체 어떤 놈에게 내가 당한 것이냐?’
카이로는 그것이 궁금했다. 검은 안개가 문 주위로 가득 찬다.
“대장을 뵙습니다.”
바닥에 머리를 대고 있던 자들에게서 커져 나온 소리였다. 안개 주위로 몇 명의 인물들이 살짝 고개를 숙인 채로 뒤따라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저건 그냥 안개가 아니다. 모습을 숨기고 있는 건가? 혹시 정신을 잃기 전 느꼈던 어둠이 저놈의 짓인가?’
뭉쳐 있던 안개가 출렁거리며 그 안에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겨우 몇 걸음 간격을 두고서도 카이로는 안력으로 안개를 뚫을 수 없었다.
“이놈들이 전부인가?”
뒤에 있덛 자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이 정도의 인원으로 그 많은 사상자를 냈다는 말이더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 자는 죄를 청하기라고 하는 것처럼 바닥에 엎어졌으며 심하게 떨고 있었다.
“프뉴마 군의 수치다. 더군다나…… 그노시스 님의 도움으로 겨우 제압했다니…… . 상부에 이 일이 알려지면 나까지 문책당할 일이야.”
“…….”
카이로는 적들의 대화를 듣다 자신들을 제압한 게 눈앞에 있는 정체불명의 인물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노시스, 그노시스…… . 분명 그렇게 말했지?’
그는 그 이름을 몇 번이나 되뇌이며 기억에 담아 두었다. 그것이 이름이 아닌 직위라는 걸 카이로는 알지 못했다.
“이놈들의 신분은?”
바닥에 엎어져 있던 자가 고개를 들고 보고하기 시작했다.
“맨 끝에 있는 놈부터 카이로, 아레나, 벤살렛, 베붓…… .”
“이름을 물은 게 아니다.”
“죄송합니다. 모두 선발대원들입니다. 전사도 있고 술사도 섞여 있습니다.”
“대체 어떤 놈이 내 수하들을 그렇게 많이 죽인 거지? 선발대 중 대단한 놈은 얼마 없다 들었는데?”
“바로 저 끝에 매댤려 있는 놈입니다. 이 중에 제일 독종이기도 합니다. 아직까지 정확한 신분은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안개가 출렁거렸다. 카이로는 느낌만으로도 안개 속에 숨은 놈의 따가운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척 보아도 꽤나 독종같이 느껴지는 군, 선발대원들이 사라졌으니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고 있겠어. 선발대원이라…… 흐음, 이것 곤란하게 되었군. 전사들이라면 그냥 죽이든 내 방식대로 처리하든 상관없지만 이들에 대한 처결이라면 상부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
그노시스 님에게서는 특별한 명이 없었나?“
“우리는 그 분의 모습조차 보지 못했습니다.”
“신비한 척하는 걸 무척이나 즐기는 일문이군. 어떻게 한다?”
“그냥 죽이기엔 아까운 놈들입니다. 마신으로 개조함이 여러모로 좋을 듯합니다.”
“우리가 현재 보유하고 있는 마신이 몇 놈이나 되느냐?”
“다섯입니다.”
“지원대 전체를 통틀어서는?”
“정확한 숫자는 모르겠습니다. 대충 스물 정도가 될 듯 합니다만…… .”
“상부에서 보내 주기로 약속된 마신은?”
“셋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렇지만 그 시기가 언제쯤 될지 알 수 없습니다.”
“대체 뭘 하고들 있는 건지. 마신 개조가 아무리 힘이 든다지만 너무 더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우라노스 군에 우선적으로 제공되는 듯 여겨집니다.”
“좋다. 이놈들을 상부로 보내라. 대신 단서를 달도록. 반드시 본지원대에 다시 보내 줘야 한다고 말해 둬라. 알겠는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번엔 네가 직접 갔다 오도록.”
“알겠습니다.”
뭉쳐진 안개가 또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열린 물을 메우고 잠시 머물고 있던 안개가 밖으로 사라졌다. 그제야 바닥에 엎어져 있던 자들이 얼어서기 시작했다.
벽에서 튀어 나왔던 자들까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고, 조금 전까지 열심히 보고를 해대던 자와 몇 명만이 남아 물끄러미 선발대원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불쌍한 놈들, 너희들 신세도 비참하구나. 그렇지만 의지를 제압 당했다고는 하지만 본 아바돈의 성전에 너희 작은 힘이나라 사용된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카이로는 대충 돌아가는 상황이 매우 절망적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시간을 아쿠게 되었다. 조놈의 말처럼 그런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 그것만은 안 된다. 죽음만도 못하다. 그런 비참한 꼴만은…… .’
그런 심정은 아레나를 비롯한 모두도 마찬가지였다.

페리칸을 비롯한 수색 인원들은 한시도 쉬지 않고 열심을 다해 뒤지고 다녔다. 중심에서 시작해 점차 외곽 지역으로 넓혀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자 문제가 발생했다. 처음엔 간격이 좁았지만 갈 수록 서로간의 간격이 벌어지고 일인당 할당된 구역도 넓어져만 갔다. 어찌 보면 이런 방식도 거대한 하룬을 모두 뒤진다는 건 어리석은 일일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중단할 수 없었다. 달리 다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카이로를 비롯한 실종된 선발대원들에게 닥친 위기를 이들은 전혀 모르고 있다. 마음속에서 불쑥불쑥 일어나는 불안감이 있기는 했지만 애써 외면하며 태연해지려 노력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버릴 수는 없었다.
이들이 누 둔에 불을 켜고 사방을 헤집고 다닐 때 파천과 라미레스가 하룬에 당도했다. 그들은 곧장 선발대가 모여 있는 전사평의회 본부로 들어갔고 소식을 듣게 되었다.
파천은 그 소식을 듣자마다 선발대 전원을 끌고 나갔다. 뿐만 아니라 평의회 의장인 에이어에게 부탁해 오대전사단 전원을 동원해 주기를 부탁했다. 그들에게는 자세한 이유를 말해 주지 않고 단지 손바닥 흔적만 찾으라고 은밀히 지시케 했다.
이를 안 페리칸이 적이 알고 혹시나 지우지 않을까 염려했지만 파천은 단호하기만 했다.
“지금 시점은 그걸 염려할 단계가 아니다. 죽지 않았다 해고 위험에 처할 만큼 시간이 흘렀다. 만약…… 아직까지 살아 있다고 해도 그들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그러니 시간 소모를 줄이는 게 지금은 더 시급한 것.”
그리고 파천은 최대한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또 한 가지 조치를 취했다.
하룬의 전사들 모두에게 평의회 의장의 또 다른 명령이 내려졌다.
모든 전사들은 정해진 거처로 들어가 특별한 명이 있기 전까지 처소를 이탈하지 말라고 지시를 내려 둔 것이다. 이는 최대한 움직임을 파악하기 용이하도록 한 조치였다.
뿐만 아니라 라미레스와 불칸, 몰간, 페리칸 등은 단서를 찾아 함께 헤맬 것이 아니라 선발대와 오대전사들의 안전을 책임지게 했으며 특별한 기운을 포착하는 것에 집중케 했다. 전격적이면서도 발빠른 움직임이었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