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40화 : 모험을 거는 천상계의 천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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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검 – 140화 : 모험을 거는 천상계의 천주들


모험을 거는 천상계의 천주들

선발대는 중부권의 중심으로 서서히 접근해 가고 있었다. 전사들이 빠져나간 중부권은 조용하기만 했다. 모든 게 괜한 기우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사방은 평화롭기만 했다.
카이로와 페리칸은 전면은, 불칸과 몰간은 좌우 측면을 주로 감시했으며, 때때로 선발대를 떠나 멀리까지 나갔다 오기도 했다.
“이것 지나치게 조용한 게 오히려 더 이상한데.”
불칸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라미레스도 말을 않고 침묵을 지킨 지 꽤나 오래되었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파천은 그게 궁금했다. 시선의 끝자락에 깊은 숲이 보이자 파천이 긴급히 제안했다.
“여기서 잠시 쉬었다 간다.”
굳이 휴식이 필요해서는 아니다. 눈앞에 보이는 숲에서 근거 없는 불길함이 흘러 나왔기 때문이었다. 라미레스도 앞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파천이 물었다.
“뭔가 잡히나?”
“아니. 그렇지만 뭔가 있을 것 같긴 해.”
헤아리기 힘든 말이었다. 라미레스의 곁으로 다가온 불칸이 의미가 분명치 않은 말을 한다.
“흡사 귀류에 휩싸인 듯하군.”
“귀류라면 귀계의?”
아난다의 덧붙임을 듣고서야 파천은 무엇을 이르는지를 알 것 같았다.
귀계의 귀령들 중 칠성의 영향 아래 있지 않는 라만들이 모여 사는 곳이 있다. 그곳의 지도자를 하만이라 하는데, 그는 생령의 두려움과 악한 정신을 먹고 제 힘을 키운다.
하만은 눈이 없다. 대신 귀류라는 영기를 뿌려 주변의 상황을 인식한다. 불칸이나 라미레스는 하만을 대면해 본 적이 있다. 불칸은 눈앞에 보이는 숲안에 하만이 있는 것이 아닐까 짐작하는 듯했다.
“귀류도 아냐. 그러나…… 그것만큼 기분이 나쁘긴 해.”
다른 선발대원들은 초긴장 상태에 접어들었다. 숲의 초입부터가 시커먼 게 뭔가 알 수 없는 신비한 힘이 도사리고 있음은 대충 눈치로 때려잡을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을 짐작키 힘들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저렇게 내놓고 초청을 안 하니 안 가볼 수도 없잖아?”
파천의 말이었다. 라미레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와 불칸, 몰간만 간다. 나머지는 구경이나 해라.”
뻔히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선발대 전체가 뛰어들 필요는 없다는 뜻이었다. 파천은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준비들 해.”
라미레스의 말에 불칸과 몰간이 심호흡을 했다. 조심스런 태도를 보니 이들 역시 긴장하는 것 같았다 감지되지 않는다 함은 쉽게 볼 수 없다는 걸 이름이다. 적이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으니 심적인 부담을 가지는 건 당연한 일.
이때 라미레스가 앞이 아닌 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선발대원들중 가장 뒤쪽에 있던 너울을 지나 저 멀리까지 시선을 이끌었다. 파천의 시선도 거의 동시에 뒤쪽으로 향했다.
‘이쪽도 적인가?’
누군가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게 느껴졌다. 페리칸과 카이로가 경계를 하며 뛰쳐나갔다.
휘류류륭
하늘에서 빠르게 기류가 휘몰아치며 급강하한다. 바닥에서 먼지가 휘말려 오르며 시야를 가린다. 페리칸은 적이라 판단했는지 다짜고짜 공격을 퍼부을 기세였다.
라미레스가 급히 말렸다.
“잠깐 기다려 봐라.”
그의 제지가 아니었으면 페리칸의 선공이 작렬했을 것이다.
“누구냐?”
라미레스의 물음에 아직 형체도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음성이 대답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다급한 소리였다. 자욱한 먼지를 뚫고 두 그림자가 선발대 앞에 나타났다. 거대한 체구의 사내와 왜소하고 가녀린 체구의 사내. 둘은 나란히 서서 다가서고 있었다. 페리칸이 급히 제지했다.
“거기 서. 더 이상 다가오면 좋지 않다.”
페리칸의 경고에 큰 체구의 사내가 슬쩍 주목해 바라본다. 그것도 잠시, 빠르게 선발대원들을 훑으며 누군가를 찾는 듯했다. 그러다 파천에게서 시선이 멈춘다.
“그대가 바로…… 파천이란 생령인가?”
그랬다. 그가 찾고자 한 이가 파천이었던 것이다. 파천은 고개를 끄덕여 인정했다.
“그대들은?”
“저희들은……”
왜소한 사내의 말을 자르며 나서는 이는 성질이 어지간히 급한 듯했다.
“난 천상계 33천중 무상천의 신장 여록이라 한다.”
무상천의 신장 여록. 그는 천상계 신장들의 회의에서 무한계의 동정을 파악하기 위해 대표로 파견된 신장이었다. 또한 무한계 뜰의 주점에서 한바탕 소동을 일으켰던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 옆에 있는 이는 무상천의 아라한이었다. 선발대원들 중 천상계의 아라한 들이 다급하게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춘다.
그들도 여록의 이름은 들어 봤으나 실제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여록은 두 가지로 천상계서 유명했다. 그 하나는 급한 성정으로 인해 크고 작은 문제를 빈번하게 일으킨다는 것, 또 하나는 도무지 위아래가 없다는 점이었다.
천상계의 신장이라 하면 위로 천주를 모시고 아래로 아라한들을 거느린 채 천상계의 안전을 책임질 의무가 있다 그런데 그는 예외였다. 도무지 그런 것에는 도통 관심이 없고 다른 이들의 전혀 호기심을 느끼지 못하는 일에만 매달려 있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분연의 제 임무에는 소홀해지는 게 당연했다. 그럼에도 천상천의 천주는 단 한 번도 그를 나무라거나 책망한 적이 없다. 으레 그렇겠거니 하고 포기한 것인지, 아니면 나름대로 맡겨진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기 때문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 여록이 파천과 선발대 앞에 나타난 것이다. 라미레스가 여록에게 물었다.
“존귀하신 신장께서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시오?”
약간 비꼬는 듯한 어투였지만 여록은 그런 걸 문제 삼지 않았다.
“그대가 라미레스? 과연…… 명불허전이군. 척 보아도 내 아래가 아니겠어.”
어찌 들으면 상당히 무례한 말일 수도 있었다. 라미레스로서는 상당히 기분 나쁜 말이기도 했다.
설사 무상천주라고 해도 자신 앞에서 이런 말을 쉽게 뱉어낼 수 업ㄱ다, 라고 생각하는 이가 바로 라미레스였다. 그 정도로 자존심이 강한 라미레스 앞에서 사대천왕이나 도리천의 대신장도 아닌 일개신장이 할 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천상계의 아라한들은 여록이 그렇게 말했다는 사실 앞에 놀라워했다.
여록은 도리천의 대신장을 제외하고는 33천의 신장들 중 자신을 능가하는 이가 없다고 큰소리 쳐왔었다. 그런 그가 누군가를 인정한다는 건 상당히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이런 사연을 알 리 없는 라미레스의 어투가 다소 거칠어졌다.
“우리는 한가하지 않다. 짧게 용건만 말하라.”
“그러지. 나도 한가한 건 아니니까. 파천, 이유는 묻지 말고 잠시 시간을 내줘야겠다. 천상계로 가라.”
뚱딴지같은 요구였다. 명령하는데 익숙한 신장의 전형적인 말투였다.
이때 옆에 있던 아라한이 당황하며 급히 나섰다. 라미레스가 막 발작하려는 걸 봤기 때문이다.
“제가 자세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저희는 이번에 두 가지 지시는 무한계로 들어섰습니다. 하나는 무한계의 현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파천님을 천상계로 들이는 일입니다.
이 일은 33천 중 변천의 천주께서 특별히 부탁하신 일입니다. 지금 변천에 몇 분의 천주께서 모여 계십니다. 그 분들이 파천님을 뵙기를 청하셨습니다.
같은 말인데도 하는 이가 달라지나 받아들이는 쪽에서도 반응이 다르다.
“무슨 연유인지 알 수 있을까요?”
파천의 물음에 아라한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저로서는…….”
여록이 덧붙였다.
“가보면 안다.”
파천은 딱 잘라 거절했다.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거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그럴 만한 여유도 없습니다. 미안하군요. 먼 길을 오신 듯한데 거절하게 됐으니.”
여록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네가 감히 천주님들의 청을 거절한단 말이더냐!”
“이것 참…….”
파천은 잠시 어찌 대처해야 할지를 몰라 머뭇거렸다.
라미레스의 차가운 냉소는 마침 시기적절해 파천에게 쏠렸던 시선을 일시에 그에게로 돌려놓았다.
“볼일이 있으면 그쪽에서 오면 될 것은, 오라 가라 하다니. 그 오만함은 여전하군. 이것 봐, 존귀하신 여록 신장. 그대가 무상천에서야 큰소리치고 사는 신분일지 모르나 이곳 무한계에 와서까지 그러면 곤란하지.
내가 자네 천주 앞에서 버럭 고함을 지르면 기분이 좋겠는가? “
여록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라한은 여록의 눈치를 보다 또다시 먼저 나섰다.
“시간은 그리 많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잠시면 됩니다. 허락만 하시면 공간이동을 시키면 되는 것이고, 그곳에서도 그리 많은 시간이 소모되지는 않을 겁니다.
변천의 천주께서 말씀하시길 매우 중요한 일이라 하셨습니다.K 그리고 파천님께도 여러 가지 득이 되리라 여겨집니다. 그러니 부디 거절치 마시길. “
여록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지금 그는 화가 나 있었지만 꾹 참고 있는 중이었다. 스스로 가지 않겠다는 자를 설득시킬 재주가 없기 때문이었다.
“으음, 어떻게 하지?”
파천은 고민했다. 듣고 보니 그리 많은 시간이 소비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런 잠시일지언정 선발대의 곁을 비울 시기는 아니다.
또한 심정적으로도 흔쾌히 수용하시가 쉽지 않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갈등하고 있는데 아난다가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잠시의 심간이라면…… 굳이 거절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천상계의 천주들이 괜한 일로 파천님을 부르실 분들이 아니니 다녀오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여록이 급하게 말을 덧붙인다.
“선발대의 안전이 염려되어서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있는 한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가든, 가지 않든 결정은 빠른 게 좋다.
파천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좋소. 저를 청하신 분들에게로 인도해 주시오.”
라미레스는 파천이 홀로 가는 것에 안심이 되지 않아 동행을 요청했으나 당사자인 파천의 거절로 무산된다.
“선발대의 안위를 위해서도 너는 여기 있는 게 좋을 듯싶다.”
그것이 파천이 거절한 이유였다.
급작스런 천상계의 전령들로 인해 파천은 전혀 예기치 않는 시점에 천상계를 방문하게 된 것이다. 그동안 여러 경로를 통해 천상계에 대해 들어 왔기에 호기심을 지니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방문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누가 무슨 일로 나를 보자고 하는가?!’
이건 단지 파천만이 지닌 궁금증은 아니리라. 지금껏 단 한 번도 적극적으로 무한계의 일에 간섭하지 않았던 천상계의 입장은 지금에 와서도 여전할 것이다.
그런 그들이 일개 생령에 대해 신장을 직접 파견하면서까지 관심을 보인다는 건 상당히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파천의 공간이동을 돕기 위해 신장이 자세를 취했다. 신장 여록이 파천을 천상계까지 보낼 능력은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단지 영언을 전달해 그의 위치를 알리는 것과 이동할 공간의 지점을 정확하게 잡아 주는 정도였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어떤 대상을 소환하기 위해서는 피소환자의 동의가 필요했다. 여록은 파천에게 필요한 당부를 잊지 않는다.
“두 손을 하늘로 뻗치고 내부로 스며드는 기운에 항거하지 말고 받아들이면 된다. 그 힘이 너는 특정한 곳을 이동시킬 것이다.”
간단했다. 파천은 여록이 시키는 대로 따랐다. 몇 번의 호흡이 지나기도 전에 변화는 일어났다. 파천이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서 사라졌다.

잠시 눈을 떴다 감은 것이 파천이 한 일의 전부였다.
전경은 돌변했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건 낯익은 모습이 아니다. 선발대원들 대신 처음 대하는 인물들이 시야를 채웠고, 탁 트인 들판이 보이던 자리에 새하얀 벽이 가로막고 있다.
몇 명인가가 파천을 주시하고 있었다. 파천은 가벼운 현기증에 머리를 짚었다. 공간이동 후에 나타나는 형상이었다.
그는 가장 눈에 두드러지게 띄는 인물에게 먼저 집중했다. 상대의 눈빛은 약간의 호기심을 담았으나 대체적으로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다. 그 눈은 말하고 있었다.
‘그대가 파천인가?’
파천은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파천은 무엇인가 물어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는 선뜻 입을 열 수 없었다. 심장을 압박하는 위엄이나, 처한 상황이 난처해서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예의를 따지는 차원에서도 아니었다.
분명하게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그건 뜻밖에도 친근함 때문이었다. 언제라고 못 박아 규정할 수 없는 때부터 그들과 자신은 서로를 상당 부분 공유했을 것 같은, 많은 시간을 두고 여러 차례 서로를 대면해 너무도 익숙한 것 같은 그런 감정에 빠져든 것이다.
파천은 이런 강정 상태를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힘들었다. 다행히도 그들 쪽에서 먼저 입을 열어 준다.
“번거롭게 해드린 것은 아닌지.”
파천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이렇게 먼 곳까지 오시게 한 이유가 궁금하겠지요?”
“네.”
“제가 설명을 드리는 것보다는 두 분을 먼저 만나 뵙는 것이 여러 모로 시간 절약이 될 듯합니다.”
다른 곳으로 인도하겠다는 의미였다. 파천을 보기를 청한 당사자가 눈앞에 있는 자들이 아니라는 의미기도 했다. 파천은 여러 궁금증이 한꺼번에 일었지만 잠자코 기다렸다. 애써 묻지 않아도 알게 될 일이었다.
“따라오시지요.”
파천은 묵묵히 그들을 따라갔다.
공간의 넓이를 짐작할 수 없는 방을 나온 파천은 이후 한참동안이나 새하얀 발광으로 눈을 뜨기조차 힘든 복도를 걸어야 했다.
신기하게도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걱정이나 근심이 한순간에 씻겨져 내린다. 모든 것이 가능할 것 같은 근거 없는 자심감에 충만된다.
약간의 흥분 상태로까지 이끌어 올리는 힘은 도처에서 쏟아져 나오는 발광 때문인 듯 했다. 그들 중 가장 앞서 걷던 자의 손이 초라해 보이는 작은 문의 고리를 힘줘 잡았다. 그는 파천을 슬쩍 돌아보며 말했다.
“이곳입니다. 들어가십시오. 저희들은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파천이 안으로 들어서자 문은 작은 소음도 없이 천천히 닫혔다.
밖에 있던 다섯 인물 중 맨 뒤쪽에 있던 자의 입에서 낮은 한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과연 잘 하는 일인지를 모르겠습니다.”
아직까지도 문고리에서 곤을 떼지 않은 변천의 천주가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서로의 의도는 같지 않을지라도 목적이 성취될 가능성만은 높아지겠지요. 용천의 지혜를 대면하는 건 수호자도 원한 일. 어쩌면 우리가 염려하는 부작용은 일어나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된다면야……..”
“수호자와 옛용의 의도중 어느 쪽으로 인연이 맺어질지는 알 수 없지만 아예 시도조차 해보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어느 쪽이라고 최소한 루시퍼를 상대할 힘을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는 루시퍼를 상대할 힘을 언급하고 있었다. 마계의 대마황을 상대하는 것과 파천을 모처로 이끈 것과 무슨 연관이 있음을 암시하는 말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여전히 아직은 모든 게 미궁 속에 웅크리고 있을 뿐이었다.

안으로 들어선 파천은 또 한 번 급변한 정경에 놀람의 탄성을 발했다.
끝을 알 수 없는 초록빛 초원이 눈앞을 가득 채우며 다가섰다. 군데군데 살짝 패인 웅덩이에는 연보랏빛 액체가 넘실댄다.
어디서부터인지는 모르나 향긋한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파천은 영계에 들어서고 처음 대하는 푸른빛 하늘에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곳은 그가 익히 보아 왔던 고향의 냄새와 닮아 있었다. 물론 이렇게나 신비하고 정겨운 전경은 그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으나 익숙한 향취가 느껴졌다.
그런 이유로 파천은 자신이 지금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들었음을 망각했다.
그는 시야가 끝나는 지점까지 뛰고 또 뛰었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이곳에 온 목적 따위는 내팽개치고 무한한 넓이만큼이나 큰 자유를 만끽했다.
최소한 이 순간만큼은 영혼이 자유로움을 느끼는 듯했다.
그러기를 한참. 그는 진정시키는 한 소리 울림이 조용한 가운데 사방에서 퍼져 울렸다.
“이곳이 어디인지를 아느냐?”
파천은 일순간에 현실로 내동댕이쳐졌다. 조금 전까지 때묻지 않은 순수한 욕구는 사라지고 집중된 의식이 자리 잡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거지?’
파천은 대답할 말을 찾았다. 평소 같았으면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누가 하는 말인지를 먼저 알아보려 했겠지만 지금의 그는 그런 것에까지 생각의 폭을 넓히지 못하고 있었다.
“모르겠습니다.”
“나를 보고 싶지 않느냐?”
늙어 주름살 가득한 노인이 제 핏줄에게 대하는 듯한 자상한 음성이었다.
“어디에 계십니까?”
“나는 네 옆에 있다.”
파천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소리의 임자를 찾았다.
그는 뜻밖에도 파천의 옆에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어떤 이의 용모를 가지고 평범하다고 하는 기준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애매하지만 파천은 그렇게 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떠올라 주지 않았다.
어디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으나 그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평범한 미소가 자신을 향해 보내지고 있었다. 파천도 따라 웃었다.
“네 영혼은 내 기대보다도 맑고 순수하구나. 참으로 다행이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너와 같은 나그네다. 날 일러 다른 이들은 용천의 지혜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사악한 정령이라고도 부르지. 나는 날 단 한 번도 지혜롭다고도, 사악하다고도 판단해 본 적이 없다.
난 자유인. 그 무엇에도 매임이 없이 자유롭게 떠도는 영혼일 따름이란다. “
“용천이라면…….”
“너도 들어 본 적이 있겠구나. 용천은 옛용이 갇혀 있다 알려진 곳이지. 그러나 사실은 갇혀 있는 것이 아니란다. 세상을 위해 스스로를 묶어두고 있는 것뿐이란다. 난 그곳에서 태어났다. 옛용과 메타트론의 사이엣.
그들이 내 어미요, 아비인 셈이지. 그들이 날 길렀고 날 가르쳤으나 난 한 번도 그들은 내 스승으로 여겨보지 않았다. 그들 또한 나와 동일한, 무엇인가 결여된 불완전한 영혼들.“
파천은 한 가지를 기억해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옛용과 메타트론에게서 루시퍼가 났다고 들었다. 그런데 이건 또 어찌된 연유란 말인가?
“네 생각이 맞다. 네 판단 기준에 따르자면, 나와 루시퍼는 시기를 달리해 태어난 형제와 다름없는 사이지.”
파천의 스스로의 사고 기능이 일시에 마비되는 듯한 느낌에 전율했다. 루시퍼에게도 형제가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거니와 그런 존재가 천상계에 있다는 사실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저를 왜 이리로 부르신 것인지요?”
“너와 나는 한 번은 필연적으로 만나야만 할 운명이었다. 옛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지. 메타트론이 신의 사자로서 제 역할을 다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옛용은 메타트론과 동일한 소임을 담당하고 있었지.
둘은 신에게서 났으니 어떤 측면에서는 지금의 영자들보다는 더 자유로웠다. 그들은 더 많은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신에게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권리마저 누리고 있었지.
그들은 다른 영혼들보다 많은 측면에서 우월한 존재들이었다. 옛용은 하늘 아래 가장 지혜로웠고, 메타트론은 전 우주에서 신 다음으로 힘센 자였다. 서로 연합하니 못 이룰 것이 없었지.
그런 그들에게 다가선 자들이 있었다. 신의 완전성에서 분리된 자들이었다. 그들은 옛용보다 지혜롭지 못했고, 메타트론보다 힘이 세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옛용과 메타트론이 애초부터 지니고 있지 못한 걸 누리고 있었고, 그걸 자랑했다. 그건 바로 자유, 자유의지였다.
나중에 태초의 참사람들에게는 자유의작 주어졌지만 첫 천사들인 그들에게는 그런 자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자유의지로 신을 모함했다. 그리고 유혹했다.
누구보다 지혜롭던 옛용은 그들의 의도를 벌써부터 눈치 채고 있었지만 그들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는 알고 있었던 거야. 주어지지 않은 자유의지를 획득하는 방법을 말야. 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타락하는 것 외에는 달리 없었다.
옛용은 메타트론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타락의 길을 자진해서 걸었다. 신의 의지의 이면을 들어다보고야 만 것이지.
신을 의심하는 순간 그에게는 단 한번도 맛보지 못한 신선한 지혜가 찾아들기 시작했다. 그건 근원적인 지혜였다. 그는 천사들에게 많은 걸 말하기 시작했다. 글 인해 천사들은 흔들리기 시작했어. 그들 중 가장 먼저 옛요의 말에 귀를 기울인 천사가 바로 메타트론이었다.
메타트론의 갈등은 그리 길지 않았어. 그는 확인하고 싶어 했어. 스스로 확인하지 않고서는 그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질 수 없었던 거야. 그러나 그런 결정 자체가 자유의지를 지니기 시작했다는 의미였고, 신을 의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메타트론은 후회했지만 이미 늦어 버렸지. 메타트론은 지금까지도 당시의 결정에 대해 후회하고 있단다. 그런 반면에 그가 처음에 확인코자 했던 것에 대해 지금까지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도 하지.
그런 그의 이중성이 낳은 걸. 그게 바로 나와 루시퍼였단다. 굳이 구별하자면 선한의지와 악한 의지라고 말하면 이해가 빠르겠구나. 이제는 널 이곳으로 부른 이유를 말해주겠다. “
파천은 숨죽이고 귀 기울였다.
“너를 이곳으로 들인 천상계 천주들은 네가 루시퍼를 견제해 주길 바란다. 그러자면 널 제한하고 있는 것들을 해제시켜야만 한다. 잠재된 무궁무진한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해주길 원한다. 그건 네가 생령이기에 가능하다.
인간은 가장 미약해 보이나 실제 그들이 지닌 가능성은 영자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우월하지. 이들에게는 루시퍼를 당해낼 만한 능력자가 없다. 그건 무한계나 선계를 뒤져 보아도 마찬가지. 그들이 내게 기대하는 게 무언지를 알겠느냐? “
“예, 대충은…….”
“그리고 수호자. 그 또한 원하는 게 있다. 수호자가 네 안에 스스로를 금제시키기 전에 날 찾아 온 적이 있었다. 그는 내게 부탁했었다. 알파이온을 네 손에 들려 보낼 테니 원령체로 만들어달라고 했었다.
그 요구의 결과는 천상계의 천주들이 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내게는 그리 힘든 일이 아냐. 물론 그 대상이 너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
파천은 극 한 말들이 얼른 납득이 가지 않았다.
‘수호자는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는 단지 광명을 찾게 되면 모든 걸 알게 될 것이라고만 하지 않았던가?’
“원령체가 된다는 것. 신비한 일이고 무서운 일지. 더군다나 네게는 더군다나 네게는 더욱 그러하다. 영격이 완성되지 못한 자가 원령체가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
지금껏 원령체는 완전자에게만 내려지는 축복과도 같은 것이었지. 신의 선물이었다. 무한한 지혜가 폭포수처럼 들어차 우주의 시원을 꿰뚫고 막힘없이 모든 걸 관조하게 된다. 영혼은 흔들림 없이 견고해지고 신체는 강건해진다. 그 힘과 능력은 신의 근원에서 나온 것. 깊고 넓다.
그런 힘을 네게 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
“잘…… 모르겠습니다.”
파천은 자신에게서 그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결단코 단 한번이라도 상상해 본 적조차 없다. 별로 실감나지 않는 말은 그래서 공허하기만 했다.
“너는 완전자가 아니다. 영격을 고려해 보아도 네 때는 아직 멀기만 하다. 그런 널 원령체로 만들어 달라고 했다. 수호자는 위험한 도박을 내게 종용한 셈이지. 그를 만나보았겠지?”
그는 모르는 게 없는 듯 했다.
“……예.”
“그는 널 통해서 메타트론과 한 가지를 겨루고 있는 중이다. 그들 간의 싸움은 오랜 시간을 통해 이뤄져 왔다. 지금 영계의 상황이 그들 간의 대결이 불러온 결과물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수호자는 여러 가지 안배를 해왔다. 마지막 승부를 위해서 그는 완벽하다 싶을 정도의 준비를 갖춰왔어. 그는 자신의 신념이 옳다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어 한다. 그건 메타트론도 마찬가지. “
“그들이 알고자 하는 게 대체 뭡니까?”
“서로가 점유하고 있는, 스스로 옳다고 믿고 있는 제 입장을 증명해 보이는 것. 그 이상은 나도 알 수 가 없구나.”
그는 파천에게 이 부분만은 알려 주지 않으려 했다.
지금도 그는 용천의 옛용에서 지혜를 제공받고 있다. 제공받는다기보다는 서로가 공유하고 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리라. 그와 옛용의 사념은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현상계에서 이뤄지고 있는 사건들 중 이 둘의 판단을 벗어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고 보는 게 옳다.
그런 그가 직접 확인하지 못했다 해서 짐작조차 못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보다는 파천이 알아서 좋을 게 없거니와 그러면 안 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건 수호자의 태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수호자나 천상계의 천주들이 원하는 것과 내 결정은 별개의 것. 난 네가 원령체가 되는 걸 바라지 않는다. 왜냐고? 네가 다스리지 못할 걸 뻔히 알기에 그렇다. 제어하지 못하는 무한대의 힘은 영자들에게 더 큰 불행을 안겨줄 터.
루시퍼나 아바돈보다도 더 위험한 존재가 되겠지. 바라기는 네 노력이 더해져 얻어내는 게 가장 바람작하겠지. 수호자는 네가 그렇게 해주길 기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해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안배를 해놓은 거고. “
파천은 요구하지 않았다. 힘을 달락, 강하게 해달라고 매달리지 않았다. 솔직히 현재 지닌 힘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에게 지금 요구되는 능력은 광명에 도달하기까지 자신과 주변인들을 지켜낼 정도면 되었다. 지금 지닌 힘이 그 정도에 미치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아직 가려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조급해 하지 않는다. 기다렸다. 결론은 자기에게서 내려지는 게 아니었다.
원령체를 만들어 주는 게 가능하다는 말은 확실히 강한 유혹을 던져 주었다. 그것은 이내 파천의 마음속에 뿌리내려 빠르게 커가고 있는 중이었다.
“너는 내가 어떻게 해주길 원하나? 원령체가 되고 싶은가?”
파천은 스스로에게 자문했다. 그리고 신중하게 대답했다.
“내가 그 힘을 가지게 되었을 때 어떤 문제점이 발생한다는 건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습니까?”
“여러 가지 양상을 예상할 수 있다. 가장 좋은 건 네가 완전하게 그 힘을 소화했을 경우. 잠시의 혼란은 있을지언정 안정을 되찾을 수 있겠지.
그렇게 된다는 확신만 들어도 내가 망설일 이유는 전혀 없다. 또 하나는 밀려드는 지혜를 감당하지 못하고 폭주하는 경우. 넌 순수한 절대 악인이 된다. 존재에 대한 부정, 파괴를 통해서 새로운 질서를 조화시키려 할 것이다. 나머지 경우는 원령화되는 경우인데…….
세가지중 제일 나쁜 상황이다. “
“원령화된다는 의미가 무엇이죠?”
“원령을 통제하지 못하고 원령의 도구가 된다는 의미다. 네 영혼과 의지는 소멸되고 너는 현상을 만들어내는 도구쯤으로 전락하게 된다. 널 통해서 원령은 일정한 규칙성을 띤 채 빈번하게 폭주할 것이다. 영계의 암적인 존재가 되는 게지. 그 누구도 제지할 수 없는 폭군이 되고 마는.
아마 그쯤 되면 메타트론과 수호자가 협력하지 않고서는 제어가 힘들 거다. “ 파천은 등골이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원령체의 위력이란 게 어느 정도인지 전혀 실감이 가지 않는 상황에서 이러쿵저러쿵 얘기해 봐야 이해할 수 있는 범위는 한정되어 있었다.
파천은 포기하는 쪽으로 점점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수호자가 그걸 원했다는 게 저로서는 잘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수호자가 그걸 원했을 때는 달리 방책이 있기 때문이 아닌지요?”
“그가 예상한건 두 번째의 경우였다. 나 또한 그렇게 될 가능성이 가장 많다고 생각하고 있고……. 알파이온을 쓰게 되면 그렇게 유도할 수도 있다.
그 다음 그 힘을 잠재되어 있는 자신의 의지력으로 봉인시키겠다는 의도였다. 수호자 또한 원령의 힘을 다스리는 원령체였던 자. 자연스럽게 두 힘은 결합될 것이고 그 과정 중에 수호자의 의지가 봉인을 시도한다는 계획이지.
전부를 가둘 수는 없겠지만 일부만으로도 훨씬 감소될 것이고, 그 정도라면 광명에 이르기 전까지 별 문제가 없으리라는 계산이지.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일 뿐이지, 실패할 가능성이 더 크다.
그는 내게 이렇게까지 말했다. 만약 실패할 것 같으면 이곳에 널 가둬 버리라고.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너도 들어서 알고 있겠지. 널 포기한다는 건 네 개 봉인된 자신까지도 포기한다는 것.
난 그의 그런 숭고한 결정 때문에 지금 이 순간까지도 사실은 망설이고 있다. 그리고 설사 성공한다 해도 네가 광명을 얻지 못하면 결과는 마찬가지고. “
“그런데 왜…… 그는 내게 이런 얘기를 들려주지 않았을까요? 내게 천상계로 가라는 얘기를 끝까지 하지 않는 이유가 뭐죠?”
“마지막까지 결정을 망설였다는 증거겠지. 그리고 네가 선택할 수 있게끔 부담을 줄여 줄 것일 수도 있고. 어떻게 하겠나? 원한다면 난 널 원령체로 만들어 줄 수 있다.”
파천은 망설였다. 전부 아니면 전무.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럼에도 유혹을 떨칠 수 없는 건 성공했을 경우 자신이 얻고자 하는 위치를 훨씬 앞당겨 이룰 수 있다는 점이었다.
현재의 긴박한 상황쯤은 쉽게 역전시킬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게 된다. 대규모 전쟁을 몇몇의 대결로 단순화시킬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다. 무담의 무게만큼 희망의 부피도 컸다.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널 만나고 싶어 하는 또 한명을 소개하지.”
그는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면서도 은근히 파천의 결정을 부추기는 듯한 분위기로 이끌었다. 파천도 그걸 느끼고 있었다.
‘나를 만나길 원하는 또 하나?’
파천은 자신의 운명이 계속 떠밀려 다닌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여기까지 왔나 싶어서 돌아보면 어느새 더 멀리 떠밀려가 있다. 어딘가 싶어 주변을 돌아보면 낯선 곳에 자신이 서 있는 것이다.
“그를 만 난후 결정을 내려라. 결정은 번복될 수 없으니 최대한 신중하게 내리도록. 포기한다면 저 문을 열고 다시 나가면 되고, 원령체가 되길 원한다면 날 불러라.”
그 말을 끝으로 그는 파천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처음부터 그곳에는 자신만이 있었던 것처럼 착각이 들 정도로 사위를 무거운 침묵이 감싸고 있었다.
파천은 멍한 정신을 수습해서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그곳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누굴까?’
파천은 뒤돌아보다 깜짝 놀랐다.
기억의 편린을 하나씩 꺼내다 보면 마지막까지 엉겨 붙어 있는 작은 조각이 있을 것이라고 파천은 생각해 왔다. 기억을 송두리째, 누군가 지울 수 있다 해도 끝내는 소생해, 뙤약볕아래에 지친 땅과 대기를 촉촉이 적셔 가는 소나기처럼 영혼의 갈급함을 한꺼번에 채원 버릴 그리움이 그에게는 있었다.
시간의 단위로 따져 볼 수 없는, 너무도 커서 작은 가슴으로 다 담을 수 없는 그리움은 사랑이라는 묘한 이름으로 지칭된다. 설란. 그녀였다.
파천은 그렇게 생각했다.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알아보지 못하면 어쩔까? 다른 모습이어서 낯설게 느껴지면 어떡하나? 모든 게 기우였다. 파천은 단번에 설란을 느꼈고 알아보았다.
설란은 처음 그의 눈에 그득 차오르던 그 순간만큼이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그녀는 감동에 북받쳐 울먹거리지 않았다. 파천과 마찬가지로 벅찬 환희의 떨림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둘은 서로에게로 다가섰고 두 손을 마주잡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품을 그리움에 사무쳐 찾았다.
두 사람의 포옹은 한동안이나 이어졌다. 그 안에서 시간도 공간도 부서져 내렸다. 고통도 슬픔도 의미 없는 것이 된다. 서로가 서로를 가득 채운다.
품에서 설란을 떼어 놓은 파천이 싱긋 미소 지었다.
설란도 마주 웃었다. 설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 생각…… 많이 했나요?”
“생각할 틈이 없었소.”
“네? “
의외의 대답에 동그래진 설란의 눈을 바라보며 파천이 농담조로 말했다.
“늘 함께 했기에 생각할 필요가 없었소. 내 눈은 언제나 그대를 담고 있었으니까.”
그랬다. 파천의 지금 말은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파천의 전부는 언제나 그녀를 향해서만 열려 있었고 그녀를 향해서만 달려갔다.
아난다와 라미레스와 페리칸, 카이로가 자신을 찾았을 때도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그는 설란을 떠올렸다. 그녀가 오지 않은 것에 대한 섭섭함보다 그녀에 대한 걱정이 먼저 앞섰다.
설란을 다시 만나다면 해주고 싶은 말도 많았다. 예전에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을 이제는 마음껏 표현하리라 다짐하고 또 했었다.
설란의 분위기는 예전과는 달랐다. 딱히 이거다, 라고 꼭 집어 구별하기엔 힘드나 그녀에게서는 예전에 갖고 있지 않았던 고귀함이 깃들여 있었다. 꾸며서가 아닌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기품이었다.
설란의 파천의 얘기를 먼저 들었고 그 이후에나 자신의 얘기를 했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아이들 얘기를 입밖에 꺼내 놓지 않는다. 한번 뱉어내면 큰일이라도 날 듯 조심스러워한다.
두려움일까? 인정하기 힘든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설란은 파천을 여러 번 놀라게 했다.
“균천의 천주라고?”
그녀의 신분은 파천의 예상보다도 훨씬 더 고귀한 것이었다. 천상계 33천의 천주 중 하나.
33천중 유일하게 여자들로만 구성된 곳. 그곳의 천주가 바로 설란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파천을 기함하게 한 사실이 있었다. 예전 태산에서 처음으로 수호자를 만나고 알게 되었을 때 그와 동행했던 장막 뒤의 음성이 설란의 본신이었단다.
“흐음, 이것 참…….”
파천은 할 말을 잃었다. 설란은 곧 영체를 회복하고 곧바로 파천은 찾지 않은 것에 대해 변명하거나 미안해하지 않는다. 서로에 대한 신뢰는 그 정도로 얕지 않다.
설란은 곧 이어 원령체에 대한 화제로 선회했다. 그녀는 반대 의사는 분명히 했다.
“하지 마세요. 성공 확률은 낮아요. 전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망설이지 않았다. 천상계를 이끄는 천주의 입장을 우선적으로 내세운다면 그녀는 파천이 원령체가 되는 걸 부추겨야한다.
그러나 그러지 않는다. 설란의 설득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원령체가 지닌 그 무한한 잠재력만큼이나 도사리고 있는 위험성이 커요. 천운이 따라 모든 악재를 비켜났다 하더라도 위험은 여전히 잠재되어있죠. 무엇보다도 성정이 과격 포악해질 가능성이 많아요. 전 그렇게 변한 당신을 보고 싶지 않아요.”
설란의 마지막 말이 결정적이었다. 그럼에도 파천은 못내 아쉬움이 남는 눈치였다.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그 힘이라면…….’
파천은 루시퍼와 당당하게 맞설 수 있게 된다. 더 이상 주변 세력들을 끌어들이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일을 해결해 나갈 수 있게 된다. 광명을 얻기 위한 여정도 안전하게 끝낼 수 있으리라.
파천에게는 분명 완수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 일을 마치자면 지금의 그로서는 많이 부족하다. 한때 파천은 할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을 저당 잡혀서라도 루시퍼에게 복수하겠노라 다짐하지 않았던가. 지금이 바로 그 기회였다.
‘원령체가 될 수만 있다면…… 난…… 어떻게 되어도 좋다. 예전에 난 결심한 바가 있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내 운명 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좋다고. 그런데 무얼 망설이는가!’
파천은 부작용을 극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않았다. 그 정도 각오도 없이 요행만 바라고 선택할 정도로 파천이 어리석지는 않다.
그가 만약 원령체가 되기로 작심한다면 그건 최악의 상황까지 받아들이겠다는 각오가 되어 있음을 의미했다. 설란의 눈빛을 보면 파천은 마음이 약해진다. 그래서 말했다.
“잠시만 내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오.”
설란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심정이었다.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끈질기게 대응하는 것부터가 불안했다.
설란은 파천에게 더 이상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았다. 파천이외에는 달리 대안이 없는 작금의 상황이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그가 하지 않는다면 결과는 비관적이다. 설란은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우리 미래는 암울하기만 하군요. 수호가 없는 지금, 당신은 우리의 남은 꿈과 희망을 지켜낼 마지막 보루. 그렇지만…… 난 두렵기만 해요. 앞으로 닥칠 암운보다 당장 당신의 안위가 더 걱정이 된답니다.’
설란은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눈가에 설핏 물기가 묻어난다.
인세에서의 기억은 작은 조각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그녀를 만들고 지탱하고 그려 왔던 관념은 다른 곳에 더 큰 비중을 남겨 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눈물을 보이다니.
그녀는 지금 사랑하는 이의 잘못된 선택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함이 못내 서러웠다. 어떻게 해서라도 말리고 싶은데 그런 열정이 모두 소진되었음에 서러워하는 것이다. 그녀는 예전의 설란만은 아니었다.
천상계의 한 곳을 책임지고 있는 수장으로서 영계의 안위를 걱정하는 영자로서의 그녀도 상당히 컸다. 아니, 더 클지도 모른다. 끝까지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면 그녀는 어느 쪽 자리에 서는 걸 원하게 될까? 설란은 얼른 결정하지 못하는 자신이 미웠다.
파천은 시종 침묵만 두르고만 있었다. 그의 생각은 이제 두 가지 열린 가능성의 결과에 대해 그려보고 있었다.
‘지켜내는 것이 우선이다. 그 다음에야 나도 설란도 아이들도 있다. 수호자의 안배 중 최종적인 건 결국 원령체와 광명. 둘 중 어느 하나라도 빠진다면 실패는 자명하다.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고서 희망을 품어서는 안 된다.
모두가 원하는 것. 그리고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 그건 이미…… 결정되어 있다. 지금 이런 내 고민은 사치다. ‘
파천은 두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힘찬 소리로 외쳤다.
“원령체가 되겠소.”
파천을 찾은 설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런 결정을 내릴지도 모른다는 한 가닥 불안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파천의 입에서 단번에 쏟아져 나온 외침은 그녀를 새로운 차가움으로 밀어 넣어버렸다. 다른 의미의 절망이 그녀를 엄습했다.
“결국은…… 그렇게 되었군.”
수호자의 뜻대로 되었다는 말일까? 자신의 예상대로 되었다는 말일까? 소리의 주인은 파천 앞에 서서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 미소에서 특정한 감정의 여운을 찾아내기란 힘들었다.
파천은 짧게 끊어 말했다. “내가 어찌하면 되오.”
“알파이온을 먼저 다오.”
알파이온이 파천의 손에서 그에게로 넘어갔다.
파천의 운명은 새로운 길을 열어 놓고 있었고, 시작은 타인으로부터 비롯되려 하고 있었다. 알파이온을 바라보는 파천의 심정은 그래서 착잡하기만 했다.
설란은 뭐라고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할 수는 없었다.
“그대는 여기를 나가 있어야 한다.”
설란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설란은 그의 종용에 떠밀려 끝내 단 한마디 말도 덧붙이지 못하고 문을 나서고 말았다. 그녀의 마지막 사라지는 모습을 파천이 담아 두었음은 당연했다.
‘염려 마오. 내가 선택한 길. 다시 돌아오기 위해 가는 길이지 영영 이별은 아닐 거라 믿소.’

그는 파천에게 마지막 경고를 잊지 않는다.
“실패라는 판단이 선다면 난 이곳을 폐쇄하고 영원히 널 가둘 것이다. 그렇게 되더라도 날 원망하지 말기를.”
“각오는 섰소.”
“그럼 시작해 볼까. 네가 할 일을 지금부터 알려 주마.”
그는 파천의 손에서 받아든 알파이온을 두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그의 지혜는 깊고도 심원해서 그의 눈과 마음을 벗어나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는 파천은 원령체로 만드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을 고안해 두고 있었다.
“넌 수호자를 통해 원령을 구분해 내는 초보적인 단계를 거쳤으리라. 맞나?”
“그렇소. 원령을 느끼고 내 몸 안에 작용하게 하는 기본적인 수련은 거친 뒤요.”
“그럼 되었다. 이 알파이온은 옛용이 지금껏 고안하고 만들어낸 그 어떤 것보다도 탁월하다. 원령의 작용점이자 출구 역할을 한다.
원래는 다른 이들에게 근원적인 지혜를 열어주고자 만들어 내었지만…… 이렇게도 사용될 수 있다.
이건 단 하나뿐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시도는 단 한 번에 그칠 것이다. 그것이 실패든 성공이든.
다시는 이런 기회를 가질 수 없다. 이 한 번의 시도에 그대의 운명과 영계의 판도가 결정 난다. 해놓고 보니 무서운 말이로군.“
파천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지나친 긴장에서 입안이 바싹 말라오기 시작했다.
누구나 완만한 변화에는 크게 경계를 지니고 않고 곧잘 수용하는 편이다. 그다지 인식하지 못한다는 쪽이 맞을 것이다. 지금껏 그가 지니고 왔던 생각, 기억, 가치관들이 일순에 사라질 수도 있었다.
전혀 새로운 개체로 태어난다는 다소 긍정적인 입장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으나, 지금 파천이 하고자 하는 시도는 마음을 놓고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는 위험한 도박이었다.
‘내 결정에 후회는 없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라미레스와 아난다, 그리고 일행을 떠올렸다. 그들을 다시 기억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 전에 여길 나가지 못하고 영원히 갇혀있을 수도 있다. 그는 말했다.
“알파이온의 영성을 최대한도로 개방시킨다. 옛용의 능력과 내 능력이 합일되는 시점에 알파이온을 통해 네게 원령을 이끌어 들일 것이다.
넌 하나 남김없이 그 모든 걸 네 안에 채워 넣어야 한다. 그 순간 수호자의 봉인된 의식이 작용하기 시작한다. 원령이 가득 차 오르면 첫 번째 분열이 시작되고 그건 이내 연쇄적으로 순차적인 융합을 거친다.
그것이 원령체가 되는 첫걸음. 그 다음부터는 지겨운 반복만이 남을 따름이지. 어느 순간 너는 네 내부에서 일어나는 순환에 개입할 수 있는 시점을 맞게 될 것이다. 그때 너는 네 의지로 분열과 융합을 조절해야 한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지 않을 것 같으면 난 망설이지 않고 널 포기한다. 영원히 이곳을 폐쇄되겠지. “
그는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았다.
파천은 알파이온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는데 서서히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투명해진다. 내부에서 밖으로 나오려는 빛과 외부에서 안으로 침투하려는 빛은 일정한 경계를 이룬 채 서로를 밀어내고 있었다.
푸르고 붉은 빛은 그의 손바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의 손이 파천의 머리 쪽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파천은 분명히 인식할 수 있었다. 내부에서부터 지금껏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매우 이질적인 변화가 시작되는 걸.
알파이온의 형체는 더 이상 구분해 낼 수 없었다. 그의 손을 떠난 알파이온이 파천의 머리 안으로 쑥 들어왔다.
‘헉.’
온몸이, 온 정신이 그곳으로 한꺼번에 딸려 간다는 느낌이었다. 파천은 반응하지 않고 저항하지 않았다. 변화를 있는 그대로 수용했다. 그에게로 예용의 힘이 전달되기 시작했다. 음성도 더불어 전해졌다.
[폭발을 견딜지 못할 지도 모른다. 넌 한시도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 된다.]
그는 옛 용의 음성이 경계하는 위험성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정도는 그로서도 방비가 가능하다.
문제를 다른데 있었다. 파천의 의지. 그리고 수호자의 봉인된 의지. 둘의 연합된 힘이 얼마나 원령을 체계적으로 잘 정리해 제어하느냐가 이번 일의 승패를 좌우하는 것.
파천의 신형에서 첫 번째 발광이 있었다.
입고 있던 옷이 한순간에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 파천의 내부에 숨죽이고 있던 아그립바가 한순간 기겁을 하며 뛰쳐나온다. 사실은 강력한 힘을 못 이겨 퉁겨진 것이었다.
아그립바는 한쪽에 서서 눈치만 살피고 있어야 했다. 그가 참견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파천의 첫 번째 발광 이후에 두 번째 발광까지의 시간은 더욱 단축된다. 파천은 머리 윗부분이 뜯겨나간 기분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신체 곳곳에서 막대한 힘의 이동이 감지되었다. 전신이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푸들푸들 떨리기 시작했다. 입을 살짝 벌리고 있었는데 그곳을 통해 휘황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입을 다물어.”
파천은 입을 얼른 다물었다. 그의 내부는 더 이상 차오를 수 없을 정도로 팽창되었다.
‘이러다 터질 것만 같다.’
파천은 그런 걱정마저 들었다. 원령체를 이루기는커녕 그 전에 터져 버리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바로 그때 지금까지와는 전혀 상반된 기운이 스며들어왔다. 거칠고 투박한 힘이 아닌 전신을 따뜻하게 감싸는 힘이었다.
전혀 상반된 두 힘이 충돌 없이 맞물리며 파천의 전신을 한바탕 휘저어 갔다.
광폭한 그 힘은 파천을 저 우주 멀리까지 밀어 올릴 듯 거침이 없었다. 적응은 생각보다 빨랐다. 버거웠던 느낌은 사라지고 편안한기분이 들었다. 바로 그때 힘의 증폭이 이뤄진다.
콰콰콰콰콰
파천의 귓가에는 그 소리가 너무도 또렷이 들렸다.
파팍
첫 번째 변화.
파천의 몸에서 일어난 첫 번째 변화는 전신에서 스며 나온 금빛물결이었다.
금강신!
수호자가 말했던 금강신의 첫 번째 단계를 파천은 경험하고 있었다. 원령체가 되기 위한 단계를 파천은 착실히 밟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부터 고비는 시작된다. 옛용과 합쳐진 힘으로 알파이온이 완전히 개방되었기 때문이다.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근원적인 단위체인 원령이 알파이온의 활짝 열려진 출구를 통해 파천의 몸과 정신 안으로 유입되었고, 일정한 양이 되면 분열했다. 첫 번째 분열이 일어났다.
“으아아아악.”
파천은 이기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고통스러웠다. 세포 하나하나에까지 전달되는 그 처절한 고통은 또렷했던 의식을 한꺼번에 무너뜨리려 했다. 파천은 이겨내려 했지만 끝끝내 터져 나오는 비명을 참지는 못했다. 인간의 몸으로 견딜 수 있는 종류의 고통이 아니었다. 전신이 산산이 부서져 버리는 듯한 느낌.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다.
분열은 곧바로 융합을 유도했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고열이 또 한번 파천을 괴롭게 했다. 고통이 가중돼 신체가 이겨낼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오히려 무감각해지는 법이다.
그러나 파천은 그런 행운도 누릴 수 없었다. 아슬아슬한 경계를 차이로 분열과 융합은 파천의 신체를 원령체로 급속하게 변화시켜나갔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는 더 큰 분열과 융합을 맞아들이기 위한 준비였다. 끊임없는 반복. 그의 말처럼 이건 언제 끝날지 모른다.
파천의 의지가 원령을 제어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k 그것이 가능한 시점을 아직도 멀기만 했다.
파천은 몇 번이가 시도를 해봤지만 전혀 제어가 되지 않았다. 폭발의 힘은 막대해지고 그에 소모되는 원령의 양도 커져만 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천주들은 애가 탔다. 이번 일의 승패에 그들의 미래도 함께 걸려있었다. 변천의 천주가 설란에게 말했다.
“저는 왠지 모르게 성공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처음에는 솔직히 걱정이 앞섰지만 전과 달리 마음이 편하기만 합니다. 처음에 수호자가 이런 제안을 했을 때는 성사가능성은 둘째 치고 그런 시도 자체가 가능할까 싶어 회의적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전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닌 듯 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게 됐죠?”
“생각해 보십시오. 수호자에다 옛용, 그레고스 님이 함께 하는 일입니다. 이런 일이 실패한다면 그것이 더 말이 안 되는 일이지 않을까요?”
듣고 있던 천주들 중 고개를 끄덕여 주는 이는 아쉽게도 단 하나도 없었다.
“그 세분들마저 성공보다는 실패 쪽에 더 비중을 두고 있는데도 말이죠?”
설란의 지적에 변천주는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그건 단 한번도 이런 시도를 해보지 않았기에 내려진 신중함이겠지요. 정말로 실패의 확률이 높다면…… 글쎄요. 그레고스님의 성품으로 봐서 이런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듯싶은데.”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그레고스.
파천과 함께 있는 이가 바로 옛용 족의 족장으로 영계에 널리 알려진 바로 그 그레고스였던 것이다.
오래전 얘기이긴 하나 카란과 메테우스도 친분이 있었고, 특히 카란과는 옛용에게서 직접 수련을 받기로 했었다. 그에 대해 알려진 것 그다지 많지 않다. 예전 그레고스에게서 사사받았던 극소수의 영자들이 하나의 부족을 이루고 있었던 적이 있다. 영자들은 그들은 가리켜 이후 칠대부족의 하나가 된 용족과 구별해 옛용족이라 불렀다.
옛용족의 마지막 후예, 즉 마지막까지 그레고스 곁에 남아 있던 영자가 지금의 용족의 족장이 되었다. 그레고스는 수호자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존재이기도 했다.
“결과는 지켜봐야겠지요.”
이사나천의 천주였다. 이들은 지금의 시도가 장차 영계에 미칠 파급에 얼마만 하다는 걸 짐작하고 있기에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중에서도 영계의 운명을 생령에게 맡겨야 한다는 착잡함도 간간이 내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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