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41화 : 무엇이 진짜 파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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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검 – 141화 : 무엇이 진짜 파천인가


무엇이 진짜 파천인가

파천을 떠나보낸 선발대원들은 그에 대한 걱정보다 먼저 눈앞의 일을 해결하기에만도 급급해 했다. 상대의 정체가 가려졌다. 아바돈. 아바돈이 척살대를 보낸 것이다.
라미레스와 불칸을 선두로 숲 안으로 발을 디뎠다. 그 뒤를 신장 여록과 몰간 카이로가 받쳤다. 신장 여록은 사악한 힘을 경계하는 법술에 능했다. 그가 쳐놓은 결계는 썩 괜찮은 효과를 보였다. 특히 능력이 딸리는 다른 선발대원들을 지켜 주는 데는 안성맞춤이었다.
숲 안으로 완전히 들어선 순간 그들은 놀라움에 직면하게 된다. 눈앞을 가득 메우고 있는 십여 명의 형체는 사악한 기운을 뿌리고 있었는데 그 모양이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추괴했다.
그들을 발견한 두름이 비명에 가까운 경악성을 발했다.
“마신!”
그랬다. 라미레스와 페리칸도 한 번 마주친 적이 있던 마신이란 존재들이었다. 한 둘도 아닌 십여 명의 마신이 한꺼번에 등장한 것이다.
그들은 라미레스가 마주친 적이 있는 그 마신과 비교해 볼 때 어딘가 모르게 격이 떨어져 보였다. 그들의 모습은 제각각 조금씩 달랐지만 공통적으로 닮은 것도 있었다.
푸른 갑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그 표면에 동일한 색상의 작은 뿔이 곳곳에 돋아나 있었다. 그걸 본 신장 여록이 침음했다 그것이 무언지를 알아 본 것이다.
“귀갑을 걸친걸 보니 귀계와 관련이 있나보군.”
그는 아직까지 마신이란 존재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다. 그건 천상계의 천주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난다가 간략히 설명을 보태자 그제야 여록은 일의 심각성에 대해 깨닫는 것 같았다. 아바돈이 새로운 괴물을 등장시켰다며 근심 섞인 소리를 주절댔다.
마신들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아바돈의 이름으로 너희를 처단하겠다.”
금속성의 목소리는 듣고 있자니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그들 무리를 관찰하던 라미레스가 마신들과 전혀 다른 하나를 구분해냈다. 같은 갑옷을 걸치고는 있었지만 마신이 아닌 자가 하나 섞여 있었던 것이다.
라미레스가 그를 주목하고 있자 그가 반응했다.
“라미레스, 그대의 명성을 그 동안 흠모해 옥 있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었으니 참으로 반길 만한 일이다. 마계 대마신의 반열에까지 오른 그대니 만큼 특별히 신경을 썼다. 마음껏 실력 발휘를 해도 좋을 것이다.”
옆에 있던 불칸이 히죽 웃었다.
“여긴 라미레스만 있는 게 아냐. 나 불칸도 있음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어.”
“호오, 그대가 바로 카란의 친위대였던 전사 불칸인가? 그대는 마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나 그런 소리를 하는가?”
“그래봤자 마물에 불과 하겠지.”
“흐흐, 그대들 중에 마신 하나를 당해낼 자가 몇이나 될까? 아마도 내 생각엔 두셋 정도? 겪어 봐야. 두려움이 주는 쾌락을 마음껏 누려라.
마신들이여, 내 명령을 이행하가. 아바돈의 영원한 태양이신 하기오스 님의 명령에 따라 눈앞에 있는 적들을 소멸시켜라. 명하노니 죽음을 집행하라. “
그는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마신들이 움직임을 보였다. 조금 전 입을 열어 말을 했던 마신이 제일 앞서 걸어 나온다.
결계를 풀지 않고 있던 신장 여록이 고함을 질렀다.
“감히 신장인 내 앞에서 마물 따위가.”
그는 결계의 강도를 높였다. 천상계의 법술은 하나같이 사악함을 억누르는 힘이 있었다. 귀계나 무한계 술사들의 술법보다도 객관적이 위력에서 상위에 있었다.
아바돈이 어떤 식으로 마신들을 만들어냈는지는 모르나 그들 또한 신장 여록의 결계에 맥을 못 추어야 한다. 그러나 보이는 양상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잠시 주춤하기는 했으나 그들의 전진은 중단되지 않았다.
서서히 라고는 하지만 그들이 뿜어내는 마력을 간격이 좁아질수록 숨 막히는 압력을 가해 왔다. 결계마저 없었다면 선발대원들 중 상당수는 그것만으로도 기진맥진했을 정도였다.
라미레스의 얼굴에 웃음기가 감돌았다.
“아바돈이…… 내 성미를 건드는군. 누가 내 앞에 제일 먼저 나타날 것인가가 난…… 무척이나 궁금했는데. 이런 헛껍데기들을 보내다니.”
그는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다. 마신들을 이끌고 온 프뉴마의 그노시스는 라미레스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괜히 해보는 소리쯤으로 치부했다. 그는 자신만만했다.
‘마신 열이라면 누구와도 승부가 가능하가. 아무리 라미레스 그대라도…… 오늘은 낭패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는 대산 다른 걸 염려하고 있었다. 그가 선발대 앞을 가로막은 주목적은 생령을 죽이는 일이었다. 그가 공격을 지체하는 동안에 생령은 사라졌다.
‘신장이 함께 있는 걸로 보아 그놈은 천상계가 데려 갔나 보군. 문책을 피하기 어렵겠어.’
자신이 친 결계가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걸 바라보는 신장여록의 심정은 말이 아니었다. 이런 결과는 그로서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같이 왔던 아라한이 걱정스런 얼굴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여록의 발작이 시작되었다.
“이놈의 마물들! 너희들을 처단해 아바돈에 경계의 표시로 삼아야겠다.”
그는 말릴 새도 없이 무리 중에서 뛰쳐나갔으며 곧바로 마신들 중 가장 앞서 있던 놈 앞으로 들이쳤다.
그의 손은 명왕과 초혼의 법술을 동시에 발휘하여 그들 앞에서 휘돌려졌다. 활짝 펼쳐진 손바닥에서 광휘로운 서기가 휘몰아치며 사방을 순식간에 가두었다.
명왕의 법술을 신장들이라면 누구나 펼치는 호신의 법술이었고, 초혼은 사악한 기운을 억눌러 움직임을 봉쇄하는 힘이 있었다. 이 정도라면 영자들이 상대하길 꺼려하는 라만들도 단번에 가루로 만들어 버릴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힘이었다.
느릿느릿 움직여 오던 마신의 움직임이 빨라진 건 바로 그때였다.
파팡
마신은 여록에게 얻어맞으면서도 다가서는 속도가 줄지 않았다. 지켜보고 있던 라미레스가 걱정스런 얼굴을 했다.
‘저놈들을 너무 만만하게 보는군.’
그의 예측대로 마신의 손은 기묘한 선을 그리며 여록의 가슴을 때렸다. 법술에 억제됨이 없으니 움직임은 매우 민활했다. 여록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는 뒤로 훌쩍 물러나며 자신을 친 마신을 찾아내었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초혼이 먹혀들지 않다니.‘
그는 지금 당황하고 있다 한 대 맞은 거야 별 타격이 될 수 없었지만 그가 받은 심적 충격을 이만저만 큰 게 아니었다.
“하하하하, 당황스러운가 보군. 마신에게 법술을 통하지 않는다. 네 밑천이 그게 다라면 넌 마신의 한 손도 당해내지 못한다.”
그노시스는 신장 여록을 마음껏 비웃고 조롱했다. 여록의 얼굴에 한 겹 얼음이 깔린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을 아라한들과 다른 선발대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라미레스가 신경에 쓰였다.
‘오늘 망신살이 뻗쳤군. 그러나…… 나는 여록이다.’
“내가 바로 여록이라고, 이놈아.”
여록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기세를 보였다. 두 발을 어깨보다도 넓게 벌리고 상체를 살짝 주저 앉혔다. 두 손을 합장해 땅으로 내렸다가 서서히 끌어올린다. 마주 붙어 있던 손바닥이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불칸이 아는 척을 했다.
“사대천왕의 절기를?”
사대천왕이란 천상계33천 중 상위 다섯 개를 제외한 다음 순위 네 개천의 천주를 일컫는 말이었다. 그들은 천상계 무력의 정점이었다. 마계에 대마신이 있다면 천상계에 사대천왕이 있다고 할 정도로 명성이 드높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 틀어박혀 무력을 키우는데 주력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술법이나 프리즈마 파동의 기술은 매우 독창적인 데가 많았는데 때때로 신장들 중 사대천왕에게서 직접 전수 받아 사용하는 예가 있었다.
지금 여록도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사대천왕 중 지국을 만난 적이 있었고, 당시 그에게서 몇 가지를 전수받았다. 그 중에 하나를 지금 쓰고자 했다.
불칸이 쉽게 알아보는 건, 그게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 아니라 지국과 몇 번인가 대면한 사이이기 때문이었다. 지국천왕과 카란은 메테우스가 무한계를 확장하기 이전만 해도 왕래가 상당히 빈번한 친밀한 사이였다. 그런 이유로 불칸 또한 지국의 절기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었다.
여록의 두 손은 불붙은 것 같았다. 일명 화인의 술이라고 명명돼 이 기술은 지국의 바탕을 이루는 것이었다. 어떤 대상에 손이 스치기만 해도 장심에서 시작된 불길이 체내로 빠르게 스며든다. 그 부분부터 시작된 불길을 꺼지지 않고 타올라 종래엔 한줌의 재로 만들어 버린다.
마신의 다가섬이 주춤했다. 그걸 본 여록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스쳤다.
“타앗.”
그의 입에서 우렁찬 기합성이 토해졌다. 그는 빠르게 마신에게 접근하며 두 손을 교대로 내뻗었다. 마신은 무심결에 손을 내밀다 화들짝 놀란다.
“키악.”
여록은 마신이 움츠릴 여우도 주지 않았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몰아붙였다. 그러나 그가 상대해야 할 마신은 하나가 아니었다. 주변에서 몰려들던 마신들이 한꺼번에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여록은 그들 쯤 안중에 두지도 않는지 처음에 노렸던 마신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마신들이 점유하고 있는 곳의 상당부분을 여록이 뿜어낸 붉은 기류가 장악했다. 불칸이 말했다.
“우리고 힘을 보태야지.”
어느 정도는 신장이 체면치레했다 여기기에 하는 말이었다. 라미레스의 다물어져 있던 입이 떨어졌다.
“페리칸, 몰간, 카이로! 시작하자.”
그는 나머지는 굳이 나설 필요가 없다는 뜻을 비쳤다. 라신과 여록의 어우러짐을 봐도 라미레스의 판단은 정확한 것 같았다. 마신들을 강하다. 하나면 달리지만 둘이면 신장과 비등하다. 셋이라면 얘기는 틀려진다. 그런 마신들이 열이다.
라미레스는 생각했다.
‘이런 놈들이 대체 몇이나 되는 걸까?’
아바돈의 저력은 이런 마신들만 감안해도 짐작키 힘든 정도였다. 외부에 잘 드러나지 않는 바시류스급의 지휘자들까지 무한계를 휘젓고 다닌다면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닐 것 같았다. 선발대의 주력을 이루는 다섯 명과 마신 열명간의 치열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격정에서 조금 물러서서 편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그노시스는 겉으로는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역시 저들을 만만하게 볼 자들이 아니다. 그러나 쉽게 극복할 수도 없을 터. 이제 시작이다. 끝내는 우리가 준비한 그물망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너희가 소멸당하는 건 시간문제다.’
라미레스를 제외하고는 넷 모두가 화신했다.
역시나 카이로의 거신족 본연의 모습이 제일 인상적이었다. 거대한 신체에 어울리지 않게 빠른 몸놀림을 자랑하며 마신들의 포위망 속으로 뛰어들었다.
페리칸과 몰간은 틈새를 비집으려 약점을 노렸고 불칸은 여록을 도왔다. 어쩌다 보니 라미레스가 가장 많은 수의 마신들을 상대하게 되었다. 이놈들도 라미레스가 사장 강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던지 그를 상대하는 태도가 신중했다.
한편 라미레스는 마신들을 적당히 상대하며 기회를 노렸다. 그는 그노시스를 노리고 있었다. 느긋하게 관전하고 있는 그노시스를 생포하는 게 마신들을 제압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파천은 몇 번의 고비를 넘긴 뒤였다. 일정수위의 압력을 넘어서는 순간 아무리 아름다운 유리잔도 일순에 깨어진다.
파천도 견딜 수 있는 수위의 한계는 있었다. 몇 번인가 깜박, 깜박 정신을 놓을 뻔하기도 했다. 제어되지 않는 원령의 기운은 서서히 포화 상태를 넘어 그의 몸을 벗어나는 일까지 생겨나기 시작했다.
알파이온을 통해 원령을 불어넣고 있던 그레고스는 그걸 보며 긴장한다.
‘아직은 괜찮으나…… 좀더 진행된다면 내 안전도 보장받지 못하겠구나. 역시 원령을 다스린다는 건 무리한 희망사항이었던가? 나 하나쯤의 소멸쯤이야 무슨 대수겠는가 마는……. 장차 올 영계의 혼란은 누가 책임진다 말인가?
여기를 폐쇄하기 전에 내가 위험해지면 그 기회마저 없어진다. 그런 일만은 없어야 할 텐데. ‘
이제 그레고스는 파천이 실패한 뒤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알파이온은 파천의 신체 밖으로까지 밀려나와 있었다. 그만큼 원령의 양이 커졌다는 걸 위미한다.
알파이온의 크기가 점차 작아지고 있다는 걸 감지할 수 있었다. 엄지와 검지를 맞붙여 오므린 크기만큼 작아진 알파이온은 때가 멀지 않았다는 걸 가르쳐 주고 있었다.
완전히 녹아 소멸하기 직전, 가장 방대한 분량의 원령이 파천에게로 유입될 것이고, 그건 이내 대폭발을 일으킬 것이다. 그 전까지 갈 것도 없을지도 모른다.
‘이 아이의 상태를 보면 그 전에 의지를 빼앗길 수도 있겠다. 그럼…… 방법은 없어진다.’
옛용도 그레고스만큼이나 정확하게 파천의 상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가 그레고스의 심중에 전했다.
[알파이온이 손톱만하게 되었을 때까지도 징후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곳을 폐쇄하라. 더 이상의 미련은 어리석은 직이다.]
그레고스는 그럴 수 없었다.
‘먼저 이곳을 폐쇄한 다음에 난…… 끝을 보겠다. 끝까지 책임을 지겠노라 말했으니 나도 이곳에서 마지막을 보낸다. 혹시라도 마지막 순간에 징후가 나타날지도 모르는 일.’
그는 이제 더 이상 알파이온에 집중하지 않아도 좋았다. 행동에 제약이 사라진 그레고스가 아그립바를 돌아보았다.
‘너도 내 신세와 마찬가지구나.’
공동운명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까? 아그립바는 파천을 떠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레고스는 성공하지 못하면 떠나지 않을 셈이다. 결국 파천의 실패는 셋을 이곳에 가두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레고스는 문 앞으로 가 섰다. 결정을 내려야 한다. 망설이다가는 모두가 공멸하는 것이다. 그는 밖에 있는 천주들에게 먼저 알렸다.
[이곳을 폐쇄시키겠다.]
[실팬가요?]
설란의 다급한 질문에 그레고스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아직은 모른다. 최악의 상태에 앞서 안전장치를 해놓는 것뿐…… 나도 아직은 모른다.]
바로 그때 문이 열렸고 설란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레고스는 짐작 가는 바가 있어 굳이 막지는 않았다.
“저도 여기 있겠어요.”
그레고스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반대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반대할 일도 아니다. 둘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알고 있는 그로서는 더욱.
설란이 안으로 들어온 순간, 그레고스에 의해 문은 폐쇄되었다. 그레고스가 다시 공간을 개방하기 전에는 그 누구도 이곳을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한다. 설란은 한쪽에 서서 괴로워하는 파천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심정이야 오죽할까. 서 있던 파천은 주저앉았고 머리를 쥐어뜯기까지 했다.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
설란의 음성은 젖어있었다. 그레고스는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아무것도. 지켜보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다. 그는 지금 듣지도 보지도 못한다. 희미한 의식을 잡고 있기에도 벅차겠지. 마지막 한 가닥 의지를 놓치는 순간…… 우릴 먼저 소멸시키려들 것이다. 각오를 해둬라.”
그런 각오가 돼 있지 않았다면 여길 들어온 결심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균천의 천주라는 신분까지도 내팽개친 상태였다. 힘겨운 줄다리기의 결과가 드러난 셈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파천 하나를 위해 버린 것이 아니다. 아니 그건 그녀 자신을 위한 선택이었다. 만약 밖에 서서 안의 상황을 짐작만 하고 있었다면 그년 앞으로도 그릇된 선택으로 인해 영원토록 괴로워했을 것이다.
그레고스의 진단처럼 지금 파천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다. 그를 지탱하고 있는 의식을 미약하기만 했다. 알파이온의 크기가 작아질수록, 원령의 양이 커질수록, 분열과 융합의 폭발력이ㅡ 거대해질수록 파천의 의지는 점차 약해졌다.
감당할 수 있다 여긴 자체가 오만일지도. 밤새도록 불을 밟힌 촛불의 심지가 마지막 빛을 던져 주듯이 그의 의식은 어둠 속에 깊이 잠들어 가고 있었다. 수호자의 봉인된 의지가 그를 잡아 주지 않았다면 진작 그는 원령의 지배 아래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지금 수호자의 잠재된 의지를 파천과는 반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의 봉인은 한정된 영역 안에서 파천에게 끊임없이 경고한다.
[파천, 이대로 주저앉으면 안 된다. 일어서라. 너를 포기하지 마. 너 하나에 운명을 건 영혼들을 생각해라. 파천, 파천…….]
그의 외침은 침묵으로 메아리쳤다. 파천은 영원의 나락으로 서서히 침몰하고 있었다. 이제 모든 게 끝난다. 원령은 마지막 점령을 선언이라도 하는 듯 화려하게 폭발한다.
“으아아아악.”
파천의 비명은 크고 드셌다. 마지막에 항거라도 하는 듯했다. 자신을 우롱하고 내몰았던 비정한 운명에 대해 초라한 모습으로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었다. 그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흐른다. 그는 거의 의식이 없다시피 했다. 그런데 그가 눈물을 보인다. 설란도 함께 울었다. 그것이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전부라는 사실에 그녀는 비통해 했다. 그레고스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끝나고 마는구나.”
많은 의미가 함축된 말이었다.
“당신의 선택은…… 어리석었소. 그대는 메타트론과 싸워 보지 못한 채 이렇게 소멸하고 마는구려.”
이번엔 파천의 안에 봉인된 수호자는 향한 말이었다.
수호자는 파천과 함께 운명을 같이하고 있다. 파천의 마지막 의식과 함께 그도 소멸하는 것이다. 그레고스는 옛용을 향해 마지막 말을 남겼다.
[지혜의 전사들을 이제 그만 풀어 주시오. 그들을 할 만큼 했습니다. 몇몇의 입장 때문에 증명하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앞으로도 얼마나 더 많은 비극이 잉태될지.]
대답이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K 시작은 내가 아닌 그들이 먼저 했다. 난 한 발짝 물러서 있었을 따름이다.]
[부탁 하나만 하겠습니다]
[말하라.]
[봉인된 전사들을 내보내 주십시오. 만약…… 그들로서도 안 된다면 완전자들을 통해서라고…… 영자들 스스로 해결하게 도와주십시오]
[너는 지금 또다시 신에게 반역하라고 부탁하고 있구나.]
[영자들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게 힘을 줄 자는…… 당신 박에 없지 않습니까? 그건 신에 대한 반역이 아니라, 신이 당신께 바라는 일일지도. 더 이상 침묵하지 마십시오. 그것이야말로 신을 부정하는 오만입니다.]
[벌써 포기한거냐?]
[그럼 이 순간에 희망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넌 한 가지 잊고 있는 게 있다]
“…….”
[수호자가 어떤 자냐! 그가 이러게 쉽게 좌절될 일에 제 운명을 맡겼을 것 같은가? 내가 판단하는 그는…… 메타트론보다도 더 치밀하다. 그를 쉽게 보지 마라.]
아직도 가능성이 숨쉬고 있단 말인가? 껄덕껄덕 숨이 넘어가고 있는데도 아직 살아난 기미가 보인단 말인가? 그레고스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끝났다.’
파천의 신체는 금강신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가는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눈을 뜨고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할 정도로 밝은 빛이 사방을 향해 뿜어져 나왔다. 저 강한 신체가 영계를 향해 돌려 세워졌을 때 세상을 아비규환의 지옥도가 연출될 것이다.
이제 알파이온은 손톱만하게 작아졌다. 마지막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파천, 이대로 끝낼 수 없잖아요 일어서요. 힘을 내란 말이에요. 어서, 어서!”
설란의 외침이었다. 파천에게로 가까이 다가서려는 그녀를 그레고스가 급히 붙잡았다. 그녀는 처연하게 말했다.
“우리 아이들은…… 누가 내게로 데려 오죠? 환아와 화아는…… 이제 누가. 그 애들을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잖아요.”
이번엔 작은 소리였다. 그녀 자신만이 간신히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그녀의 두 눈에서 맑은 눈물이 맺혔다. 볼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웅크린 파천의 등이 들썩인다.
설란의 슬픔을 느꼈을까? 그 안타까움이 전달된 것인가? 바닥을 향해 숙이고 있던 고개가 천천히 들려졌다.
설란도 그레고스도 아그립바도 충격 속에 빠졌다. 찡그린 콧잔등 위의 두 눈이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섬뜩함. 그 눈의 오직 단 하나의 감정만이 담겨 있었다. 파괴의 욕구. 감출 수 없는 파괴의 욕구가 진득하니 묻어 나온다.
어느 특정한 상대를 향한 감정은 아니었다. 존재한 모든 것들을 근원적인 무의 상태로 돌려 놓고자 하는 자연스런 감정의 발로였다. 원령의 성질을 닯아 가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는 더 이상 파천이 아니었다. 알파이온을 녹은 뒤, 더 이상의 원령이 공급되지 않을 때 파천은 발작을 일으킬 게 틀림없었다. 원령의 속성은 끊임없는 생성과 파괴의 순환고리로 대표된다. 우주의 법칙성은 원령의 그런 단순한 활동의 역동적이고 좀더 짜임새 있는 큰 그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파천의 입 꼬리가 슬며시 말려 올라간다. 단 한 번도 짓지 않던 표정이다. 그의 고개라 이리저리 돌려진다. 무언가를 시선에 포착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현 상태를 뭐라 규정지을 단계는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최소한 예전의 파천은 아니다.
그는 원령체다. 지금 그를 구속하고 제어하는 마지막 힘은 아파이온의 공급이었다. 아직 단절되지 않은 원령의 공급을 파천의 마지막 생명줄이나 마찬가지였다. 알파이온이 소멸하면 원령체는 완성된다. 그런 그가 진정 파천인가가 모두에게 중요한 것인지 원령체만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그레고스조차 그 눈을 맞받을 자신은 없었다. 그는 두려웠다.
‘저 눈은 선과 악도, 좋고 나쁨도 구분하지 않는다. 절대선이자 절대악. 단지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가? 어쩌면 내가 한정시켜 놓은 이 공간마저 파괴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우리가 이해했던 것보다는 원령체를 더 무서운 것일지도.’
그가 두려워하는 것과 달리 설란은 애처로움에 전신을 떨었다. 그녀는 자꾸만 파천에게로 다가서려 했다. 그런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고 있던 갈고리 같은 그레고스의 손이 슬며시 풀어지는 순간, 그녀는 파천에게로 성큼 다가섰다.
그녀와 파천의 간격은 손을 뻗으면 닿을만한 거리. 파천의 손이 슬며시 들어 올려진다. 그의 손을 느릿하게 설란의 얼굴로 다가섰다. 이마에서 콧등으로 옮겨 가던 손이 입술에서 멈추었다. 설란의 손이 파천의 손을 움켜잡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파천의 눈과 설란의 눈이 마주쳤다. 설란은 울먹이며 말했다.
“그래도. 이대로, 이대로 우리 함께 가요. 더 이상…… 쓸데없는 미련에 집착하지 말고…… 훌훌 벗어 버리고 우리 함께 떠나요. 그동안 많이 힘들어…… 많이 울었겠죠. 더 이상은 숨어서 울지 않아도 돼요. 전 당신 옆에 언제까지나 함께 있을래요. 그래서…… 그 슬픔이 당신만의 것이 아님은…… 나와 함께 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줄게요.”
설란의 그 말은 웅얼거림으로 파천에게 들렸을 따름이다. 그런데도 파천의 내부에서는 작은 울림이 시작되었다.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모를 진동은 그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고 잠들어 있는 의식마저 끌어올렸다.
기력을 잃은 의지는 마지막 힘을 내 소생의 몸짓을 펼쳤다. 때를 맞춰 폭발한 원령의 힘을 수호자의 의지가 잠시 억눌렀다.
일수유와 같은 바로 그 순간, 파천의 의식이 기적과도 같이 일시 회복된다. 그의 시선에는 설란의 영상이 비로소 맺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한 번에 관통하는 전율. 그걸 설란이 놓쳤을 리가 없다.
“파천!”
설란의 가녀린 두 손이 파천의 얼굴을 힘차게 감쌌다.
“안 돼. 위험해!”
그레고스가 파천에게서 설란을 급하게 떼어 냈다.
“못 보셨어요? 파천이 의식을 찾았단 말이에요.”
그레고스는 멈칫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인가?”
“으으으으으으”
파천이 머리를 감싸 쥐며 괴로워한다. 생과 사를 두고 펼쳐지는 마지막 싸움. 수호자의 외침이 가세했다.
[파천, 지지마라. 지면 너와 나는 모든 걸 잃는다 죽음이라면 차라리 다행이다. 완전히 소멸. 영원히 우리는 자신을 찾을 수 없게 된다.]
알파이온의 마지막 발광은 찬란했다. 그레고스도 설란도 마주보지 못하고 일시지간 두 눈을 감았다. 허공중에 떠 있던 알파이온이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쿠쿠쿠쿠쿵
파천의 몸 안에서 일어난 폭발이건만 은은한 진동이 둘에게까지 전달될 정도였다.
“끄어어어억.”
파천의 두 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 핏물은 얼굴을 적시고 두 손을 적시고 그의 운명을 적셔갔다. 두 눈에서 피가 쏟아질 만큼 그는 여전히 치열한 극한투쟁의 한가운데 있었다.
“안 돼!”
파천의 입에서 터져 나온 외침은 공간을 터트릴 듯 컸다.
파파파파팍
파천의 전신 곳곳에서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살가죽이 터지며 피가 솟구쳤다. 그레고스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 앞에 당황했다. 옛용의 소리가 들렸다.
[마지막 기회다. 그 아이의 머리를 힘차게 가격하라. 네가 지닌 모든 능력을 동원해 그의 머리를 강타하라. 어서, 빨리.]
‘내 전 힘을?’
그레고스는 망설일 여유가 없었다. 옛용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즉시로 깨달았다. 그렇지만 솔직히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자신의 전력이 가해지고도 멀쩡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던 것이다.
그레고스는 파천의 등 뒤로 가서 두 손바닥에 최대한의 프리즈마를 유동시켰고, 전혀 기세는 감하지 않고 파천의 뒤통수를 노리고 힘껏 갈겼다.

설란의 놀람의 단말마를 토해낸 것과 파천이 힘없이 푹 쓰러진 것은 거의 동시였다. 어찌된 일일까? 설란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레고스의 멋쩍어하는 얼굴을 들여다본다.
“왜, 그런 짓을?”
파천이 거짓말처럼 쓰러지자 그제야 그레고스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걸렸다.
“원령체가 내 일격에 쓰러지다니. 기분은 썩 그만인데.”
농담까지 한다. 설란은 도통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영문인지를 몰라 가만있었다. 그레고스의 이어질 설명을 기다렸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슬슬 말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천주의 말대로 잠시 파천의 의식이 돌아온 그 순간 모든 게 한꺼번에 일어나TEk. 알파이온이 소멸하며 마지막 원령을 공금하고, 수호자의 의지가 발동되고, 파천이 치열한 싸움을 시자하고……
원령체가 완성되었다면 내 한방에 이렇게 맥없이 쓰러지지는 않았겠지.“
“그럼…… 우리가 원하던 대로 되었단 말씀이신가요?”
“그건…… 아직 알 수 없다. 좀더 지켜봐야 한다. 그러나 최악의 상황만은 피한 게 분명해.”
그것만으로도 어딘가! 설란은 안도의 한숨을 토하며 쓰러진 파천을 품속에 안았다. 그녀의 손이 피로 얼룩진 피천의 얼굴을 말갛게 닦아냈다. 좀더 지켜보지 않아도 설란은 알 것 같았다.
‘이러게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는 걸.’
그레고스는 아직은 안심할 단계가 아니기에 공간을 개방시키지는 않았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참으로 천운이 따랐다. 이렇게 교묘할 데가. 파천의 의지가 돌아오지 않았던들, 마침 그 순간이 알파이온의 마지막 공급이 아니었던들 이런 행운은 오지 않았겠지. 저항력이 최소화되지 않았다면 치는 순간 되려 내가 죽었을 거야.’
그는 자신의 손바닥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그때까지도 그는 원령체를 자신의 손으로 때려눕혔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이 참에 내가 싹 정리해?’

한편 선발대와 마신들 간의 싸움은 좀체 결과가 나지 않고 있었다. 라미레스가 셋을 상대하는데 그다지 힘겨워하지 않는다는 점과 다른 다섯 명도 하나 정도는 거뜬히 상대하고도 남음이 있다는 정도만 확인될 뿐이었다.
그럼에도 앞도적인 우위는 점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만 봐도 마신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게 해주었다.
그노시스는 다른 관점에서 현 상황을 놀라워했다.
‘라미레스야 그렇다 쳐도 다른 이들까지 이 정도일 줄이야.’
솔직히 그노시스인 자신도 마신 하나를 상대하기 힘들다. 그런 마신들 열이면 선발대가 아무리 강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해도 거뜬히 상대할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이제 보니 그 모든 게 오산이었던 것이다.
판단 착오. 그러나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라미레스는 한 가지 사실에 주목하고 있는 중이었다.
‘마신들은 특별한 기술이 없다. 단지 신체를 단련시키고 프리즈마 유동의 양이 일정하다는 정도다. 물론 지치지도 않고 타격도 받지 않는다.’
그것만으로도 비등한 실력이라면 우위를 점할 수 있을 정도로 장점이라면 장점이었다. 그러나 처음 마신을 대했을 때와 같은 부담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게 라미레스로서는 큰 수확이었다.
‘이제 슬슬 정리해야겠군.’
알아 볼 만큼은 알아 봤다. 라미레스는 곧바로 페리칸 등에게 영언을 전달했다.
[이제 그만 끝낸다.]
라미레스의 그 말로 모든 건 확실해졌다. 그들은 지금껏 전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유야 뻔했다. 마신의 위력을 직접 체험해 보고 약점이 있다면 그걸 파악해내기 위함이었다.
이건 장차 마신의 수가 얼마가 되든 중요한 정보로 작용할 것이다. 그러나 라미레스는 또 한 가지를 잊지는 않았다. 부분만을 보고 전체를 파악하면 안 된다는 불변의 진리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는 있겠으나 그것이 매번 적용되어서는 곤란하다.
마신들의 공격은 점점 포악해졌다. 그들의 기민한 움직임은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었고, 신체는 놀라울 정도로 견고했다. 프리즈마는 거칠긴 했지만 막강했다. 그럼에도 거뜬히 상대하는 자들을 대단하다고 할 밖에.
라미레스의 신로가 떨어진 이상 더 이상 사정을 보아 줄 리가 만무했다. 맨 먼저 카이로의 맹공이 시작되었다. 거신족 특유의 광폭함은 마신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하하하하, 이 잡놈들. 모조리 때려잡아 주마.”
쿠와아아아
그의 거대한 신형을 감싸고 프리즈마가 용솟음쳤다. 진저리치는 프리즈마의 폭풍사이로 큰 배의 노를 연상시키는 그의 팔과 다리가 마구잡이로 마시들 사이를 누볐다.
퍼퍼퍼퍽
연타를 허용한 한 마신이 멀리까지 내동댕이쳐진다. 짓밟히고 얻어맞은 마신들은 언제 그랬느냐 싶게 벌떡벌떡 일어서고, 어떤 놈은 아예 떠밀리지도 않는다.
“이런.”
그걸 본 라미레스가 어이없어 했다. 페리칸의 화신체의 공격도 먹혀들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막강한 힘을 쏟아 부어 봐도 상처는 고사하고 공격의 속도를 늦추지도 못했다.
그나마 불칸이 좀 나은 것 같았다. 그는 최소한 밀어내고는 있었고, 비명을 지르게는 했다.
이런 결과에 모두는 당황했다. 지금껏 봐주고 있었다고 생각할 때는 여유가 넘치더니 정작 회심의 일타가 먹혀들지 않자 당황하게 된 것이다.
졸지에 응원하는 입장이 되어야 했던 다른 선발대원들도 지금의 돌아가는 분위기를 대충은 눈치 채고 있었다. 어떤 공격에도 멈추게 할 수 없는, 맹렬하게 돌진하는 흉기를 손쉽게 제압할 묘수는 얼른 떠올라 주지 않는다. 라미레스가 모두에게 말했다.
“모두 잠시만 물러서라. 한 가지 확인할 게 있다.”
그의 외침에 여록만 부응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씩씩거리며 맹공을 퍼붓고 있는 중이었다.
“거기 있다 내 공격권에 휘말려도 난 책임지지 않는다.”
그제야 라미레스의 말을 들은 것일까? 슬쩍 돌아다본 여록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래도 다치고 싶지는 않았던지 얼른 몸을 뒤로 빼냈다.
갑자기 상대를 잃어버려 허전했던 마신들은 모조리 라미레스에게로 몰려들었다. 그노시스는 라미레스의 하는 짓이 왠지 불안했지만 무슨 일이 있을까, 싶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라미레스는 짧게 호흡을 들이마시고는 몰려오는 마신들 틈으로 오히려 비집고 들어섰다. 마신들이 지척까지 다다를 때를 기다렸다. 일시에 힘을 풀어냈다.
콰콰콰콰
라미레스의 몸을 감싸고 돌풍이 몰아쳤다. 그 힘이 얼마나 빠르고 강하고 거대했던지 통째로 땅거죽을 말아 올릴 듯했다. 실제로도 땅의 일부분이 갈라지며 하늘 높이 올라가고 있었다.
마신들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사정권 안에 들어선 이상 버텨내지 못하면 같이 휘말려 오르는 건 당연했다. 그들은 맥을 추지 못하고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문제는 그것이 단순한 돌풍만은 아니란 점이었다.
프리즈마의 돌풍. 살을 가르고 뼈를 꺾어 버리면 심하면 아예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놀라운 위력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그가 알아보고자 한 건 단 한 가지였다.
‘놈들의 신체가 어느 정도로 견고한지를 시험해 보고 나서…… 웬만한 공격으로 통하지 않는다면 비장의 수를 써봐야겠지.’
라미레스는 아직도 드러내지 않고 숨겨 놓은 부분이 그렇지 않는 부분보다도 더 많았다. 그건 다른 이들도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원래 적이 많고 위험한 환경에 자주 노출되는 이들일수록 숨기는 게 많은 법이다. 라미레스라고 예외는 아니었다.k 죽음에 처하기 직전까지도 끝내 감추고 싶은 비장의 한 수는 분명히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생과 사를 갈라놓는 중요 변수로 작용하며 진정한 강자가 갖추어야 할 기본 요건이기도 했다.
마신들은 큰 저항 없이 말려 올라갔다.
‘이렇게나 쉽게?‘
마신들이 이리 허무하게 극복될 리는 없었다. 라미레스는 그들이 나타나길 좀더 기다렸다.
그노시스는 초조함에 마신들을 삼켜버린 하늘과 라미레스의 얼굴만 연신 번갈아 쳐다본다.
‘이대로 마신들이 당한 거라면……’
적진 중에 홀로 덩그러니 남게 된 그노시스는 처음의 당당함을 유지할 수 없었다. 자기에게로 향하는 따가운 시선들에 흠칫 놀란다. 위기의식은 그의 두뇌 회전을 평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민활하게 했다.
하지만 잠시 후 그는 불안의 부피가 컸던 만큼 긴 안도의 한숨을 토해냈다. 마신들이 하나 둘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쓰러져 있던 파천을 안고 있는 설란과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그레고스. 둘은 근심과 걱정이 서려있는 대화를 이이 가는 중이었다. 설란은 파천의 머리칼을 매만지며 입을 뗐다.
“그럼 아직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치열하게 대립하던 두 힘의 맞섬이 외부의 타격으로 균형을 잃었고, 그 순간의 싸움의 승패는 결정되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 이겼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아직까지도 공간을 개방시키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원령의 승리로 끝났다면요?”
“그럼…… 깨자마자 우리들부터 소멸시키겠지. 반대의 경우라도 무턱대고 안심할 수 있는 건 아냐. 상태를 지켜보고 나서 결정을 내려야겠지.”
“그건 또 왜요?”
“제 의지로 제어한다 하더라고 이 아이의 성정이 원령의 영향을 받았을 것은 분명해. 만약…… 세상에 나가서 해악이 되리라 판단되면…… 그때도 문은 개방되지 않는다.”
“그것도 나쁘진 않군요. 잡다한 세상사에 휘말리지 않고 유유자적 지낼 수 있으니.”
이때 근처를 배회하던 아그립바가 설란의 눈에 띄었다.
“네가 바로 아그립바로구나.”
영계에서의 지난 행적을 들은 바 있던 설란은 어렵지 않게 아그립바를 추측해냈다. 아그립바는 귀여운 얼굴을 활짝 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히.”
“너도 걱정이 되는가 보구나.”
“……”
아그립바의 침묵은 흔한 일이 아니다. 그레고스는 영물인 아그립바가 지금 무얼 생각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저놈은 갇혀있게 될까봐 두려운 거로군.’
아그립바가 파천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본다. 그리 오래지 않았지만 어느새 둘은 정이 들어있었다. 아그립바는 고통이나 슬픔이란 감정의 상태가 정확히 어떤 건지를 모른다. 그런데도 그의 표정은 금세 침울해졌다.
“왜 그러니?”
“싫어.”
“뭐가?”
“파천이 저렇게 두 눈을 감고 있는 게.”
설란의 귀여운 영물, 아그립바를 향해 자상한 미소를 보냈다.
“곧 깨어날 거야. 네가 이렇게나 걱정해 주는데 무슨 일이야 있으려고?”
“그렇겠지?”
“그럼.”
언제 그랬던가 싶게 아그립바의 표정엔 생기가 돌았다.
그런 아그립바를 흐뭇한 심정으로 바라보던 설란이 다시 파천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켯다. 설란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언제 깨어난 건지 파천이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파……천. 언제 깨어났어요?”
그녀의 물음은 조심스러웠다. 그레고스와 아그립바도 긴장한 나머지 아무런 말도 못하고 지켜보고만 섰다. 파천은 대답없이 설란의 얼굴만 올려다보았다. 그 얼굴에서 감정 변화를 찾기랄 불가능했다.
설란은 불길한 예감을 떨쳐내기라고 하려는 듯 다시 파천에게 말을 걸었다.
“좀…… 어때요?”
“누구지?”
파천의 첫마디였다. 그런데 무슨 뜻인가? 설란도 얼른 이해할 수 없었던지 가만 입을 다물고 있다.
‘혹시…… 나를 못 알아 봐서?’
“누가…… 날 때렸나?”
겨우 그게 궁금했단 말인가?
“그건…….”
설란이 어떤 말로 이 상황을 열어가야 할지 난감했다. 정말로 파천이 그걸 궁금해 하는지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딴 사람을 보는 것처럼 달라진 분위기는 설란을 어색하게 만들었다. 설란의 난처함을 덜어주고자 그레고스가 자진해 나섰다.
“내가 그랬다.”
파천이 슬며시 일어나 앉는다. 한 팔을 자연스럽게 무릎 아래로 늘어뜨린 채였다. 파천을 주시하고 있는 설란과 그레고스과 아그립바가 긴자의 빛을 지우지 않는다.
파천의 눈길을 덜 받게된 그레고스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파천의 눈빛은 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는데 그것을 본 그레고스가 지레 부정적으로 판단한 때문이었다.
시선을 그다지 오래 주지 않고서 파천은 일어섰다. 그레고스가 입힌 것으로 보이는 금의를 휘날리며 파천은 곧장 좀 전까지 문이 있던 지점쯤으로 걸어간다.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만 있던 설란과 그레고스가 거의 동시에 급하게 입을 열었다.
“파천.”
“파천.”
둘 다 파천을 불렀지만 심정은 달랐다. 그레고스는 파천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그의 존재를 장악하고 있는 정체성에 대한 궁금증이 더 큰 반면 설란은 그런 것보다는 현재 파천의 상태가 위험하거나 불안정한 것은 아닌지가 더 염려되었다.
어느 족이든 둘의 부름은 파천의 걸음을 그 자리에 우뚝 세워놓았다. 몸을 돌려세우지도 않고 고개만 슬쩍 돌리는 파천은 분명 예전과는 판이한 행동양식을 보여 주고 있었다. 설란이 먼저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죠?”
직선적으로 물어 봐도 되겠건만 설란은 애써 피하는 눈치가. 그녀는 확인하고 났을 때의 절망감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이런 그녀와는 달리 그레고스는 자신이 알고 싶은 걸 숨기지 않는다.
“넌…… 누구지?”
애매한 물음이었다.
“…….”
파천은 대답이 없다. 그레고스가 재차 물었다.
“너에 대해서…… 기억하고 있는 게 있나? 네가 누군지 아는가?”
일반의 경우라면 참 황당한 질문일수 있겠으나 지금은 가장 적절한 물음이라 할만했다. 파천은 그제야 몸을 돌려세웠고 아그립바를 포함한 셋을 담담한 시선으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나는 파천. 파천이다. 난 너희들 영자들과는 다른……. 생령. 난…….”
천천히 뱉어내던 말을 중도 끊은 채 파천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고통스런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매우 괴로운 눈치였다.
“난…… 복수를 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내 모든 걸 뺏어 버린 자들에게 그들이 저질렀던 짓의 대가가 얼마나 비싼 것인가를, 그들의 전부를 뺏음으로서 깨닫게 하려고 왔다. 난…… 마계와 루시퍼와 그들과 관련된 모든 자들을…… 내가 받은 고통의 대가로 소멸시킬 것이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목적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 짧지만 소상하게 밝혔다.
그는 그레고스와 설란을 처음 대하는 것처럼 행동했고 그것을 사실이었다. 그의 현재 상태는 매우 복잡했다.k 그는 여전히 파천이었으며 그다지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원령과의 마지막 힘겨운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그가 받은 정신적 충격은 대단히 큰 것이었다. 영계에 들어선 이후의 일정부분의 기억이 훼손되었고 그 바람에 눈앞에 있는 이가 설란이라는 것도 몰라보았다.
기억상실은 순차적이지 않았다. 시간의 경과와는 상관없이 부분적으로 소멸되었기에 그가 기억하고 있는 부분은 규칙 없이 뒤죽박죽 뒤섞여 있는 상태였다.
예를 들면 그는 천상계에 온 이후로의 기억은 가지고 있지 못했지만 선발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비행선에서의 기억은 지니고 있었으나 대적자들에 해서는 전혀 기억해내지 못한다.
라미레스와 아난다, 페리칸, 카이로 등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이들에 대한 기억은 여전했지만 여타 선발대는 그의 기억 속에 없다. 이런 식이다 보니 그는 현재 자신이 왜 이곳에 와 있는지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본질적인 원령체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현 공간이 폐쇄되어있으며 어떻게 열어야 하는지를 깨닫고 있었다.
그레고스는 이후에도 많은 걸 물었다. 일일이 대답하는 파천에게서는 어떤 공격적인 성향도 보이지 않는다. 파천의 본능적인 판단은 그레고스를 적에서 제외시켜 놓고 있었다.
답답한 건 설란이었다. 파천의 하는 말을 들어보니 자신을 전혀 기억해내지 못하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설란이라고 다시 주지시키면 되겠으나 왠지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특히 라미레스와 페리칸 등을 언급할 때는 섭섭한 마음에 울음이라고 왈칵 쏟아낼 것같은 심정이었다.
설란은 착잡한 심정을 진정시키고 금세라고 공간을 박차고 나가려는 파천을 차근차근 이해시켰다.
“성급하게 행동하시면 안돼요.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먼저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천주들을 만나보세요. 그러고 나서…… 선발대로 복귀해도 늦지는 않을 것 같네요.”
파천은 설란이 말하는 내내 그녀의 얼굴만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지.”
순순히 승낙한다. 그레고스는 현재의 파천에 대해 어떻게 판단을 내려야 할지 종잡을 수 없었다. 그때 옛용의 음성이 들려 왔다.
[그는 아직 불안정하지만 우리가 우려하던 상태는 면한 것 같다. 참으로 다행이야.]
[이대로 내보내도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은가. 이제 그의 앞길을 막을 건 아무것도 없다. 한시라도 빨리 광명을 얻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어.]
[실패한다면 마계가 아니라 원령체의 저주가 영계를 휩쓸겠군요.]
[그렇게 되겠지. 원령체는 축복인 동시에 저주이기도 하니까.]
둘의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파천은 그레고스를 주시했다.
옛용의 전언이 끊어졌을 때였다.
“그는 누구지?”
그레고스는 의아했다.
“너와 대화를 나누던 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레고스의 얼굴이 급변했다.
‘그걸 엿들었던 말인가?’
“대답하기 곤란한가?”
그레고스는 잠시 혼란스럽던 정신을 수습하고 입을 여는데, 당황한 나머지 더듬거리고 있었다.
“그…… 렇…… 지는 않다. 그는…… 옛용…… 이다.”
“옛용? 그렇군. 원령체의 저주라……. 재미있는 말이군.“
파천은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섰다.
“문을 열라.”
그레고스는 폐쇄시킨 공간을 다시 개방시켰다. 활짝 열린 문을 통해 파천이 밖으로 나섰고 그 뒤를 설란과 아그립바가 따랐다. 그레고스가 따라나오지 않자 설란이 고개를 돌린다. 그레고스가 말했다.
“나는 여기에 좀더 남아 있겠다. 그를 부탁한다.”
설란은 고개를 끄덕여주었고 그걸 본 그레고스는 안심하는 눈치였다.
‘그를 조절할 수 있는 이는 어쩌면…… 균천주 자네밖에 없을지도 몰라. 부탁하네.‘
밖으로 나온 파천을 반기는 이들이 있었다.
파천의 기억 밖으로 매몰차게 쫓겨나 버린 천주들이 그것도 모르고 여전한 모습으로 서있었다.
변천주가 설란의 눈치를 빠르게 살폈다.
‘공간이 개방된 걸 보니 일단은 성공적이라는 얘기인가?’
기대감을 가지고 설란을 살피는데 설란은 이렇다 할 언급을 하지 않는다. 파천이 말했다.
“날 만나고자 하는 용건은? 되도록 짧게 해줬으면 좋겠다.”
파천의 현 상태가 어떤지를 모르는 천주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 중 전에 보이지 않던 자가 하나 더 늘었다는 걸 설란은 알아보았다.
‘저 자는 대처의 대신장!’
천상계에서 대천이라 함은 도리천을 말한다. 도리천에는 신장이 셋이다. 도리천의 신장은 웬만해서는 밖으로 나오는 법이 없다.
예전 대적자들이 무한계에서 혼란을 기도했을 때 잠시 조사차 나온 적이 있다지만 별일 아니라는 판단에 금방 자취를 감추지 않았던가. 도리천의 신장이 이 자리에 나타났다는 건 대천주의 전언을 가져왔다는 의미였다.
그는 천상계를 대표한다. 그런 만큼 어떤 결정이든 신중하지만 한 번 결정되면 전 천상계가 나서서 일의 성사를 위해 전력한다.
사전 통보 없이 나타난 대신장을 보며 설란은 궁금증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가 궁금증을 털어 놓기 전에 대신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균천주인 설란에게 대신장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설란도 마주 예를 취했다.
“네, 그렇네요. 여기는 무슨 일로…….”
“잠시 자리를 옮겼으면 합니다. 간단히 전할 말은 아닌 것 같아서요.”
그러나 대신장의 그런 의도는 성취되지 못한다.
“간단히 해. 난 그리 오랜 시간을 할애하지 못한다.”
파천의 다그침에도 대신장 타론은 그다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그럼…… 그러지요. 대천주께서는 두 가지를 전하라 하셨습니다. 하나는 출전령입니다.”
“네?”
설란을 비롯한 천주들의 얼굴에 놀람이 가득하다.
출전령. 천상계 전체에 내려지는 병력 동원령이었다. 각 천주들은 자체 주력을 이끌고 도리천으로 지체하지 말고 즉각 집결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여타 다른 일로 외유중인 신장이나 아라한들도 복귀시켜야한다.
여태껏 출전령이 내려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천주들이 이렇게 놀라는 건 출전령이 내려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 시기 때문이었다. 마계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의 침공이 있기 전에는 섣부른 움직임을 자제할 것이란 예상을 해오던 터였다.
이런 천주들의 예상을 깨고 출전령이 내려졌다. 그 이유가 궁금했다. 신장은 그런 천주들의 생각을 읽었던지 간략히 첨언했다.
“이번 출전령은 마계의 움직임이 포착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예비 단계의 출전령일 뿐입니다. 언제든 전력 동원이 가능할 수 있도록 미리 내려놓는다는 의미가 더 큽니다.
천주님들께서는 지금 즉시 마계와의 전쟁에 투입할 수 있는 주력을 대동한 채 도리천으로 집결해 주셔야 합니다.
“지금 즉시 말이오?”
변천주의 되물음에 대신장 타룬의 고개가 전혀 망설임 없이 끄덕여진다.
“네.”
“으음, 대천주께서 명을 내리셨으니 따라야겠지요. 좋소. 또 하나는 뭐요?”
“또 하나는…… 여기 계시는 파천님과 관련된 일입니다.”
파천과 관련되어 있다. 그 말은 천주들을 좀 전보다 더 놀라게 했다. 파천의 일은 대천의 지시 하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그를 원령체로 만드는 일은 대천에 보고된 바가 없이 몇몇 천주들에 의해 주도된 일이다.
그들은 모두 수호자를 만났고, 그의 계획에 동참하게 되었던 것뿐이다. 이런 일은 대천에서 언급한다는 것은 이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좀 미묘한 부분이었다.
굳이 숨길 것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드러내 놓고 진행시켜 온 일도 아니었던지라 막상 대천 대신장의 입에서 파천의 이름이 거론되니 왠지 뜨끔했다. 대신장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 한 자락이 걸렸다.
“걱정 마십시오. 대천주께서는 이번 일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 아니십니다. 여러분들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하고 계십니다. 또한 루시퍼를 상대할 만한 능력자가 우리 측에 없다는…… 천주님들의 판단에도 어느 정도는…… 동의하시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대천주께 보고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을 진행시켜 온 것에 대해서는 상당히 섭섭해 하시는 눈치셨습니다.
대천주께서 말씀하시길…… 파천님을 마계정벌의 선봉에 세우시겠다 하셨습니다. 영계 연합군의 총사령관에 임명하신다 하셨습니다. 물론…… 정식 임명은 광명을 얻고 난 뒤가 되겠지요.“
모두는 뒤통수를 호되게 한 대씩 얻어맞은 표정들이었다. 영계 연합군 총사령관! 당연히 대천주인 도리천주가 맡아야 할 자리였다.
물론 선계나 무한계의 입장의 다르겠지만 천상계는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고 있었다. 영계 연합군의 총사령관이라면 천상계 천주나 신장들뿐만 아니라 장차 합류할 선계나 무한계의 수장들에게까지 명을 내릴 수 있는 무상의 지위라 할 수 있었다.
마계와의 대전쟁을 수행하는 최고의 명령권자. 그 자리를 생령이 파천에게 위임하겠다는 대천주의 발상은 대단히 파격적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또한 이러한 천상계의 의견을 선계나 무한계에서 순순히 받아들일지도 문제였다.
천상계 대천주라면 얘기가 틀려지겠지만 파천은 영자가 아닌 생령. 그런 그가 영계를 대표할 수는 없었고 자연 반대에 부딪힐 게 뻔했다. 반발은 내분을 조장할 우려가 컸다.
“허 참…….”
“대천주께서 그런 결정을…….”
“좀 지나치신 감이…….”
모두는 다음말을 잇지 못했다.
대신장은 얼른 다음 말로 자신이 해야 할 책무를 마무리 지으려했다.
“일단은 그렇게들 알고만 계십시오. 단서 조항이 붙는다는 걸 염두에 두시고 말입니다.”
파천이 광명을 얻어야 한다. 이 전제가 붙어 있다지만 그런 걸로 천주들이 받은 심적 충격을 다스리기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대천주의 속내를 짐작키가 힘이 드는군. 그 분은 이번 일을 통해 천상계의 지위를 다시금 확고히 하겠다고 여러 번에 결처 말씀하시지 않았나? 그럼에도 이런 결정을 내리셨다는 건……’
설란은 아무리 여러 각도로 생각해 봐도 대천주의 진의를 파악하기가 힘이 들어TEk.
파천은 천주들의 그런 고민 따위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더 이상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다 끝났나? 난 이만 가겠다.”
파천의 돌발적인 발에 모두는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일부 천주의, 파천을 향항 시선엔 약간의 회의적인 감정도 담겨 있었다. 과연 잘한 일일까, 라는 의미일 것이다.
또한 저런 자에게 그런 막중한 책무를 맡겨도 되겠느냐는 심정도 다분했다.
설란은 파천이 곧장 이동해 갈 태세라는 걸 짐작했다. 다른 이의 기분 따위에는 아랑곳 없이 그렇게 할 것만 같았다. 원령체가 된 파천의 현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미지수. 설란은 그가 공간이동쯤 쉽게 해낼 것이라 판단했다.
“저도 함께 가겠어요.”
“너도?”
“네.”
“왜지?”
설란은 속이 터질 듯 답답했다. 자신이 설란임을 말해 주고 싶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드디어 결심을 굳혔다.
“가서 말씀드리죠.”
파천은 더 이상 구체적인 이유를 물어 보지 않았다. 대신 그는 대신장과 천주들에게 말했다.
“난 가겠다.”
대신장 타룬이 급하게 파천을 불렀다.
“잠깐만.”
“…….”
“아직 확답을 해주지 않으셨습니다.“
“뭘?”
“총사령관직을 수락해 주십시오.”
“대신장이라 했나?”
“그렇습니다.”
“가서 대처주란 자에게 이렇게 전해. 난 내 길을 간다. 난 너희들과 다르고 가는 길도 다르다. 날 끌어들이려 하지 마라. 난 내 방식대로 마계와 싸운다.”
“그렇지만…….”
파천은 설란을 보며 짧게 말했다.
“그럼 가지.”
그 말이 끝이었다. 파천과 설란, 아그립바는 모두가 지켜보는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홀연히 자취를 감춰 버렸다. 천주들과 대신장은 어처구니없어 했다.
“이런……. 이 일을 어쩌면 좋지? 아직 채 말을 나누지도 못했건만.”
변천주는 애가 타는 심정이었다. 너무도 충격적인 전언 앞에 진작 파천과 나눠야 할 대화를 하나도 하지 못한 것이다. 그건 대신장도 마찬가지였다. 확답을 받아 가야 하는게 상대는 관심도 없는 눈치였다.
그들은 멀뚱멀뚱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답이 나올 리가 만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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