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42화 : 새로운 적, 아바돈의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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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검 – 142화 : 새로운 적, 아바돈의 도전


새로운 적, 아바돈의 도전

뜻밖의 일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쉽게 제압될 듯, 될 듯하면서도 끝끝내 극복되지 않는 마신들! 그들은 싸울수록 요령이 늘어나며 오히려 상대가 더 거북해지고 있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백지와도 다름없는 존재 같았지만 점차 그 기술이 다양해지더니 급기야는 상대하고 있는 자의 기술을 그대로 습득해내고 있었다. 마신들의 무서운 점이 서서히 실체를 드러내고 있는 중이었다.
라미레스조차 이런 마신들의 빠른 습득력에 혀를 내두르고 있으니 다른 이들이야 말해 무엇하랴.
비교적 단순 공격을 선호하는 페리칸이나 카이로는 그런 것으로 당황하는 경우야 없었지만 불칸이나 몰간은 완연히 달랐다. 특히 몰간의 공간왜곡은 마신들은 처음부터 알고 있기라고 했던 것처럼 능수능란하게 사용했고, 이로 인해 더욱 제압하기 까다롭게 만들어 버렸다.
마신들보다 선발대측이 강한 건 언급할 필요도 없어 보였다. 그런데도 그 간격은 급격히 좁혀지고만 있었으니 이를 어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라미레스의 전명을 막아서고 있는 마신들 셋은 상태가 가장 나빠 보였다.
그들이 걸치고 있던 귀갑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고 견고하고 질긴 피부조차 찢어지고 갈라져 흉한 상처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그들의 투지만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더욱 흉험한 기세로 압박해든다.
라미레스는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해 마신들의 치명적인 약점을 파악해내고자 했지만 그 모든게 실패로 돌아갔다. 결론은 하나였다.
‘단번에 죽이지 않고 질질 끈다면 승부는 예측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싸울수록 강해지는 놈들이란……..’
그의 판단은 정확한 것이었다. 아바돈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마신들은 최고의 병기라 불릴만했다. 아바돈은 단순히 야심만 큰 곳이 아니라 그걸 이룰 능력마저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아바돈의 주력은 단연 마신이었다. 마신을 만들어내기까지의 과정이 워날게 까다롭고 복잡하며 또한 성공률도 낮아 그다지 많다고는 할 수 없는 수를 보유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들의 전력을 십 배나 강화시켜 놓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이제는 마계와 전면전을 생각해도 좋을 정도라는 것이 아바돈 상층부의 판단이었다.
무한계에서는 최대의 난적을 만난 셈이다. 마신들의 첫 시험 무대나 다름없는 선발대와의 충돌 결과를 아바돈 상층부 역시 관심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을 이끌고 온 그노시스는 워낙에 쟁쟁한 강자가 많이 포진된 선발대는 마신 열로써 상대할 수 있을까, 처음엔 반신반의했으나 이제는 거의 확신에 차 있었다.
‘마신의 위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이 정도면 성공이라 단언해도 좋다.’
지금 데리고 온 마신들은 중간급 정도에 해당되었다. 원래 지니고 있던 실력이나 자질의 차이에 따라 그 위력도 천차만별이었다.
최상위급 마신들은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그 위력은 가히 측정 불가다.
그들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실험이 진행 중이며 보완될 점이 수두룩했다. 또한 오늘의 결과에 따라 다른 마신들도 상당 부분 보완될 여지는 남아 있었다. 지적된 모든 미흡한 점이 완성될 때 아바돈은 실체를 드러낼 예정이었다.
라미레스는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짜증이 치밀었다.
‘이런 헛껍데기들을 상대하고 있어야 하다니.’
그는 그다지 전력을 기울이고 있지도 않았다. 어차피 을 기다려야 하고 그럴 바에는 무료함을 달랠 겸 마신들을 측정해 보는 재미라도 보려 했던 것이다.
그랬던 것인데 이제는 그도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피 맛을 본 승냥이 떼처럼 득들같이 달려들어 질기게 늘어 붙으니 여간 짜증스럽지 않았다.
라미레스는 다른 동료들의 상황이 그다지 좋지 못하다는 걸 알게 되자 이제는 용단을 내려야 할 때임을 알았다. 그는 먼저 아난다에게 영언을 전달했다.
[선발대를 멀리 뒤로 물려라.]
그가 안심하고 힘을 쏟아 내기 위해 내려진 조치였다.
아난다는 빠르게 모두에게 전달했고 선발대원들은 신속하게 뒤쪽으로 물러섰다. 일정한 공간이 확보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미 약속이 되어 있었던 듯 라미레스를 뺀 페리칸 등이 선발대 쪽으로 빠르게 이동해 갔다.
라미레스는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이제 끝낼 때가 왔다.” 두 팔을 앞으로 뻗은 라미레스의 두 손이 쥐어졌다 퍼졌다.
촤촹
두 손바닥에 찰싹 달라붙은 기형의 창!
새파란 프리즈마로 형성된 창은 보기만 해도 눈이 따끔거릴 정도로 밝은 광채를 발산하고 있었다. 창의 양쪽 끝은 몇 갈래로 갈라져 있었는데 그것이 꼭 나뭇가지가 여러 갈래로 뻗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신들이 잠시 주춤하는 순간, 라미레스의 손에서 프리즈마 창이 떠났다. 회오리치며 공간을 갈라버리는 창의 위력은 거대한 산도 단숨에 두 쪽 낼 정도였다.
주춤거렸던 마신들은 또다시 라미레스를 향해 맹공을 퍼부으려다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던지 본능적으로 두 팔을 내밀어 방어한다. 그러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콰콰콰콰
급한 물살에 방둑이 무너지듯 그들의 방어망은 헛된 몸부림에 지나기 않았다. 창의 공격권은 상당히 넓어 마신 열을 한꺼번에 삼켜버렸다.
치치칙
괴이한 소음은 마신들의 접촉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었다.
“크아악.”
첫 번째 단말마를 시작으로 여러 번의 비명성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그들도 고통이라는 걸 느끼는지 애처롭기까지 했다.
한바탕 피의 폭풍을 불러왔던 창은 얌전히 라미레스에게로 돌아와 있었다. 라미레스는 주변을 슬쩍 흝어 보았다.
우뚝 멈춰 서 버린 마신들의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중 셋은 허리가 양단되어 상반신이 사라져 버린 상태였고 둘은 양팔이 떨어졌다.
나머지 다섯도 중상이었지만 사지는 멀쩡했다. 라미레스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선발대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신장 여록의 얼굴은 벌개졌다. 그는 이 순간 라미레스의 위대함을 목격하고 있음에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나치게 명성이 높은 건 과장되게 전해진 때문이라 여겼었다. 마계 대마신들을 그다지 인정하지 않는 그로서는 라미레스도 안중에 두지 않았었다.
그런데 자신이 하나를 상대하며 간신히 우위를 점하던 마신들 열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저 가공할 위력이라니.
‘저 자는 이미…… 절대의 경지에 도달해 있구나.’
괜히 스스로 부끄러워지는 건 하늘을 앞에 두고도 오만하게 행동한 좀 전의 태도가 상기되었기 때문이다.
마신들을 이끌고 왔던 그노시스도 이 순간 벌레 씹은 얼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신들의 기세가 선발대원들을 압도해 갔던 게 사실이었던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또 저 라미레스가 문제인가?’
그노시스는 예전 딱 한 번 이런 경우를 당해 본 적이 있었다. 다름아닌 바로 라미레스에 의서. 그때 그는 대적자의 지휘부중 하나였다. 물론 그가 직접 라미레스를 대면한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를 갈아붙였다.
“뭣들 하고 있느냐, 어서 공격하지 않고.”
그노시스는 아직은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마신 다섯에게 고함을 질렀다.
그제야 마신들은 다시 움직여 갔다. 그렇지만 처음의 기세는 한층 누그러져 있었다. 사실 멀쩡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신체 기능은 현저히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놀라운 건 상반신이 없어지고 팔이 날아가 버린 나머지 다섯의 마신들도 같이 움직였다는 점이었다. 라미레스의 눈살이 찌푸려지는 건 당연했다.
라미레스는 망설이지 않는다 두 팔을 활짝 벌리자 하나에서 두개로 창이 분리된다. 양손에 들린 창을 날아오는 마신들을 향해 사정두지 않고 던졌다.
휘휘휙
창의 주변을 더 한층 강한 프리즈마의 빛이 겹겹이 둘러싸는 걸 보아 좀 전보다도 더 위력을 배가시킨 게 틀림없었다. 그노시스는 굳이 확인하지 않고서도 결과를 예측할 수 있었다. 그노시스는 굳이 확인하지 않고서고 결과를 예측할 수 있었다. 패배! 그렇지만 마신들의 위력은 충분히 검증된 셈이었다.
‘무한계에 라미리세는 결코 둘이 될 수 없다.’
그것이 그가 마음을 놓는 이유의 전부라면 오산이라 해야 한다. 라미레스는 둘이 아니지만 그와 비등하거나 우월한 존재는 분명히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열을 넘지 않을 것은 분명했다.
‘라미레스, 너를 상대할 마신은 따로 준비되어 있으니 그때를 기다려라.’
그는 이제 여기는 무사히 빠져나갈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마신들 사이로 창의 모습이 사라지는 때를 기다려 몸을 빼냈다. 그 또한 으레 도주하는 자들이 그렇듯 마지막 외침을 잊지 않았다.
“이것이 시작이다. 선발대는 광명에 도착하기도 전에 모두 소멸할 것이다.”
긴 경고의 말을 남겨두고 사라지는 그노시스를 라미레스는 굳이 추적하지 않았다. 이미 쫓아갈 수 없는 한계를 벗어나 있음을 알고 있었다.
헛되이 사라져 가는 마신들의 형체를 일별하며 라미레스는 긴 한숨을 토했다.
‘시작된 건가? 아바돈은 끈질기다. 이런 마신들이 대체 얼마나 될까?’
쉽지 않은 여정을 생각하며 그는 더욱 각오를 새롭게 했다. 한 순간의 방심도 허용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마음을 놓는 순간 적은 슬며시 접근할 테고 약점을 일순간에 파고들 것이 분명했다. 그때 후회해 봐야 소용없다.
라미레스의 승리는 선발대에 강한 자부심을 안겨주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부담감을 주었다. 라미레스에게 처절한 패배를 당한 아바돈. 그들은 이제 더욱 강한 강자들을 앞세우고 나타날 게 아닌가.
좀 전의 마신으로도 벅찼었던 선발대원들은 그런 부담감을 떨칠 길이 없었다. 세상은 그들 생각보다 넓고 , 강자들은 헤아릴 수도 없이 많다. 무한계 내에서 아옹다옹하던 자들은 한정된 상대들 이외에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이 앞으로 상대해야 할 적들은 영겁의 시간동안 힘을 키워오던 자들. 그들의 축적된 힘은 상식선을 휠씬 넘어서 있을 것이 분명했다.
라미레스는 선발대의 이런 침체된 분위기를 읽었지만 철저히 무시했다.
‘무한계는 아직 멀었다. 당장 마계만 하더라도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고 무섭다. 아무리 내가 설명하고 경고해 봤자 소용이 없다. 직접 겪어보면 알게 되겠지.’
라미레스만큼 다양한 적들을 많이 상대해 본 영자도 드물 것이다. 그는 마계는 물론이고 천상계, 귀계, 대적자, 선계, 무한계를 두루 섭렵했다.
심지어 제왕의 최측근인 쿠사누스와도 싸워 본 적이 있었으니 서로 간에 비교함이 가능했다. 그렇지만 그런 그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강적이 바로 아바돈이며 마신이었다. 전혀 정보가 없으니 그도 신중해지는 건 당연했다.
“여기서 파천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
마신들의 싸움에서 드러난 선발대의 전력이 기대와 다른 결과로 나타나자 일부 선발대원들은 얼굴에 잔뜩 수심을 떠올리며 전전긍긍했다. 라미레스는 그런 그들을 살피며 냉정하게 전력을 집어내고 있었다.
‘도주한 그놈은 카이로보다 아래였다. 카이로는 마신 하나보다는 강하지만 둘은 무리고 불칸은 간신히 둘을 상대한다. 몰간은 카이로보다 조금 강한 정도. 페리칸은 너끈히 둘을 상대하지만 그 역시 단숨에 제압하기는 역부족, 아난다는 제 실력을 모두 발휘한다면 둘은 충분할 것이고……. 나머지는 하나도 힘겹다.
그렇다면…… 마신 서른 이상만 동원돼도 선발대는 위험해진다. 이래 가지고서는…… 파천을 보호하기는커녕 짐만 된다. 차라리 선발대는 해체하고 소수 정계로 진행 속도를 높인다면…….‘
라미레스는 그런 생각을 끝까지 떨쳐내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방법이 제일 좋을 듯싶었다. 어차피 지금의 상황에서 공간이동은 자살이다 다름없다. 결국 무한계를 종단해 가는 수밖에 없는데 그동안 만날 적들이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이런 때 지혜전사단을 동원할 수만 있었어도.’
그는 아쉬움이 컸다. 그의 또 하나의 감춰진 신불. 지혜전사단주라는 신분이 있었지만 지금으로서는 단원들을 소집할 권한이 자신에게 없었다.
선발대원들이 상심에 젖어 있을 때 파천과 설란, 아그립바가 나타났다. 그들은 좀 전까지 마신들이 서 있던 치열한 격전의 중심지역에 갑작스렀게 출몰했다.
파천의 달라진 점에 모두가 주목하게 되기까지엔 그다지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도 않았다. 척 보고서 느낀 라미레스는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에 등줄기가 오싹한 기분까지 들었다.
“너, 파천 맞냐?”
그렇지 않아도 금박이 이색적이던 파천의 외형은 얼굴마저도 금빛으로 물들어 있어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것만이 전부라면 그다지 놀랄 것도 없었다. 차가운 얼굴, 냉정한 말투. 근본부터가 바뀌어 버린 듯한 파천의 태도엔 라미레스도 당황했다.
“가자. 여기서 이럴 시간이 없다.”
파천은 그 말을 끝으로 앞쪽으로 걸어간다. 라미레스는 하도 어이가 없어 냅다 소리부터 질렀다.
“파천, 거기 서.”
파천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때 선발대원들 중 균천의 아라한들이 설란을 아랑보고 부리나케 앞으로 뛰어온다. 균천의 미타와 찬다마나였다.k 그녀들은 설란 앞에 공손한 태도로 무릎을 꿇었다.
“천주님을 뵙습니다.”
뜻밖의 장소에서 자신들이 속한 균천의 천주를 대한 미타와 찬다마나는 의아한 빛을 지우지 못했다. 그녀가 파천과 동행하고 있음의 쉽게 이해가지 않았던 것이다.
“일어들 나세요.”
설란의 지시가 있고 나서야 그녀들은 고개를 들었고 여전히 조심스런 태도로 살며시 일어섰다. 설란이 라미레스와 아난다 등 몇 번의 만남이 있었던 영자들에게 인사를 했다.
“오랜만 에들 뵙는군요.”
신장도 아닌 천주다. 라미레스도 아난다도 페리칸과 카이로도 그녀의 전신이 설란임을 전혀 짐작조차 못했다. 그런 이유로 그들의 태도 역시 정중하기만 했다. 아난다는 설란의 등장이 의외였던지라 연유를 물었다.
“어쩐 일로 무한계까지 발걸음을 하셨습니까?”
“그런 일이 좀 있어서요.”
모두가 지켜보는 자리다. 더군다나 신장 하나까지 포함되어 있기에 그녀는 자세한 내막을 밝히길 꺼려했다.
‘기회가 오겠지.’
그녀는 다음을 기약했다. 반가움이 목까지 치솟아 올랐지만 꾹 눌러 참았다.
라미레스는 설란의 등장으로 잠시 환기됐던 분위기를 다시금 파천에게로 집중시켰다. 그의 시선은 파천에게로 향해 있었지만 물음은 설란이게 했다.
“저 녀석이 저렇게 된 연유를 알 수 있을까요?”
그 질문 속에는 천상계에 대한 추구의 의미도 다분했다. 사람을 왜 저 따위로 만들었냐는 질책이 섞여 있던 것이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설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자세한 내막을 털어 놓았다.
그녀의 설명이 끝나자 선발대원들의 얼굴 표정엔 경악의 빛이 가득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이론적으로만 존재한다던 원령체. 그 것이 실제로 가능하가에 대한 질문에서부터 회의적인 영자들이 태반이었다.
그런 상식이 허물어진 현장은 파천의 냉막한 얼굴만큼이나 싸늘했다. 원령체가 탄생했다는 걸 도저히 믿기 힘들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여기엔 밝히지 못할 다른 내막이 있을 거라 지레 짐작하는 이도 있었고 천상계가 어떤 술책을 획책하고 있다 확신하는 이도 있었다.
라미레스는 그 순간 그 동안 잊고 지냈던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럼 파천이 정말…… 금강신을 이뤘단 말인가? 그 분이 말씀하시던 바로 그 원령체를?’
아직까지 반신반의하던 라미레스는 뭔가 짚이는 것이 있어 이렇게 물었다.
“그럼 혹시 그레고스 님을 만난 겁니까?”
“네.”
이제야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알아챈 라미레스. 그는 전신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벅찬 희열에 감동했다.
‘됐다. 이제 희망이 보인다. 파천이 원령에 먹히지 않은 걸 보니 어느 정도는 극복했다는 의미. 광명만 얻을 수 있다면…….’
라미레스는 지금껏 영계의 미래에 대해 회의적이기만 했었다. 객관적인 전력 평가에서 그만큼 열세라는 걸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고,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루시퍼를 상대할 만한 실력자가 이쪽에는 눈을 씻고 봐도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유일한 대안이라 할 수 있었던 수호자마저 종적이 묘연한 상태. 이런 이류로 그는 결과라 나쁠 것이라 속단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절대자의 부재가 해결될 듯했다.
‘파천, 너라면 극목할 수 있을거다. 너라면 광명을 얻어 루시퍼를 상대할 수 있을 거야. 내가…… 꿈 꿔 왔던 게 이제야 이뤄지려는가?’
파천은 그들의 대화내내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련한 기억들. 꿈결처럼 이어졌다 흩어지는 단상들. 그리고 그 느낌들. 슬픔의 색과 기쁨의 색은 뒤섞여 있었고, 그의 가슴을 묵직하게 채우고 있는 건 슬픔의 감정들이었다.
가끔씩 특별한 연유를 찾아낼 수 없는 분노가 생각의 고리를 끊어버리고 침범해 올 때마다 그는 억누르느라 힘겨워해야만 했다.
격렬한 감정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 표정은 일정했다. 표정 없는 석고상이라도 보는 것 같았다. 자신의 얘기를 하고 있음에도 어떤 감흥조차 일지 않는 자신이 이상하다는 자각도 하지 못하는 파천. 그의 머릿속엔 광명에 대한 갈증만이 똬리를 틀고 고개를 곧추세우고 있었다. 파천의 입이 다시금 열렸다.
“가지 않겠다면 나 혼자 가겠다. 나는…… 빨리 가야 한다. 광명이 아니면 이 갈증을 해소할 수 없다.“
그가 찾아가야 할 생명의 뜰은 무한계 북부 너머, 중간계의 어디쯤에 있다는 것만 알려져 있을 뿐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 이 중에 아는 이는 없었다. 파천도 모르긴 마찬가지였고 라미레스도 그건 동일했다.
여래장의 지류인 생명수가 흐르는 곳. 그곳 중심에 생명나무가 있으며 그 위를 여래장이 흐르고 있다 그곳을 통해서만 천궁을 드나들 수 있다. 결국의 천궁의 위치를 알아야만 생명의 뜰도 찾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걸 알고 있는 이는 천사들이나 메타트론, 수호자, 옛용 정도가 전부일 터. 그들 줄 누군가가 길 안내를 해주지 않는 한 이들이 전진해 갈수 있는 한계는 중간계와 직면하는 무한계북부권의 끝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파천은 혼자 가겠노라 말하고 있었다. 그는 원령체가 된 순간부터 본능적으로 광명을 갈급히 원하게 되었고, 광명은 그를 특정한 지역으로 이끌어 들이고 있었다. 파천은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이런 걸 알리 없는 라미레스가 조급해 하는 파천을 달래려고 애를 썼다.
“서두른다고 능사가 아니다. 일단은 북부권까지 가자. 그런 뒤에 방법을 강구해 봐야지.”
라미레슨 파천의 상태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자신을 알아보는 것이 오히려 신기했다. 파천은 라미레스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부렸다.
“가자. 광명을 찾으러.”
라미레스는 할 수 없었던지 파천의 고집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래, 떠나자. 네 상태를 알았으니 조금이라도 시간을 단축하는 것이 최선이겠지. 모두 이동한다.”
“라미레스.”
파천의 부름이었다.
“왜?”
“난…… 아니다.”
파천은 무슨 말인가는 하려다 그만둔다. 선발대원들 모두가 떠날 채비를 하는 걸 보며 파천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들은?”
누구냐는 물음이었다. 그리고 왜 함께 갈 듯이 행동하는 질문도 섞여 있었다. 라미레스는 진의를 파악하지 못하고 가만있었다.
그때 설란의 영언이 전달되었다.
[저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기억하지 못한다. 이 말은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가장 잔인한 말일 수도 있었다. 특히 이들처럼 생가를 함께하는 처지라면 더욱더 그러하리라. 그만큼 그의 가슴을 차지하는 비중이 작았다는 걸 의미하는 것도 되니까.
이렇게 해석될 소지가 많기에 설란은 조심스러워했다. 영언은 파천에게 간파당한다. 그걸 깜박 잊은게 설란의 실수라면 실수였다.
“내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그럼…… 나와 관련이 있는 자들이란 말인가?”
파천의 물음은 의미심장했다. 똑바로 자신들을 쳐다본 채 한 말이라 더욱 분명하게 전달되었다.
라미레스는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그는 선발대원들에게 현재 파천의 기억이 완전치 않음을 다시금 주지시켰고 이해시켰다.
“파천, 저들은 모두 선발대원들이다. 너와 함께 동행해 왔고 동행할…….”
라미레스의 다음 말을 파천이 끊어 버린 건 강한 자의식의 발동이었다.
“안돼. 나와 너 그리고 아난다, 페리칸, 카이로만 간다. 나머지는…….”
“나머지는?”
“모두 돌아가라.”
잔인한 선언이었다. 그렇게까지 동행을 요구했던 장본인에게서 흘러나온 말이라 더 크게 작용했다.
선발대원들에게서 결코 작다할 수 없는 동요가 선명하게 흘러 나왔다.
라미레스는 정작 반기는 심정이었지만 그걸 내색할 수는 없었다. 그는 되물었다.
“이유는?”
“함께 위험을 자초해야할 이유가 없다.”
그것만으로도 지금의 파천에게는 너무도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그는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광명을 향한 이끌림과 달리 그를 위협하는 좋지 않은 기운이 시시때때로 감지되고 있다는 걸.
그건 자신의 생명을 향한 노림이라는 걸. 그로 인해 함께하는 이들까지도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
그럼에도 라미레스 등은 제외시키지 않은 이유 또한 있었다. 그들에게는 최소한 함께 해야 할 이유와 목적이 있었고, 그들 정도는 자신의 힘으로 보호해 줄수 있을 것만 같았다. 왠지 모를 확신이었다.
선발대의 동요가 가라앉길 기다렸다가 라미레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는 게 좋을 듯싶군. 조금 전 마신들을 겪어봐서 알겠지만 앞으로 대면할 적들은 지금까지와는 다를 게 분명하다 여러분들을 헛되이 희생시킬 수는 없다. 그보다는 파천이 광명을 얻은 뒤를 기약하는 게 현명한 것 같다.
여러분은 여전히 앞으로도 선발대원들이다. 이 사실만은 변함없다. 나중에 동참한다고 해서 그 빛이 퇴색되지는 않는다. 더 가치있는 전진을 위해 일보 후퇴하는 것이라 양해해 줬으면 한다.“
거의 유일하다 할 수 있었던 파천의 반대가 사라지니 더 이상 라미레스의 강요에 반발할 여지도 여력도 없었다. 일이 이쯤 되고 보니 아난다도 무작정 반대할 일이 아닌 듯싶었다.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복귀하든, 하룬에 남아서 기다리든 그건 여러분들의 자유입니다. 아무도 여러분들을 탓하지 않습니다. 다소 섭섭한 감정은 이해합니다만…… 부디 널리 이해해 주시고 우리들의 뜻에 따라 주시길 바랍니다.”
끝까지 고집을 부려 따라오겠다면 막을 길이 없다. 그것까지 막을 권한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 그렇지만 선발대원들 중에 그 정도로 고집을 부릴 만큼 낯짝이 두꺼운 이도 없었다.
그들 역시나 지금까지의 동행만으로도 충분히 벅차했었지 않던가?
개중에는 오히려 반기는 이도 있었다. 불만의 소리는 없었다. 그들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그들 중 너울이 겸연쩍하며 선뜻 입을 열었다.
“그럼…… 하룬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아무쪼록…… 광명을 가져오시길…… 학수고대하고 있겠습니다.”
모두의 심정을 대변한 말일 것이다. 잠시나마 선발대원으로 여정에 동참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은 오랫동안 긍지를 지니게 될는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이번 여정은 그들 자신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영광스런 임무였다. 비록 끝까지 동참하지는 못했지만 심정적으로나마 동일하게 염원했다.
파천은 더 이상 미적거리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앞서 걸었다. 그 뒤를 라미레스, 아난다, 페리칸, 카이로가 차례대로 걸었고 한참 뒤에 설란이 뒤따랐다. 아그립바 역시 그녀 곁에서 함께 걸어간다.
남겨진 자들은 그들이 사라져 가는 모습을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았다. 남겨진 선발대원들은 무리를 이룬 채 하룬을 향해 떠났다.
그들 중 몇몇은 얼마가지 않아 무리 중에서 이탈했다. 그들이 향한 방향은 하룬 쪽이 아닌 파천이 향한 곳이었다.

설란이 계속 따라 오고 있는 게 라미레스는 여간 신경 쓰이지 않았다. 면박을 줘서 돌려보낼 정도로 함부로 대할 신분도 아니기에 잠자코 있기는 했지만 끝내는 멈춰서고 말았다. 파천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홀로 묵묵히 걸어가고 있었다.
라미레스가 말했다.
“어디까지 따라오실 참입니까?”
이 정도면 라미레스는 꽤나 예의를 갖춘 셈이다.
“저…… 사실은…….”
“말씀하십시오.”
“저, 설란이에요.”
이렇게 느닷없을 수가 있을까? 모두는 할말을 잃고 한동안 멍하니 굳어만 있었다.
설란. 그 이름이 생소할 리가 없었다. 그 존재가 가벼울 리가 없었다. 반가움이 덜할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다른 이도 아닌 균천의 천주가 독고설란이라니. “허.”
라미레스의 반응처럼 모두는 한결같이, 누가 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랬……군요.”
그 말로 모든 게 해명된다. 그 말이면 납득이 가고 그 말 하나로 모든 걸 용납해야 한다. 사랑하는 정인을 따라나선 길을 그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주…… 모셨습니까?”
페리칸의 주모라는 호칭에 설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이 때 라미레스는 뭔가 걸리는 게 있어 슬쩍 넘겨짚었다.
“파천은…… 혹시 모르고 있기라도.”
“네.“
“허.”
“어이가 없네.”
“이럴 수가.”
“말도 안 돼.”
이번엔 반응이 매우 다양했다. 그리고 일제히 그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몰려갔다.
터벅터벅 걸어가는 사내. 모르는 이가 보면 세상 짐을 혼자 지고가기라고 하는 듯 착각이 들 정도로 잔뜩 심각해 있는 사내를 그들의 매서운 눈초리가 따라 붙었다.
그리고 그들은 일제히 달려갔다. 아그립바와 덩그러니 남게 된 설란은 어깨를 움츠리며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그가 몰라보면 또 어때? 처음엔 날 알아 봤잖아. 그리고 지금 이렇게 함께 있는 걸. 그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해.’
그녀는 그걸로도 행복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주변의 친인들은 그렇지가 못했따. 그들은 막무가내로 파천을 들볶기 시작했고, 파천은 멀뚱한 시선으로 그들을 한꺼번에, 매우 효과적으로 간단히 무시했다.
“시끄럽군.”
그 한마디가 끝이었다. 다시 거리가 멀어지자 이번엔 라미레스가 훌쩍 날아올라 파천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그리고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 대체 무슨 짓을 한지나 알고 있냐?“
“……?”
“그 얼굴을 보니 전혀 모르고 있나 본데……. 내가 지금부터 네가 저지른 만행을 낱낱이 파헤쳐주마.”
“비켜.”
파천의 손이 라미레스의 어깨를 슬쩍 밀쳐낸다.
라미레스는 끝끝내 포기할 수 없다는 불굴의 의지로 파천의 뒤를 따르며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물론 그 내용물을 분석해 보면 절반은 파천의 잘못을 비난하는 내용이요, 절반은 암울한 미래에 대해 위로하는 말이었다.
“네가 그러고도 무사하길 바라냐? 다른 이도 아니고 네가 어떻게…… 설란을…….”
“설란이라니?”
이제야 반응이 있다. 시큰둥한 표정은 싹 가시고 언제 그랬느냐 싶게 어떤 열기마저 담겨있다. 그걸 흐뭇한 시선으로 주시하며 뒤를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 끝은 미세한 떨림으로 설란을 자꾸만 강조한다.
“저기, 저기 걸어오고 있는 균천의 천주가 바로…… 네 아내이자 네 아이들의 어머니의 어머니인 그녀, 한때는 내 동생이기도 했던 설란, 바로 독고설란이다.”
횡설수설했지만 의미만은 분명히 전달했다. 파천의 표정이 싹 바뀌는가 싶더니 다시 시큰둥해졌다.
“농담 마라.”
파천은 다시 제 갈 길을 갔다. 라미레스는 좀 황당한 심정이었다.
‘내가 그렇게도 신뢰를 주지 못했던가? 내 진지한 말이 이렇게도 쉽게 무시당할수도 있다니.’
“지존, 주모님이 맞습니다.”
막 도착한 페리칸의 확인이 있고 나서야 파천의 몸이 돌려세워졌다. 저 멀리서 아그립바의 손을 잡고 걸어오고 있는 설란의 모습이 파천의 눈에 커다랗게 확대된다.
‘설란…… 이라고? 설마…….’
그는 이미 설란과 재회를 나눈 바가 있다. 그 기억이 어떻게 사라져 버렸는지를 불가사의하지만 그 덕분에 파천은 또 한번의 짜릿한 재회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예전과 달리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감격스런 표정을 지을 줄은 모르는 파천이었지만 은근히 떨리는 음성만은 숨길 수 없었다. 설란은 설란대로 반복되는 재회를 충분히 만끽했다.
나중에 파천의 기억이 완전히 회복되고 나면 그때는 또 어떤 반응을 나타낼지 사뭇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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