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45화 : 사라진 제왕들의 전설
사라진 제왕들의 전설
파천은 왜지 서두는 눈치가 역력했다. 그의 얼굴엔 빛이 나고 눈길은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지혜로 충만되었다. 그 눈은 말하고 있었다.
‘서둘러라. 지금에 만족하는 순간, 교만해지는 때에 내 안의 평안을 조정하고 있던 균형이 무너진다.’
파천의 속도를 일행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였다. 저 멀리 하늘에서부터 시작된 무지개 빛이 이쪽까지 번개가 무색할 정도의 속도로 갈라왔다.
선발대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급작스레 출몰한 빛의 정체는 오리무중.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파천은 모두에게 경고를 잊지 않았다.
“죽고 싶지 않거든…… 뒤로 물러서라.”
파천의 음성엔 긴장이 서려 있었다. 원령체가 된 이후로 단 한 번도 보인 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라미레스도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그는 눈짓으로 모두에게 물러설 것을 종용했다.
라미레스 본인도 자존심을 굽히고 뒤로 물러났다.
무지개는 너무도 아름다워 그걸 대한 이들을 하나같이 황홀경에 젖어들게 할 정도였다. 빠르게 접근하는 무지개의 끄트머리를 지그시 밝고 선 자! 그는 중무장한 전사의 모습이었다.
한 손에 홀을 들었고 머리는 금발로 출렁인다. 전신을 감싼 갑옷 역시 휘황한 빛이 머물고 있어 직시하기 힘들다. 그의 눈은 선하고 아름다웠다. 모든 걸 포용할 듯 넓고 깊었다. 파천은 고개를 갸웃하며 의문을 표시했다.
“그대는 제왕! 어찌 적진에 함부로 들어섰는가?”
그가 바로 제왕이었던가? 파천의 물음에 지척까지 다다른 제왕이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보내며 마주 섰다.
그는 파천의 진면목을 파악해내기라도 하려는 듯 신중한 태도로 그를 살폈다. 제왕이 입을 연다.
“오해를 풀기 위해 왔다. 천궁은 문을 닫아걸었고 수호자는 만날 길이 없다. 이제 내가 누구를 만나야 하는가? 그런 때에 그대를 느꼈다. 난 생각했다. 무한계에 이런 자가 있었던가? 그대는 누군가?”
되려 그가 묻고 있었다. 파천은 제왕의 물음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적의가 없다.’
그랬다. 적어도 눈앞에 선 제왕은 영계에 알려진, 인식되어진 제왕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건 라미레스도 증멸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는 제왕을 대면한 적이 있다. 루시퍼를 따라 만났던 제왕은 패도적이었고 오만의 극을 달리는 자였다.
그리 좋지 못한 인상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지금의 제왕은 전혀 다른 풍모를 보여 주고 있다.
“나는 파천이란 생령. 광명을 얻기 위해 가는 길이다.”
“광명을?‘
그는 진정으로 놀라워했다. 그는 잠시 생각하는 눈치더니 파천의 뒤에 선 자들을 가리켰다.
“저들은 믿을 수 있나?”
“물론.”
“그대와 좀더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다. 내가 그대를 초대하겠다.”
“그럴 수 없다. 내게는 시간이 많지 않다.”
“원령체의 균형이 무너질 것이 두려워서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내 초대에 응해 주면 감사의 표시로 선물을 주겠다. 잠시 동안이지만 원령을 제어할 수 있는 기물을 주겠다.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파천은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제왕이 무한계에 직접 나타났다는 건 대사건이었다. 이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제야 파천은 제왕의 눈 깊은 곳에 미약하게나마 숨쉬고 있는 초조감을 보았다.
‘이 자는 쫓기고 있구나.’
무슨 일일까? 파천은 얼른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흔쾌히 응했다.
“좋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제왕은 파천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파천은 경계하지 않았다. 상대가 자신을 상해할 의도가 없음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제왕의 발아래 출렁이던 무지개 빛이 파천의 전신을 휘감는다. 파천은 기분이 더할 수 없이 상쾌해지는 걸 느꼈다.
“내 초대를 받아들여줘서 고맙다.”
제왕은 엉뚱하게도 파천과 자신을 무지개 빛으로 감싸고서는 이제는 안심이 된다는 투로 그런 말을 했다. 그걸 두고 초대라고 했을 줄이야. 파천은 피식 웃으며 응대했다.
“이 정도라면 얼마든지. 그건 그렇고 조금 전 했던 말의 의미는 뭔가? 무슨 오해를 풀겠다고 하는 건지…….”
“그대들. 영자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 주고자 함이다.”
파천은 예상을 빗나가는 제왕의 말에 얼굴 가득 의문을 담았다.
“그대들은 우리들이 다스리는 땅을 잠자는 대지라고 부른다고 들었다. 일견 맞는 말이긴 해도 지금은…… 해당 사항이 없다. 긴긴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간략하게 말해 줄 수 없나?”
“그러지. 내게도 여유는 없으니…….”
그는 초조감을 여실히 드러냈다. 그는 뜸들이지 않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원래의 우리는 영계를 침략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우리를 적으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 그 모든 것이 메타트론의 속임수. 그는 또다시 거대한 사기극을 준비하고 있다.”
무슨 의미일까? 파천은 한참 동안 제왕이 한 말의 의미를 되씹어 보았다.
“현재 남은 제왕은 고작 열둘. 남은 대륙은 열셋. 제왕의 군대는 힘을 잃었고, 제왕들은 나처럼 모두 쫓겨 다닌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파천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제왕의 선언에 어리둥절해 했다.
“쿠사누스들의 반란이 있었다. 우리들은 그들에게 제압당해 허수아비일지언정 명맥을 유지했지만 그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대부분이 처형당하고 남은 제왕은 고작 열둘.
그 중에서 포로 신세로 전락한 이가 다섯. 나머지 일곱은 뿔뿔이 흩어져서 도주중이다. 비참한 신세가 된 거지.“
지각 변동을 알리는 대 사건이었다. 영자들의 입에 오르내릴 때마다 신비와 외경, 두려움과 증오의 대상이었던 막강한 제왕이 고작 도망자 신세라니. 파천은 한가지 의문을 해소해야 했다.
“무한계에 들어와 있는 제왕의 파견자들은 그대들이 보낸 것이 아닌가?”
“아니다. 쿠사누스들이 섬기는 지도자는 단 하나. 그는 쿠사누스들 중 하나였으나 지금은 유일한 제왕이 되었다.
쿠사누스들의 전폭적인 지지아래 그는 무상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k 무한계에 들어와 있는 파견자들은…… 그가 보낸 자들이다.“
파천은 제왕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한 번쯤 여과시켜 재정리했다. 그러나 결국엔 그대로 믿은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에게서는 진실이 엿보였고, 그로 인해 강력한 설득력을 발휘했다.
“그는 여덟 번째 대륙인 판드아에 새로운 제국을 건설했고 군대를 더욱 강력하게 일치시켰다. 그들의 힘은 지난날 아흔아홉 개로 각기 흩어져 있던 때보다 배는 강해졌다.
그들을 막지 못하면 영계는 마계의 침략과 더불어 멸망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그 말은 그들이 루시퍼와 맹약이라고 맺었다는 의미인가?”
“그건 확실치 않다. 단지 내가 확인해 줄 수 있는 건 현재의 제왕은 광적인 폭군이며 메타트론의 충성스런 수족이란 점이다. 루시퍼가 그러하듯 그 또한 그를 맹신한다. 그런 한편으로는 그를 극복해보려 애쓰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의 의도는 명백하다. 무한계를 포함한 영계 전부를 또다시 자신들의 지배 아래 두려한다.“
“제왕들이 쿠사누스들에게 당할 정도로 약했나? 이해가 가지 않는 군.”
“그럴 테지. 모든 것이 사기극이었다.”
그는 또다시 그 소리를 입에 담았다. 뭐가 사기극이라는 걸까? 패배자의 변명이라 일축할 수만은 없었다.
“예전 메타트론이 쿠사누스들을 잠재웠다. 그 바람에 현 영계 영자들의 반란은 성공했고.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던 거야. 모두가 속았었어. 메타트론과 쿠사누스들에게 철저하게.”
그의 설명은 이랬다.
메타트론은 그전부터 쿠사누스들과 맹약이 되어 있는 관계였다. 아흔아홉의 쿠사누스들 전부가 그의 뜻에 동참한 건 아니었고, 전체의 3할에 해당하는 서른셋이 반대했으며 칼을 뽑아 대항하려 했다. 메타트론이 잠재운 건 사실상 그들이 전부였다.
나머지는 뒤로 물러나서 전황이 어찌 돌아가든 지켜보고만 있었을 뿐.
나중에 새로운 영계가 열렸을 때 포로로 잡혀갔던 서른 세의 쿠사누스. 그들이야말로 제왕에 대한 충정을 끝까지 지키려 했던 자들이었다. 이미 계획돼 있던 반란은 제왕의 대지가 안정을 찾아갈 때쯤 시작되었다.
쿠사누스들의 연합된 힘은 미리 준비하지 못했던 제왕들을 무력하게 몰아붙였고 결국엔 그들의 반란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애초의 의도대로 성공하게 된다.
살아남은 제왕들을 재반격을 준비했지만 그때는 남은 게 없었다. 그들은 더 이상 항거할 여력이 없었. 그들이 내린 결론은 하나. 영계이 이 소식을 알려 도움을 청하자는 것이었다.
메타트론과 천적이라 할 수 있는 수호자라면 자신들을 도와 중 수 있다는 결론. 그러나 수호자는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들이 마음 놓고 무한계를 활보할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롭지도 못했다. 영자들의 눈도 피해야 했고 추적자들도 따돌려야 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시간만 허비하고 있을 때 남은 제왕들은 다시 모였다. 그리고 새로운 결론은 도출해냈다.
“포로로 잡혀갔던 서른셋의 쿠사누스. 그들과 함께라면 해볼 만하다. 거기다 영계의 도움만 뒷받침 된다면 쿠사누스들의 반란을 진압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파천은 제왕들이 내린 결론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전혀 현실이 고려되지 않은 견해였다.
“현 영계는 아바돈과 마계 침략에도 전전긍긍하고 있다. 그런데 어찌 그런 여력이 있겠는가?”
“그런가? 그렇겠지. 그렇다면 서른셋의 쿠사누스들만이라도 찾아낼 수 있다면 그들과 우리의 합쳐진 힘이라면 얼마간은 제왕의 침략을 지연시킬 수 있다. 파천은 제왕에게 궁금한 걸 물었다.
“왜 나를 선택했나? 내게는 영계를 대표할 만한 지위도, 그런 권한도 없거늘.“
“그대만한 자를 보지 못했다. 원령체. 제왕 중에서도 단 하나에 불과했던 원령체를 이곳에서 다시 발견하게 되었다. 너무도 흥분한 나머지 주변의 시선도 무시하게 되었다. 제왕의 파견자들에게 들킬 걸 각오하고서.”
파천은 제왕중 하나가 원령체라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그런 원령체가 있음에도 속수무책이었단 말인가? “그는 메타트론과 싸우다 실종되었다. 판드아의 적통을 이었던 제왕이었지. 그는 가장 강하고 지혜로웠다. 그의 실종으로부터 반란은 시작되었다.”
이 우주에서 메타트론과 싸울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자가 수호자말고 또 있었더란 말인가? 파천은 그가 실종되었다는 사실보다 메타트론과 싸울 수 있을 정도로 강했다는 말에 더 큰 호기심을 나타냈다.
“서른셋의 쿠사누스들은 이곳 영계 어딘가에 있다. 그들만 찾아낼 수 있다면 기억을 회복시키는 건 우리가 할 수 있다. 그들을 찾아내지 못하면, 우리의 역사도 이 시점에서 마감되어야겠지.”
우리의 일이 아니니 나 몰라라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들의 절박함은 영계의 운명과도 맞닿아 있었고, 파천의 복수의 대상인 루시퍼와도 무관하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나?”
“날 영자들이 오해 없이 받아들여 줄 수 있도록 주서해 다오. 이왕이면 천상계나 메덴 정도가 적당하겠지. 그들과 협상을 통해 새로운 길을 모색해 보겠다.”
“판드아의 제왕이 알게 된다면 당장 무한계를 치려 할 텐데.”
“아니. 그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직까지 출정을 머뭇거리고 있다. 내 생각이긴 하지만 메타트론의 특별한 지시가 있었다. 여겨진다. 그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어떤 시점을. 그게 정확히 어떤 때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전에 그가 병력을 동원할 일은 없을 것이다.”
제왕은 자신이 내린 결론에 대해 강한 확신을 표했다. 파천은 생각했다.
‘내가 광명에 들기를 바라는 거겠지. 메타트론과 수호자 둘 모두가 원하는 것. 그때부터 전쟁을 표면화된다.’
파천의 이런 예측이 사실이라면 영계로서는 파천이 생명의 뜰에 이르는 걸 늦춰 주는 게 차라리 도움이 될 일이다. 그러나 파천에게는 그럴 수 없는 사정이 있지 않던가.
“포로로 잡혀온 쿠사누스들을 가려낼 묘안은 없나?”
“있긴 하지만 쉽지는 않을 것이다. 원령체인 그대라면…… 어쩌면 가능할 지도 모르지.”
그것까지 도와달라고 하기엔 그도 염치가 없었던 것일까? 다음 말은 꺼내 놓지도 못했다.
“내겐 아쉽게도 그대를 도울 여유가 없다. 광명을 찾지 못하면 나로 인해 영계가 멸망할 터. 미안하다, 도움이 되지 못해서.”
“아니. 그래, 아난다의 전신이 쿠사누스인 건 분명하지. 그대 역시 그걸 알아낼 수 있었던가? 그렇다면 나머지 쿠사누스들을 찾아내는 것도 그리 힘들지는 않을 것 같은데.”
“아니. 모두가 저 쿠사누스처럼 본신을 찾아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스스로도 모르는 걸 난들 알아낼 방법이 없지. 하지만 저 자는 다르다. 자신의 전신이 쿠사누스인 걸 알고 화신체로 확인을 한 상태였다.
저 정도의 경제 올라 있다면 나로서도 찾아낼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가 발견한 쿠사누스는 저자 하나에 불과했다.“
그의 말로 미루어 보아 그가 아난다는 발견한 건 꽤나 오래전의 일인 것 같았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내게는 시간이 없다. 너를 천상계나 선계 또는 메덴에 소개시켜 줄 시간을 내기가 힘이 든다.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하군.”
“방법은 내가 만들겠다. 네가 날 믿어 주듯이 너처럼 내 말에 귀 기울여 줄 단 한명만 소개시켜 주면된다. 물론 영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여야 한다.
그에게 영언을 전하고 날 보내 주면…… 더 이상 널 귀찮게 하지 않겠다.“
“그런 방법이 있었군.”
파천은 누가 적당할지를 두고 고민했다.
라미레스만큼 적당한 인물이 없지만 지금 그는 자신과 동행중이다. 두 명의 얼굴이 떠올랐다.
‘바소름과 에이어. 그들이라면 현명하게 처리하겠지.’
파천은 제왕에게 간략하게 설명하고 곧바로 영언 전달을 시도했다. 제왕은 파천과 자신을 가두고 있던 공간을 일시에 해제했다.
라미레스의 얼굴을 대하며 그는 친근한 미소를 보냈다. 아난다의 기묘한 표정을 보며 제왕은 기억의 곳간에서 한 명의 쿠사누스를 꺼내 놓고 있었다.
‘내 짐작이 맞다면 그대는 루잔의 철인이라 일컬어졌던 쿠사누스 유스티안이 분명할 터. 아직은 때가 아니지만 그대를 다시 찾겠소.’
제왕의 시선을 담담하게 마주 대하는 아난다. 그 또한 내심으로는 격동하고 있었다. 본능적인 이끌림이 그렇게 만들었다. 파천은 영언 전달을 끝내고 제왕에게 마지막 당부를 잊지 않았가.
“그대를 함부로 드러내지 말라. 그들 중에는 적들의 간세가 많다. 드러내어 좋을 일은 하나도 없겠지.”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고맙다. 약속대로 선물을 주겠다.“
제왕의 손 위에는 작고 귀여운 꽃 한 송이가 쥐어져 있었다. 투명한 꽃송이는 입을 앙 다물고 있었는데, 내부에 무지개 빛이 감돌고 있어 신비로움을 더했다
제왕의 손에서 파천의 손으로 옮겨진 꽃송이. 파천은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상대의 성의를 무시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나 결정적으로 고비가 왔을 때 도움이 될까 해서였다.
제왕은 마지막 말을 끝으로 모두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부디 성공하길 빈다. 판드아의 실종된 제왕은 원령체의 마지막 단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가 그것마저 극복했더라면 메타트론에게 당하지는 않았겠지. 행운이 그대에게 있기를.”
그는 판드아의 제왕이 메타트론에게 당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가 실종된 것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 파천은 제와오가 나눴던 대화를 모두에게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긴중한 라미레스와 설란은 한 번쯤 더 의심해봐야 한다고 했고, 소군은 제왕을 순수하고 진실된 자라고 했다.
페리칸과 카이로는 별 의견 없이 입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 그 정도로 충격이 크다는 증거였다.
아난다. 그는 의외로 지나치게 침착했다. 쿠사누스들의 반란이라는, 그의 입장에서는 무관할 수 없는 사건을 대하고서도 그는 담담할 수 있었다.
‘나는…… 쿠사누스가 아니다.’
굳이 그렇게 주문을 외워대는 걸 보니 그 또한 감추고 있을 뿐 심적 동요가 큰 것이 틀림없었다.
파천과 선발대가 겪어 나가고 있는 일들은 하나같이 영계의 운명과 직결되어있는 비중 있는 사건들뿐이었다. 지금껏 감추어져 있던 것들이 한꺼번에 벗겨지고 있다는 건 그만큼 격전의 때가 가까워지고 있음을 예고하는 것과 진배없었다.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을까?’
설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잔잔한 흥분은 모두에게 동일하게 작용했다. 끝없이 펼쳐져 있을 것만 같은 무한계도 끝이 보이고 있었다. 그들은 무한계가 더 이어졌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다. 왠지 그 끝에 다다르는 순간 감당하기 벅찬 일들이 준비되어 있을 것만 같았고, 운명의 소용돌이는 그때부터 모두를 삼켜 버릴 것만 같았다.
“가자.”
변함없는 파천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가 모두를 안심시키는 유일한 구원의 밧줄이었다. 그들은 파천을 말없이 뒤따랐다.
파천의 뒤를 따르는 자들 중 하나. 그는 오래전부터 선발대의 뒤를 몰래 추적하고 있는 중이었다. 예전에도 이와 같은 경우가 빈번했기에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내게 패배란 없다.’
이런 신념이 그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다.
발도바. 그는 파천에게 패배를 당한 이후에 그의 약점을 캐내기 위해서, 아니 그보다는 그를 파악하기 위해서 꾸준히 일정한 간격을 두고 따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극복하고야 만다. 그런 그도 점점 상심에 젖어들고 있다.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이다. 저 놈은 이제 바라볼 수도 없는 곳까지 이르러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기회가 오겠지. 난 그때는 노려 네 놈을 깨부수고야 말겠다.’
제 능력은 살피지도 않고 되려 않은 망상에 젖어 있는 발도바는 의기소침해지려는 자신을 나무라며 다시금 투지를 불태웠다. 그런 그의 뒤에 불현듯 나타난 괴인이 있었다.
깜짝 놀라 뒤돌아서는 발도바를 스쳐가는 괴인. 그의 손에 투명한 검이 들려있다 발도바의 몸속으로 파고든다.
“컥.”
발도바는 한차례 심한 경련을 보인 뒤 그 자리에 꼿꼿이 선 채로 굳어 버렸다. 그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점차 희미해지는 시야를 통해 자신이 누구에게 당했는지를 파악해보려 했지만 허사였다.
‘이렇게…… 한심한 꼴로.’
발도바의 복수는 여기서 끝나게 생겼다. 상대의 얼굴도 확인하지 못했기에 그는 앞으로도 복수조차 꿈꿀 수 없게 된 것이다. 괴인은 발도바의 곁을 떠나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파천이라고 했나? 제발 광명을 얻어서 돌아오길 학수도개하고 있으마. 짧은 성취감이나마 맛본 뒤에, 최상에서 최저의 나락으로 널 떨어뜨려 주마. 그동안 실컷 누려 두거라. 생각해 보면…… 너와 나의 악연은 참으로 질기기도 해. 이제는 끝낸 때가 왔다. 바로 이손으로.”
괴인의 등은 규칙적으로 들썩이고 있었다. 그는 소리 내어 웃고 있는 중이었다.
바시류스의 통솔아내 마신들과 그노시스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은 높은 언덕 위에 정렬한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파천과 선발대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바시류스는 뒤를 돌아보며 흡족해 했다.
‘이들이라면…… 라미레스 아니라 카란이나 메테우스라고 처치할 수 있다. 이로써 한 번의 실패를 잊혀지고 되려 공으로 뒤바뀔 것이다. 후훗.’
바시류스는 거만한 표정으로 저 멀리까지 내다보고 있었다.
“올 때가 되었는데 …… 꽤나 늑장을 부리는군.”
바시류스는 기다림에 익숙지 않았다. 더군다나 누군가를 처단하기 위해 이렇게 오랜 시간을 기다려본 적이 없다. 그는 점차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이놈들…… 혹시 다른 곳을 통해 이동하고 있는 것 아니냐?”
뒤에 시립하고 있던 그노시스를 그럴 리 없다고 했다. 선발대의 이동경로는 최직단을 가르고 있다. 그들이 이곳을 우회해 지나갈 이유가 없었다.
“곧 나타날 겁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조급해 하는 바시류스의 등이 오늘따라 그노시스들에게는 초라해 보이기만 했다. 그들은 숨죽이고 전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카란이 무한계에서 종적을 감췄을 때, 함께 동행한 이가 있었다.
그는 카란의 분신이나 다름없었던 자로, 카란의 명을 거의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한치의 실수도 없이 완수해냈었다.
그의 이름은 로메로.
카란의 친위대와 제자들을 포함해서 서열 첫 번째를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는 사내였다.
언제나 빈틈없는 일처리로 주변에 냉정하게 비쳐지기도 했지만 기실 그는 누구보다도 따뜻한 사내였다. 그는 스스로가 남들보다 늘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 더 많이 고민하고 더 큰 노력을 기울여 시도한다.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행동하기 때문에 그에게는 실패가 없었다.
카란의 곁을 떠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했던 그가 무한계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등장은 곧바로 카란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그건 다시금 메테우스가 또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불러 일으켰다.
아직은 일반 영자들에게까지 알려진 건 아니었지만 이 소식은 충분히 무한계를 달굴 만했다.
로메로는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옛용이 머물고 있는 용천의 주변엔 기괴한 생물들이 많이 산다. 그놈들 중 일부는 영자들이 탐을 낼 정도로 영특했다.
로메로는 옛용이 선물한 영물을 타고 있었다. 창처럼 뾰족한 꼬리가 아래쪽으로 길게 늘어뜨려져 있고 제 몸의 세배가 넘음직한 날개는 매우 튼튼했다. 이놈의 최고 속도는 영자들이 전력을 기울여 날아가는 것보다 몇 배는 더 빠르다.
뿐만 아니라 특유의 영특함으로 주인의 마음을 능히 헤아릴 뿐만 아니라 높이 떠다니기에 영자들에게 들킬 염려가 없다. 굳이 지시하지 않아도 할 바를 알아서 하는 놈이다. 로메로는 넓은 타쿤의 등에 서서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탄식했다.
“이제야말로 결단을 내려야 할 때. 이때를 위해서 긴 세월동안 스스로를 봉인한 전사들을 불러내야 한다.”
그렇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어쨌든 현재의 무한계는 팽팽한 균형을 이룬 채 서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 봉인한 전사들이 투입되면 그 균형을 일시에 무너지고, 마계와 아바돈은 경계한 나머지 서둘러 전쟁을 시작하려들 것이다.
그걸 우려한 로메로는 잠시 하늘의 기운을 살폈다. 그에게는 습관과도 같은 일상이었다.
“아직은 저들의 기운도 견제를 받고 있다. 그 힘을 바로 저 아래. 의외로 생각지도 못했던 한 생령에게서 변수가 발생하다니…….”
로메로는 처음 그걸 알게 되었을 때 너무도 뜻밖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실수가 아닌가 해서 몇 번이나 천기를 반복해서 읽었다. 그럼에도 결과는 여전했다. 그가 급히 불칸을 보낸 건 원래는 계획에도 없던 일이었다.
그는 카란과 메테우스를 기다려야만 했다. 그들이 있어야 그나마 승리를 기대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솔직히 카란님이나 메테우스 님이라도 아바돈이라면 몰라도 루시퍼는 벅차다. 그 문제가 해결될지도 모른다. 광명을 얻기만 한다면.’
그는 타쿤을 타고 파천 일행을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
‘확인해야 한다. 정말로 그가 운명의 중심에 있는지. 그에게 승부수를 던져도 승산이 있는 건지를.’
타쿤을 타고 전면을 가로막은 로메로를 파천은 기이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번엔 또 뭔가, 라는 의미를 담고서.
라미레스와 아난다와도 안면이 있던 로메로를 그들에게 반갑게 아는 척을 했다. 라미레스는 로메로의 깊은 현기를 담은 눈 속에서 뭔가를 알아내려 애썼다.
“불칸의 말로는 제왕의 파견자들을 만나러 갔다더니…… 어떻게 된 건가?왜 자네가 그들을 만나야 하는가?”
“불칸이 말했나 보군.”
“그렇네.”
“별소리를 다했군. 신경 쓸 것 없네. 그다지 특별한 것도 없으니까.”
“그렇지가 않아. 제왕들이 다스리는 대지에 생긴 변괴에 대해서는 아는가?”
“무슨 말인가?”
로메로는 아직 모르는 듯했다. 그는 기실 파견자들을 만났으나 원하던 바를 이루지 못했다. 마계와 그들이 동맹했는지, 영계 침략의 의지가 있는지를 캐내고, 할 수만 있다면 그 시기 협상함으로써 늦춰 보려 했었다. 그의 계산속에 제왕들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아무리 잠재력을 끌어내 봐도 영계가 상대할 수 있는 건 마계와 아바돈 정도였다. 그나마도 승리할 수 있다,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제왕의 파견자들을 찾아 나선 것이었다.
라미레스의 간략한 첨언에 로메로는 몇 번이나 침음을 발했다. 그는 이제야 모든 게 확연해지는 듯 했다.
‘그래서 그들의 태도가…….’
이렇게 되면 승산은 더 없어진 셈. 로메로는 처음으로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절실히 깨닫는다. 전략도 전술도 한도 내의 전력 차를 전제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제왕의 군대마저 무한계를 침략해 들어온다면 속수무책이다.’
그래서일까? 파천을 바라보는 시선에 간절함이 더해졌다.
‘허, 내가 이런 기대를 하게 되다니. 되지도 않은 일에 기대를 품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 경계해 왔거늘.’
그랬다. 그는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 작은 텃밭을 일구며 큰 결실을 바라는 허망한 짓은 애초에 하지도 않는다.
라미레스는 속 시원하게 매우 간략하게 현 상황을 분석했다.
“처음부터 전력으로는 어림도 없었던 일.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건 이제 두 가지밖에 남지 않았다. 하나는 천궁이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주길 바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파천이 광명을 얻어 원령체를 완성하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 파천이 적의 수뇌만 처리해 줘도 승산을 우리 쪽으로 넘어온다.”
말이야 누군들 그렇게 못하랴. 로메로의 생각도 라미레스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봉인한 전사들이 힘을 더해 주면 전력 상승이 되는 건 맞다. 그럼에도 그 수치라는 게 제왕의 군대를 견제할 정도는 아니었다.
결국 영계의 잠재력을 총동원해봐도 여전의 힘의 균형은 저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셈이다. 그나마 한 가닥 기대를 걸 수 있는 건 아직까지 남아 있었다.
“마계와 아바돈 그리고 제왕이 연합하는 일만 없다며……. 그래서 그들을 각개 격파할 수 있는 기회만 잡을 수 있다면……. 좀더 승률을 높일 수 있을 텐데.”
그들이라고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을 바보들은 아닐 터. 전세가 불리해지면 연합은 기정사실. 로메로는 그들 간의 이해관계를 적절히 이용해 보리라 다짐한다.
그는 파천을 확인하고자 왔다가 더 큰 짐을 안은 셈이었다. 로메로의 얼굴이 어두워진 걸 보며 파천이 입을 열었다.
“그대의 머릿속에 세상을 모두 담으려고 하지 마라. 모든 건 순리대로 된다. 억지로 꿰어 맞춰도 결국은 터지고야 만다. 감춰 있는 걸 모두 드러내 놓고 결과를 기다려라. 최선을 다하다 보면 생각지 못했던 뜻밖의 변수가 발생하지 말란 법이 없다.”
로메로는 파천의 그 말을 다시 곰곰이 되씹어 보았다. 그는 생각했다.
‘수호자 대신 이 자를 얻었다. 수호자의 물러섬이 메타트론의 직접 개임을 막아 주었으니 우리로서는 이득인 셈인가?’
그렇게라도 위안을 하지 않고서는 못 견딜 것 같았다.
로메로는 무한계에 들어온 제왕을 만나고자 하룬으로 떠나겠다고 했다. 그는 당분간 그곳에 머물며 전황을 살필 계획이라 했다. 카린란 메테우스가 무한계로 복귀하는 날, 그의 전쟁은 시작된다. 그의 머릿속에 그려진 그림은 그때부터 최초의 선을 긋고 있었다.
파천과 일행들이 막 북부권의 마지막 매소인 카르나를 지날 때였다. 매소를 우회해 지나가려던 라미레스와 달리 파천은 곧장 매소로 진입하자고 했다.
라미레스는 귀찮은 일이 생길 수도 있음을 충고했지만 파천은 막무가내였다.
매소는 황량했다. 대부분의 영자들이 중부권으로 이동한 때문이었다. 전쟁에 직접 참전하고자 떠난 이도 있지만 모두가 가니 나도 간다는 식으로 아무 생각 없이 무리를 따른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 중 무한계의 주재자들에 의해 전력으로 편입될 수 있는 비율은 그리 높지 못했다. 인간계에서의 전쟁이라면 머릿수를 채우는 의미는 꽤나 큰 것일 수도 있겠으나 영계의 전쟁은 전혀 양상이 다르다. 기준치의 실력도 갖추지 못하고서는 오히려 방해만 되는 것이다.
지금 무한계가 최저로 잡고 있는 수준은 중부권 하위 전사였다. 그들이라 해도 일반의 영자들이 볼 때는 바라볼 수도 없는 강자. 만약 수적으로 승부가 결해진다면 무한계는 영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는 조직할 수 있을 것이다.
매소의 황량함 가운데서도 생기가 조금씩은 느껴지는 걸 파천은 감지했다. 그가 굳이 이곳 매소를 들른 이유는 그 생기들 가운데서 특별한 기운을 구분해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매소의 외곽지역엔 영자는 고사하고 풀벌레조차 보이지 않는다. 한때 사냥꾼들의 집결지로 유명했던 카르나이고 보면 이런 적막감은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모두가 떠나지 않은 바에야 누구라고 있어 주어야 했다. 생기는 매소 가운데 지점에서만 희미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남아 있는 자들은 모두 가운데 모여 있나 보군.”
그렇게 생각할 도리밖에.
그러나 매소 중앙에 도달해 그들이 본 것은 뜻밖의 상황이었다. 언젠가 한 번 연출된 적이 있었던, 파천과 설란, 라미레스 등의 기억 속에서 이와 같은 전경이 그려진 적이 있었던 것이다.
마계에서의 마지막. 루시퍼에 의해 저질러진 잔혹한 도살극. 바로 그 현장에 다시금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모두는 동시에 느꼈다.
영자들의 수는 적게 잡아도 5백여 명. 그들은 옷이 찢어진 상태로 묶여 있었다. 살이 발라지고 뼈가 피부 밖으로 툭툭 튀어나온 상태로 그들은 가늘게 마지막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누구의 소행인지 모르지만 흉수는 잔인하게도 그들이 단숨에 죽을 수 없도록 출혈의 양을 교묘하게 조절해 놓기까지 했다.
두 개의 나무기둥을 십자 형태로 묶고 그 위에다 영자들을 결박시켜 놓았다. 파천과 가장 가까이 있던 자가 고통을 호소해 왔다.
“제발…… 죽여주시오.”
이 정도쯤이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법도 하건만 그들은 그럴 수가 없었다. 무엇을 피부에다 뿌려 놓았는지 부글부글 거품이 일고 있었다. 피부 조직이 조금씩 미세하게 녹고 있는 걸 파천은 똑똑히 관찰할 수 있었다. 파천은 두말 않고 손을 떨쳤다. 원령이 한바탕 매소 광장을 휩쓸고 지나갔다.
휘스스스
소군은 질끈 감았던 눈을 다시 떠보았다. 보이지 않는다. 조금 전까지 고통에 몸부림치던 자들과 십자형틀이 흔적 없이 사라지고 난 뒤였다. 아직까지 한 손을 들고 있는 파천의 모습이 두 눈을 가득 채웠다.
“으음, 대체 누가 이런 짓을.”
아난다는 연신 고개를 저었다. 그의 자비심 가득한 눈엔 금방이라도 눈물이 차오를 것만 같았다. 파천이 말했다.
“나오너라. 거기 숨어서 날 살피지 말고 당당하게 나서라. 내게 보이기 위해 한 직인 걸 다 알고 있음이니.”
“그러죠.”
맑고 낭랑한 목소리는 모두가 기대하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의 눈앞에, 조금 전까지 죽음을 호소하던 자들이 가득하던 그 자리에 세 명의 인물이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별안간 나타났다.
제일 먼저 눈에 뜨인 이는 라넷. 그녀의 모습에 설란이 흠칫 놀라고, 라미레스는 진정 의외라는 낯빛이었다.
파천의 눈은 라넷에게 향해 있지 않았다. 제일 앞에 서서 자신을 빤히 주시하고 있는 미청년. 아름다운 사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이마에 선명한 표시는 마계의 것이었다.
“너…… 로구나.”
너로구나. 파천이 할 수 있는 말이 고작 이것뿐이었던가. 설란도 그제야 환아를 바라보았다.
천아를 보는 라미레스의 두 눈 역시 잔잔한 떨림을 보인다. 정작 환아와 천아, 아니 루시퍼에 의해 헤르파와 라아그라 명명된 그들은 태연한 신색으로 자신들의 부모를 대했다.
“네, 오랜만이군. 그 동안…… 몰라보게 변했군요.“
그건 되려 파천이 하고 싶은 말이다. 설란이 파천 뒤에서 앞쪽으로 나오며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붙들었다.
“환아, 환아니?”
헤르파가 자신의 옛 이름을 부른 여인에게 시선을 돌린다.
“누구?”
그는 설란을 알아보지 못했다. 천아 역시 라미레스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은 파천을 찾아온 것이었다. 그의 곁에 천마와 설란이 함께 있음은 생각지 못한 상태였다.
“나다. 네 엄마다. 환아야.”
“엄…… 마…… 라고?”
그때 라아그 역시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라미레스가 낯설지 않게 여겨졌다. 그 또한 상대가 누군지를 알게 된 것 같았다.
“훗, 재미있군. 패배자들이 모두 모이셨군. 그럼 저기 천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소군인가? 그 뒤는 광마존과 율극쯤 되겠군. 하하하,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야.“
환아의 비웃음은 설란의 가슴을 송두리째 짓쑤셔 놓는 잔혹한 행위였다. 헤르파와 라아그는 놀랄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그들의 체형뿐 아니라 심성마저도 예전의 모습이라고는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파천은 낮은 어조로 말했다.
“패배자…… 그래 네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다. 우리는 패배자다. 물으마. 넌 왜 여기를 왔는냐? 루시퍼가 우리를 도륙하라고 하더냐? 아니면…… 우리가 너희들 기억 가운데 들러 붙어있는 게 너무도, 너무도 불쾌해서 자진해서 왔느냐?”
파천은 지나치게 흥분하고 있었다. 원령체가 된 이후 단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던 그다.
어떤 일도, 설사 당장에 영계가 먼지 하나 남지 않고 소멸하는 일이 벌어진다 해도 그는 이러지 않을 것이다. k조금 전 보았던 잔인한 학살의 장면이 다른 이도 아닌 자신의 아들에 의해서 저질러졌다는 사실과 더 이상 환아가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을 저렇게 만든 루시퍼에 대한 분노와 이 모든 게 자신의 무력함이 빚어낸 결과라는 사실이 파천의 가슴을 갈가리 찢어 놓았다. 그는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까지 서슴없이 내뱉었다.
“환아와 천아는 죽었다. 너희는 그 아이들의 망령. 루시퍼의 꼭두각시가 된 악마들이라면 내 손으로 처단하는 것이 지당하다.”
설란은 덜컹 내려앉는 가슴을 부여안고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울었다.
라미레스는 아예 시선을 외면하고 말았다. 소군과 페리칸 등도 나설 수 없는 상황에 가만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느냐? 진정…… 나와 맞서겠는냐?”
헤르파는 피식 웃었다. 그 웃음으로 그는 답을 대신했다. 이때 라넷이 참견하고 나선다.
“파천, 흥분을 가라앉히는 게 좋을 듯싶은데. 어차피 헤르파와 라아그는 너희들과 싸울 일이 없다. 너는 루시퍼님의 몫. 그리고 지금 본계에서는 아직까지도 너에 대해 관대하다.”
라넷의 그 말은 타오르는 불길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었다.
“용서하지 않는다. 루시퍼, 네 놈을 저주한다. 널 갈기갈기 찢어도 내 분노를 달랠 수는 없을 것이다.”
파천의 얼굴에서 잔잔하게 머물던 금빛이 더욱 선명해졌다.
헤르파의 눈이 이채를 담았다. 파천의 두 눈은 이 순간 동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단순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마주보고 서 있는 헤르파와 라아그, 라넷만이 이를 보고 있었고, 파천의 옆이나 뒤에 있던 자들은 아직까지 그 사실을 몰랐다.
헤르파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 현상은 뭐지? 설마…… 우리를 공격하려는 것인가?’
그는 부정했다. 자신들은 몰라도 파천은 그래서는 안 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마주보고 언성을 높일지언정 서로 싸워서는 안될 것 같았다.
헤르파는 불길함을 떨치고자 고함을 질렀다.
“그 따위 헛소리만 지껄이지 말고 덤비려면 어서 덤벼.”
이게 자식이 아비에게 할 말이던가. 헤르파는 철저하게 마성에 젖어 있었다. 라아그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루시퍼님의 당부가 있었다지만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지는 않는다.”
라넷은 돌변하는 상황에 어쩔 줄 모르고 당황했다. 인간의 정리 따위엔 초연한 그녀였지만 그런 그녀도 지금 벌어지려는 일만은 왠지 께름칙하겨 여겨졌다.
‘이건 좋지 않아.’
라미레스도 그제야 일의 긴박함을 눈치챘다.
‘파천이 이상하다.’
“파천, 정신차려라. 흥분을 가라…….”
“으아아아아…….”
파천이 내지른 괴성은 하늘 끝까지 다다를 것 같았다. 그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그 순간 파천의 전신에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밝은 빛이 투사되었다.
“위험하다. 다들 피해!“
라미레스의 경고에 모두 분분히 사방으로 흩어졌다.
파천의 전신을 물들이고 사방을 적셔 가던 금빛은 이제 칠채서광을 띠고 있었다.
“큰일이다. 원령이 또다시 발작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
라미레스는 그렇게 단정지었다.
헤르파와 라아그도 심상치 않다는 건 알았지만 구체적으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는 파악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라넷. 그녀는 한 가지 사실에 주목하고 있었다.
‘메타트론 님의 마력이 최상승에 달하면 저런 현상이 빚어진다 들었다. 저건…… 좋지 않다.’
라넷은 헤르파와 라아그에게 빠른 말로 제안했다.
“여길 떠나자. 아무래도 위험이 닥칠 듯…….”
그녀는 말을 마저 끝맺지 못하고 다물고 말았다. 파천이 다가서고 있었다. 헤르파와 라아그 그리고 라넷이 서 있는 곳을 향해 파천은 느릿느릿 걸음을 세듯 다가서고 있었다. 설란이 외쳤다.
“안 돼. 안 돼요. 파천, 그러면 안 돼요.”
설란이 뛰어 나가려는 걸 라미레스가 제지했다. 그는 팔뚝의 힘줄이 툭툭 불거지도록 설란을 꼭 부여잡았다.
‘어쩔 수 없다. 지금 나서는 건 더 큰 비극을 불러온다.’
라미레스는 이 순간 체념한다. 파천의 내부에 온순하게 잠들어 있던 원령이 다시 발작을 일으킨 거라면, 그리고 파천이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폭주한 것이라면 그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아이들뿐 만아니라 자신들도, 그리고 영계도 불운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다가서는 파천을 라넷은 두려움 가득한 시선으로 대했다. 라넷은 두 팔을 활짝 벌려 프리즈마를 유동시켰다. 이대로 손놓고 당할 수만은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강의 공격을 준비했다. 그 정도로 파천이 뿜어내는 기운은 예사롭지 않았다. 라넷이 긴장하는 것과는 달리 헤르파는 담담하기만 했다.
‘어서 와서 날…… 치세요. 그것만이 모든 걸 원점으로 돌려놓을 수 있으니까.’
헤르파는 눈앞에 다가서고 있는 거인을 쳐다보았다. 그는 기억을 되짚으며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그의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거인이 있었다. 세상 전부보다 더 큰, 힘센 자.
그가 바로 자신의 아버지 파천이었다. 그는 모든 이들이 경외하고 진심으로 존경하며 따르는 세상 밖의 거인이었다. 지금 눈앞을 그득 채우며 다가서고 있는 파천은 역시나 변함 없는 거인이었다. 대항할 의지마저 꺾어 버리는 절대강자.
헤르파는 생각했다.
‘꿈이라면 좋겠어요. 내 안에 내가 모르는 것들이 너무도 많아요. 난 이제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네요. 아빠와 엄마를 향해 내가 칼을 휘두르게 될까봐, 내가 얼마나 노심초사 했는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언젠가는 날 구해주러 아빠가 오실 거라는 믿음. 그것을 포기하던 순간, 난 모든 걸 버렸어요. 이제 이대로 영원히 잠들어 깨지 말았으면…….‘
헤르파의 마성이 많이 수그러졌다. 라넷이 파천을 공격하는 게 보였다. 공격했던 라넷이 오히려 뒤로 한참이나 퉁겨지는 것도, 탈골된 한 팔을 움켜쥐고 신음을 흘리는 것도 헤르파, 아니 환아에게는 꿈결 같았다.
파천이 내지른 분노의 일상이 그를 잠시 깨워 놓았다. 파천의 한 손이 하늘로 치켜 올려졌다.
‘저 손이 내려오면…… 모든 건 끝난다. 이 지긋지긋한 악몽도 벗어날 수 있다.’
헤르파는 두 눈을 꼭 감았다.
라아그의 시선은 마지막이라도 되는 듯 라미레스를 찾았다. 라아그는 피식 웃었다. 상황과 너무도 어울리지 않게 그 웃음은 해맑기만 했다. 진흙탕 가운데서 피어난 연꽃을 보듯.
라미레스가 천아의 미소를 본 것은 모두를 위해서는 행운이었다.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
지나가 버린 시간을 돌리거나 쏟아 버린 물을 주어 담으려는 노력은 허망한 것이었다. 결과가 생겨나기 전에 라미레스는 뭔가를 해야만 했다.
“파천, 기다려!”
라미레스는 파천을 향해 신형을 전력으로 날렸다. 그의 어깨가 파천의 등에 부딪쳤다.
“크억.”
라미레스는 답답한 신음을 토해내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파천은 미동도 없다. 라미레스가 다시 황급히 두 손을 떨쳤다.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저 손이 내려오면…… 모든 건 끝난다. 되돌려 놓을 수 없는 결과는 더 큰 아픔을 남겨 두게 될 것이다.
라미레스의 전력을 담은 공격은 모두의 시선을 붙잡아 매놓을 정도로 강력했다.
콰쾅
우르르릉
은은한 뇌성마저 동반된 회심의 일타가 파천의 등에 작렬했다. 그럼에도 파천의 손은 모두의 기대를 여지없이 깨버리고 멈춤 없이 내려오고 있었다. 그는 전혀 타격을 받지 않은 채였고 하던 행동을 멈출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라미레스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렇게 된 이상.’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보기로 했다. 파천의 손이 아래로 내려지고 라미레스가 그의 앞을 막아선 건 동시였다.
누군가의 얼굴이 놀람으로 일그러지고. 다급한 나머지 입을 활짝 벌리거나 두 팔을 뻗어 무언가를 잡으려는 이도 보인다. 라미레스는 툴툴 메마른 웃음을 흘렸다.
‘이렇게 가는 건가? 아직은 가슴속의 한을 풀어내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끝나는구나.’
그럼에도 기뻤다. 누군가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내어 놓을 수 있다는 것이, 그 대상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사실이. 파천의 원령사가 라미레스를 휘감으려는 순간이었다.
파천의 가슴 앞으로 무엇인가가 삐죽이 고개를 내민다. 제왕이 주고 갔던 꽃송이. 꼭 다물고 있던 꽃잎이 활짝 봉우리를 벌렸다. 그리고 내부를 일렁이며 오가던 칠채서광이 몸 밖으로 쭉 뻗어 나왔다.
파천의 전신은 스스로가 내뿜는 원령의 기운과 제왕이 던져 주고 간 꽃 한 송이가 뿜어내는 빛으로 가득 물들었다. 파천의 눈이 시야를 확보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의 의지가 새롭게 일어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파천은 아차, 하는 심정이었다. 그는 원령을 거둬들였지만 늦어도 한참은 늦어 있었다. 원령사의 일부가 라미레스의 전신을 여지없이 꿰뚫은 뒤였다.
“아아……”
설란이 머리를 짚으며 비틀거린다. 라아그가 앞으로 뛰어나가 허공으로 붕 떠오른 라미레스를 부둥켜안았다.
그리고 침묵이 도래했다. 깨어져서는 안 될 침묵이 점점이 허공중에 흩뿌려지는 선혈을 따라 함께 내려앉았다.
파천은 눈앞에 아찔했다.
천아의 품안에 안겨 있는 라미레스의 시신은 감히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한없이 미웠다.
분노의 대상은 루시퍼이건만 엉뚱하게도 친구가 시체가 되어 누워 있다니. 이런 결과를 누군들 원했겠는가.
라아그는 무표정한 얼굴에 웃음을 담으려고 애썼다.
“바보같이…….”
라아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표현이었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하야. 헤르파는 고개 숙이고 넋이 나가 있는 파천을 쳐다본다.
‘또 그러고 있군요. 당신에게는 당당함이 어울리거늘, 왜 그런 나약한 모습으로 서 있습니까?’
“쿨럭, 이렇게…… 가는구나.”
분명 라미레스의 음성이었다. 곧 끊어질 듯 연약한, 생명의 마지막 호흡을 토해 놓고 있었다.
그 순간 파천의 두 눈에 희망의 실체가 잡혔다.
“살아 있었다니.”
파천은 라아그의 품안에 있던 라미레스를 빼앗듯이 제 품에 안았다. 미약하지만 아직 살아 있었다. 파천은 웃었다.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하하, 질긴 놈. 무슨 미련이 많아 아직까지 숨을 놓지 않고 있더란 말이냐.”
원령체의 치료술은 기적의 실현이었다. 영혼만 떠나지 않았다면 상세가 어떠하든 상관없이 모든 걸 원상으로 회복시킬 수 있다.
파천의 이런 능력을 그노시스를 상대로 발휘된 적이 있었다. 파천은 라미레스의 머리와 가슴에 각기 한 손씩을 얻었다. 그리고 잠시 뒤, 떼어냈다. 힘없이 늘어져 있던 라미레스의 몸을 파천은 바닥에 내동댕치쳤다.
“그만 일어나라.”
잠잠하다.
“하여간 놀랐다. 비록 원령사의 상당부분을 거둬들인 상태라지만 그걸 맞고도 살아 있을 수 있다니……. 네 생에 대한 집착이 널 살렸다.”
그때까지도 숨도 쉬지 않고 있던 라미레스의 한쪽 눈이 슬며시 떠졌다. 그리고 한다는 말이,
“나…… 산 것 맞아?”
지켜보던 모두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심지어 라넷까지 동일한 심정이었다. 라미레스는 일어나 앉으며 툴툴거렸다.
“지겨운 놈, 네 곁에 있으면 자다가도 벼락 맞을 게 뻔하다. 죽일 듯이 광분하던 놈이 이제는 계집애처럼 샐샐거리는. 네가 죽였다가 살려 놓았으니 고맙단 소리는 않으마. 빌어먹을, 대마신 바알세불이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되었는지.”
파천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가까이 다가온 설란이 둘을 지나쳐 헤르파에게로 갔다.
“환아야, 누가 뭐래도…… 네가 아무리 달라졌다 해도 너는…… 여전히 내 사랑스런 아들이란다. 네가 부정한다 해도 그건 변함없는 사실이야. 아직은 모든 게 혼란스럽겠지.
기다리마. 네가 그 모든 걸 떨쳐 버리고, 이겨내고 다시 돌아올 날은 그럴 수 없다면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차라리 우리 앞에 나타나지 말아다오.“
뜻밖의 말이었다. 파천은 설란이 환아를 붙들고 울고불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모정은 부정보다 강인하다. 저 말을 하기 위해서 그녀는 몇 번이나 가슴을 스스로 생채기 내고 도려냈겠는가.
설란이 다시 입을 열었다.
“화아는…… 잘 있니?”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였다. 헤르파는 고개를 슬쩍 외면하며 한 번 끄덕거려 주었을 따름이다. 그것만으로도 설란은 충분했다. 헤르파가 말했다.
“곧…… 본계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될 것입니다. 내가 선봉을 서기로…… 되어 있습니다. 부디……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죽일 놈.”
루시퍼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헤르파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있던 카이로가 화가 나 뱉은 말이었다.
“이제 그만…… 되었다. 네 길을 가거라. 네가 선택한 길…… 하지만 이것 한 가지만은 듣고 가거라. 가다 잘못된 길이라 여겨지거든…… 언제든 돌아오너라. 우리는 변함없이 그 자리에 서 있을 테니.”
파천은 마음을 진정시키며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헤르파는 대답없이 몸을 돌려세웠다.
‘되었다. 이제는 후회도 없다.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이제는 되었다.’
헤르파는 내심을 정리하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난 그는 끝끝내 하고 싶었던 말을 하지 못했다. 가슴속에 담아 둔 그 말은 언제고 그의 영혼을 멍들게 할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떠났다. 더 큰 상처를 모두에게 만들고 그들은 떠났다.
장성한 자식이 모습이 오히려 서글픈 현장을 그렇게 조용히 막을 내렸다.
파천도 매소를 벗어났다. 그는 한시도 더 이상 이곳에 머물고 싶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