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46화 : 파천, 무한계의 끝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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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검 – 146화 : 파천, 무한계의 끝에 서다.


파천, 무한계의 끝에 서다.

마침 그때 제왕이 주었던 한 송이 꽃이 없었더라면 파천은 원령화되었을 것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서 제왕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가 신비한 보물을 파천의 손에 쥐어 주지 않았더라면 파천의 운명을 뒤바뀌었다.
이처럼 세상일은 지나고 나서 돌아보면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 많다. 지금도 같은 상황이었다.
바시류스가 매소 카르나에서 더 북쪽으로 물러서지 않았다면, 그들은 마침 그곳에 있던 파천과 환아의 일을 보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감히 이런 암습 따위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가를 뼈저리게 깨달았을 것이 아니다.
마신들과 기습. 파천을 중심으로 일행들은 좁은 간격으로 둘러서 있었고, 그들을 향해 마신들의 파상 공세가 퍼부어졌다. 죽음의 순간에서 간신히 살아 나온 라미레스는 저 위 벼랑 끝에서 킬킬거리며 웃는 바시류스를 발견하고는 어이없어 했다.
파천이 쳐놓은 보호막은 일행들 전부를 감싸고 있었다.
“크크크, 무덤치고는 꽤나 운치 인ㅅ는 곳이로군.”
바시류스는 여유롭게 조롱까지 하고 있었다.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한 파천.
‘이들을 죽여 봤자 적들의 전력에는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한다. 그래도 살려 보낼 수는 없겠지.’
바시류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는 상황이 좀 이상하다는 걸 간파했다. 공격은 죽어라고 하는데 픽픽 쓰러져야 할 선발대는 멀쩡히 서 있고 마신들이 하늘 높이 퉁겨져 오른다.
선발대를 빙 둘러싸고 마신들을 허공중에서 아래쪽을 향해 전력을 퍼붓고 있었다.
우르르르릉 꽈꽝
천지를 울리는 소음 요란하고 번쩍번쩍 모양새도 그럴 듯한데 영 효과가 없다. 자신이 쏟아낸 힘에 퉁겨지는 꼴들이란.
벌겋게 확 달구어진 철판에 콩을 던져 놓은 듯 이리 저리로 마구마구 퉁긴다. 바시류스는 그제야 선발대의 모습을 다시금 확인한다. 그들이 서 있는 공간을 희미한, 투명한 막이 가로막고 있음을 알아챘다.
“저건 웬 호신막이란 말이더냐?”
곁에 있는 그노시스에게 물은 것이다. 그노시스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저들이 친 것이겠죠.”
그걸 몰라서 물었을까? 어떤 호신막이 저리도 강할 수 있다는 말인가, 라는 물음이었는데 그노시스는 잘못 이해한 것이다. 그는 실수를 만회하고자 급히 말을 덧붙였다.
“제가 내려가서 확인해 보고 오겠습니다. 누가 쳐놓았는지까지 상세하게…….”
바시류스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마신들의 공격이 전혀 먹히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다. 선발대중 하나가 분리되어 나서는 게 보였다.
“저놈은?”
“파천이란 생령입니다.”
라미레스가 아닌 파천이 나선다?
바시류스는 고개를 갸웃했따. 그는 마신들을 독려했다. 언제까지 호신막의 보호 아래 숨어 있을 수만은 없을 거라는 너무도 단순한 계산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었다.
저 정도의 호신막을 칠 수 있다면 그 능력이 어디에 미쳐있는가를 생각하는 게 당연한 순서다. 그런데 아바돈의 바시류스쯤 되는 인물치고는 상황 판단이 지나치게 느렸다.
파천은 허리를 한껏 뒤로 젖혔다가 앞으로 확 꺾으며 손에서 프리즈마를 쏟아 놓는 마신들을 별 의미 없는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파천의 걸음은 매우 느렸다. 그는 공격권 내를 천천히 걸어서 빠져 나왔다. 절반의 마신이 그에게로 공격을 선회해 집중시켰다. 파천은 맨몸으로 그들의 공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퍼퍼퍼퍼퍼퍽
파천은 자신의 몸을 신기한 듯 내려다보았다.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간질간질 한 듯도 한데 좀더 세게 쳐줬으면 하고 바랄 정도였다.
스스스스
파천의 신형이 마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높이까지 솟아올랐다. 서른이 넘는 마신들은 그 바람에 파천만 공격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총 서른다섯 중 서른둘의 마신이 파천에게만 집중시키고 있었다.
아바돈이 상급으로 분류한 마신 셋은 바시류스의 뒤에 시립한 채로 격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도 곧 격전 중에 참가하게 될 것이다.
바시류스는 파천과 마신들 간의 싸움을 면밀히 살폈다. 사실 싸움이라고 하기도 뭣한 것이 아직까지 파천이 공격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마신들의 일방적인 공세, 일방적인 수세였다.
공격하고 되려 타격을 감다하는 마신들의 모습을 보며 바시류스는 파천이란 생령이 보호막을 친 장본인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의 상식으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눈앞에서 뻔히 펼쳐지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파천과 마신들의 격차는 언뜻 보아 짚어 볼 수 없을 정도로 커보였다. 모든 건 상대적이다. 마신들이 약한 건 아니다. 그들이 약해 보일만큼 파천이 센 것뿐이었다.
조막손을 지닌 어린아이가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굳건한 문과 같이 파천의 원령체는 마신들의 무수한 타격에 조금도 요동하지 않았다.
하늘을 나는 새는 하늘을 느끼는 법이 없다. 물 속을 유영하는 물고기들은 물과 자기들을 구분하지 않는다. 늘 공기를 들이마시며 사는 사람들은 그 소중함을 잊을 때가 있다. 이처럼 존재함이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은 특별히 주시되는 법이 없고 관심을 받지 못한다.
허나 그것이 사라진다면, 어느 날 익숙했던 모든 것이 바뀌어 버린다면 너무도 절실히 그 소중함을 깨달을 것이다. 파천은 그와 같은 이였다. 너무도 익숙하게,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제 존재를, 제 가치를 드러낸다.
모두는 그때서야 느낀다. 그가 있었구나. 그가 우리를 보호하는 구나. 그가 있어 안심이 된다. 그가 있어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 설란과 소군, 라미레스와 아난다, 페리칸과 카이로 모두는 파천이 있어 든든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은 이제 파천을 더 이상 지켜줄 필요가 없었다. 그를 이끌 필요도 없고 그에게 무언가는 알려 주어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이제 스스로 그 모든 걸 해낼 것이며 오히려 주변의 위협들로부터 자신들을 지켜낼 것이다. 이런 믿음의 시선들은 굳건하기만 했다.
파천은 주변을 가늠했다. 나라는 개별성 이전에 공간을 인식했고, 그 공간에 가득한 보이지 않는 생명들을 느껴 갔다.
원령은 생명에 다름 아니다. 하나하나가 살아 있으며 서로를 고집하지 않고 서로 섞이고 뭉쳐서 새로운 생명을 창조한다.
원령의 유기적인 결합력은 서로를 끌어당기고 밀치는 가운데서도 끈끈하게 유지되며 짧은 주기를 통해 분열하고 융합하여 더 큰 창조로 나아간다.
내부에 가득 차올라 포화상태가 되어 원령은 이제 분출을 시도하려 한다. 파천은 그 느낌을 관조하듯 찬찬히 살펴갔다.
화아악
빛. 화려한 빛의 분출은 외부로 확장되며 공간에 존재하는 원령과의 접촉점을 찾아낸다. 원령을 사용한다 함은 관계를 확장시킨다는 의미와 동일했다.
안에 가둔 것을 밖으로 내보낼 때 전혀 새로운 형태의 힘이 발생한다. 파천의 전신을 채우고, 그의 주변을 채우고, 그의 의지가 허용하는 공간을 채운다. 빛은 보기에 아름다웠지만 결과만은 그렇지가 않았다.
마신들의 신체는 강건하지만 원령의 폭발을 견디기에는 턱없이 약했다. 저항은 부질없는 것이 되고 그들은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무로 돌아갔다.
정적.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바시류스의 불신은 나타난 결과를 강하게 부정했다. 반발. 그의 명령의 이제 죽음을 집행하는 소리였다.
“모두 나가서 싸워라.”
모두 나가서 죽으라는 명령과 다름없었다.
세 마신들이 조금의 주춤거림도 없이 앞으로 튀어나간 것에 비해 그노시스들은 멈칫거렸다.
곧바로 그들은 체념했다. 명령불복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으로 다가온다. 망설임보다는 두려움이 그들은 떠밀어냈다.
이때 막상 반사적으로 명령을 내렸던 바시류스도 내심으로는 갈등에 휩싸여 있었다. 그의 정신 속에서 벼락치듯 충돌하고 있는 이견은 서로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승…… 산이 없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도주는 있을 수 없다.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란 말은 아바돈에게는 되도 않은 소리, 씨도 안 먹힐 말이다.
퇴각의 결과는 처형. 실패의 보상을 죽음. 명령 불복종은 고통 후 소멸. 이처럼 간단한 공식에 익숙해져있는 바시류스가, 더군다나 지금껏 주로 집행하는 위치에 있던 그가 승산이 없다고 해서 등을 보이려 하겠는가.
그는 오랜만에 자신이 전사임을 자각했다. 그는 스스로도 싸울 마음의 준비를 했다. 전투는 그에게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오늘은 분명 기억할 만한 전투가 될 것이다.
‘절대강자. 그래, 나는 그런 자들과 한 번쯤은 싸워 보고 싶었다. 생령인 네가…… 그런 절대강자였을 줄이야. 후후후, 운도 없군. 아바돈이 영계를 지배하는 성전에서 꼭 동참하고 싶었거늘.’
그는 마음을 새롭게 했다. 그노시스들의 비명이 들릴 때마다 그는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한심한 놈들. 마신들보다 못하다니.’
마신들은 고통 앞에서 나약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노시스들은 달랐다. 죽음의 공포는 이겨냈지만 고통에 무릎 꿇는 본능만은 어쩔 수 없었다.
파천은 진정 위대해 보였다. 적으로 마주선 바시류스의 눈에도 그렇게 비췄다. 아름다운 춤이라도 추는 듯 가뿐한 손놀림에 그노시스들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내렸다.
마신들은 그들보다는 오래 견딘다. 그들이 상위로 분류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가볍게 펼쳐진 원령사는 그들을 무력하게는 만들었지만 완전하게 소멸시키지는 못했다. 파천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더군다나 마신들의 공격이 어쩌다 몸에 적중되기라도 하면 찌릿찌릿한 느낌까지 전달되었다.
‘강하군.’
마신들은 빠르고 강했다. 그들은 강할 뿐만 아니라 매우 교활했으며 전투에 상당한 경험을 쌓은 것 같았다. 서로간의 허점을 채워줄 줄도 알았고 힘을 합할 줄도 알았다.
파천은 이제 끝내야 할 때라고 결정했다. 결정은 곧장 실행된다.
‘제왕력의 여섯 번째 원령의 폭풍. 사정권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갈가리 찢겨 놓는다.’
파천의 신형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서는가 싶더니 파악하기도 힘들 만큼의 속도로 빠르게 회전했다.
쐐애액
콰콰콰콰
대지를 뽑아 하늘로 이어 놓으려는 걸까? 강력한 돌풍의 사정권이 3장을 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파천이 마음 놓고 펼쳐 놓는다면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바시류스는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마신들의 형체가 그 자리에서 소멸하는 것을. 햇살에 흩어지는 안개처럼 그들의 자취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바시류스는 땅을 박차로 하늘 높이 솟구쳤다. 그의 의도를 모르는 이가 보았다면 도주를 감행할 줄 알 정도로 높게 솟아 올랐다. 한 지점에서 정지한 바시류스가 고함을 질렀다.
“안의 사념이여, 돕는 마령이여. 내게로 와 모든 걸 처음의 상태로 돌릴지니. 가라.”
바시류스는 스스로 용기를 북돋으며 전력을 짜냈다. 파천은 생각했다.
‘마계의 마력과 아바돈의 마력은 출발점이 비슷하다. 하지만 근원적으로 틀린 것이 있다. 마계는 메타트론에게서 힘을 얻었지만 아바돈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들에게서 힘을 배웠다. 과연…….’
마신들과는 또 다른 의미. 파천은 호기심을 나타냈다. 일반 영자들이 사용하는 것이 순수한 프리즈마라면 마력은 좀더 가공시킨, 변질된 프리즈마였다.
악한 사념이 포함되어 있어 여러 현상을 동반한다. 바시류스의 공격도 그와 같았다. 머리사 셋이요, 뿔이 아홉인 마신상이 두 손에 거대한 창을 들고서 파천을 향해 내리꽂히고 있었다. 파천은 실소했다.
‘꽤나 거창하군.’
“소멸하라.”
오만한 언명은 거침없다. 손을 쳐들고 그렇게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바시류스의 주변에 갑자기 생겨난 수백, 수천 개의 륜. 그것들은 파천의 의지에 동참해 맹렬하게 돌아가며 바시류스의 전신을 덮어 버렸다.
“끄아아악.”
바시류스는 길고도 긴 비명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가 발출해낸 마력도 물론 허망하게 흩어졌다. 이제 우위는 명백해졌다.ㅏ 아바돈의 바시류스도 파천의 한 수조차 받아내지 못한다. 그들이 자랑하는 마신도 마찬가지.
그렇다면 이제 그들에게는 결국 하기오스들과 마령의 본주만이 남는다.
‘강해도 너무 강하구나. 파천에 의해서 구도는 새롭게 재편된다.’
라미레스의 이런 예측은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비교적 객관적인 평가에 기초하고 있었다. 어쩌면 파천이 그렇게도 원했던 절대자들 간의 대결로 모든 상황이 압축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북부권도 거의 끝나가는 지점이었다.
무한계를 종단한 파천은 많은 이를 만나건 아니었으나 무한계와 영계의 현 상황을 구체적으로 접하게 되었다. 그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와 그 바탕위에서 결정될 것이다.
파천은 광명을 가져온다는 생각에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실패는 곧 공멸을 의미했다. 그러하기에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해야만 했다.
‘광명으로 완전해진다면 루시퍼를 처단할 힘이 생긴다. 그리고…… 내게 기회를 준 영계에 보답하는 것도 그것뿐. 그런 뒤, 나는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
파천은 이제 서두르지 않았다. 모두와 잠시지만 작별할 때가 다가온 것이다. 조금만 더 가면 중간계로 접어들게 된다. 거기부터는 영자들이 준비 없이 들어서기엔 지나치게 위험하다.
중간계는 우주의 온갖 찌꺼기가 가득한 곳. 갖가지 기이한 생명체와 환상으로 채워진 곳. 거길 드나들 수 있을 정도가 되려면 적어도 영계에서 절대자라 불리지 않고서는 곤란하다.
중간계는 또한 마령과 비슷한 성질을 지니니 여러 사이한 정령들이 자주 출몰한다. 어디서 기인되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천궁의 천사들도 때로 곤란을 겪을 정도로 위험하기 짝이 없다.
그런 위험천만한 중간계로 파천은 들어서야 한다. 완전자들이 모두 향했던 곳, 그곳을 향해 생령인 파천이 들어서려 하고 있었다.

그는 뒤돌아서며 짧게 현재의 심정을 밝혔다.
“여기까지 왔구나. 이제는…… 나 혼자 해내야 한다. 내가 돌아올 동안…… 무사한 채로 기다려 주길…… 바란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리요. 그들이 선 곳은 대지가 끝난 지점. 더 이상 내딛을 땅은 없다. 잘려 나간 대지의 단면 아래로는 뭉클뭉클 검은 먹구름만 가득하고 저 멀리 어둠이 물결친다.
돌아오기 위해 가는 길. 하지만 영영 이별일수도 있는 길. 언제가 될지 기약할 수 없는 길을 파천은 홀로 가야만 했다. 이제 돌아서면 당분간은 서로우 안부를 확인할 수 없다.
그래서일까? 그들은 오히려 말을 아꼈다. 잘 가라, 잘 있어라. 이 말을 하기가 왜 이리 힘이 드는가. 그 말이 마지막이 될 것이란 불길함 때문이 아니라 그 말을 함으로 보내고 남겨 두어야 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 순간 조금이라도 늦게 와줬으면 하는, 그런 마음일 것이다.
“성공해라.”
라미레스는 그 말로 자신의 착잡한 심정을 대신했다. 설란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입을 다물었다.
파천은 모두의 얼굴을 찬찬히 훑었다. 그의 시선 속에는 따스한 정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파천은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또 다른 시선들을 일별했다. 여기저기 숨어 있는 자들은 꽤나 많았다. 그들 모두를 항해서 파천이 외쳤다.
“가서 전하라. 광명을 꼭 가져오겠노라고. 침묵하는 신을 대신해 그의 상징인 광명을 손에 쥐고 그들을 심판하겠노라.”
꼭 한 번쯤은 다시 맞부딪쳐야 할 자들. 그들은 파천이 중간계로 들어서는 걸 숨죽이고 바라보았다.
파천은 미련없이 몸을 날렸다. 드디어 파천이 영계를 벗어났다. 더 이상은 감시의 눈길도. 기대의 시선도 따라붙지 못하는 곳으로 그가 갔다. 소군이 외쳤다.
“꼭 돌아오세요. 우리와 했던 약속…… 꼭 지키셔야 해요. 사부님을…… 기다리고 있을게요.”

라치오와 일당들은 허탈한 심경으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밴살렛은 라치오를 보았다. 짜증 섞인 목소리가 여과 없이 흘러 나왔다.
“네 말과는 다르잖아.”
“그래서?”
라치오도 지금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가 선발대에 자원한 데에는 나름의 목적이 있었다. 그 목적은 선발대에 동행함으로써 이룰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측이 빗나갔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지 않았기에 대책이 없기는 그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괜한 짓을 한 거라는 얘긴데……. 허 참, 어이가 없어서.”
밴살렛의 말은 사실이었다. 쿤사가 고집스런 얼굴을 쳐들며 뇌까렸다.
“그들은 왜 나타나지 않은 걸까?”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누가 나 좀 납득시켜줘, 그렇게 항변하는 듯했다.
라치오가 상황을 정리해 갔다.
“왔겠지. 오지 않았을 리는 없다. 나타날 수 없었던 이유. 그건 좀 더 고민해봐야 알 것 같다. 이렇게 되면…… 파천이 돌아올 때를 기다려야 하는가?”
로이가 볼멘소리를 하는데 그의 말에도 불만은 가득했다. 자신들을 지금껏 이끌었던 라치오에 대한 불만이었다.
“또 기다리자는 말이냐? 차라리 아바돈에 투항해 기회를 엿보는게 더 빠르다.”
라치오의 눈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그럼 넌 빠져. 아바돈이 그렇게 만만한 곳이었던가! 그랬다면 우리가 이런 고생을 자초할 필요도 없었지. 기회는 반드시 온다. 우리 목적을 잊지 마라.
혼란의 시대가 오기를 얼마나 학수고대했던가. 이때가 아니면 얻지 못한다. 절대자들의 틈바구니에서 그나마 실속이라도 차리려면 내 말대로 따라라. 결코 손해는 없을 테니.“
베붓이 상황을 정리했다.
“기다리자. 어차피 그 길 외에는 달리 수도 없는 것 같으니까. 그런데 어디로 가지? 파천이 돌아올 때까지 어디서 이 지겨움을 달래나 그래.”
“가자, 하룬으로.”
라치오는 친구들을 이끌었다. 불만은 있을지언정 그에 대한 신뢰는 여전하다. 벤살렛은 생각했다.
‘라치오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 우리같은 어중이떠중이들이 이런 기회 아니면 언제 한몫을 잡아 보겠어.’

파천이 중간계로 들어섰다.
이 소식은 금세 전 영계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반응들은 제각각이었지만 한 가지 공통적인 것도 있었다.
때가 왔다!
곳곳에서 몸을 일으키는 자들이 속출했다. 조금이라도 세상 돌아가는 모양새를 읽을 줄 아는 이들은 웅크리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걸 너무도 잘 알았다.
마계의 루시퍼는 그 소식을 듣고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시작된 건가? 그 동안 숨어있던 것들이 모조리 튀어나오겠군. 하하하하. 준비를 서둘러라. 헤르파가 돌아오면 곧장 영계를 향해 진격할 수 있도록.”
마계는 전력을 재정비했다. 지금껏 심혈을 기울여 양성시켜 왔던 마계전사들을 재점검했고, 마인들과 마신들의 기강이 해이해질 것을 우려해 다시금 자극시켰다. 그들은 루시퍼의 출전 명령이 떨어지기만은 손꼽아 기다렸다.
대마신들도 긴장의 빛을 띠는 건 마찬가지였다. 동분서주 바쁘게 움직이면서고 그들의 표정엔 숨길 수 없는 숨가쁨이 표현되고 있었다.
대마신들의 호통은 때를 가리지 않고 터져 나왔고, 그로 인해 마신들의 전쟁의 서막이 머잖아 열릴 것이란 걸 실감하고 있었다.

마계가 준비를 서두르는 이때에 선계도 이동할 채비를 마쳤다.
단독으로 마계에 대항함은 전력소모일 따름이란 판단은 그들을 천상계와 합류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게 했다. 오랜 칩거를 깨고 나온 천상노군의 지휘 아래 종적이 묘연했던 팔선이 한자리에 모였으며, 그들은 선장과 선인들을 이끌고 전쟁준비를 끝내 놓은 천상계 도리천으로 떠났다.
당당히 팔선의 일좌를 차지하고 있는 장삼봉은 높은 하늘 잔잔한 강을 보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의 곁에 함께 동행하던 창선이 수심가득한 장삼봉의 얼굴을 보고 옆구리를 쿡 찔렀다.
“무슨 생각에 잠겨 있기에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시오?”
“허허, 아닙니다. 잠시 지난 세월을 되짚어 보았더랬습니다.”
“특별히 회한이 남는 일이라고 있소?”
“없다면야 거짓이겠지요. 그것보다는…… 한 얼굴이 떠올라서요.”
“허, 별일이구료. 마음을 잘 주기 않기로야 충선이 우리중에 으뜸인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그런 것도 아닌가 보오.”
“인연이 있었지요. 그 아이의 슬픈 운명이 자꾸만 눈앞에 밟힙니다.”
“그 아이라면…… 혹시 파천이라는 생령을 두고 하는 말이요?”
“예, 바로 그 아이지요. 누구보다 순수하고 여렸던 영혼이, 지고 가는 짐에 겨워 제 얼굴을 가리고 강인함을 둘렀으니…… 안쓰럽기 그지없어서요.”
“어찌 그 아이만의 비극이겠소.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영혼들의 비극이지요. 그나마 광명이라도 얻어 온다면 다행이겠으나 그도 아니 되면…… 그 안타까움이야 오죽하겠소.
허나 모두는 기억할게요. 운이 따라 영계의 평화를 지켜낸다면 진정그리 될 수만 있다면 그걸 위해 제 한 몸을 불사른 이가 있었음을 말이요. 그 바탕 위에 평화가 지켜졌음을…… 모두는 기억하겠지요.“
“그럴까요? 허허허…….”
충선의 웃음은 그의 만큼이나 공허했다.
‘아닐게요. 영자들은 그 아이의 비극 따위는 생각지도 않으려 들거요. 세상이 그런 거지요.
파천아, 성공해야 한다. 그래서 네가 겪은 세월들을 보상받아야 한다. 그것으로도 슬픔은 가시지 않겠지만 오직 그 길만이 한 인간의 송고한 가치를 영계에 알리는 길이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발생하지 않고도 생령인 네 손으로 해내야 한다.‘
장삼봉은 저 앞에서 선두를 지휘하고 있는 태선을 바라보았다. 태선은 태상노군과 대화중이었는데 그들의 말 중에 이런 내용이 언뜻 들려왔다.
“연합군의 사령관은 생령에게 맡기겠다는 발상을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는 본계를 눈 아래로 보는 천상계의 오만함이 적나라하게 표현된 것입니다. 그를 내세워 우리 체면을 손상시키다니. 생각할수록 괘씸하군요.”
충선은 뒤에서 그 말을 들으며 혀를 끌끌 찼다.
‘점잖은 얼굴을 하고 저런 말을 뱉으니 천 년, 만년 도를 닦아 봐도 아무런 소용이 없구나.
영리에 매였으니 마음인들 자유로울까. 다 소용없는 짓이다. 순수하게 복수의 칼을 빼든 파천만도 못하구나.
참으로 부끄럽다. 스스로를 지킬 힘도 없어 생령에게 모든 짐을 지운 주제에 아직도 체면 만은 지키고 싶어하는 이 간사함 마음이라니.‘
충선은 고개를 흔들며 암울한 영계의 미래를 걱정했다. 마계를 대적할 역량이 없어서가 아니라 눈 가리고 귀 막을 영자들의 허욕이 안타까워서였다.
선계는 걸음을 재촉했다. 무한계의 상황이 어떠한 지에 대해서는 이미 파악이 끝난 상태. 도움을 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이유는 마계가 워낙 막강하기 때문이다.
무한계가 홀로 아바돈을 상대해내거나 그것이 안 되면 버텨 주기라도 했으면 하고 바랐다.

파천의 중간계 입성은 제왕의 대지 판드아에도 전해졌다. 쿠사누스들의 반란군 수괴로, 지금은 유일한 제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마르시온은 쿠사누스들을 모아 놓고 일장 연설을 하고 있었다.
굳건한 어깨는 하늘이라도 떠받칠 듯하고 튼튼한 두 다리는 땅이라도 갈라 버릴 것 같았다. 부릅뜬 호목에 강렬한 안광이 번뜩이고, 우뚝 선 날카로운 콧날은 그의 고집스런 면을 부각시켰다.
“한때 우리들의 노예였던 하찮은 것들이 이제는 스스로를 하늘이라 하고 신선이라 한다. 이 얼마나 가소로운 일인가.
신은 오직 우리에게만 통치권을 주셨다. 잠시 그들을 풀어 주었으나 이 또한 우리의 위대한 통치를 추억하게 하기 위한 방쳔, 스스로 조아리지 않으니 다시 힘을 제압해야 한다.
제왕의 군대에게 명하노니, 저들에게 누가 주인인지를 깨닫게 하라. 나 마르시온이 명한다. 내 이름으로 저들의 아둔함을 일깨워 다시는 반역을 꿈꾸지 못하게 하라.
쿠사누스들이여, 그대들의 위대함을 모든 영자들에게 보이고, 나아가서 피조물 중 누가 가장 완전한지를 깨닫게 하라.“
마르시온은 일단 마계도 적으로 규정했다. 같은 쿠사누스의 반열이었다가 제왕이 된 자. 너무도 강해 쿠사누스에 만족하지 못했던 그가 이제는 제왕의 일보로써 영계를 지배하려 들었다.
그의 결정은 제왕의 선택. 누구도 거역해서는 안 되었다. 자신들이 선택한 제왕을 바라보는 쿠사누스들의 눈에는 두려움의 감정에 지배당한 불순한 충정의 빛이 가득했다.
이들도 출정을 서두르고 있다. 파천이 중간계에 들기가 무섭게 진격 나팔을 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무한계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아난다와 카이로, 페리칸은 다시 하룬으로 돌아갔다.
라미레스는 서쪽 방향을 택해 홀로 떠났으며, 설란은 천상계로 복귀하겠다며 갔다.
소군은 모두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카이로와 페리칸의 하룬행에 동행을 고집했고 결국은 그녀의 뜻대로 되었다. 그들은 파천이 돌아올 때까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기로 했다.
그가 돌아오면 다시 시작된다. 모두는 암묵적으로 이렇게 결정해놓고 있었다. 돌아오지 못한다면…… 슬픔을 안고 마지막까지 사력을 다해 싸울 것이다. 그 대상이 아바돈이든 마계든 제왕의 군대든…….
이들이 제 갈 길로 흩어지고 난 뒤 한참이 지나 근처에 숨죽이고 있던 모든 이들이 사라졌을 때쯤이었다. 하나의 영자가 나타났다. 발도바를 처단했던 투명검의 소유자였다.
투명검은 루딘족에 내려오는 전설의 명검이다. 이론으로만 내려오는 비기였기에, 단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었기에 지금껏 가상의 보검으로만 인식되었다.
어떤 강력한 힘으로도 막을 수 없다는 검. 천궁의 전사들이 신의 의지를 영자들에게 전달하고 나서 그들이 남기고 간 흔적, 날개의 깃털을 모아서 만든 것. 천사들의 날개 깃털엔 그들의 영력이 담겨있다.
첫 불 헤세시가 일어나기 전 소멸한 불꽃이 있다. 악마의 발틉이라 불리는 검은 불꽃 나르하만.
그 불꽃의 잔재는 무한계 서쪽 코름 언덕에 지금도 석화된 채 남아있다. 루딘족을 이 두가지를 꾸준히 모아 왔다. 투명검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가장 순수한 금속 메그나를 수만 범 정련해 만든 그릇에 두 가지를 담고 다양한 영물과 영력을 함께 넣은 뒤 요령족 헤세시에게서 건네받은 꺼지지 않는 불로 그 모두를 녹인다.
혹시라고 있을지 모를 불순한 기운의 침범을 막기 위해 술사들로 하여금 그 곁은 한시도 비우지 않게 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투명검이었다.
허나, 루딘족이 생겨난 이래 단 한 번도 투명검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는 외부로 흘러나온 적이 없다. 지금도 술사들은 그 곁을 지키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이 자! 전설이 전하는 투명검을 지니고 있는 이는 대체 누굴까?
“흐흐흐흐, 광명을 가져오기가 수월치는 않겠지. 허나, 너라면 분명…… 성공할 것이다. 네 집념이라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가져오겠지.
그때 너는 내게 죽는다. 마령의 본주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날 이길 수 없다고. 그래, 내 힘은 네게 미치지 못하지만 이 투명검만 있다면 너도 죽일 수 있다 원령체인 너라도 말야.
하하하하, 나 상여락에 의해서 네 꿈을 산산이 부서지고야 만다. 두고 봐라. 인세에서는 네가 이겼지만 이번엔 다르다. 내가 이긴다. 내가 이긴단 말이다. 크크크크…….“
그는 상여락이었다. 여전이 상여락이길 고집하는 자. 그는 마령의 본주에게서 투명검을 건네받았고 광명을 지니고 나오는 파천을 죽이라는 명을 하달받았다.
마령의 본주는 그를 통해 파천을 시험하고자 했다. 상여락이 쥐고 있는 건 투명검의 분신이었다. 투명검은 완성되었다. 마령까지 덧씌워진 투명검은 분명 광명에 필적하는 보검임에는 틀림없었다.
투명검은 어떤 힘에도 저항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투명검은 막을 수가 없다. 체내로 침투한 투명검은 혼과 육의 정혈의 일순간에 흡취해 버리고 그 순간 신체의 기능은 정지된다. 죽음이 찾아오는 것이다.
이처럼 무서운 마병을 마령의 본주가 상여락에게 주었을 리가 없다. 상여락이 쥐고 소유하고 있는 건 투명검의 자의식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투명검일 뿐이었다. 더군다나 마령을 흡취하기 전의 투명검이기에 본체에 비해 훨씬 떨어진다 할 수 있었다.
마령의 본주가 상여락을 통해 알고 싶어하는 건 하나. 파천이 투명검을 막을 수 있는 가의 여부다 그는 파천과의 대결이 승부처라 여기고 있었다. 파천의 광명을 가지고서 무한계로 나온다면 이는 곧 원령체를 완성했다는 의미.
그런 그를 죽일 수 있다면 루시퍼도 메타트론도 미길 수 있다. 상여락은 그런 것도 모르고 언제일지 모르지만,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파천에게 복수할 때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곧 다가올 희열의 순간을 생각하며 잔뜩 들떠 있었던 것이다.
무림에서의 패배를 영계로까지 가져 온 자. 그의 집념도 보통은 아니었다. 어떻게 마령의 본주가 연이 닿았는지는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 중요한 건 그가 상여락이고 파천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투명검을 쥐고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는 파천이 광명을 가져오길 진심으로 바랐다.
“투명검으로 놈을 죽이고…… 광명까지 얻는다면, 난…… 영계 제일이 된다. 무림지존이 되지 못했지만 영계에서는 내가 절대자가 되는 것이다.”
상여락은 꿈에 부풀어 있었다. 마령의 기운이 침투해서이니 약간은 실성한 듯도 보였다.
지나치게 흥분하는 것만 봐도 그건 분명했다.
상여락이 기다리고 있는 무한계. 파천에게는 생각지도 못했던 또 하나의 의미가 추가된 것이다. 반드시 돌아와야 할 의미가.

무한계의 전력이 하룬에 집결한 지도 꽤나 되었다.
그들은 대적자의 주력쯤은 안중에 두지 않아도 좋을 만큼의 충분한 전력을 갖추었다.
그럼에도 경거망동하지 않는다. 수뇌부는 때를 기다렸다. 무한계의, 남의 잠재력이 합류할 시점을 기다렸다.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권위 있는 지도자를 기다렸다.
‘카란과 메테우스. 무한계의 영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바로 그들이었다.
그러나 상황을 냉정하게 파악하고 있는 일부 수뇌들은 카란과 메테우스가 아닌 다른 이를 기다렸다.
그는 바로 파천. 그가 돌아오기 전에 아바돈이 공격을 감행하지 말았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다.
매 순간을 임박한 전쟁에 대한 긴장과 공포로 지내고 있을 때 무한계는 뜻밖의 사건에 직면하게 된다.

‘천지에 보물이 가득하다.’
누구의 입에서 처음 그 말이 흘러 나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확인도 불가능하다. 소문은 삽시간에 무한계전체를 열병에 걸리게 했다. 영자들의 입에서 거론되는 보물은 다름 아닌 제왕의 대지에서 가져 왔다고 알려졌던 바로 그것들이었다.
하룬이 들썩거렸다. 보물이 주는 유혹은 대단했다. 자신이 지닌 힘의 한계치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영자들에게 제왕의 보물들은 막혀 있는 벽을 일시에 허물어뜨리는, 자력으로 할 수 없는 한계의 확장을 확실하게 보장해 준다.
이것보다 더 큰 유혹이 또 어디 있을까.
수뇌들까지 동요하는 분위기가 되자 하룬의 지도부는 곧장 소문의 진원지를 파악하려 애쓰게 되었고 그것이 사실인지를 가려내려 시도했다.
현재 하룬에는 전상평의회에 속한 전사단들과 메덴의 주력, 칠대부족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들은 각 진영에서 적임자들을 뽑아 파견했다.
그들은 하룬을 떠나 보물이 있다는 서북지대의 매소 나마스를 향해 떠났다.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올 줄 몰랐다.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하룬의 지도부는 2차파견대를 나마스로 보냈다. 그들도 돌아오지 않기는 매한가지.
이제는 방법이 없다. 대규모 파견대를 보내든가, 무시하든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렇지만 두 번이나 파견대를 보냈기에 최소한 그들의 생사는 확인해야만 했다. 그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이들과 뭔가 조짐이 좋지 않다며 아바돈이나 대적자들의 흉계일 수도 있다고 경고하는 측이 팽팽하게 맞섰다.
아난다는 모두에게 경고했다. 그는 예전에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지금처럼 일반의 영자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진 건 아니었지만 그때도 상당한 수의 영자들이 보물의 유혹에 빠졌고 쟁탈전에 거침없이 몸을 던졌었다.
그때의 수치스런 기억을 떠올리며 아난다는 말했다.
“이건 분명 아바돈의 짓입니다. 보물이 있든 없든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곳의 죽음의 땅이요, 배신의 대지입니다. 가면…… 누구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명심하십시오. 제왕의 보물은 어딘가에 실재하는 게 맞고 매소 나마스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허나…… 그것은 보물이 아니라 마물입니다. 보지 말고 듣지 마십시오. 정 유혹을 이기지 못하겠거든 혼자 가십시오.
우리는 앞에 선 적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뒤의 보물은 그 뒤의 문제입니다. 혼동하면 안 됩니다. 먼저 생존하고 보물도 의미가 있습니다. 생사를 결정짓는 전쟁을 치러야 하는 마당에 그깟 보물이 대수입니까! 더 이상 전력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맞는 말이었다. 허나 수련자 카포는 다르게 생각하는 듯했다.
“파견된 자들은 어찌한단 말이오. 그들이 아직 돌아오지 못하고 있거늘, 보내지 않았으면 모를까, 생사도 확인하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오? 현재 어려움에 처해 간절히 도움을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거늘. 당치도 않소.
가서 확인해야 합니다. 아무도 가지 않겠다면 나 혼자서라도 가겠소. 그곳이 아바돈이 짜놓은 죽음의 그물망이라면 전력을 충분하게 준비해서 가면 되는 것 아니오.
어차피 싸워야 할 적인데 두렵다고 피하기만 해서야 어쩌겠다는 말인지. 3차 파견대를 결성할 것을 제안하는 바이오. 이번엔 나도 파견대에 포함시켜 주시오. 내 가서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해 봐야겠소.“
카포의 의견이 채택되었다. 그의 말이 더 설득력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보물에 대한 호기심과 욕심이 작용한 때문이었다. 강해지고자 하는 욕구와 상승하려는 의지는 이들이라고 다를 수 없었다.

파천의 마음속에는 광명에 대한 집착이 그득했다. 광명만이 하고자 하는 걸 이루게 해줄 수 있다는 이 단순한 명제로 인해서였다. 그는 누구처럼 절대자가 되길 희망하지도, 영계를 장악하고 지배하려는 야심도, 모든 영자들에게 추앙받는 지도자로서의 명예욕도 없었다. 있다면 하나.
‘루시퍼를 내 손으로 처단하고 싶다. 그에게도 절망이 뭔지, 슬픔이 뭔지, 침몰하는 심정이 뭔지를 절절히 느끼게 해주고 싶다.’
대의명분으로 이곳을 찾았다면 차라리 이처럼 간절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파천은 간절했다.
‘광명을 얻을 수 있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얻어 내고야만다. 하긴 이제 내게 남은 건 이 쓸데없이 단단해진 몸뚱이와 생명밖에 더 있는가.’
파천은 언제라도 그 모든 걸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복수를 하기 전에는 안 된다. 설사 신이 원한다 해도 순순히 내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소중한 목숨을 요구하는 놈이 나타났다.
희멀겋게 생긴 놈이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다. 식물의 유액같은 점액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놈이었다. 그럼에도 파천은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본능적인 위험 신호가 번뜩였다.
중간계는 어둠이 차지하는 공간이 지배적이라고 할 만큼 많았고 일부에만 희미한 빛이 존재했다. 비탈질 언덕에 밤새 내린 비로 생겨난 것처럼 좁은 고랑과도 같은 길이 있었는데 그건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확산되며 복잡하게 뒤엉켜있었다.
파천은 어둠이 지배하는 허공으로 날아보려 몇 번이나 시도했다가 포기했다. 압력. 원령체인 그로서도 감당하기 버거운 압력이 전신을 짓뭉개버릴 듯 내리 눌렀다.
그래서 파천은 마음 편히 길이라 생각하기로 한 좁은 공간을 택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앞에서부터 불길하게 생긴 그놈이 나타난 것이다.
앞을 막고 다가오고 있으니 뛰어 넘든지 뒤로 물러서든지 해야 했다. 물러설 수는 없고 결국 파천은 뛰어 넘어서 가기로 했다. 조심스럽게 놈을 타넘었다.
“헉.”
파천은 당황했다. 끈적끈적한 점액질이 발을 물고 늘어 붙는다. 그는 기우뚱하는 상체를 간신히 세워놓고 빠르게 상황 판단을 했다. 파천의 손에서 원령사가 발출되었다.
그런데 웬 걸. 마신들도 한 반에 소멸시켜 버리는 원령사를 정통으로 맞고도 놈은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마치 비웃는 것 같았다.
발목을 지나 무릎까지 이르는 데는 잠깐이었다. 파천은 이런 황당한 경우를 당해 본 적이 없다. 설마하니 이런 기이하게 생긴 놈이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 거라고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파천은 이제 앞뒤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보호막을 치고 원령을 힘차게 폭발시켰다. 내부에서 시작된 힘의 증폭은 몸 밖에 이르기도 전에 수십 배로 늘어났다.
피시시식
불에 달군 쇠꼬챙이를 물에 담근 듯한 소리가 먼저 났다. 그 뒤 허벅지까지 오른 그 놈이 다리를 타고 다시 아래로 내려간다. 이번에도 소멸을 커녕 별 타격을 주지도 못했다.
놈은 파천에게서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는지 그의 가랑이 사이를 지나 저쪽으로 가는 것이었다. 파천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다행인가! 등에 식은땀이 가득하다.
“이거야 원…….”
원령체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저놈을 영계에 갖다 놓으면…… 절대자 소리를 듣겠네.”
하도 어이가 없어서 그렇게 말하고는 웃고 말았다. 하지만 파천은 내심 바싹 긴장하고 있었다.
‘역시 만만찮은 곳이란 얘기.’
파천은 계속 전진했다. 원하기는 생명의 뜰에 이르기까지 아무것도 나타나지 말았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그렇지만 파천의 이런 기대는 오래지 않아 깨지고야 만다.
“우워어억.”
길이 조금 넓어진다 싶어 안심하고 있던 때였다. 저 멀리서 가물가물하게 보이는데 고함소리가 먼저 반긴다.
파천은 경계의 빛을 늦추지 않은 채 천천히 다가서며 전면을 살폈다. 붉은 털이 전신에 수북한 짐승이었다. 머리는 개의 형상이요, 몸퉁은 곰과 같았다. 주저앉아 무언가를 꾸역꾸역 입 안으로 쑤셔 넣고 있었는데 가끔씩 그렇게 고함을 지르곤 했다.
놈은 등을 돌린 채였다. 파천은 난감했다. 아까 겪은 일도 있고 해서 괜히 건드리자니 찜찜했고 그냥 지나치고 싶은 맘은 굴뚝같은데 길의 태반을 놈의 큰 덩치가 채우고 있다.
“후유.”
파천이 자신도 모르게 토해낸 한숨소리를 들었음인지 개, 아니 곰, 아니 괴물이 고개를 슬쩍 돌렸다. 파천은 하마터면 놀라서 자빠진 뻔했다.
‘얼굴이 사람과…… 같다.’
매끄러운 피부에 눈, 코, 입이 오밀조밀하게 적당한 위치를 잡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무척이나 징그러운 모습. 익숙지 않은 것에 결벽증세가 있는 것도 아닌 파천이었으나 눈앞의 괴물은 좀 해괴했다.
그런데도 눈망울이 참 맑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천은 용기를 내 말을 걸어보았다.
“너…… 뭐 먹니?”
기껏 한다는 소리가 이랬다. 자신도 해놓고 보니 민망하기까지 하다. 놈은 히죽 웃으며 다시 먹는 일에 열중했다. 반쯤은 입 밖으로 나와 있는 건 의외로 연한 고사리 잎 같은 식물로 보였다. 자고로 초식 동물치고 포악한 놈 없다. 파천은 안심하고서 놈의 곁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우워어억.”
‘깜짝이아.’
파천은 자신이 이렇게나 겁이 많았던가 다시금 짚어 보고 있었다. 자동으로 반응하는 신체 반응은 이보다 빠를 수 없었다. 놈은 고함을 질러 놓고, 남이야 놀래서 기겁을 하든 말든 먹는 일에만 열중했다. 그러던 놈이 슬그머니 돌아앉았다.
놈은 파천은 빤히 쳐다본 채 계속 입안으로 음식을 쑤셔놓고 있었다. 이제 보니 두 손이 교대로 입 안을 들락날락하고 있었는데 손끝에 삐죽한 손톱이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으음, 비켜줄 생각이 전혀 없나 보구나.”
그때다. 괴물이 자신이 먹고 있던 식물은 파천이 서 있는 앞으로 툭 던져 놓는다. 파천은 그걸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설마…… 이걸 나보고 먹으라는 건…… 아니겠지?”
괴물은 제 앞에 있는 것들을 입 안에 가져가는 시늉을 했다.
‘헉.’
파천은 기가 찼다. 이 난감한 일을 어떻게 모면해야 할지 얼른 대책이 서지 않는다.
다시 시선을 아래쪽으로 향하던 파천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지금껏 고사리 잎 같은 식물이라 생각했던 게 이제 보니 전혀 다른 것이지 않은가? 꾸물꾸물 기어 다닌다. 그렇다면 놈의 정체는?
‘육식 괴물이다!’
이러면 얘기는 틀려진다.
괴물은 고개를 갸웃하며 파천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파천은 결단을 내렸다. 은근슬쩍 괴물의 곁을 지나쳐 가기로. 보호막을 먼저 발동시켰다. 타격에는 자신이 있었다.
파천의 변화를 괴물은 유심히 살피더니 손을 슬쩍 내밀었다. 그 순간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괴물이 팔이 쑥 늘어나 파천의 지척까지 다다르고 있었다. 파천은 반사적으로 손으로 밀쳐내며 앞으로 전진했다. 광속.
‘빠르게 지나친다.’
괴물의 들린 팔 아래로 작은 공간이 보인다. 파천은 망설이지 않고 그 사이로 몸을 날렸다.
쉬쉭
무사히 빠져나온 파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내달렸다. 한시름 놓은 파천은 뒤를 돌아보았다.
‘이, 이럴 수가.’
괴물이 자신을 따라오고 있었다. 그것도 무서운 속도로. 마치 사자가 초원을 내달리듯 놈의 동작은 유연하기 그지없었고 파천이 전력으로 달리는 속도에 버금가는 속력을 내고 있었다.
파천은 진땀을 흘렸다. 그렇다고 멈추자니 뒷감당이 자신 없다.
도망가고 추적하기는 얼마였던가, 파천은 더 이상 놈이 따라오지 않고 있음에 안도했다.
“후우, 별의별 괴물 같은 괴물이 다 있군.”
말은 해놓고 보니 이상했다. 그만큼 지금 파천은 혼란스러웠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었다. 그렇게 단순 무식하게 생긴 놈이 영계 최강을 다툴 수 있을 정도의 강자가 된 자신을 기겁하게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그 뒤로도 파천은 몇 번이나 위험 아닌 위험의 고비를 넘겨야 했다.

매소 나마스에 파견한 제3차 조사대가 추려졌다. 이번엔 꽤나 강자들을 포진시켜 혹시라도 위험이 있다 해도 충분히 방비할 수 있을 정도의 진용을 갖추었다.
자신이 원한 대로 카포가 포함되었고 슐탄도 자진해 들어갔다. 불칸과 몰가, 아난다, 페리칸까지 더해진 조사대는 정예중의 정예로 추려졌다.
칠대부족을 대표해서 카이로와 헤세시의 대법사 소군도 그들 중에 당당히 끼어 있었다. 이들뿐만 아니라 비밀리에 하룬에 머물고 있는 제왕과 로메로도 뒤를 따르기로 약속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오히려 아난다는 걱정이 앞섰다.
‘주력이라 할 만한 강자들이 하룬을 빠져나가길 기대한 건가?’
그는 매소 나마스의 일이 아바돈의 소행이라 단정지어 놓고 모든 걸 판단했다. 그들이 노리는 게 뭘까를.
그래도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는 건 칠대부족장들과 수련자 바소름, 벵골이 하룬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저들이라면 별일 없겠지.’
아난다는 자진해서 가기로 한 둘을 바라보았다. 카포와 슐탄. 둘 중에 하나는 적의 간세라는 심증이 확실한 자였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처단하지 못하는 건 그걸 가려낼 물증이 없기 때문. 슐탄은 자신들의 수하에게 몇 가지 지시 사항을 하달하고 있는 중이었다.
조사대가 하룬을 벗어날 때쯤 제왕의 영언이 아난다에게 전달되었다.
[슐탄이란 자를 조심하라. 그에게서 마령의 기운이 포착된다]
제왕의 경고가 아니었어도 아난다는 그에게로 향한 감시의 시선을 한시도 늦출 생각이 없었다.
‘역시 아바돈이었던가?’
초반에 긴장했던 것과는 달리 나마스가 가까워짐에도 별다른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자 모두는 마음을 놓았다.
서로들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고 있었는데 환담을 나누며 비교적 여유로운 태도를 보였다.
저 멀리 나마스의 초입이 보였다. 불칸이 모두에게 경고를 잊지 않는다.
“조심들 하는 게 좋을 거야. 마음 단단히들 먹어.”
나마스는 거대한 공동묘지를 보는 것 같았다. 음침한 기운이 가득했으며 여기저기 죽어 나자빠진 시체들이 즐비했다. 사단이 나도 크게 난 것이 틀림없었다.
중심으로 접어들수록 시체의 수는 늘어났다. 나마스에 원래 거주하고 있던 자들과 소문을 듣고 몰려온 영자들의 시체였다. 죽음의 현장에 있는 것보다 결과를 보는 것이 때로는 더 두려움을 준다. 강자들이라고 해서 다르지는 않았다.
휘휘휙
무엇인지 확인할 길 없는 시커먼 그림자들이 건물들 지붕을 옮겨 다니고 있었다. 그림자만 보이지 실체는 파악할 수 없었다. 점점 안으로 접어들었다.
나마스에 깃든 죽음의 그림자가 실체를 드러내길 기다렸다. 매소 중심까지 이르렀음에도 상대들에게서는 반응이 없었다. 그때다. 묵직한 긴장감이 모두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급작스런 카포의 외침이 그 모든 걸 한꺼번에 깨버렸다.
“제왕의 보물이다.”
그는 정말로 제왕의 보물을 본 적이 있는 걸까? 아니면 무턱대고 그럴 거라 짐작하는 걸까? 어쨌든 그가 가리킨 곳에는 정말로 찬연한 빛을 내뿜는 그럴 듯해 보이는 검 한 자루가 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것 하나만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구석진 곳마다 그런 것들은 수두룩했다.
아난다는 궁금했다.
‘저것이 정말로 제왕들이 소유하고 있던 것들이란 말인가?’
이곳에 제왕이 와 있으니 그에게 확인해 보면 된다. 그가 친절하게도 아난다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맞는 것 같군. 우리가 지니고 있던 것들 중 일부가 맞아. 하지만…… 쓸모 있는 건 눈에 띄지 않는데]
순전히 그의 기준이었다. 그에게는 아무리 하잘 것 없는 것들일지라도 일반 영자들에게는 더 없는 보물이었다. 적어도 제왕이 지녔다는 가치만으로도 영자들의 마음을 뺏을 만했다.
소문은 사실은 근거로 퍼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소문은 죽음을 부르는 유혹이었고 그 결과는 참혹하게 드러나 있었다.
조사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눈은 보물에 빼앗겼지만 귀와 감각은 적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기다려도 반응이 없었다.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는 곳이 이곳은 어쨌든 적이 파놓은 함정일 가능성이 많은 곳이었다.
그리고 적의 움직임은 처음부터 너무나도 노골적이었다. 자신들이 있음을 드러내도 좋을 만큼 자신만만함을 나타내는 반증이 아니고 무엇이랴!
조사대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이들과는 달리 제왕과 로메로는 매소 나마스 곳곳을 뒤지고 다니는 중이었다. 조사대중 그 누구도 이 둘보다 강하지는 못했다. 이 둘은 하룬에 남아 있는 누구보다 강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그들이 은밀히 움직이는 걸 잡아낼 수준이라면 조사대가 보이는 즉시 공격했지 이런 곳에서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지도 않을 것이다. 제왕은 이곳저곳을 조사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군. 아무것도 포착되는 것이 없다니.’
그는 더 이상 들쑤시지 않고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했다. 이제 그의 감각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그 상태도 나마스 전체를 차근차근 훑어갔다. 로메로도 가장 높은 건물 옥상에서 제왕과 동일한 시도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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