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51화 : 비행매소를 하룬으로 돌려라
비행매소를 하룬으로 돌려라
마계는 도주하던 천상계와 선계의 주력을 바짝 뒤쫓지 않고 사냥몰이라도 하듯 느긋하게 간격을 두고 따랐었다. 그러다가 중부권에 들어서고 곧바로 진격을 멈춰버렸다. 그들은 더 이상 하룬으로 발길을 재촉하지 않았다 예상했던 것과 다른 상황이 앞에 놓여 있는 게 기분 나빴음인가.
루시퍼와 일곱의 대마신, 헤르파와 라아그, 헤렘, 라넷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으며 그들 외에도 새로운 인물들이 대거 참석하고 있었다. 귀계의 칠성은 아니었다. 귀계는 마계와 동등한 입장에서 연합한 것이 아니기에 그다지 존중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마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으며 한마디 말조차 조심해야 할 처지였다.
대마신 브리트라는 헤르파에게 향했던 시선을 거둬 루시퍼에게로 건넸다.
“존경하는 마황께 다시 한 번 아뢰겠나이다. 제왕의 군대가 출정 한 마당에 더 이상 미적거릴 여유가 없습니다. 과감한 진군을 선택하든 아니면 이대로 상황을 좀더 지켜보든 지금 결정해야 함은 맞습니다.
정벌군 사령관일 헤르파의 판단도 일리는 있습니다만…… 제 견해는 조금 다릅니다. 제왕 역시 우리와 입장이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선택 여하에 따라 그들은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쪽에서 먼저 그들을 치지 않는 한 그들 또한 괜히 어려운 적을 만들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영계연합군을 먼저 제압한 연후에 다음을 차례대로 굴복시킴이 마땅합니다. 지금 제왕의 군대와 마찰을 일으킨다면 영계연합군에 어부지리를 허용하는 것과 진배없습니다. 그들은 하룬에서 한 치도 군대를 움직일 생각이 없는 듯합니다. 그럴 필요가 없지요.
지금 쳐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이 포획해놓은 사냥물을 중간에 가로챈다면 위대하신 마황의 의지가 훼손 받습니다. 정복의 의미가 퇴색됩니다. 우리가 먼저 움직이면 제왕은 잠자코 기다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후 우리를 향한 그들의 태도를 보고 나서 일전을 결해도 늦지 않으리라 여겨집니다.”
헤르파는 조금 전 제왕의 군대가 무한계 쪽으로 다가서는 게 포착되었으니 그들의 행보를 보고 나서 정벌군을 움직여야 한다고 했었다. 그러자 브리트라가 즉각 반박하고 나선 것이다.
헤르파가 다시 제 주장을 강력하게 펼쳐나갔다.
“영계연합군을 복속시키는 것이 뜻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들이 지닌 잠재력을 감안하면…… .”
“그들에게 잠재력 따위가 있다고 믿는 것인가?” 이런 회의에서는 잘 입을 떼지 않는 메피스토였다.
헤르파도 의외였다.
메피스토는 묵묵하게 결정된 사항을 경청하다 군소리 없이 자기가 맡은 일을 완수하는 성격이었다. 대마신 중 아사셀 다음으로 입지가 튼튼한 자였음에도 잘 나서는 성격이 아니었다. 여러 가지로 파악하기 힘든 자였다. 그만큼 상대하기 까다롭다는 뜻도 되었다.
“그럼 일순에 그들을 제압하리라 여기시나요? 우리 측의 피해 없이 말입니다.”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너는 정말로 우리가 그 정도 능력도 없이 정벌을 나섰다 여기는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래, 우리가 마음만 먹는다면 진작에 끝낼 수도 있었지. 영계의 조무래기들 따위는 안중에 없다. 내 관심은 오직 천궁. 영자들의 목 줄기를 움켜쥐고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움직이게 되어 있다.
헤르파는 미심쩍은 표정을 감추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난 저들 대마신들의 진정한 능력이 어디에까지 이르러 있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다. 하지만…… 설마하니 그 정도일 거라고는 인정할 수 없다.’
메피스토는 루시퍼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명하신다면 두 세력을 한꺼번에 제압해 보이겠습니다. 그런 연후에 기다리고 있으면…… 그제야 상대할 만한 놈들이 나타나겠지요. 바알세불 같은 놈들 말입니다.”
바알세불!
그의 이름이 언급되자 발리가 흥분하며 나섰다.
“그렇지, 바알세불. 그 정도는 되어야 상대할 만하지. 완전히 제 힘을 풀어버리고 미쳐 날뛰는 바알세불…… 참으로 흥미로운 상대지. 흐흐흐.”
헤르파는 두 눈에 이채를 담았다.
‘모두가 전력 감소 따위는 전혀 관심권 밖이구나. 자신들의 뜻을 다르고 함께 할 존재라는, 이후 영광을 누리게 해줄 대상 이상의 의미는 없다는 말인가?’
루시퍼가 말했다. 그는 대마신들 쪽이 아닌 새로운 자들에게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대들의 견해도 말해보지.”
그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아직까지는 마계의 싸움입니다. 저희들의 때는 아직 이르지 않았습니다.”
“그런가? 그분에게서 아직까지도 전갈이 없었단 말이지. 그런데 왜 그대들이 내게로, 하필이면 이런 때에 내게로 온 건가?” “여기만이 아닙니다. 제왕에게도 우리들 중 일부가 가 있습니다.”
아사셀의 잠잠하던 눈빛이 순간 강렬해졌다. 다른 대마신들도 마찬가지 반응들이었다.
루시퍼가 나직하게 웃으며 물었다.
“내가 제왕을 굴복시키고자 한다면?”
“그래도 저희들은 잠잠할 것입니다. 물론 일정 수준까지만 입니다.”
“일정 수준?”
“전력의 핵심만 다치지 않으면 됩니다.”
“내가 영계를 끝내 치지 않고 이 상태로 둔다면?”
“마찬가지입니다.”
“영계를 복속시키라는 명령이 아버지로부터 떨어졌음에도 미적거린다면?”
“저희들만으로도 임무를 완수해야겠지요. 대신…… 이후엔 루시퍼님도 무사하길 바래서는 안 되겠지요.”
“감히!”
브리트라였다. 그의 쏘아보는 눈엔 살기가 번쩍였다.
“그랬군. 그렇겠지. 그대들이 짐작하기로 위대하신 내 아버지는 언제쯤이나 본격적으로 모습을 보이실 것 같은가?”
“저 같이 미천한 것이 그분의 뜻을 짐작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어둠의 천사들이었다. 그들 중 일부는 제왕에게로 갔고 일부는 루시퍼의 곁으로 왔다. 그들은 함께 하기 시작했지만 간섭도 도움도 주지 않는다. 전면에 나설 생각은 조금도 없는 듯 보였다. 루시퍼의 어조는 처음이나 지금이나 전혀 다르지 않았다.
“날 감시하는 것도 그대들의 임무 중 하나겠지?”
“어찌 그런 맘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명령이 없는 한 언제까지나 저희는 루시퍼님의 편입니다.”
루시퍼는 관심을 거두었다. 그가 깊은 생각에 잠기는 건 그다지 자주 보이는 태도는 아니었다. 그가 입을 열 때까지 모두는 기다렸다. 루시퍼가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헤르파!”
그가 처음 부른 이는 정벌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헤르파였다.
“말씀하십시오.”
“네 생각대로 하라. 그것이 어떤 결정이든 네 뜻대로 모든 걸 주관하라.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책임 추궁은 하지 않겠다.
대마신들과 마계전사를 제외한 모두를 네 손 안에 넣고 마음껏 휘저어보라. 설사…… 그들 모두를 데리고 영계연합군에 투항한다 해도 네 뜻을 꺾지 않겠다. 이건 아비로서의 약속이다.”
순간이다. 어둠의 천사들의 눈빛이 기묘해졌다. 브리트라는 그런 어둠의 천사들을 비웃었다.
‘메타트론님이 마황께 하신 말씀을 그대로 들려주시는 듯하군.’
헤르파의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하지 않아도 될 말이라고 생각했다.
‘나를 시험하는 건가?’
이런 헤르파와는 달리 라아그와 헤렘은 마황의 결정에 반색했다. 자신들을 향한 루시퍼의 신임이 절대적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대마신 아사셀과 어둠의 천사 하나만 남고 모두가 물러간 연후였다. 루시퍼는 모든 것이 권태롭다는 듯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운을 떼기 시작했다.
“흥미가 생기지 않아. 그대들은 그렇지 않은가? 사건이란 말야. 주동하는 자들의 비중이 크면 클수록 그 지위가 막강하고 능력이 탁월할수록 파장이 더 커지기 마련이 아닌가?
본계가 움직이면…… 잔챙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럴 듯한 놈들이 모조리 쏟아져 나오리라 여겼다. 그런데…… 창피하게도 판단 착오를 했던 거야. 정작 내가 원하는 자들은 아직까지도 배후에ㅓ 머리를 굴리고 있어. 역시 신은…… 신이란 말인가? 이 지경에 와서도 그의 눈치를 살펴야 할 만큼 그에 대한 두려움이 모두를 지배하고 있어.
재미있는 일이야. 그렇지 않은가?”
아사셀은 대답을 않고 어둠의 천사만 말했다.
“저마다 염두에 두고 있는 적절한 때가 다른 이유겠지요. 신에 대한 두려움은 애초에 극복되지 않았습니까? 예전 주께서 반역의 기치를 들었을 때 신의 절대적 권위는 심각한 손상을 입었지요,
지금……의 고요는 두려움이 아니라 신중함이지요. 단 한 번에 모든 걸 획득하고자 하는 신중함.”
“아버지의 의중을 내가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를 모르겠군. 천궁까지 밀고 올라가 주기를 원하시는 줄 알았는데……. 혹시 나만의 착각이 아닐까? 그럴지도 몰라. 자네 생각은 어떤가?”
“감히 판단할 수 없습니다.”
“난 말이다, 어서 빨리 내 호흡이 가빠져 왔으면 좋겠다. 예전 그때처럼…… 감당하지 못할 두려움과 긴장감으로 전신을 떨면서 살기 위해, 그래, 살기 위해서 마지막 한 방울의 여력까지 짜내야 했던 그때처럼 말이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야말로 내가 유일하게 행복했던 순간이었던 것 같다. 살아 있음이 그렇게도 소중했었던 거야. 지금은…… 무뎌졌어. 지금의 이따위 장난 같은 눈속임이 아니라 내 전부를 걸고 싸우고 싶다. 그 결과가 영원한 형벌이든 소멸이든…… 상관없다.
그런데…… 난 그럴 수 없다. 아버지의 뜻이 아니기에. 그분의 명령이, 지시가 없었기 때문에. 여전히 내게 신은…… 그래서…… 극복되지 않았다. 아버지의 망설임으로 인해.”
아사셀은 판단했다.
‘마황이 요구하기 시작하셨다. 이들을 통해 메타트론님의 진의를 파악하고 싶으신 거다. 그분이 마지막으로 원하는 것이 만약…… 우리들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두려워하고 계신 거다. 이대로 시도도 해보지 못하고 물러서게 되는 것이 두려운 거야. 또다시 긴긴 침묵을 강요당하는 것이, 그 세월의 지루함이 못 견디게 싫으신 거야.
하긴…… 나도 나도 그렇지 않은가? 이제는 결정되어야 해. 이건 무엇보다 고통스런 형벌이다.’
어둠의 천사는 말을 아꼈다. 그리고 지극히 신중했다.
“주…… 께서는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루시퍼는 포기해야만 했다. 어둠의 천사를 통해 메타트론의 심증을 알아내기란 불가능한 일.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결정은 빠를수록 좋겠지. 내 결정엔 후회가 따르지 않는다. 내가 헤르파에게 했던 것과 같이 약속은 예전에 주어졌다. 그리고 난…… 무엇이든 실행할 권리를 위임받지 않았던가? 후후후.”
파천이 생략된 시간을 체험하고, 영계가 연합하기 위한 진통을 앓고 있던 그 시점에 영계의 또 한 곳에서는 매우 은밀한 사건이 제한적인 시선 속에서 잉태되고 있었다.
스스스스
바람이 분다. 축축한 습기 속에는 뜨거운 열기가 담겨 있다. 뜨거운 열기 가운데에는 누구도 엿보길 거부하는 단호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용천!
옛용의 유배지로 알려진 용천은 때 아닌 광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핏빛의 호수는 붉기보다는 검었다. 수면 위를 흐르는 안개마저 시야를 차단할 정도로 짙어 음산함이 가득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어디서부터 불어온 바람인지를 수면 위를 핥아가는 힘이 그 무엇에도 항거할 수 없을 정도로 거셌다.
씻은 듯이 사라진 안개. 물결은 출렁이고 그때마다 은은한 푸른색에 빛은 조금씩 부서진다. 대천사장 미카엘의 허락이 없으면 갈 수도 없단,s 곳. 그곳에 두 명의 영자가 모습을 드러낸 때는 파천이 배반의 탑을 지날 때쯤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라미레스는 숨죽이고 기다렸다. 그의 곁에는 또 한의 인물이 좌정한 채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라미레스는 한 조각 숨을 토해냈다.
‘그렇게도 어려운 결정이던가? 무엇이 그분으로 하여금 이토록 망설이게 하는가?’
라미레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커먼 천공에 무한한 공간이 펼쳐져 있음을 안다. 그는 다시 땅을 내려다보았다. 거길 딛고 있는 두 발을 보았다.
“내 자리는 이곳이다. 내가 선택한 자리 이왕 시작했으니 최선을 다하리라.”
라미레스의 곁에 침묵을 두르고 있던 자가 살짝 몸을 비틀며 움직였다. 라메레스가 그를 향해 시선을 둔다.
“초조한가 보군.”
그에게서 나온 말 이었다
“그렇소, 초조하오. 어떤 결정이 내려질지…… 무척이나 궁금하오.”
“그럴테지. 걱정이 되는 거겠지? 자네의 제안대로 되지 않으면 그대는 원치 않는 길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니.”
“…….”
라미레스는 가슴속이 써늘해지는 듯한 느낌에 전유했다.
‘원치 않는 길.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그분은 그런 결정을 내리지도 모른다. 왜 그런 생각을 지금껏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되면…… 난 파천과 맞서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난….. 어찌해야 하나!”
라미레스의 곁에 좌정한 이의 눈꺼풀이 스르르 말려 올라갔다. 그는 그레고스였다. 변천에서 파천이 원령체가 되는 것을 도왔던 그가 지금은 용천에 와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라미레스와 함께.
둘은 오래 전부터 친숙한 사이인 듯했다. 라미레스는 그레고스의 지적에 반발했다.
“그럴 리 없소. 그분은 예전부터 파천의 출현을 예상했었소. 그리고 장차 있을 일의 일부를 내게 암시해 주시기도 하셨지요. 크게 벋어나지 않을 겁니다.”
“우리 예상, 아니 희망이라고 해두지. 벋어난다면 그때는 어쩔 텐가?”
‘그때는…… .’
라미레스는 쉽게 말을 하지 못했다. 그의 지금이 있기까지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자들을 꼽으라면 그는 서슴지 않고, 주저함 없이 넷을 말한다. 옛용과 루시퍼와 아직은 밝혀지지 않은 천상계 천주의 하나와 마지막으로 파천.
그들 중 현재의 라미레스를 가장 강하게 이끌고 있는 것은 파천이었다. 옛용에 대한 감정은 존경이었고, 루시퍼는 증오의 대상이었으며, 천주는 고마움, 파천은 애정의 대상이었다.
“모르겠소.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을 놓고 미리부터 고민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소.”
그레고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대의 진실함은 내가 잘 알지. 둘 사이에서 망설이다 끝내는 지신을 포기할지도 모르지. 그래서 걱정이 되는 거야. 대체 이렇게나 망설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직 까지도 망설여야 할 만큼 미련이 남는 것인가요? 이제는 버릴 때도 되었건만…… .’
그레고스와 라미레스는 옛용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레고스가 외쳤다.
“말씀하십시오. 이젠 우리가 결정을 내려야 할 때입니다. 파천이 광명을 얻든 그렇지 않든 우리 할 일은 해야 합니다. 이대로 방관하면 영계는 설사….. 파천이 광명을 가져온다 해도 끝장이 나고 난 뒤일 겁니다. 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어서, 결정을 내려 주십시오.”
그레고스에 이어 이번에는 라미레스가 외쳤다.
“힘이 필요합니다. 그 힘을 열어주십시오. 당신은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기다리며 준비해 왔던 이유가 바로 지금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까?”
그레고스는 길게 한숨을 토하고서는 다시 두 눈을 감아버렸다. 라미레스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말해주시오. 당신의 뜻을 알려주십시오. 우리가 어찌하기를 원하십니까?”
물결에 일던 파문이 일시에 잔잔해진다. 그때 그레고스의 감겼던 눈이 번쩍 떠졌다.
‘드디어.’
“무엇을 말해 달라는 것이냐? 용천을 열어달라는 건가? 그래서 봉인한 자들을 풀어달라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더불어…… .”
라미레스의 말을 자르고 또다시 음성이 울려 나왔다.
“네겐 자유를 주었다. 네 뜻대로 행하라 했거늘 또다시 여기 온 이유가 무엇이더냐?”
“전 바알세불도 아니고 라미레스도 아닌 지혜전사단주로 이 자리에 왔습니다. 이제는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아직은…… 아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다. 파천을 기다려라. 메타트론과 수호자와 파천이 영계에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그때까지 기다려라.”
“그때는 너무 늦습니다. 모든 게 사라지고 나서 지킬 것도 없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진정 그렇게 생각하느냐? 어찌 지금 전면에 나선 자들만 생각하느냐? 그들은 s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너도 그 지신들처럼 그들이 영계의 중심이라 여기더냐?”
“…… .”
“영계가 힘으로 유지되더냐? 영계의 영자들이 누리고 있는 자유가 신의 의지인가, 영자들의 의지인가? 허락되지 않으면…… 달라지는 건 없다.”
“그 과정 중에 고통 받는 자들은 어찌합니까?”
“그것도 순리라면 순리다.”
“순리에 역행하고자 이곳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으셨습니까? 그것이 순리라면, 그래서 그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 수리에 따르는 것이라면 당신의 지난 선택들은 어떤 가치가 있습니까? 말씀하십시오. 왜, 무엇 때문에 망설이는지 사실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그레고스가 말했다.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가 아니었던가요? 우리가 재촉하는 결정이 내려지면 짐작이 확신이 될 것이 두려운 게 아닌가요? 신의 이면을 보았다는 것이, 그로 인해 마땅히 할 바를 한 것이 스스로를 가두게 된 동기가 되었다는 걸 인정하는 게 두려운가요? 아니면 신의 개입을 기대하는 것입니까? 피조물 중 가장 지혜롭다는 당신도 알고 보면 어리석기 짜이 없군요. 이미 지나버린 일입니다. 미련을 가진다 해서 돌이킬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지난 일이 후회되십니까? 다시 돌이키고 싶습니까? 잠잠함으로 침묵을 지킴으로써 스스로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싶은 겁니까? 회복하고 싶다면 더 적극적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파천을 보십시오. 왜 그가 모근 걸 짊어져야 합니까? 왜 영자들이, 아무도 동의하지 않은 일에, 왜 그들이 희생되어야 합니까?
제게도 그러시지 않았던가요? 모두가 등을 돌린다 해도 내 스스로 당당함을 잃지 않으면, 사사로이 유익을 구한 것만 아니라면, 그래서 많은 이에게 희망의 빛을 던져줄 수 있다면 어찌 되어도 좋다고. 결정을 내리세요. 어떤 결정이든….. 전 당신의 결정을 끝까지 존중하겠습니다. 나만은 언제까지나 당신의 편으로 남겠습니다.”
옛용은 침묵했다. 그렇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신을 판단한 것이 모든 것의 시초였다. 그것이 지혜의 실체였다. 회복할 수 없는 과오였지 지금 내가 개입하면…… 나는 또다시 과거의 과오를 되풀이하는 것이 된다. 내 의지가 개입된다 해서 큰 줄기를 바꿔놓지는 못한다. 난…… 자신감을 잃었다. 더 이상은 내가 지닌 생각이 옳다는 확신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라미레스는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그에게서 이런 고백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진정 이런 일이 자신에게 벌어지리라고는 짐작도 못해본 일이었다.
그는 발악하듯 외쳤다. 거부하고 싶었다. 인정하기 싫었다.
“그럼 우리는 뭡니까? 당신이 던져준, 우리에게 심어준 의지는 무엇이죠? 이대로 멈춰버릴 걸 왜 시작한 겁니까? 메타트론을 보십시오. 루시퍼를 보십시오. 그들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그들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으며 자신이 지닌 신념을 증명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합니다. 왜 그러지를 못합니까? 결정하십시오. 당신이 뿌린 씨앗이니…… 당신이 거두십시오.”
그레고스도 거들었다.
“그렇습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당신의 결정이 어떤 결과로 다가설지를…… 지금 예측하는 일은 어리석습니다. 우리는 우리 할 바를 다하면 됩니다.”
예용은 웃었다. 회한이 가득한 공허한 웃음이었다.
“그런가? 내 운명인가? 피할 수 없단 말인가?”
그리고 옛용은 결정했다.
“용천을 열겠다. 너희는 먼저 가서 지혜의 전사단을 소집하고 이끌라 . 봉인한 자들을 뒤따라 보내겠다. 그것으로 안 된다면…… 파천이 광명을 얻지 못한다면…… 완전자의 세상을 열어서라도 메타트론과 비밀차원을 막겠다. 신의 저주가 내게 내릴지라도…… 내 모든걸 던져서라도 그들의 걸음을 멈추게 하겠다. 내가 뿌린 씨앗을 내 스스로 거두겠다.”
옛용의 결정이 내려졌다. 라미레스와 그레고스는 격렬하게 심장이 뛰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제야, 이제야 모든 걸 원점으로 돌릴 수 있을 것이다.‘
라미레스는 파천을 생각했다.
‘네가 와야 한다. 그래서 네 손으로 마무리를 지어다오. 그래야 가벼워진다. 그래야 회복시킬 수 있다. 그래야 징벌을 면할 수 있다. 생령인 네 손으로 막아내야지만…… .’
둘은 떠났다. 옛용에게서 허락을 얻어낸 둘은 약간은 들떠서 용천을 떠났다. 그리고 봉인은 점차 조금씩 풀어질 것이었다.
브람과 페드로가 아난다를 따로 불렀다.
그의 눈치를 살피던 둘은 어렵게 입을 떼어 갔다.
“이제는 풀어줄 때가 된 것도 같은데…… .”
페드로가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그렇게 간신히 운을 뗐다. 그러자 페드로도 가세한다.
“여벌의 목숨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 스스로를 지킬 힘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지금에 와서 더 이상 미룬다는 건 납득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
약속 이행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주길 바라오?”
아난다의 질문에 둘은 히죽 웃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혹시라도 아난다의 마음이 바뀔까 염려되어서였던지 페드로가 부리나케 심중의 말을 한 번에 쏟아냈다.
“그야 금제를 풀어주면 되지.”
브라함이 덧붙였다.
“거기다 우리 무기까지 돌려준다면 더 좋고.”
그들에게 가해진 금제란 건 따지고 보면 살아가는 데 전혀 지장을 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들이 그렇게도 원하는 건 정작 위험이 닥쳤을 때 본신의 전력을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겨우 십 분의 6이나 7 정도만의 힘으로도 둘은 지금껏 잘도 버텨 왔다. 더군다나 몸의 일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무기들을 떼어놓고서도 그 정도의 능력을 발휘했으니 대단하다고 할 밖에.
페드로가 말했다.
“마계 침공이 임박했으니 이제 우리 목숨은 우리가 지켜야지. 사실 그 동안도 답답했지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 제대로 저항 한 번 못해보고 가기는 좀 억울하더군. 그래서 부탁하는 거야. 금제를 풀어주고 무기까지 돌려주면 좋겠어.”
아난다는 깊이 생각해 볼 것도 없었던지 그들의 요구에 동의하는 몸짓을 했다. 고개가 끄떡여진 것이다.
너무도 쉽게 승낙하지 둘은 좀 어안이 벙벙했던 것 같다. 브라함이 의문 가득한 얼굴이 된다.
“메덴에 우리 무기가 있다고 들었는데.”
“아뇨, 지금 제가 갖고 있습니다. 물어 볼 게 있습니다.”
“말해.”
“원래의 능력을 회복하게 되면…… 선발대를 떠날 겁니까?”
페드로와 브라함이 서로의 얼굴을 찾았다. 서로에게 물었다.
“넌…… 어쩔 거야?”
“넌…… 갈 데라도 있냐?”
“흐흐흐, 역시 우리를 반겨 주는 데는 아무래도 …… 여기 밖에 없겠지. 그리고 다시 오지 않을 큰 싸움을 앞두고 도망가는 건 내 성미에 맞지도 않고.”
“아무래도 그렇지? 여기서 마계 몸들을 짓이겨버리고 장렬하게 산화한다면 그도 멋질꺼야, 크크크.”
페드로와 브라함의 두 눈이 순간 번들거렸다. 아난다는 내심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난다는 즉각적으로 브라함과 페드로의 금제를 푸는 작업에 들어갔다. 천상계의하나인 화천의 천주가 걸어놓은 금제란 건 어찌 보면 단순한 것이었지만 그 효과만은 아주 탁월했다.
화천주는 심령으로 일으킨 화기를 둘에게 심어놓았다. 일정한 수위 이상의 힘을 끌어올리거나 아난다의 특별한 의지가 작용하면 화기는 즉각적으로 발동했고, 그 고통이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했다.
뿐만 아니라 순간적으로 전신의 진력이 모조리 빠져나가며 공백상태가 되고야 만다. 아난다가 금제를 풀어주며 뭔가를 내밀었다. 아난다의 손에 올려진 물체를 확인한 둘은 뛸 듯이 기뻐했다.
“이게 대체 얼마만이냐!”
“흐흐흐, 이제야말로 다시 날 찾은 기분이군.”
네 개의 팔찌였다. 각기 양 손목에 채우도록 고안된 것인데 그 효능이 매우 탁월한 기병이었다. 제왕의 대지에서 흘러 들어왔음이 분명했다. 브라함과 페드로는 병기의 자체 위력보다도 그 익숙함 때문에 이리도 반가워하는 것 이었다.
각기 양 손목에서부터 시작된 청량함이 전신에 전달되는 걸 기분 좋게 즐기던 둘은 서로 손을 굳게 잡았다.
“다시 부활했다.”
“우리의 옛 악명을 …… 마계를 상대로 재확인하지.”
아난다는 이번에는 대놓고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만 내심은 그리 나쁘다고 할 수만은 없었다.
연합을 위한 진통은 극심했다. 몇 차례나 연기되고 재개되기를 거듭했다.
로메로의 극단적인 연합 파기는 오히려 효과가 있어 보였다. 천주들의 기세가 한풀 꺾인 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었고 저자세를 보여 타협을 제시한다.
이 정도에서 물러설 로메로가 아니었다. 그의 심중의 결정에 다시는 번복함이 없음을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냉랭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지금껏 사태를 관망하던 중도적인 성격의 인물들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선계의 충선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로메로에게서는 자신이 거명되어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는 입장이 아니었기에 지금껏 잠자코 지켜보았다. 그러나 이젠 그럴 수 없었고 그럴 수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판단했다.
“영계연합 지휘부 구성에 대한 전군을 로메로님에게 일입했으면 합니다. 어떤 결정을 내리시든 다른 여타의 두 차원계는 군소리 없이 따르기로 하죠.”
균천주인 설란도 제 목소리를 냈다.
“그러는 게 좋을 듯하군요. 잠시우리 처지를 잊은 듯해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연합된다 해도 지휘부 구성에 이처럼 잡음이 많아서야 어찌 마계를 효과적으로 상대할 수 있겠어요.
연합의 성격이 무한계를 기반으로 하게 되었으니 주도권을 저들이 가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거예요.”
이젠 천주들도 적극적으로 반박하거나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로메로가 저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나왔으니 또다시 제지당하면 그때는 돌이킬 수 없을 것 가탔기 때문이다.
무한계와 연합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선계나 천상계 모두 어떤 극적인 반전을 기대할 수 없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그것이 현실인 바에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대신 최대한 위신과 체면만이라도 회복하고 싶은 심정은 여전했다. 이때 대덕이 들어왔다.
칠성대덕을 그들로서도 반길 만한 존재였다. 칠성대덕은 균천주인 설란과 눈웃음을 주고 받더니 비어 있는 자리에 가 앉았다.
그녀는 이후 속개된 회의를 지켜보며 잠자코 있었다. 일사천리였다. 로메로가 주도하고 선계에서는 충선이, 천상계에서는 균천주가 각각 호응해주면서 적당하게 조직을 정비해 갔다. 노군도 제석도 참견할 여지가 없다고 판단한 때문인지 물끄러미 지켜보고만 있을 따름이었다.
최종적으로 결정된 사항은 처음 로메로의 제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기초로 해서 좀더 세밀하게 보충했다. 세부적인 조직편제에 대해서는 좀더 많은 대화들이 오갔고 여러 가지 기발한 견해들도 받아들여졌으며 충분히 검토되었다. 그들의 대화가 무르익어 갈 수록 영계연합군은 좀더 단단한 조직의 외피를 지닐 수 있었다.
사령부와 7개군단.
사실상 이 두 조직으로 틀을 갖췄다. 사령부에는 제석과 노군, 대덕, 로메로를 주축으로장차 합류하게 될 무한계의 강자들로 구성된다.
7개 군단의 수장은 야마천주와 도솔천주, 태선과 충선, 요주족장과 수련자 바소름, 전사 불칸으로 최종 낙점되었다. 처음 로메로가 했던 제안대로였다.
나머지 천상계와 선계, 무한계의 상층부 요인들을 비슷한 비율로 적재적소에 배치했다.이제 남은 건 마계의 중앙군을 담당할 예비군단에 대한 논의였다. 로메로는 라미레스가 가장 적임자라고 했다. 그런데 현재 그는 하룬에 있지 않다. 제석이 말했다.
“그라면 안심하고 맡겨도 되겠지요. 사실 그만한 자가없지요.”
천주들도 8선도 그가 연합군단을 책임지는 것에 대해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노군이 쌍수를 들어 찬성했다.
“그만큼 마계에 해서 잘 아는 이도 없습니다. 그의 능력과 경험이라면 충분히 감당해내리라 봅니다.”
이때 대범천주가 파천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파천, 그가 돌아오게 되면 그에게 연합군 총사령관을 제안한 적이 있었습니다. 확답을 듣지는 못했지만 그가 진실로 광명을 얻어서 돌아온다면 마땅히 그를 중용해야 할 것입니다.”
연합군 총사령관. 현재는 아무도 그렇게 불리는 이가 없었다. 로메로는 전체 분위기를 다시 촘촘히 살펴가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직은 좀더 기다려 봐야 할 듯 합니다.만약 그가 돌아와 준다면야…… 그 이상의 직책을 만들어서라도 중임을 맡겨야겠지요.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차후의 일. 지금 논의될 일은 아닌 듯합니다.”
충선은 생각했다.
‘저들은 파천을 잘 모른다. 파천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 녀석의 고집은 아무도 꺾지 못하지.’
로메로는 더 이상 의견을 묻지 않았다. 대신 사령부 참모로서 각 군에 전달사항을 전달했을 뿐이었다. 그는 시간을 지체했다는 조급함 때문이었다.
그노시스 헤이룬은 아바돈의 에레츠 소속이었지만 엄밀히 말해 그는 마령의 본주의 명을 직접 듣고 있는 처지였다.
그는 마령의 본주에게서 하달된 명령을 완수함에 설사 아바돈의 하기오스들과 불화하게 된다 해도 망설이지 않을 위인이었다. 그의 마령의본주에게서 나와 루딘의 비행매소로 갔다. 루딘의 족장은 그를 반갑게 맞아들였다. 어찌된 영문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동안 어디에 계셨던 겁니까, 마르쿠제님?”
루딘족 족장 미스바에게서 마르쿠제라고 불린 그노시스 헤이룬은 잠시 아름다운 미스바의 얼굴은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잠시 뒤 그는 몸을 돌려 미스바의 반대편을 향했다.
“매소를 하룬으로 돌려라.”
“하룬으로 간다는 건 결국…… 이번 전쟁에 우리도 참전한다는 의미인가요?”
“그렇다. 루딘족의 전 역량을 결집해…… 영계연합군을 도울 것이다.”
그노시스 헤이룬의 진정한 얼굴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는 루딘족장인 미스바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을 정도의 막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마르쿠제. 언젠가 미스바를 만나고 갔던 루딘족 전 족장의 입에서 거론된 바 있는 두 명중의 하나의 이름이었다. 미스바는 물었다.
“카발라 님은?”
“그는 하룬에 먼저 가 있다.”
“그런 소식을 접하지 못했습니다만 …… .”
‘그는 현재 다른 신분으로 위장하고 있다.”
미스바는 이해하지 못했다.
“굳이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까? 납득할 수 없는 일이군요.”
“미스바.”
“네.”
“하룬에 마계나 아바돈의 잔당이 암약하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나?”
“그 정도야 누구나 짐작하는 일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하지만 연합군 상층부의 요인 중에도 포함되어 있다면…… 그대는 믿겠는가?”
“으음.”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껏 확인된 바도 없었다.
“현재 카발라는 다른 신분으로 위장한 채 마계와 아바돈의 첩자들을 색출해내는 일을 하고 있다. 그는 오래 전부터 그 일을 해오고 있었다.”
“아!”
‘그랬던가? 그래서 두 분과 연락이 두절되었던 거로구나.’
미스바는 전족장에 대해서도 물었다. 그러자 마르쿠제는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나도 모른다. 그 분은 모종의 일을 완수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나셨다.”
미스바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대충 짐작했다. 그럼에도 확인은 필요했다.
“하룬에서 재가 할 일은?”
“카발라를 지원하는 것과 하룬을 도와 마계를 치는 데 일조하는 일이다.”
미스바는 고개를 숙였다.
“이행하겠습니다. 마르쿠제님은 동행하지 않습니까?”
“나는 다른 일을 해야 한다. 너는 먼저 하룬으로 가 연합군 수뇌들과 회동하라. 너의 위치를 공고히 다져두어야 후에 주인께서 오셨을 때 일하기 편하단 사실을 잊지 말고…… 명심하기 바란다.”
“네.”
미스바가 고개를 다시 들었을 때 마르쿠제는 보이지 않았다. 떠난 것이었다. 그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미스바의 표정이 기이한 변화를 보였다.
뒤이어 긴 한숨이 그녀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제왕의 파견자들이 대적자의 수뇌들과 만났다. 몇 마디 말이 오가고 대적자들은 어딘가를 향해 떠났다. 그리고 제왕의 군대가 무한계로 들어왔다. 아직은 마계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영계연합군은 언제든 적을 맞을 준비를 끝내놓았다. 누가 먼저인가? 연합군은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마계와 제완의 군대가 점하고 있는 위치는 하룬과 삼각을 이루고 있었고 그 거리도 거의 비슷했다.
묘한 대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이런 긴장감이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 가운데 외부로 알려지지 않은 은밀한 움직임들이 도처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연합군이 주둔하고 있는 하룬에서도 그런 움직임은 있었다.
루딘족의 비행매소가 하룬에 도착했다. 연합군의 사기가 오를 만한 낭보였다. 그들은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하룬의 상공을 선회했다. 족장 미스바와 주요 측근들은 하룬의 사령부가 있는 중심지역으로 초대되었으며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다.
미스바는 카발라가 접촉해 올 것을 기다렸지만 그런 조짐은 없었다. 비행매소로 돌아간 미스바는 수하들에게 명해 하룬의 연합군이 필요한 물자들을 공급해줬으며 새로운 무기들도 제공했다. 그것들 중 로메로를 감탄시킬 만한 대량 살상용 무기가 있었다는 것이 특이할만한 사항이었다. 그리고 다시 하룬은 조용해졌다. 숨죽이고 적의 침습을 기다렸다.
아난다가 실종되었다. 천주 중 둘이 사라졌다. 보고를 들은 제석은 놀람을 감추지 않았다.
‘이런 공교로운 일이. 대체 무슨 일인가? 자의적인 잠적인가?, 아니면 납치란 말인가. 아닐 것이다 외부에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사실상 그 둘은 천주들 중에서도 가장 강하다 할 수 있지 않던가?’
이런 일은 곳곳에서 벌어졌다. 급작스런 실종사건.
그다지 많은 눈길이 없는 곳에서야 누구 하나가 사라져도 관심조차 일으키지 못하지만 하룬은 사정이 달랐다.
가장 크게 주목받은 건 역시나 아난다와 두 천주였다. 하룬의 분위기가 뒤숭숭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마계의 첩자가 하룬내에서 암약하고 있단 소문이 돌고 있던 때였기에 납치 쪽으로 가닥이 잡히면서 그 분위기는 더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들의 급작스런 실종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 정도의 강자들을 소란 없이 납치할 정도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쉽게 잠잠해질 것 같지가 않았다.
수하들의 동요가 가라앉지 않자 7군단장들은 예하 직속 부대장들을 소집했고 곧바로 하룬 외곽 지역으로 군대를 이동시켰다. 두려움이 번져 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일종의 군사 훈련인 셈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