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58화 : 연합군 내부의 적
연합군 내부의 적
루딘족장 미스바는 비행매소에서 하룬 사령부를 오가며 여러 가지 일을 담당했다. 그녀와 루딘족에게 맡겨진 일은 다른 조직들과는 차별된 특별한 임무였다.
그들은 영계에서 가장 탁월한 장인들이다. 그들이 만들지 못하는 것은 없다. 필요가 있고 요구하기만 한다면 그들은 어떠한 것도 고안해냈다. 무기에서부터 각종 필요한 물자까지 루딘의 비행매소에서 만들어져 하룬 전역의 영자들에게 주어졌고, 그것들은 상당히 요긴하게 쓰여 졌다.
그들이 연합군에 기여한 점은 비단 이런 부족함을 채우는 선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로 인한 전체 영자들의 자신감 상승에 톡톡히 한몫을 하고 있었다.
미스바는 사령부에서 소집한 수뇌회의에 참석했다가 비행매소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그녀는 현 하룬의 연합군이 심각한 위기 상황에 직면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것을 지켜보는 심정은 가볍지가 않았다.
‘저들이 단합하지 못하는 한 하룬은 언제 깨질지 모르는 연약한 그릇과 같다. 덩치만 크지 비대한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거동하지 못하는 괴물이 되어 버린 연합군.
그나마 다행인 것이 라미레스님과 생사군단의 활약이다. 그들은 충분히 활력소 역할을 하고 있고 불화를 표면에서 내부로 잠재시켰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런 회의감은 요즘 하룬 연합군의 수뇌들이라면 누구나 겪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의 처소에 돌아온 미스바는 곰곰이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중이었다.
‘내게 맡겨진 임무는 하룬을 도와 마계와 제왕의 군대로부터 영계를 지키는 일이다. 카발라님은 대체 어디에 계시는가? 첩자들이 암약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기껏 정보를 수집하는 정도의 활동 역량밖에는 없을 터.
그런 그들을 솎아내기 위해 침투해 있다는 카발라님은 왜 지금까지 연락이 없는가? 생사군단의 부단주 중 하나일 가능성도 생각해봤지만…… 그건 아닐 것이다. 우리가 이곳으로 왔음을 벌써부터 알고 있었을 터인데…… 알 수 없는 일이구나.’
미스바는 하룬에 온 때부터 지금가지 카발라를 기다렸다. 그가 먼저 접촉해오지 않으면 그녀로서 찾아낼 방도는 없었다. 그녀가 어떻게 알겠는가? 생사군단의 대원들에게 감사당하고 있는 카발라로서도 미스바와의 접촉을 조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마르쿠제에게서도 연락이 끊어졌다 전족장을 비롯한 그들3인에게서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음을 그녀가 알게 된 것은 꽤나 오래 전의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더 이상의 관심을 기울일 수가 없었다. 그렇게 훈련받고 교육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유는 그럴 만한 역량과 권한이 지신에게 없다는 점이었다.
“후우, 답답한 일이야.”
그녀는 자신의 처소를 벗어나 비행매소의 이곳저곳을 순시했다. 그녀의 발길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언젠가 파천에게 도움을 줬던 신비의 영자가 기거하는 공간이었다.
현자는 파천과 만났을 때와 다름없이 자신만의 공간에 머물고 있었다. 미스바가 기척을 내자 그제야 돌아본다.
“여긴 어쩐 일이냐?”
“궁금한 게 있어서 왔습니다.”
“궁금한 것? 내게서 알아볼 것이 있었던가? 뭐지?”
“모든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당신은 원래 우리 부족과 연관이 없던 분. 당신을 보고 있으면…… 마치 억류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네 느낌에 대해 내가 일일이 답해줘야 하나?”
“말씀해 주십시오. 당신이 왜 이곳에 있어야 하며 그분들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미스바가 지칭하는 대상은 전족장 케플러를 포함한 마르쿠제와 카발라였다.
그들은 루딘족 족장인 미스바에게 유일하게 명령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에 그녀가 그들에게 어떤 작은 의문이라도 가진다는 건 불경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지니게 된 의문들이 하나 둘씩 쌓여가면서 더 이상은 잠자코 있기 힘이 들었다.
‘나는 루딘족을 책임지고 있는 족장. 나보다 그분들보다 우선하는 것이 부족이다.’
이런 생각 때문이었다. 케플러가 미스바에게 심어준 족장으로서의 책임감이 이제는 되려 자신마저 의심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현자는 미스바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미스바는 그런 현자의 태도에는 아랑곳없이 하고 싶었던 말을 마저 했다. 사실 그녀로서도 어떤 기대를 갖고 이곳에 온 건 아니었다. 이렇게라도 쏟아놓고 나면 마음이 좀 편안해질까 해서였다.
“그분들이 제게 지금껏 지시했던 것들 중 제대로 성과를 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제대로 짚어냈다 생각되는 것들도 막상 결과물을 얻어내려 하는 순간 허공으로 사라진 듯 자취조차 없어지곤 했습니다.
대적자들도 그랬고 아바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껏 끈질기게 추적해 왔지만 수하들의 조사는 공연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분들은 이런 무능한 절 단 한 번도 나무라지 않더군요.
제가 알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분들의 의중이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그분들이 어떤 일을 계획하고 진행시켜 가는지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실이 전무했습니다. 너무나도 단순한 현재의 구도를 파헤치기 위해 저는 많은 수하들을 희생시켜야만 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쓸데없는 일이 되었지요.
그래서 전 생각했습니다. 혹시 내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잡다한 명령들을 내린 것이 아닌가 하고. 우리 부족원 중 최고로 손꼽힐 만한 장인들이 은밀하게 어딘가로 보내진 것은 꽤나 오래 전부터입니다. 제가 족장이 되기 전부터 있어 왔던 일이었습니다.
대체…… 그분들이 무슨 일을 계획하고 있는 겁니까? 그리고 당신은 왜 이곳에 있으며 그분들과는 어떤 관계입니까?”
현자는 미스바를 측은한 눈길로 잠시 바라보았다. 미스바는 그 눈빛의 의미를 놓치지 않았다. 현자는 다물고 있던 입을 끝내는 열어놓고 있었다.
“네가 많은 절 알고자 하면 더 많은 걸 잃어야 한다. 그래도 좋으냐?”
“이미…… 각오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나보군.” “아닐 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불안합니다. 불길한 일에 대한 제 직감은 지금까지 한 번도 틀려본 적이 없기 때문이죠.”
“네게 진실을 알려주는 것을 케플러가 허락한 적이 없다. 그래도 좋으냐?”
케플러의 눈 밖에 나는 걸 각오하란 말이었다.
“…… 네.”
현자는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며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는 욕심이 많은 자였다. 루딘족장이라는 신분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어. 그것이 시작이었지. 하지만 이렇게 까지 되리라고는 그도 당시엔 짐작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미스바는 지니고 있던 불안의 정체가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전율했다.
“케플러 또한 비극의 현장에 있었다.”
그 말이 시작이었다. 아바돈의 하기오스들로부터 시작된 비극은 전 영계에 드러난 일은 아니었다. 당시 하나의 소문이 영계를 떠돌았다. 제왕의 보물. 그들이 지니고 있던 보물들이 무한계 어딘가에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이 소문은 누군가에 의도에 따라 당시 영계의 명망 있는 인물들에게 처음 전해졌다. 그리고 그 소문은 은밀하게 퍼져나갔음 진위 확인을 위해 나섰던 영자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했다.
“그들 중 대다수는 신분이 드러나는 걸 꺼려해 위장한 모습으로 왔다. 사실 제왕의 보물이 모든 영자들에게 유혹일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들 중 하나는 분명…… 누구라도 외면 할 수 없었다. 그랬었지. 나 또한 그들 중에 있었다.”
“그것이 대체 뭐기에…… .”
“그 보물들 중 하나는 제왕들에게서 나왔으며 그들이 지닌 것 중 최상의 가치가 있었다. 모두가 탐낸 보물의 정체는 소멸을 극복하게 해준다는 영물이었다.
영자들이라면 누구나 바라마지 않을 그 유혹은 참으로 대단했다. 기억과 육체의 소멸을 극복한다는 건 떨쳐내기 힘들었지. 실제로 제왕들은 소멸을 극복해냈었다고 전해졌었다. 그것이 어디서부터 흘러들어왔는지 말 안 해도 짐작할 것이다.
“비밀차원입니까?”
“그렇다. 그곳이 아니고서는 그럴 만한 곳이 없지. 그 보물은 제왕에게서 천주들에게로, 아바돈에게로, 대적자들에게서 일반 영자들에게로 전해졌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자들이 버젓이 현세에 등장하기 시작했으니 믿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지. 천상계의 천주들을 보라. 그들 중 상당수는 소멸을 극복해 냈을 거로 추정된다. 기억소멸만이 아니라 육체의 죽음까지도 말이지.
대적자들의 수뇌들도 마찬가지. 아바돈의 하기오스들도 해당된다. 그런 보물이 아바돈에 의해 비밀차원에서 무한계로 대거 흘러들어 온 것이다. 제왕의 보물이란 이름으로.”
실제 당시의 보물들은 제왕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하기오스들이 비밀차원의 스스로 존재하는 자들에게 받아다 무한계로 가져온 것들이었다.
“아바돈이 모든 배후에 있다는 사실이 모두를 망설이게 하기엔 유혹은 너무도 …… 컸다. 그리고 보물 쟁탈전이 일어났지. 수는 한정외어 있었고 효력 또한 그랬다. 모두에게 골고루 혜택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회에 한해 사용된 보물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으니까.
힘이 있는 자들이 먼저 가졌다. 그리고 남은 자들은,,,,,, 하기오스들에게서 빼앗으려고 했다. 그때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친구가 친구를 배신하고 수하가 섬기던 주인을 죽였다. 연인이 등을 돌렸고 스승이 제자를 해하고 서로 반목하고 배신하고 이용했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하나. 얼마 남지 않은 보물을 가지는 것이었다. 아바돈은 어느 시점이 되자 흔적 없이 자취를 감추고 물러갔다. 결과적으로 모두는 허망한 욕심으로 인해 서로를 해친 꼴이 되고 말았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거다. 그들이 그때까지 쌓아왔던 영격이 그처럼 초라한 것일 줄은 몰랐을 테지. 모두는 충격 중에 빠져 들었다. 모두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다.
그때, 그 현장에 케플러도 있었다. 그리고 당시 하기오스들과 접촉한 몇 명의 운 좋은 영자들 중 하나였다.”
“아…… .”
“사실은 불운이라고 봐야겠지만.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하기오스들과 접촉했던 영자들 모두는 비밀차원으로 들어가게 되었지.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소멸을 극복해냈고 힘을 얻어 새로운 존재로 탄생했다.
하기오스들은 그것에 그치지 않고 당시의 쟁탈전에 참여했던 자들을 후에도 적절하게 이용하고 싶어 했다.
그들은 저주의 미약을 사용해 영자들을 속박하려 했다. 그리고 마침내 모두를 굴복시켰다. 그들은 당시의 영계에서 그야말로 최고라고 자처했던 절대강자들이었다.
그대로 두었다면, 하기오스들의 의도대로 흘러갔다면 영계는 당시에 그들의 소유가 됐을 것이다.
그때 엤용이 나타났다.
그는 하기오스들을 비밀차원으로 쫓아냈으며 모두를 해방시켰다. 그리고 영자들은 각기 제 갈 길을 갔다. 일부는 옛용을 따라갔고 나머지는 나처럼 어딘 가로 숨어들었다. 일반 영자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영자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었지. 모두가 잊고 싶은…… 하지만 잊을 수 없는.”
미스바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절대자들이라고 불렸던 뛰어난 영자들 거의 대부분이 그 일에 관계되어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그럼 세 분들은 그 당시에…… .”
“그래, 비밀차원으로 들어갔다가 나온 일부 영자들 중에 포함되어 있었고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그들 중 케플러는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아바돈의 최고 명령권자이며 대적자의 수뇌들과 관련이 있다. 뿐만 아니라 영계에서 그 이후로 벌어졌던 사건들의 배후에는 직간접적으로 그가 있었다. 심지어 사냥꾼이 생겨난 것도 그로 인해서다.”
라만을 그가 만들어 냈다는 의미였다. 그 정도가 아니었다. 그가 실제로 모든 사건의 배후이며 원흉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걸 나더러 믿으란 말인가?’
“믿고 싶지 않겠지. 하지만…… 모두가 사실이다.”
“그럼 당신은 그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왜…… .”
“그에게 협조하느냐고?”
“네.”
“할 수밖에 없으니까. 나는 그가 싫다. 저주할 정도로 증오한다. 하지만 난 그의 곁을 떠날 수 없다. 내 생명은 그의 것이니까. 그가 시키는 일을 거부할 수 없다. 저주의 미약은 당시 원령을 수련하던 내가 극복해 내지 못한 힘의 한계를 넘어서게 해주었다. 그를 떠나면 난 한시도 뚜렷한 의식을 지닐 구 없다.
옛용의 도움으로 회복되었던 내가 다시 그를 만나게 되었을 때 난 어처구니없게도 당시에 느꼈던 힘을 다시 가지고 싶어 했다. 난 마신들을 만드는 일에 협조했으며 수많은 영자들을 금단의 길로 끌어들였다.
나는 이제 돌아갈 곳을 잃어버렸다. 돌이키기엔 …… 너무 늦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케플러가 아바돈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가 또 알고 있죠?”
“모른다. 그의 야심이 어떤지를, 그의 본모습이 어떠한지를 아부도 모를 거다.”
여전히 믿기 어려웠다. 갑작스런 진실은 그래서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때는 고통스럽기까지 한 법이다.
그러나 이게 모두 사실이라면 그야말로 심각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밝혀내야 할 일이었다. 이대로 둔다면 그가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미스바는 결심했다.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라. 네가 아니라도 언젠가는 밝혀지게 되어 있다.”
“어째서 그렇게 된다는 거죠?”
“그는 지금 자신감에 차 있다. 스스로의 능력에 도취되어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네가 알고 있는 케플러와 실제의 케플러는 전혀 다른 존재다. 그의 능력은 스스로 오만해도 좋을 정도다. 그는 네가 아니어도 자기 입으로 밝힐 것이다. 그리고 모든 걸 차지하려 들겠지.”
“말하겠습니다. 영자들에게 이 모든 사실들을 밝히겠습니다.”
“밝혀도 소용없다. 그냥 두어라.”
“그럴 수 없습니다.”
“네가 그 사실을 밝힌다면 어찌 될까? 네 말을 믿어주는 이도 별로 없겠지만 믿어준다 해도 증명할 길이 있느냐? 그걸 떠나서 그가 현재 어디에서 어떤 일을 도모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않느냐?
그리고 루딘족의 장래는 어찌될까? 영자들은 너희들 모두를 배반자로 몰아 멸절시키려 들 것이다. 되려 그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일이다.”
“그래도 해야 합니다. 이대로 뒀다 나중에 밝혀진다면 오해를 풀길이 없습니다. 최소한…… 루딘족 전체가 그 하나로 오해를 받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
“몰랐으면 모를까, 알게 된 이상 이대로 당하고만 있지는 않겠습니다. 카발라가 이곳 하룬에 있습니다. 그부터 가려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루딘을 그 모든 책임에서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족장인 내가 해야 할 최선입니다.”
“케플러는…… 널 참 잘 길러냈구나. 후후, 네 뜻대로 하라. 하긴…… 말린다고 될 일은 아니지.”
그는 미스바에게 알고 있던 사실을 털어놓으며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였다.
더 이상은 케플러의 노예로 질질 끌려 다니고 싶지가 않았다. 그는 미련을 버렸다. 어쩌면 진작부터 이런 기회를 노려 왔던 건지도 모른다. 그가 케플러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의 방법이기도 했다.
라메레스는 내부를 정리해 가며 전에부터 가지고 있던 몇 가지 의문을 해결하려 애썼다. 라만의 등장으로부터 마신의 제조, 그리고 그들과 칠대부족 간의 관계를 규면하는 것이었다.
그는 부족장을 한 자리에 모았다. 그리고 자신이 지닌 의문을 솔직하게 가감하지 않고 털어놓았다.
그들은 라미레스가 알고 있는 사실이 의외로 많다는 것에 놀라워했고, 그 다음엔 어디서부터 얘기를 풀어 나가야 할지 정리하느라 고민에 빠졌다. 라미레스는 그들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기위해 기다렸다.
입을 연 것은 용족장이었다.
“예전 발락이 위기에 빠졌을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우리들의 스승이신 카란님은 각기 하나씩의 물건을 맡겼습니다. 그것은 우리들 모두에게 부족장을 상징하는 권위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일단의 무리들이 발락을 공격했고 그들은 호란한 틈을 타 부족장의 신물을 훔쳤다.
도난당했다는 사실을 후에 알 정도로 적들은 신출귀몰했다. 느닷없는 변고에 발락은 외부에 알려질 것이 두려워 부족의 외부 활동을 금지시켰다.
만약 그때 발락이 다른 부족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만 했었더라도 방비 정도는 했을 터인데 그런 사실을 수치스럽게 여긴 발락은 알리지도 않았다.
결국 칠대부족은 차례로 족장의 신물을 도난당했다. 당시에 입은 피해는 만만찮은 것이었다. 이후 그들에게 몇 차례나 제의가 왔었다.
물론 그때마다 신물을 거래 조건으로 내세웠기에 그들은 혹시라도 신물을 영영 되찾지 못할 것이 두려워 암중인들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그들도 나름대로 대책을 세우려고 나섰다. 하지만 모든 건 미궁에 빠진 듯 묘연하기만 했다. 먼저 그간에 서로 왕래가 빈번하지 않아 정보 공유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대책도 독자적으로 세워 나갔다는 게 문제였다.
“그러던 차에 타이론 족장이 모두를 한 자리에 모이게 했습니다. 신물의 일부 찾았으며 나머지도 찾을 길이 생겼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원흉이 누군지도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때까지도 마땅한 대책도 수립하지 못하고 있던 차였기에 망설이지 않고 그의 초대를 받아들였지요.”
그들을 맞은 것은 마령의 본주에게 제압된 타이론 족장이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마령의 본주가 족장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섯은 그와 생사를 결할 각오로 싸웠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한 패배. 그들은 이후의 기억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못했다. 당시 마령의 본주에게서 마령이 전이되면서 기억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라미레스는 물었다.
“마령의 본주라는 자를 기억 할 수 있겠소?”
용족장은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그가 라만이나 대적자, 마신등과 관련이 있다는 것만 알 뿐, 그 이외의 것은 전혀 모릅니다. 그의 얼굴은 희미했고 형체마저 분명하지 않습니다.
기억나는 건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던 사악한 기운뿐입니다.”
이들은 지금도 당시를 떠올리면 두려움에 빠져든다. 그에게서 받았던 공포감은 지금까지도 그들 일곱을 사로잡은 채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라미레스는 그들에게서 더 이상 얻들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내실을 빠져나가는 족장들의 등에 시선을 준 채 라미레스는 상념에 젖어들었다.
‘그놈이 아바돈의 배후란 말이데…… .지금 또 어디서 어떤 일을 꾸미고 있는지…… 하루 속히 제거해야 안심할 수 있다. 파천이 어느 정도 알아챈 것 같았는데…… 바보같이 그때 알아두는 건데…… .’
그는 당시 파천이 중간계로 들어선다는 것과 광명에 대한 관심에만 집중되어 있어 그 일을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언젠가 만나게 될 자이니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은 것이다. 지금에 와서야 당시의 안일함이 후회되었다.
비행매소를 급히 나온 미스바는 곧장 하룬으로 내려갔다.
그녀가 향한 곳은 사령부가 있는 쪽이었다. 그녀는 예전과는 다른 삼엄한 기운을 감지했다. 사방에서 조여드는 기운은 은밀한 가운데 강렬했다. 그것을 느낀 미스바는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흘렸다.
‘역시 라미레스로군. 이토록 짧은 시간에 이 정도의 변화를 끌어내다니.’
그리고 그녀는 곳곳에 숨어 있는 감시의 눈길을 의식할 수 있었다. 그녀조차 구체적인 위치를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기운은 있는 듯 없는 듯 희미했다. 그녀는 라미레스에게 먼저 알리고자 마음먹었다.
‘어쩌면 이 일로 우리 부족이 곤란을 겪을지도 모른다. 우리 전체가 의심받을 수도 있고 철저하게 외면 받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해야 한다. 나는 케플러의 의지 아래 춤추는 노예가 아니다. 나는 그의 야심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정도로 어리석지가 않다. 잘못된 길인지 의식하지 못하고 빠져들 수는 있다. 하지만 명백히 가려졌음에도 안주하는 건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다.’
“아니 루딘족장 아니시오? 회의도 없는데 사령부에는 무슨 일로 오신 거요?”
그녀 뒤에서 나는 소리였다.
미스바는 뒤에서 반갑게 부르는 이를 확인하고 마주 인사를 나누었다.
“의논할 일이 있어서요.”
“누구와 말입니까?”
“네, 라미레스님과요.”
그녀의 뒤에 나타난 이는 하나가 아니었다. 세 명이었다. 그들은 메덴을 대표하는 세 명의 수련자들이었다.
치앙마가 의혹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라미레스님과요? 비행매소에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겼나요?”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
그녀는 말문을 닫았다. 이들에게 발설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벵골이 그녀의 표정을 살피더니 그러지 않아도 자신들도 라미레스를 찾아가던 길이라며 함께 동행하지고 했다.
미스바는 차마 거절할 수 없어 그들 셋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카포가 다시 물었다.
“우리처럼 배치 조정 문제로 찾아온 건 아닐 거고…… 무슨 일이 있으신가 보죠? 얼굴이 썩 밝지가 않군요. 근심이 있는 듯하기도 하고…… .”
“네, 별다른 일은 아닙니다. 이것저것 의논이라도 하면 좀 기분이 풀릴까 해서요.”
치앙마가 별일 이라는 듯 그녀를 주시했다.
“그와 그처럼 친밀한 사이였는 지는 몰랐군요.”
그녀는 더 이상 대답을 하지 않았다.
미스바와 세 수련자는 라미레스와 마주 앉았다.
치앙마와 카포는 결사적으로 라미레스에게 매달렸다.
“자네 영향력이면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은가 말야. 그러지 말고 좀 해주게.”
카포는 1군단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게 마땅찮았다. 속을 터놓지 못하고 눈치만 살펴야 하는 관계가 어색하고 불편했던 것이다. 겉으로야 많이 좋아졌다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마저 달라진 건 아니다.
“바소름 아래로 넣어주기 곤란하면 사령부에 자리를 마련해주면 되지 않겠나?”
라미레스는 난처해했다.
“자네들 위치를 내 임의로 배정한다면 천주들이 반발할 거야. 그러니 그런 부탁일랑 하지도 말게.”
카포는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그럼 나만이라도 안 되겠나? 야마천주와 지국이 날 아주 갈아 마시려고 벼르고 있단 말일세. 이러다 실수라도 한 번 하는 날이면 낭패를 면치 못할 거야.”
“그럼 실수하지 않으면 되는 거지. 정신 바짝 차리고 열심히 해보게. 노력 분투하는 자에게 적은 없는 법이니.”
“정말 이럴 건가?”
“이해해 줘. 내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그렇게 해주고 싶지만 공과 사를 구분하지 않고서야 어찌 공평함을 주장하겠는가? 그런 약점이 생기면 더 이상 내 정당성을 주장할 수 없고 조정 역할도 불가능해지지.
미안해. 친구 좋다는 게 뭔가? 이럴 때 날 돕는 셈치고 좀 견뎌주게.”
벵골이 허허롭게 웃으며 말했다.
“그럴 줄 알았어. 나야 괜히 따라와 본 거니 상관없지만 내가 봐도 카포는 참…… 안됐단 말야. 쯧쯧, 이를 어쩌나 그래? 마지막으로 기대를 가졌던 라미레스마저 외면했으니 이제 누구한테 가서 떼를 써보나 그래.”
“지금 나 약 올리는 건가?”
“허허, 그럴 리가 있나? 그저 자네 처지가 안쓰러워서…… .”
치앙마는 가만 앉아서 듣고만 있는 미스바에게 물었다.
“의논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 했었던 것 같은데…… . 왜 그러고 있소?”
“네? 아, 네.”
모두의 시선이 주목되자 미스바는 안절부절못했다. 그걸 본 라미레스가 물었다.
“비밀을 요하는 일이오?”
“…… .”
미스바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라미레스가 벵골등에게 자리를 피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들은 썩 좋은 기분이 아니었지만 거부할 일도 아니었다.
세 명이 물러가고 나자 그제야 미스바가 입을 열었다.
“주변도 물려주세요.”
라미레스의 수하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라미레스가 그들마저 물렸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저렇게 긴장하는가?”
“이제 말해보시오.”
라미레스는 그녀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제 얘기를 모두 다 들으신 뒤에 판단을 내려주십시오.”
미스바가 육성이 아닌 영언으로 말해오자 라미레스는 일시 긴장했다.
“보통 사안이 아니다. 이 정도로 신중을 기한다는 건가?”
“말해보시오. 사안의 심각성에 따라 나도 신중하게 처신 할테니.”
미스바는 현자에게서 들었던 얘기 중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부를 상세하게 말했다.
얘기가 진행되는 동안 라미레스의 얼굴은 석고상처럼 딱딱하게 굳어갔다.
미스바의 신중함이 이해가 갔다.
“그럼 케플러의 현 위치를 족장께서는 전혀 모른단 말이오?”
“네.”
“연락을 취할 방법도 없소?”
“없습니다.”
“카발라라는 자의 동태도 모르고?”
“네.”
“알아볼 수는 없소?”
“곁에 함께 있다 해도 제 쪽에서는 알아볼 수는 없습니다.”
“흐음, 그자가 이곳에 있는 건 확실한 사실이오?”
“그렇습니다. 마르쿠제에게서 들은 얘기이니 틀림이 없을 겁니다.”
“비행매소에 있다는 그 자는 대체 어떤 자요?” “모릅니다. 단지 대단한 현자이며 능력자라는 것 밖에는.”
“그런 처지에 용단을 알려 주었군 미스바 족장, 당신의 용기에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오. 이번 정보는 차후에 아주 유용하게 쓰여 질 거요.”
“제가 바라는 건 단 한 가지뿐입니다.”
“말해보시오.”
“제가 이런 걸 요구할 처지가 아니란 걸 알지만…… 들어주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들어주겠소.”
“우리 부족의 미래와 안전을 보장해 주십시오. 그들로 인해 우리는 후에 책임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그때, 라미레스님이 방패가 되어 주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그것이 제 유일한 소망입니다.”
“흐음. 지금으로서는……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 이외에는 장담할 수 있는 게 없구려. 허나, 내 생명과 이름을 걸고 루딘족의 미래를 보장하겠소. 그나저나 카발라라는 자가 이곳에 있다면 드러내놓을 일도 아니구려. 당분간은 비밀로 해야겠군요. 경호를 위해 수하들을 배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당분간은 비밀을 유지할 테니 혹시라도 그자가 찾아오면 태연하게 행동하시오.”
“네, 알겠습니다.”
“그런 후에 그자의 정체를 내게 통보해주면 모든 건 내가 알아서 처리 하리다.”
“네.”
“혹시 모르니…… 앞으로도 극도로 조심하시는 게 좋을 거요.”
“네.”
라미레스는 현자라는 자도 만나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를 통해서 좀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다른 이들의 시선을 피해 그 자를 접촉하는 일이겠군. 그리고 만에 하나 그 자의 심경에 변화라도 있게 되면 미스바가 위험해질 것이다. 할 수 없군. 대책을 세워놔야겠어.’
망각의 강, 지금은 메테우스의 강이라 불리는 곳을 건너 사라졌던, 이로 인해 영자들에게 무한한 신비를 불러일으켰던 첫 수련자 메테우스.
그가 의외의 장소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옛용이 머무는 용천에서 걸어 나온 것이다.
그는 한동안 멈춰 서서 주변을 둘러보는 일에 열중해 있었다. 망각의 강을 건넜던 메테우스는 실제 지금까지 옛용과 함께 거했었다. 그는 후에 봉인을 자처했으며, 용의 지혜를 빌려 스스로의 영격을 완성 해 가는데 충실해 왔었다.
“그 오랜 시간도…… 날 완성시켜 주지 못하는구나.”
그의 독백은 처연하기까지 했다. 그가 망각의 강을 건너기로 작정한 것은 스스로의 한계를 너무도 뚜렷하게 자각했기 때문이었다. 용이 말했다.
“가서 영자들과 함께하라. 그들을 도와 자유를 누림이 원만하게 하라. 그들 중에서 마지막 완성을 향해 나아가라. 지혜의 완성은 인간의 삶 가운데서 성취될 수 있다.”
메테우스의 입가에 모든 일에 달관한 듯한 가벼운 미소가 한쪽 걸렸다.
“그대는…… 함께 가지 않소?” “나는 가지 않는다.”
“왜요?”
“나섬을 스스로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 원만하게 성취된다면…… 다시 돌아와도 외겠소?” “물론 언제든 …… 환영하마. 하지만 그대 스스로 그럴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가겠소. 내 능력이 그들을 자유롭게 할 정도는 아니겠지만 나는 그들 중에 함께 하겠소.
부디…… 스스로를 옭아맨 사슬을 언젠가는…… 끊어낼 수 있기를 바라겠소.”
용은 더 이상 메테우스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메테우스는 용천을 떠났다. 그가 떠난 직후 또 하나의 존재가 용천을 벋어난다. 그는 카란이었다.
그와 메테우스는 옛용과 함께 있었지만 서로는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느낌으로나마 둘은 항시 서로를 느꼈지만 굳이 만남을 가지려 하지는 않았다.
용의 도움을 받아 봉인을 한 자들은 의식만이 자유로울 뿐이고 육체의 제약 가운데 머물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분명히 인식하고는 있었지만 그런 것에 관심을 나타내거나 집착하지 않았다. 모두는 완성으로 이르는 길에 정진해 왔으며 영계가 위기에 닥친 지금 다시 세상으로 나오고자 봉인을 풀었다.
그들 중 하나도 완성을 이룬 자는 없었다. 그들이 얻고자 하는 물음들은 그들 안에서만 맴돌았다. 수많은 의문들을 극복하고자 애썼지만 용의 지혜를 빌려서도 풀길이 없었다. 그들은 더 강해졌는지는 모르지만 실상은 세월을 낭비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도 가지고 있었다.
카란은 메테우스가 먼저 세상으로 나갔다는 말을 듣고 용에게 물었다.
“그가 달리 남긴 말은 없었습니까?”
그는 예전 그레고스와 함께 옛용에게서 수련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에게 옛용은 스승과도 같은 존재였다. 하긴 봉인에 든 자들치고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없었다.”
“지금가면…… 다시는 못 뵐지도 모르겠군요.”
“아직도 인연에 집착하는 네 성정은 여전하구나.”
“…… .”
“서둘러라. 지금의 상황이 썩 좋지가 않다.”
“나 하나의 서두름이 무슨 도움이 될까요.”
“그렇지 않다. 그런 노력들이 모여 더 큰 하나를 이루니 염원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냥 이대로 잊혀졌더라면 더 좋을 뻔 했는데…… .”
“그들은 한시도 너희들에 대한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더욱 견고해지고 커졌다. 너희가 할 일이 많을 것이다. 동참하라. 그리고 생명을 바쳐 부족함을 채워라.”
“가겠습니다. 언젠가 될지 모르지만 만약…… 돌아오게 된다면…… 다시는 이곳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네 영혼에 새겨지는 약속을 함부로 하지마라. 넌 다시 돌아올 필요가 없을 거야.”
“그런가요?” 무한계의 칠대부족과 전사들에게는 여전히 뛰어난 지도자로 각인되어 있는 카란. 무한계의 절대강자였던 카란도 봉인을 풀고 세상으로 나왔다.
그도 용천을 떠났다.
무한계의 너른 대지를 밟고 걸어가던 카란은 감회가 새로웠던지 하늘을 바라보는 시선에 애잔함을 담고 있었다.
‘이곳을 떠난 지가 언제였던가? 그간 내 안에서 날 괴롭히던 생각들 모두가 부질없음을 깨달았다지만…… 그것이 과연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 하나조차 감당하지 못해 버거워하는 내가 과연 영자들에게 무슨 힘이 될 수 있을까? 힘을 힘으로 막아낸다 해서 될 일이 아니잖은가?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기회마저 박탈하려는 자들만은 막아내야 함이니. 과연 우리들의 연합된 힘으로 그들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인가?
카란은 옛용에게 현재의 영계 상황을 빠짐없이 들은 상태였다.
‘메테우스, 너도 이 길을 걸었겠지.’
그는 메테우스를 생각하고 있었다. 한때 그의 살아감의 목적이 되었던 존재. 소중함이 컸던 만큼, 애정이 컸던 만큼 배신감과 절망감도 컸었다.
그에 대한 미움은 많이 가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정의 찌꺼기까지 제거해내지는 못했다.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는 멀리를 내다보고 있었다. 시선의 끝자락에 언덕을 짓누르며 버티고 선 바위산이 보였다. 그 정상에 희미한 그림자 하나.
카란은 그를 구별해 내고 숨을 들이켰다. 호흡을 천천히 고르며 바위산의 정상을 향했다. 메테우스였다. 그가 카란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둘은 마주쳤다. 메테우스가 마음을 열었다.
“오랜만이로군.”
“그렇군.”
메테우스는 카란을 시선 안에 담아두고 있었지만 카란은 비스듬히 산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란의 옆모습에서 메테우스는 극복되지 않은 고독감을 느꼈다.
“아직도…… 날 원망하는가?”
“아니. 모두 잊었어.”
정말 그럴까? 사실이 아니었다. 카란은 여전히 그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나에 대한 네 믿음이, 신뢰가…… 나에게는 부담이었다.”
메테우스는 그렇게 속마음을 열어 갔다. 카란이 그제야 메테우스를 바라본다.
“부담? 그래. 그럴 수도 있었겠지.”
“영자들의 기대가 내게는 부담이었다. 능력 밖의 기대를 받는다는 것만큼 괴로운 일도 없다. 그래서 난…… 떠날 수밖에 없었다.”
“굳이 지금에 와서 이런 얘기를 해봐야 소용이 없다. 나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던 일이니까. 망각의 강을 건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내가 생각했던 건 단 하나. 네 좌절감이었다.
이상한 일이긴 했지만 당시 나도 같은 좌절감은 느꼈다. 네가 모든 걸 포기했다는 걸 들었을 때 나 또한 내 삶이 거기서 중단되는 경험을 했다.
그래, 네 말대로 난 네게 과도한 기대를 했던 건지도 모르지. 내가 섭섭했던 건 네가 내 동의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뜻을 일방적으로 꺾어 버린 네 독단 때문이 아니었다.
벌써 잊었나, 메테우스.
난 친구인 널 섬길 존재로, 주인으로 인정했었고 충심을 다했다. 넌 내게 너무도 큰 거인이었다. 네가 완성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본다는 건 내게 더할 수 없는 보람이었고 기쁨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네게 나는 그다지 중요한 의미가 아니었던 거야. 네가 지닌 힘겨움을 함께 나눌 만큼의 신뢰도…… 주지 못했던 하찮은 존재였던 거지.
그것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두지만…… 난 잊었다. 이제는 그런 과거의 일에 매여 있고 싶지 않다. 너는 내게서 떠났고 난 널 보냈다.”
“그리고 지금…… 다시 만났지.”
“후후, 그래. 다시 만났지.”
“한 가지만 묻자.”
“……?”
“나는 여전히 네게…… 친구인가?”
카란은 메테우스의 눈 속을 깊숙한 시선으로 들여다보았다.
“그런 불음은…… 불필요하다. 널 향한 내 우정은…… 세월로도 감출 수가…… 없더구나. 그래, 넌 내 친구다.”
메테우스는 환하게 웃었다. 그는 더 이상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다. 그는 카란을 기다리면서 이 물음이 필요할까를 놓고 고민했었다. 그래도 확인하고 싶었다. 카란이 그랬던 것처럼 그도 상대의 심중이 자신과 같음을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둘은 나란히 바위에 걸터앉았다. 카란이 근심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과연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나?” “그럴 수밖에.”
“그들이 강하다지만 우리도 강하다. 그들은 죽이고자 하지만 우리들은 죽고자 한다. 잠시 진다고 해서…… 이기지 못한다 해서 그들이 옳은 건 아냐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그래도, 그래도 이기고 싶다. 난 그들에게 지고 싶지가 않다.”
“생령의 얘기를 들었다.”
“그래, 나도 들었지. 네 생각은?” “글쎄…… 생령이 광명을 얻는다는 건 솔직히…… 기대할 수 없는 일이긴 하지. 그런데 냉철한 옛용마저 내심 기대하는 걸 보면…… 뭔가 특별한 구석이 있는 존재겠지.”
“그렇게라도 되었으면 좋겠군. 그렇게 되면…… 완전자에게만 허락된 광명이 최초로 현세에 등장하는 건가?”
“광명. 대체 어떤 것일지 나도 궁금하긴 하군. 완전자의 길. 너무도 멀고도 먼 길. 언젠가는 이르게 될 것이란 아득한 희망만으로는 그 실체는 너무도 멀리 있어.
광명이라도 본다면 다소 위안이 될까?”
“그럴지도 모르지. 완전에 이르는 길을 포기한 자들까지 다시 희망을 가져볼지도…… .”
“그런 걸 바라는 걸 보니…… 우리는 아직 멀었군.”
“허허, 그걸 이제 알았나?”
“봉인한 자들 중 완전에 이른 자가 단 하나도 없다는 건 솔직히…… 좀 충격적인 일이야.”
영자들에게 알려진 것과는 다른 의미였다. 완전에 이르길 거부한 것이 아니라 완전에 이르고자 봉인 했다는 의미였다.
옛용의 지혜를 빌려, 그 도움으로 완전에 이르고자 했던 영자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알게 되었다. 그 시도가 얼마나 부질없었던가를. 완전에 이르는 길은 홀로 감당해야 할 자신만의 몫. 어떤 도움에 의지해서도 단축시킬 수는 없다는 걸 깨달았다.
옛용의 고뇌를 이해하지 못했던 자들은 이제야 그가 바라보고 서있는 한계의 벽이 얼마나 두터운지를 알게 되었다. 그의 좌절이 어느 정도의 깊이를 지니고 있는지를.
그들은 봉인을 풀고 나타날 다른 동료들들 기다렸다. 옛용은 그들을 받아들이면서 두 가지 의도를 품었다. 하나는 그들의 봉인을 도와 정진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그들은 서로 도움을 주고 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또 하나는 영계에 닥칠 위기에 대비하고자 함이었다. 지금의 우기를 옛용은 오래 전부터 감지해 오고 있었으며 대책을 강구하고자 애썼다. 바로 그 시점이었다. 그런 때에 무한계 절대자들의 봉인은 그가 피할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어쨌든 결과만으로 따져 놓고 보면 봉인한자들은 더 강해졌기에 이런 옛용의 의도만은 성공적으로 평가되어도 좋았다. 그렇지만 옛용도, 봉인한 자들도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봉인의 선택이야말로 오히려 그들의 정진을 지연시켰으며, 그들의 부재가 현 상황을 잉태시키는 한 축을 감당했다는 점이었다.
메테우스와 카란은 저 멀리서 하나 둘씩 나타나는 자들을 인식했다. 그들은 소수였지만 하나같이 초강자들 이었다. 그들은 다시 만났다. 새롭게 맞게 될 운명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들은 근심을 지웠다. 각오를 새롭게 헸다.
그레고스와 메테우스, 카란이 만났다.
그들이 기다려 만난 이들은 메테우스와 카란 이후에 스스로를 봉인시켰던 무한계의 강자들이었다. 그들의 수는 많지 않았지만 그 힘은 그런 한계를 뛰어 넘어 있었다.
이들의 등장으로 무한계는 온전한 전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 그동안 무한계가 지니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던 잠재력은 더 이상 가능성의 영역이 아니었다. 눈앞에 나타난 현실이 되었고 그 힘은 영계 사상 최강이었다.
천상계와 선계의 힘은 이런 무한계에 비한다면 오히려 부족하다. 진정한 영계의 핵심 전력은 천상계나 선계가 아닌 무한계임을 확정하는 순간이었다.
“오늘을 위해 우리가 할 바는 다 했소. 그대들의 능력이 더해지면 연합군은 막강한 전력을 보유하게 되겠지요. 그 힘은 마계나 제왕의 군대와 필적할 것이오. 여러분들의 선택에 수호자나 옛용의 개입이 있었지만 지금부터는 아닙니다. 오직…… 우리들의 힘과 용기만으로 적들과 마주서야 합니다.
지금 연합군은 사분오열되어 있습니다. 예전 천상계에서 분리되어 무한계를 열었던 때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자존심에 상처 입은 거인의 비참한 모습만이 남아 있을 따름이죠.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우리는 아바돈의 배후를 치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들의 퇴로를 차단시켜 완전히 괴멸시키고자 했지요.
하지만…… 현재 그들의 위치는 파악되지 않고 있고, 그들은 현 국면에서 교묘하게 빠져나갔습니다. 마계와 제왕의 군대만이 우리 앞에 남아 있습니다. 마계와 제왕의 군대만이 우리 앞에 남아 있습니다.”
그레고스는 옛용이 미처 하지 않았을 만한 얘기들만 간추려서 핵심을 짚어 나갔다.
“하나는 파천이 광명을 얻느냐, 아니냐로 인한 변수. 또 하나는 비밀차원에서 어느 정도로 개입할 것이냐의 변수. 이 두 가지 사실은 하나와 거의 다름없습니다. 파천이 광명을 얻게 되면 비밀차원은 전면에 등장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럴 때 메타트론이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또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다행히 사태를 제대로 파악한다면 힘을 합해 비밀차원을 먼저 방비하고 이후로 모든 관계를 미뤄두겠죠.
하지만…… 그는 독자 노선을 걸을 수도 있습니다.
파천이 광명을 얻지 못할 경우. 이때는 메타트론의 영향 아래 있는 제왕과 루시퍼를 동시에 상대해야 합니다. 아바돈을 염두에 두고서 말이죠.
이 경우에도 비밀차원의 개입이 어느 선에서 조정될지에 따라 여러 가지 상황으로 달라질 여지는 남아 있습니다. 현재까지 우리가 지닐 수 있는 최대 전력을 확보해두었으니 더 이상 우리 쪽에서의 변수는 없습니다.”
메테우스가 다른 견해를 보인다.
“최악의 경우라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겠군요. 우리가 막아 내지 못하면…… 옛용이 나설 것이고 그는 망설이지 않고 완전자들의 세상을 열겠지요. 결국 그런 선택은 이 세계의 포기와도 같고.”
카란이 시큰둥한 어조로 반박했다.
“그런 상황까지 가도록 신이 방치하겠는가? 하여간 지금의 전력으로도 이런 염려를 해야 한다는 현실이 참으로 답답한 것만은 사실이군.”
새로 나타난 자들 중 하나가 말했다.
‘세 차원계의 최강자들이 모두 힘을 합하고 있는 시점에도 마계와 제왕의 군대가 벅차다는 게…… 좀 믿기지가 않는군요. 저만해도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거늘.“
그는 분발트라고 불리는 전설적인 강자였다. 화신해서 싸우는데 있어서는 예전부터 최강이라 불리던 인물이었다.
빠르고 강한 화신체를 장기로 적을 아주 손쉽게 제압하고는 했던 자였다. 그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는 지금 생각 같아서는 메타트론과도 싸워 이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레고스는 그의 그런 기대를 여지없이 산산 조각내 버린다.
“그대들이 봉인해 능력을 키워오던 동안 다른 영자들 역시 힘을 길러오고 있었지요. 특히 마계나 제왕의 군대의 드러난 힘은 하룬에 자리 잡고 있는 연합군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루시퍼나 대마신을 예전과 같이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원래가 메타트론의 이단적인 마력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가공했지요. 그 힘에 의지해 힘을 길러온 자들이라 성장 속도를 예측하기 힘듭니다. 듣기로는 천상계 천주들 여섯이 대마신 둘을 당해내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럴 수가…… .”
카라반이 놀라 입을 딱 벌렸다. 거신족 사상 가장 강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한때 비록 지기는 했지만 루시퍼와 직접 싸워본 적도 있을 정도로 명성이 드높았던 자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레고스의 말은 모두를 당황시켰다.
대마신들과 직접 싸워본 적은 없지만 대충 그 능력을 가늠할 기준은 있었다. 라미레스! 그야말로 대마신 중 최강을 다투던 강자였다. 카라반이 말했다.
“예전 라미레스가 강하긴 했어도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
“라미레스도 예전과는 다른 경지에 올라서 있지요. 그라면 대마신들 중 누구라도 하나 정도는 감당해낼 겁니다. 그 또한 진정한 능력의 끝이 어디인지 모를 정도죠.
문제는 다른 이들이 전진하고 있을 때 천상계 천주들은 머물러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소멸을 극복한 뒤 예전처럼 영격 수련에 매진하지 않았지요. 그 결과인 셈이죠.”
“그렇게 된 거군.”
카란은 좀 어이없어했다. 천상계의 천주들이라면 자신들과 함께 으레 영계 최강으로 인정받아 왔다. 현재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었다. 메테우스가 그레고스에게 물었다.
“어떤 순서로 실행해 나갈지가 궁금하군요. 전면에 등장한 채 다른 적들을 기다리는 건지, 아니면 우리들만 따로 움직이는지부터 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
그레고스는 라미레스와 함께 구상한 계획을 그들에게 전했다.
그들은 쉽게 이해했다. 계획에 그다지 빈틈이 보이지 않자 그들 모두는 적극적으로 찬동했다. 거기다 자신들의 생각을 일부 덧붙여 제안하기까지 했다.
모든 계획이 완료되자 그들은 움직였다. 새로운 강자들의 출몰은 누구의 관심도 없는 가운데 은밀하게 이뤄졌다.
마계가 움직였다. 루시퍼의 제안에 제왕이 동의함으로써 얼마간 기다리기로 결정됐었다.
전면전 돌입을 지연한다는 서로간의 합의가 있었고 마계가 먼저 깨트릴 입장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전면전을 노린 움직임은 아니다. 그렇다면 전면전을 노린 움직임은 아니다.
그들은 하룬으로 좀더 가까이 군영을 배치시켰으며, 이후 한 개 군단을 하룬 외곽에 주둔하고 있던 연합군에게로 진격시켰다. 루시퍼의 지시가 아닌 헤르파의 독단적인 결정이었다. 그는 7군단을 직접 지휘해 외곽 지역을 두드렸다. 헤르파의 주위엔 언제나 처럼 라아그와 헤렘, 라넷이 함께 있었다. 그들의 진로를 제일 먼저 막아선 것은 연합군 제 1군단이었다. 둘의 접전은 몇 차례에 걸쳐 계속되었다. 이 같은 결과는 웬만큼 치열해지려 하면 헤르파가 퇴각 명령을 내리곤 했기 때문이다.
헤르파의 의도는 명백했다. 연합군의 전력을 알아보고자 하는 시도였다. 어느 정도 파악이 끝났다고 판단한 헤르파가 군대를 시계권에서 물렸다. 연합군 측의 지휘자였던 1군단장 야마천주는 몇 번이나 사령부에 진격하기를 주장했다. 해볼 만하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마계군이 물러난 것에 한껏 고무되어 지금 마계와 전면전을 치러도 승산이 있다며 확신에 차 부르짖었다. 하지만 사령부의 판단은 그와 달랐다. 그들의 움직임이 상당히 제한적이었고 여전히 전력을 기울인 듯 보이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로메로는 마계의 지휘부 생각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전력 탐색에 불과하다며 야마천주의 제안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모여든다. 소리 없이 은밀하게 흐르는 실개천처럼 이름 없이, 그럴 듯한 직위도 없이 무한계를 떠돌던 나약하고 힘없는 영자들이 어디서부터인지 자꾸만 꾸역꾸역 몰려들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을 강제로 내몬 이는 하나도 없었다. 투덕거려도 좋으니 나가서 칼 한 번 휘두르고 엎어져 죽으라고 등 떠민 이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꾸만 하룬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아무런 주시도 받지 못했던 실개천이 강물로 번지더니 급기야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는 너른 바다를 만들었다. 그때서야 모두는 관심을 가지고 움직임을, 대열을, 그 엄청난 광경을 주목해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어느 곳에서도 제대로 환영받지 못했던, 천대받던 하급자들이 산을 부수고 대지를 가르는 초강자도 두려움에 더는 냉혹하고 살풍경한 전쟁판에 자진해서 뛰어들고 있었다.
그 어떤 현자도 이런 현상을 미리 예측해내지 못했었다. 전세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기에 애초부터 제외되었던 영자들이었다. 그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들의 의도는 분명했다.
죽으리라!
내가 살아갈 터전을 내 손으로 지키리라.
단 하나의 적조차 막아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죽음으로 내 확고한 의지를 표하리라.
그것으로 내 존재를 증명하리라.
그 물결은 하룬으로 끝없이 밀려들었고 어느새 주변을 새까맣게 에워쌌다.
말없이 그 현장을 바라보는 하룬의 투사들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울려나오는 가슴 뭉클함을 느꼈다. 자신이 지금 선 자리가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지켜야 할 가치가 있다는 게 이렇게 소중한 것인 줄 그들은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었다.
압도된 산하가 숨을 죽이고 그곳엔 역사와 전통도, 거추장스러운 지위와 체제도 없었으며 오직 인간만이, 자랑스러운 인간의 숭고한 의지만이 빛나고 있었다.
어떤 이는 주먹을 움켜쥐었고 또 다른 이는 눈물을 흘렸다. 고인 눈물을 감추고자 하늘 향해 얼굴을 들었다.
가장 강력한 변수가 예고 없이 등장했다. 이는 마계와 제왕의 군대에 대한 영자들의 절절한 선언이기도 했다. 영계의 영자들이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은 굴복하느니 전멸을 택하겠단 확고부동한 결전 의지였다.
이제 마계든 제왕이든 그들이 영자들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지배할 대상이 사라졌다. 전부를 소멸시켜서 그들이 얻을 가치는 너무도 허무한 것이었다. 마계도 제왕의 군대도 이런 상황에는 아연 당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