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61화 : 메타트론이 물었다, 하룬을 칠 것이냐
메타트론이 물었다, 하룬을 칠 것이냐
중간계를 벗어났다. 대지와 하늘과 천지 사이를 떠도는 먼지조각 하나까지도 파천에게는 새롭게 다가온다.
넓은 가슴을 활짝 내밀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살아 있음이 소중하고 그 소중함이 더 큰 가치가 있는 이유가 눈앞에 놓여 있었다.
‘사라짐은 내 하나의 만족. 여기 두고 온 물음들은 여전히 살아 있다. 하나하나 부딪히며 내 영혼에 새롭게 각인시켜 나가리라.’
“드디어 이 자리에 다시 섰구나.”
수호자도 감회가 새로운 듯했다. 그 동안 기울여 왔던 각고의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 그 결실은 다름 아닌 파천. 광명을 얻은 그의 존재만으로도 수호자는 어느 정도 성과를 올린 셈이었다.
그의 가장 큰 바람은 메타트론에게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었고 그것은 이미 달성되었다.
‘이제 남은 건 광명을 얻은 파천의 행보를 뒤에서 조력하는 것.’
수호자가 물었다.
“어디부터냐?”
파천의 움직임에 대해 수호자가 예상하는 범위는 두 가지였다.
옛용을 만나는 것과 스스로 존재하는 자들을 저지시키는 것. 그 두 가지 중에 하난 우선 될 거라 예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파천의 생각은 전혀 다른 듯했다.
“먼저 하룬으로 간다.”
‘그랬던가?’
수호자는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사람에 대해 모르겠다고 고백한 것은 메타트론만의 심정은 아니었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완전을 놓아버린 이유가, 그 사랑이 어디에서부터 확장되는지를 수호자는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파천의 관심은 하룬에 집중되어 있었다. 거기가 출발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분명하게 파천의 심장 안에서 재확인되고 있음이니.
파천은 손을 들어 어깨 위에 앉아 있는 아그립바를 쓰다듣는다.
“크하하하, 기다린 보람이 있었음이야. 널 다시 보게 될 줄이야. 기적이로세, 기적이야.”
파천과 수호자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달려갔다.
까마득한 점이 급격하게 확대되고 그건 이내 한 사란의 건장한 사내를 형상화한다.
망토를 펄럭이며 나타난 이는 거만한 표정에 살기까지 두르고 온 상여락 이었다. 지독한 살심은 얼굴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증오의 대상은 보나마나 파천일 게 분명하다.
파천은 상여락을 곧바로 알아보았다. 한 발 뒤에 처져 있던 수호자도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누구인지 알겠는가?”
“상여락이로군.”
“그렇지. 바로 맞혔어. 너로 인해 좌절을 맛봐야 했던 바로 그 상여락 이야. 뜻밖이냐? 네게 복수하기 위해 칼을 갈아 왔음이 진정 뜻밖이더냐?”
“복수란 말인가? 그렇군. 자네에겐 내가 복수의 대상이었군. 얼마 살지 않은 생에서도 이런 인과는 생기는 거였어. 두려운 일이야. 자네는 자네의 삶이 그토록 무가치했던가?”
“무슨 헛소리냐?”
“지난 생에 매달려 현생마저 낭비하고 있으니 하는 말이지. 자신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알 일이야.”
“내 힘이 모자라 네게 패했다. 모든 걸 다 가질 수도 있었는데 너로 인해, 그래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좌절해야만 했다.
나는 그것이 너무도 분하고 억울했다. 이제야말로 널 넘어서서 내가 너보다 뛰어난 존재임을 입증해 보이겠다. 널 넘어서지 않고서는 내 존재 의미를 찾을 수가 없다.”
그의 생각은 누구의 권유도 가르침도 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삐뚤어져 있었다.
상여락이 종말을 고했을 때 상천일이 보았던 눈물의 의미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뉘우침의 의미가 아니라, 헛된 욕망의 덧없음을 한탄하는 고백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가 좌절된 분노의 표현이었던가?
상여락은 그 동안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마지막 찌꺼기까지 토해 내려는 듯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영자들이 모두 지켜보는 데서 처단하고 싶은 게 솔직한 바람이지만 그것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토록 이나 대단하게들 생각하는 광명이 얼마나 하잘 것 없는 것인지 보여주고 싶지만 흐흐흐, 제 하나의 좌절이면 족하다.
이후 난 내 힘만으로 영계에 새로운 역사를 써나갈 것이다. 그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절대의 성지를 내 힘만으로 건설할 것이다.”
“상여락”
“말해 봐라. 마지막 유언쯤으로 들어주지.”
수호자의 얼굴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저렇게 앞뒤 상황 구분 못하기도 쉽지 않을 텐데. 어떻게 하면 저렇게나 자신의 능력을 과신할 수 있는 거지?’
파천은 말했다.
“진실에 대하여 눈을 돌릴 수는 있어도 네 마음만은 속일 수가 없다. 네 의지가 스스로 판단하기에도 부끄럽지 않았나? 네 욕망이 떳떳했던가를 먼저 생각해 보라. 그리고 네 복수의 의지가 어디서 기인하여 어디를 향해 있는지도.”
“하하하, 고리타분한 소리로군. 너 그것 알고 있느냐?”
“……?”
“너 많이 변했다. 그래 변하긴 무척이나 많이 변했어. 그런데 말야, 아주 지저분하게 변했어. 예전엔 그래도 솔직하기라도 했지. 지금은 영 아니군. 우리 좀더 솔직해지자고. 너나 나나 추구하고 있는 욕망은 똑같아. 단지 그걸 획득해 가는 과정이 달라 보일 뿐이다.
난 내 마음을 속이지 않는다. 선,악? 그딴 건 개에게나 줘라. 아참, 여긴 개가 없지? 크크크.”
상여락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혼자서 키득거리며 한참을 웃었다. 그러다 두 눈을 무섭게 치켜뜨며 발악하듯 외쳤다.
“날 봐라. 난 힘을 추구한다. 난 지배하길 원하지 지배받고 싶지 않다. 내 삶을 내 손으로, 내 의지로 하나씩 만들어 간다. 그래서 신도 날 벌할 수 없다. 난 고아와 같다. 내 위에 버티고 선 모든 존재를 부정하는 순간, 나는 자유를 느꼈다. 그래, 신선한 자유였어.
이제 나는 신이 될 수도 있다. 그보다 내 힘이 월등해지면, 내 능력이 앞선다면 그렇게 될 수도 있다. 크고, 멋지지 않은가! 인간계가 지금 존재하나? 그 세계를 신이 지켜주었나? 결국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진리는 약육강식이야. 힘 있는 자가 모든 걸 차지하고 누리며 존귀해진단 말이다.
그래서 난 널 원망하지 않는다. 단지 내 시작을 알리는 거룩한 의식으로서 네 소멸ㅇ르 택한 것뿐이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나무는 그늘 또한 한쪽으로만 드리운다. 이 나무는 곧 잘리고 새로운 나무가 심어지겠지. 항상 네가 옳다고 믿는 반대편도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잘못된 생각 아래 결박시켜 놓은 것도 너 자신. 네 의지의 선택이었으니 원망함은 옳지 않다.
그렇지만……기회는 아직까지 문을 닫아걸지 않았다. 마음을 돌이켜라.”
“흠, 무척이나 자비롭군. 아니면 내가 두렵나? 꼬리를 내리다니 실망이야. 이기는 자가 정의다. 이번에도 네가 이긴다면 네 말이 옳다고 인정하마. 흐흐 어떠냐? 이제야 좀 싸울 맘이 생기시나?”
이때 수호자가 개입했다.
“저자는 마령에게 조종당하고 있다. 저자의 눈을 통해 마령의 본주가 이곳을 주시하고 있는 셈이지. 파천, 네가 하기 힘들다면 내 손에 맡겨라. 저런 자는 한시라도 빨리 소멸시켜주는 게 도움을 주는 일이다.”
파천은 가만있었다. 그의 동공은 상여락의 눈 속을 지나 다른 존재와 대면하고 있었다. 파천이 말했다.
“너를 처단함이 내 첫 발걸음이 될 것이다. 확신에 서지 않은 자가 다른 이를 이끌 수 있겠는가. 먼저 널 돌아보고, 네 가는 길이 어디에 서 있나를 판단하라. 네 죄가 남의 발도 더럽히고 있음이니 그 악의적인 인도함이 네게 화가 될 것이다.”
상여락이 아닌 마령의 본주를 향한 파천의 경고였다. 이때 상여락의 얼굴에 첫 변화가 보였다. 얼굴 주위를 가득 메운 화염의 그림자는 마령의 기운이 골수에까지 미쳤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의 두 손이 정면 앞에 우뚝 멈추더니 무엇인가를 꽉 움켜쥐는 시늉을 했다. 상여락의 입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음성이 흘러나왔다.
“파천, 광명을 얻은 것을 축하한다. 너는 그것으로 메타트론과 비밀차원을 상대하겠지. 그때까지 네 생명을 유보시켜주마. 내 앞길을 평탄케 하니 내 어떤 수족보다도 훌륭한 조력자가 아니겠는가?
광명을 보여라. 그 위력을 보여라. 네가 지닌 광명이라면 상여락쯤은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안심하지는 마라. 그는 내 능력의 일부일 뿐이니.”
상여락의 움켜쥔 두 손 사이에서 희미한 형체가 빛을 발한다.
“투명검!”
수호자가 먼저 놀라 부르짖었다. 파천의 얼굴에도 의외라는 기색이 완연했다.
상여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본주, 끼어들지 마라. 네가 내게 힘을 줬다지만 그 영향은 여기까지다. 이제부터는 나의 일이다. 광명마저 내 것으로 만들어 너마저 무릎을 꿇게 해주겠다.”
상여락은 마령의 본주에게 완전하게 제압되어 있는 건 아닌 듯했다.
“파천, 자, 시작하자. 어서 광명을 내보이거라.”
파천은 한 가지 생각이 번쩍 떠올랐다.
‘저들의 생각을, 이 상황을 역이용한다면 좋은 기회를 만들 수 있다.’
파천은 수호자에게 자신의 생각을 짧게 전했다. 수호자는 감탄했다.
파천이 한 손을 허공으로 들어올렸다.
번쩍
“그, 그것이 광명인가?”
“으음.”
상여락에게서 두 사람의 음성이 동시에 토해졌다.
파천의 손끝을 따라 거대한 빛의 기둥이 허공중에 둥둥 떠 있었다.
거의 십장이나 됨직한 크기의 금빛 기둥은 완전한 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상여락의 고개가 십 장 높이에 위치한 검극을 쳐다보다 다시 파천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대단……하군.”
파천이 만들어낸 검은 연신 밝은 빛을 사방으로 뿌려댔다. 보기만 해도 고개가 숙여질 정도로 위압스런 전경이었다.
상여락은 자신도 모르게 몇 걸음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좋아, 그 정도는 돼야 내 투명검을 받을 자격이 있지. 아쉽군. 영계 역사상 이런 대결이 있었던가? 보는 자들이 없으니 아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어.”
상여락은 자신이 있었다. 아무리 광명이라도 투명검만은 어쩔 수 없으리란 확신!
그건 신앙에 가까운 신념이었다. 그를 여기까지 이끌어 온 동기이기도 했으며 지금껏 지탱시켜 온 근원이었다.
그런데 조금씩 흔들린다. 파천이 만들어낸 어마어마한 광명의 위용 때문만이 아니라 파천의 변함없이 고요한 태도 그리고 곧이어 몰려들기 시작한 형체 없는 압력, 그 앞에서 한 없이 초라해져 가고 있었다.
두 발을 넓게 벌렸다.
‘한 번에 끝난다. 지든 이기든 단 한 번의 부딪침이면 족하다.’
상여락은 어금니를 갈아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힘주어 물었다. 두 손에도 자연 힘이 들어갔다.
“후우, 준비는 됐겠지?”
파천이 아니라 자신에게 한 질문이기도 했다. 수호자의 어깨에 옮겨 앉은 아르립바의 표정에도 근심 따위는 없었다. 수호자는 말할 나위 없었다. 파천은 대답대신 빙긋 웃었다. 언제든지 시작해 보라는 뜻이었다.
상여락의 작게 흔들려가던 시선이 투명검에 머물렀다.
‘그래 막을 수 없음에야. 이건 누구도 방비할 수 없다.’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아먹자 풀 죽었던 상여락의 기세가 금세 되살아나고 강력한 기운이 그의 전신을 감싸며 사위로 퍼져 나갔다.
이에 반해 파천에게서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죽여주마. 죽여서 네 이름을 이 땅에 묻어두고 떠나리라.”
최면이라도 거는 양 중얼거리던 상여락의 눈이 뚜렷하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변화를 보인다. 결심을 굳힌 것이다.
“죽어라!”
스스스스스
투명검은 곧장 늘어나기 시작했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갈대 잎처럼 이리저리 흔들린다.수풀 속을 기어가는 뱀이 빳빳이 쳐들고 다가오는 듯도 보였다.
수호자는 파천의 곁에서 그 전경을 숨죽이고 쳐다보았다. 아그립바는 투명검이 늘어나는 순간 두 눈을 감아버렸다. 그는 차갑고 섬뜩한 살기가 동공을 파괴시키는 듯한 경험을 했다.
‘기분이 나빠.’
아그립바가 느낀 본능적인 감정처럼 투명검은 확실히 예사롭지 않았다.
첫 번째 나타난 현상은 투명검이 조금씩 다가올 때마다 주변의 전경이 확연하게 달라졌다는 점이었다.
빛을 삼켜버린다. 주변의 모든 빛을 모조리 빨아들이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점차 커져갔다.
막대한 압력마저 뿌리며 다가오는 투명검은 이제 희미한 형체마저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파천의 영안은 뚜렷이 그 움직임을 살피고 있었다. 투명검의 압력 따위는 그에게 아무런 장애도 아니었다.
스팟
파천은 투명검이 자신의 머리를 향해 쏘아져 들어오는 걸 명확하게 살필 수 있었다.
파천의 입가에 머문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손이 슬쩍 아래로 내려온 것도 바로 그때였다.
“됐다.”
상여락은 희열에 차 부르짖었다. 파천의 머리통을 투명겸의 검극이 관통해버린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겼다, 이겼어.”
상여락은 파천의 손끝에서 시작된 광명검이 자신이 딛고 선 대지를 양단해 오는 걸 보지 못한 듯 기뻐했다. 그런 것쯤 안중에도 없었다. 당연히 멈출 것이라 여겼다.
파천의 모습을 살펴 가던 상여락의 두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커진다.
“뭐, 뭐야?”
그리고 광명검의 움직임에 시선의 초점을 급하게 맞추었다. 여전히 맹렬한 기세로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검의 형상을 상여락은 두려움이란 최초의 인간적인 감정을 담고서 노려본다.
“아, 안 돼”
파천의 입이 열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임을 잊지 마라.”
“커억.”
그 거대한 검신이 땅 속으로 파고들었음에도 어떤 흔적조차 남지 않는 게 신기했다.
아그립바는 어느 새 감았던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는 상여락의 상태를 살폈다.
변화가 없었다. 당연히 두 조각이 나 뒹굴고 있을 것이란 아그립바의 예상은 빗나갔다.
휘이이잉
고독한 바람만이 장내를 쓸면서 스쳐간다.
수호자는 어찌 된 연유인지를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령이 제거되었다. 상여락은 영혼이 절단되는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헌데……어찌 파천은 무사할 수 있을까? 분명 투명검이 두 눈 사이를 파고들었는데.’
수호자는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파천은 잠시 상여락을 주목하여 쳐다보다 발걸음을 옮겼다. 막 상여락을 스쳐가던 파천에게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다시는……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마라.”
상여락의 축 처진 어깨가 미세한 떨림을 보였다. 그는 아무런 생각도 이 순간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저 멍하니 믿어지지 않는 현실을 받아들이고만 있었다.
수호자가 파천의 뒤를 따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엔 상여락만이 덩그러니 홀로 남게 되었다.
“모든 게……끝나버렸어.”
상여락의 독백을 지나치던 바람이 휘말아 올렸다. 무릎이 꺾어지고 머리가 땅에 닿았다. 좌절은 죽음보다 고통스런 화인(火印)을 남겼다.
수호자의 질문이 파천에게로 향했다.
“투명검이 분명 네 두개골을 뚫는 걸 보았건만.”
“투명검의 실체는 매우 교묘한 것이었어. 그건 허상이지 실상은 아냐. 하지만 그 효력마저 그러한 건 아냐.”
투명검은 달리 영혼의 검이라고 불려도 될 만했다. 불완전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기 마련인 의심이나 초조, 불안, 슬픔, 두려움, 미움 등의 부정적인 감정을 파고든다는 게 파천의 설명이었다. 효력은 영혼을 일시에 파괴시킬 정도로 치명적이다.
“막을 방법은 없었나?”
“글쎄”
파천은 사실 그럴 생각도 없었다. 자신에게 어떠한 상해도 입힐 수 없다는 걸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막으려고 했다면 방법이 있었을까도 의문이로군.”
수호자는 내심 기가 막혔다.
“희대의 마병인 것만은 확실하군. 부동심(不動心)이 누구에게나 허락된 일이 아니니 마령의 본주는 벅찬 상대가 된 것인가?”
파천과 수호자는 하룬을 향해 떠났다. 그들은 먼저 하룬의 상황을 파악하고 나서 일의 진행순서를 결정하기로 했다.
파천이 광명을 얻었음을 아는 이는 그다지 많지 않다. 극소수에 불과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소식은 금세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천사가 알았으니 천궁에 소식이 전해지겠고, 마령의 본주가 알게 됐으니 스스로 존재하는 자들도 들을 것이다. 메타트론을 통해 어둠의 천사와 루시퍼와 제왕의 군대가 알게 될 건 자명한 사실.
가장 갈망하고 염원하는 입장인 하룬의 연합군이 가장 늦게 알게 될 것이었다.
은밀하게 잠입한 파천과 수호자는 하룬의 정황을 파악하느라 분주했다.
파천은 최선의 방책을 결정하느라 고민했다. 자신의 등장이 어떤 형태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세력 간 대규모 전쟁은 어떻게 해서라도 막을 생각이었고 그럴 수 있다는 확신도 있었다.
전쟁은 또 다른 상처를 남긴다. 더군다나 지금의 대립 구도는 어느 쪽으로 봐도 생존을 보장할 수 없는 위험수위였다.
섣불리 군중을 선동한다는 건 어리석은 일. 과도한 열정은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감상적이고 즉흥적인 충동은 곧장 파멸을 불러들인다. 하룬 곳곳을 누비고 다녔음에도 파천을 발견해내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하룬에 이처럼 많은 이들이 모여 있을 줄이야.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계와 제왕의 군대가 진격을 멈춘 일이야. 참으로 다행이다.’
파천은 이 모든 일이 메타트론의 지시였음을 확인치 않고도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의 개입이 절대적이다. 그가 동조해주지 않는다면 전쟁은 불가피하다.’
파천은 그럴 경우를 생각해보았다.
어느 한쪽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부류를 억압하다보면 반드시 의도치 않았던 희생이 따른다. 그런 순간이 도래하면 그때도 파천은 소멸시킴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나의 개입은 최소화시킬수록 좋다.’
원칙일 뿐이다. 의도와 동일한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모든 상황이 들어맞아 줘야 하는 것이다.
파천과 수호자는 하룬 북부 페이룬트 산의 동굴 중 하나에서 다시 만났다.
수호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전면적인 대결 양상은 지금 상황대로라면 막을 수 있겠으나 문제점은 많군. 지금 하룬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마치 마지막 축제를 준비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비정상적인 들뜸이 있어.
이들의 심리 상태가 이처럼 공황을 맞은 것은 적에 비해 자신들의 전력이 상대적으로 약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일 테고. 비밀차원의 일이 매듭지어진 후가 문제겠는데.”
수호자는 메타트론과의 싸움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것까지 대비한 행보를 진행시켜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장기적인 포석을 준비하란 뜻이었다.
파천의 표정을 설핏 살펴 가던 수호자가 의견을 내놓았다.
“하룬의 곳곳에 봉인을 푼 강자들이 은닉하고 있음이 포착되더군. 그들이 연합군의 지척에 머물러 있다는 건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분위기고.
파천, 어떻게 할 셈이냐? 전면에 등장함이 나을 것 같은데.”
“이유는?”
“복잡하게 얽혀 있는 지휘 체계를 단일화시켜야 할 필요성이 있다. 나아가서 이리저리 분산되어 있는 힘을 하나로 결집시켜야 한다. 또한 너의 등장은 당장 하룬의 영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등불이 되기도 하지. 심리적 안정을 기할 수 있다.
다른 방법으로도 가능하겠지만 효과를 극대화시키기엔 미흡하지. 통제되지 않아 생겨날지 모를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고. 어떻게 하겠나?”
“좀 더 지켜봐야겠어.”
파천의 신중함을 수호자는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파천은 자신의 부재 이후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날 의지하게 해선 안 돼. 저들의 길을 중단시켜서는 더더욱 안 되고. 저들은 내가 자신들과 함께 머물러 있기를 바라겠지. 그건 바람직하지 않아. 도움을 주되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내 영향을 최소화시켜야 한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네가 드러나지 않아서는 더 곤란하다. 광명을 얻은 사실은 메타트론과 마령의 본주를 통해 모두가 알게 된다. 좀 전에도 말했다시피 그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다며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통제하는 것이 오히려 원하는 결과를 앞당길 수 있다.”
파천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시간을 끌어서 좋을 건 없다. 함께 머무는 시간을 줄일수록 좋은 것이다. 하고자 하는 일이 끝나면 미련을 두지 않고 떠날 생각이었다. 좀더 강력한 지도력이 필요하다면 그리고 현재 그 일을 담당하기에 가장 적절한 요소를 자신이 지니고 있다면 물러서 있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의 심려가 깊고 우려가 큰 만큼이나 너무도 명확해 보이는 답변이 내부에서 크게 외치고 있었다.
‘그래, 믿자. 사람들을 믿고 과감하게 추진해보자.’
파천은 결심을 굳혔다. 그와 수호자는 좀더 세밀하게 정황을 분석하고 앞으로의 행보를 의논했다.
메타트론과 루시퍼가 나란히 앉아 있고 그 밑으로 어둠의 천사들과 대 마신들이 동석했다.
메타트론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메타트론은 모두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다 루시퍼에 이르자 시선을 멈추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표정이구나.”
어찌 안 그렇겠는가. 루시퍼는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아름다운 미소를 입가에 만들어내고 있었다.
“어떤 말이든 해봐라.”
루시퍼는 망설임 없이 곧장 입을 열어 갔다.
“제 통치를 허락하신 분은 아버지였습니다.”
“그랬지. 그 사실은 지금도 변함없다. 저들 대 마신들을 네게 준 것도 그와 같은 이유다.”
“제가 어떤 결정을 내려도 막지 않겠다고 하신 분 역시나 아버지, 당신이셨습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비밀차원이 그렇게 두려운 존재입니까? 우리 발을 묶어 두어야 할 정도로 그들의 능력이 뛰어납니까? 파천이 광명을 얻었으니 이제 그들을 방비해야 한다고 하셨습니까?
그래서 힘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고……그렇게 말씀하신 게 맞나요?”
“그래.”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간단하게 해라.”
“네……그러죠. 지금 진군 명령을 내린다면……하룬을 쓸어버린다면……어쩌시겠습니까?”
의외의 질문이었고 태도였다. 어둠의 천사들이 먼저 고개를 쳐들었고 대마신들도 긴장 어린 표정들이다. 메타트론은 한참 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제가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적이 지금껏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요?”
“없었다.”
“대답해 주십시오. 제가 마계의 전군에 그런 명령을 하달한다면 제 앞을 막으시겠습니까?”
“그 전에 한 가지 물어보자.”
“말씀하십시오.”
“마계가 내 권한 아래 있더냐? 내가 주인이냐?”
“…… ”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렇다고 할 수도,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소리쳐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그럴 용기는 없었다.
“아버지께서……제게 주셨습니다.”
“흐음, 그래 맞는 말이다. 이제 네 것이다. 네 것을 맘대로 하는 데 내가 참견할 수 있겠느냐?”
“그럼…… 제 앞을 막지 않겠다는 말씀이군요.”
“아니.”
“……?”
“ 네 것을 네 맘대로 하는 것은 네 자유의지지만 내가 그 앞을 막는 건 내 의지다. 그렇게 하고 싶다면 언제든 그리 하거라. 하지만 경고하건대 행하기 전에 먼저 생각 하거라. 네가 그리 한다면 나는…… 단 하나도 살려두지 않겠다.”
충격이었다. 어둠의 천사들 입가에 의미가 분명치 않은 웃음이 머물고 있음을 루시퍼는 놓치지 않았다. 대 마신들은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들이었다. 메타트론은 계속 말을 이었다.
“너와 나는 주종간이 아니다. 내 의지를 네게 강요할 생각은 없다. 나는 단지 권고할 뿐이다.”
“그렇……군요.”
“명심해라. 난 지금껏 내 눈에 거슬리는 걸 참아 넘긴 법이 없다. 그건……너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이따위 세력쯤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새로 만들어낼 수 있다.
내 관심은 오직 나 하나뿐이다. 너는 내 뜻이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를 살피는 데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지금껏 잘해 왔고 앞으로도 그러리라 믿으마.”
“……”
“왜 대답이 없느냐?”
“당연하신 말씀이신걸요.”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하지만 그런 걸 신경 쓸 메타트론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고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가 루시퍼에게 다시 경고했다.
“행여 파천에게 도발하는 짓 따위는 하지마라. 그는 이제 네 상대가 아니다. 그가 하룬에 있는 한 그가 저들을 지키기로 작정하고 있는 한, 지금 네 가진 힘으론 어림도 없음을 한시도 잊지 마라.
이건 나와 그와의 싸움이다. 내가 그를 이긴다면 네가 모든 걸 가지고 누릴 것이고, 반대의 결과라면 너 또한 모든 걸 잃을 것이다. 지금 너 가진 것이 내게서 나왔듯 이후의 영광도 내게서 나올 것이다.”
파천에 대한 메타트론의 평가를 아무도 믿지 않는다. 하지만 메타트론이 한 말이다. 믿지않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루시퍼는 반발하고 싶었다.
“인정하기 쉽지 않군요.”
“그럴 것이다. 나 또한 그러니. 하지만 승산은 내게 있다. 그가 사람의 마음을 지니고 있는 한, 그는 결코 날 넘어설 수 없다.”
루시퍼는 메타트론의 말을 알 것도 같았다.
“그가 사람이기에 광명을 얻었지만 또한 그로 인해 제 발에 스스로 족쇄를 채울 것이다. 그때를 기다리면 내가 이긴다.
비밀차원은 한 번은 짚고 넘어갔어야 할 존재들. 그들을 홀로 상대하기엔 벅차지만 그와 함께라면 승산은 우리 쪽에 있다.
모든 걸 정리하고 우리 둘의 대결로 결정지을 것이다. 또 다른 궁금증이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메타트론이 약간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마르시온은 왜 이리 늦나?”
어둠의 천사 하나가 황급하게 일어나 대답했다.
“곧 도착할 것입니다.”
제왕 마르시온을 이 자리에 불렀었다. 그에게도 다짐받아 두려는 것이다.
어둠의 천사가 막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제왕 마르시온이 장내에 나타났다. 부리나케 들어오는 것이 꽤나 당황한 기색이다. 메타트론은 활짝 웃으며 그를 반겼다.
“이리로 오라.”
옆에 빈자리를 가리키며 두 팔을 활짝 벌린다. 마르시온은 황송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의 품에 살짝 안겼다 떨어졌다.
착석한 마르시온에게 메타트론이 급하게 말을 꺼냈다.
“그동안 많은 진전이 있었군.”
“이 모든 게 메타트론님의 은혜 덕분입니다.”
“하하, 그런가?”
“오랜만에 뵙게 되니 더욱 반갑군요.”
“후후, 나도 그래. 제왕은 어찌 생각하는가?”
제왕 마르시온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무엇을 말입니까?”
“하룬을 어찌 생각하는가?”
“제게 맡겨 주신다면 단번에 함락시킬 자신이 있습니다.”
“그래? 흐음, 그런 연후엔?”
“네?”
“그대 앞에 무릎 꿇은 자들을 어찌할 생각이지?”
“그야……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해야지요.”
“둘 중에 하나?”
“네, 지배에 순응하거나 죽음. 그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한다면……”
“순순히 따를 것이다.”
“네.”
“자네는 참……단순해서 좋겠어.”
마르시온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대체 무슨 얘기가 듣고 싶은 거야?’
메타트론이 무슨 얘기를 듣고 싶으냐를 따지기 전에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자신을 이곳으로 불렀는가를 따져보는 게 순서였다. 그는 그만 그것을 잊어버린 것이다.
“내가 왜 널 이 자리에 불렀을 거라 생각하나?” ‘그걸 어지 안단 말인가?’
“모르겠습니다.”
“간략하게 얘기하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네?”
“하룬으로 진격하거나 가만있거나. 어느 쪽이 좋은가?”
웬만큼 눈치가 있다면 상대가 뭘 말하고자 하는지 알아채야 한다. 메타트론이 현재 지극히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이고, 그래서 이런 괴팍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무슨 말……씀이신지……”
“내 말이 어려운가? 다시…… 말하지. 하룬을 칠 것이냐, 말 것이냐.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해.”
“그야……”
그는 말을 하려다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어둠의 천사들과 대마신들 그리고 루시퍼의 눈길을 순간적으로 훑었다.
‘분위기가 왜 이래?’
그는 그제야 뭔가 이상하단 생각이 막 들기 시작했다. 하룬으로 향하던 자신이 진격을 멈춰야만 했던 까닭에 생각이 머문 것이다.
‘파천이 광명을 얻었단 말인가? 그래서……지금……’
그의 머리가 순간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야 당연히 메타트론 님의 지시에 따라야지요. 무엇을 원하십니까? 명령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리고는 고개가 부러져라 아래로 꺾어버린다. 메타트론이 대답했다.
“당분간 별도의 전갈이 있을 때까지 움직임을 자제해줄 수 있겠는가?”
“당연하신 말씀을. 저야 늘 메타트론님의 지시에 충실히 따르는 걸 즐거움으로 알고 있습니다.”
“흐음, 고맙군. 그럼 부탁하겠네.”
“부탁이라니…… 당치도 않으십니다. 지시하십시오. 명령하십시오, 그러면……”
메타트론은 매몰차게 그의 다음 말을 끊어버렸다.
“모두에게 다시 한 번 알리겠다. 영계연합군과의 전쟁은 생각지도 마라. 물론 당분간이다. 상황은 언제든 달라질 수 있으니.”
“네.”
“명심하겠습니다.”
메타트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루시퍼와 제왕에게는 더 이상 눈길조차 주지 않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메타트론의 뒤를 어둠의 천사들이 따른다. 그들 모두가 사라지고 나서야 제왕은 크게 한숨을 토했다.
“이거야 원, 날벼락도 어느 정도지. 뭐가 어찌된 영문인지를 모르겠군.”
루시퍼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왠지 서글퍼 보였다.
“결국 파천이란 생령이 광명을 얻었다는 말이오?”
마르시온은 그걸 루시퍼에게 묻고 있는 자신이 더 한심스럽게 여겨졌다.
“그렇소.”
“하, 어이가 없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광명 하나 얻었다고 이토록 호들갑을 떨어야 하다니.”
“……”
대마신들의 표정이 그리 곱지 않다. 마르시온의 어조가 마뜩치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코앞에 먹이를 두고서 으르렁대고만 있어야 하다니 답답한 노릇이로군.”
“좀 전에 그렇게 말해보지 그랬소?”
“흠흠, 그러게 말이오.”
루시퍼는 메타트론이 사라진 곳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넘지 못할 벽. 여전히 높기만 하구나.’
루시퍼는 스스로가 초라하다고 느꼈다. 그런 그를 주시하는 대마신들의 얼굴도 침통하기는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