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63화 : 욕망의 군대 영계연합군
욕망의 군대 영계연합군
매소 하룬이 한바탕 환호성으로 떠나갈 듯했다.
상공을 메운 금빛 막은 성스럽기까지 했다.
그동안 소문으로 나돌던 광명의 실체가 곧 나타나리란 예감을 확인해 가는 영자들.
하지만 그 이상의 변화는 없었다. 그들이 기대했던 파천의 출현은 기대로만 그칠 것인가?
모두가 하늘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시간이 흘렀다. 막은 여전히 하늘 높이 걸려 있었으나 다른 징조가 보이지 않는다. 실망하는 소리가 조금씩 흘러나온다. 그리고 하나 둘씩 하늘을 바랐던 마음을 거둔다.
그들은 언제 그랬느냐 싶게 원래의 모습들로 돌아갔다.
그러나 여기 하룬의 다른 장소에서는 이와는 다른 양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파천!”
“정말 파천이구나.”
“지존.”
“으하하하.”
“돌아왔어, 돌아 왔다구.”
모두가 엉겨 붙었다. 그들은 파천을 둘러싸고 그 동안의 기다림이 헛되지 않았음을 토로한다.
라미레스와 설란, 칠성대덕만을 제외하고 파천의 친인들은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들의 반가움은 어디에 비길 바가 아니었다. 파천이 그런 그들을 찬찬히 훑어갔다. 그들의 기다림의 이유를 알기에, 그동안 그들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의 무게를 알기에 바라보는 시선은 따사롭기만 했다.
“모두들 그 동안 잘 참아주었다.”
그 말이 시작이었다. 소군이 파천의 품으로 뛰어듣다. 그것이 또한 시작이었다. 선수를 빼앗긴 것이 억울한 듯 카이로와 페리칸이 얼싸안고 너울과 각시가 뛰어올랐으며 도나투스가 헤헤거렸다. 점잖은 아난다조차 기쁨을 감추지 못해 어쩔 줄 몰라 한다.
모두는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둘러앉아 있었다. 어느 새 소식을 듣고 달려왔는지 라미레스와 설란, 칠성대덕까지 한자리에 모였다.
연합군 수뇌들은 이 자리에 참석함이 어색했던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라미레스가 말했다.
“광명을 얻었구나.”
확신이었다. 파천이 다시 나타날 단 한 가지의 경우. 광명을 얻은 것에 대해 의심을 하지 않는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메타트론이나 수호자처럼 보여 달라고, 확인시켜달라고 하는 이가 단 하나도 없다. 파천이 말했다.
“그래. 얻었다.”
설란의 눈에 눈물이 핑 돈다. 라미레스가 들떠서 소리쳤다.
“이제 시작하는 거냐?”
“그래.”
왠지 파천의 음성이 잦아든 것이 이상해서일까? 라미레스가 신중하게 물었다.
“어디부터지?”
라미레스의 물음은 어디부터 쳐부술 거냐는 질문이었다. 그런 점에서 파천의 대답은 엉
뚱했다.
“여기부터다.”
라미레스가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과는 달리 칠성대덕은 빙긋 웃기만 한다. 다들 궁금해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여기 하룬에서 시작해서 하룬에서 마친다.”
아난다가 입을 연다.
“무슨 뜻이지요?”
“너희들의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모든 건 가려져야 한다. 그 행위에 합당한 대가가 따르겠으나 뉘우침이 있다면 누구라도 용서받을 수 있다. 돌이키려는 자의 용단마저 거절해서는 안 된다.”
라미레스가 침울했다.
‘용서. 용서라고? 네 입에서……그런 말이 나오다니. 벌써 잊은 거냐, 파천. 그런 거냐? 그때의 맹세를 벌써 잊은 거냐?
라미레스의 이런 심정을 공유하는 자들은 카이로와 페리칸 그리고 소군이었다. 인간세에서 파천과 함께 했던 자들. 그중에 소군이 나섰다.
“루시퍼와 대마신, 마계는……물론 빼놓고 하시는 말씀이겠죠?”
모두는 파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파천의 표정엔 한 점의 변화도 없었다.
“그들이라고 다를 리가 있겠느냐. 기회는 공평하다. 잘못이 클수록 정화하기 위한 고통도 더 크다. 진정 그리하겠다면 아무도 그들을 벌할 수 없다.”
소군은 발작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어느새 그녀의 큰 눈은 물기로 흠뻑 젖어 있었다.
“안 돼요. 그 짐승 같은 자들을 용서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그자들은 대가를 치러야 해요. 그들이 한 짓을 생각해보세요. 그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에 빠졌는지를. 그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용서받아서는 안 돼요.”
라미레스가 맥 빠진 음성으로 말했다.
“소군, 염려하지 마라. 그런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놈들이 어떤 놈들인데 죄를 뉘우치겠느냐? 그들은 후퇴를 모르고 후회도 모른다.
모두는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마계의 마신들이 자신의 행위를 뉘우친다는 건 상상조차 가지 않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모두는 이 순간 한 가지 사실만은 인정해야 했다.
파천이 달라졌다. 적에게 베풀 자비 따위는 없다고 소리쳤던 예전의 그가 아니다.
대덕이 조용한 어조로 물었다.
“하룬에서부터 시작하신다는 말씀은 혹……어긋난 길을 바로잡겠다는 뜻인지가 궁금하군요.”
“소수의 그르침이 모두를 어긋나게 했다. 소수의 욕심이 다른 길을 만들었다. 본질을 회복시켜야 한다. 단지 제시할 뿐이지만, 선택은 여전히 자신의 몫이지만 내가 할 바를 할 뿐이다.”
대덕의 얼굴이 환해진다. 그녀가 원하던 대답이 파천에게서 나왔기 때문이다.
‘힘에 의한 정복은 무의미하다. 두려움으로 통치함은 차선일 뿐이다. 내 근심이 한낱 기우였을 따름이야.’
파천이 선발대원들을 향해 선언하듯 말했다.
“선발대는 먼저 가는 자들이다. 먼저 가서 보이는 자들이다. 너희의 역할이 지대하다. 잊지 마라. 선발대를 지켜보는 자들이 있음을 항시 잊지 마라.”
선발대! 파천의 말처럼 과연 그런 의미가 있던 이름일까? 그 누구도 이런 생각을 가진 이가 없을 것이다. 선발대는 연합군에서조차 냉대 받고 있지 않던가!
“선발대가 완전하게 위용을 갖추는 때야말로 어둠이 물러갈 때다. 너희의 진군이 온 땅에 전해질 때 비로소 평화의 노래가 퍼질 것이다.”
모두는 파천의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설란은 파천의 말을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선발대의 현재는 초라하다. 그런데도 굳이 저런 말을 하는 건 단지 용기를 북돋워주려는 이유만은 아니 것 같은데……필시 다른 복안이 있음이 분명해.’
파천은 더 이상 그 부분에 대한 언급을 피했다. 그는 선발대원들과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어떤 질문에도 망설임 없이, 숨김없이 대답한다.
“그렇다. 비밀차원이 먼저다. 그때까지는 마계도 제왕의 군대도 함부로 경동하지 않을 것이다. 메타트론의 약속이다..”
라미레스는 아바돈이 신경 쓰였다. 그들을 먼저 제거했으면 하는 게 솔직한 바람이었다.
더 이상 마계와 제왕의 군대를 견제하지 않아도 된다면, 안전이 확보되었다면 지금이야말로
아바돈을 섬멸할 기회였다.
“아바돈은?”
“그들은 비밀차원의 하수인. 그들 또한 예외가 아니다.”
“놈들의 위치를 모른다는 게 문제지.”
“계획대로만 된다면 알아낼 수 있을 거야. 그들의 위치가 파악되는 즉시 함께 떠난다.”
“선발……대와 함께?”
“모든 일이 종결될 때가지 선발대는 나와 함께 한다. 아니, 나 또한 선발대원으로 참여하는 것이지.”
라미레스는 내심으로는 어이없어 했지만 결코 밖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아바돈을 너무 만만하게 보는 군. 연합군 정예를 추려야지, 선발대원만으로 아바돈을 친다고?”
파천은 라미레스와 아나다, 대덕과 설란을 대동하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서 서성이고 있는 이들은 네 명이 전부였다. 로메로와 대천주 제석, 태상노군 그리고 충선 장삼봉이었다.
먼저 눈길이 머문 것은 역시나 충선. 그도 반가움에 파천의 두 손을 덥석 부여잡았다.
“수고했다, 파천. 정말 수고했다. 장한 일을 해냈어. 네가 해내길 기대하지만……실제로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진인”
“그래, 이제 시작이야. 네가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르겠구나.”
“아직은 먼 길이죠.”
파천에게 장삼봉은 특별한 존재였다. 파천은 그에게만은 깍듯하게 예의를 차렸다. 어느 정도는 사람 간의 예의에 구속을 받지 않는 파천인지라 이런 태도는 상당히 이례적인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로메로가 제안했다.
“연합군 수뇌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파천의 시선이 그들은 절로 움츠려드는 자신을 무기력하게 느껴야만 했다.
“가다리는 게 나인가? 광명인가?”
“둘 다……입니다.”
“내가 어떤 일을 해주리라 기대하는가?”
“선봉에 서서 연합군을 지휘해주리라 믿습니다.”
제석이 당황해서 떠듬거렸다.
“아직……은……결정……된 일이 아니……잖소?”
파천의 눈길이 제석을 향했다.
“결정은 그대들이 아닌 내가 한다. 싸움은 그대들의 참여가 필요치 않다.”
제석은 당황했다. 이런 모멸감은 처음이었다. 라미레스도, 설란도, 대덕도 파천의 지나친 태도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노군이 심사가 뒤틀렸던지 한소리 참견을 했다.
“광명이 대단하긴 한가보군. 충선, 원래 저렇게 거만한 위인이었던가?”
충선도 좀 의외였던지라 멍청하게 굳어있기는 한가지였다.
“태상노군, 그대가 진인께 그런 태도를 보일 자격이 있는지 묻고 싶구나. 그대들을 이처럼 대하는 이유를 진정 모르겠는가?
순리를 버리고 역행함이 어리석음의 소치라 보면 그만이던가!
그대들은 모든 자격을 상실했다. 다른 이들의 본이 되고 모범이 되어야 할 위치에 있음에도 그 사실을 망각하고 잠깐의 명리에 현혹되었으며 또한 그 수단이 정당하지 않음을 알고서도 좇았으니 너희의 퇴보가 당연함이 아니더냐!
아직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겠다면 만인의 바로 섬을 위해서라도 교훈이 필요하리라. 그런 그대들이 아직도 다스리고 가르칠 위치를 고집하는가!“
파천의 꾸짖음은 통렬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도 언급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거의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그 길을 택했음으로 달리 비판할 자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알고 있음에도 지적하지 못했던 것을 파천이 짚고 나선 것이다.
제석도, 노군도 파천이 지금 무얼 꼬집고 나선 건지 금세 깨달았다. 그들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벌게져 갔다. 그들 또한 많은 세월을 두고 당시의 선택을 후회해 오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돌이킬 길이 없어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들춰지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었다.
‘그것도 생령에게.’
아직은 그들 마음에 이런 생각이 버티고 있음에야 그 수치심이 오죽하랴. 로메로가 사태를 수습하고 나섰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일단은 가셔서……”
“그 전에 할 일이 있다.”
파천이 성큼 앞으로 걸어가자 다른 이들은 묵묵히 따른다.
궁성 밖으로 나온 파천이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그의 주변으로 마주 보기 힘들 정도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하룬의 모든 이들이 볼 수 있을 정도의 높이까지 이른 파천이 멈추었다.
라미레스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가까이 날아온다. 무엇을 하기 위함인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파천의 두 손이 하늘을 떠받들 듯 어깨 위로 올려지는 순간이었다.
쩌적저적
거대한 무엇인가가 통째로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영자들은 웅성거렸다. 그때 누군가의 입에서 한소리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따, 땅이 움직인다.”
하룬 전역이 급한 물살에 떠밀려 내려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천천히 움직이고 있음이 느껴졌다.
“어어어?”
“뭐, 뭐야?”
“이게 대체?”
놀람의 탄성이 체 뱉어지기도 전에 하룬은 아예 통째로 뽑혀지고 있었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하늘 높이 솟아 올라갔다.
매소 하루의 상공에 머물고 있던 비행매소보다도 더 높이 올라가던 하룬이 멈춘 건 저 멀리 마계와 제왕의 군대가 어렴풋이 보이는 지점에 이르러서였다.
입을 딱 벌리고 있는 이는 일반 영자들뿐만이 아니었다. 연합군 수뇌들조차 이런 기사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 누가 이런 능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발휘한 적이 있었던가?
단지 하룬을 허공으로 뽑아 올린 것에서 멈췄다면 이들이 이렇게나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메타트론이나 수호자, 루시퍼 정도라면 이 정도는 가능할 것이라 짐작해 왔었다.
영자들의 발이 묶였다. 그렇게 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떠올라주지 않았다.
자유롭게 허공을 누비던 영자들이 어찌된 일인지 일장 이상을 도약해내는 이가 없었다. 하룬의 중심 쪽으로 이겨내기 버거운 막대한 인력(引力)이 작용하고 있었다.
라미레스가 물었다.
“왜 이렇게 하는 거지?” “전쟁을 막기 위해서. 이들의 안전을 보호 하고 적의 침입을 방호하기 위해서. 이후로도 이들이 참여할 전쟁은 없다.”
하룬을 둥그렇게 보호하고 있는 막은 안으로 인력이 밖으로는 척력(斥力)이 작용하고 있어 외부에서 뚫고 들어오기 힘들고, 내부에서도 외부로 나가기가 쉽지 않다. 물론 모두에게 해당 사항이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최악의 경우라도 소수의 부딪침만으로 종결돼야 한다. 너라면 이 정도는 장애가 되지 않으리라 보는데.”
사실이었다. 연합군의 수뇌를 맡고 있을 정도의 강자들을 제어할 만큼의 힘은 아니었다. 적절하게 조정해 놓은 이유는 그도 밝혔듯이 외부의 적들과 싸우게 될 때를 대비해서였다.
라미레스는 파천의 거침없는 결단이 썩 마음에 들었다.
“그간의 고민을 한꺼번에 날려버렸군. 그리고 높이도 아주 적절해. 저기 마계와 제왕의 군대가 한눈에 들어오니 말 야.”
하룬의 영자들은 그제야 파천이 누군지를 알게 된 듯했다. 그들의 환호성이 또 다시 하룬을 뒤흔들었다. 궁성 앞에 있던 제석과 노군은 가슴 한쪽이 써늘해지는 심정이었다.
‘저런 자가 대적하고자 나서면……꼴이 우스워지겠구나.’
‘어떻게 해서라도 척지면 안 된다. 할 수 있다면 회유해보고 안 된다면 세력을 끌고 이번 싸움에서 빠져야겠어.”
현재의 위치를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앞에 그들은 한없이 나약해져 갔다.
연합군의 거의 대부분의 수뇌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군단 부대장급 이상을 소집해서인지 꽤나 많은 수가 회의실을 채우고 있었다. 지혜전사단의 부단주 들 중에서도 홀딘을 제외하고는 모두 참석했다.
파천을 비롯한 일행이 안으로 들어서자 모두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좀 전의 소동을 목격한 바 있었기에 파천을 대하는 시선이 많이 달라졌다.
호기심과 감탄, 두려움이 적당하게 뒤섞인 눈길들이 파천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로메로가 회의를 이끌어 갔다.
“오늘 모두를 이 자리에 모신 것은 예전에 논의한 바 있던 연합군 총사령관에 대한 가결을 확정짓기 위함입니다. 혹시라도 그간에 마음이 바뀌신 분이 계시다면 기탄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능력에 대한 검증은……방금 전의 일로 확인되었으니 굳이……재차 논의되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하긴 그걸 보고 능력이 어쩌고 할 간 큰 위인은 이 중에 없었다. 제석이 야마천주를 주시한다. 그 의미는 분명했다. 하지만 제석이 간과하고 있는 게 있었다.
‘저자의 능력은 대천주를 능가하거늘……날더러 뭘 어쩌란 말인가? 계속 나만 쳐다보는군. 참나……이거 잘못하면 오늘 제대로 망신당할 수도 있거늘.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고……에라 모르겠다.’
야마천주가 벌떡 일어섰다. 모두의 시선은 그가 일어나기 전부터 그곳에 맞춰져 있었다. 이제는 자연스럽기까지 했다.
“1군단장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있으니 이러났겠지요.”
처음부터 삐딱했다.
“그럼 가부부터 먼저 말씀해주시고 그에 따른 첨언을 되도록 간략하게 해주시기를.”
“그러지요. 전 반대합니다. 총사령관이란 직위는 종전(終戰)의 시기까지 연합군의 모든 생사여탈권을 행사할 수 있는 막중한 자리입니다. 능력만 있다고 해서 거머쥘 수 있는 직위가 아닙니다. 그 정도의 능력이라면……”
한참을 생각해봐도 마땅히 예로 들 적임자기 없다.
“흠, 하여튼 예비군단장이신 라미레스 님이나 대천주님, 노군께서도 적임자라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무한계의 메테우스님과 카란님도 해당되겠지요. 그럼에도……”
야마천주의 말을 라미레스가 딱 잘라먹는다.
“어림도 없습니다. 전 저런 능력 없습니다.”
야마천주의 얼굴이 급변했다.
“하여튼……그럼에도 그분들을 물망에 올리지도 않은 이유를 여러분도 잘 아실 겁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 중 파천님에 대해서 상세히 알고 계신 분이 과연 몇 분이나 되십니까? 지도자를 선택하는 자리입니다. 영계의 운명을 어깨에 짊어져야 할 막중한 책무가 있는 자리입니다. 잘못 된 선택이라는 걸 훙 알게 된다 해서 돌이킬 수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만한 영격이 뒷받침 되어야 함은 물론이고 강력한 지도력과 빈틈없는 지략, 신중한 판단, 과감한 결단력을 모두 겸비해야 합니다. 거기다 최종적으로 루시퍼나 메타트론을 상대할 정도의 힘까지 지니고 있다면 두말 할 나위가 없겠지요.
그런데 지금 파천님에 대해서 알려진 건 하나도 없습니다. 능력은 예외로 치고 하는 말입니다. 그것조차도 확신이 드는 건 아닙니다만……“
노군의 언질을 받 은 태선이 동조하고 나섰다.
“듣고 보니 그렇군요. 좀더 신중해야 할 것 같네요. 일단……알려진 게 너무 없다는 점. 막말로 루시퍼와 메타트론 등과 밀약을 했는지도 모르는 일이잖습니까?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라미레스가 또 끼어들었다.
“어떻게 되긴 상납하겠지…..”
그는 하는 짓거리들이 마뜩치 않았다. 들어오면서 노군과 제석이 수하들에게 눈치를 주는 걸 보았고, 영언이 오갔을 것이라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군만 해도 굳이 반대 입장이 아니었다가 돌변한 건 파천의 적대적인 테도 때문이었다. 그걸 간파한 라미레스가 심통이 나서 이러는 것이었다.
“그렇……죠.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란 확신을 가지기 위해서도 좀더 시간을 두고 치밀한 검증이 뒤따라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연후에 다시 논의되어야겠지요.”
라미레스가 더 참지 못하고 일어섰다.
“지금 다들 착각하고 있는 게 있어서 한마디만 하죠. 누구처럼 사령관에 앉지 못해서 안달 내는 것도 아니고, 비공식적인 내락이나마 들어 본 적도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 쪽에서 매달리고 부탁해야 할 입장입니다. 그럼 묻겠습니다. 다른 건 다 접어두고서라도 루시퍼와 붙어서 안 깨질 자신 있는 분, 계십니까?”
조용하다.
“그럼 메타트론은 말할 것도 없겠네요. 이게 우리의 당면한 현실입니다. 분명히들 그렇게 말씀하신 걸로 기억합니다. 파천이 광명을 가지고만 온다면 당연한 거 아니냐고, 아니었습니까? 제가 회의 중에 엉뚱한 생각하다가 잘못 들은 건가요? 길게 말할 것 없습니다. 로메로 님.”
“네, 말씀하세요.”
“상반된 의견이 나올 때 결정은 어떻게 내립니까?”
“원칙은 반대가 나오면 무조건 부결입니다만……사안이 사안이니만큼 다수의 동의로 가결합니다.”
“그럼 그렇게 진행하죠. 더 들어봐야 새로운 의견이 나올 것 같지도 않으니 말입니다.”
“이견이 없으시면 잠시 결정할 시간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대덕이었다. 그녀의 개입에 모두가 긴장했다. 그녀의 발언은 그만큼 비중이 있었다.
“너무나 입장들이 다르네요. 아직도 움켜쥐고 있을 가치가 남았는지 궁금하기도 하구요. 어리석은 집착은 이제 버릴 때도 되었건만……안타깝네요. 찬성하는 분들과 반대하는 분들이 대립할 이유가 없습니다. 또 하나의 입장이 있기 때문이죠.”
모두 무슨 소리인가 싶어 멀뚱거리며 대덕을 쳐다본다.
“파천님은 관심이 없으신 듯하네요. 아쉽게도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찬성하든 반대하든 총사령관직을 승낙하실 것 같지가 않네요. 파천 님, 제 말이 틀리나요?”
파천은 빙긋 웃고만 있다. 대덕은 계속 말했다.
“이제는 우리 자신들을 돌아볼 때입니다. 제와의 지배에서 벗어나 만들었던 세상이 그 전과 달라진 것이 있었나요?”
천상계의 속박에서 벗어나 영자들의 자유를 외쳤던 분들의 무한계는 어떻습니까?
여전하죠. 문제가 뭘까요? 힘을 지닌 자와 그렇지 않은 자. 힘을 누리는 자와 소망하는 자. 계급이 생겨나고 지위가 생겨나고 체제가 생겨나 모드를 억압하고 억압받고……
기억이 닿아 있는 최초로 돌아가 보십시오. 그때도 여러분들이 지금과 같았나요? 위기 앞에 분열하는 건 어쩌면 당연합니다. 작은 이익, 그것이 전체의 생존보다도 더 가치 있는 분들이 계시는 한 영계는 신의 직접 다스림이 있다 해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소멸마저 극복하셔서 영원한 생명을 누린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제 기회는 없습니다. 아직도 희망을 생각하신다면 그건 오산입니다. 더 이상 여러분들이 누릴 희망이 아닙니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서는, 자기 것을 내놓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지킬 수도, 누릴 수도 없게 될 겁니다. 지금 우리 앞에 어려운 싸움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
힘든 적들이 앞을 지키고 섰습니다.
우리 싸움이 아닙니다. 그럴 자격도 능력도 안 되죠. 파천 님, 그렇지 않은가요? 견해를 알고 싶네요. 앞으로의 계획까지도 들으면 더 좋겠지만 그건 무리겠지요.”
대덕이 제대로 짚었다. 파천은 야마천주나 태선이 뭐라고 지껄여대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하나하나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더 많이 병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신뢰라기보다는 모든 이들의 본성에 대한 신뢰였다. 파천이 앉은 그대로 입을 열어 갔다.
“오늘의 씨앗이 없다면 내일의 꽃은 피지 않는다. 씨앗은 또한 썩어야 한다. 썩음으로 생명을 잉태할 수 있고 썩음으로 내일을 기약할 수 있다. 교만한 자 썩을 수 없다. 바른 길을 포기한 자 썩을 수 없다. 용기가 없으면 썩을 수 없다. 결단하지 않으면 썩지 않는다.
썩음은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 부정함으로써 더 큰 긍정으로 다다르는 지혜를 어디에다 비교할까. 그대들은 많은 것을 누려 왔다. 그 누림이 그대들만의 노력이었던가? 그 누림이 혼자만의 결실이던가? 혁명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나? 힘센 자가 두려움으로, 억압함으로 잠시 세상을 변화시킬 수는 있지만 그 본질마저 달라짐은 아니다.
하나, 하나의 씨앗이 썩을 때 그제야 세상은 온통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하게 된다. 혁명이 아닌 개개인의 혁신으로만 세상은 변모한다. 그대들은 다른 이들을 가르치고 지도해야 할 위치에 있다. 다른 이들을 위해 스스로를 비우고 썩을 용기가 없다면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입을 다물고 잠잠히 배우라.
그대들은 현명한 줄 아나 어리석다. 그대들은 용맹하다. 생각하겠으나 비겁하다. 바른 길을 버린 순간 잠시의 안주함이 그대들을 영원토록 속박한다. 지금 그대들의 모습은 그래서 너무도 추악하다.
나는 그대들의 지도자가 될 생각은 없다. 나는……그대들이 쓸모없다고 여긴 저 연약한 자들의 친구로 왔다. 저들을 도와 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 왔다. 기회마저 박탈당하는 게 안타까워서 돌아왔다.
나와 그들의 싸움이다. 그대들은 참여할 자격을 잃었다. 소멸을 극복한 자들은 아무것도 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대들에게 돌아갈 것은 한줌 가치도 없는 차가운 냉소뿐이다.“
파천이 일어섰다.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또 있을까. 회의에 참석한 자 치고 강하지 않은 자 없었다. 그 신분들 또한 각 차원계에서 가장 고귀하다. 그런데 아무데나 굴러다니는 볼품없는 돌멩이만도 못하게 취급하다니. 이런 모욕을 어디서 또 받아봤을까!
파천은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기회를 얻고 싶다면 모든 것을 버려라. 그런 뒤에야 새 길이 열리리라. 그대들은 머지않아 주어진 그 길마저 막힐까 두려워해야 한다.”
파천이 돌아섰다. 제석이 외쳤다.
“홀로 싸우겠단 말인가?”
파천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번엔 노군이 외쳤다.
“그대 혼자서 이길 수 있다 생각하다니 어리석구나.”
그때 파천의 신형에서 거센 바람이 몰려나왔다.
파파팡
놀라운 일이었다. 무엇이 어찌된 상황인지 파악해 낸 이가 단 하나도 없다.
제석도, 노군도 그 자리에 없었다.
회의장은 궁성의 최고층 중앙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지붕이 뜯겨나가고 하늘이 훤하게 보였다. 아마도 제석과 노군은 그곳을 통해 밖으로 퉁겨 져 나간 것 같았다.
파천은 다시 걸음을 떼었다. 라미레스와 대덕과 설란, 충선만이 그 뒤를 따른다. 다른 이들은 아직도 충격 중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마음도, 몸도 움직일 수 없었다.
회의장에서 한참이나 멀어진 뒤였다. 라미레스가 물었다.
“그래서 어쩔 생각인데?”
“두고 보면 알아.”
대덕은 고개를 살래살래 젓는다.
‘굳이 쉬운 길을 버려두고 힘든 길을 택하는 건 저 들마저 버리지 않겠다는 뜻인가?’
파천은 다시 선발대에게로 갔다. 이제 파천에게 남은 건 눈앞에 있는 이들 뿐이었다.
‘어차피 세력의 힘으로 겨룰 수 있는 적들은 아니다.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하지만 문제도 있었다. 그는 되도록 전면에 나서지 않는 게 더 좋았다. 그 혼자의 힘으로 역경을 이겨낸다면, 그래서 얻은 영계의 평화란 무의미했다. 자신들 스스로의 힘으로 이뤄내는 게 가장 좋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라미레스가 말했다.
“연합군의 힘이 아니라도 보탤 여력은 많다.”
“무한계의 강자들을 이름이냐?”
“그들도 있고 내게도 준비된 힘이 있다. 일명 지혜 전사단 이라고 하지. 설마 그들도 거부하는 건 아니겠지.”
파천은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대덕은 다른 자들을 언급했다.
“제왕들이 돕겠다고 하면…….그땐 어쩌시겠습니까?”
정돈된 맑은 음색이 파천의 입에서 음률처럼 흘러나왔다. 제왕들의 상실감을 파천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그간의 상처로 지쳐있다. 최종적인 확인이 따라야겠지만 최소한 손 안에 움켜쥔 것은 없다. 바른 인식이 따른다면 새롭게 다리를 놓아줄지도……”
그들 역시 소멸을 극복하긴 마찬가지.
그럼에도 파천은 달리 생각했다. 그들은 모든 걸 빼앗겼다. 치명적인 좌절을 체험한 그들이라면 결단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기대. 연합군 수뇌들과는 입장이 다른 것이다.
라미레스는 그런 파천의 고집스러움이 못마땅했다.
‘좀 꺾어 주면 어디가 덧 나냐. 그들의 힘을 적절하게 이용해서라도 모든 걸 안정시킨 후에 네 뜻대로 하면 될 것을. 이럴 때 쓰라고 타협이라는 게 있는 건데.’
파천은 밝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들 하지 마. 우리 힘만으로도 기적이 일어날 테니. 앞으로 놀라운 일들이 자주 일어날 텐데 벌써부터 맥 빠져 있으면 곤란하지.”
선발대원들은 대충 돌아가는 분위기만으로도 어찌된 연유인지를 알게 되었다.
일부 대원들은 이런 파천의 신뢰가 오히려 버겁기만 했다. 자신들을 잘 헤아리고 있거늘 무슨 기적을 기대한단 말이던가?
파천이 수호자와 함께 움직인다. 메타트론을 먼저 찾았고 대화를 나눴다. 구체적인 숙의에 들어가자 메타트론은 정색했다.
“아바돈을 먼저 치겠다고?” “그들을 등 뒤에 놓아둔다면 남겨진 자들의 희생이 크다.”
“대적자들이라면 모를까……아바돈의 위치는 나도 알고 있는 바가 없어. 내 도움은 기대로 하지 마라.”
“물론이지.”
“아바돈을 찾아내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을 때는?”
수호자가 대신 대답했다.
“그때야 물론 비밀차원부터겠지.”
“맞다.”
메타트론은 파천이 자신에게로 온 진정한 이유가 있음을 눈치 채고 있었다.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비밀차원으로 들어갈 셈이냐? 아니면 그들이 나오길 기다릴 참이냐?”
중요한 문제였다. 파천이 광명을 얻었음이 알려졌다면 그들은 어쨌든 간에 영계로 침투해 들어오게 되어 있다.
그걸 기다리고 있다 맞받아치는 게 여러모로 유리하다는 판단은 메타트론이나 수호자 모두 동일했다. 하지만 파천의 관점은 다르다.
“그들이 영계로 들어서면 혼란이 빚어진다. 우리가 들어간다.”
“흐음, 좀 위험 부담이 있지만 그것도 괜찮겠어. 낯선 곳이라 께름칙하긴 하지만…… 방비하는 것보다는 역시 정벌이 모양새가 그럴 듯하겠군.”
수호자가 물었다.
“인원은?”
“우리 쪽에서는 나와 어둠의 천사들 그리고 루시퍼와 대마신만 간다.”
“제왕은?”
“그놈은 안 데려가는 게 낫다. 워낙에 믿을 수 없는 놈이거든.”
그런 말을 천연덕스럽게 웃으면서 내뱉는 메타트론을 수호자는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메타트론이 물었다.
“그쪽 진용은?”
메타트론이 물어보나 마나라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메타트론은 사실 별로 기대로 하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건 수호자와 파천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파천에게서 나온 대답은 의외였다.
“나와 수호자. 그리고 선발대.”
“선발대? 어이없군. 그 약골들을 데려가서 어디에 써먹게? 대답하기 싫은가 보군. 그래도 꽤 쓸만한 자들이 있을 텐데 의외야. 그렇게나 믿음이 가는 자들이 없었던가?”
파천은 잠자코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 들어 차 있는 계획은 이제 그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된다.
어떤 조건, 어떤 상황이 닥칠지도 모르기에 그 모든 가능성에 대해 치밀한 안배를 해두어야만 했다. 실제 메타트론과의 싸움은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메타트론이 루시퍼를 언급했다.
“루시퍼를 만나 볼 생각은 없나? 원한이 깊을 텐데?”
그가 꺼내고 싶은 얘기는 사실 다른 것이었다.
‘네 아이들이 보고 싶지 않더냐?’
파천이 끝내 그런 뜻을 내비친다.
“아이들은 무사한가?”
메타트론의 눈에 광채가 서렸다 사라진다.
“네 눈으로 확인해보는 게 낫겠지.”
“아니다. 보지 않는 편이 낫겠다.”
“파천, 애써 감출 필요는 없다. 너는 완전자가 아니지 않은가? 아직은 인간의 정에 초연하지 못하지. 그걸 알고 있는데 굳이 부인할 필요는 없다.”
파천은 서둘러 대화를 마무리 짓고 싶었다.
“아바돈이 정리되면 곧바로 알려주겠다. 준비할 게 있으면……미리 해 두는 게 좋을 거야.”
의미 있는 말이었다. 메타트론은 짧게 대답했다.
“그러지.”
파천의 뒷모습에서 메타트론을 망설임을 읽었다.
‘네 강점은 역시나 약점이었던 거야. 이러면 생각지도 않았던 의외의 무기를 갖춘 셈인가! 파멸은 순간의 흔들림 때문에 찾아드는 법이지.’
메타트론은 간만에 기분이 매우 흡족했다. 어둠의 천사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동안 입가에서 한시도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다.
말들이 많았다. 파천이 스스로 영계연합군 사령관직을 고사했다는 얘기는 어떤 경로로 퍼져갔는지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파천의 등장에 희망을 가졌던 이들은 이런 갈등 관계가 대두되자 실망감을 드러냈다. 소문은 원래가 와전됨이 심한 법이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파천이 호통을 친 부분에 대한 오해가 깊어져 갔다.
일부는 통쾌해마지 않았지만 대다수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부정적이 시각도 만만찮았다. 이런 차에 연합군 내부에서도 진통이 거듭되고 있었다. 그 발단은 그럼에도 파천을 따르고 의지하려는 자들과 그에 반하는 자들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로메로가 진땀을 흘리는 건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다. 웬만한 일에는 초연함을 보이던 그도 지금은 무척이나 당황해했다.
“그 이면을 살펴봐야 합니다. 그렇게 유도한 것은 대천주와 노군이었습니다. 설득해도 부족한데 오히려 거부하고 공박하는 분위기를 이끌었으니 누구라도 그랬을 겁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소멸극복에 대한 질책이었지 영자들의 연합하려는 의지조차 무시한 건 아니었단 점입니다. 이점 오해 없으셨으면 합니다.”
카란은 그래도 막무가내다.
“그가 아무리 광명을 얻어 절대자의 경지에 도달했다지만 영계는 존중받아 마땅한 고유의 역사와 전통이 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그런 태도를 보임을 어찌 좋게 보아줄 수 있겠는가! 그건 우리까지도 포함한 비난이지 않던가!”
봉인을 푼 강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들의 표정엔 착잡함이 가득했다. 표면에 등장하지 않고 지금껏 기다림은 연합군의 지휘체제에 혼선을 주지 않으려는 배려였다.
게다가 전력을 집중하지 않고 비교적 자유로운 상태에서 적의 내습을 대비하기에도 효과적이란 판단도 한몫 거들었다.
로메로는 지금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분들마저 등을 돌리게 해서는 안 된다. 더 이상 오해의 골이 깊어지기 전에 차단해야 한다.’
“그건 아닙니다. 제 생각엔 천주들에게 향한 질책도 비난이 목적이 아닌 돌이킴의 결단을 촉구한 듯 보여 집니다.
사실 육체소멸의 극복은 순리에 반하는 이단적인 지향입니다. 틀린 견해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로 현재의 혼란이 잉태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영격 매진을 포기한 자들이 속출하고 영원한 생명 유지만이 영자들의 관심이 된 것도 그들의 책임이 큽니다. 앞선 자들의 흔들림이 영계에 미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지대한 것이었습니다.
만약……당시의 그릇된 시도와 선택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다른 도움을 기대하지도 않아도 되었을 겁니다. 지금 그들의 초라함은 스스로 초래한 것이었고, 그 이상의 비난도 감수해야 마땅합니다.“
카란이 로메로의 견해조차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켜져야 할 전통은 존중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오랜 세월이 정형화시킨 고착화된 관념을 계기 없이, 충격 없이 벗어 던지기엔 무리가 있었다. 평등을 지향하나 현실의 그렇지 않음을 어느 정도 수용하는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태도는 그만의 입장은 아니었다. 가장 원만하고 유연한 사고를 지니고 있다고 인정받는 메테우스 조차 어느 정도는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카란의 입장도 로메로의 입장도 어느 하나 틀리지 않다. 천상계와 선계의 지도자들이 육체소멸마저 극복한 건 신의 관점에서 보자면 매우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그들이 영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감안할 때 비난받는 것은 더욱 당연하다.
하지만 그들의 현재의 지위와 그에 따른 권한은 영자들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파천의 비난은 그들의 최소한의 권위마저 부정한 것으로 비춰지기 쉽다. 비난의 강도에서 도가 지나쳤고 접근하는 방법에서 미숙했다. 더군다나 사령관직을 거절함은 모처럼 맞은 영계의 단결마저 흩트려 놓았다. 그를 지지하고 신뢰하는 무리들과 반발하는 자들의 일치는 힘들어졌다.
그가 신의 권능을 부여받았다 해도 지금처럼 해서는 안 되었다. 그것만은 지적해야 한다. 문제는…… 그럼에도 달리 대안이 없다는 점이다. 그런 그의 입장은 우리가 수용하지 않는다면 더 큰 분열이 초래된다.
현재 무한계는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았다. 우리가 반대 입장을 표명하면 더 큰 혼란이 빚어진다. 그래서 고민인 것이다.”
분트발이 불만 가득한 어조로 구시렁댔다.
“광명을 얻은 자가 어찌 그리 경솔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겠군.”
카라반도 동의하는 심정이었다. 파천에 대해 가졌던 기대가 일시에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이상한 일이야. 광명을 얻었다는 건 그만한 자격을 인정받았다는 말인데…… 그런 자라면 완전자에 버금가는 영격을 지녀야 당연한 일일 텐데. 우리가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성급하게 판단하는 게 아닐지 모르겠군.”
카란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일축했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는가마는 지금의 돌아가는 사정을 들어보면 그런 것도 아냐. 현재의 위기를 타개할 능력만을 부여받았나 보지. 우리가 기대하던 것과는 거리가 멀어.”
메테우스가 로메로의 심리를 지나칠 리가 없었다.
“알리지 않은 사실이 있나?”
로메로가 망설이자 그걸 본 자들의 궁금증이 더 커졌다.
“저 이건 어디까지나……아직 확인되지 않은 제 추측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뭐지?”
카란은 뭐가 또 남았다는 말인가, 라는 표정이다.
“아무래도 파천 님의 생각은 저희들과 전혀 다른 듯했습니다.”
“어떤 측면에서?”
라미레스를 통해 전해들은 상황들을 비교적 자세하게 털어놓았다. 메타트론과의 제휴를 통한 비밀차원과의 대결에서부터 이후의 행보까지 대규모 전쟁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소수의 영자들만을 대동하고 이 모든 싸움을 종결지으려 한다는 대목에 이르자 메테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상대의 생각마저 그와 같으리라 보장할 수가 없으니……그게 문제지.”
“저도 그 점이 의문이었습니다만……만약……메타트론과 이 부분에 대한 어떤 일치를 보았다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메타트론과의 합의라. 그게 가능하다고 보는가?”
“으음”
“메타트론은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언제든 모든 걸 원점으로 돌려놓을 수 있는 존재야. 두렵지. 신과 천궁의 오랜 침묵 가운데서 지금껏 영계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그의 이런 자신감이 바탕이 되었어.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지금껏 자선을 베푼 거야. 나약하고 미천한 존재들에게 말 야. 옛 용께서 하신 말씀 중에 이런 게 있었네.
‘메타트론이 무서운 이유는 싸우면서 이기는 게 아니라 이겨놓고 싸우기 때문이다. 만약 그의 의지가 신이 아닌 다른 존재에 의해 가로막힌다면 그 때야말로 영계가 종말을 고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의 마지막 힘은 신에게 근접해 있다. 그 힘은 소멸을 결정했을 때 발휘된다.”
놀라운 말이지. 옛 용의 판단이 과장이 아니라면 지금이 그때가 아닌가 싶다.
만약……파천에게 그의 행보가 저지되는 상황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그는 어떤 식으로 결정을 내리게 될까? 짐작할 수 있는 모든 최악의 상황이 그대로 재현된다고 봐야겠지.
그래서 우리는 봉인을 풀고 나올 때 미래에 대해 어떤 것도 장담하지 않았다네. 메타트론이 현재의 대립 구도를 이후로도 원하길 바라는 게 고작이었어.”
“그렇다면 최상의 결과는 파천님과 메트트론의 힘이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고 균형을 이루는 것이겠군요.”
“그래, 바로 그거야. 그래서 우리는 전쟁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어. 두 존재가 팽팽한 대립 구도를 유지하고 있을 때 우리가 대비해야 할 적은 루시퍼니까. 그래서 그들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다고 본 거야.”
로메로도 일시 혼란을 느꼈다.
‘이분들의 판단대로라면 파천님은 메타트론의 수족을 묶어놓는 역할 정도란 말인가? 나머지는 결국 우리의 몫이고?’
“그런 예상이 기정사실화 되었을 때를 생각하면 연합군의 분열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럼 어쩌실 작정이십니까?”
“그는 혼자만의 싸움으로 매듭짓고 싶어 한다. 그런 성급한 판단에 무조건 동조할 수는 없어. 우리는 나름대로 대책을 수립하고 있어야 한다.
노력 해봐도 안 된다면……그땐……그때는…… 파천을 버린다. 그와 메타트론의 합쳐진 힘이라면 비밀차원도 상대할 수 있겠지. 우리는 그 이후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연합군을 완벽하게 정비해놔야 하고.”
‘결국 그렇게 결정되는가? 이분들의 결정을 무한계는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
암울해지는 심정을 로메로는 가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냐. 그를 만나보는 게 우선이겠지. 모든 결정은 그 이후로 미룬다.”
로메로는 그것이나마 다행이라며 자신을 위로해야만 했다.
메테우스가 결론을 지었다.
“로메로, 그와의 만남을 주선하라.”
“예, 알겠습니다.”
천상계와 선계의 지도자들이 느끼고 있는 곤혹감이란 그 어떤 표현으로도 부족할 만큼 큰 것 이었다. 제석과 노군만이 회동했다.
좀 전까지도 여러 명이 흥분해서 떠들었던 곳인지라 그 열기가 채 가시지도 않은 상태였다. 둘은 허탈한 심정이었다. 주도권을 무한계에 빼앗겼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어했던 제석에게 파천의 등장은 막다른 벽과도 같은 절망을 던져 주었다.
그의 질타가 이어졌을 때 제석은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소멸극복을 선택한 건 더 강력한 지도력을 겸비하기 위해서였지 결코 오늘의 결과를 원했던 건 아니었다. 영속적인 시간이 주어진다면 더 빠른 진전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그런데……고작 이런 꼴을 보기 위함이었던가?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돌이킬 수만 있다면……’
회한은 깊었다. 노군도 마차가지였다. 다들 내색은 하지 않지만 자신을 대하는 선인들의 태도에서 예전과 같지 않음을 간파해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된 지도 꽤나 오래된 일이었다. 언젠가는 마계가 도발을 해올 것이고 그때를 대비해 힘을 키워야 함은 자명했다.
그는 선계의 지도자로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왔다 자부했었다.
얼마나 고심참담하며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왔던가!
‘그때의 성급한 판단만 아니었더라도……’
제석이 물었다.
“다시 돌이킬 수 있다면……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런 방법이라도 알고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런 게 있을 턱이 없다. 노군은 망설이다 결국 한숨을 토해내고야 말았다.
“노군의 심정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겠지요. 그 당시로 돌아갈 수 있다면, 지금의 이런 결과를 알고 있는 상태라면, 결코 소멸극복을 원치는 않겠지요.
그런 사실을 모르는 상태라면 욕심은 눈을 멀게 할 테니 또 다시 어리석은 선택을 하겠지요. 때늦은 후회를 해본들 소용이 없지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현재를 인정하고 미래를 대비하는 것.”
“현재가 우리의 조건이 된 이상 쓸데없는 기대는 허망할 뿐이오. 주춤거리고 있다면 우리를 의지하고 있는 자들이 너무 가련해지오. 이 이상 양보할 수는 없습니다. 무한계와 대등함은 인정할 수 있지만 그들에게 종속됨은 결단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조금 전 야마천주의 지적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가 보다. 야마천주는 이대로 간다면 천상계, 선계와 무한계의 지위는 역전되고 오히려 종속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던 것이다.
무한계가 파천을 내세워 그런 시도를 해온다면 섣부른 예상이라고 코웃음을 칠 수 없는, 당면한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 염려가 노군의 평정을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어찌해야 합니까? 이대로 끌려간다면 후에 대책을 마련할 기회조차 없어질 듯합니다만……”
“나도 지금 당장은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할지 막막한 건 마찬가지입니다. 상황을 좀 더 지켜봅니다. 그러고 나서 무한계가 끝가지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인다면 그때 가서 결정을 내려야겠지요.”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정이란 게 뻔하군요. 독자노선! 그래서 얻을 게 적다는 게 서글플 따름입니다.”
“그렇게까지 가게 해서는 안 됩니다. 무한계의 지도자들이 아직 전면에 나서지 않았으니 섣부른 판단은 금물입니다. 그들에게 기대를 걸어 봅시다. 그들 역시 처한 입장이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봅니다.
최고의 권력을 맛 본 자는 그 달콤함을 잊지 못하는 법입니다. 다소의 차이는 있겠지만 파천이라 생령에게 일방적으로 끌려간다는 기분은 최소한의 권위마저 포기함을 뜻하니 선뜻 받아들이기 쉽지 않겠지요. 어떤 식으로든 견제하려는 자들이 생기기 마련이고 그 틈은 대의를 위해 젖혀두었던 향수를 불러일으킬 겁니다.”
노군은 과연 그럴지가 의문이었다.
‘그들은 우리와 다르다. 그동안의 기득권 따위는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다. 그런 전례를 이미 남겼지 않은가! 실리보다는 명분에 더 치우치는 자들. 파천의 주장에 설득력이 있다고 판단되면 그쪽의 손을 들어줄 것이다.’
노군과 제석의 근심이 깊어가는 때에 파천은 설란과 함께 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자신의 언행이 불어온 파장이 어떤 지를 전혀 모르는 자와 같이 태평이기만 했다. 설란이 되려 근심을 떠올린다.
“괜찮겠어요?”
“뭐가?”
“걱정되지도 않아요?”
“걱정한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지지는 안아. 한 번은 짚어야 했을 문제. 충격에 집착하지 않고 결단이 따라준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감수해야지.”
“파격이군요.”
“여유가 없어서 그래. 자연스럽게 그런 기회가 오길 기다릴 만큼의.”
“후우, 그거 알아요?”
“뭐?”
“많이 달라져서 과연 내가 알던 사람인가 의심이 가네요. 느낌이 생소할 정도로 말이죠.”
“그런가? 그럼 이렇게 생각해. 전에 알던 난 가면을 쓰고 있었다고.”
“그럼 지금은요?”
“보시다시피 이렇게 매끈하잖아.”
제 얼굴을 쓰다듬고 있는 파천을 보며 설란은 피식 웃고야 말았다.
파천도 처음 무척 당황스러웠다. 설란을 대한 순간에야 확신하게 되었다.
‘사랑의 완성은 확장이지 부정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자기애에서 가족, 이웃, 전체로 점차 확대시켜 가는 것이다. 사랑의 시초는 내 안에서 찾아야 한다. 이부에서 불현듯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내게 가족은 여전한 의미로 소중한 것임을 부인할 수 없음이니.’
부정 이후에 공백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정은 긍정과 맞닿아 있고 그 자리를 즉시로 메우기 때문이다.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함이 배움의 시작임과 동일한 것이다. 유연하다는 것은 편견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모든 것에 열려 있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그런 태도야말로 완전을 향한 첫걸음인 것이다.
파천은 스스로를 새롭게 규정했다. 완전에 가까운 자가 아니라 완전에 이르는 첫걸음을 내디뎠음을. 그 첫걸음이야말로 한달음에 새로움으로 채워지는 비약의 상태임을 또한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설란은 여전히 고요와도 같은 평정에 잠긴 파천을 가만 들여다보았다. 하룬에 얼굴을 내민 파천이 낯설다고 생각했었다.
‘왜 그렇게 느꼈을까? 지금은 익숙한 예전의 모습 그대로인데.’
둘은 현재 하룬을 멀리 벗어나 있는 상태였다. 설란이 다짐을 받듯 물었다.
“한 가지만 약속해줄 수 있어요?”
“말해봐.”
“다시는……다시는 내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약속해줘요.”
어려운 요구였다. 파천은 그러겠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설란은 한숨을 포옥 내쉰다.
“제가 너무 무리한 요구를 했나요?”
“설란.”
“네.”
“아이들이……우리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 해서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난 것은 아니잖아.”
“네, 여전히……그 모습 그대로 내 맘속에 살아 있어요.”
“그래,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지금 나는 어떤 약속도 할 수 없어. 미래는 그런 거야. 아직 결정되지 않은 가능성. 그 영역은 우리의 의지로 만들어 가는 거야. 그럴 여건이 허락된다면……노력은 해보겠어.”
둘의 마음은 이 순간 하나로 이어졌다. 설란은 밝게 웃었다. 웃는 모습이 아름답다.
“우리 이제 그만 돌아가요.”
더 묻고 싶은, 확인하고픈 얘기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설란은 입 밖에 내지 않는다. 가슴 한쪽에 더 묻어두기로 했다. 꺼내지 않아도 파천이 알고 있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대신 그녀는 작은 소원을 하나 빌어본다.
‘한 순간이라도 좋으니 아이들과 함께 웃을 수 있었으면. 신이여, 너무 큰 욕심인가요?’
하룬으로 돌아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은 천사가 보아도 시샘을 낼 정도로 정겨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