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77화 : 비밀차원의 지배자들과 그 적들
비밀차원의 지배자들과 그 적들
메타트론을 떠난 카오스는 아퀴나스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높은 언덕에 올라 멀리 시선을 두고 있는 아퀴나스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숨어서 지켜보았다. 아퀴나스는 심중의 혼란을 정리하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이 세계를 지금의 모습으로 유지하는 것인가? 아니면 혼란에 대한 기대인가? 내 안엔 없다고 생각했던 승부욕이 이처럼 끓어오르다니. 내 마음은 강하고 단단하다고 생각했다. 흔들림 없이 견고하리라 자신했다. 그런데 … .’
재를 뿌려 놓은 듯 새카만 흙덩이가 떠올라 아퀴나스의 손 안으로 흘러들어 갔다.
작은 알갱이로 부서진 흙덩이가 허공중으로 다시 떠올랐다. 뿌연 먼지는 빙글빙글 돌아가며 흩어지더니 다시 뭉쳐 덩어리가 되었다. 이어 손가락 한 마디보다도 작은 크기의 단단한 돌로 변했다.
모양은 또 변했다. 유난히 잎이 많은 꽃 한 송이가 진한 향기를 머금은 채 강렬한 자태를 뽐낸다. 손 안에 사뿐히 내려앉은 꽃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아퀴나스. 섬세한 손놀림으로 꽃잎을 하나씩 떼어냈다.
꽃잎 하나가 떨어지고, 또 하나가 떨어지고 … 결국엔 앙상한 가지만 남는다.
‘비우고, 비우고 덜어내도 덜어내어도 내 안엔 무한한 욕망의 실체가 있다. 마음만 바꿔 먹으면 키케로와 싸우지 않아도 된다.
생각만 바꿔도 카오스와 부딪치지 않을 수 있다. 모든 위협으로부터 이 세계를 안전하게 지킬 방법을 난 … 알고 있다. 하지만 … .’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지?”
예고되지 않은 카오스의 등장에도 아퀴나스는 전혀 놀라지 않는다. 언젠가 한 번쯤은 찾아올 거라 짐작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돌아선 아퀴나스의 눈에 카오스가 하나 가득 차올랐다. 하지만 보여지는 외형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실체를 어딘가에 숨겨두었다. 저처럼 신중을 기하니 예전처럼 쉽지는 않겠어.’
“오랜만이야.”
“그런가? 너는 그럴지 몰라도 난 아냐. 너희가 날 잊고 지내는 동안에도 난 너희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한 순간도 너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지.”
“그랬나?”
“그래. 특히 내가 주목해 바라본 건 아퀴나스, 너였어.”
“영광이군.”
“우리 사이에 해결할 빚은 처리해야겠지. 어떤 식으로 지불할 거지?”
“그랬군. 내가 빚을 졌었군.”
“탕감하는 건 매우 쉬운 일이야. 네가 진정 그럴 마음만 있다면 언제든 가능한 일이기도 하고.”
“들어나 볼까?”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지만 실상 너희들 중 이 세계를 가장 많이 아끼는 건 바로 너, 아퀴나스야. 이곳의 혼란은 돌아오지 말았어야 할 키케로의 등장으로부터 시작되는 것. 그만 없어져 준다면 예전처럼 이곳은 평온을 되찾을 거야, 그렇지 않나?”
“틀린 말은 아니군.”
“내 제안은 간단해. 너와 네 동료들 그리고 이 세계에 이후 어떠한 위협도 가하지 않겠다. 대신 … ”
“대신?”
“너 또한 날 적대하지 마라.”
납득할 수 없는 의외의 제안이었다.
“그게 전부라면 네 말처럼 정말 쉬운 일이군. 그래서 네가 얻을게 뭐지? 시간을 벌어보겠단 속셈인가?”
“시간 … 그래 내겐 시간이 필요하긴 하지. 하지만 너와 타협을 하지 않아도 내 시간이 제한받지는 않아. 솔직하게 말하지. 내 적은 오직 키케로 하나일 뿐이다.
양립할 수 없는 숙적을 앞에 두고서 다른 곳에 한눈을 팔기는 싫다. 난 그를 살펴야 하고 내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난 많은 시험을 해봐야 해. 그에게만 내 관심을 집중시킬 여유가 필요해.
네가 날 상대하겠다고 쫒아 다닌다면 나로선 여간 성가신 게 아니거든.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것, 나로선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이지.”
“거절한다면?”
“그러진 않을 거라고 봐. 너로선 손해날 게 전혀 없는 일이니까. 더군다나 네겐 나 전에 처리해야할 자들도 있으니 말야.”
아마도 메타트론을 말하는 것이리라.
“나는 말야 … .”
아퀴나스가 움직였다. 물 흐르듯 물러서 보았지만 아퀴나스를 떨쳐내진 못했다. 빼앗긴 간격은 한 자를 유지한 채 더 이상 벌어지지도 좁혀지지도 않았다.
쉬쉬쉭
둘은 그 상태로 공간을 떠도는 유령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던 아퀴나스의 몸이 폭발하듯 나눠졌으며 주변의 공간은 그의 환영으로 가득 차버렸다. 그 어디에도 숨을 곳이 없게 된 것이다. 그러자 카오스가 멈춰 섰다. 그 찰나의 순간, 아퀴나스의 몸이 카오스의 몸을 뚫고 지나갔다.
“역시 실체는 아니었어.”
그것을 확인해보고자 이 난리법석을 떨었더란 말인가?
“결론은?”
“좋다. 네 말처럼 나로선 손해날 게 없는 일이니 일단은 접수하도록 하지. 하지만 시한은 언제든 변경되며 그 즉시 발효된다.”
“흡족하다 할 순 없지만 나쁘지도 않군. 좋아 나도 선물을 하나 준비하도록 하지.”
“선물?”
“네가 원하는 것. 네가 그렇게도 갖기를 원했던 걸 주도록 하겠다. 기대해도 좋을 거야.”
사라진 카오스의 빈자리는 아퀴나스의 의문으로 가득 찼다.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뭘 갖길 원한다는 거지?’
카오스가 남긴 모호한 말이 그렇지 않아도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던 아퀴나스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카오스는 아퀴나스와 헤어지고 나서 바로 음모를 획책했다 비밀차원의 지도자들과 메타트론 일행을 마주치게 하는 것이었다. 그 이외에 그가 준비하거나 간섭해야 할 일은 없었다. 양측을 만나게 하기만 해도 기대했던 일은 벌어질 것이란 건 충분히 예측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현재 메타트론의 심기가 어떠할지를 예상해보면 그 격돌이 어느 정도로 치열할지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카오스는 그 첫 번째 대상으로 비밀차원의 여섯 지도자들 중 하나인 헤르바르트를 지목했다.
헤르바르트와 메타트론이 우영처럼 만났다.
뒤에서 루시퍼도 관심을 나타내고, 아사셀도 기웃거린다.
피차 말로만 들었던 존재와의 첫 대면이었다. 헤르바르트는 많은 수와 대치하고 있음에도 주눅 들어 하지 않는다. 되려 무리를 쭈욱 쓸어보는 모습에서 여유가 넘쳤다.
“많이도 몰려왔군.”
가장한 것일 거라 여겨지는 태연함으로 자신을 반긴다.
메타트론은 그가 여섯 지도자들 중 누구인지가 궁금했다. 여섯 중 하나일 거란 확신을 더하며 물었다.
“너는 누구지?”
“나? 아하, 그랬군. 내 소개를 잊었구나. 헤르바르트, 화합을 이끌어내는 자다.”
“왜? 어울리지 않나?”
“화합하는 방법치고는 치졸한 것 같아서. 요리조리 꽁무니를 빼고 다니는 화합을 이끌어내기 위해서였다니, 몰랐어.”
“싸움을 즐기는 자들은 늘 그런 식으로 공격적인가? 그래야 자신의 품위기 드러난다고 생각하나?”
“나를 가리켜 모두가 화평을 파괴시키고 분쟁을 즐기는 자라고 하지만 그래도 지금껏 지저분한 싸움을 해본 적은 없다. 너희는 싸움에 임하는 투사로서의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지 못했다.”
“예의라 … 화가 많이 난 모양이군.”
“길게 말할 것 없겠지. 너로부터 시작해서 이 비밀차원의 오만은 깨어질 것이다. 나머지 다섯도 불러라. 지금이 아니면 기화가 없을 테니.”
“오만한건 내가 아니라 메타트론, 너인 것 같은데. 나 하나로는 양에 안차니 모두 불러서 한꺼번에 덤벼보라는 건가?
대단해. 거절할 일은 아닌 것 같군. 잠시만 기다려주게. 모두를 이 자리로 불러들일 테니 말야.”
메타트론은 사실 그럴 의도가 있었다기보다는 그냥 해본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이를테면 큰 소리를 한번 쳐본 것이었다. 정작 상대가 호응해 한꺼번에 상대한다?
아무리 메타트론이라도 그건 해보나 마나한 싸움일 것이다. 다행이 자신에게는 그리 썩 흡족하진 않지만 수하들이 뒤에 버티고 있다.
‘루시퍼라면 하나 정도는 충분히 막아낼 것이고 어쩌면 그 이상도 가능할지 모른다. 나머지도 수하들의 연합된 힘이라면 이겨내지 못한다 해도 버텨내긴 하겠지. 그렇다면 해볼 만은 하겠군.’
아퀴나스를 제외한 다섯 지도자들이 모두 모였다.
그들 중 코모라와 캄파넬라는 메타트론도 익히 아는 존재들이다.
루시퍼 또한 캄파넬라와 접촉한 적이 있었다. 그 외에는 대부분 비밀차원의 우라노스들에 불과했던 것이다.
“누가 아퀴나스인가?”
메타트론은 먼저 그를 찾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퀴나스를 찾다니 … 아는 게 많군. 물론 키케로에게 들었겠지.”
헤르바르트의 부름에 응답한 네 명의 스스로 존재하는 자들은 대마신들 정도가 마주 대하기엔 버거운 상대들이었다.
보고만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히니 무슨 싸움인들 되겠는가? 카오스의 통제와 훼방 가운데서도 그들은 별 어려움 없이 서로 간의 소통이 가능한 것만 봐도 차원이 다른 강자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들 뒤쪽으로 잊혀진 공간으로 들여보냈다던 우라노스 백여 명이 한꺼번에 나타난 것이다.
메타트론은 분위기가 자신에게 지극히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알았다. 수적인 우세를 빌어 승부를 이끌어보겠다던 애초의 계획은 백지화되어야만 했다.
긴장한 탓인지 대마신들과 어둠의 천사들 간의 간격이 좁혀졌다. 사이가 좋지 않아도 이럴 때는 자연스럽게 하나가 된다. 어쩔 수 없는 동류임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데 키케로는 어디가고 너희들만 몰려다니고 있나?”
코모라가 한 걸음 나서며 메타트론을 지그시 바라본다.
메타트론은 파천과 수호자의 부재가 이때만큼 아쉬웠던 적이 없었다. 그들이 옆에 있다면 이 순간 얼마나 든든할까.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나약해졌다고 느꼈음인지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가 없어도 … 너희들 정도는 나 혼자서도 상대할 수 있다.”
“자신감은 좋은 것이지만 제 능력을 헤아리지 않은 것이라면 되려 멸망의 지름길이 되기 싶지.”
“자, 시작해 볼까?”
“푸하하하하하.”
캄파넬라가 웃자 나머지 인물들도 따라 웃었다. 메타트론은 그들이 왜 갑자기 한꺼번에 웃음을 터트리는지를 모르겠단 표정을 했다. 헤르바르트가 그 이유를 설명했다.
“너희들과 우리가 한 번에 격돌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
“그야 … .”
그랬다. 신을 대적한다고 큰소리 칠 정도로 자부심이 강한 강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다. 그들이 지닌 힘은 초유의 것이었고, 그 힘이 충돌한 여파는 비밀차원을 찢어놓을 정도가 될 게 분명했다. 메타트론은 적이 안심이 되었다.
“너희들은 이곳의 붕괴를 염려할지 모르지만 우리에겐 해당사항이 없다.”
“과연 그럴까? 이제 보니 메타트론의 지혜란 것도 과장된 것이었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메타트론은 비밀차원이 붕괴되는 것이 어떤 연쇄작용을 일으킬지 생각해봤다. 물론 전혀 영향이 없는 건 아니지만 영계에 미칠 타격은 그 자체만으로 크다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카오스, 바로 카오스로구나. 이들은 그것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던 거야. 이제 보니 카오스가 이들과 나를 만나도록 유도했을지도 모르겠다. 저들은 그것까지도 헤아리고 있다. 카오스가 우리 힘을 빌어 이곳을 붕괴시키려 한다. 왜 제 힘으로 하지 못하는 걸까? 분명히 거기엔 내가 모르는 이유가 있을 텐데.’
물어보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자존심은 둘째 치고 카오스가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메타트론의 표정만 보고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는 것처럼 말했다.
“이제야 깨달았나 보군. 그래, 우리들에겐 그런 제약이 있어. 그래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지. 어떠한 경우라도 공멸은 어리석은 거야.
우리가 영계를 침범하지 않았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언제든 가능하지만 때를 기다려 왔지. 완벽하게 우리의 것이 되지 않는다면 상생이 좋다고 생각했던 거야.
그런데 너희들 생각은 좀 다른 것 같더군. 위협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여길 침범한 것도 경솔한 결정이었어. 가만 두었다면 우리들 간의 균형 때문에 영계는 언제까지고 안전했을 거야. 물론 후로도 우리들의 개입은 꾸준했겠지만 그것이 결정적으로 영계의 존망을 좌우할 정도는 아니거든.”
‘그런가? 이들은 내 생각보다도 훨씬 현명한 자들이었다. 그런데 왜 파천은 서둘러 이곳을 먼저 정리하자고 했던 걸까?’
의문이었다. 광명을 얻은 파천은 파괴로서 질서를 재창조하겠다는 자신과 달리 조화로서 모든 걸 화합시키려는 의지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왜 그런 결정을 내렸던 걸까?
그리고 왜 지금 그는 메타트론을 따돌리고 독자적인 행보를 하고 있는가?
메타트론은 뭔가 자신이 모르는 부분이 있음을 절감했다.
지금껏 핵심에서 벗어나 있었다고 생각하니 왜 그렇게 제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는지. 메타트론의 이런 내심의 변화를 헤르바르트가 슬쩍 건드렸다.
“키케로의 광명은 완전하다고 볼 수 없다. 우리가 내린 결론이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가 마지막 인간세의 생존자라는 것. 그 사실은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그는 이곳 비밀차원에서 결정적인 뭔가를 얻으려고 한다. 그것이 카오스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한데 … 뭘 노리는지는 우리도 아직 파악치 못했다.
진정 그의 의도가 우리 차원의 멸망이라면 차라리 쉽게 이해가 가겠는데 광명을 얻은 그가 추구할 바는 아니지. 그렇지 않은가?”
‘맞다. 틀림이 없는 말이다.’
메타트론도 헤르바르트의 견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처럼 파천이 노리는 게 무엇일까? 캄파넬라가 메타트론에게 제안했다.
“네가 원하는 건 우리들과의 대결이고 우리 또한 침략자인 너희들을 용서할 만큼 너그럽지가 못하다. 결정은 내려져야겠지.”
“방법은?”
“우리의 초대에 응하겠는가?”
메타트론은 망설였다. 그의 제안이 뭘 의미하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들 정도의 강자 들쯤 되면 독립적인 공간을 창조하는 것쯤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공간을 새롭게 열 테니 그곳에서 싸우자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거기엔 썩 달갑지 않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대상을 한정시킬 경우 메타트론과 루시퍼는 그들 다섯의 결집된 힘을 한 번에 상대해야 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럴 경우 차원의 붕괴를 염려하지 않아도 좋으니 전력을 기울일 것이고 그 힘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에 대한 대책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차라리 개방된 이 곳에서의 대결이라면 상대의 약점을 적절히 이용할 수 있으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았다.
“좋다. 응하겠다.”
메타트론이 흔쾌히 수락하자 비밀차원의 지도자들은 진정 의외라는 낯빛이었다. 개중엔 감탄하는 자도 있었다.
이렇게 해서 그들 간의 대결은 결정되었다.
공간을 연 것은 캄파넬라였다. 그가 집중하는 때를 기해 그들 뒤에 늘어서 있던 우라노스들이 모조리 사라져버렸다. 메타트론은 한 방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속은 것이다. 우라노스들의 출현은 실체가 아니었다.
아무리 주의 깊게 보지 않았다지만 경탄이 절로 나올 만큼 완벽한 속임수였다. 확실히 비밀차원의 지도자들과 자신과는 서로 힘을 사용하는 방식에서 확연하게 다른 뭔가가 있었다. 큰 범주의 원리는 동일하겠지만 형상화되는 단계에서의 상이점은 분명하게 존재했다.
우라노스의 출현만 해도 그랬다. 아무리 그럴듯하게 만든다 해도 실체와 허상을 구분 못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은, 최강이라 자부하고 있는 자신에게 이건 수치스러울 정도의 실책이라 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적의 술수에 놀아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했다.
그건 대마신들이나 어둠의 천사들로 하여금 현 상황에 대한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메타트론과 루시퍼가 패한다면 자신들의 미래도 동시에 사라지는 것이다.
메타트론은 루시퍼를 주시했다. 자신의 아들이자 지금은 든든한 동료이기도 한 그를 향한 눈빛엔 신뢰가 충만했다. 그걸 루시퍼도 느낄 수 있었다. 파천이나 수호자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다. 메타트론이 헤르바르트를 직시했다.
“너희 다섯 모두가 함께 들어가나?”
한번 열린 공간이 닫히면 그 공간을 연 힘의 균형이 깨지기 전까진 외부로 나오지 못한다. 그 균형은 캄파넬라의 의지와 연동하기 때문에 그가 소멸한 경우거나 일시에 균형을 무너뜨릴 정도의 강력한 힘이 아니고서는 공간을 다시 열지 못한다.
그 힘의 수치라는 것이 단지 캄파넬라의 기준에 맞춰져 있는 것도 아니어서 더욱 강력한 힘이 요구되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 캄파넬라를 제압하지 못하면 그곳에서 나올 생각을 말아야 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메타트론은 다섯을 한 번에 상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 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몇몇을 남겨두고 가기엔 수하들의 안위가 걱정이다. 왜 자신이 이런 불리한 선택에 동조해야 하는지에 대한 회의감도 들었다.
따지고 보면 비밀차원의 붕괴가 장차 자신의 행보에도 그다지 좋지 않을 것이란 막연한 느낌만 있지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나빠질지에 대해선 모른다고 할 수 있었다. 단지 카오스란 존재가 현재는 이곳 비밀차원에 갇혀 있는 게 분명하고 자력으로 그 제약을 무력화시킬 수 없다는 것만 확인될 뿐이었다.
그런 염려 때문에 이런 불리함을 자초해야 한다는 건 너무 억울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결정된 일을 또다시 번복하고 싶지도 않았다.
한 가지 다행인 건 파천과 자신의 운명이 공유된다는 점이었다. 파천의 계획이 어디에 있든 자신의 생존을 전제로 하고 있을 것이고, 이런 경우까지를 대비했다면 자신은 어떠한 경우에도 생존해야 한다. 그렇다면 최악의 경우 파천의 개입이 있을 것이다.
비밀차원의 지도자들이 하나 둘 캄파넬라의 공간 안으로 사라지고 마지막으로 헤르바르트만 남았다. 그가 한 말이 메타트론을 자극시켰다.
“걱정마라. 우리 다섯이 함께 한다 해도 수적인 우위로 너희를 핍박할 생각은 없으니. 염려 말고 따라 들어와도 좋을 거야.”
그마저 사라졌다. 공간의 문은 아직 그들 눈앞에 열려 있었다. 루시퍼는 걱정이 앞섰다.
“왠지 불안하기만 합니다. 차라리 우리 쪽에서 공간을 열어 저들을 불러들이는 것이 어떨지 … .”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면 어쩌란 말인가! 메타트론은 루시퍼를 바라보며 힘차게 말했다.
“날 믿어라. 우리는 지지 않는다.”
메타트론이 들어서고 망설이던 루시퍼마저 사라졌다.
일곱을 삼킨 공간은 남겨진 어둠의 천사들과 대마신들은 메타트론과 루시퍼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면서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달리 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아사셀이 놀라 부르짖었다.
“너희들은 조금 전 분명히 … .”
빈델반트와 바르트가 조금 떨어진 곳에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어찌된 일인가? 캄파넬라가 연 공간 안으로 들어갔던 자들이 어찌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단 말인가?
의문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그들은 애초에 들어가지도 않았던 것이다. 둘 중의 하나였다. 우라노스들의 경우처럼 캄파넬라의 공간 안으로 사라진 자들도 허상이었던가, 그도 아니면 다른 이들이 위장한 것이던가.
어느 쪽이든 현재 대마신들 쪽을 노려보고 있는 두 사람은 분명 빈델반트와 바르트 본인들이었다.
“비겁한 자들. 이런 얕은 속임수를 한번도 아닌 두 번이나 쓰다니 … 그러고도 너희가 스스로 존재하는 존귀한 자라고 칭할 수 있더냐!”
아사셀은 적들에게 농락당한 사실인 너무도 분하고 억울하기만 했다. 그보다 더 큰 분노가 그의 마음을 빠르게 채워 갔다. 그건 다른 대마신들이나 어둠의 천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저들의 의도는 분명해졌다. 메타트론과 루시퍼에게서 자신들을 떼어놓는 것. 그리고 각개격파!
“비겁하다? 생존을 결해야 하는 전쟁터에선 어울리지 않는 말인 것 같군.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강구한다. 그리고 거침없이 망설임 없이 적을 섬멸한다. 공연한 자비심을 베풀지도 헛된 자만으로 대세를 그르치지도 않는다. 끝낼 수 있을 때 끝낸다.
과정이 아닌 결과만이 중요하다. 이것이 싸움에 임한 자의 수칙인 건 당연한 것 아닐까? 그리고 얕은 수작에 두 번이나 농락당할 정도로 무능한 자들이 수치를 논하기엔 적당하지 않은 것 같군.”
빈델반트였다.
그나, 입을 꾸욱 다물고 있는 바르트나 이런 비열한 작전에 동의할 생각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비난하는 입장을 취해 왔었다.
하지만 모든 돌아가는 상황이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키케로의 위협에 카오스의 등장, 거기다 내부적인 불안까지 겹치자 캄파넬라의 제안은 거절하기 힘든 달콤한 유혹일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살아남고 봐야 한다. 그 이외의 가치는 더 이상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들은 적어도 현재의 구도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는 위인들이었다. 굳이 신을 언급할 필요성도, 영계를 정벌하자는 주장 따위를 펴고 싶어 하지도 않는 온건성향의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자신들의 생존마저 위협받게 된 지금 그들이 이것저것 가린다는 건 사치란 생각이 들었다. 이 자리에 아퀴나스만이 제외된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가 비밀차원의 최고지도자였음에도 배제되었다는 것, 그만큼 생존의 욕구가 간절했기 때문이다.
아퀴나스가 이 계획을 알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시작도 해보기 전에 산통이 깨졌을 것이다. 그의 완벽을 추구하는 성품이 이런 암계를 허락할 리가 없었다.
어쨌든 이렇게까지 된 마당에 이젠 실행하는 일만 남았다. 보아하니 자신들에게 맡겨진 몫은 그다지 힘들일 이유가 없을 듯했다. 바르트는 적들의 무리 중에 딱 둘 정도만을 가려냈고, 나머진 사실 직접 손을 대기조차 부끄러운 대상이라 생각했다.
영광스럽게도 그 둘 중의 하나로 분류도니 아사셀이 대마신들과 어둠의 천사들에게 지시를 내린다.
“모두 마음의 준비를 해라.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저런 것들에게 당한다면 우리가 천궁을 벗어난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이 되겠는가!”
그는 천사였던 때를 언급했다. 타락한 천사. 모두에게 그렇게 불려야 했던 오명을 감수하면서까지 선택한 길이었다. 자유를 찾아, 새로운 가치를 찾아 떠난 길이었다.
비록 때때로 돌아온 길을 되돌아볼 때가 있었지만 단 한 번도 당시의 선택을 후회해본 적은 없었다. 그들은 이보다 더한 위기에 처했던 때를 기억해냈다.
마지막이란 예감을 떨쳐 내며 지금껏 생존을 이어 왔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지금껏 최선을 다해 왔었다. 그런데 그 결말을 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질 수는 없었다.
타의에 의해 그 길을 중단해야만 했던 동료들을 대신해서라도 이렇게 끝나서는 안 되었다.
“모두 정신들 차려. 우리가 힘을 모으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 자신의 능력을 믿어라.”
어둠의 천사를 이끄는 자의 목소리도 간절함을 담고 있었다. 빈델반트는 그런 그들이 안쓰럽다고 생각했다. 해보나 마나한 싸움이다.
‘이런 짓은 정말이지 … 하고 싶지 않았는데.’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들 앞에서 마지막을 예감하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 자들의 모습이 남의 일 같지가 않다. 그것은 또 다른 자신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바르트가 말했다.
“빈델반트,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어서 끝내자.”
“그래, 다른 길은 … 없겠지.”
그들이 싸움을 준비하고 있을 때 메타트론과 루시퍼는 한참 격전 중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둘을 상대하는 이는 코모라와 헤르바르트였다. 이때가지도 메타트론과 루시퍼는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메타트론은 코모라와의 대결에서 약간의 우위를 점했고, 루시퍼는 헤르바르트와 박빙의 승부를 이어 갔다. 누가 더 집중력을 가지느냐에 따라 승패는 갈릴 것 같았다.
지켜보던 캄파넬라는 의외의 결과에 몹시 긴장하고 있었다. 메타트론의 경우야 충분히 나올 수 있는 결과였지만 루시퍼의 대등함은 정말이지 충격에 가까웠다.
비밀차원은 루시퍼를 천궁의 대천사 정도로 기준을 잡고 있었다. 그들 중 그 누구도 두려워할 만큼 부담스런 존재는 없었다. 그럼에도 천궁이 무서운 점은 헤아리기조차 힘든 천사들의 막대한 수와 그 하나하나가 끔찍스러울 정도로 잘 훈련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어쨌든 메타트론에 대한 부담이 있었음에도 자신들 중 셋이면 둘을 충분히 제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젠 장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아직은 양쪽 다 개입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지만 코모라는 얼마 가지 않아 바닥을 보일 것 같았다.
메타트론은 서둘지 않고 조금씩 코모라를 몰아가고 있었는데 그 수법이 치밀하기 그지없었다. 캄파넬라는 메타트론의 공격 수법을 면밀히 살폈다. 언제든 힘을 보태야 할 때를 대비해서였다. 이왕이면 약점이라도 발견해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테지만 그런 게 쉽게 포착될 리는 없었다.
메타트론은 화려함보다는 지극히 실용적인 공격을 선호하는 것 같았다. 빠르고 강한 타격 위주의 공격이 주를 이루고 있었고, 상대의 공격에 대한 방어도 성질 파악이 안 되면 자신의 몸을 공간 중에 흩어버리는 정도로 무산시켰고, 파악이 되면 그냥 몸으로 부딪치며 깨트려 버렸다.
그에 비해 코모라는 정신을 쏙 빼놓을 정도로 화려한 공격에 비해 실속이 없었다. 휘황찬란한 빛 무리를 몰고 다니는 건 기본이고 화염과 번쩍이는 빛으로 정신없이 공격을 해댔지만 어느 것 하나 메타트론을 곤란하게 만들지 못했다.
점차 시간이 흐르며 메타트론의 마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분신들이 공간 중에서 불쑥불쑥 마구 튀어나오며 공격을 가하기 일쑤였으며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지거나 흩어지며 움직임을 둔화시켰다.
갖가지 환영이 실체를 이룬 채 공격해대니 그것도 집중력을 깨트리는 요소가 도니다. 결정적으로 메타트론의 움직임은 이제 더 이상 눈으로 좇을 수 없을 빠름을 가지기 시작했다. 코모라에 대한 파악이 끝난 것이다.
이쯤 되고 보니 금방이라도 승부가 날 것 같았다. 이때 캄파넬라가 개입했다. 메타트론은 잠시 움찔했을 뿐 빠르게 적응해 갔다. 둘의 합공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다지 힘겨워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