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79화 : 메타트론과 마계의 지배자들
메타트론과 마계의 지배자들
파천이 움직일 생각을 않는다. 가만 웅크리고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분위기가 워낙에 심각했던지라 누가 나서서 물어보려고도 않는다.
회색 하늘을 응시하는 시선엔 무거운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었다. 고뇌의 기색이었다. 하지만 어떤 확신으로 가득 차 있음이 분명했다. 카오스의 위협도, 적의 출현도 없었다. 고요하고 평안했다.
선발대는 오히려 이런 평화로움이 갑갑하고 불안했다. 수호자는 파천이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그의 행보가 어디를 향해 있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게 되었음에도 굳이 확인하려 들지 않았다. 파천에 대한 이런 무조건적인 신뢰는 최종적인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이해하기 때문이었다.
우르릉
멀리서 들려오는 대기의 진동음은 여리고 약했다.
하지만 선발대원들은 저마다 강한 의혹을 드러냈다. 또 무슨 일인가가 벌어지려 한다는 걸 직감했다. 자신들이 모르는 어떤 일이 지금 벌어지려 한다는 걸 직감했다. 자신들이 모르는 어떤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비밀차원에 발을 들인 이상엔 자신들도 그 변화에 포함될 수밖에 없었고 그걸 거부하거나 마다할 일도 아니었다.
현재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진행 상황도 전혀 파악하거나 예측 할 수 없다는 답답함이 결국엔 라미레스의 입을 열게 만들었다.
“파천, 이 소리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나? 우리가 알아서 곤란한 일이 아니라면 대답해줬으면 좋겠다.”
“메타트론이 싸움을 시작했다.”
파천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호자가 놀라는 것에 비해 라미레스는 강한 호기심을 나타냈다.
“누구와? 카오스와? 아니면 이곳의 여섯 지도자들과?”
“카오스는 아니다. 카오스는 나처럼 방관하고 있다.”
파천의 그 말은 여러 측면에서 의미심장했다.
“여섯 중에 하나가 떨어져 나갔고, 다섯과 사투를 시작했다. 그 싸움은 새로운 국면을 열 것이다. 그리고 … .”
“그리고?”
“그리고 내가 원하는 상태가 되겠지.”
바로 그것을 라미레스는 알고 싶었다. 파천이 원하는 상태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하지만 파천은 더 잇아 입을 열지 않았다.
수호자가 걱정스레 말했다.
“위험한 도박을 하는 건 아니겠지.”
“감수해야 할 일이다.”
“그 방법밖에 없나?”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허나 가장 빨리 결과를 얻어내는 길이다.”
“예측이 빗나갈 수도 있다. 그럴 때에 대한 대비도 되어 있는 거겠지?”
“아니. 그 이후는 생각해둔 바도 없다. 그럴 수도 없고. 위험은 단 하나, 메타트론이 내 예상보다 약할 경우에만 해당된다. 그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할 테고 모든 건 원점으로 돌아간다. 이쪽도 저쪽도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게 된다.”
“왜 그렇게 서두르지?”
“시간과의 싸움이다.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승리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최대한 보존한 상태에서 승리를 얻으려면 서둘러야 한다. 그러다보니 조금 무리한 계획을 세우게 됐다. 그러다보니 조금 무리한 계획을 세우게 됐다.”
“아직까지는 차질이 없나?”
“그런 편이지.”
수호자도 사실 파천의 계획을 속속들이 짐작하고 있진 못했다. 단지 메타트론과 카오스, 그리고 비밀차원의 지도자들을 이용해 파천이 획책하고 있는 일이 달성될 경우 최종 목표를 이루는 시기를 앞당겨준다는 것 정도였다.
제한시키지 못한 메타트론의 힘은 비밀차원의 지도자들을 긴장시켰다. 그를 당해내지 못해서가 아니라 힘의 여파가 미치는 영향 때문이었다.
셋이 메타트론에게 들어붙어 상대했음에도 그 여파를 줄여놓지 못했다. 절반쯤은 외부로 향하는 힘을 차단시키는 데 주력하다 보니 집중력이 분산돼 되려 상대하는 데 애를 먹을 지경이었다.
그들과는 반대로 메타트론은 거칠 것이 없었다. 솔직히 비밀차원이 어떻게 되는지가 그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이제 그런 걸 따질 계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메타트론도 슬슬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둘까지는 모르나 셋을 상대하면서 여유를 부릴 수도 없으니 하나씩 죽어 나가는 수하들을 가만 보고만 있어야 했다.
하지만 메타트론은 더 이상 그런 데 정신을 분산시키지 않는다. 마음을 모질게 먹었다. 메타트론은 자신을 상대하고 있는 자들을 다른 곳으로 유도했다. 이리 저리 끌고 다니며 마구 헤집어 놓았다.
한 번씩 제대로 부딪치며 그 일대는 초토화되어 남아나는 게 없었다. 수천 개의 벼락을 모았다 한 번에 터뜨리는 듯한 폭발의 범위는 점차로 넓어져 갔다.
메타트론이 상대하고 있는 것은 헤르바르트와 코모라와 빈델반트였다. 헤르바르트는 근거리에서 타격 전을 유도했고, 코모라는 그보다는 원거리에서 빈틈을 노렸다.
빈델반트는 틈틈이 공격을 하는 동시에 충격의 여파가 외부로 퍼져 나가는 것을 최대한 억제시키는 데 주력했다.
숨 돌릴 틈 없이 몰아붙이는 순환공격에도 불구하고 메타트론은 잘 적응하고 있었다.
그는 싸우면 싸울수록 더 힘을 내고 있었으니 상대하던 자들도 혀를 내두른다. 왜 그가 천사들 중 전투에 관한한 최강이라 불렸었는지를 알만 했다.
메타트론의 마력은 상대의 힘을 이용하는 데 탁월했다. 작은 힘으로 큰 힘을 끌어들여 역공하니 당하는 입장에서는 진이 빠지는 일이었다. 되도록 정면충돌을 피하고 결정적인 틈만 노려 위협하곤 했다.
양측 다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지 못해 이래저래 시간만 보내고 있었지만 메타트론은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이제 조바심을 내는 건 오히려 비밀차원의 지도자들이었다. 한다고 했는데도 충격을 완전히 차단시키지 못하니 그럴 만도 했다.
루시퍼도 바르트를 다른 곳으로 유도했다. 둘의 대결은 승부를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접전이었다.
루시퍼는 아래쪽에다 마력으로 소용돌이를 만들고 자신의 위치가 항상 바르트의 위가 되도록 했다. 그런 시도는 의외로 효과가 컸다.
결정적으로 이득을 주진 못했지만 아무것도 아닌 소용돌이 하나도 해소시키지 못한다는 바르트를 자극시켰다. 게다가 집중력이 흩어지니 회심의 공격도 주효하지 못하곤 했다.
둘의 대결로 발생하는 여력도 만만찮았다. 대지가 칼로 이리저리 그어놓은 듯 갈라지기 일쑤였고 높은 산과 구릉이 흔적 없이 사라지거나 깊이를 모를 골을 만들어놓기도 했다.
갖가지 환상이 펼쳐져 서로를 미혹시키고 공간이 비틀리며 대기를 불안정하게 했다. 전력을 다한 부딪침에도 둘은 승부를 보지 못했다.
이런 결과가 루시퍼보다는 바르트를 더 조급하게 만들었다. 루시퍼는 상대를 본래보다 더 높게 보았다가 평수를 이뤄 반가운 심정이었고 바르트는 반대의 경우였다.
심리적인 안정은 제 실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 해주는 법이다. 그러니 용기를 얻은 루시퍼의 힘은 배가 되었고, 바르트는 흔들리고 있었다. 얼마만한 능력을 갖고 있고 다룰 수 있는 힘이 어느 정도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사실은 그 힘을 어떻게 유효적절하게 응용하느냐가 근소한 차이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루시퍼는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상태로 안정되어 가고 있었다.
메타트론도 루시퍼도 큰 위기 없이 잘 싸우고 있는 반면에 대마신들과 어둠의 천사들은 캄파넬라 하나를 당해내지 못해 애를 먹었다.
캄파넬라는 영악하게도 이쪽을 치고 반대쪽을 처리하는 방식으로 수를 줄여놓고 있었다. 무리 중 가장 약한 자부터 목표물로 잡고 야금야금 구석으로 몰아갔다.
서로 간에 워낙에 현격한 차이가 있어 그 간격을 좁히기엔 무리가 따랐다. 그나마 대마신들은 아사셀을 중심으로 뭉치기라도 했지만 어둠의 천사들은 독자적으로 틈을 보려 했다.
캄파넬라의 전신이 새하얗게 변하는가 싶더니 끝내 투명해진다. 곧 이어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빛이 외부로 뿜어졌다.
빛의 가닥은 직선이 아닌 종잡을 수 없는 곡선으로 쏘아졌다. 이런 간단한 속임수에도 대처하지 못하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반응하는 속도보다도 빠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눈앞에 멀쩡히 있는 줄 알았는데 어느새 배후로 접근해 있고 사방을 경계하면 사라져 종적을 감춘다.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튀어 나오니 무슨 수로 막을 수 있겠는가?
빠르고 강한 타격은 한 번도 빗나가지 않았다. 아사셀은 마지막을 직감했다. 하나씩 쓰러져 가는 동료들을 보며 안타까움을 삼킬 따름이었다. 메타트론이나 루시퍼도 자신들을 돌볼 여력이 없음을 알기에 원망하는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애초에 비밀차원은 그들에게 무리한 도전이었던 것이다. 그걸 이제 알게 된 것이 후회가 될 따름이었다. 마지막 순간이, 한 방울의 잠력까지 끌어내는 후회 없는 싸움이 아니라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마지막을 예감하자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바알세불!’
하필이면 이런 순간에 왜 라미레스를 떠올리는 걸까? 대마신들 중 첫 번째를 다투었던 그야말로 그의 기억에서 진정한 경쟁자로 불릴 만했었다. 그와 다시 싸워보고 싶었다.
‘네 표정엔 후회가 없더구나. 대마신의 자리를 버리는 걸 보고 어리석다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야. 지금 있는 그 자리가 네겐 무척이나 잘 어울려 보였어.’
아사셀은 보았다. 바알세불에 이어 사람으로 대마신에 오른 브리트라의 최후를.
브리트라는 웃고 있었다. 허망한 웃음 뒤에 숨은 비애를 아사셀은 보았다. 뭐가 그리 아쉬웠던 걸까? 그는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었다.
“멸망이라도 좋습니다. 결말을 볼 수 있다면 좋겠네요. 내 선택의 결과가 어떤 열매를 맺을지가 궁금합니다.”
그는 끝내 그 결말을 보지 못하는 것이 원통했던 걸까?
아사셀은 생각했다.
‘한때 이들을 신과 동격으로 여겼던 때가 있었다. 비밀에 싸여 있던 자들. 창조되지 않고 신에 기대지 않는 유일한 피조물이라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신비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자들. 그래서 루시퍼님은 어떻게 해서든 손을 잡아보려고 애썼었다. 그런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자들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되자 그걸 마치 극복한 듯 생각하다니.
어리석었어. 역시 우리들에겐 아직 무리였던 거야. 역시 우리는 메타트론에겐 언제든 버려질 수 있는 하잘 것 없는 수단에 지나지 않았던 거야. 자신의 영광을 위해 바쳐질 제물 같은 … .’
다사도, 타루나도, 찬드라도 어김없이 마지막을 고했다. 이제 남은 건 아사셀과 라곤의 왕이라 불렸던 메피스토뿐이었다.
메피스토의 술법은 캄파넬라에겐 유치한 장난과도 같은 것이었다. 술법이 무용하니 그가 할 수 있는 건 피하는 게 고작이었다. 지금껏 버틴 것만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둘밖에 안 남자 캄파넬라는 조롱하듯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메피스토가 아사셀에게 부탁했다.
“내 생명을 바쳐 마지막 술법을 쓰겠다. 제발 … 허락하라.”
메피스토의 눈가에 흐르는 핏줄기를 보고 아사셀은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메피스토의 말을 듣고 캄파넬라는 호기심이 생겼다. 그는 기다렸다. 아무리 타락했다지만 한때는 천사였던 자가 술법을 알 리가 없다. 인간들의 술법은 어떤 경로를 통했든 그 근원은 옛용이다.
그렇다면 메피스토의 술법이란 것 역시나 옛용의 것일 가능성이 컸다. 팔짱을 끼고 지켜보는 캄파넬라를 노려보며 메피스토가 저주의 말을 퍼부었다.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지 마라. 당장은 이기지만 네 뼈와 살은 내가 취하리라.”
아사셀의 뒤에 가서 선 메피스토의 손이 아사셀의 머리 깊숙이 박혀 들어갔다.
“으음.”
잠시 통증을 호소했던 아사셀은 곧 무감각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머릿속이 화끈해지며 전신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상쾌해졌다.
힘차고 강한 기운이 전신을 가득 채우고 있는 느낌은 점차 어떤 확고한 실체로 결집되어 갔다. 메피스토의 몸은 화염에 싸여 있었다. 붉고 푸른 불꽃은 전신을 반분한 채 타오르고 있었으며 그 경계는 조금씩 허물어지더니 급기야 하나가 되었다.
“아사셀 … 확신을 가져라. 네 영혼은 … 비틀린 존재들의 … 저주와 염원을 동시에 소유한다. 네가 원하면 그들도 원한다. 네게 … 마르지 않을 힘을 공급해주리라. 너를 이길 자, 골육으로 된 자들 중에서는 없을 것이니 … 그 모두를 지배하게 되리라.”
“크아아악.”
아사셀이 고통에 차 비명을 질렀다. 바로 그때였다. 온몸이 불타오르던 메피스토가 아사셀의 머릿속으로 순식간에 빨려들어 갔다. 그리고 그의 흔적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아사셀은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고 엎어져버렸다.
캄파넬라는 뭔가 섬뜩한 느낌이 들어 주변을 슬쩍 돌아보았다. 전신이 쭈뼛 설 정도로 으스스했다.
‘예감이 … 좋지 않다.’
캄파넬라는 마지막 남은 아사셀을 소멸시키고자 손을 뻗었다.
카오스는 누구와 했던 어떤 약속이라도 언제든 파기할 수 있었다. 마음 내키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정하고 행한다. 그에게는 의지만 있을 뿐 마음은 없다. 기쁨도 슬픔도 거짓으로 꾸며낼 수는 있고 흉내 낼 수는 있지만 진정으로 그런 감정을 느끼지는 못한다. 아예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아퀴나스와 했던 약속을 파기하면서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하긴 아퀴나스도 카오스가 약속을 지켜줄 거라곤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좀 엉뚱했다. 아퀴나스가 미리 대피시켰던 비밀차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잊혀진 공간을 찾아낸 것이다.
찾아냈을 뿐만 아니라 폐쇄된 공간의 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아퀴나스가 입구를 숨겨놓았기에 그간은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메타트론과 비밀차원의 지도자 사이에 벌어진 싸움의 여파로 차원에 미세한 균열이 발생하고 그로 인해 감춰뒀던 입구가 드러나 버린 것이다.
열린 공간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지도자들을 찾았다. 그런데 그들을 반긴 것은 카오스였다.
카오스가 원하는 것은 부족한 힘을 채워줄 사람들의 변화무쌍한 마음이었다. 분노와 슬픔과 두려움을 비롯한 갖가지 감정의 동요가 그에겐 절실했다. 몇몇이 공급해 주는 것만으로는 양에 차지 않았고, 그래서 지금껏 잊혀진 공간의 입구를 찾아 헤맸던 것이다.
“키케로를 이기기 위해서 너희들이 필요하다. 내 제물이 되는 것을 허락하라.”
카오스는 갖가지 모양으로 그들을 미혹했다. 전혀 방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카오스의 급습에 놀란 자들은 분분히 흩어졌다. 그들은 비밀차원 전체로 퍼져 나갔다.
확산의 속도는 빨랐다. 그보다 빠른 것은 카오스가 곳곳에 안배한 그들을 위한 함정이었다. 애초에 아퀴나스가 염려했던 것처럼 카오스에게 그들은 재물에 불과한 미약한 존재였다. 흔들림을 잡아줄 지도자가 없기에 더했다. 이런 처지를 아퀴나스가 다른 지도자들이 알아 챌 때쯤에는 벌써 카오스의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되고 난 후가 될 것이다.
쿠사누스들을 향한 제왕들의 집요한 공격은 그들의 원(怨)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집착은 쉽게 떨쳐지지 않는다. 제 것이라 믿었던 것을 강탈당하고 그것도 모자라 갖가지 참기 힘든 모욕과 수난을 견뎌야 했으니 그 심정의 처절함이야 오죽했겠는가!
다행히 하룬과의 연합이 성사되어 원한을 갚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잃어버린 것을 찾을 길은 없겠으나 짓밟힌 자존심은 회복할 수 있었다. 다시 오지 않을 마지막 기회 앞에 그들은 모든 걸 걸었다.
쿠사누스의 압도적인 수적인 우세가 제왕들을 어렵게 만들었다. 하나씩 끌어내 다룬다면 쉽게 처리할 수 있겠지만 그들은 결단코 무리를 떠나는 일이 없었다. 로메로는 그 싸움에 집중했다.
전선 중에 가장 치열한 접전이 한창인 그곳이야말로 이번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을 분수령이 될 것이란 판단을 한 것이다. 로메로는 지체하지 않았다. 각 군단의 허점을 보완하고 때로 적진에 침투해 혼란을 일으키곤 하던 지혜전사들을 모조리 외곽으로 빼냈다.
라아그와의 싸움에 열중하다 지금 막 몸을 빼낸 홀딘을 비롯한 네 명의 부단주들에게 명령했다.
“제왕들을 도와 쿠사누스들의 밀집된 힘을 분쇄한다. 그 지점이 이번 전쟁의 승부처이니 결단코 밀려나서는 안 된다.”
이길 수 없겠거든 옥쇄하라는 뜻이었다.
전체적인 흐름을 훑어가던 홀딘도 로메로의 의견이 맞다는 걸 알아보았다. 다른 곳들과는 달리 유독 난전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뒤로 밀려나고 있었던 것이다.
제왕들만으로는 쿠사누스들의 단합된 힘을 감당하기 힘이 드니 몇 개의 부대가 힘을 거들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것이 제왕들의 활약을 제한시키고 있었다. 어느 정도 감당할 수준이 돼야 보조라도 맞출 텐데 거드는 자들의 능력이 한참이나 떨어지니 도움은커녕 거치적거리는 장애로 작용했다.
부단주들이 명령을 받고 제왕들의 뒤를 받치자 1 군단의 병력이 뒤로 빠져 다른 곳을 막았다. 로메로는 단숨에 뚫겠다는 생각에서였던지 그들만으로도 안심이 안 됐던지 몇 명을 더 보강했다.
로메로가 충원시킨 자들은 다름 아닌 무한계의 최강자들이었다. 화신해서 사우는 데는 최고라고 공인되었던 분트발과 거신족 출신으로 역시나 최강으로 불렸던 카라반, 카나의 친위대였던 불칸과 몰간이었다.
그들이 가세하는 걸 보고 로메로와 함께 전체적인 전세를 지휘하고 있던 제석과 노군도 직접 싸우겠노라고 자원했다. 하지만 로메로는 그들까지 가세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리고 그들을 지금껏 전선에 투입시키지 않는 건 사실 다른 이유가 있었다. 마계가 고전하고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귀계의 전력이 보이지 않았다. 대등한 동맹이 아닌 구색맞추기식 들러리로 참전했다지만 이런 대규모 전쟁에서 그들이야말로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는 전력이었다.
그런데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로메로는 이상하게 생각한 것이다.
‘그들은 분명 이번 싸움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제석과 노군은 그때를 대비해야 한다.’
무한계의 강자들 치고 귀계를 어려워하지 않는 자들은 흔치 않다. 속성의 본래적인 차이로 인한 것이었다. 귀계의 천적은 천상계와 선계다. 특히 칠성이 직접 참전할 경우 제석과 노군은 훌륭한 방패가 될 수 있었다.
한편 한창 접전을 펼치던 제왕들 쪽에 지혜전사들이 대거 힘을 보태자 쿠사누스들의 기세가 주춤했다.
거기다 분트발 등이 가세하자 힘의 균형이 오히려 제왕들 쪽으로 기우는 것이었다. 쿠사누스는 제왕보다 약하다. 하지만 둘이나 셋이 힘을 합하면 제왕 하나를 감당할 수 있었다. 지혜전사와 쿠사누스들을 비교해도 그 정도의 우열이었다.
이러다 보니 제왕들에게 집중되던 조직적인 공격이 분산되기 시작했고, 훨씬 자유로워진 제왕들이 활개치고 다닐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차에 제왕들에 비해서도 전혀 손색이 없는 분트발 등이 힘을 더했으니 힘의 균형이 무너진 것이다.
뒤에 있던 마르시온도 그런 변화를 간파했다. 제왕의 군대는 마계군과 마찬가지로 쿠사누스들이 주력이었고 나머지는 머릿수를 채우는 정도에 불과했다.
쿠사누스들이 뚫린다면 그 여파는 걷잡을 수 없게 되고 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급한 나머지 마르시온이 직접 몸을 던졌다.
밀고 밀리는 틈바구니 사이에서도 사상자는 무수하게 발생했다. 처음의 혼전 때보다는 늘어가는 속도가 빠르지 않았으나 이대로 간다면 누가 이긴다 해도 생존자가 극소수에 지나지 않을 것 같았다.
로메로도 헤르파도 그걸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전력을 후퇴시킬 수도 없었으니, 어느 한쪽이라도 먼저 물러서는 순간 맞물려 돌아가던 힘의 균형이 일시에 무너지며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될게 뻔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는 걸 그리도 염려했거늘 결국에는 … .’
로메로는 전세가 비록 유리하게 흘러가곤 있었지만 그럼에도 가슴이 아팠다.
정작 이 싸움을 주관하고 종결지을 당사자들은 빠진 상태였으니 더 한심한 노릇이었다. 로메로의 머릿속은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현재의 상태에서 전력을 후퇴시킬 경우 발생할 수 있는 피해와 적의 선택을 가늠해보는 중이었다.
아무리 짚어보아도 길은 없었다. 그 끝이 어떠할지를 뻔히 알면서 걸어가야 하는 심정은 그래서 더 무거웠다.
헤르파가 한참 정신없이 싸우고 있는 마르시온에게 영언을 보냈다.
[아무래도 퇴각시켜야겠소. 변화가 생기면 뒤로 신속하게 병력을 후퇴시키시오.]
마르시온은 느닷없는 헤르파의 통보에 얼떨떨한 심정이었다. 미리 얘기가 오간 바가 있지만 지금이 과연 퇴각을 결정해야 할 정도로 위기 상황인지 잘 납득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도 곧 수긍하고야 만다.
‘하긴 단번에 결판을 낼 상황은 아닌 것 같으니 잠시 숨을 돌리는 것도 나쁘진 않겠어.’
사실 그는 지금 상당히 곤혹스러워하고 있던 참이었다. 하룬의 전력이 생각했던 것보다 막강했고, 이기고자 하는 결의에 있어서도 자기네들을 앞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잘 것 없이 여겨질 정도로 약한 자들까지도 죽기 살기로 덤볐고, 싸우다 죽게 된 것을 무슨 큰 영광이라도 되는 것처럼 엄숙한 표정인 것이 놀라웠다. 전력의 차가 없는 소모전이니 결국엔 수적으로 열세인 자신들이 불리한 셈이었다.
마지막까지 가면 남는 건 어쨌든 하룬이라는 결론이었다.
헤르파는 라넷에게 명령했다.
“준비하고 있는 자들에게 가보라. 명만 전할 것이 아니라 직접 지휘를 맡아줬으면 좋겠어.”
“이러면 이번 격돌은 탐색전이 되는 건가?”
“그런 셈이지.”
헤렘이 시큰둥해서 종알거렸다.
“이른 판단인 것 같은데. 적의 사기를 올려줄 필요가 있어? 퇴각해봤자 달리 뾰족한 수가 없잖아. 하룬이야 먼저 싸움을 걸어오진 않을 테니 무한정 기다릴 것 같고. 시간을 벌게 해주면 저들은 더 튼튼하게 방비할 텐데 … . 기습해서도 소득이 없었는데 준비하고 있는 적을 쳐봐야 뻔한 거지.”
헤렘의 말을 다 듣지 않고 라넷은 그곳에서 사라졌다. 헤렘이 다시 말했다.
“아버지 루시퍼가 없는 한 이기긴 틀렸어.”
바로 그때였다. 넓게 퍼져 있던 최전선의 한곳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미세한 양이었지만 그건 이내 두텁게 방벽을 세우며 넓은 지역을 가득 채웠다.
먹구름 사이에 갇힌 자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시야가 흐려지더니 사물이 구불구불 비뚤비뚤 굽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 움직임이 현저하게 느려졌다. 방벽은 높게 솟아 양쪽의 진영을 반분시켰다. 그리고 마계와 제왕의 군대가 퇴각했다.
“저 현상은?”
후방에서 지켜보고 있던 로메로가 놀라서 외치자 제석이 대답했다.
“귀계의 짓이오. 그들이 드디어 나타났군. 이제 내가 나설 차례가 왔구려.”
로메로는 방벽 너머의 움직임에 주목했다.
마계와 제왕의 군대가 물러서고 있었다.
급작스런 변화에 잠시 당황하던 아군들이 정비하며 그들을 뒤따르려 하고 있었다.
로메로가 지휘관들에게 추적하지 말 것을 명했다.
“제석께서 나설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로메로의 명령에 따라 하룬의 전력도 뒤로 물러나 전열을 정비했다. 방벽이 사라지고 훤히 트인 전방으로 더 이상 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로메로는 귀계를 이런 식으로 써먹었다는 점에서 마르시온이나 헤르파가 이번의 접전을 탐색 정도로 생각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후속 공격 때는 분명 귀계도 함께 올 것입니다. 그때 제석과 노군의 활약을 기대하겠습니다.”
로메로는 당장이라도 추적해 결단내자고 하는 제석과 노군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곧 바로 지휘관들을 한군데 모아들였다.
대충 살펴본 바로도 피해 상황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하지만 몇몇 지휘관들은 적의 피해에 더 신경을 쓰는 모습들이었다. 기습을 당하고서도 이 정도의 전과를 올렸다는 사실에 고무되어 있었다.
로메로는 간략하게 회의를 마친 후에 제왕들을 따로 불렀다. 그들에게 물었다.
“쿠사누스들을 상대해보니 어땠습니까?”
제왕 중 하나가 말했다.
“상대하는 건 모르겠으나 역시 제압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요.”
“충원도니 전력으로도 벅차던가요?”
“쿠사누스들은 연동하는 능력이 탁월하오. 하나가 모자라면 다른 하나가 채우고 그 빈 자리를 또 다른 하나가 와서 채우지요.
그러다 보니 때로 하나였다가 둘인 것처럼 벅차고, 셋이나 넷이 되면 격퇴되는 것이오. 그 변화를 종잡기 힘이 드니 그들과 싸워 본 경험이 없는 이들이라면 적응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오. 일시 늘어난 힘을 당해내지 못한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은 더 강한 힘을 내게 되어 있소. 그러니 결과를 장담하기엔 이르오.”
“저들 동맹군은 핵심인 두 축에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마계전사들과 쿠사누스. 둘 중 하나만 무너뜨려도 저들은 쉽게 무너질 것입니다.”
“모르는 바는 아니오만 쉬울 것 같진 않았소.”
마계 전사들은 경계할 정도로 막강하다고 할 순 없었지만 퇴치하기 쉽지 않았다. 웬만한 공격으로는 흠집조차 낼 수 없는 질기고 단단한 신체도 그렇거니와 무엇이든 배우고 습득하는 속도가 빠르고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타격기술을 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도 그랬다.
게다가 그들은 두려움을 몰라 용맹스럽고 제 목숨을 아끼지 않으니 후퇴를 모른다. 기세에 억눌려 당황하다보면 앞서는 실력을 갖고서도 당하기 마련이었다.
제왕 중 하나가 차라리 수뇌를 치는 방법을 강구해보자고 했다. 마르시온과 헤르파를 동시에 노리자는 뜻이었다.
“침투 조를 구성해 접전이 벌어진 틈을 타 적의 배후로 접근하면 가능할 것도 같소만. 마르시온은 모르겠지만 마계사령관은 성공 가능성이 높아 보였소. 그를 지키는 자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 역시 그다지 부담스런 존재들은 아닌 것 같고.”
로메로는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못내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헤르파가 비록 루시퍼의 양자로 마계군을 이끌고 있지만 그가 누구인가! 적의 수괴이니 척살한다고 해서 누구 하나 나무랄 사람이 없겠지만 후에 파천을 무슨 면목으로 대한단 말인가?
그가 의당 했어야 할 일을 했노라며 개의치 말라고 하겠지만 그 부담감이 어찌 작다 할 수 있으리요. 또한 그 일을 자임해 나설 이가 있을까도 의심이 갔다.
군령의 권위로 강권하자면 못할 것도 없었지만 그도 할 짓이 아니었다. 일단 그 안은 제외시켰다.
로메로는 제석과 노군을 비롯해 수뇌들과 차례로 연석하며 방비의 측면이 아닌 적극적으로 적에 대한 섬멸 책을 강구하기에 안간힘을 기울였다. 그래서 모아진 결론이란 것이 먼저 적을 치려고 일어설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기다려 상대하고, 개전되면 최대한 피해를 줄여 적을 제압할 방안을 모색했다. 다행히 대덕이 있어 귀계의 더함은 방비할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