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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검 – 89화


달빛에 드러난 삿갓 괴인의 용모는 한 자루 검에 목숨을 걸고 있는
흑의무사마저 두려움에 젖게 할 만큼 공포스런 것이었다.
삿갓 아래로 드러난 턱은 달빛에 반사되어 청광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얼굴을 감싸며 흘러내린 머리털은 핏빛이 분명했다. 어찌 인간의 얼굴이
푸르고머리털이 붉을 수 있단 말인가? 흑의 사내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지척간이라 잘못 본 것은 분명 아니었다. 더군다나 괴인의 한쪽 소매는
간간이 스치는바람결에 몸을 맡기고 펄럭이고 있었는데 그것이 더욱 상대에
대한 공포를 가중시켰다.그는 뒷걸음치며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나
변함없는 믿음을 주던 주군을 향하는 눈길엔자신으로서는 감당하지 못할
한계상황에 직면한 구원의 의미가 담겨 있었지만 이내 그는그 생각을 포기해야만 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주군의 얼굴이 평소와는 분명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고 자신의 짧지 않은 생애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저것은
공포의 표정이 분명했다. 세상에 무서울 것 없어 보이던 혈수천자의
이런 태도는 대체 무슨 연유란 말인가?

‘헉…… 저자의 용모는 바로 혈마천의 이총사가 사형에게 주의를
주었다는 바로 그……’사형은 그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혹시라도 중원에서 얼굴이 푸르고 머리털이 붉고 외팔이인
괴인을 만나게 된다면 무조건 도망쳐라.
혈마천 이총사의 말을 종합해 보면 그 자는 본 천황부에서 사부님을 제외하고
우리들 중 그 누구도 상대할 수 없는 괴물임이 분명하다. 괜히 체면 따위를 생각하다
헛되이 생명을 잃지 말고 내 충고를 깊이 새겨두는 것이 좋을 게다.
혈수천자의 눈은 더 이상커질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되었고 그의 입은 슬며시 벌어지고 말았다.

`너, 너는 대체 누구냐?’

스스로의 음성이 떨려 나오고 있음은 추호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 같이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인물이 이 정도로 망가지는 모습을
보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설사 죽음의 위기가 닥친다 하더라도 생명을
구걸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지 않을 위인이 바로 이런 류의 유형이었고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그렇게 비쳐지고 있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그의 음성이 절로 떨려
나옴은 실로 의외라 할 수 있었다. 이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삿갓 괴인은 태연히
발을 떼어 다가오고 이것만으로도 다소 거드름을 피우며 괴인에게 나섰던 흑의 무사를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얼어붙게 만들고야 말았다. 흑의 무사는 어떻게 해서든지 뒤로
물러서고 싶었다.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본능적인 두려움이 신체의 신경마저 한순간에
장악해 버렸음을 뒤늦게 깨달아 본들 스스로에게 돌아오는 유익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겨우 그의 입에서는 자신의 이런 상태를 모두에게 알리는 한 소리 신음성이
들릴 듯 말 듯 새어 나오니,으……으으말을 처음 배우는 어린아이도 아니고
듣지 못하여 말하지 못하는 벙어리도 아닐진대 그의 혀는 석고를 물어
굳은 듯 움직이지 못했다. 이것으로 보아 이는 단순히 상대에 대한 거역할수
없는 두려움 때문만은 아닌 듯 했다. 사실이 그랬다. 흑의 무사의 눈앞에서
다가서고 있는 삿갓괴인의 몸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운이 뻗치고 있었고
그것은 의도된 작용으로 흑의무사의 몸을 옭아매었던 것이다. 적어도 이런 점에서
말(馬)에 기품 있는 자세로 적당히 거만을 떨면서 앉아 있어야 당연할
혈수천자는 자신의 수하보다는 조금은 나은 처지라 할 수 있었다. 그가 탄 말이
주인의 뜻을 거부하지 않고 뒷걸음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의 이런 행동이
신호라도 된 듯이 삼백삼십명의 인영들과 한 그림자를 이루고 있는 말들이
동시에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서고 있었다. 이 상황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것이기에
당사자들인 일행들에게 극히 낯설고 이질적일 수 있었다.

묘한 긴장감이 강물의 흐름과 보조를 맞추며 사람들의 발 밑을 흘러다니고 있었고
그것은 불현듯 그들에게 무사로서의 자존심과 오기를 한 여름밤의 악몽처럼 일깨우고야 말았다.

`이이…… 모두 멈춰라. 그리고 너, 너도 거기서 멈추어라.’

`흐흐흐흐’

삿갓괴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낮은 흉소는 불같이 일어섰던
일행들의 투기를 어렵지 않게 으깨어 버렸다.

` 모두 쳐라. 놈을 죽여라.’

악을 써대며 명을 내리는 혈수천자의 모습은 언제나 당당하던 예전의 것이 아니었고
이것은 그를 아는 수하들에게도 동일하게 비쳐지고 있었다. 처음에 앞으로 나섰던
흑의무사는 정말이지 자신의 주군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 없었다. 어느새 다가선
괴인은 어깨를 잇대고 한 선으로 숨쉬고 있었는데 감히 옆을 쳐다보아 알 수는 없으나
분명 그곳엔 마주치지 못할 두려움의 원천이 불을 밝히고 있을게 분명했다.
숨죽여 호흡을 끊어 가는 흑의 무사의 목에서는 거칠게 걸려서 넘어오는 투박한 숨이
토해지고 심장은 요동쳐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너희들 같은 피라미들에게는 관심도 없지만 내 친구는 그렇지가 않거든……
스스로 운이 없음을 한탄해라. 내 손에 피를 묻히기 싫으니 모두 자결해라.’

흑의무사의 오른쪽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는 삼백명이 넘는 자신들의 일행들에게
하는 말이 분명해 보였다. 모두 저 자를 포위하라.자랑스런 주군은 기껏
그런 명이나 내리고 있었기에 흑의무사의 낙담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한 번의 손짓으로 상대를 두쪽내던 주군의 륜은 더 이상
절대의 믿음을 약속하지 못했다.

` 헉……’

흑의 무사의 어깨에 괴인의하나밖에 없는 손이 놓여지자, 헛 바람을 삼키며 기함하고야 만다.

`한심한 놈들이군. 너희들에게 더 이상의 시간을 소비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겠군.
지루하니깐 될 수 있으면 빨리 끝내자.’

세상에 이 정도로 오만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그는 진정 눈 앞에 보이는 삼백 기의 기마대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아무렇게나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땅바닥을 굴러다니는 돌멩이쯤으로 보인단 말인가?
그도 아니라면 스스로를 신으로 여기는 실성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인가?
어쨌든 상관은 없어 보였다. 혈수천자의 손이 들리는가 싶었더니
앞으로 힘차게 뻗어가자 뒤의 기마대는 언제 그랬느냐 싶게 용맹스럽게
말을 몰아 괴인의 사방을 에워쌌다. 동작은 빠르게 취해졌지만
그들의 표정만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삿갓괴인의 태연한 신색을 확인하자
그들의 표정엔 불안감만이 기승을 부리며 표면으로 떠오르고 있을 뿐이었다.
달빛도 숨을 멈추었고 바람도 잠잠해 졌다. 삿갓괴인은 흑의무사의 어깨에
올려져 있던 손을 이동하여 삿갓의 끝을 움켜쥐었다.그가 움직임을 보이자
흑의무사들은 한 동작으로 무기들을 빼어 들었다. 그들이 토해내는 거친 숨결과
그들의 검과 도에서 뿜어지는 빛들이 어우러져 장내에 긴박감을 더할만한
긴장을 일층 무겁게 얹어 주었다. 모두의 시선은 괴인의 손에 머물렀고
이를 즐기기라도 하는 듯이 괴인의 손은 느릿하게 삿갓의 끝을 들어올리며
가려있던 얼굴을 달빛아래 확연하게 드러내었다. 완전히 드러난 괴인의 얼굴은
마주보기가 두려울 정도로 괴이한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만약 어둠 속에서 불현듯
홀로 마주쳤다면 심장이 멈추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는 그런 용모였다.
그는 천마였다. 천마교의 창시자이자 무림사 최고의 고수라고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는 전설,
그 자체의 인물인 것이다. 이런 것을 알리 없는 흑의무사들은
자꾸만 움츠러드는 마음을 다잡아 일으키며 투기를 불태웠다.
혈수천자의 명이 떨어지면 언제든 공격을 감행할 수 있는 준비를 마쳐놓고 있었고
그들이 내뿜는 기운으로 장내의 공기는 한껏 팽팽하게 고조되어 갔다.
천마의 옆에 서 있는 인물은 사건의 중심에 있음에도 마치 방외자라도 된 듯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아니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손가락 하나라도 꼼짝하는 날에는 더 이상 숨쉬는 행복을 보장받을 수 없으리라 여겨졌다.

`쳐라.’

드디어 혈수천자의 입에서 공격명령이 토해졌다. 누구도 기다리지 않았던 순간이기도
했으므로 그들은 순간 흠칫거렸고 그 순간, 천마의 손에 들려 있던 삿갓이 허공을 향하여 쏘아졌다.
순식간에 삼십여장까지 이른 삿갓이 불을 뿜으며 터져 나갔다.

` 이런…… 신호탄이었나?’

그렇다면……혈수천자는 멍하니 그것을 쳐다보며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촤촤촤기이한 소리가 밤의 적막을 찢어오며 묘한 여운을 남기고 있었고 그 방향은 강 쪽이었다.
괴인은 느긋하게 허공의 한 점에 시선을 둔 채 움직이지 않았으며
혈수천자의 공격명령을 수행해야 할 수하들도 몸을 정지하고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강 위엔 무엇인지 모를 그림자들이 빠르게 이쪽으로
이동해 오고 있었다. 세상에 그러고 보니 그것들은 물위를 스치듯이 밟고 오지 않는가?

‘세상에.’

혈수천자는 놀라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육안으로 구분이
가능한 지점까지 다가온 그것들은 분명히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었고
물경 100을 헤아리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놀라는 이유는 물을 밟고 몸을 띄우는
경지라는 무력답수(無力踏水)나 물을 밟고 빠르게 뛰어가는 등평도수(登萍渡水)의
절정경신법을 펼쳤기 때문만은 결코 아니었다.
자신 또한 저 정도의 경공이라면 손쉽게 펼칠 수가 있다. 문제는 그 숫자에 있었다.
100여명이나 되는 인원이 너무나 능숙하게 물위를 스치듯이 뛰어오지 않는가?
대체 어떤 집단이 내공 100년 이상이 아니면 흉내조차 불가한 절정경신법을 익힌 고수들을
이리도 많이 보유하고 있단 말인가? 그의 생각은 당연히 무림맹이나 마도련에
머물 수밖에 없었지만 눈앞의 괴인을 다시금 쳐다보고는 고개를 젓고 말았다.
어쨌든 자신들은 지금 함정에 빠진 셈이었다. 비록 인원이 적들의 세배에 이른다지만
자신이 알기에도 강 위를 뛰어오는 고수들 정도는 직속수하들 30명을 제외하고는 없다고
할 수 있으니 위험을 쉽사리 벗어나지는 못할 것임을 절절히 직감하고 있었다.
다가오는 인물들 중 선두에 있는 자들이 물을 박차고 허공 중으로 뭣들 하는 거냐?
정신들 차려라. 모두 수비대형으로……혈수천자의 다급한 명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어느새 십 여명의 적들이 무리 중에 뛰어드는 것이 눈에 잡혔기 때문이다.
천마는 느긋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고 속속 나머지 인원들이 합류하며
흑의무사들을 핍박해갔다. 그들 역시나 흑의를 입고 있었는데
가슴에 붉은 혈룡을 수놓고 있었다. 천마의 옆으로 한 사람이 사뿐히 내려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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