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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검 – 92화


혈수천자의 얼굴엔 풀길 없는 의문에 대한 궁금함과 불안함으로 가득 찼다.
분명히 처음에 그가 그런 말을 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별다르게 주의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대체 무엇을 놓고 가란 말인가?
혈수천자는 그의 궁금증을 풀어줄 괴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천마의 입 꼬리가 슬쩍 위로 말려 올라가는 듯 싶더니 묘한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하는 말,난 원래가 적이라고 판단되는 자들을 여태껏 살려준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한번 한 약속을 번복한 적도 없었지. 결국 이 두 가지 요구를
모두 충족시키려면 그 만한 대가를 치러야 마땅하겠지.’

그래서 뭘 어쩌란 건가?죽이겠단 말이냐? 살려주겠단 말이냐? 이런 빌어먹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어이없는 지금의 상황 앞에 그는 튀어나오려는 울화를 삭혀야만했다.
아직은 성급하게 희망을 포기해야 할 단계는 아니었다.

그래서…… 너의 신체 중 일부를 여기다 두고 가면 된다. 어느 곳이든 상관없다.
목을 두고 갔으면 좋겠지만 네가 거부할 것이고…… 팔이나 다리나 어디든 상관은 없다.

헉…… 그, 그게 진심으로 하는 소리요?

그럼 지금 내가 네놈과 농담이나 주고받고 있다고 생각하나? 빨리 해라.
네놈 얼굴 마주보기도 슬슬 지겨워온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요.아니, 오히려 내가 더하오. 꿈에서라도 볼까 두려운 그 상판때기를 마주보아야 하는
괴로움을 애써 견디고 있건만……’

뭐하고 있는 거냐? 내가 잘라줄까?
한가지 네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가끔 나는 과도하게 힘을 쓰는 버릇이 있다.
이를테면 팔 하나를 잘라내려다 상체전부를 떡으로 뭉개버릴 수도 있다는 말이지.

혈수천자는 어쩔 수 없음을 절감하고 말았다. 어찌 스스로 자신의 몸의 일부를
잘라낼 수 있겠는가 만은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날 수 있다면 그것이 최선이라 생각되었다.
그는 염두를 굴렸다. 결국 양쪽 팔 중에 하나를 자르는 수밖에 없을 것이라 판단되었다.
‘둘 중에 비중이 약한 왼쪽 팔을 자르는 수밖에……
‘그의 눈은 어두움도 태워버릴 듯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몸의 일부를 스스로 잘라내어야 한다는 비애감, 이런 일을 강요하는 상대에 대한 적개심,
스스로의 무능에 대한 분노까지…… 복잡한 심경을 담은 눈빛은 쉬이 꺼질 것 같지 않았다.
어금니를 꽈악 다져 무는 혈수천자의 시선 깊은 곳에서는
그 모든 감정을 앞서는 안타까움이 물결치고 있었다. 자신의 왼팔을 다시 한번 쳐다보고 나서
고개를 들어 천마의 시선과 조우했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강하게 맞섰다.

기억해 두시오. 내가 지금은 힘이 없어 이런 수치를 당하지만…… 분명 이 빚은 갚고야 말겠소.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팔을 내 언젠가는 몸통에서 분리시키고야 말 것이오.

말을 하는 말미에그의 오른손에 쥐어져 있던 륜이 왼쪽 어깨쪽으로 대어졌다. 힘만 주면 팔은 잘려져 갈 것이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천마의 눈은 아무런 감정도 배어있지 않았다.

웃기고 있군.그런 짓을 하고서 겨우 목숨을 구걸 받는 주제에 할말은 다 하고 있군.
그런다고 수치가 가려지나?

천마의 뒤에 있던 옥기린이 장난처럼 뱉어낸 혼잣말이었지만
그것은 혈수천자에게 너무나 큰 충격으로 되새겨졌다.

그래 나는 비겁자에 배신자에이 세상에 살아있을 가치도 없는 놈이다. 그렇지만 복수는
내 생명이 남아 있는 한 분명히 할 것이다.
네 놈의 아가리도 내 잊지 않고 찢어발겨 주마. 흐흐 다시는 그 입으로 음식을 처먹지 못하게 해주겠다.
죽는 그 날까지 날 기억할 수 있도록 처참하게 짓이겨주겠다.

그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스스로의 팔을 잘라내야 한다는 두려움과 분노 때문에
그는 자신이 어떤 상황 중에 있다는 것도 잊은 것 같았다. 천마의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저 녀석 죽여버릴까?’그 자식 더럽게 시끄럽네. 팔 하나 자르는데도 별 거지같은 소리를 다 하는군.

아가리를 찢든 팔을 잘라 내든 차후의 일이니 어서 서둘러라.
사내자식이 그것하나 하는데 오도방정을 떨어대니……
셋 셀 동안 하지 않으면 네 놈을 세로로 찢어 죽이고야 말겠다.

하나.

헉,

혈수천자의 무릎이 땅에 잇대어졌다. 그의 륜은 너무나 간단히 왼쪽 팔을
어깨에서 분리해버린 것이다. 땅위로 떨어진 팔은 펄떡거리고 있었고 그것을 바라보는
혈수천자의 눈은 극도로 충혈 되어 터져 나갈 듯 했다. 피가 샘솟듯 쏟아져 나왔지만
그는 지혈할 생각도 없이 말 위로 당당히 올라탔다. 다시 한번 주변을 돌아보더니
마지막 시선은 역시나 천마에게로 주었다.

기억해라. 나는 반드시 네놈들에게 복수하겠다.
내 팔이 썩어 대지와 동화되기 전에 이 복수는 꼭 이루고야 만다.

이랴.히히히히두두두두하나밖에 없는 손으로 말고삐를 채어 자신이 왔던 방향으로 내달렸다.
급하게 달려가는 말을 쳐다보며 천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나 같으면 지혈부터 하겠다.
역시나 예측할 수 없는 놈이야. 곧 죽어도 큰 소리를 치고 가는군. 멍청한 놈.
그런다고 내가 널 멋있게 볼 줄 알았다면 큰 착각이다 이 놈아. 아마 얼마 가지 않아
현기증으로 쓰러질지도 모르겠군. 클클클

천마의 중얼거림에 옥기린은 입가에 미소를 달았다.
그의 눈 역시나 장내에서 사라져간 혈수천자의 자취를 쫓고 있었다.
‘저런 놈은 위험한 법인데…… 대체로 저런 성격의 소유자는 어떤 야비한 짓도 서슴지 않고
그래서 적이 되었을 때는 기회가 포착되는 즉시 죽여야 한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조사께서 무슨 이유로 놈을 살려두었단 말인가?’옥기린.

하명하십시오.

너는 지금 즉시 사천에있는 마황검위대 삼개조와 합류하도록 해라. 그곳에 가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될 것이다.

존명.
하늘이 부여한 삶의 기회를 박탈당한 시체들이 주변에 어지럽게 늘려 있었다.
그들이 흘린 피를 가슴으로 머금은 대지는 더 이상 강할 수 없는 어조로 항변하고 있는 듯 했다.
언제까지, 언제까지 죽고 죽이고를 반복할 것인가?
언제까지 이 땅을 너희들의 추악한 욕망으로 더럽힐 것인가? 라고.
하늘은 푸르고 물빛도 고와 발을 담그고 발바닥을 차노라면 나무와 하늘과 아름다운 전각,
수면에 새겨진 그 모든 것이 새롭게 묻어나며 형태를 바꾼다.
둘의 손이 서로를 느끼고 있은 지는 꽤 오래 되었다.
시선은 전면을 향하고 온 몸의 신경은 서로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다.
작은 호흡마저 놓치지 않으려는 세심함이 서로의 체온으로 전해졌다.
파천은 정말이지 오랜만에 갖는 여유로움을 온몸으로 만끽하고 있었다.
옆에 독고설란을 두고 있어 그 마음은 더 아늑한 지도 몰랐다.
처음 독고설란이 호수에 발을 담그자는 제안을 했을 때만 해도 파천은 망설여야만 했다.

그의 현 위치나 그가 지금껏 보여준 모습이나 현재의 무림정세의 긴박함에 비추어 볼 때
자신의 이런 행동은 어딘가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고 이런 것보다
더 결정적으로 그를 망설이게끔 한 것은 왠지 모를 쑥스러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이성적인 판단은 결코 사랑하는 여인의 끈질긴 요구보다 강하지 못했다.
스스로의 결정을 허물어뜨리면서 이렇게 행복해 본 것은
그의 생애에 처음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설란이 좋아하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그에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또 다른 만족감을 주었다. 그것이 어디서 기인하는지는 몰랐다.
아니, 몰라도 좋았다.

하하 그래서 나와 함께 시진에 나가보자는 건가?

네…… 왜 안되나요?

독고설란이 살며시 고개를 들며 수줍게 물어오자 파천의 만면에는 흡족함이 피어나더니 금세
얼굴전체를 장악해버린다.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코를 찡긋거리는
파천의 반응에 설란은 안도의 표정을 보였다. 그녀는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맹내의 분위기가 그리 썩 좋지 않다는 것 정도는 느끼고 있었다. 그랬기에 자신의 요구가
다소 무리하다 여겨진 것도 사실이었고 파천이 이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가 염려스러웠던 것이다.

뭐, 안될 거야 없지만……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은 것 같으니깐, 나중에 가면 안될까?

그래요?그럼…… 할 수 없죠. 대신 나중에는 꼭 설란을 데려가신다고 약속해줘요.

후후 그러지.

독고설란이 손가락을 내미는 것을 바라보며 파천 또한 손가락을 내밀었다.
둘의 손가락은 서로의 몸을 꼬아갔다. 둘은 이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공동의 운명을 가졌다.
둘의 이런 상황과 마찬가지로 두 개의 손가락은 하나로 얽혀 들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는 서로에 대한 믿음만이 가득했다.

응?

후닥닥파천이 갑자기 물 속에 들어가 있던 발을 꺼내놓으며 벌떡 몸을 일으키자
그녀는 영문을 몰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파천은 난처했다.
저쪽에서 누군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자신의 하고 있는 모양을 내려다보고는 두 손을 펼치며 잠시 어쩔 바를 몰라했다.
‘이게 무슨 망신이람.’그는 어차피 들킨 것 딴청을 부리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온 사람은 다름 아닌 개방의 태상방주이자 무림맹의 장로원주이기도
한 개왕 풍천호였다.

흠흠…… 풍노가 여긴 웬일이오?

역시 평소에 하지 않던 짓을 하다들킨지라 어색함을 모면하고자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돌아서 있었다.
보지 않아도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짐작이 갔다.

[지존. 큰일났습니다.]

갑자기 풍천호의 전음이 들리자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세웠다.
그의 얼굴은 어느새 얼음장을 한 겹 씌운 것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개왕의 성격을 익히 아는지라 그가 이렇게도 다급하게 위기를 알릴 일이라고는
그다지 많지 않았고 그것이 파천의 얼굴을 빠르게 경직시킨 이유가 된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인데 호들갑을 떠는 건가?]

[이…… 서찰을 보십시오.]

풍천호의 손에는 땀에 흠뻑 젖은 서찰이 여러 겹으로 접혔다 펼쳐진 흔적을
지닌 채 파천의 손으로 들어왔다. 파천은 서찰을 찢듯이 펼쳐들었다.
한참을 읽어 내려가던 파천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이, 이…… 미련한 놈!

파천의 얼굴엔 분노와 다급함이 함께 피어났고 그것을 확인한 풍노는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 파천의 반응만 살피고 있었다. 대체 무슨 내용이 길래 파천이 이 정도의 반응을 보인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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