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3권 – 14장 : 얼어붙은 검 – 5화
8월 25일 제5시. 볼지악 요새 앞쪽에는 초록빛 옷을 입은 자가 하나 더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음유시인은 그 옷의 의미 그대로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
둔덕 위에 남아 있던 바탈리언 남작은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희열감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가까스로 대어온 길이었다. 비자 록소나에서 서 브라 도가 사라졌을 때만 해도 남작은 그가 제국으로 돌아갔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비자 록소나에 있던 그의 지인들 중 한 명인 골도 백부장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었고 그를 다그친 결과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 다. 골도 백부장은 서 브라도가 서 하빈저와 함께 록소나 기병들을 이끌고 다벨로 떠났다고 말했다. 바탈리언 남작은 당혹하여 외쳤다.
“황제의 명령을 무시하고?”
“아니오. 어찌 서 브라도가 황제 폐하의 명령을 무시하겠습니까. 서 브라도는 제국으로 돌아가시는 겁니다.”
“뭐라고? 그게 무슨 말…”
“그리고 황제 폐하께선 그가 어떤 길을 통해 돌아오라고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 록소나가 약간의 병졸들로 하여금 그 분을 배웅해서 는 안 된다고도 하지 않으셨지요.”
바탈리언 남작은 골도 백부장이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표정을 지어보임으로써 그를 꽤나 즐겁게 만들었다. 그러나 곧 정신을 가눈 남작은 사납게 으 르릉거렸다.
“이 악마! 그걸 이제서야 말해 줘? 내가 왜 이곳에 온 건지 알면서!”
골도 백부장은 실실 웃으며 뭐라 변명했지만 남작은 그 말을 듣지 못했다. 남작은 이미 자신의 짐과 자신의 말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있었기 때문 이다. 그대로 록소나를 떠난 남작은 끔찍한 강행군 끝에 조금 전에야 가까스로 돌격 준비중인 서 브라도와 서 하빈저, 그리고 록소나 기병들을 따라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서 브라도에게 따져묻듯이 외쳤다.
“시간 잡아먹지 않겠습니다. 한마디만 해주십시오!”
“……여기까지 왔으니, 스스로 확인하시오.”
바탈리언 남작은 얼굴을 좀 붉힌 다음 연대기 작가답게 스스로 확인하기로 했다. 그가 물러나는 것을 보며 서 브라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러나 그는 곧 얼굴을 굳힌 다음 록소나 기병들을 살육의 파도로 만들어 눈앞의 전장을 향해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그 파도의 가장 앞쪽에서 빛나는 포말이 되었다.
록소나 기병들은 전장의 오른쪽, 즉 경장기병들이 싸우고 있던 곳을 목표로 돌격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바스톨 장군은 급히 경장기병들에게 후퇴 명령을 내렸다.
“뒤로 빠져라! 길을 여는 자가 오리라!”
다벨 경장기병들은 적은 숫자로도 사트로니아 경장기병들을 농락하고 있었지만 숫자가 더 많은 그들을 붙잡아두진 못했다. 그리고 사트로니아 경장 기병들이 후퇴하자 그들과 자리를 바꾸듯이 그들이 빠져나간 자리로 록소나 중장기병대가 뛰어들었다.
제일파가 도착한 순간 총체적인 소음들의 향연과 함께 다벨 경장기병대는 이미 수십 피트나 물러나고 있었다.
그리고도 아직 여력이 남았다는 듯이 록소나 중장기병들은 그대로 다벨 경장기병들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말들은 아예 튕겨나갔고 땅에 떨어진 다 벨군은 비명을 지를 사이도 없이 피범벅의 시체가 되었다. 투구가 사방으로 날아다니고 있었고 그 중엔 속이 비지 않은 것도 있는 듯했다. 록소나 중 장기병들의 숫자는 1,600기 정도. 하지만 다벨 경장기병대는 16,000기의 공격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그 광포한 돌격은 다벨 경장기병대를 이끌고 있던 서 기리우에게는 낯익은 광경이기도 했다.
“이 노망꾼, 또다시 남의 싸움에!”
서 기리우는 저주의 말들을 쏟아내며 말을 달렸다. 싸운다기보다는 밟고 지나가는 식으로 다벨 경장기병을 유린하고 있던 서 브라도는 다벨군 가운데서 솟아오르듯이 뛰쳐나오는 한 다벨 기사의 모습에 찬탄을 보내었다. 그러고는 그가 서 기리우임을 알아차리곤 함박웃음을 지었다.
“오래간만이군, 젊은 친구!”
“나한테 인사할 시간 있으면 오랜 시간 동안 얹고 다녔던 네 늙은 머리에나 작별인사를 보내시지!”
서 기리우는 검을 어깨 뒤로 눕혔다. 서 브라도는 싱긋 웃으며 플레일을 돌렸고 그 모습을 본 서 기리우는 방패를 끌어당겼다.
“두 번은 당하지 않……!”
서 브라도는 플레일을 휘두르는 대신 내려쳤다.
플레일의 쇠사슬이 방패에 걸쳐진 순간 그 쇠구는 그대로 아래로 떨어지며 서 기리우의 머리를 강타했다. 투구가 일그러지는 소리는 꽤나 장엄해서 주위의 기병들이 모두 돌아볼 정도였지만 서 기리우만은 다른 소리를 듣고 있었다. 서 기리우는 이름 모를 새들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낙마했다. 투구 속의 그의 얼굴은 헤벌레 웃고 있었다.
서 브라도는 플레일의 쇠사슬을 회수하며 ‘정말 재미있는 젊은이군’이라고 말하듯이 고개를 조금 가로저었다. 하지만 그는 곧 다음 상대를 향해 플 레일을 휘두르고 있었다.
바탈리언 남작이 이미 꿰뚫어보았던 것처럼, 아무런 약속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스톨 장군은 자신감에 차서 경쾌하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본대! 마차들을 우회하여 록소나군을 따르라! 공격 목표는 적군 경장보병이다!”
서 브라도는 흘깃 보는 것만으로도 사트로니아군이 폐쇄 지역의 한쪽 입구를 열어야 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이제 바스톨 장군은 서 브라도 가 오른쪽 입구를 열어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오른쪽 입구를 막고 있던 다벨 경장기병들은 서 브라도의 맹렬한 공격에 뒤로 물러났고 이미 이동하고 있던 사트로니아 중장보병대는 그 입구를 이용하여 폐쇄 지역 안쪽으로 침입해 들어갔다.
전투가 시작된 후 지금까지 움직이지 못하고 있던 사트로니아의 본대가 드디어 전투에 투입된 것이다. 그대로 사트로니아 본대와 록소나군이 전장 의 우회기동을 성공시킨다면 거꾸로 포위진 속에 갇히는 것은 다벨측이 될 것이다. 하지만 본영에서 전장을 바라보고 있던 휘리는 별 걱정 없는 얼굴 이었다. 그리고 본대를 진격시키면서도 바스톨 장군 역시 아슬아슬하다는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다벨군이 사트로니아의 좌익에 입히고 있는 피해가 너무 컸던 것이다.
전장 왼편에서 4개 부대의 공격을 받고 있던 사트로니아 경장보병과 중장기병은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만약 사트로니아 본대와 록소나군의 우 회기동이 성립되기 전에 좌익이 무너진다면 다벨군을 포위진 속에 가두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바스톨 장군은 독촉하는 심정으로 서 브라 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멀리 둔덕 위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바탈리언 남작 역시 서 브라도를 바라보며 소리 없는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설 령 그가 고함을 지른다 해도 들을 사람은 없겠지만, 남작은 자신이 입고 있는 초록빛 옷 때문에 차마 그렇게는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소리 없는 응원을 들었다는 듯이, 서 브라도는 최초의 기세를 아직까지 연장시키며 다벨 경장기병들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서 브라도! 서 브라도!”
다벨 경장기병들은 죽을 때까지 그 이름을 잊을 수 없게 되었다. 록소나 중장기병들은 서 브라도의 이름을 구호라도 되는 것처럼 외치며 진격해 들 어갔고 그 사나운 기세 앞에 다벨 경장기병들은 초단위로 최전방이 바뀌는 수모를 겪고 있었다.
“서 브라도! 서 브라도!”
다벨 경장기병들 또한 용맹한 이들이었다. 만약 상대가 록소나 중장기병만 아니었다면 그들의 용감성을 의심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하지만 이번 상 대는 바로 그들을 베테랑으로 만들어주었던 상대였다. 마른 모래에 떨어진 물방울처럼, 최초의 일인이 느낀 공포는 곧 최대 다수의 공포로 바뀌었다. 이미 지휘관을 잃은 다벨 경장기병들은 말 그대로 파도에 무너지는 모래성처럼 지리멸렬하게 후퇴하기 시작했다. 바스톨 장군과 바탈리언 남작은 거 의 동시에 환성을 질렀다.
“서 브라도!”
그러나 그 환성의 끝에서 그들은 거의 동시에 불안감을 느꼈다.
그리고 문객이었던 바탈리언 남작보다는 바스톨 장군 쪽이 그 불안감을 정확하게 분석해 내었다. 남작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바스톨 장군은 이미 미심쩍은 어조로 혼자말을 하고 있었다.
“너무………….. 들어간다?”
서 브라도는 이명 같은 것을 느꼈다.
그의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의 격음들 사이로 이상하게 부드럽게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투구 속으로 날벌레가 들어온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 도였다. 서 브라도는 플레일을 잠시 회수하여 쇠사슬을 손에 든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고민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서 브라도는 다시 그의 팔로 플레일을, 그리고 그의 굳센 정신으로 록소나 중장기병들을 동시에 휘둘러대었다. 그리고 저 멀리 사트로니아 본영에선 바스톨 장군이 비명을 올리고 있었다.
“더 들어가지 마! 제기랄!”
그리고 바로 그때, 전장 좌측에서 싸우고 있던 다벨 중장보병과 경장보병이 모두 우측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앞쪽에는 방금 폐쇄 지역으로 들어온 사트로니아의 본대가 있었다. 사트로니아 본대의 숫자는 상대편의 반밖에 되지 않는다. 서 브라도의 록소나 군이 합류해야만 전력이 비슷해질 테지만 ・바스톨 장군이 기대하던 것도 바로 그것이었지만 록소나 중장기병들은 후퇴하는 다벨 경장기병들을 쫓아 이미 볼지악 요새 바로 앞까지 진격하고 있었다. 필요없는 짓이었다. 서 브라도가 당연히 포위진 형성에 나설 것이라고 믿었던 바스톨 장군은 배신감 비슷한 기분까지 느꼈다.
이제 전투는 크게 세 군데서 일어나고 있었다. 전장 좌측에서는 다벨 중장기병과 노예병들이 사트로니아 중장기병과 경장보병을 상대하고 있었고 다벨 측이 더 우세했다. 두 개 부대가 빠져나갔지만 다벨군은 이미 괴멸의 증후를 보이고 있는 사트로니아군을 손쉽게 처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 에서 빠져나온 다벨 중장보병과 경장보병은 전장 중앙에서 사트로니아 중장보병에 맞서 싸우고 있었으며 역시 다벨 측이 우세했다. 숫자 자체가 월 등히 많은 것이다. 그리고 전장 저 위쪽에서는 록소나군이 다벨 경장기병들을 밀어붙이고 있었으며 그곳에선 록소나측이 우세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불필요한 싸움이 되었고 그들이 빨리 돌아오지 않는다면 다른 두 전장의 사트로니아군이 무너질 판국이었다. 바스톨 장군은 들릴 리가 없는 함 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 목소리에는 울음기 같은 것마저 섞여 있었다.
“지금이라도 돌아와! 서 브라도, 제발!”
서 브라도는 다시 이명 비슷한 것을 들었다. 두 번째로 들었던 그 소리에 서 브라도는 조금 전보다 더 주춤거렸다. 그는 자신이 느꼈던 것을 어떤 신 호로 간주했다. 내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서 브라도는 주위를 둘러보려 했다. 하지만 전장 전체를 통틀어 가장 치열한(일방적이긴 하지만)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그곳에서는 시야를 확보하는 일 이 쉽지 않았다. 서 브라도는 다벨 경장기병을 빨리 쫓아버리고 다른 곳을 관찰하기로 결심했다.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미 지휘관도 없는 상태 에서 다벨 경장기병들이 지금까지 버틴 것만 해도 대단한 일………….
다벨 경장기병들 사이에서 이상한 환성이 터져나왔다.
록소나 중장기병들이 외치던 ‘서브라도! 서 브라도!’에 응수라도 하듯 다벨 경장기병들이 다른 말을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함성과 함께 다벨 기병들은 다시 힘을 얻었다는 듯이 전열을 재정비하고 있었다. 전투 도중의 부대가 이 정도의 움직임을 보여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서 브라도는 그 움직임이 어디에서 시작되는가를 면밀히 관찰했다.
그때, 터질 듯한 함성과 함께 다벨군 한가운데서 초록빛 기사가 뛰쳐나왔다.
“서 휘리!”
서 브라도는 플레일을 단단히 고쳐잡으며 상대를 바라보았다. 초록빛 갑옷을 두른 젊은 기사가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지금껏 본영에서 기다리 고 있다가 낙마한 서 기리우를 대신하여 다벨 경장기병들을 지휘하기 시작한 8군단 사령관 휘리 노이에스였다.
“서 브라도?”
휘리는 확인하듯 질문했다. 서 브라도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온통 젊은이들뿐이군, 이곳엔 휘리는 검을 뿌렸다가 다시 고쳐쥐며 비웃듯 말했다.
“제국으로 돌아가신 줄 알았습니다만.”
“무사가 돌아갈 곳이 전장 이외에 어디겠소.”
“무엇을 위해? 당신이 지킬 것은 이곳에 없습니다.”
서 브라도는 잠시 말을 멈춘 채 투구 아래로 보이는 휘리의 얼굴을 주시했다. 그러곤 뭔가를 발견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지의 머릿돌에서도, 더 높은 곳을 찾는 이리가 있소.”
휘리는 흠칫했다. 그는 의아함으로 두 눈을 찡그리며 서 브라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서 브라도는 다시 웃으며 말을 마쳤다.
“내 터져버린 심장엔 전장의 피가 필요했던 모양이오.”
이번엔 휘리가 말을 멈췄다. 대신 그는 눈으로 질문했다.
‘알고 있습니까?”
서 브라도는 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휘리는 차분히 검을 들어올려 서 브라도를 겨눴다. 그리고 서 브라도는 그에 응수하듯 플레일을 휘둘렀다. 탄력이 붙은 플레일은 점점 날카로운 음 을 내며 회전했다.
황제를 욕하는 것은 용감한 행위지만 사트로니아 대통령을 욕하는 것은 미련한 행위라는 말이 있다. 비슷한 말로 황제의 귀가 듣지 못하는 말은 있 지만 사트로니아의 귀가 듣지 못하는 말은 없다는 말도 있다. 물론 모두 다 왕년의 소제국 사트로니아의 막강한 정보력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나 핸솔 추기경이 파덴트 시의 사트로니아 상관으로 하여금 자신을 초청하게 만든 것은 그들의 정보력을 이용하기보다는 그들에게서 펠라론까 지의 여행 경비를 울궈내려는 생각에서였다. 여행 경비를 울궈낸다는 말은, 그 말의 속뜻과는 달리 어쨌든 축복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고위 성직자의 여행에 경비를 제공하거나 조력을 베푸는 것은 영광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핸솔 추기경은 파덴트의 사트로니아 상관으로 하여금 영광스러 운 순례행의 후원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배려를 베풀었다고 할 수 있다.
데스필드는 냉소하며 말했다.
“영광스러운 순례행?”
파킨슨 신부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나에 대해서는 적용되는 말이잖느냐?”
“하긴 그렇군요. 어쨌든 당신은 펠라론으로 순례하러 간다고 할 수 있으니. 뭐, 본인은 불만 없수다. 덕분에 이렇게 계산도 끝내었고.”
데스필드는 묵직한 가죽 주머니를 들어올렸다. 그것은 새로 그들의 후원자가 된 사트로니아 상관장을 심장마비에 걸릴 뻔하게 만들면서 추기경이 그로부터 받아낸 돈으로 데스필드가 다림으로부터 이곳까지 두 성직자를 패스파인딩해준 대금이었다.
데스필드는 가죽 주머니를 배낭에 집어넣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럼, 펠라론까지 즐거운 여행 되쇼.”
핸솔 추기경은 씁쓸한 얼굴이 되었고 파킨슨 신부 또한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봐. 데스필드. 정말 우리하고 같이 안 갈래?”
“당신들하고? 뭐하러. 이 상관에서 교통편을 제공할 테니 펠라론까지의 길을 못 찾아갈 것도 아닐 텐데.”
“그럼 뭐 다른 급한 일이라도 있느냐?”
“글쎄. 남쪽에 일거리가 있을 것 같수. 미리온 산맥 남쪽으로는 누군가 길잡이를 해주길 원하는 당신들이 많을 거 같지 않소? 급히 떠나야 하지만 어 디로 떠나야 할지는 모르는 당신들.”
“응? 그 벌쳐를 찾아보려는 것 아냐?”
“엥? 당신을 뭐하러.”
파킨슨 신부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도대체 너라는 놈 정말 이해를 못하겠다. 어쨌든, 이렇게 하면 안 되겠냐? 난 펠라론에 갔다가 내 일을 마치면 다시 테리얼레이드로 돌아갈 거 다. 너 나를 따라왔다가 거기까지 같이 가지 않겠냐?”
“이거 보쇼. 대금이 얼마가 될지 짐작도 못하는 모양인데, 펠라론부터 테리얼레이드까지의 패스파인딩이라면 엄청난 액수가 될 거요.”
“망할 놈. 동향 사람들끼리의 애정을 좀 발휘하면 안 되냐.”
“어억. 웃기지 마쇼. 본인은 패스파인더고 패스파인더에겐 패스가 고향이오. 무슨 동향.”
파킨슨 신부는 결국 붉으락푸르락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핸솔 추기경은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안타깝군요. 당신과 좀더 많은 시간을 같이 하고 싶었는데.”
“패스가 겹치면 다시 만나게 되겠지. 그럼 안녕히들 계쇼.”
데스필드는 한시라도 머물고 싶지 않다는 듯이 대충 인사하고 방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쳐다보지도 않던 파킨슨 신부는 그가 나가고 나서야 불쾌한 듯이 말했다.
“망할 녀석. 부리나케도 떠나는군. 그렇게도 같이 있기 싫었나.”
핸솔 추기경은 빙긋 웃으며 데스필드를 변호했다.
“뭐, 그는 패스파인더잖소. 그리고 패스파인더는 항상 움직여야 되는 사람으로 알고 있소. 목적지를 찾는 것이 아니라 길을 찾는 것이니 그럴 수밖 에. 우리가 싫어서 그렇게 떠나는 것은 아닐 거요. 신부님.”
추기경의 말대로 데스필드는 사트로니아의 상관을 나오자마자 계속 걸었다. 물론 목적지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목적지가 없이 무작정 걷는 사람에게 흔히 찾아오는 불안감은 그에겐 전혀 상관없는 말이었다. 차라리 산보하는 사람처럼 데스필드는 경쾌하게 걸었다.
파덴트 시를 가로지르던 데스필드는 문득 눈에 들어오는 주점을 발견했다. 다시 패신저를 구하려면 주점이나 여관이 좋을 것이다. 데스필드는 배낭 을 한번 추어올린 다음 마치 그곳을 찾아온 것처럼 그대로 주점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선 데스필드는 어둑어둑한 실내에 적응하기 위해 잠시 멈춰섰다. 주점은 작았고, 손님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패신저를 찾는 것은 어려울 것 같았다. 그냥 나갈까 고민하고 있는 그에게 갑자기 주점 주인으로 짐작되는 키 작은 사내가 다가섰다.
“빨리 오셨군요?”
데스필드는 멍한 얼굴로 주인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주인장은 자신의 앞치마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앞치마 주머니에서 약간 묵직해 뵈는 꾸러미 를 꺼낸 주인장은 데스필드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동작이어서 데스필드는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러자 주인장은 다 시 그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아. 한 잔 하시고 갈 거요?”
“아니, 밥 먹으려고. 배가 고프네.”
데스필드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한 다음 역시 그러기 위해 찾아왔던 것처럼 가까운 테이블에 앉았다.
“되는 대로 대충 챙겨주쇼.”
주인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부엌 쪽으로 걸어갔다. 데스필드는 햇빛이 잘 드는 테이블 위에 주인으로부터 받은 꾸러미를 올려다놓고는 잠시 그것을 노려보았다.
“자, 이게 뭘까.”
꾸러미는 손수건으로 둘러싸여져 있었다. 데스필드는 매듭을 풀었고 그러자 안에서 접혀 있는 종이 하나와 약간 길고 화려한 나무 상자 하나가 나왔 다. 데스필드는 일단 종이를 펼쳤다.
그것은 편지였다. 굵고 힘있는 글씨가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다.
‘존경하는 데스필드. 난 조금 전 이곳의 주인장에게 이 물건을 건넸어. 그리고 다시 돌아올 때까지 잠시 맡아달라고 했지. 주인은 자네를 나로 착각 하고 이것을 자네에게 건넨 거야. 내가 누군지 알겠지?’
데스필드는 희미하게 웃었다.
“벌쳐.”
‘일면식도 없는 사이에 갑작스럽게 이런 편지 보내서 미안하군. 하지만 자넨 내 이름을 들어봤을 테고 나 역시 자넬 알아. 그러니 아는 사이라 치고 이런 무례한 편지 용서해 주게. 이미 열어봤는지 모르겠지만, 나무 상자 안에 든 것은 대금이야. 난 자네에게 의뢰를 하나 하려고 하는 거야.’
데스필드는 잠시 읽기를 중단하고 나무 상자를 흘끔 바라보았다. 그러나 의뢰의 내용이 더 궁금했기에 데스필드는 다시 서신 쪽으로 눈을 돌렸다. ‘자네 패신저였던 파킨슨 신부 이야기를 좀 하세. 그가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자넨 그가 왜 그곳으로 가려 하는지 짐작하고 있을 거야. 그는 펠라론 게이트에 들어갈 생각이지. 이제 의뢰 내용을 말하겠네. 자네는 펠라론까지 파킨슨 신부를 따라가주게. 그리고 그가 그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그를 도와주게. 상자 속에 든 것은 내 의뢰에 대한 대금임과 동시에 그때 자네에게 도움이 될 물건이지.’
“제멋대로군.”
‘제멋대로의 의뢰에다 막무가내인 대금 지불이지만 맡아줄 것이라고 믿네. 당장은 별 일도 없잖아? 그리고 내가 지불하는 대금에 만족할 거라고 믿 네. 그럼, 즐거운 여행 되기를 바라네.’
편지는 그렇게 끝나고 있었다. 서명이 없다는 점이 약간 특이했다. 데스필드는 편지를 옆으로 치워놓고는 나무 상자를 끌어당겼다. 자세히 본 나무 상자는 꽤나 고가의 물건으로 보였다. 데스필드는 그것을 열었다.
안에는 파란 비단으로 안감이 대어져 있었다. 그리고 파란 비단 가운데로 아름답게 생긴 단검이 하나 놓여 있었다. 만져보기도 전에 데스필드는 그 것이 데자크 가의 가보 스완 대거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단검을 들어올린 데스필드는 조심스럽게 검집에서 단검을 뽑아보았다.
칼날은 놀랍게도 투명했다. 어떤 각도에서는 거의 칼날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만져보고 싶은 유혹을 느꼈지만 데스필드는 자신을 억제한 다음 그 것을 테이블 표면 위에 던져보았다.
어지간히 무딘 단검이라도 별 무리 없이 꽂혔을 테지만 스완 대거는 테이블에 꽂히는 대신 힘없이 미끄러졌다. 데스필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스 완 대거를 들어올렸다. 역시 살아 있는 것을 베어야 되나. 당장은 죽일 만한 것이 없었기에 데스필드는 그것을 다시 상자 속에 넣고는 상자를 닫았다. 잠시 후 그는 자신의 머리를 난폭하게 긁어대었다.
“아, 젠장. 도대체 어떻게 다시 당신들과 합류하지? 지금 찾아가면 당신은 별의별 비아냥을 다 해댈 텐데.”
데스필드에겐 자신이 우연히 이곳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라는 점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도 패스파인더고 벌쳐도 패스파인더였으므로, 그래서 그의 고민거리는 오로지 달걀 품은 암탉 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 파킨슨 신부에게 어떻게 찾아가느냐 하는 것뿐이었다.
바탈리언 남작은 씁쓸한 얼굴로 우필을 들어 잉크병에 담갔다. 그리고 그 자세 그대로 상념에 빠져들었다. 때마침 들려온 종소리가 아니었다면 언제 까지라도 그 자세로 굳어 있었을 것이다. 얼핏 정신을 차린 남작은 심호흡을 하곤 다시 글을 썼다.
‘서브라도의 사망은 록소나 중장기병들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서 브라도와 함께한 시간 동안 그들은 그때까지의 그들을 뛰어넘 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전까지도 그들은 최강의 기병이었지만, 서 브라도의 지휘를 받은 이후론 그들은 서 브라도 그 자체가 되어 있었다.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그들은 그 이전까지는 단단한 바위들의 모임이었다. 하지만 서 브라도와 결합된 이후로 그들은 마치 성곽과 같은 것이 되어버렸 다. 단순한 바위의 집합보다 설계자의 정신이 담긴 성곽이 더 강력한 것은 당연한 이치다. 하지만 그 설계의 정신, 결합의 묘가 빠져버리면 성은 무너 지는 법이고 그때의 폐허는 단순한 바위들의 모임보다 더 못한 것이 된다. 서 브라도의 사망 이후에 보여준 록소나 중장기병들의 모습이 바로 그러했 다. 그들을 도저히 최강의 기병이라 부를 수는 없었다. 서 하빈저의 침착하면서도 참을성 있는 지휘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전장에서 빠져나오지도 못 한 채 전원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는 수모를 겪었을 것이다. 서 하빈저는 다시 한번 그 특유의 침착함과 인내심으로 주군에게 봉사했다 하겠다.’
바탈리언 남작은 그에 뒤이어 다벨 경장기병의 전장 재투입, 사트로니아 본대의 패주 등을 담담한 어조로 써내려갔다. 물론 한마디 덧붙이는 것은 있지 않았다.
‘차라리 서브라도가 오지 않았더라면 바스톨 장군은 본대를 안전하게 후퇴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바스톨 장군은 서 브라도를 믿었기에 본대의 중장 보병들을 전장에 투입시켰고, 그래서 팔라레온, 혹은 폴라리스로 되가져갈 병력마저 잃고 말았다. 결국 그는 수하의 참모 약간 명과 함께 간신히 탈 출했다. 따라서 이 전투의 승패가 다벨 쪽으로 기울어진 것은, 볼지악 자작 휘리 노이에스의 우수한 부대 운용과 지휘에도 기반할 뿐만이 아니라 서 브라도의 참전, 그리고 그의 전사에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든다. 서 브라도는 왜 황제의 명령을 왜곡하면 서까지 이곳으로 왔고, 이곳에서 죽었는가.’
우필이 멈췄다.
바탈리언 남작은 종이를 바라보며 약속에 대해 생각했다. 그의 안에서 연대기 작가인 그와 명예를 중시하는 인간인 그가 한동안 맹렬한 싸움을 벌였 다. 가정과 가설, 변명과 증명이 그의 속에서 소용돌이쳤고 무서운 갈등 속에서 바탈리언 남작은 약한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남작은 고개를 돌렸다. 나이 지긋한 신부 한 명이 안쓰러운 얼굴을 한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형제?”
“예? 아, 괜찮습니다. 수사님.”
“신음을 흘리고 계시던데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너무 시끄러웠습니까? 죄송합니다.”
신부는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신부는 남작이 쓰고 있던 것을 흘끔 바라보았지만 그것을 읽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예의상 관심을 보여주는 것 같은 시선으로 종이를 보던 노신부는 몸을 돌리며 말했다.
“이젠 사람들이 없습니다.”
남작은 떠나가는 신부의 등을 보다가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말대로였다. 넓은 교회 안에는 바탈리언 남작만 남아 있었다. 물론 관 주위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모두 수도사나 수련사뿐이었다. 남작은 부드럽게 웃었다. 늙은 신부는 남작이 다른 사람의 시선이 없어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음을 눈치 챈 것이다.
남작은 지금껏 앉아 글을 쓰고 있던 예배석에서 일어났다.
저 앞쪽으로 관이 보였다. 제단 앞쪽에 놓인 관은 크고 화려한 것이지만, 동시에 쓸쓸해 보이기도 했다. 남작은 다시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지 만 조금 전까지도 교회 내에 가득하던 다벨인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아마도 승전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서둘러 떠나간 모양이다. 물론 다벨인들 이 망자에게 작별 인사를 보내는 그를 보더라도 뭐라 하지는 않겠지만 바탈리언 남작은 조용히 작별 인사를 하고 싶었다.
관이 눈앞에 다가왔다. 남작은 걸음을 멈추고 관 속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그가 있었다. 브라도 잇사 크레이탄 켄드리드, 혹은, 그런 이름으로 불리 던 유체.
깨끗이 씻겨지고 정갈한 옷이 입혀져 있었지만, 죽음의 손길이 훑고 지나간 그의 모습에서 바탈리언 남작은 생전의 그를 찾기 어려웠다. 남작은 뭐 라 말할 수 없는 당혹감을 느꼈다. 시체를 한번도 보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아니, 상처 입고 찢겨진 무수한 시체들을 보았다. 하지만 남작은 깨끗한 서 브라도의 모습에서 말할 수 없는 생경스러움을 느꼈다. 남작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고인의 옛모습을 찾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바탈리언 남작은 고개를 돌렸다. 다시 그 늙은 신부였다. 신부는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분은 이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께 가셨으니까요. 남겨진 것은 그의 육신일 뿐입니다. 굳이 당신이 기억하시는 옛모습을 찾으시려 애쓰실 필요 는 없습니다.”
“…………이 분이 주님 곁으로 가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예?”
수도사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남작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는 재빨리 고인에게 인사를 보낸 다음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노신부는 멀거니 그의 등 을 바라보았지만 빠른 걸음으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바탈리언 남작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단번에 썼다.
‘그는 복수로도 찌르지 못한 자신의 목을 찌를 검을 찾아낸 것이다. 다섯 번째의 검 휘리 노이에스. 따라서 나는 이것을 우리 주님이 바라지 않으시 는 죽음, ‘자살’이라고 정의한다.’
바탈리언 남작은 우필과 종이를 챙겨든 다음 그때까지도 당혹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노신부에게 다시 걸어갔다.
“고해는 말로 해야만 합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그러니까 말을 할 수 없는 벙어리 같은 사람 말입니다.”
“그러면 다른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만.”
“잘됐군요. 이것은 제 고해입니다.”
노신부는 남작이 내미는 종이 뭉치를 보고는 다시 당황한 얼굴로 남작을 바라보았다.
“이게 고해라고요?”
“그렇습니다.”
“아, 이 무슨………… 그리고 전 고해신부가 아닙니다.”
“신부님이 아니면 전 이것을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습니다. 부디 이것을 받아주십시오.”
남작은 반강제로 그것을 내밀었고 노신부는 얼떨결에 종이 뭉치를 받아들었다. 자신이 쥔 종이 뭉치를 바라보던 신부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고해라면, 그럼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말라는……?”
“바로 그렇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남작은 몸을 돌렸다. 손에 종이 뭉치를 든 채 멍하니 남작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노신부는 잠시 후 그것을 펼쳐보았다. 고해를 받아들이려면 읽어야 되니까.
그리고 신부는 더 놀랐다. 무슨 죄가 적혀 있을 거라는 신부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교회 밖으로 나온 남작은 가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밤이었다. 저 멀리 볼지악 요새 본성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본성에 보이는 창문마다 불빛이 요란했고 요새 곳곳의 누벽과 흉벽 위에는 횃불이 찬 란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저 아래쪽 대로에서는 사람들의 노랫소리와 환성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횃불이 이곳저곳에서 정신없이 춤추고 웃음 소리는 끝이 없었다. 오랜 기간 동안 불안과 공포를 달래며 농성전의 고통을 참아온 그들에게 마침내 찾아온 미칠 듯한 승전의 밤인 것이다. 아마도 볼지악 요새 내에서, 아니 다벨 전체에서 기뻐하지 않는 것은 그뿐인 것 같았다.
그리고 서 브라도를 위해 눈물 흘리는 것 또한 그뿐인 것 같았다.
눈물을 닦아낸 바탈리언 남작은 다시 본성을 바라보았다.
불이 환한 본성을 향해 남작은 빈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가락은 안으로 구부러져 컵을 쥔 것 같았다. 남작은 가상의 건배를 보내며 나직하게 말했다.
“어쨌든 축하드립니다. 볼지악 자작. 당신은 당대 최고의 무장 두 명을 하루 동안, 한 전투에서 모두 격퇴시켰습니다. 당신의 친구든 당신의 적이든 그것이 칭송받을 일임을 부정할 자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내 늙은 영웅에게 베풀어준 당신의 손길에 감사합니다.”
남작은 빈손을 도로 당기다가 문득 손을 멈췄다. 그러곤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본성을 향해 두려워하는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볼지악 자작. 나는 그 검, 그 차가운 검이 받아낼 피가 앞으로 얼마나 되는지 궁금합니다.”
“내 예견대로잖은가! 하하하!”
다벨 공작 프란체스코 메르데린이 너무 많이 마시고 있다는 점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했다. 그의 옆에 앉아 있던 휘리는 자신의 술잔에 술을 때려붓 는 공작의 모습에 약간 곤혹스러워하는 미소를 지었다. 술병이 빌 때까지 기울여 결국 술잔 밖으로 더 많은 술을 부어놓은 공작은 빈 술병을 집어던 지며 다시 웃었다.
“솔직하게 말함세, 서 휘리. 자네가 8군단을 거느리고 다벨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내 결정에 대해 감히 반론을 제시하려 드는 작자들이 많았다네.”
“이해합니다.”
“그래, 물론 기분 나빴겠지.”
휘리는 그냥 웃어버렸다.
“하지만 나만은 믿고 있었어. 자네는 분명히 돌아올 것이며, 그것도 내 왕국을 가지고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어. 그래서 난 아무런 변명을 하지 않았다고!”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왜 그랬냐고? 이 친구 취했구먼.”
휘리는 그저 술잔만 기울였다.
“말했잖아! 나는 자네를 믿고 있었다고! 그래서 직접 보여줄 생각이었단 말이야. 그럼 찍소리 못할 테니까. 그리고 봐! 그렇게 되었어!”
메르데린 공작은 다시 술병을 들어올리며 외쳤다.
“자넨 이제 명실상부한 영웅이야! 다벨의 영웅이 되었다고!”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내 말대로지? 낭중지추와 같은 그댄 반드시 만인들로 하여금 자네를 인정하게 만들 거라고 했잖아. 그렇게 되었어! 하하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아냐, 아냐. 절대로 어쩌다 보니가 아냐.”
휘리는 공작이 자신의 말을 알아듣자 더 놀라버렸다. 메르데린 공작은 테이블을 탕탕 내리치며 판결이라 도 내리듯이 말했다.
“자넨 영원한 영웅이라고!”
“사람들은 그리 오래 기억하지 않을 겁니다.”
“천만에, 천만에. 누가 잊겠는가. 오늘 자네가 보여준 모습을!”
“글쎄요. 일은 기억하더라도 감정은 잊혀지겠지요.”
“감정? 아.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렇겠지요.”
휘리는 몸을 일으켰다. 메르데린 공작은 여전히 웃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고 휘리는 그런 그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기억하는 동물이라면 좋을 테지만, 그렇지 못하니 어쩔 수가 없군요. 오늘 안에 이렇게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휘리는 검을 뽑아 단숨에 공작의 얼굴을 내리쳤다.
공작의 웃는 얼굴은 그대로 반쪽이 되어 테이블 위에 고꾸라졌다. 반대쪽에 앉아 있던 클루 경은 비명을 지르며 검을 뽑아들었지만 그의 곁에 앉아 있던 서 소팔라가 촛대를 들어올리는 것은 보지 못했다. 서 소팔라는 촛대를 휘둘러 서 클루의 뒤통수를 침착하게 내려친 다음, 촛대를 집어던지고 다시 술잔을 들어올렸다.
테이블 곳곳에서 유사한 일들이 짧게, 그리고 격하게 일어났다. 1분 후 메르데린 가에 충성스러운 이와 그렇지 않은 이들은 일목요연하게 구별되게 되었다. 전자는 모두 칼에 맞거나 쓰러졌던 것이다. 그리고 후자는 대부분 메르데린 스쿨의 최고 엘리트들이었다. 메르데린 공작이 최고의 정성을 들 여 가꿔내었던 자들.
교육이 과했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합리성 이외의 모든 것을 거부하도록 철두철미하게 교육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지도. 그런 합리성을 가지고 있는 자들답게, 암살을 끝낸 그들의 모습에서 격한 호흡이나 다급한 시선 교환 같은 것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서 소사라는 여전히 술을 마시 고 있는 그의 형에게 눈치를 줬지만 서 소팔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왜?”
“그만 좀 마셔, 형.”
“이건 좋은 술이라고. 아깝잖아.”
서 소사라는 한숨을 내쉬며 휘리를 바라보았다. 휘리는 피 묻은 검을 든 채 공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 다. 나도 이런 식은 싫습니다, 공작. 하지만 내가 다벨의 영웅인 동안에, 사람들이 나에게 환호를 보내고 있을 때 해치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휘리가 입을 열었을 때 서 소사라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들었다.
“서 소사라. 내 얼굴을 한 대 쳐줘.”
소사라는 당황하여 휘리를 보았지만 휘리는 눈을 감은 채 얼굴을 내밀었다. 소사라는 입술을 비죽거렸다.
“그러지요, 뭐.”
서 소사라의 일격은 사정 봐주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휘리는 거의 턱이 돌아갈 뻔한 충격 때문에 몇 발자국이나 물러나야 했다. “괜찮으십니까?”
서 소사라의 질문에 휘리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우는 소리를 했다.
“말이 되는 질문을 해라, 젠장. 턱이 찌그러진 것 같아.”
“왜 그런 명령을?”
“이제 내 얼굴 너무 환하지 않지?”
서 소사라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예. 이제 주군 암살의 비보를 들은 충신의 얼굴 비슷하게 되었군요.”
휘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 소팔라 쪽을 흘끔 쳐다보았다.
“빨리 끝내고 일하세. 우린 바빠.”
소팔라는 기분좋게 술잔을 들어보였다. 그 모습에 미소 짓던 휘리는 몸을 돌려 문 쪽을 향해 걸어갔다. 물론, 지금껏 사트로니아와 내통하면서 그들 을 이곳까지 끌어들인 다벨 내부의 ‘비밀 결사’에 의해 다벨 공작 프란체스코 메르데린이 살해당했음을 만방에 알리고 그 유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해 서다.
여담이지만 그 ‘비밀 결사’에 이름을 붙여줄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서 소사라와 휘리는 격론을 벌였다. 서 소사라는 이름을 가진 편이 사람들로 하여금 실체감을 느끼게 해주며 애져버드가 그렇듯 어떤 이름은 실체보다 더 오래 남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만드는 이 있지도 않은 비밀 조직을 실체감 있게 만들어주기 위해선 이름을 붙여주는 것보다 더 좋은 건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휘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네 말은 맞아. 하지만 바로 그래서 안 돼. 그 실체감이 너무 진해지면, 사람들은 자네 말마따나 애져버드의 경우처럼 너무 오랫동안 기억하게 돼. 그럼 언젠가 탄로난단 말이야. 난 수십 년쯤 후에 탄로나는 건 아무 상관 하지 않겠어. 하지만 수년 내는 곤란해. 일을 못하니까.”
서 소사라는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휘리 노이에스에 찬성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 ‘비밀 조직’의 우두머리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의견 일치를 보였 고 그래서 다벨 총사령관 클루 멕켄지 경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그 비밀 조직의 수령으로 취임(?)했다. 자기가 똑똑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왜 클루 멕 켄지가 싸우는 족족 바스톨 장군에게 진 것인지 잘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공작의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달려간 휘리 노 이에스의 행동에 대해서는 칭송을 보내게 될 것이다.
복도를 걸어가는 휘리의 걸음은 활기찼다. 활기차지 않으면 이상한 일일 것이다. 휘리 노이에스는 어제 자작이 되었고 오늘은 공작(당분간은 ‘대리’가 붙겠지만)이 되었다. 그러면 내일쯤은?
서 소사라에게 한 대 때리게 하면서까지 얼굴을 진정시켰지만, 휘리 노이에스는 자신도 모르게 자꾸 볼이 실룩거리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4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