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4권 – 18장 : 산폭풍, 평야로 – 2화
가장 잔잔한 바다도 별빛을 반사하지는 않는다. 그런 먹물 같은 바다를 가로지르는 배가 있었다.
키를 쥔 채 밤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오스발은 가벼운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오스발은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검은 윤곽을 보았다. 달빛밖에 없는 밤바다였지만 오스발은 어렵잖게 그것이 율리아나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안 주무십니까?”
율리아나는 대답 대신 오스발의 등뒤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오스발의 등에 등을 기대었다.
“발. 난 조금 전 매우 발칙한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잠이 안 와요.”
오스발은 빙긋 웃으며 허리를 약간 앞으로 굽혀 공주가 편한 자세를 취할 수 있도록 했다.
“어떤 생각이시기에 발칙하다는 말씀을 다 하십니까?”
“아까 저녁에 슈마허가 미적거리며 물어봤던 것 기억나죠? 행선지를 알고 싶다고.”
“예. 기억합니다.”
율리아나는 밤하늘을 바라보려는 듯 머리를 뒤로 젖혔다. 그러자 율리아나의 머릿결이 오스발의 목을 눌렀다. 부드럽고 가느다란 머릿결이 목을 간 지럽히자 오스발은 몸을 살짝 흔들었고 율리아나는 불평하듯이 말했다.
“가만히 있어요. 어디까지 말했죠? 아, 그래. 행선지, 침대에 누워서 그 생각을 해봤어요. 당신도 대충 짐작할 수 있겠죠? 카밀카르 아니면 검독수리 의 성채죠. 그렇죠?”
“예.”
“그 외에 다른 선택은 없는 걸까요?”
“무슨 말씀이신지요?”
“언젠가 우리 이런 이야기 나눈 적 있었죠. 왕족의 책임 말이에요. 미노 만에서 테리얼레이드로 가는 도중이었지요? 예. 그때만 해도 나는 왕족의 책 임을 강하게 인식하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지금부터 말하려는 생각 같은 것은 절대로 떠올릴 수 없었죠.”
“어떤 생각입니까?”
“만약 말이에요. 당신은 나를 걷어찼지만.
“예?”
“시끄러워요. 듣기나 해요. 어쨌든 당신은 나를 걷어찼지만, 그래도 내가 술김에 당신 겁탈하고……”
듣기나 하라는 명령 때문에 오스발은 신음만 흘렸다.
“꼼짝 못하게 된 당신을 끌고 어느 조용한 어촌으로 도망쳐 버릴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나서 당신은 이 배로 고기를 잡고 나는 그 고기를 절대로 먹 을 수 없는 것으로 바꿔놓은 다음 당신에게 강제로 먹이며………… 그렇게 행복하게 살 수도 있겠지요?”
오스발이 뭐라 대답할 틈은 없었다. 율리아나가 먼저 대답했기 때문이다.
“헤헤헤. 옛이야기에는 그런 가증스러운 공주들이 나오죠. 그런 지독한 이기주의자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야기를 애들한테 들려주다니.”
“이기주의자라고 하셨습니까?”
“그런 공주들은, 그렇게 살고 싶다면 공주로 살아온 날들에 대해 환불 조치는 했어야 했어요.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먹고 마시고 입고 교육받고 심 지어 그들에게서 존경받고 사랑받은 것들 전부를 국민에게 돌려주고 나서 자기 길을 찾아가야 했지요. 받은 것에 대해선 아무것도 안 돌려주고서 제 멋대로 자기 좋아하는 것만 찾아 훨훨 떠나다니, 정말 공주 망신 다 시키는 것들이라고요. 같은 공주라는 것이 창피해요.”
오스발은 소리없이 웃었다. 하지만 떨림은 전달되었고, 그래서 율리아나는 오스발의 등에 자신의 등을 비비적거려 주의를 촉구했다.
“가만있으라고 했잖아요. 응. 계속 말할게요. 어쨌든 난 그렇게 생각해 왔어요. 그런데 말이죠. 정말 그러면 안 될까요?”
“환불 조치를 하지 않으시겠다는 겁니까?”
“그게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다 돌려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세상에서 받은 것을 다 돌려주려면 우리는 세상 전체를 볼 줄 알아야 해요. 빵 한 조각을 들어올리며 농부와 수레꾼과 방앗간 일꾼과 제빵사와 물 길어온 하녀와 오븐에 넣을 나무 해온 나무꾼과…… 아아, 이건 끝도 없어요. 어쨌든 그 모든 것을 볼 수 있을까 요?”
“글쎄요.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죠?”
“세상에 있는 것들은 다 연관되어 있으니까요. 어느 선부터 다른 세계의 일부와 관련이 없어지는 세계의 일부 같은 것은 없지 않습니까?”
“맞아요. 세상은 편집증 걸린 거미가 끝없이 뽑아내는 무한한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지요. 당신처럼 그런 거미줄에서 빠져나와 있는 인물이 있지만 그건 특별한 경우겠지요.”
“예? 제가 빠져나와 있다니요?”
율리아나는 방긋 웃으며 오스발의 목소리를 흉내내려 했다. 하지만 곧 율리아나는 오스발의 목소리가 특별한 개성 없이 그저 부드러운 목소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율리아나는 자신의 목소리로 말했다.
“면천? 싫어. 신분에 나를 돌려주고 싶진 않아. 정의의 실천? 싫어. 정의에게 나를 돌려주고 싶진 않아. 공주 구출은 여가 활동이었을 뿐이야. 세기 의 신부? 싫어. 세기의 신부에게 나를 돌려주고 싶진 않아. 아무것도 안 주기 위해서 아무것도 안 받는 자유인. 하아, 그대는 세상의 왕.”
“노래말 같군요.”
“노래・・・ 그 가수.”
“예?”
율리아나는 졸린 눈을 비비고 말했다.
“으응. 그건 지금 할 이야기가 아니에요. 조금 있다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은 세상이 내게 준 것과 그 보답으로 내가 세상에 줘야 하는 것의 저울눈 맞추기 이야기예요. 어쨌든 계속하죠. 도대체 어디까지 돌려줘야 하지요? 보통 사람들은 자기 시야에 들어오는 거미줄만 보고 시야 너머에 있는 거미줄 은 신경 쓰지 않고 살잖아요. 내가 먹는 빵이 구워진 오븐을 만들기 위해 대장간에서 사용된 철광석을 캐어낸 광부의 곡괭이를 만들기 위해 나무를 채벌한 나무꾼의 옷을 만들어낸 재단사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말이에요.”
오스발은 빙긋 웃었다.
“더 이어질 수 있겠군요.”
“물론 무한히 이어질 수 있지요. 당신이 말한 것처럼 어느 선부터 다른 세계의 일부와 관련이 없어지는 세계의 일부 같은 것은 없으니까. 그럼 나는 어디까지 고려해야 하지요? 나를 키워주신 아바마마의 고마움만 생각하면 될까요? 아니면 카밀카르의 장래? 대륙의 평화? 세계의 운명?”
“세계의 운명이오?”
“그건 그냥 말해 본 거예요. 하지만 대륙의 평화 정도는 고려해 볼 수 있겠지요. 잠깐. 지금 속으로 과대망상도 참 더럽게 걸렸구나 등의 생각을 하 나요? 도망다니는 공주 주제에 대륙의 평화를 고려해서 어쩌겠다는 거냐고?”
“그렇지 않습니다.”
율리아나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차라리 그렇다고 말하지, 이 악당. 그러면 나도 헤헤 웃으며 맞장구 치고는 대륙의 평화 따위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을 텐데.”
“무슨 말씀이신지요.”
“오스발. 내 쪽으로 좀 돌아봐요.”
오스발은 키를 쥔 손을 바꾸며 뒤로 돌아 공주를 바라보는 자세로 앉았다.
율리아나는 선원용 반바지에 소매를 둥둥 걷어올린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아직도 햇살은 뜨거웠고 그래서 율리아나의 팔다리는 갈색으로 그을려 있었지만 이 밤하늘 아래 오스발의 눈에는 그저 하얗게만 보였다. 율리아나는 그 하얀 무릎을 가슴 앞에 모아 그 위에 턱을 얹었다.
“비밀 이야기 해줄게요. 나 혼자 끙끙거리기 싫어서 그러는 거예요.”
오스발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아나는 시선을 약간 낮추며 말했다.
“휘리 노이에스 이야기는 들어봤지요?”
“예.”
“난 좀 복잡한 경로들을 통해 그 아버지가 누군지 추측해 낼 수 있게 되었어요. 그 이야기를 다 하는 건 지루한 일이니 넘어가고, 어쨌든 그 아버지 는 혼 족의 타르타니어스예요. 그러니까 휘리는 휘리 타르타니어스인 것이지요.”
“타르타니어스라면?”
“그래요. 레프토리아 회전에서 늦게 도착했던 하이낙스의 친구. 혼족의 반란을 앞장서 지휘했던 맹장. 무시무시한 사람이지요. 혼 족의 장수라서 더 높게 평가되는 거라고 트집잡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제국이 안심하고 잠자리에 들 날이 올지 의심스럽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 “지요.”
“예. 그러면 휘리 노이에스는 그 아버지를 닮은 것이군요.”
“그래요. 또 하나. 언젠가 말해 줬지요? 휘리가 팔라레온, 다케온, 록소나를 정벌하게끔 만든 것은 나라고. 옛기억을 되살려봐요, 발, 다림에 들어가 기 전, 볼드윈 씨의 산장에서 만났던 롱레인저 기억나나요?”
“도나텔 백부장님 말씀이군요.”
“그건 가명이었어요. 그 사람이 휘리 노이에스지요.”
오스발은 눈을 커다랗게 떠 율리아나를 바라보았다. 율리아나는 무릎 위에 얹은 머리를 옆으로 기울였다.
“예. 그 사람이 왜 거기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정찰 같은 것이었나 봐요. 어쨌든 나는 그때………… 그에게 아버지를 닮으려고 애쓰지 말라고 말해줬지요. 내가 보기에 그 남자는 그때 아버지를 너무 강하게 인식하고 있더라고요.”
“기억납니다. 언젠가 바탈리언 남작님과 말씀하시던 것이군요.”
“예. 그리고 그는 나와 헤어져서 곧장 정복 사업에 뛰어들었지요. 모르지요. 내가 지금 한 사람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는 식의 과대망상에 빠져 있 는 것일지도. 하지만 내가 만났을 때의 그와 지금 정복 사업을 벌이고 있는 그 사이에는 너무 큰 차이가 있고, 그 둘 사이의 시간 간격은 너무 짧아요. 그러니까 내가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할 수도 있잖을까요?”
“그렇습니까. 하지만 공주님께서는 아버지를 닮으려고 애쓰지 말라고 하셨는데, 지금 그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을 재능을 쓰고 있잖습니까?”
“바로 그거예요! 그 재능을 어디서 물려받았건 간에 그것은 그의 재능이잖아요? 그때 나는 이런 식으로 말했어요. 휘리 당신이 아버지의 아들이 아 닌 휘리 당신으로서 설 수 없다고는 생각하지 말라고. 당신 스스로가 되라고. 그래서 그는, 자신의 속에 있는 것이 아버지의 것이 아니라 자기 것이라 는 것을 생각하게 된 건 아닐까요? 아버지의 이름에 구애될 필요 없이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 아닐까요?”
“아, 예.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율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힘겹게 말했다.
“그렇다면, 정말 내가 휘리를 그렇게 만든 거라면 나는 팔라레온과 다케온, 록소나, 심지어 다벨의 사람들에게까지 죄를 지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요. 그렇죠? 또 하나의 거미줄, 아주 진득진득한 거미줄이 생긴 것이겠지요?”
오스발은 약간 멍한 듯한 얼굴로 그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율리아나의 얼굴은 짙은 슬픔으로 물들어 있었다. 오스발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환불 조치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너무 잘 말해 줘서 미울 정도예요.”
율리아나는 고개를 푹 숙여 무릎 속에 감췄다.
“내 문제를 알겠나요? 난 남해상에서의 강한 조력자를 원하는 아바마마나 우리 국민들을 위해 발도 로네스에게 가야 하지요. 혹은 휘리를 그렇게 만 들어버린 책임을 지기 위해 다벨로 가야 할 수도 있고요. 내가 도대체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하지요? 우습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거예요. 지나가다가 내뱉은 말 한마디까지 책임져야 하냐고. 하지만 그 결과를 보세요.”
율리아나의 어깨가 한번 크게 움직였다.
“아니, 그런 것은 옆으로 치워두더라도,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서부터 우스워지지 않는 것이지요? 도대체 어느 선부터 진지하게 책임져야 하는 건가 요? 모든 것을 책임질 수는 없어요. 그 책임의 거미줄은 무한대까지 이어진다는 것은 조금 전 당신과 내가 증명했어요. 그렇다면, 발. 나에서부터 시 작되는 이 엄청난 씨실들의 행렬에서, 나는 도대체 어디까지 날실을 움직여야 되는 거지요? 어디까지가 내 천인 거죠?”
오스발은 묵묵히 율리아나의 어깨를 바라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 켜켜이 쌓여가는 달빛과 뱃전을 애무하는 파도만이 세상의 전 부인 것 같았다.
잠시 후 율리아나는 풍성한 머리를 쓸어넘기며 고개를 들었다.
“위로 같은 건 안하는군요. 내 슬픔에 책임질 건 없다 이거죠.”
“죄송합니다.”
“내가 왜 당신에게 끌리는지 알겠어요.”
오스발의 눈꼬리에 미세한 슬픔이 스쳐지나갔다. 율리아나는 세웠던 무릎을 다시 눕혀 무릎걸음으로 오스발에게 다가왔다.
“허리를 부러뜨리고 말 짐을 어깨에 진 자는 미풍처럼 가볍게 걸어가는 자를 선망하겠지요. 그래요. 난 당신을 선망해요. 가짜 자유밖에 누리지 못 하는 공주를 비웃는 당당한 노예………… 돌려주기 싫어서 아무것도 받지 않지만 그래도 결핍감을 느끼지 않는…… 보통 사람이라면 그 결핍감이 무서워 서, 고독이 무서워서 허겁지겁 받고 안간힘을 다해 돌려줄 텐데…”
율리아나의 얼굴은 이미 오스발의 가슴에 닿아 있었다. 오스발은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천에도 불구하고 공주의 뜨거운 볼, 매끄러운 이마, 그리고 코와 입에서 흘러나오는 따스한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율리아나는 오스발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속삭였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예.”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예.”
“나는 절대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예.”
“조만간 가을이겠지요. 추우니까, 안아줘요.”
오스발은 키를 잡았던 손을 놓고는 율리아나의 등에 손을 올려놓았다. 율리아나는 오스발의 어깨에 기댄 채 태평하게 잠들어버렸고 그래서 오스발 은 다시 키를 잡을 기회를 놓치고는 아침까지 그녀를 안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배는 제멋대로 흘러갔다.
물수리호의 갑판에 올라서던 하리야 선장은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어라, 벌쳐 씨? 당신이 여긴 웬 일이오?”
갑판 구석에 앉아 햇빛을 쬐고 있던 벌쳐는 하리야를 향해 손을 흔들어보였다.
“아아, 발길 가는 대로 걷다 보니 이렇게 오게 되었습니다.”
하리야는 이상하다는 투로 물수리호의 갑판을 둘러보았지만 언제나 사교성 빵점인 물수리호의 선원들은 그에게 아무 눈길도 보내지 않았다. 하리야 는 미심쩍다는 투로 벌쳐에게 말했다.
“승선 허가는 받은 거요?”
“집어던지지는 않더군요. 그래서 앉아 있습니다.”
하리야는 미심쩍다는 투로 메인 마스트의 알버트 선장을 바라보았지만 무슨 대답을 얻을 수야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하리야는 팔짱을 끼며 그에게 로드 데자크의 서신을 전달했던 패스파인더를 바라보았다.
“발길 가는 대로라니, 그러면 아무 목적도 없이 물수리호에 승선해 있다는 말입니까? 묵을 곳이 필요하다면 여관이나 다른 곳으로 갈 것이지.”
벌쳐는 아무 대답 없이 그저 웃어보였다. 하리야는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자신의 배도 아닌 이곳에서 그를 쫓아낼 수는 없었 다. 물수리호의 선원들이 놔두기로 했다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 그러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동료들에 대한 해묵은 답답함을 느끼며 하리야는 주위를 다시 둘러보았다. 그때 벌쳐가 말했다.
“벨로린을 찾으시는 거라면 포어 마스트 위에 앉아 있습니다. 하리야 선장님.”
하리야는 포어 마스트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벨로린이 가로대 위에 다리를 뻗은 채 돛대에 기대어앉아 있었다. 하리야는 다시 벌쳐를 돌아보 았다.
“벨로린도 아시오?”
“예.”
하리야는 벌쳐를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햇살은 벌쳐의 얼굴에 정면으로 떨어지고 있었고 그래서 그의 얼굴은 하얗고 멀어보였다.
“당신 목적이 뭐요, 벌쳐 씨? 왜 여기 앉아 있는 거지?”
“선단에 이상한 불청객이 들어온 것에 대해 화를 내시는 것은 이해합니다. 뭐, 해를 끼치지는 않겠습니다. 저는 다만 이곳에 있어야 할 필요를 느끼 며, 그리고 미안합니다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리야는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벌쳐를 바라보았지만 벌쳐는 이제 눈을 감고 다시 햇빛에 얼굴을 내맡겼다. 하리야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익숙한 손 놀림으로 밧줄을 붙잡았다.
빠르게 앞돛대 위로 기어올라간 하리야 선장은 벨로린이 있는 높이까지 이르렀다. 벨로린은 그를 흘끔 보고는 약간 옆으로 물러나 주었고 그래서 하 리야 선장 역시 가로대에 앉을 수 있었다. 이 배 위에서 말이 통하는 사람(?)이 그래도 한 명은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하리야는 벨로린에게 말했다. “벨로린. 저 아래의 저 남자는 뭐지?”
“벌쳐라는 패스파인더.”
“그건 나도 안다. 왜 이 배에 타고 있는 거야? 선원들이 왜 저 친구를 쫓아내지 않는 거지?”
“알버트 선장의 손님이야.”
“손님?”
“응. 일항사는 이미 확인했어.”
확인이라 하리야는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물수리호의 일항사가 선장에게 명령받은 일이라면 이야기는 끝난 것이다. 하지만 알버 트 선장이 무슨 손님을 받는다는 거지?’ 하리야는 메인 마스트 아래에 못 박혀 있는 알버트 선장을 바라보다가 다시 답답함을 느꼈다. ‘젠장. 뭘 물어 도 답이 나오나.’
하리야는 ‘뭘 물어도 답이 나오는 소녀를 돌아보았다.
“알았다. 손님이라니 어쩔 수 없겠군. 뭐 좀 물어볼 것이 있어서 찾아왔는데, 벨로린.”
벨로린은 하리야를 흘끔 쳐다보았다.
“하리야. 하나 말해 두겠는데, 나는 킬리를 돕는 거지 너를 돕는 것이 아냐.”
“킬리가 좀 바빠서 내가 직접 온 거야. 하지만 꼭 따질 필요가 있겠니? 그가……”
“그가 너희들을 돕고 싶어한다는 것은 알아. 동료니까. 하지만 킬리가 폴라리스를 배신하고 싶어졌을 경우 나는 그에게 적극적으로 그 방법을 알려 줄 수도 있다는 것 잊지 말아줬으면 하는군.”
하리야는 약간 얼떨떨한 표정으로 벨로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그는 싱긋 웃었다.
“알았어. 원하면 죽여준다고도 했다지? 그래. 잘 알아. 너에게 뭐 좀 물어볼 것이 있고, 킬리 역시 내가 그걸 알게 되는 것을 원할 것 같아서 물어보 는데 말이야…… 이렇게 말하면 되겠니?”
“좋아.”
“지금 대륙 내에서 목도리도마뱀들을 구할 방법이 있을까? 한꺼번에 대량으로.”
“목도리도마뱀?”
벨로린은 한 호흡 쉰 다음에 말했다.
“패잔병…… 다케온의 리저드라이더들이 찾아왔군. 322명? 꽤 많이도 모였군. 그들 중 자신의 목도리도마뱀을 가진 건 126명. 그러면 넌 196마리 나 되는 목도리도마뱀을 구해서 그들을 무장시킬 생각인거냐?”
하리야는 감탄했다는 듯이 말했다.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좋긴 한데, 익숙지 않은 거니 좀 불안하기도 하군. 그래, 그 자들이 이곳으로 도망쳐 왔어. 그 자들을 무장시켜 팔라레온을 칠까 하는데. 어떨까?”
“밀 수확을 방해하겠다는 것이군. 유격 활동에서는 가장 적합하겠지. 빠르고 강하니까. 그리고 나는 미래의 일은 알 수 없어. 그들이 훌륭하게 활동할지 그렇지 않을지야 모르겠군. 그런 건 스스로의 판단을 믿으시지, 그래?”
“알았어. 그러면 아까 질문에나 대답해 주렴. 196마리의 목도리도마뱀을 구할 방법이 있을까?”
“그건 너도 알 텐데? 다케온에 목도리도마뱀을 판매하던 나라들은 바이스라와 레모, 켄타로니아. 그 중 제일 좋은 것은 켄타로니아 산. 그 수입선을 이쪽으로 돌린다면.. 현재 그곳에 있는 구매 가능한 목도리도마뱀은 다 합치면 15마리 정도군.”
“겨우 그 정도야?”
“뱃사람이라서 잘 모르나 보군. 목도리도마뱀은 말이나 소처럼 목장에서 키우는 동물이 아냐, 하리야 선장. 사냥꾼들이 어린 새끼를 생포해서 파는거지.”
“할 수 없지. 15마리라. 어디에 있지?”
“켄타로니아에 7마리, 그리고 바이스라에 3마리, 레모에 5마리. 서둘러야 될걸. 그 사냥꾼들 이제 목도리도마뱀 팔아먹을 곳이 없다고 낙담하고 있거든.”
하리야는 고개를 홰홰 내저으며 다시 밧줄을 쥐었다. 그때 벨로린이 말했다.
“그렇잖으면, 직접 잡든지.”
“잡는다고?”
“잊혀진 탑 섬. 거기엔 아무도 가지 않기 때문에 대륙에서 건너간 목도리도마뱀들이 지천으로 뛰어다니지. 리저드라이더들을 태우고 직접 잡으러 가면 되겠군. 그 자들이 목도리도마뱀들 다루는 데 최고인 것은 당연하니까. 돈 별로 안 드는 방법이니 너나 식스가 환호를 지를 것 같지만…………”
벨로린은 말 끝에 하리야를 돌아보았다. 하리야는 반가움과 공포가 뒤섞인 표정으로 벨로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벨로린은 싸늘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거기는 좀 무섭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