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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1부 – 36화


어제 밤 자매들과의 어색함도 많이 풀린 것 같고, 간만에 술도 많이 안 마셔서 그런지 매우 상쾌한 아침이었다.
나는 기분 좋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대청각으로 향했다.

도착해 보니, 총관과 월영당주는 무릎을 꿇은 자세로 대기하고 있었다.
야후 장로는 곡 내의 ‘막강 파워 그룹 멤버’답게 무릎을 꿇고 있지는 않았으나, 들어오는 나에게 인사하는 폼이 평소와 달리 조심스러웠다.

“두 사람도 일어나. 뭐, 죽을죄를 지었다고…”

일단 그렇게 부드러운(?) 말로 시작했다.

상좌에 앉아 세 사람을 내려다보는 내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남아있었으나, 세 사람은 그런 내 표정에도 결코 방심하지 않겠다는 듯 긴장된 모습이었다.
안색이 약간 초췌한 듯 보였고, 한 무술과 한 내공을 갖춘 이들인데 하루 밤 설친 정도로 저럴 리는 없으니, 좀 걱정이 되긴 했나 보다.

“…어제 내가 말했듯, 어젯밤에는 누구를 처벌하고 어쩌고 할 마음이 안 생길 정도로 기분이 좋았어.
그런데… 어쩌지?”

나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었다.

“오늘 아침도 여전히 기분이 좋으니….”

세 사람 다 아직 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허허… 제가 보기에도 오늘 아침 곡주의 심신이 매우 쾌청해 보입니다.
간밤에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던 모양이지요?”

먼저 야후 장로가 짐짓 태평한 태도로 입을 열었고, 나도 그 정도로 대꾸하기로 했다.

“하핫..! 달은 밝고, 미주와 미녀가 함께 했으니 당연히 기분 좋을 수밖에요.”

세 사람의 시선이 내 왼쪽의 소령이에게 집중됐다.
‘어째서…?’ 하는 표정으로 당황하던 소령이는 내가 장난스럽게 찡긋 윙크를 하자 새빨개진 얼굴을 푹 숙였다.
짜식… 순진하기는…

자매들에게야 그렇다 치고,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오히려, 내가 귀여워해 준다고 알려지는 것이 얘들에게 더 유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예상대로 세 사람은 ‘기특한 것, 네가 밤새 곡주의 마음을 풀어 놓았구나.’ 하는 표정으로 소령이를 보고 있었다.
응…? 가만…? 지금 이 인간들 전부 콕 찍어서 소령이를 봤지?
그럼 역시 이들도 어제 소령이가 단장을 하고 내게 온 것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지…?

음… 눈치를 보니 내가 ‘종교 생활(?)’ 운운하여 말짱하게 돌려보낸 것까지는 모르는 듯도 했지만, 어쨌든 새삼 기분이 나빠졌다.

“허허! 곡주의 풍류는 여전하시군요.
마침 이 늙은이가 아끼는 먹을만한 술이 몇 병 있는데, 언제든 곡주께서 오신다면 개봉할…”

나는 손을 들어, 아부성 발언을 하고 있는 야후 장로의 말을 막았다.

“그 술은… 나중에 맛보기로 하지요.
그보다 후후! 기분이 아무리 좋아도 할 건 해야겠지?
안 그래요? 세 분, 이 비화곡의 핵심 간부님들…?”

나는 여전히 웃으며 조금 비꼬아 말했고, 다른 사람들은 흠칫하며 안색이 굳어졌다.

“먼저, 총관.”

“하, 하문(下問) 하십시오, 곡주님.”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말해봐.”

“고, 곡주님의 엄중한 지시를 함부로 제3자에게 언급하였습니다.
곡 내외의 업무를 총괄하는 가볍지 않은 직책을 맡고 있는 자로서 언행이 망령되고 경솔했습니다.”

“… 이번엔 소당주.”

“…곡 내 외의 정보망을 맡고 있는 자로서, 곡 내의 기밀이 명령체계 외로 유통되는 것을 막지 못했으며, 오, 오히려 본 당주가 그 기밀을 사사로이 취하였습니다. 이는…”

“허, 허어-엄!!”

헛기침으로 월영당주의 말을 끊은 것은 야후 장로였다.
양녀인 월영당주가 당황한 시선을 던지는 걸 무시하고, 야후 장로는 포권하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서서 입을 열었다.

“본 장로, 곡주께 한 말씀 올리겠소.
곡주께서 진노한 이유를 모르는 바 아니나, 아시다시피 저희는 한 가족입니다.
사위인 총관에게 상황의 진행을 물은 것은 장인인 저였고, 또한 본 장로도 결코 이번 일에 무관하지 않으니 총관이 숨기지 못한 것입니다.
허허, 이 늙은이 딴에는 주어진 임무 때문에 오랫동안 헤어져 있는 여식과 사위를 보기가 안타까워 소식을 전해주려는 욕심에 그만…”

노인네 특유의 억지가 조금(?) 섞인, 조리가 있는 듯도 하고 말도 안 되는 듯도 한 주장이랄까?
현대의 ‘보안’ 개념으로 하자면 역시 말도 안 되지만, 체면과 인간 관계를 중요시하는 이 시대 사회를 기준으로 하면 아주 엉뚱한 주장도 아니긴 하다.

“어쨌든… 본 장로가 곡의 법규를 어긴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니, 치죄 하시려면 이 늙은 것을 먼저 하시지요.”

…이 노인네, 결국엔 완전히 BJR(배째라)이군.
그동안 나도 나름대로 생각해 봤지만, 사실상 총관과 월영당주 같이 없으면 당장 아쉬운 핵심 간부들을 처벌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장로급들은 당연히 더 어렵다.
과거 원판의 사부와도 자웅을 겨루었던 존경받는(?) 전대마두(前代魔頭)들인데다, 현재도 힘없는 명예직이 아닌 아직 정정하여 밖에 나가면 능히 혼자 일파를 이룰 만한 실력자들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래서 전체적인 ‘군기’를 잡으려면 오히려 이 장로급을 확실하게 잡아야 하는데, 오늘의 껀수(?) 정도로는 힘들 것 같고…
흐… 이번엔 계획대로 좀 골탕이나 먹여야겠다.

“..야후장로께서도 당신의 잘못을 인정한다. 이거지요..?”

“그렇소이다. 그러니 구워먹든 삶아먹든 맘대로 하시구려!”

본래 원판이 그랬다고 하고, 그래서 나 역시 상대가 누구든 반말로 지껄였고,
평균 연령이 100살이 넘는 장로급들에게도 반말과 존대어를 대충 섞어 말한다.
근데.. 역시 동네가 그런 동네라 그런가? 이 터프한 노인네 야후 장로도 만만치 않다.
일단 막나가기 시작하자 상대가 ‘곡주’고 뭐고 말투부터 조심성이 없어지는 것이다.

“세 사람 모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거로군. 근데 어쩌나.. 나는 여전히 기분이 좋은 걸…”

나는 그러면서 또 슬며시 소령이를 보았다.
소령이는 전전긍긍 어쩔 줄 몰라하며 다시 고개를 숙였고,
야후 장로는 노골적으로 내게 ‘이런 껄떡쇠 같으니..’ 하는 시선을 보내온다.
흐… 나는 왜 이런 장난이 재밌는지 모르겠다.

“험..! 웬간하면 세 사람의 그간 공적도 있고.. 그 저 훈계로 끝낼까도 했으나,
너무 해이해진 곡 내 보안을 경계하라는 마음에서…”

나는 갑자기 씨이익-! 웃으며 세 사람을 응시했다.

“세 사람에게 사소한, 아주~ 사소한.. 금제(禁制)를 가할까 합니다.”

‘금제’라는 말도 뜻밖이지만, 내 사악한(?) 미소 때문에 다들 긴장하여 내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지총관과 소당주.. 부부싸움 3년 금지. 야후 장로는 무력사용 1년 금지.”

“……….”

“……….”

“……….”

“왜..?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내가 다시 묻는데도 세 사람은 멍청해진 표정을 풀지 못하고 멍하니 날 올려다 볼 뿐이었다.
옆을 돌아보니, 내가 정식 명령을 내릴 때면 기록하는 서기 역할의 소교도 붓을 든 채 곤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잘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인데, 보충 설명을 해주지.
총관과 소당주는 앞으로 3년 동안 어떠한 형태로든 부부싸움을 할 수 없어.
병기를 쓰는 건 물론이고 손발.. 심지어 말다툼도 안돼. 어때.. 아주 쉬운 금제지..?”

“조, 존명..!”

얼떨떨한 표정으로 동시에 대답하는 두 사람..
이 부부의 재미있는 반응을 좀 더 보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옆에 있던 야후 장로가 어느 사이 표정이 변했는데, 우.. 이거 장난이 아니다.

“곡주… 설마, 본 장로의 무공을 폐하겠다는 뜻이오?”

몽몽이 경고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내공을 끌어모으지는 않은 것 같지만..
평소 허허거리며 약간은 주책 맞아 보이기까지 하던 표정이 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극히 살벌하고 냉냉한 ‘노마두’의 얼굴이 자리해 있었다.
솔직히 디게 무서웠지만.. 이 노마두의 말귀 어두운 것에 더 짜증이 나서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거참-! 누가 무공을 폐하거나 쓰지 말래? 딴 사람 때리지 말라는 얘기야.”

“….?”

“다른 일로 무공 쓰는 건 상관없지만.. 제자들은 물론이고, 곡 내 식구들 아니, 세상의 누구도 때리거나 괴롭혀서는 안돼!”

“곡주, 그건…”

“장명의 도발에 생각 없이 대처하여 화천루와의 일전을 유발한 죄!
곡 내의 일급 기밀을 사사로이 퍼트린 죄! 그 대가로 1년 근신.. 이게 너무 약소하단 뜻인가?”

“…….”

울그락 푸르락 난리가 아닌 표정.. 그러나 이미 시선은 날 응시하지 못하고 있다.
한동안을 혼자 씩씩대던 야후 노인네는 알아서(?) 혼자 진정하더니 체념한 표정으로 내게 포권했다.

“비화곡 장로 야후(夜吼) 소진광! 곡주의 금제에 따라,
1년 동안 누구도 때리지 않고 괴롭히지 않겠습니다.”

절도 있게 딱 부러지게 말하더니, 인사도 없이 휘익! 몸을 돌려 휘적휘적 걸어 나가버린다.
노인네, 성질머리 하곤.. 좀 뒤끝(?)이 걱정되긴 했지만…
흐.. 우히히~ 어쨌든 내가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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