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1부 – 61화
대충 핑계 대고 자리를 나와 고룡촌에서 벗어나면서 다시 생각해보니.. 얼결에 왔다가긴 하지만 여기 고룡촌은 정말 무서운 곳이다.
본단의 아홉 장로에 못지않은 마인들이 이렇게 득실거리는 마을이라니…
비록 은퇴한 자들이라고는 해도, 비상 사태가 발생했을 경우 비화곡의 진짜 무서운 저력은 이 고룡촌처럼 겉으로 눈에 안 띄는 마을에 있는 것이 아닒까?
어쩌면 그래서 원판 ‘극악..’같이 위아래 구분 못하는 놈도 이 고룡촌에 자주 들러 전대 마인들과 친분을 쌓아 놓은 것일 테고…
그럼 앞으로 나도 자주 와봐야 하나?
음- 제기, 여기 이 시대에서 얼마나 살지를 알 수가 없으니 어느 선까지 주변 관리(?)를 해야 하는지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어… 그러고 보니, 만약 ‘진’이 지금 당장 나타나 날 본래의 시대로 돌려보내 주겠다고 하면 그땐 어쩌지..?
몽몽이 처음에 ‘몇 년 오차는 다반사다’라고 해서 막연히 몇 년 버틸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그 것도 100% 확실한 건 아니지 않은가.
다른 일들은 비록 벌여 놓긴 내가 벌여 놓은 일이지만 남은 니들이 능력껏 해결하세요, 하고 미련 없이 20세기로 가버릴 수 있겠는데…
그렇지만 대교 문제는 좀 심각하다.
이 시점에서 갑자기 내가 사라져 버릴 경우, 성지에서의 탈출은 알아서 할 수 있다고 쳐도.. 비화곡 인간들이 상황을 조사하다가 그녀에 관한 걸 알게 되면, 그러면 대교가 세상의 어떤 무공을 익히고 어떻게 도망 다닌다 해도 오래는 못 살 것이다.
총명한 대교가 무사히 장청란을 쓰러트리고 마봉후의 후인으로 인정을 받기만 한다 해도.. 그래도 내가 없으면 결과가 불투명하다.
현 비화곡의 짱이라는 ‘배경’이 있는데도 성지에서 지낸 사실을 용서받을 수 없다고 하여 쉽게 없애기 어려운 존재, 마봉후의 후인으로 만들고 거기다가 몇 가지 더 조치를 강구 중이지 않았는가.
그나마의 빽도 없어진 대교가 처치 대상이 되면 당근 대교의 동생들도 줄줄이 엮일 테고, 별로 안 친한 여자지만 하여간 구월화 삼홍랑의 입장도 썰렁해질 것이고…
으~ 이거 다시 생각을 좀 해봐야겠는걸?
당장에 닥친 일들 처리에 급급하다 보니 그 동안 너무 일을 많이 벌여 놓았나?
내가 아무리 이 시대 사람이 아니라 해도 그렇지 여러 사람 인생이 걸린 일들을 잔득 벌여놓고 그렇게 무책임하게 사라질 수는 없지 않은가.
더구나 대교는….
일단은 ‘진’이 미래에서 온다 하더라도 몇 달 기다리라고 할 수밖에 없지만, 지난번에 날 돌려보내지 못한 것처럼 만약 또 이런 저런 이유로 반드시 당장 가야 한다고 하면 어쩌지?
언제든 손 뗄 수 있게 좀 더 머리를 써서 일을 벌였어야 했었나..?
하지만 지금까지 내 머리로 그럴 여유나 있었냐?
으으~ 빌어먹을-! 상황이 나 진유준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구나.
“곡주님..?”
옆에서 조심스럽게 말을 거는 황성의 음성 때문에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어..? 어느 사이 내가 소호루 앞까지 온 거지?
“고룡촌에서 나온 후 줄곧 신색이 좋지 못하십니다. 혹시 이곳 주인 이화의 접근이 부담스러워 그러신다면…”
그럼 어쩌겠다고? 니가 해결사로 이화를 어찌 하겠다는 거냐?
“그건 백인장의 오판일 것이오. 곡주께서 설마 그런 여자 문제로 그렇게 고민을 하시겠소?”
이럴 땐 백상이 좀 낫군.
“이봐 황성, 백상 말대로 내가 아무렴 이화 때문에 그랬겠어? 갑자기 엄청 골치 아픈 일들이 떠올라서 그랬어. 최근 곡 내외의 사태들.. 이거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거든.”
“곡주님의 깊은 심기도 모르고 제가 주제넘었으니 용서해 주시길…”
“괜찮아. 후우~! 앞으로 정말 더 골치 아파질 테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오늘은 좀 잊고 술이나 마셔야겠군.”
“좋은 게 좋은 거..?”
그 말이 뭐 이상하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자 중얼거리는 황성의 옆을 스쳐 먼저 소호루의 입구로 들어섰다.
어라-? 오늘 여기 분위기 왜 이래?
“죄송하지만 오늘 소호루는 영업을 하지 않는.. 아! 진대가께서 오셨군요.”
조금 낯이 익다 싶은 중년의 남자가 날 알아보고 정중하게 포권을 해왔다.
“흠.. 이거야, 오늘 저녁때 오라고 하더니 영업을 하지 않는다니 누구 놀리는…”
“아니, 그게 아니올시다. 오해십니다. 아씨께서는 진 대가를 더욱 성심껏 모시기 위해 오늘 하루 소호루의 영업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 험! 뭐, 그럴 것까지야…”
나는 전에 왔을 때처럼 전망 좋은 2층 자리에 안내되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설마.. 했더니 정말로 소호루의 문이 굳게 닫히더니 실내에는 몇 명의 종업원들만 남아서 내가 앉은 탁자에만 알아서 고급(으로 보이는) 술과 안주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 진유준, 비록 본의 아니게 이런 시대에 날아와 어이없는 상황을 연속으로 겪고는 있지만 그래도 가끔 이렇게 기분 전환할 수 있는 일이 생기는구나.
비화곡주라는 신분 때문이 아니라 내 능력(?)으로 이런 특급 VIP 대접을 받게 되다니….
아니, 아니지..? 방심하면 안돼. 이럴 때보면 발생 확률 높은 일이 있었지? 바로 이화가 무슨 이유에서든 배신 때리고 함정을 파놓은 것이라는 패턴!
일단은 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서있는 황성과 백상에게 음식 먹으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은 상태에서 몽몽에게 실내 스캔시키고…
음, 몽몽의 레이다에 걸린 저쪽 벽 뒤의 인간. 이건 흑주로군. 흑주가 특별한 움직임이 없다는 것 자체만 봐도 실내에 특별한 위험은 없을 것 같지만 어디 조금만 더 조사를…
음, 아무 이상 없군 그래.
이제 최후로 의심할 만한 건 이화 자신.. 하지만 원판의 육체는 만독불침이고 이화가 적어도 장로급 정도의 고수가 아닌 이상 아무리 나와 가까이 있어도 흑주보다 빨리 날 어쩔 수는 없을 것이다.
이건 전에 재미로 가상 시물레이션 돌려봐서 안다. 몽몽이 계산한 흑주의 풀 파워(?)는 흑주가 평소 내게서 유지하고 있는 거리만 유지하면, 누가 직접 내 몸에 이미 손을 대고 있게 된 상태라도 그 때부터 날 어쩌기 전에 그를 벨 수 있다. 참 대단한 흑주…
음, 근데 나 오늘 왜 이렇게 새삼 꼼꼼해진 거지?
아무래도 무의식중에 자꾸만 이화와의 신체적 접촉(?) 가능성을 의식하게 되어서 그런가..?
에구, 혼자 미리 김치국 마시지 말자 진유준.
이화가 내게 혹한 것은 사실이라고 해도 겨우 두 번만에 무슨…
음, 갑자기 지난번처럼 1층 무대의 커튼이 열리네…?
그리고 전과 비슷한 패턴으로 등장한 이화가 악기 연주와 노래 공연을 시작한다. 나로서는 나 혼자 덜렁 보고있자니 좀 어색했지만 이화는 눈을 지긋이 감은 채 잘도 감정을 넣어 연주와 노래를 들려준다.
지난번엔 주변이 시끄럽고 기분도 그렇고 해서 잘 몰랐는데 생각보다 듣기 좋은 연주와 노래로군.
얼마 후 이화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갑자기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였던 길고 치렁한 천녀유혼 복장을 벗어 던졌다.
스트립쇼 하는 줄 알고 놀라서 하마터면 들고 있던 술잔 떨어트릴 뻔했지만, 그건 아니었고 이화는 안쪽에 더 활동적이고도 화사한 의상을 걸치고 있었다.
지난번에는 몸이 좋지 않아 춤을 보여 주지는 못한다고 하더니.. 오늘은 그 춤인가?
별안간 조금 빨라지는 전형적인 중국 악기 소리에 맞추어 우아한 동작으로 팔다리를 흐느적거리는(?) 이화…
음, 미안하지만 내 눈에는 아름답다는 생각 이전에 꼭 북한의 무슨 대동강 어쩌고 하는 무용단 무희들의 춤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드는군.
지금 이화의 분위기라면 차라리 엄정화의 섹시 춤이 더 나을 것 같은데…
어쨌거나 이거 조금 감동되는 걸? 나 하나 만을 위한 공연이라니, …..짝!짝!짝!짝!
혼자 치는 거니까 좀더 우렁차게 군바리 박수로 할까? 쫙!쫙!쫙!쫙!쫙!! 우쒸- 손 아프다.
내 열화와 같은 박수(?)에 깊게 허리를 숙여 감사 인사를 한 이화는 다시 천녀유혼 복장을 걸치고 나서 총총히 2층으로 달려 올라왔다. 그리고는 내 맞은편 자리에 다소곳이 앉는다.
“미흡한 재주라 부끄럽기만 합니다.”
“아, 그건 너무 겸손한 말이야. 내가 본 중 최고였어.”
굳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어 보이긴 했지만, 글쎄 뭐… 어설픈 중국 영화 속 여자 배우의 춤 연기보다 낫긴 했다.
“지난번의.. 그 작고 아름다운 아가씨는 틀림없이 저 같은 것보다 기예(技藝)도 뛰어나겠지요?”
미령이 얘기로군.
“아, 내 동생 말이야? 그 아이도 춤은 제법 귀엽게 추지.”
“누이..였습니까..?”
“후후.. 걔가 뭐 내 애인이라도 되는 줄 알았어?”
짐짓 태연하게 지껄였다. 미령아 미안하다, 하지만 이 판국에 친동생은 아니지만 그저 동생처럼 여길 뿐 아무 사이도 아니라던가 길게 설명하는 것도 좀 그렇지 않겠니?
…근데 가만? 미령이를 내 동생이라고 한다면, 내 성이 ‘진’씨니까 미령이는..?
에구,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개그맨 ‘전유성’님 죄송합니다. 오늘 어쩌다보니 부인의 함자를 감히 도용하는 결과가 됐습니다. 용서를…!
“대가, 이화가 한잔 술을 올리겠습니다.”
음- 좋지!
미령이가 동생이라니까, 조금 샐쭉했던 표정이 풀리는 것 같더니 이화는 연신 내게 술을 따랐다. 말은 한 잔 준다더니 두 잔, 세 잔…. 음, 매취로 담근 술인 것 같은데 꽤 맛있다.
“저.. 이화는 아직 진대가께서 어떤 분인지, 본단의 귀한 분이라면 천한 것이 공연히 못 오를 나무를 바라보는 것은 아닌지 불안합니다.”
내 정체..? 20세기 대한민국 특공대 예비역 하사로써 제대 전 M16, K2, K1, M201 등의 개인 화기는 대부분 거쳤으며 저격수 교육도 받은 바 있음.
입대 전에는 당구 200, 주량 소주 2병, 제대 후 대학교에 복학 예정이었으며 예비역이라고 캠퍼스 왕따 될까봐 약간 걱정하던…
흠, 이런 거 말해 봐야 알아들일 리가 없겠지?
그렇다고 최첨단 미래 로봇을 팔목에 장착하고 현재 이 비화곡의 짱 울트라변태살인마 ‘극악서생’행세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더더욱 없고…
“훗,훗- 내가 누구냐고 물으면 그저 웃지요~”
헛, 이건 또 무슨 대사?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말이긴 한데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하고.. 술 몇 잔 들어가니 말이 막 나오는군.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로 희롱하시며 숨기시겠다면 더 이상 묻지 않겠습니다.”
쳇-! 농담(?) 한 번 한 거에 삐지긴..! 할 수 없군. 음- 일단, 비밀 이야기 털어놓듯 귀를 가까이 하라고 한 다음.. 난 짐짓 목소리를 낮추어 심각하게 입을 열었다.
“실은, 난 최근에서야 이 비화곡에 들어온 사람이야. 음- 자네니까 이야기하는 거네만. 곡주께서 추진하는 중요한 일로 초청되어 왔으며 아직은 정식 비화곡 소속이 아니니. 어디서 이런 얘기하지 말고..”
“아, 그런..! 그렇다면 대가께서는 언제 이 곳을 떠날지 모르는 분… 이화는 역시 박복하군요. 비화곡에 들은 지 어언 5년, 이제야 마음을 줄 분을 만났다고 여겼더니..”
이런, 얘기가 그렇게 되나? 어이, 이봐! 그렇다고 그렇게 신파조의 대사를 하며 혼자 막 술을 퍼마실 것까지야…
“흠, 흠..! 거 자네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날 좋게 봐주니 고맙네만, 난 별로 내세울 인물도 아닌데 이렇게 마음을 써주니 조금 부담이…”
“흥! 천하의 명문을 일신에 지닌 분이며, 비화곡의 본단에 초청되실 정도의 재간을 지닌 분이 내세울 것이 없다면 한낱 작은 기루의 이화는 무얼 내세우란 말입니까.”
그 것도- 또, 얘기가 그렇게 되나?
“이제 보니 진대가께선 저 이화를 일신의 영달 때문에 대가께 허언을 일삼는 여인으로 보셨군요. 정말 섭섭합니다.”
“이런, 그럴 리가 있겠나?”
솔직히 그 말들으니까 조금 의심은 간다만, 그렇다고 표현할 수는 없지..?
“난 다만- 약간의 말재주로 살아가는 나에게 이화처럼 아름답고 재주 많은 이가 관심을 주니 당혹한 마음에.. 후, 정작 이럴 땐 어떻게 내 진심을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구려.”
대중가요 가사를 시라고 떠버릴 때도 이렇지는 않았는데 지금은 웬지 간지럽고 팔뚝에 뭔가 스르륵 솟는 느낌-!
너 이화… 웬만하면 이쯤에서 더 따지고 들지 마라. 자꾸 닭살 대사 강요(?)하면 섬씽이고 뭐고 ‘너, 내가 패권웅 왕정도 상대도 안되는 고수들 데리고 다니고 귀유옹 노인네도 쫄아서 튀고 그러니까, 진짜 정체까지는 몰라도 최소한 중앙의 상당한 권력자로 본거지? 그치? 그래서 지금 엉기는 거지?’ 이렇게 몰아붙여 버리고 가버릴 라니까!
“..진대가, 이화가 공연히 심술이 나 주흥을 깬 것 같습니다. 용서해 주시길.”
이화가 조금 씁쓸한 미소와 함께 그렇게 물러났다. 암-! 용서하구 말고. 험..! 다행..이군.
“…진대가, 실내가 갑갑하지 않으십니까? 제 방에서 내려다보는 소호(素湖)의 경치가 제법 볼만하답니다.”
딴 대사는 자동으로 걸러지고, ‘..제 방에서 내려다보는..’만 정확히 들려왔다. 이화는 내가 채 대답하기도 전에 지배인 격인 사내를 불러 자신의 처소에다 새로 주안상을 마련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역시 이화는 이 시대의 신세대 여성인가? 겨우 두 번째 만남인 오늘 바로 대사(?)를….?
여자 방~ 여자 방이다. 아직도 약간은 어색한 중국식 가구며 인테리어지만 현재의 내 처소에 비하면 확실하게 여성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실내이다. 특이한 점은, 이화의 취향을 나타내듯 한쪽 벽 가의 침상은 물론이고 가구들의 장식, 창가의 커튼도 모두 그녀의 백의 자락처럼 온통 희고 치렁하며 부드러워 보이는 천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분위기부터 무지 멜라꼬리(?) 했다. 분위기 있는 촛불 켜진 주안상.. 그거 차려놓은 곳은 침상 바로 옆.. 슬쩍 보니까 침상에는 비단 금침이 깔려 있고…. 게다가 이화는 창 밖 풍경 보러 오자고 해놓고 막상 내가 창문을 여니까 춥다고 금방 닫아 버린다. 으- 막상 이런 상황이 닥치니까 어째 머리 속이 복잡하고 심란해지는 걸?
“..진대가께 부탁이 한 가지 있습니다.”
“으, 응? 모, 몬데?”
“오늘 밤 만이라도 절 ‘소소매’라고 불러 주실 수 없을까요?”
“소소매…?”
별명..? 아니 그게 본명일까? 하여간 불러주는 거야 뭐 어렵겠냐만 ‘오늘 밤 만이라도’라는 말이 먼저 마음에 와 닿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