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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1부 – 72화


중원 역사상 최강의 조폭(마도) 연합이라는 ‘비화곡’의 짱이며 그 자신 울트라캡사악잔인무도변태살인악마… 하여간 대충 그 정도 인물의 대타 치고 있는 나와 그의 시녀 출신의 고작 열일곱 소녀…는 한동안 서로를 마주 보았다. 무지 어색하게…

“…저, 저어…”

드디어 대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긴 침구가.. 없어 곡주께서 지내시기는…”

“넌 매일 있는데, 뭐. ..안 될까? 응..?”

“그야.. 소녀는 괜찮.. 하지만, 곡주님 건강에 해로울까..싶어….”

“하루 야전에서 잔다고 문제면 죽어야지, 그게 사내겠니?”

“…………..”

“싫은 모양이구나. 하긴, 내가 있어봐야 너 불편하기만 할 테고…”

“아, 아닙니다. 그게 아닙니다.”

조금 억지를 부려도 웬지 오늘은 이대로 돌아가고 싶지가 않았다.

“소녀가 하겠습니다.”

난 대교에게 손을 저어 보이고, 내가 직접 하루 지낼 준비를 했다. 비상 식량과 옷가지가 있는 석실에서 대충 옷가지와 이불로 쓸 수 있을 것 같은 커다란 천 같은 것을 몇 차례에 걸쳐 가지고 나왔다.
일단, 바닥에 옷가지를 잘 펴서 몇 겹을 깔고, 그 위에 넓은 천을 두어 개 덮어 침상 비슷하게 꾸몄다.
내친김에 옷가지를 또 다른 천으로 두툼하게 싸고 말아 간이 베개도 두 개 만들었다. 아무렇게나 짱박혀 자는 것이 군바리의 기본이지만, 시간만 허락하면 어떻게든 주변 지형지물과 도구를 이용해 환경을 꾸밀 수도 있는 것이 대한민국 군바리다.

“니 자리 거기. 내 자리 여기다.”

중간에 금 거 놨으니까, 넘어오지 말라는.. 분위기 깰 거 같은 말은 생략했다.

“에, 오늘은 무공 수련 하루 쉬어. 소위 수련이라고 편히 잠도 못 잤을 텐데 오늘만이라도.. 조금이라도 편히 쉬도록 해.”

“곡주님….”

시간을 몽몽에게 물어보니 이곳 용어로 해시(亥時, 오후 9시 – 11시)라고 했다. 이곳 용어에 적응하기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시간 개념이고, 그래서 상당 기간 동안 본래 내 시대의 몇 시간 몇 분… 이런 용어를 써왔던 거지만.. 하여간 그건 나중에 따지고 오늘은 대충 ‘취침시간’이라는 것만 인식하자.
약 1-2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를 두고 나란히 누운 가운데, 나는 천천히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일단 말이야, 일정을 대충 얘기해 줄게. 오늘 내가 니가 먹을 마지막 영약 ‘공청석유’를 가져왔어. 그거 내일 먹고.. 그리고 그걸 니가 다 흡수하는.. 그렇게 예상되는 삼일 후, 넌 ‘한룡소’로 통하는 그 통로로 드디어 세상에 나가게 되는 거야. 알겠니..?”

“예..”

“그날, 거기서.. 먼저 니 동생들 소교, 소령, 미령이를 만나게 해 줄게. 기쁘지 않니..?”

“…예, 너무나 기쁩니다.”

쳇-! 당연한 걸 괜히 물어서 기분만 반감하게 했나?

“..그런 다음 넌 강호에 나가는 거야. 비화곡 역대 최강의 여고수 ‘마봉후’의 후인으로써….”

“……….”

“강호에서 비록 짧은 기간이겠지만, 실전 경험을 쌓고 그리고 돌아오면… 음- 그다음은 다시 이야기해 줄게, 내가 준비한 것이 있어. 대교가 장청란과의 비무전에 꼭 치러야 할 과정이…….”

“………..”

“달리 궁금한 점 없니..?”

“………..”

“…잠..들었니..?”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무심코 그렇게 물으며 고개를 돌려보았다. 대교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다가 당황한 듯 입을 열었다.

“죄, 죄송합니다. 확실히 기억하고 시행하겠습니다. 걱정..마십시오!”

난 낮게 한숨을 쉬며 오색, 아니 오만 가지 색채의 야명주로 영롱한 천장을 보며 또 혼자 중얼거렸다.

“아름..답다. 저런 ‘취침등’이라면 잠이 쉽게 올 리가 없지. 그때도.. 훈련 때 텐트도 치지 않고 산에서 잘 때.. 그 ‘은하수’도 그랬는데… 하늘을 가득 메운 별의 강…”

이쯤에서 ‘몽몽’이 함부로 다른 시대 용어 쓰지 말라고 경고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직은 말이 없다.

“대교, 넌 왜 다를까..? 넌 아직 어리고.. 내가.. 이런 마음을 먹으면.. 안 되는데.. 넌 왜 다를까…?”

“………”

“….난 지키고 싶은 사상, 신앙이 있어. 그건.. 어쩌면 지금 이 시대에 맞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렇지만 그게 내가 원하는 것이고, 가능한데.. 너만 안돼. 왜지..? 왜 너만 다르지…?”

“…….”

“듣고, 내일은 잊어버려. …나- 너 좋아한다.”

“….”

“..니가 웃는 것이 좋고, 니 목소리가 좋고, 니가 기뻐하는 일이 좋고, 니가.. 거기.. 있는 것이 좋아.”

“..고, 곡주님..?”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난다. 대교가 움직이는 소리라는 것을 알지만 나는 한 손을 들어 내 이마와 눈가를 가렸다.

“하지만.. 난 아직 지켜야 할 사상, 신앙이 있어.”

그렇게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개뿔이 무슨..!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리고 그리고 아프다. 얼굴을 가린 손 말고 다른 한 손이 대교에게 내밀어진 것은 언제였는지, 무슨 정신에서였는지 모르겠다.

“곡주님….!”

작고 보드라운 손이 그 손을 마주 잡아왔다. 지켜야 할 사상? 우리 시대의 도덕률? 그 웃기지도 않는 코리아 교의 신앙..? 전부 거짓말, 헛소리다. 대교의 손을 쥔 오른 손에 꾸욱 힘이 들어간다. 대교야! 니 이상형의 남자는 패도광협이겠지..?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하지만 난 안돼. 난 돌아가야 해. 내 시대, 내 세계로.. 부모님이 계시고 형과 동생이 있고 친구들이 숨쉬는 그 세계로… 난- 여기에 있을 수가 없어!

“…………..”

대교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하지만 내 손안에서 체온을 전하고 간혹 움찔대며 마주 움직이는 그녀를 느낀다. 어느 순간인가, 내 손에 다른 부드러운 것이 느껴졌다. 내 손안에는 대교의 작은 손이.. 또 그 위에는 그녀의 자그마한 볼과 따뜻한 숨결이 느껴진다. 거짓말처럼.. 답답한 가슴이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난 조금씩 편안해지는 숨결로 서서히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곳, 이 낯선 세계로 온 이후 술에 취하기 전에는 이루기 어려웠던.. 난 처음으로 서울의 집에서처럼 편안하게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일어나렴. 학교 안 가?

우… 오늘 오전 강의 없어요.

밥은 식구들끼리 먹어야지. 어서 일어나..!

으으-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지..?

..제기, 기분 상 집은 아니다. 어슴푸레한 빛.. 냉기가 느껴지는 공기.. 피부를 스치는 거친 천의 감촉.. 부대 내무반..? 난 또 꿈을 꾼 건가..? 훈련을 마치고 돌아와 자다가 어렸을 때 꾸던 환타지 세계나 무협지 세계에 떨어진 꿈을.. 그런 꿈을 다시 꾸었었나..?

눈을 뜨고 내무반 침상 위를 살피고 그러다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 불침번과 마주치는, 그런 기분을 느끼기 싫어서 나는 눈을 가리고 있는 손을 치우지 않았다.

제기-

하룻밤 꿈인 줄 알았으면, 대교처럼 사랑스러운 소녀와 좀 더 많은 시간을 가졌을 것을 아무리 꿈이라도 왜 그렇게 애매하게… 으아~ 억울해라.

음..? 뭐야.

난 내 오른 손의 색다른 감촉에 놀라며 고개를 돌려보았다. 옆에서 자던 남모 일병이 내 손을 부여잡고 쩝쩝 침을 흘리는 상황이었다면, 난 새벽에 내무반을 뒤엎어버렸을 것이다.

으후… 후..후, 흐흐흐-

지금 내 손을 쥐고 잠들어 있는 것은 남모 일병도, 인신매매범 출신이라는 서모 병장도 아닌 우리 이쁜 ‘대교’닷-!
군대 내무반 쪽이 착각이었다. 이렇든 저렇든 이 쪽이 현실이다. 입이 찢어져라 움뿌왓-! 핫핫!! 웃고 싶었지만, 소리내어 그래 봤자 나만 미친놈 될 것 같아서 그냥 조용히(?) 키득키득 웃었다.
간밤엔 대교 생각만으로도 미칠 것만 같았는데, 새벽인지 아침인지에 깨어난 지금 군대 내무반인 줄 알았다가 아니니까. 그 하나 만으로도 안도의 숨이 쉬어진다. 대교야. 니가 그만큼 비중이 작은 것이 아니라, 군대란 것이 그렇단다. 아무리 ‘악바리’니, 혹은 ‘체질’ 소리를 들으며 훈련도 잘 받고 그렇게 군대 생활 잘해도 괴롭고 싫은 건 싫은 거란다.
난 지금의 기분이 웬지 곤히 잠든 대교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안도의 기분을 좀 더 만끽하느라 그대로 한참을 더 누워 있었다.
잠시 후 슬며시 대교의 잠든 얼굴을 돌아보니 새삼 고맙고 사랑스럽다. 깨어날 때는 좀 썰렁했지만.. 이 아이와 함께 있다는 것으로 그만큼 내가 마음을 풀어놓고 잠들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지금까지 여기에 와서 아침에 군대 기분과 습관으로 깨어난 적이 많았지만 기분이 이렇지는 않았다. 짧은 휴가 나왔을 때 그랬듯이 그런 식으로 일어나도 그냥 군대 기분의 연장일 뿐이었다. 어랏-? 내무반인가? 그럼 일어나서 점호 준비해야겠네. 그런 정도..?
조금 전처럼, 다시 군대에 돌아왔다..? 그럼 나 미치지~ 뭐, 그런 정도의 기분은 아니었다. 대교가 심리적으로도 날 진정 ‘제대’ 시켜 준 모양이다.

또 얼마가 지났을까. 난 조심스럽게 대교의 손을 놓았다. 사륵-! 대교가 눈을 떴다. 너무나 반가웠지만 나는 고개를 숙여 대교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좀 더 자. 조금 있다가 보자.”

그렇게 말하고, 다시 살며시 눈을 감는 대교를 확인하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세상에- 이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사람 기분이란 것이 뭐 이래, 싶을 정도로 상쾌했다.
이 현실이 군대가 아니라서? 대교에게 그간 참아왔던 고백을 맨 정신(?)으로 해서? 하여간 이 시대 와서 최고의 아침이란 생각이 들었다.
너무 잘 자서 그런가..? 그래서 소위 스트레스가 자연스럽게 풀어진 건가…?
어쩐지 어제까지의 모든 고민이 신기할 정도로 가볍게 느껴지면서 나는 차분히 다시 이런 저런 생각을 했다.
..결론, 대교를 살리는 일에만 집중하자.
이 아이에 대한 마음은 그 것으로 대신하자.
언제인가 내가 사라지더라도 아니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살아만 있으면, 그럼 이 아이도 자신의 인생을 살 수 있을 테니까.
조금, 상당히.. 무지하게 아깝지만-

간밤에 비해 백 팔십도 달라진 내 태도에도 대교는 별다른 말과 반응 없이 평소처럼 행동하고 있다.
둘이 앉아 아침 먹고.. 음, 아침을 뺏어(?) 먹었으니 담에 식량을 더 많이 가지고 와야겠다.
보면 볼수록, 함께 있으면 있을수록 아깝다는…

나중을 생각하는 마음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당장은 본능(?)이 이겨서 나는 며칠 계속해서 성지의 대교를 찾았다.
얼마 후 결국 진품 공청석유까지 자신의 것으로 한 대교. 이제 잠시(?) 헤어질 때가 왔나..? 뭐- 좋게 생각하자. 그리고 오늘은 특별하니까, 기념을 해야겠다.

“음, 좋아. 여기 앉아 봐.”

내 말에 대교는 조신한 태도로 건너편 탁자에 앉는다.

“이제 내일이야. 내일 내가 동생들 데리고 한룡소로 나갈게. 후후- 기분이 어때? 드디어 세상에 나가게 된 기분….”

“그저, 꿈을 꾸는 기분입니다. 이곳에 들어올 때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그렇긴 하겠다. 죽을 각오를 하고 들어온 아이니, 그간 내가 병 주고 약주고 다 한 셈인가?

“그래, 그 동안 내가 병 주고 약주고 그랬으니.. 오늘은 술 준다.”

“예..?”

“대교, 아니 마봉후의 후인 마봉낭자께서 강호 출도 전 날인데 기념주 한 잔 정도는 해야지..?”

난 오늘 가져온 바구니에서 잔 두 개하고 술 한 병을 꺼냈다.

“아, 그건 혹시..?”

“후후- 이름은 없을지 몰라도, 이걸 더 원할 것 같아서.”

내가 잔에 채워 준 술을 내려다보며 대교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어, 이거 아냐? 소령이가 준비해 준 건데..?”

“마, 맞습니다. 흑..! 저희 자매끼리 가끔 마시던, 흑..!”

이런, 결국 울리고 말았나..?
난 이런 거, 여자 달래는데 약한데, 대교도 이제 ‘명령이다, 울지마.’할 군번도 아니고…
난처해진 내가 뒷머리를 긁적이고 있자, 대교가 잔을 들었다. 잔을 마주치고 한 잔 마시고, 뭐라 건배 축하 멘트를 하려는 내 앞에서 대교가 눈물을 닦고 살며시 웃는다.

“…그래, 넌 우는 모습보다는 웃는 얼굴이 더 예뻐.”

…이런- 하고 보니 ‘들장미 소녀 캔디’에 나오는 대사인가..? 동산 위의 왕자, 정체가 아주 몇 겹(?)인 그 친구가 여 주인공 캔디에게 했던 말.

“곡주님 앞에서 절대 눈물을 보이지 않겠다고 맹세했었는데.. 죄송합니다.”

“아, 뭐. 맹세까지야. 하지만 역시 우는 것보다는 웃고 사는 것이 좋지. 후후-“

우린 또 몇 잔인가를 건배하며 자축의 시간을 가졌다. 음, 동생들에게 듣던 대로 대교도 술이 꽤 센지 흐트러짐이 없군.
아, 정말 돌아가기 싫다. 오늘도 자고 가도 되냐고 할까..? 후우- 그럴 순 없지.
대교와 동생들 만나게 하려면 나도 요것만 마시고 돌아가서 몇 가지 더 준비를 해야 하니까.

“좋아, 이제 돌아가야겠다. 내일 한룡소에서 보자.”

그렇게 말하고 일어선 내가 몇 걸음인가를 떼었을 때, 나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오늘도 그냥 가시렵니까..?”

어, 야아~ 갑자기 뒤에서 끌어안으면, 그리고 그런 대사를… 이런 전개가 되면 안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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