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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1부 – 96화


시간이 갈수록 내 불안감은 점점 커져갔지만, 불안감과 배고픔은 별개다.
점심 무렵이 되어 마차 안에서 도시락을 까먹고 있는데 사영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무래도 이공자가 쉽게 아가씨를 포기할 것 같지 않은데, 계획대로 오늘 신수성녀를 만나려면 어떻게든 따돌릴 방도를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음… 우물, 우물~ 알아서 어떻게… 우물– 안돼요? 우물, 꿀꺽! 그 객점, 주먹밥 꽤 맛있네. 거기 물 좀 주고 사영도 드세요.”

“저기, 아가씨. 그렇게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닙니다. …우물, 우걱! 우걱!”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영도 꽤 맛나게 주먹밥을 먹고 있다. 사실 이명환이 꺼림칙해서 아침도 안 먹고 나온 참이었다.

“음… 냠냠! 거… 독수사갈이나… 쩝쩝, 다른 습격자들 기색은 없어요?”

“음, 음~! …없는 것 같습니다. 누가 우물, 꿀꺽! 고용했는지, 아니면 개인적인 원한인지 몰라도… 본래 ‘독수사갈 임융’은 몸 사리기로 유명한 작자죠. 음… 하나 남았는데 마저 드시렵니까?”

보면 볼수록 전직 살수, 공포의 암살자라고는 믿기지 않는 사영의 침 삼키는 모습을 가만히 노려보다 나는 주먹밥을 반으로 갈랐다.

“쩝쩝! 담에는 여유있게 사요. 흠! 기껏 살려 놨더니 우환이 되다니… 쩝! 어디 사람 많은 동네나 좀 찾아봐요. 꺼억! 좀 길을 돌아도 할 수 없으니까.”

“과연 아가씨, 묘수를 찾으신 겁니까?”

“묘수라고 할 건 없고 우리가 치기 애매하니까 딴 놈들 끌어들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래요. 뭐… 내 입으로 할 말은 아니지만 이쁜 여자는 항상 싸움의 원인이 되잖아요?”

“그것, 괜찮군요. 지금까지는 오히려 강호인들이 많이 들락거리는 객점은 피해 왔었지만…”

“출발하기로 하죠. 근데… 손은 씻었어요?”

“손은 왜요?”

사영은 손가락에 붙은 밥풀을 떼어먹느라 자기 손을 핥고 있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생긴 건 장국영인데 평소 하는 짓은 주성치 같으니 원…

“아무 것도 아니에요. 출발하기나 해요.”

그렇게 대충 결론을 내린 우리는 여전히 뒤에 따라붙고 있는 이명환과 류혼을 무시하며 길을 재촉하다가 두 시간쯤 후에 한 마을로 접어들었다. 사영이 일부러 길을 돌아서 찾은 곳답게 지금까지 지나온 중 가장 크고 번화한 곳이었는데… 흠, 입구부터 시끌벅적한 게 비화곡 안의 가경촌 분위기와 비슷한걸?

으잉?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지? 나는 얼핏 들려온 낯익은 노래 소리에 놀라 반사적으로 마차 창문을 열었다. 문제의 노래 소리는 길가의 꽤 큰 객점 안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뭐야, 이거. 저 노래가 왜 이런 데서 들려오는 거지?

“너와 나! 마도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 전투와 전투 속에! 맺어진 전우야아~!”

여러 명이 동시에 악쓰며 부르는 대한민국 군바리들 특유의 소리를 멍하니 듣고 있는 나에게 앞의 마부석에 앉아있던 사영이 돌아보며 말했다.

“비화곡 정예 무사들의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보아 저 객점에는 마도에 속한 이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 겨우 5일째인데 이곳까지 퍼져 있다니… 확실히 이번 비화곡주의 강호행이 강호를 진동시키긴 했나 봅니다.”

가짜 비화곡주 행렬에 참여할 인원들, 특히 비화곡주 직속 호위대인 혈랑대에게 군가를 가르친 건 바로 나다. 처음엔 그럴 생각 없었는데 요란하게 노래를 부르라고 시켜 보니 영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화려하고 듣기 좋지만 힘차고 씩씩한 느낌이 들지 않아서 에라 모르겠다 하고 군가 가사만 조금 바꿔 가르쳤는데, 그게 이런 결과를 낳다니!

“멋있는! 싸나이! 많고 많지만~! 바로 내가!”

객점 안에서 여전히 들려오는 군가… 게다가 객점 창문 너머로 보니 탁자마다 모여 앉은 자들이 한 손을 들었다가 힘차게 내리는 ‘반동’까지 열심히 하고 있다. 음… 상당히 민망하구만. 내가 가르친 원흉이긴 하지만, 그게 강호의 유행가가 되어 버릴 줄이야.

사영이 내가 마차 창을 여는 소리를 듣고 세웠던 마차를 다시 출발시키고 조금 더 가다 보니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마을의 꼬마들이 길에서 뛰어다니며 흥얼거리는 노래도 대부분 군가였다. 그 꼬마들을 붙들고 “그건 몹쓸 노래”라고 야단치는 어른도 있어… 비화곡주가 퍼트린 노래가 금지곡이란 말인가?

나는 잠시 생각하다 마부석으로 통하는 작은 창문을 열고 사영에게 말했다.

“적당한 객점이 안 보이면 아까 그 객점으로 가요. 그 인원들이 모두 같은 계열이면 류혼 정도의 고수도 쉽게 벗어날 수 없겠죠?”

잠시 후…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천천히 객점 안으로 들어왔다. 음… 막상 들어와 보니 바깥에서 보던 것보다 굉장히 큰 객점이었는데 안쪽으로 이어진 수많은 테이블이 꽉 들어차 있었고 그 사이를 점소이들이 부지런히 오가며 술과 음식을 나르고 있었다. 장사 참 잘되는 집인가 보다,라고 생각했더니만 입구 근처에서 서성이던 객점 주인 분위기의 중년 남자가 우리 쪽으로 다가오며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 아가씨 오늘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헤- 벌리고 선 주인장인지 지배인인지 모를 중년 남자. 현재의 날 가까이서 목격한 남자들의 반응은 대체로 이렇게 시작한다. 처음엔 짜증만 났던 이런 반응들에 조금씩 반가운 마음이 드는 내 자신이 두렵다. 언능 신수성녀를 만나 여장 같은 건 때려 쳐야겠다는 위기감이 든다.

“아, 저… 오, 오늘은 근동의 호걸들이 이 객점을 전세 냈으니, 외부 손님을 들일 수가 없습니다. 부디 아가씨께서 양해를 해주셨으면…”

“상관없어요. 잠시 차나 한 잔 마시고 갈 거니까.”

겨우 정신을 차린 그가 하는 말을 무시하고 나는 간단하게 대꾸하고 제일 가까우면서 유일하게 빈 탁자로 가서 앉아 버렸다.

“아, 저, 그, 그러시면 곤란…”

“괜찮으니까 가서 아가씨 드실 차나 내오게.”

이번엔 사영에게 씹힌 주인장이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물러섰고 사영은 그 사이 스윽 실내를 훑어본 것만으로 소위 ‘호걸’이라는 객점 안의 인물들을 파악했는지 낮은 음성으로 보고했다.

“지니고 있는 병기들의 특징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광혈파(狂血派)와 세석파(細石派) 인원들이 섞여 있는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사영의 설명에 의하면 본래 두 파는 같은 사마외도 계열이면서도 서로 싸우거나 화해하는 걸 반복하는 사이라고 한다. 어쨌든 오늘은 같이 노는 분위기라 마침 잘됐다 싶었다. 나는 사영에게 몇 마디 지시를 내리고는 조용히 차를 마시며 기다렸다.

내가 기다리는 두 가지 중 하나인 이명환과 류혼이 예상대로 들어와서 실내의 분위기(산적들 단체 회식과 유사한.)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내가 손짓하여 내 맞은편 자리를 가리키자 냉큼 와서 앉는다. 나는 이명환이 뭐라고 말을 걸든 그냥 가볍게 대꾸만 해주며 다음 차례를 기다렸다.

처음엔 조금씩… 이윽고 매우 빠른 속도로 객점 안에 울려 퍼지던 군가며 떠들어대는 소리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조금 더 지나자 이 큰 객점이 서울 시내 고급 레스토랑처럼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장난삼아 몽몽에게 카운트를 시켜놨었는데, 내가 안에 들어와 자리에 앉은 지 8분 35초 정도가 걸렸다. 진하연이라는 가공할 미모의 여자가 가만히 앉아서 차 한 잔 홀짝이고 있는 것만으로 실내의 분위기를 장악한 것을 말한다.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겠지만, 하여간 객점 안의 사내란 사내들은 모두 살짝 맛이 간 표정으로 내 쪽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사마외도의 인물들이어서 그런가? 다른 곳에서보다 더 노골적이고 음흉무쌍한 시선들이라 징그러운 느낌도 더 심했지만, 이번엔 특별한 목적이 있으니… 참자 참아.

“…진소저. 아무래도 이 곳은 소저께 어울리지 않는 장소인 것 같습니다. 차를 즐기시려면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기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실내의 요상한 분위기를 그제야 눈치 챈 이명환이 그렇게 제의했지만 나는 피식 웃으며 사영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사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는 객점 안의 사내들 모두에게 포권하여 인사하며 외치기 시작했다.

“여기 호걸들께 인사드리오. 나는 무송이라 하오. 실은 여기 계신 저희 아가씨께서 이 곳을 찾은 이유는 여러분들의 그 노래 소리에 이끌려서였소. 강호의 많은 노래를 들어보았지만 그토록 굳센 기상이 느껴지는 노래는 처음이라 하셨소이다.”

사영은 사내들의 반응을 잠깐 살피고는 미소지으며 말을 이었다.

“저희 아가씨께선 조금 전부터 노래가 들리지 않아 실망하셨다오. 그러니… 조금 더 여러분들의 그 노래를 들려 줄 수는 없겠소?”

잠시의 정적 끝에 한 우락부락하게 생긴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건 거, 비화곡주님의 행차 때 나온 노래인데, 이젠 어디 가서나 들을 수 있을 것이니 굳이 여기서… 억!”

퍼억~! 소리와 함께 옆에 앉아 있던 더 우락부락하게 생긴 남자가 술병으로 그 남자의 머리를 내리쳐 버리고는 어색한 표정으로… 그러나 소리만은 호탕하게 웃었다.

“왁하핫핫! 얘들아, 저런 미녀께서 우리의 노래가 듣기 좋으시단다. 뭣들 하느냐!”

폭풍당 당주 상관마를 연상케하는 용모의 저 인간이 두목쯤 되나 보다.

“노래, 하면 아무래도 우리 세석파의 호걸들이 더 낫지. 뭐하냐?”

그 건너편에 앉아있던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 사내가 라이벌 의식이 여실히 느껴지는 음성을 터트린 것을 시작으로 실내의 사내들이 일제히 반동 자세를 잡고는 고래고래 군가를 부르기 시작한다. 내가 유도한 상황이긴 해도… 참 잘들 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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