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극악서생 1부 – 97화


얼마간 여유로운 태도로 차를 마시며 수십 명의 사내들이 군가 부르는 걸 감상하는 척했지만, 기분은 영 아니었다. 솔직히 아까까진 그럭저럭 들어줄 만했었는데, 이번엔 여자에게 잘 보일 의도로 한껏 꾸민 음성을 내는지 군가에 중국 음악 특유의 앵~ 앵~하는 음감이 섞여 죽도 밥도 아닌 이상한 노래가 되어버린 것이다.

“껄껄껄! 어떻소. 사마외도의 하늘인 비화곡주께서 만든 노래를 마음에 들어 하다니, 소저가 누군지 몰라도 안목이 아주 높으시오.”

상관마 사촌 동생쯤으로 보이는 광혈파 두목에게 그 노래 출처는 대한민국 국방부이고, 여기서 퍼트린 건 나야, 라는 소리를 해봤자 고… 나는 다시 사영에게 몇 마디를 했고, 사영이 일어나 큰 소리로 내 말을 전달했다.

“여러분들이 수고하여 아가씨의 귀를 즐겁게 해주셨으니, 아가씨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약소하지만 금화 1냥을 선물하시겠답니다.”

사영의 말이 끝나자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돌아보는 사내들… 말이 좋아 1냥이지, 몽몽에게 들은 대로라면 금화 1냥은 우리 돈으로 대충 200만 원 정도이다. 술 취해 군가 부르는 거 듣고 그런 팁(?)을 주는 건 미친 짓일 것이고… 사실 진짜 줄 마음도 없다.

“이거-! 소저께서 우리 세석파를 뭘로 보고 그러시는지 모르겠소. 소저께서 즐거우셨다면 그뿐, 대가를 받는 것은 당치도 않소이다.”

암, 그렇게 나와야지.

“하핫! 광혈파도 마찬가지요. 뭐… 정히 보답을 해주시고 싶으시면 우리에게 술 한 잔만 대접해 주시면 좋겠소이다.”

암, 너도 그렇게 나와야지.

“노래를 한 것은 모두였으나 이 많은 인원에게 일일이 술을 따르라고 하는 것은 무리일 듯하니 양파를 대표하는 우리 두 사람만 받겠소이다. 허허~!”

쓴 입맛을 다시는 부하들을 무시한 채, 두 명의 두목은 모처럼 뜻이 맞았다는 듯 서로 흐뭇한 미소를 교환하고 있었다.

“이, 이런 방자한 것들 봤나, 감히 진소저께 그런 요구를……”

이명환이 노한 음성과 함께 눈꼬리를 치켜뜨자, 류혼은 어느 사이 검에 손을 가져가고 있었다. 음, 좋아. 아주 바람직한 진행이야.

“어서 나갑시다, 진소저. 상대할 필요 없소이다.”

음… 그건 안 되지. 아무래도 확실하게 터트리려면 좀 더 바람을 잡아야겠는걸?

“아니에요, 이공자. 저들의 요구가 그렇게 무리한 것도 아니잖아요. 저 많은 사람들이 날 위해 노래를 불러주었어요.”

내가 타이르듯 조용히 말하자, 이명환은 잔뜩 인상을 구긴 채 투덜대듯 말했다.

“그렇지만, 이런 자들이 어찌 고귀한 아가씨께 술을 따르라는… 나도 아직……”

짜식이, 역시 그래서 삐졌구나. 지도 아직 내가 따라주는 술을 못 받아봤는데 선수를 빼앗겼다는 생각이 들었나 본데… 조금만 기다려. 더 열 받게 해 줄 테니까.

나는 일부러 이명환을 자리에서 기다리라고 해놓고는 사영만을 데리고 두목들이 앉아있는 탁자로 향했다. 근데 으… 이건 무슨 짐승들이 우글대는 우리 속을 걸어가는 기분이 들 정도이니… 길거리에서 여자에게 노골적으로 음흉한 시선을 던지는 남자도 모두 성희롱으로 형사처벌해야 한다고 오버하던 어떤 자칭 여성 운동가의 말에 조금은 공감이 되는 시간이었다.

“허, 크흠-!”

그와 반대로 막상 내가 술병을 들자, 어울리지 않게 순진한 사춘기 소년들처럼 긴장한 태도로 공손히 술잔을 내미는 두목들… 흠, 날 너무 어려워만 하면 일의 진행에 차질이 생기겠다 싶어 나는 광혈파 두목에게 술 따라줄 때는 실수인 척 내 손등이 살짝 그의 손가락을 스치게 했다. 그리고 세석파 두목에게는 옆에 서 있는 사영의 몸으로 이명환과 류혼의 시선을 가린 지점에서 살포시 웃어주었다. 따지고 보면… 남자들도 불쌍하다. 이쁜 여자(?)의 이런 사소한 동작 몇 가지에 목숨을 거니 말이다.

“경국지색의 미녀께서 따라주시는 술이라 더욱 달구려. 하핫-! 술이란 자고로 주거니 받거니 해야 맛이 나는 법! 제 술 한잔 받으시오.”

“어머, 그건 곤란해요.”

나는 곤란하다는 투로 조금 크게 말하면서 이명환 쪽에서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는 여전히 두목들에게 다정한(?)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허허… 그러지 마시고 한 잔, 아니… 내 술까지만 받으시오.”

“대체 왜 이렇게 무례하세요?”

조금 화가 난 음성을 내면서 여전히 표정은 스마일… 이제 터질 때가 됐는데?

“이런 못된 놈들! 백주에 감히 누굴 희롱하는 거냐?”

의외로 무협지에 보면 지금 이명환이 한 것과 같은 투의 말이 많이 나온다. 말도 참 웃기는 것이, 그럼 백주가 아닌 오밤중엔 희롱해도 된단 말이냐?

암튼… 자기네 패거리가 떼거지로 모여있는 곳에서 단둘이서 큰소리를 쳐대는 이명환이 가소로웠는지 코웃음을 치던 두목들 중 세석파 두목은 문득 내 눈치를 살피며 이명환에게 외쳤다.

“우리가 언제 이 소저를 희롱했다는 거냐? 그리고 넌 누구이며 소저와는 무슨 관계 길래 나서는 것이냐!”

“나, 난… 그러니까, 난 진소저의…”

사람들 앞에서 별로 아는 체하고 싶지 않다는 아침의 내 말을 떠올렸는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이명환을 보며 두 명의 두목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보니 주제를 모르고 끼어 드는 웃기는 놈이로구나. 어디서 감히!”

광혈파 두목이 먼저 벌떡 일어서며 크게 외쳤고, 그 순간 나는 그 기세에 놀라 물러서다 넘어지는 척하며 일부러 아악! 하고 날카로운 비명을 울렸다.

“앗! 진소저!”

이명환의 놀란 외침과 함께 싸움의 징이 울렸다. 슬쩍 보니 다급하게 이쪽으로 달려오려던 이명환은 몇 명의 사내들이 막아서자 대뜸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보디가드 류혼은 사영도 인정할 정도로 강한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예상외로 이명환도 상당한 실력의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두 남자가 순식간에 무수한 동료들을 쓰러뜨리자 두목들이 광분하기 시작했다.

“뭣들 하는 거냐! 결코 살려 보내지 마라!”

그 넓은 객점을 가득 메우고 있던, 적어도 오십 명이 넘는 인원이 일제히 우오오~! 하는 괴성과 함께 이명환과 류혼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나는 처음 잠깐은 이명환을 응원하다가(우리가 빠져 나갈 틈이 있어야 하니까) 혼란의 틈을 타 사영과 함께 뒷문으로 슬며시 빠져 나와 마차를 탄 다음에는 속으로 열심히 광혈파와 세석파를 응원했다. 싸움이 오래오래 지속되길 바라며… 우린 열심히 튀었다. 가다가 말도 몇 마리 더 사서 기동력을 보충하며 쉬지도 않고 부지런히 몇 시간을 달리다 보니 결국 목적했던 장소에까지 도착하는데 성공했다.

“음왓핫! 이제 됐다. 이 지겨운 여장도 이제 끝이로구나!”

나는 마차에서 내려 말로만 듣던 양자강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가에 서서 며칠 동안 참았던 호탕한(?) 남자 웃음을 웃었다. 근데… 몽몽이 내 음성을 여전히 여자 음성으로 조정하고 있는 상태여서 웬지 무척 기괴한 웃음소리였던 것 같다.

“저… 아가씨, 아직은 아닙니다.”

음? …아참, 그런가? 확실하게 신수성녀를 만나야 끝이지?

“월영당의 보고대로라면 확실히 지금쯤 신수성녀의 배가 이곳을 지날 것이지만, 어쨌든 아직 배가 보이지 않으니 혹시 모를 류혼의 추적에 대비해 몸을 숨기고 기다려야겠습니다.”

“흠,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이명환은 몰라도 류혼은 아까 본 수준의 무리들로는 인해전술로도 어쩌기 어렵다는 것이 사영의 견해였기 때문에 나는 조금 불안한 마음으로 우리가 온 길에 잠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이럇!”

이럇…? 나는 뒤쪽에서 들려온 뜻밖의 소리에 놀라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이런, 사영이 마차를 몰아 절벽 끝으로 달리고 있었다. 내가 뭐랄 틈도 없이 마차는 말 몇 마리와 함께 절벽 아래로 곤두박질 쳐버리고… 그 전에 아슬아슬하게 뛰어내린 사영이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뭐, 뭐야. 지금 무슨 짓 한 거야?”

“흔적을 없앤 겁니다. 그리고… 잠깐 참아 주십시오.”

사영은 태연히 말하더니 대뜸 날 붙잡아 안아 들더니 어어- 소리를 내는 나를 든 채 그대로 날아올라 근처 나무의 두터운 가지 위에 올라섰다.

“이… 이봐. 뭘 할 거면, 미리 말을 하고 해야 할 거 아냐.”

“아, 죄송합니다. 최대한 빨리 처리하려는 마음에 그만… 이대로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흔적을 마저 없애고 오겠습니다.”

다시 땅으로 내려간 사영… 그가 일하는 거 보니 요사이 가끔, 아니 자주 내게 망가진 모습을 보여서 그렇지 진짜 프로구나 싶었다. 자신은 작은 돌맹이 같은 것만을 골라 밟아 가며 마차가 격렬하게 달려간 흔적을 제외한 내 발자국 같은 흔적을 꼼꼼하게 찾아 없애는 모양인데, 그것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끝났습니다. 그리고 얼마간은 더 불편을 참아 주셔야겠습니다.”

말을 마친 사영은 그때부터 거의 30분 정도를 날 업은 채 마치 타잔처럼 나무 가지에서 나무 가지로 날아가는 방식으로 이동했다. 처음엔 다 큰놈이 남에게 업혀간다는 것이 무지 쑥스러웠지만 한편으론 갈수록 사영이 매우 듬직한 어른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나와 나이 차이도 많은 사람인데 그동안 내가 너무 무례했던 건 아닌가 반성도 해 보았다.

땅으로 내려온 이후 사영은 어디선가 말을 한 마리 구해와 날 뒤에 태우고 또 달렸다. 난 말을 한 번도 타본 일이 없어서 비화곡 사람들 앞에서 말 탈 일이 있으면 어쩌나 걱정한 적도 있었는데, 다행히 원판 녀석도 어렸을 때 화끈하게(?) 말에서 한 번 떨어지고는 그 이후 절대 직접 말을 타지 않았다고 한다.

다시 20분 정도 후, 우린 강가의 작은 나루터 객점에 도착했다. 외진 장소인지 사람도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그 나루터… 실은 이곳이 우리와 월영당 요원들의 접선 장소이다. 내가 이동하는 중에 월영당과 연락이 취해지는 것도 위험 요소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직접 기존의 월영당 지부들을 방문하기로 했던 것이다.

우린 나루터의 배를 타려고 대기하는 사람들 행세를 하며 객점으로 들어갔고, 사영이 객점 주인인 월영당 임시 지부장과 접촉하는 동안 나는 방에서 기다리며 창문 밖으로 보이는 양자강을 감상했다. 현재 위치에서는 듣던 것만큼 얼마나 큰 강인지 실감이 안 났지만, 일단 경치는 참 좋았다. 얼마 후 사영이 돌아오는 기척을 느낀 나는 느긋하게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가씨, 문제가 생겼습니다.”

“응? 무슨… 문제?”

“신수성녀의 배 말입니다. 반나절 전에 이미 이 앞을 지나갔다고 합니다.”

뭐시라고라고라-!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