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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1부 – 102화


아, 한 번은 있었다고 해야하나? 처음 도주 과정에서 죽였다는 자들에 대해서는 달리 기록되어 있는 자료도 있었는데, 조금 나중… 그러니까 일단 모용세가로부터 도주에 성공한 다음 다시 돌아와서 그들을 도륙했다는 것이다.

그들을 따로 한 그룹으로 구분하는 이유는 그들 모두가 비록 비 공인이지만 어쨌든 꽤 알려진 단체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그 비 공인 단체는 다름 아닌 백봉회(白鳳會), 당시의 천하제일미 백봉황(白鳳凰) 모용란의 팬클럽이었다. 다른 이들도 아니고 자신의 추종자였던 이들을 애써 돌아와서 몰살시켰다는 것도 납득하기 힘든 얘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또 그녀의 행적을 보면… 응?

“…아가씨, 쉬시는데 죄송하지만 잠깐 나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불연 듯 말을 걸어 온 건 사영이었다. 그 사이 또 무슨 일이 일어났나 싶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서는 나에게 사영이 간단히 설명을 덧붙였다.

“음혼귀모와 모용란이 추적자들의 배를 따돌리는데 성공하자 이 배를 떠나려고 하는 모양입니다.”

“근데, 나는 왜요?”

“음혼귀모는 이 배에 오르자마자 선원들에게 모두 독을 쓴 모양인데, 아가씨를 보기 전에는 해독제를 내놓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습니다.”

으으… 순간적으로 그 재수 없는 여자에게 나 남자라고 밝힐까 하는 충동이 일었지만 그럴 수도 없거니와, 다시 생각해 보니 음혼귀모는 남녀를 안 가린다고 했었다. 제기랄! 나는 매우 짜증스러운 기분과 함께 선실 바깥으로 나왔는데 과연 배 뒤쪽에 끈질기게 보이던 작은 배들은 이미 모습을 감춘 상태였고, 이 배는 강기슭으로부터 3, 40미터 정도 되는 위치에 정박해 있는 상태였다.

나는 우선 선실 가까이 서 있던 선원 한 명을 불러다가 그를 진맥… 하는 척하며 몽몽에게 신체 스캔을 시켜 봤는데, 칠절지독에 비하면 대단치 않은 독에 중독된 거긴 했다. 그러나… 중독된 선원들 수가 너무 많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명환 때 방식으로 일일이 치료하려고 들면 그 사이 적어도 몇 명은 골로 갈 것 같았고 나도 빈혈로 맛이 갈 위험이 있었다. 제대로 된 항구에 정박한 것이 아니라 인적도 없는 곳에서 임시 멈춘 거라 따로 약재를 구할 곳도 없겠고… 제기, 결국 저 음혼귀모의 해약을 쓸 수밖에 없나?

음혼귀모는 모용란은 선원들을 동원해 비상용 소형 배 한 척을 강물에 내릴 준비를 하고 있다가 날 발견하자마자 반색을 하고 다가왔지만 사영이 스릉~! 검을 뽑았다. 음혼귀모는 사영의 기세에 눌려 세 발짝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춰 서서 표독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난 댁의 아가씨에게 볼일이 있지, 당신이 아니에요.”

“아가씨께서 나오셨으니 더 이상 허튼 수작 말고 해독제를 내놔라. 아가씨께서 살생을 삼가라고 하시지만 않았어도 넌 벌써 죽었다.”

사영의 말에 음혼귀모의 눈 꼬리가 대뜸 올라가 붙으며 불쾌감을 드러냈으나 그녀는 애써 감정을 자제하는 기색이더니 품 안에서 작은 호리병 같은 것을 꺼내 들었다.

“동생, 이리 가까이 와요. 내가 약의 복용 법을 자세히 설명해 줄 테니.”

동생…? 댁은 그러는 거 별로 안 반가운데?

“약은 내게 주고 복용 법은 거기 서서 말해라.”

“흥! 난 더 이상 당신처럼 재수 없는 사람과 말하고 싶지 않아요. 동생… 이리 와요. 난 동생에게만 해약을 내 줄 거예요.”

왠 어거지? 흠… 아무래도 이 할머니, 뭔 꿍꿍이가 있나 보다 싶어 사영을 돌아보았더니 그는 간만에 특유의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띄우고 있었다. 그의 지금 표정이 소위 ‘위험한 미소’라는 것을 감 잡았는지 음혼귀모도 흠칫 긴장하는 눈치였다.

“아가씨, 제게 살인을 허락하신다면 저 여자에게 가까이 가셔도 좋습니다.”

“아… 알겠어요. 이번만은 예외로 하죠.”

사영에게 고개를 끄덕인 내가 음혼귀모에게 다가섰고 음혼귀모는 조금 씁쓸한 표정으로 내게 약병을 내밀었다.

“재빨리 납치하려고 했더니 안 되겠네? 동생 호위가 생각보다 너무 무서워.”

짐짓 고백(?)하며 엄살을 떨지만 표정에 어쩐지 여유가 있어 보인다 했더니, 허공에 마우스 화살표가 떠서 스윽 이동하더니 그녀가 내민 약병을 클릭하며 그 옆에 붉은 문자 메시지가 뜬다.

[ 약병 표면에 피부 점막 침투 가능한 유독 물질 발견. 독물 명칭, 춘설침단장(春雪浸斷腸). ]

뭐, 알기 쉬운 이름이군. 피부에 닿기만 해도 ‘봄눈 녹듯이 스며들어 내장을 아작 내는 독’이라 이거지? 하긴… 말처럼 단순 무식한 납치만을 생각했을 여자가 아닐 거라는 예상은 하고 있었다.

“이것을 어떤 식으로 먹이면 되나요?”

내가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표정을 꾸민 채 약병을 받아들고 묻자 음혼귀모는 만면의 미소와 함께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

“일인당 한 개씩. 물과 함께 먹으면 더 좋고.”

“…그걸 지금 투,약,법이라고 가르쳐 주는 거예요?”

“호홋홋! 동생하고 조금이라도 얘기하고 싶어서 핑계를 댔던 거야. 하지만 앞으로는 정말 재미있는 얘기 많이 해줄게.”

“앞으로 누가 같이 있는데요?”

“음… 그건 곧 알게 될 거야. 동생은 나와 함께 갈 수밖에 없을 걸?”

넌 이미 걸렸어…라는 표정으로 여유 있게 돌아서는 음혼귀모를 보며 나는 속으로 노래를 불렀다. 좀 된 노래지만, 신형원의 ‘개똥벌레’를 개사한 노래를……

나는- 만독불침~ 아무리 중독시켜도~ 어쩔~ 수 없네~.

“아가씨, 해약은 틀림없을까요?”

“일단 해약은 맞아요. 하지만 투약하는 양과 물과 함께 마시라는 말 같은 건 거짓말이에요.”

몽몽에 의한 분석이 이미 끝났기 때문에 나는 사영에게 작은 소리로 대답해 주고는 여유 있는 태도로 모용란과 음혼귀모가 배에서 내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먼저 모용란이 갑판으로부터 3, 4미터 정도 아래 강물 위에 방금 띄워 놓은 작은 배에 가볍게 착지했는데, 그 작은 조각배가 거의 흔들림이 없었다. 음혼귀모는 바로 뛰어내리지 않고 뜸을 들이더니 갑판 가장자리에 서서 내 쪽을 돌아보며 재수 없게 씨익- 쪼갰다.

“동생, 어디 불편한데 없어? 가령 가슴이 답답하며 배속이 바늘로 찌르는 듯 아파온다던지……”

“누가 당신 동생이래요, 할머니?”

음혼귀모가 뜻하지 않은 나의 반격에 새우깡 먹다 이빨 부러진 사람 표정이 된 사이 나는 사영에게 짤막하게 명령했다.

“쳐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영은 내 귀에 쉬익! 하는 소리가 들릴 만큼 빠르게 음혼귀모를 향해 달려나갔다. 음혼귀모의 입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비져 나왔다.

“자, 잠깐.”

이미 뽑혀 있던 사영의 검은 가차없이 허공을 가르며 짧은 검광을 뿌렸고, 강물 쪽으로 몸을 날려 그 검을 간신히 피한 음혼귀모는 어색한 자세로 모용란의 옆으로 내려서고 있었다.

“무대가께선 저 여자 다시 올라오지 못하게 하고, 선원들은 빨리 닻 올리고 출발해요.”

선원들이 쭈뼛거리면서도 내 말에 따르고 있는데 강물 쪽에서 음혼귀모의 애처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동새~앵~! 내 말 좀 들어 봐! 동생은 무서운 독에 중독됐어-! 내가 치료해 주지 않으면 죽고 말 거야~!”

나는 배의 선장을 불러 그에게 해약을 꺼내주고 나서, 갑판에 모여 웅성거리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여러 군웅들께서는, 수고스럽겠지만 제 부탁을 들어 주시겠습니까?”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아가씨와 무대협 덕분에 목숨을 건졌는데, 무슨 일은 못하겠소이까.”

한 명이 먼저 나서자 다들 서로 새치기라도 할 것처럼 다투어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그럼,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대신 음혼귀모에게 외쳐 주시겠어요? 먼저, 선원들의 독을 해독할 약은 고맙게 두 개씩 쓰겠다고 해주세요.”

음혼귀모가 살기 등등한 사영 때문에 돌아오지는 못하고 목청 높여 ‘동생’을 찾고 있는 갑판가로 몰려간 사람들은 음혼귀모를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 요녀야, 아가씨께서는 해약을 두 개씩 써서 선원들을 구해주시겠단다-!”

여러 사람들이 각자 중구난방으로 소리치긴 했으나 내 말의 뜻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대체로 의미는 위와 비슷했다. 나는 사람들이 조금 진정했을 때 다시 말했다.

“…약병에 당신이 묻혀 놓은 춘설침단장은 안됐지만, 나도 해약이 있어요. 음혼귀모… 할머니!”

“춘설침단장의 해약은 아가씨도 있단다, 이 추잡한 할망구야~! 으하핫-!”

“천하의 못된 할망구가 총명한 아가씨를 속이려다 헛물을 켜고 말았구나!”

내가 소개할 수 있는 건 위의 두 가지 정도? 짧은 시간 동안 쌓인 게 많았는지 사람들은 저마다 온갖 걸 쭉하고 원색적인 문장으로 신나게 목청 높여 음혼귀모를 놀리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사영이 나섰다.

“이 말도 전해 주시오. 내가 그 배에 구멍을 뚫어 놓았다.”

그의 말에 잠시 멍해 있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나도 조금 놀라 다시 그녀들이 타고 있는 배를 보니, 모용란은 열심히 강가 쪽으로 노를 젓고 있었고 음혼귀모는 더 열심히 배 안에 차오르는 물을 손으로 푸고 있었다.

음왓핫핫!

누군가가 먼저 크게 웃음을 터트리자 배 안은 온통 통쾌해하는 웃음소리로 넘치기 시작했다. 역시 만만치 않은… 아니 한술 더 뜨는 사영이다. 언제 거기까지 손을 써놓았담?

다시 출발한 배가 본래의 진로로 향하는 동안 나는 줄곧 선실 안에 누워서 시간을 보냈다. 어찌어찌 배 안의 사람들을 비인사기로부터 지켜 준 상황이어서, 섣불리 저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섰다가는 인사말 주고받는 정도만 해도 엄청 피곤할 것 같았기 때문에 난 계속 쉬어야 한다고 하고 손님 접대(?)는 사영에게 떠맡겨 놓은 것이다. 음… 그렇다고 나도 혼자 빈둥빈둥 논 건 아니었다.

[ … 말씀하신 대로 실시간 망막 스크린 메뉴를 추가했습니다. 메뉴명은 TURBO 입니다. ]

몽몽의 말대로 허공 상단에 떠 있는 메뉴 바에 붉은 색의 터보 아이콘이 생성되어 있었다.

시청각 하이퍼 터보 모드…라고 하고 싶었지만 메뉴 치곤 너무 긴 것 같아서 그냥 터보라고만 하기로 했다. 메뉴명이 문제가 아니라 그 기능을 과연 유용하게 쓸 수 있느냐가 중요한데… 그게 좀 걱정이긴 했다. 예를 들어… 대교가 장청란과 비무하는 것을 내가 터보 모드로 관찰했다고 치자. 잠깐 타임 걸고 “대교야, 기뻐해라 장청란의 약점을 발견했다. 그건… 어헉-!” 픽~!(졸도)… 이러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말이다.

“몽몽… 터보모드의 부작용을 최소, 그러니까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몸을 가눌 수 있을 정도를 기준으로 하면 하루 사용시간이 어느 정도까지 가능할까?”

[ 호르몬 분비 촉진에 의한 인체 기능 향상에 대한 상세한 임상 실험 데이터가 없어 정확한 결과를 도출하기는 어렵습니다. 일일 5-6분 정도를 실험적으로 반복하는 방법을 권고합니다. ]

하루 5-6분이라… 내가 무슨 독수리 오형제가 변신한 ‘불새’냐? 시간 재어가며 기능을 쓰게? 에구… 그 정도를 어디 써먹을 데가 있으려는지 모르겠다.

“몽몽… 또 뭐 없냐?”

[ 질문의 요지가 명확하지 못합니다. ]

“…아냐, 됐다.”

이번의 터보 모드를 알게 되면서 새삼 느낀 거지만, 몽몽에게는 내가 아직도 알지 못하는 수많은 기능들이 있을 것이다. 좀 전엔 무심코 물었지만, 녀석에게 쓸만한 기능 뭐 없냐고 막연하게 물어봐 봤자 내 입만 아플 것이다. 그냥 기능 다 열거해봐, 그러면 언제인가처럼 한두 달 매뉴얼만 읽어야 할 분량을 늘어놓을 것이고, 검색 기능을 쓰려고 해도 일단 주제어가 있어야 하는데 당장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좀처럼 쓸만한 생각이 떠오르지가 않아 문제이다. 시청각 터보 모드처럼 신체 운동 능력을 순간적으로 높이는 걸 한 번 시도해볼까? …하지만 현재의 이 몸으로 그딴 걸 했다가는 조금 하다가 세상 하직하겠지? 음… 그렇다면… 좀 반칙 같긴 해도 이런 건 어떨까?

“몽몽, 혹시 말야. 내 지능 지수를 확 높이는 방법 같은 것도 있을까?”

[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관련된 몇 가지를 조건을 검사한 후 보고하겠습니다. ]

응…? 그런 것도 되는 거야? 야 이거 갈등 생기는 걸? 지능이 높아진다는 건 분명히 신나는 일일 수도 있지만 내 자신의 노력이 아닌 기계에 의한 향상은 자존심 문제도 있고… 된다고 하면 할까, 말까?

[ …주인님 현 거주 신체의 두뇌는 인공적인 향상 허용치를 이미 넘어선 상태입니다. 이미 활동 가능하게 개발된 두뇌 세포의 활용 여부는 저의 기능 바깥의 영역입니다. ]

…뭐? 두뇌 세포의 활용 여부…? …어?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을 안 해봤다. 현재의 이 몸, 두뇌도 당연히 내 것이 아니다. 기억이라던가 생각하는 거라던가, 모두 뇌가 하는 것일 텐데… 근데 왜 난 원판이 아니고 내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내 식대로 생각하면서 살아 있을 수 있는 거지? 인간이란 영혼이 진짜이며 전부이고 육체는 단지 껍데기라는 종교적인 말이 맞는다는 건가? 어… 그 것도 뭔가 이상해. 그럼 머리, 정확히 말해 두뇌에 충격을 받고 기억 상실증에 걸리는 경우는 뭐지? 그건 인간의 기억이 두뇌에 저장되기 때문이 아닌가…? 으으으- 골치 아프다. 나 오늘 괜한 거 물어봤나 봐.

[ 인간의 육체와 영혼 각각의 인격 구성 위치와 상관 관계에 대해서는 저희 시대에서도 명확히 밝혀내지 못한 분야입니다. ‘육체는 하드웨어, 영혼은 소프트웨어’. 저의 데이터에 주인님 시대의 개념을 도입한 관념적인 표현의 예입니다. ]

…육체는 하드웨어, 영혼은 소프트웨어…? 그 것도 표현의 한 예라니까 확실한 개념은 아니겠지만 한 가지는 알 것도 같다. 현재 원판의 육체가 두뇌만큼은 펜티엄 III 아니, 대형 서버급 컴퓨터라면 내 영혼, 즉 운영 체계는 유닉스나 NT는 커녕 DOS 수준이라 고성능 하드웨어의 활용이 안 된다는 건가? 컴퓨터 메모리 만땅, 기억 용량 짱, 처리 속도 환상… 그래봐야 DOS에서는 멀티도 안 되고 기본적으로 윈도우 용 프로그램은 하나도 못 돌리고… 그런… 얘긴가? 으… 이거 존심 상하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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