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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1부 – 103화


결국 나는 이제껏 최신형 노트북으로 갤러그 수준의 오락만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잠시 도스 급인 나 자신에 대한 비애에 사로잡혀 한숨을 내쉬었었다.

음… 하지만 이건 그리 불쾌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긴 했다. 사실 원판 녀석이 비정상적으로 머리가 좋은 거지 난 정상인이 아닌가. 현재의 지능으로 이제껏 잘 먹고 잘 살아 온 나이며 어디 가서 머리 나쁘단 소리는 안 들어봤다. 어차피 제 아무리 몽몽이라도 내 영혼을 업그레이드 할 수는 없을 것이고… 그래, 쓸데없는 욕심 부리지 말고 있는 거 잘 쓸 생각이나 하자.

“몽몽, 하드웨어의 성능 즉 지능은 그렇다 치고 말야. 이 두뇌에 저장된 ‘기억’을 읽어낼 방법은 없을까?”

[ 영혼과 육체의 융합 구성에 관한 연구는 2466년 발효된 ‘인성보호법’에 의해 금지되었기 때문에 육체의 기억을 영혼이 공유하는 체계에 대한 데이터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

원판이 그 동안 살아오며 쌓은 경험이나 알고 있는 지식을 참고하는 것도 내게 상당한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원판의 육체와 난 아직도 그리 친해지지 않은 상태인 건가? 생존을 위해 공존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음, 그럼 니가 직접 읽는 것은 어때? 그건 가능하지 않아?”

[ 가능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두뇌에 대한 직접적인 관여는 역시 인성보호법에 규정된 항목 중 36가지에 해당되어 시행이 불가능합니다. ]

“너, 아까 지능을 발달시키는 것도 가능한 것처럼 말하지 않았냐? 그건 두뇌에 관여하는 거 아냐?”

[ 규정된 허용치까지의 두뇌 발달 유도는 허가 되어 있습니다. 저와 같은 개인 사용자용 로봇이 인간의 두뇌에 관여할 수 있는 최종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거, 생각보다 까다롭구만. 인성보호법이라… 인간의 두뇌에 관한 건 내 사용자 권한 등급 어쩌고 따지기 이전에 근본적으로 막아 놓은 모양이다. 그럼 결국 이 일만큼은 순전히 내가 알아서 할 수밖에 없다는 건데… 육체의 지능과 기억… 지금까지는 왜 생각조차 안 해봤는지 모르겠다. 가만있자, 그러고 보면 적어도 기억력 하나만큼은 예전보다 상당히 좋아진 것도 같다. 잠깐 본 사람 얼굴이라던가 대충 훑어 본 책의 내용을 떠올려봐도 꽤 정확하게 떠오르는 것이다.

좀 시간이 지난 기억 중에서 비화곡 총관과 그의 마누라 월영당 주의 싸움… 어… 의식적으로 떠올리니까 그때 두 사람이 어떤 동작을 했는지 세세하게 기억이 나네? 흠, 좋아 그럼 비화곡에서 내가 머무는 창천각의 현관 계단 수는? 에… 계단을 보며 걸었던 때… 내가 밟은 계단이… 오, 생각난다. 12계단이다. 오호~ 별개다 생각이 나네? 나는 조금 흥분했다고 할 정도의 기분으로 저녁 내내 여러 가지를 떠올려 보고 따져보고 테스트해 보았다. 1차 실험(?)의 결과는 대충 다음과 같았다.

첫째, 기억력의 비약적인 상승은 확실함. 단, 원판의 예전 기억은 완전 포맷되기라도 한 듯 전혀 알 수가 없으며 원판의 육체에 들어오기 전까지의 내 본래의 기억도 원판의 육체와 함께 하기 시작한 후의 기억에 비하면 불완전한 부분이 많은 듯함.

둘째, 지능의 발달은 불확실함. 몇 가지 문제를 놓고 해답을 유추해 보거나 기타 기억하고 있는 학문적인 데이터의 분석을 시도해 본 결과, 예전과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함.

결국 단순한 입력과 저장은 협조가 되지만, 구체적인 작업은 어느 한쪽 즉 내 영혼이 우선 순위로 운영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본래 생각하던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해 원판의 두뇌가 거기에 맞추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나 자신이 무의식중에 원판의 두뇌가 계산하는 것에 따라가는 걸 거부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생각의 방식이 바뀐다는 건 나라는 인격 자체가 변한다는 의미이기도 할 테니까 말이다. 으… 역시 오늘의 주제는 너무 어렵다. 시간도 늦은 것 같은데, 자자… 낼 생각하자… 그래, 이러는 게 나답지.

다음 날 아침, 나는 매우 찌뿌둥한 기분으로 잠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밤새 악몽 아닌 악몽을 꾸며 뒤숭숭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악몽이란 게 웃기지도 않은 것이, 원판의 육체와 내 영혼이 서로 멱살 잡고 대판 싸우며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임마!”라고 우기는… 그런 꿈이었다. 참 내.

잠에서 깨어나서 이제 상당히 익숙해진 화장 손보기와 머리 빗기 등을 하고 있는 사이 배는 다음 포구에 도착했고 우리 일행은 바로 배에서 내렸다. 나는 일단 아무 객점이나 찾아 들어가 방안에 짱 박혀 모용란에게 들은 대로 바람에 날리지 않는 면포를 만들기 시작했고, 그동안 사영은 전 포구에서 구하지 못했던 배를 찾으러 나갔다. 사영은 지난번보다 훨씬 짧은 시간에 돌아오면서도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번에 구해 준 배의 선장에게 소개를 받았다더니 금방 적당한 배를 구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잠시 후 사영의 안내를 받아 포구에 늘어선 크고 작은 배들 중의 한 척에 오를 수가 있었다. 여기까지 타고 온 배의 삼분의 일 정도 크기의 배였다.

“본래 관에서 쓰던 군용선(軍用船)이었던 것을 개조한 것이라 합니다. 선장은 이 배가 과거 장강수로(長江水路) 28채의 토벌 때도 쓰였다고 자랑하더군요.”

난 배에 대해 잘 모르지만 어쩐지 주변의 다른 자잘한 배들과 느낌이 좀 틀리다 싶었다. 장강수로 28채… 사마외도 중에서 유일하게 관과 대치하기도 하는, 간단히 말해 해적(海賊)의 무리들이다. 해전(海戰)에 능숙한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 건조되었던 거라면 아무래도 속도 면에서 일반 고기잡이배나 여객선보다는 낫겠지?

“수고하셨어요. 그리고 선장에게는 목적지까지 빨리 도착할수록 돈을 더 주겠다고 하세요.”

“그러겠습니다. …헌데, 아가씨. 혹시 오늘 이 포구에서 ‘그것’을 보셨는지요.”

“그건… ‘밤에 뜨는 그림자의 손짓’말인가요?”

“역시 발견하셨군요.”

“음… 의미는 ‘특수 상황 발생에 따른 임시 집결’이었죠?”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우리의 행보와 관련된 것 같은데 제가 한 번 가보는 것이 어떨까요?”

안 그래도, 좀 아까 배에서 내려 객점을 찾는 동안 예의, ‘밤에 뜨는 그림자의 손짓’을 발견했을 때부터 나 역시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 그들과 접촉하는 건 위험성이 크지만 하는 수 없지요. 다행히 집결 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 다녀오도록 해요. 그리고 그들에게 내 지시를 전해 주세요.”

얼마 후, 사영은 월영당 비밀 요원들인 야영들을 만나기 위해 배를 떠났고 나는 새로 타게 된 배의 선실로 들어가 그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선실은 한 5-6평 정도 되려나? 별로 크진 않았지만 지낼 만 할 것 같았고 배에는 선장과 두 명밖에 안 되는 민간인 선원들뿐이니 혹시라도 날 알아볼 사람을 만날 걱정이 없어 일단 마음이 편했다. 나는 선실 창을 통해 배의 선장과 선원들이 며칠 동안의 항해 준비를 하느라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며 아까 본 ‘밤에 뜨는 그림자의 손짓’을 생각했다. 간단히 말해 그건 월영당 요원들이 서로 소식을 전하기 위한 ‘암호’를 의미한다.

암호라는 것 자체의 정식 명칭은 춘전(春典) 또는 녹림흑화(綠林黑話). 강호의 문파들 대부분이 다른 파에 자기 문파의 행적이 알려지는 것을 꺼리기 마련이라 그런지 무림의 각 파는 고유의 춘전을 가지고 자기들끼리 비밀스럽게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다. 물론 녹림흑화라는 명칭에서 드러나듯 일반적으로 범죄와 관련이 많은 사마외도에서 더 많이 쓰이기 마련이고 당연히~ 비화곡이 강호에서 사용하는 춘전의 내용은 책으로써도 한 권으로는 모자란다. 그 중에서 월영당이 사용하는 춘전을 비화곡 사람들끼리는 ‘밤에 뜨는 그림자의 손짓’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번에 나와 사영이 발견한 월영당의 춘전은 노부(路符)라는 것이었는데 길에서 지나던 동료들이 발견하고 뜻을 해독하게끔 어떤 표식을 남기는 방식의 춘전이었고 기본적인 뜻은 아까 사영에게 말했듯 ‘일 터졌으니, 다 모이’였다. 한 지역에 국한된 신호가 아니라 월영당 전체 비상이었고… 현재 그럴 정도의 일은 당연히 그들의 하나님, 비화곡주에 관한 일일 것이다.

음… 생각하다 보니 나 하루밤 사이, 엄청 업그레이드된 느낌이 든다. 내가 보고 들은 모든 것들이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는 자각을 하니까 마치 기존 시스템에 고용량 하드 드라이브를 추가 장착한 기분이 들었고, 새로운 자료를 입력하느라 옛날 자료를 정리해서 지울 필요 없다는 여유 때문인지 방금도 월영당의 춘전에 관한 데이터를 몽몽의 도움 없이 스스로 기억해내고 분석까지 해버린 것이다. 음… 좀 걱정이 되기도 하는 건, 이러다가 내 본래의 몸으로 복귀하게 되면 펜티엄 III 사용하다가 압수 당하고 386 지급 받은 사람처럼 버벅대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톡!톡!톡! 음…? 방금 건 내가 몽몽을 부르는 신호가 아니었다. 누가 내 어깨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린 것이다. 돌아보니 흑주가 선실 바깥을 보라는 듯 턱짓하고 있다. …이 인간은 하여간 벙어리도 아니면서 지독히도 말을 아낀다. 그 동안 잊고 있었는데, 여행 중에 꼭 흑주가 말하는 꼴을 봐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해 본다.

“무슨 일이죠?”

시큰둥한 태도로 선실 문 앞에 서 있는 건장한 체구의 중년 뱃사람, 선장에게 묻자 선장은 험상궂은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순박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극적이며 입을 열었다.

“배 밖에 손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아가씨.”

“손님이라고요? 난 이 곳에 아는 사람이 없는데… 정말 날 찾는 사람이 맞아요?”

“젊은 무사님들이신데, 진씨 성을 가진 아가씨를 찾습니다.”

젊은 무인들…? 근데 날 안다고? …설마 벌써 내 정체를 눈치챈 자들이 나타난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난 조금 불안한 마음을 안고 선실을 나섰다.

“하하하! 역시 아가씨셨군요. 내 그럴 줄 알았습니다.”

선착장에 서서 날 올려다보며 디게 친한 척 큰 소리로 인사하는 청년은 그 모용세가의 제자라는 구레나룻 청년이었다. 청년의 옆에는 그의 사매인 귀여운 소녀가 있었고 그들 뒤에는 역시 같은 복장의 젊은 무사들이 대여섯 명 더 보였다. 헌데 그들과는 조금 떨어져 서 있는, 복장이 다른 세 명은 또 뭐지? 눈빛이며 분위기가 어째 만만치 않아 보이는 걸?

“지난 포구에서 아가씨의 말을 제가 잡아 준 일이 있습니다. 기억 못하시겠습니까?”

“…아뇨, 기억해요. 그보다 지금은 이렇게 얼굴을 가리고 있는데, 용케 알아보시네요?”

“그런 작은 천 조각이 어찌 고괴한 보석의 영롱함까지 감출 수 있겠습니까.”

이 웬수야, 약 올리냐? 안 가려지면 내가 애써 면포를 쓰고 있는 보람이 없잖아. 그리고 넌 니 옆의 소녀가 인상 긁고 있는 것도 안 보이냐?

“헌데… 여긴 어쩐 일이신가요? 설마 모용세가의 귀하신 공자께서 아녀자를 미행이라도 하셨나요?”

아녀자… 무심코 써놓고 보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다. 그런 단어 사용도 갈수록 자연스러워지고 있는 나 자신이 두렵다.

“흥! 우린 당신이 어제 모살부취와 음혼귀모가 탄 배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추적해 온 거예요. 그렇지 않다면 대사형이 무엇 때문에 당신 같은 여자를 찾겠어요?”

“사매,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우린 지금 진소저께 중요한 부탁을 드리러 온 것인데 그렇게 무례하게 굴면 내가 어떻게 말을 꺼내겠느냐?”

“정체도 모르는 여자에게 우리 가문의 일을 굳이 부탁할 필요도 없잖아요. 도대체 대사형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너야말로 왜 이러느냐. 모든 것은 그 요녀들을 처치하기 위함이란 것을 모르느냐?”

“근데 왜 하필 저 여자예요!”

잘~들 논다. 사람 불러놓고는 지들끼리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내려다보다가 질린 나는 몸을 돌려 선실로 돌아가면서 선장에게 말해두었다.

“다 싸우거든 한 명만 올라와서 얘기하라고 해주세요.”

정작 내가 들어와 버렸는데도 얼마간은 계속해서 카랑카랑한 소녀의 음성이 선실 안까지 들려왔고, 그래 서 따로 얘기를 듣기도 전에 난 대충 저들이 무슨 일로 여길 왔는지 알 수가 있었다. 모용란과 음혼귀모를 처치하도록 협조해 달란 건데… 쯧쯧~! 눈치 없는 것들 같으니, 떠돌이 범죄자 두 명 잡는데 정신이 팔려 진짜 거물인 초거대범죄조직의 두목, 비화곡주를 못 알아보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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