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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1부 – 119화


[ 즉시 해혈 작업을 시도하겠습니다. 다만, 현재 주인님 신체의 각종 악화된 상황이므로 소요시간 추정은 어려울 것으로…… ]

몽몽의 말은 미령이가 날 부축해 일으키기 시작하자 잠시 멈추었다. 미령이는 현재 나의 가슴 정도 높이에 간신히 도달하는 작은 키와 체구를 가지고 있건만 어렵지 않게 날 안아들고 일어섰다.

[ …외부 충격이 예상되는 불안정한 이동이 진행될 경우, 해혈 작업의 위험도가 높아 시행을 중지합니다. ]

“…제기랄, 미령아… 너… 왜 이러는 거냐.”

정신이 없어 몽몽과 미령이 어느 쪽에게 하는 건지 언어 구별을 지정하지도 않은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시간을 버는 동안 제가 곡주님을 안전한 장소로 모시겠어요.”

“야… 그러지마……”

“곡주님…! 저 늙은 괴물은 누구도 이길 수가 없어요. 제가 간다 해도 아무런 힘이 못 돼요.”

사실 그 말에는 공감한다. 시력이 너무 약해져 직접 관전할 수는 없었지만 몽몽에게 가끔 전해들은 싸움의 진행상황은 매우 비관적이었다. 그건 알고 있고 또, 지금은 내가 나선다고 해서 역전시킬 묘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조금만 더 버티면 우리 지원 세력이 떼거지로 몰려 올 거야. 그러니 그냥 더 기다려보자… 라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한 타임 늦었다. 내가 입을 열기 전에 미령이가 갑자기 앞으로 달려나갔기 때문에 녀석에게 안긴 상태의 나로서는 입을 열기 어려울 정도로 몸이 요동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으, 우, 야, 야, 잠, 깐, 어, 잠, 깐, 억, 만.”

어렵게 입을 열긴 했는데 내가 들어도 해석 불능. 우- 빌어먹을… 어깨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머리가 흔들리니까 정신이 더 오락가락하고 미치겠다.

“곡주님…! 다소 불편하시더라도 이해해주세요.”

오, 그래. 우리가 여기 올 때 썼던 마차로구나. 좀 전처럼 계속 안고 뛰는 것보다는 마차 속에 누워서 가는 것이 훨씬 낫지, 암. 좋은 생각… 응…? 아니, 그게 아니었지?

“미령아… 이럴 필요… 없어. 곧 내 춘전을 본 이들이… 그래, 그들이 올 거야.”

“…하지만 아직 오지 않고 있는걸요.”

“그, 그거야 곧… 야, 잠깐! 이래선 안 되는 거야. 이렇게 나만 빠져나는 건……”

우쒸! 그냥 씹히며 마차에 강제 탑승되고 말았다. 으… 이를 어쩐다? 막상 마차가 출발하니 어찌 된 게 미령이가 안고 뛸 때보다 더 흔들거리는 것 같다. 으으~ 몽몽 녀석은 이런 작업환경에서는 해혈을 하기 어렵다 하기만 하고… 제기…! 인질이 된 자매들을 구출하기만 하면 뭔가 길이 보일 줄 알았는데, 지금에 와서는 다시 희망의 빛이 흐려지는 기분이다.

내 오산의 가장 큰 이유는 상상을 훨씬 웃도는 혈의 승의 전투력이었다. 싸움이 시작된 이후 우리 편의 쪽 수가 전혀 줄어들지 않은 상태로 격렬한 싸움이 계속되고 있어 표면적으로는 구성원들이 젊은 우리 편이 유리해 보일지 몰라도 실상은 그렇지가 못했다. 그사이, 하수급인 천인군도의 살수들이 한계를 드러내 허우적대기 시작한 형편인데 뒤늦게 나선 소교, 소령이 자매들도 벌써 지쳐 버벅거리기 시작했고 심지어 사영과 흑주마저도 좀처럼 평소의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헌데 정작 저 인원으로부터 협공을 당하고 있는 혈의 승은 일단, 내공 그래프부터 요지부동이었다. 마치 작고 어린 유치원생들의 토닥거림을 그냥 서서 맞아 주고 있는 남자 선생님처럼… 협공을 당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이 쪽을 가지고 논다는 느낌이다. 진짜 ‘괴물’이라는 생각밖에 안 드는 노인네이다.

‘터보모드’고 뭐고 아무 것도 쓸 수 없는 지금으로서는 내가 있어봤자 도움될 것이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이렇게 나만 쏙 빠져서 달아난다는 건… 윽! 으… 앞으로는 탑승감이 좋은 마차를 구하라고 하든지… 음… 하지만 이 마차, 본래 상당히 비싸게 주고 산 탑승감이 꽤 좋은 마차였는데… 아무래도 내가 부상이 심해서 그렇게 느끼는 건가…? 제기랄! 진유준, 이 놈아! 다른 전우(?)들은 지금 죽을지 살지도 모르는데 이 정도 아픈 거 가지고 무슨 엄살인 거지? 으~ 누군지 모를 지원군들~! 양심 있으면(?) 이쯤에서 나타나 줘야 하는 거 아냐? 으윽…! 비포장도로(?)라 그런지 자꾸 바닥이 튀어서 상처가 쑤시고 머리는 어지럽고… 으으으……

[ 주인님! 마차 밖에 긴급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강한 외부 충격에 대비해 주십시오. ]

또 뭐야… 으웃! 갑자기 미령이의 고함소리와 비명 같은 소리가 섞여 들리는가 싶더니 마차에 엄청난 충격이 가해진다. 으아, 쓰파!

쿠콰콰콱~! 콰꽝~! 요란한 굉음은 사방에서 쏟아졌고 벼락 같은 충격이 빈틈없이 내 전신을 강타했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 나와 내 주변의 모든 것이 부웅 떠오른다는 느낌이 있었다. 이어 사방의 공간이 무너지며 내 몸은 무언가 차가운 벽 같은 것에 팽개쳐지고 있었다. 이미 내 의식은 충격이 통증으로 연결되지도 않을 만큼 맛이 간 상태였지만… 한 가지 생각만은 비교적 뚜렷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기어이 X되는 구나.

“곡주니임~!”

거리를 짐작할 수 없는 곳으로부터 미령이의 절규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사방에서 새로이 밀려오는 어둠에 의해 흐트러지는 의식의 한 자락을 힘겹게 붙들어 보았지만, 역시 너무… 힘들다. 제기, 지겹다, 이제, 이런 거……

어두웠다. 조명이 꺼진 연극무대처럼 사방이 어두운 공간 속에 깊숙이 잠겨져 있었다. 그 어둠 속에 나는 매우 어색하고 갑갑한 기분에 사로잡힌 채 엎드린 자세로 쓰러져 있었다. 몸을 일으키기는커녕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는 허망함만으로도 고통스러웠지만 날 정말로 미치게 하기 시작한 건 내 눈앞에 연속으로 펼쳐지는 장면들이었다.

처음엔 미령이었다. 미령이와 그녀를 둘러싼 정체 불명의 사내들이 어둠 속에서 떠오르더니 이어 미령이와 그들 간에 싸움이 벌어졌다. 싸움은 오래가지 않아 미령이의 패배로 결론이 나고… 나는 눈을 감았다. 그러나 눈을 감아도 미령이의 처절한 비명소리에서까지 벗어날 수는 없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개 같은 경우인가 싶었지만, 보기 싫고 듣기 싫은 일들은 계속해서 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소교, 소령이… 심지어 사영과 흑주까지 나타났고 한 명 한 명 차례로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던 것이다. 그들이 흘린 붉은 선혈이 이 알 수 없는 공간을 축축하게 적시기 시작했고 끔찍한 비명소리는 끊임없이 내 귓속을 울리고 있었다.

빌, 어, 먹, 을…! 이게… 현실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어느 순간 그 사실을 깨달았다 해도 결코 깨어나고 싶을 때 깨어날 수 없는 악몽… 아니면 난 이미 죽어 소위 ‘저승’이란 곳에 와 있는 것일까? 그것이 아닐지라도, 다시 깨어날 수 있다 하더라도… 현실이라고 과연 이 지옥과 다른 상황인 걸까? 이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깨어나게 되었을 때, 나는 다시 한 번 이 비극을 겪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건… 내 탓인가…? 내가 자처한 일인가…? 내 터무니없는 안이함과 오만한 행동이 저들을 죽이는 가…? 난…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싫다. 나도 싫고 이 상황도 싫다. 저들의 죽음도 마음에 들지 않고 내 죽음도 인정할 수 없다. 내 잘못이라는 생각이 싫다. 내가 잘못된 것일까…? 나 때문 에 죽어갈 이들을 슬퍼하기보다 분노를 앞세우는 나는 무언가가 잘못되어 있는 놈인가? …빌어먹을… 빨리 이 눈앞의 어둠이라도 걷혀 주면 좋겠다. 이 차가운 침묵의 공간은 왜 사라지지 않는가. 지금 내가 죽은 것이라면… 빨리 어딘가로 갈 수 있으면 좋겠다. 염라대왕 앞이면 어떻고 악마가 이빨을 드러낸 채 날 반긴다 한들 어떠할까.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면서 혼자 자책감에 빠져 있는 이 시간은… 얼마나 더러운 ‘지옥’인가.

아…? 뭔가… 느껴진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몰라도 조금씩… 그래, 이건 감각…이라는 거다. 아련한 통증과 부자연스러운 통제감… 그런 것들이 희미하게 전신에서 느껴지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이렇게 기쁠 수가! 아무래도 난 깨어나는 중인 것 같다.

“…울…지마, 임마.”

간신히 입을 열고 한 말이 그거였다. 정작 하고 싶은 말은 ‘울고 싶은 건 나야.’라는 것이었지만 이어서 간신히 흘러나온 건, 또 엉뚱한 말이었다.

“잘… 있었니?”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의 얼굴이 지금까지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워 보였다. 잠시 눈을 깜짝이며 녀석과 그 뒤의 하늘을 보다가 문득 긴 한숨을 몰아 쉬었다. 공기가 꿀처럼 달다는 느낌은 또 처음인 것 같았다. 아쉬운 듯 내 눈앞에서 뒤로 물러선 얼굴이 조용히 숙여지며… 대교는 내게 큰 절로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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