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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1부 – 126화


여름이었다. 해가 없는 밤에도 땀이 멈추질 않는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어 그 한낮의 태양열은 가히 살인적이다.

길을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자연 지치고 무거워져 시원한 그늘에서의 휴식을 갈망하기 마련이다.

오악산 기슭에 자리한 이 2층 객잔에는 그런 나그네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오악산 북서쪽에 자리한 산서성으로 향하는 길목인 탓에 평소에도 오가는 이들이 많았으나 여름이면 특히 이곳에서 다리 쉬임을 하고 가는 이들이 많았다.

객잔 뒤에서 솟는 천연의 氷水(수맥의 위치에 따라 유난히 차가운 수온을 가진 우물이 가끔 발견되며 거기에 그런 이름을 붙인 것임. 한 여름에도 얼음조각이 섞여 있다고도 함)는 상당히 알려진 근동의 명물이기도 했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들어섰다가 그 빙수 한 잔에 더위를 식힌 나그네들은 기뻐하며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곤 하는 것이다.

자연 객잔 안은 그들의 대화소리로 북적대곤 하였다.

중원의 각종 소문들이 쏟아져 나오는 곳이 바로 이런 장소인 것이다.

그리고 의례 그런 곳에서는 가장 놀랍고 신기한 화제로 좌중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부류가 있기 마련이다.

중앙 탁자에 앉은 몇몇 사내들이 바로 그러했다.

오…! 정말로 그 화면으로 재생했네?

미래 여자 진은 20세기에서 나 만나기 전에 꽤나 많은 자료를 수집했었나 보다.

좋아, 집에서처럼 전화비 나갈 염려도 없으니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 보실까나?

“그러니까 자네가 그걸 직접 봤단 말이지?”

“그렇대두? 자네들은 그 상황이 짐작도 가지 않을 걸세. 직접 본 나도 눈을 의심할 정도였으니… 내가 이것 저것 보고 다닌 것이 적지 않지만 이번 싸움같이 장관은 아마 평생을 두고 처음 일 것이네.”

“…그렇겠지. 사마지존이 어디 보통 인물인가? 그런 자가 꺼꾸러졌다니.”

“이보시오!”

크게 떠들던 사내들이 소리 나는 쪽에 고개를 돌렸다.

바로 옆자리의 사람이었다.

“당신들이 지금 말한 게 사실이오? 정말 그 사마지존 현무를 말하는 것이오?”

“예끼 여보쇼. 그럼 내가 지금 흰소리를 하고 있는 줄 아시오?”

“그게 아니라…. 사마지존이라면 말 그대로 사파의 절대자인데 누가 그를 쓰러트렸단 말이오?”

“하여간 이곳은 아직도 깜깜이로군.”

말한 사내는 새로운 소식을 자신만이 알고 있는 것을 자랑하며 말했다.

“내 말해주리다. 귀 어두운 댁들도 패도광협이란 이름을 들어보았겠지?”

그 순간 물어보던 사내들은 물론이고 은연중 그쪽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던 객잔 안의 사람들이 모두 대경하여 순간적으로 조용해진다.

“그, 그럼 그 패도광협이 이번엔 사마지존까지 쓰러트린 거란 말이오?”

“바로 그렇소. 이일은 이미 10여 일이 지난 일이오.”

객잔 안 사람들의 관심은 일시에 그 한곳으로 집중되어 있었다.

“…당신이 그걸 직접 보았소?”

누군가의 외침에 처음의 사내가 인상을 구겼다.

“가까이 본 건 아니지만 그런 것이나 마찬가지지.”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사내는 모든 이들의 관심이 자신에게 쏠리자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흠-! 흠! 그건 말이오.”

이때, 그들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이층 자리에 한 청년이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 올려진 그의 도(刀)가 무림인임을 말해주고 있었지만 얼핏 미소녀로도 보일 만큼 해사하고 준수한 용모를 가진 청년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아무런 것에도 관심이 없는 듯 묵묵히 술잔만을 기울이고 있었다.

“형주에 목야평이라는 곳이 있소. 대하를 따라 100여리는 갈대만이 무성하다는 곳이지. 바로 그 곳에서 패도광협과 사마지존의 격전이 있었던 거요. 나는 그때 마침 근동을 지나고 있었소. 나무 그늘에서 다리 쉬임을 하고 있었는데……”

사내의 말은 이러했다. 갑자기 땅이 울리는 느낌과 함께 굉음이 들려오기 시작해 처음엔 지진이라도 난 줄 알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 곳이고 피하려고 허둥대다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니 바로 그 허공에 두 인형이 어우러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늘을 날며 기기묘묘한 무공들을 쏟아 내는데… 마치 하늘의 군신들이 싸우는 것 같습디다. 멀리서 보기에도 한 사람은 회색 승복을 걸치고 있었지만 그 형상은 악마가 현신한 듯 했소.”

객잔 곳곳에서 신음성이 흘러 나왔다.

사마지존 현무가 본래 소림사 출신으로써 언제나 승복을 입고 다님은 모르는 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 패도광협도 보았겠구려. 그는 어떻게 생겼소?”

누군가의 질문에 사내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너무 멀어서 정확히 볼 수는 없었소. 하지만 사마지존에 못지않게 무서운 인상이었소.”

이층의 청년이 문득 웃었다. 비로소 그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누구는 패도광협이 여자처럼 곱상하게 생겼다고도 하던데……”

“예끼 여보쇼. 말 같지 않은 소리요. 명왕(부동, 애염, 등 불가의 수호신들을 말하며 戰神이라 용모가 지극히 위압적으로 표현된다.)이 현신한 모습을 연상하면 될 게요.”

이층의 청년은 다시 피식하고 웃더니 시선을 술잔으로 돌렸다.

약간의 술기운이 올라 안색이 발그스름해져서인지 처음보다 더 소녀적인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남자임이 분명하나 아름답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이 청년무사… 그가 바로 패도광협 유운일이었다.

자신들의 머리 위에 당사자가 있다는 사실도 모른 체 객잔 안의 사람들은 그의 행각이며 용모에 대해 떠들고 있는 것이다.

화제는 그가 이제껏 상대한 인물들에 대한 것도 있었고 그의 정체에 대한 이런 저런 추측들로 난무했다.

“어딜 가나 그 사람 얘기뿐이네요?”

맑고 또랑또랑한 목소리였다.

운일은 무심히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14, 5세쯤 되어 보이는 홍의 소녀가 자신과 함께 있는 백발의 노인에게 한 말이었다.

“그 사람이 정말 그렇게 대단 한가요 할아버지?”

홍의 소녀의 앞에 있는 노인은 나이가 팔십 세는 들어 보였고 낡은 백의를 걸친 초취한 모습이었다.

“수아는 잘 모를 것이다. 그는 최근에야 알려지기 시작한 사람이란다.”

노인은 목에 가래라도 끓는지 약간 그륵거리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그가 중원에 등장한 것은 불과 반년전이지. 하지만 그 짧은 기간동안 그는 전 중원을 격동시키고 있단다.”

“반년… 하기야 사파의 최고봉이라는 사마지존을 이겼다니… 그럼 그전에는?”

“…모두 무명이 드높은 사람들이지. 사마지존도 그렇지만 그 전에 상대한 사람들도 결코 그에 못지 않은 괴걸들이었어.”

“호오- 그래요?”

소녀는 말하며 살짝 고개를 돌려 유운일을 보았다.
그러더니 유운일과 눈이 마주치자 싱긋하고 눈웃음을 치는 것이 아닌가.
유운일은 순간 당황했지만 눈을 돌리지는 않았다.
‘저 소녀는……?’

“얘기해 줘요. 할아버지. 그가 어떤 사람인지.”

“너는 천검이란 명호를 들어 보았느냐?”

“천검…? 설마 그 무적검왕을 말하는 것인가요?”

“그래, 나이 15세에 중원에 출도하여 세수 100여세를 헤아리는 지금까지 단 한번의 패배도 없었다하여 강호의 친구들이 ‘무적검왕’이란 별호를 붙여주었던 천검 진도성이다.”

“맙소사, 그 천검도 패도광협에게 패했나요?”

“그가 처음이었지. 천검의 시체가 발견되었을때는 아직 사람들이 패도광협이란 존재를 알지 못했을 때란다. 그 만큼 충격도 컸지.”

보기와 달리 노인도 무림인인 듯 했다.
강호의 친구들이니 하는 말은 각 파에서 즐겨 쓰는 표현이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지 않아 다시 무당의 서우진인이 그에게 패해 무릎을 꿇었고…. 신창 경학원은 그의 도 아래 10초를 견디지 못하고 패한 후 분을 이기지 못해 자결을 했단다.”

유운일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신창 경학원…. 팔십이로 창법을 위력적으로 펼치던 그를 유운일은 처음부터 죽이고 싶지 않았다.
패한 후에도 그의 태도는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자신을 패퇴시킨 상대와 환담을 나누며 술잔을 기울이던 그 쾌걸에게 그는 진한 호감을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 이후 자결을 했단다.
그것도 하필 그 자신의 가족 앞에서.

“신창이라면 성격이 급하고 불같다고 하더니…….”

“그래. 하지만 그가 죽은 것은 꼭 패도광협의 탓이라 고 할 수만은 없지.”

“그럼……?”

“거기에는 숨겨진 사연이 있지만 지금 말할 수는 없구나.”

노인의 그 말에 운일은 흠칫 놀랐다.
경학원의 그 당시 모습을 생각했을 때 나중 갑자기 자결한 것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그 아들 형제의 원망을 들었을 때 씁쓸한 회한을 느꼈을 뿐 그 죽음 자체에 어떤 의문을 품은 것은 아니었다.
헌데 지금 노인의 말은 그가 모르는 어떤 사연이 있다는 것이 아닌가.

“왜요? 왜 지금 말할 수 없어요 할아버지?”

“그건…….”

노인은 말을 흐리며 슬쩍 주위를 살폈다.
“신창의 명예를 깎을 수도 있는 얘기라서 그런다.”

“히잉-.”

소녀가 투정을 부리는 목소리를 내자 노인은 약간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신창은 비록 죽었지만 그의 가족들은 아직 살아있다. 우리는 말조심을 해야 한다.”

노인의 말을 들은 운일은 노인이 비록 초라한 행색을 하고 있지만 정대한 인물임을 알았고 그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언제고 시간을 내어 자신이 직접 조사해 보아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소녀가 입을 삐죽이자 노인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그가 상대한 다른 인물들은 더욱 흥미롭단다.”

두 조 손녀의 얘기에 유운일은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고 있었다.
애교를 섞은 소녀의 목소리와 조리 있는 노인의 얘기를 듣고 있자니 자신의 얘기임에도 마치 모르는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듣는 것처럼 재미가 있었던 것이다.

“‘마성동군’이라 하면 지하무림의 일백마군들보다도 무서운 전대 마인이지.
3년 전 그가 다시 강호에 등장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를 제거하기 위해 무림맹에서 파견된 고수들은 셀 수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를 어쩌지 못했지. 그만큼 무서운 마인을…….”

“또 패도광협이 죽였나요?”

소녀는 재빨리 끼어 들었다.
다시 흥미가 생긴 모양이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목이 컬컬했는지 몇 번 헛기침을 했다.
소녀가 눈치 빠르게 노인의 잔에 술을 부으며 말했다.
“이상하네요? 그는 패도광협… 사마외가 아닌가요? 어째서 같은 마도인을 해친 거죠?”

노인은 부어진 술을 시원스럽게 들이키더니 입가를 소매로 문질렀다.
“패도광협이 그에게 무슨 원한이 있어서 해친 건 아닐 거야. 다만 마성동군 월천이 강했기 때문이지.”

“그렇다는 건…….”

“그래 패도광협이란 그런 인물이었던 거야.
사마외로써 천검 등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공 완성을 위해 강자들에게 도전하고 다녔던 거지.
그리고 시기상으로 마성동군을 쓰러트린 건 신창보다 먼저였단다.”

소녀가 점점 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노인을 주시할 때 유운일은 자신도 모르게 술잔을 비우고 있었다.
‘저 노인… 보면 볼수록 보통 인물이 아니로구나. 정확히 내 행적을 파악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이번에는 사마지존마저 쓰러트렸고… 그로써 이제 그는 정사마 모두의 적이 된 셈이란다.
모두 정당한 대결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당한 이들의 주위에서 보면 원한이 없을 수가 없지.”

소녀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요. 아무리 정당한 대결이었어도 죽인 건 죽인 거니까…….”

소녀의 그 한마디에 운일은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그래 죽인 건 죽인 것이지……’

그는 오래 전 그들 형제가 겪었던 참상을 떠올렸다.
그 처절했던 기억을……

‘난…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천하제일인이라는 미명 아래 우리 형제와 같은 이들을 무수히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바로 이 손으로……’

연옥도를 떠난 후 마치 쫓기듯 계속해온 강호 종횡이었다.
타오르는 불길에 그대로 몸을 맡기고도 미소짓던 그의 아버지… 그리고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는 웃음으로 그를 보냈던 그의 형 유운호.
그들의 영상은 유운일을 조급하게 하였다.
그는 쉬지 않고 강자를 찾아다녔고 쓰러트렸다.
그러나… 천검 진도성, 신창 경학원 등 한 번의 만남이었으나 모두가 승부를 떠나 남자대 남자로 사귀고 싶었던 영웅호걸들이었다.
연옥도에서 수련하며 상상 속에 그리던, 반드시 쓰러트려야 할 적은 거기에 없었다.
심지어 마성동군, 사마지존 등 사마 외의 괴인들까지도 그 얼마나 사내다운 사내들이었던가.

강호 출두 후 조금씩 쌓이던 회의가 커다랗게 가슴에 차 오른 것은 신창 경학원이란 사내를 만나고부터였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 반드시 복수하고야 말겠다고 절규하던 그 형제들에게서 그는 바로 자신들을 보았던 것이다.

부친의 유언대로 운일은 그때의 흉수들을 전에도 찾지 않았고 앞으로도 찾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무심한 하늘의 징계가 없는 한 그들은 태연히 천수를 누릴 것이다.

그런 생각이 날 때마다 이를 악물고, 스스로를 고통 속에 몰아넣었던 연옥도에서의 나날들…

지금 자신은 혹시 그 분풀이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부친의 유한을 푼다는 명목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상은 풀길 없는 자신의 한으로 도를 휘두르고 사람을 죽여온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들이 그의 가슴속에 끝없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객잔을 찾았다.

도제, 형 유운호와 마시던 그 술을 마시면 잠시라도 심적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소녀의 마지막 말에 조금씩 술기운에 묻혀가던 고뇌를 다시 끄집어낸 운일은 연거푸 몇 잔의 술을 더 입 속에 부어 넣었다.

다른 호걸들이 몇 년, 아니 평생에 걸쳐도 이루기 힘든 명성을 단 육 개월 동안 쌓아올린 이 젊은 영웅에게 찾아온 고뇌는 사실 강호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나약한 마음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린 시절 이후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만 숨쉬던 그에게 있어 언제고 찾아올, 마치 소년이 사춘기를 거쳐 어른이 되듯 언제고 치루어야 할 통과의례이기도 했다.

어느덧 주문했던 몇 병의 술을 모두 비운 그는 아예 술독 채 주문할 마음으로 심부름꾼을 찾았다.

아래층에 시선을 던진 그는 자신을 주시하던 두 개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아까의 그 홍의 소녀였다.

기실 벌써부터 소녀는 그를 뚫어질 듯 보고 있었고 그 역시 눈치를 채고는 있었다.

다만 무시하고 있었을 뿐인데 하필 돌아본 그 순간에 눈이 마주친 것이다.

그가 마주 보자 소녀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모른 채 한다.

그 두 뺨이 살짝 붉어지고 있었다.

운일은 그런 소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일곱 살 이후 13년 간을 연옥도에서 사람, 특히 여인은 아예 접해보지 못한 그였다.

그의 기억 속에 있는 여인이라면 오직 그들 형제의 어머니와 누나라고 부르며 따르던 ‘정화’라는 이름의 여인 그 둘 뿐이었다.

이성에 대한 것은 그야말로 무지 그 자체인 그였다.

따라서 자신이 얼마나 매력적인 청년인지 그는 전혀 모르고 있었으며 홍의 소녀의 반응도 그저 ‘이상하다’는 느낌일 뿐인 것이다.

다만 아까 그 조 손녀의 대화를 들으며 두 사람에게 다 호감을 느꼈기에 그는 소녀가 다시 그에게 시선을 주자 한번 씨익하고 웃어 주었다.

그러자 소녀는 기쁜 기색을 띠고 얼굴에 아까보다 더 짙은 노을을 만드는 것이다.

‘귀엽게 생긴 소녀인데… 성격이 좀 이상하군. 왜 나를 보고 웃지? 게다가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뺨이 마치 사과처럼 물들다니……’

누구라도 그의 생각을 알았다면 크게 웃고 말았으리라.

패도광협이란 이름으로 당금 강호의 새로운 공포로 떠오르는 그에게 이런 유아적인 면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주문한 술독이 날라져 오자 바로 몇 잔의 술을 더 떠먹었지만 간간이 보내오는 소녀의 시선이 영 어색하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갑자기 객잔 안이 어수선해지는가 싶더니 여기저기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괴로운 신음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거의 동시의 바닥이며 탁자에 머리를 박고 쓰러지고 있었다.

운일은 가슴이 뜨끔하여 재빨리 실내를 살폈다.

심부름꾼 한 명이 입을 벌린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고 아까 소녀와 얘기하고 있던 노인도 가슴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홍의 소녀는 대경하여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 독! 술에 독이…….”

노인이 괴로워하다가 종내는 바닥에 쓰러졌다.

“할아버지~!”

소녀가 놀라며 노인을 부축했으나 이미 노인의 얼굴은 검붉게 타 들어가고 있었다.

“이, 이건… 독,중,지,독… 해,독은 불…….”

노인은 그 말을 남기고 허무하게 눈을 감고 말았다.

소녀의 찢어지는 비명이 객잔을 울렸다.

‘독중지독?’

유운일은 언제인가 읽었던 독왕(毒王)의 만독비전에 실린 내용을 기억해냈다.

자그마치 일흔 두 가지의 독물을 합성해 만들어 낸 것이며 그야말로 독 중의 독.

단 한 방울로 수백의 인간을 살상할 수도 있다는……

‘그 독중지독이란 말인가? 도대체 누가……’

조금 전까지 활기에 차 있던 객잔 안은 한 순간에 거대 한 무덤이 되어 버렸고 소녀의 울부짖음 소리가 더더욱 괴기스런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심부름꾼 청년은 “살인이다. 살인!” 하고 고함을 지르며 구르듯 객잔 밖으로 뛰쳐나간다.

유운일의 시선이 자신의 술독으로 향했다.

‘술! 술인가? 거기에 독중지독이……?’

그의 얼굴에도 어느덧 조금씩 괴로운 표정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기어이 상체가 고목처럼 탁자 위로 떨구어졌다.

얼마가 지나자 소녀의 목소리는 겁먹은 흐느낌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한 순간에 그 많던 사람들이 싸늘한 시체가 되어 뒹굴게 된 것이다.

그 처참함 속으로 누군가가 나타났다.

마치 유령처럼 객잔으로 들어서는 한 인형… 어린애처럼 작은 체구에 어딘가 불안정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꾸부정한 등위로 낙타처럼 커다랗게 솟은 것이 있었다.

일견 혐오감을 주는 추한 얼굴의 꼽추노인이었다.

그 눈빛은 지극히 음산했으며 걸음걸이는 시체가 비적비적 걷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렇게 시체의 걸음걸이로 들어선 그의 시선은 이층의 유운일에게 향해 있었다.

탁자 위로 길게 엎드린 모습을 보고는 그 흉물스런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를 떠올렸다.

소녀의 흐느낌이 조용한 가운데 객잔 벽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꼽추노인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소녀의 흐느낌 소리가 거슬린다는 표정이었다.

“제길…. 왜 아직도 그러는 거요?”

“이 악마! 당신이 할아버지를 죽였지?”

소녀가 발악적으로 소리친다.

꼽추노인은 더욱 인상을 구기며 또 뭐라 하려는지 입을 열었다.

그러나 더는 말을 잇지는 못했다.

벌어진 입 그대로 두 눈을 크게 떴을 뿐이었다.

설마 하는 표정이었다.

그 멍한 시선 속에 유운일의 상체가 천천히 일으켜지는 것이 보였다.

“너, 너……?”

꼽추노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을 더듬었다.

“왜, 이상한가?”

고개를 좌우로 한번씩 기울이며 두둑 소리를 내고 난 후 운일은 퉁명스럽

게 말했다.

그리고는 탁자 위의 술독에서 한 잔 가득 퍼올리더니 그걸 쭈욱 한 입에 마셔버린다.

입가를 소매로 쓱 문지르며 말했다.

“독중지독에 쓰러질 정도면 아예 강호에 나오지도 않았어.”

꼽추노인의 눈동자에 경악의 빛이 어렸다. 뭐 저런 인간이 다 있냐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독중지독은 과거 독왕이란 희대의 독인이 조제한 극독으로써 독에 관한 한 당대에서는 최고라고 자부하는 그도 극히 조심스럽게 사용하는 독물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잔뜩 들어간 술을 아무렇지도 않게 목구멍으로 넘기는 유운일이 그에겐 무슨 괴물처럼 보이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물론 유운일의 몸속에는 수많은 영약과 유운호가 조제한 독중지독 이상의 극독이 효과적으로 배합되어 있어 완벽한 만독불침 상태라는 것을 그가 알 리가 없었다.

꼽추노인은 안색이 창백해 졌으나 이내 입을 앙 다물더니 안광을 폭사하며 말했다.

“만독불침인가? 그렇다고 해도… 조금의 영향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믿지 않는다. 너도 사람인 이상.”

유운일이 피식 웃는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멍한 얼굴의 소녀를 보았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해?”

소녀가 돌연 안색이 홱하고 변했다.

“흥-! 눈치 챘었나?”

홍의소녀가 벌떡 일어나더니 무서운 눈으로 유운일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귀엽고 예쁘장한 얼굴은 그대로였으나 몰라볼 정도로 날카롭고 매서운 표정이 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그 얼굴이 한 순간에 웃는 얼굴이 된다.

너무도 빠른 표정 변화라 마치 ‘홱’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소름끼치도록 요염한 얼굴이다.

“내 연극이 그렇게 서툴렀나요? 패도광협 나으리?”

“아니야 잘 했어. 나는 당신들의 연극에 깜쪽 같이 속았어. 당신들의 얘기에 말려들었고 그 덕에 저 사람이 독을 쓰는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 하지만……”

“흥-! 만독노사. 그 독중지독에 살아날 사람은 하늘 아래 존재하지 않는다고 큰소리 치더니.”

“대 소저. 나는 3년 전에 만독불침을 자랑하는 사천당가의 각주를 중독시켜 죽인 일이 있소. 그런데 저자는 도대체……”

“그는 사천당가 사람도 아니고 죽지도 않았어요.”

홍의소녀가 매몰차게 대꾸하자 꼽추노인은 기가 죽은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호칭으로 보아 독을 쓰는 꼽추 노인보다 소녀의 배분이 더 높은 모양이었다.

“큰 소리 칠 것 없어. 당신들 연극에도 헛점이 많았으니까.”

홍의소녀는 또 가볍게 흥- 하는 콧소리를 냈다.

이번에는 비웃음이 아니라 약간의 달콤함이 섞여있다.

“헛점이라구요? 그럼 내게 말해줘요. 반성하게……”

소녀는 고개를 왜로 꼬며 속삭이듯 말했다.

운일은 약간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한다.

“둘이 조 손간인 것처럼 꾸미고는 내 얘기를 그럴 듯이 말했지만 한 가지 틀렸어. 나는 마성동군을 죽이지 않았어. 내게 진 그는 다시 세상에 나오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리고 사소하지만 당신들은 처음 천검을 얘기할 때 정파인 들처럼 강호친구들이란 말을 썼지.

그 다음 정파인 ‘천검 등을 제거’란 표현을 쓰고 마파를 얘기할 때는 ‘해치다’라고 표현했지. 도대체 어느 쪽 사람인지 헷갈리더란 말이야.

거기다가 내가 보기에 당신이나 저 누워있는 노인이나 무공을 지닌 것이 분명하더군. 그것도 정파 쪽이 아닌……”

“무섭네요 당신…. 아까는 순진한 체 하더니……”

갑자기 소녀가 고개를 크게 젓히며 깔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마치 수십 개의 유리잔을 사방에서 두드리는 듯 객잔을 가득 메운 웃음소리는 반향을 되풀이하며 울렸고 그 속에는 기묘한 리듬이 섞여 있었다.

유운일의 눈가가 좁혀진다.

웃음소리에 실린 소녀의 내력은 가볍게 볼 만한 것이 아니었다.

계속해서 깔깔거리며 춤을 추는 우아한 동작으로 소녀는 한 탁자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는 갑자기 자르듯 그 웃음을 멈춘다.

어느 사이 소녀의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후- 하고 가쁜 숨을 한번 몰아쉰 그녀는 살짝 눈을 올려 뜨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을 누가 싸움밖에 모르는 사내라고 했지요?”

홍의소녀의 목소리는 마치 꿈을 꾸는 듯 달콤하였고 믿을 수 없으리 만치 유혹적이다.

아차 하며 피하려던 운일의 눈이 이미 그녀의 끈끈한 시선에 마주치고 말았다.

“이제 보니 당신은 정말… 그래요. 당신은 사내중의 사내였군요.”

“난…….”

소녀의 입이 벌어지더니 ‘아!’하고 뜨거운 입김을 뱉어낸다.

그 눈빛에서 꿈을 꾸는 듯 몽롱함이 배어 나온다.

홍의소녀는 주홍색 혀를 꺼내 자신의 붉디붉은 입술을 핥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내가 꿈꾸던 사내…….”

홍의소녀의 목소리는 더더욱 끈적끈적해지고 그 속에는 거역할 수 없는 나른함이 있어 유운일의 전신을 그 요염한 혀로 핥는 듯 하다.

“나, 난…….”

“당신은 날 안고 싶지 않나요…? 여기 이렇게 뜨거운 데…….”

그러며 소녀의 손이 자신의 앞섶으로 향했다.

하얀 손가락이 날렵하게 움직이며 풀어 해치려는 순간이었다.

“그만!”

홍의소녀의 안색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유운일의 딱딱한 목소리에서 자신의 술수가 통하지 않았음을 안 것이다.

“섭혼공(눈빛, 혹은 목소리 등을 매체로 상대의 영혼을 제압하는 술수로써 최면술과 유사하나 내력을 기본으로 하는 것이 다름)인가? 미혼술을 가미한…….”

“흥! 정말 잘났내요.”

홍의소녀는 빽- 소리를 지르며 신형을 날렸다.

한 순간에 이층의 유운일보다 높이 도약하더니 양손을 허공에 교차했다.

반짝이는 무언가가 유운일을 향해 무수히 뻗어나간다.

막을 생각도 않고 그는 그대로 서있다.

홍의소녀의 얼굴에 득의하는 표정이 떠오르는 순간 반짝이는 암기들은 그의 몸을 그대로 통과해 가고 있었다.

그의 뒤쪽 탁자 위에 수많은 바늘들이 빽빽이 박힌다.

대경하는 홍의소녀의 시각 속에서 그제서야 유운일의 모습이 스르르 유령처럼 사라져간다.

합공을 위해 자세를 취하고 있던 꼽추노인은 그 순간 자신의 뒤쪽으로 거대한 무게가 엄습하는 느낌을 받고는 실색하여 신형을 날렸다.

그러나 허공에 뜬 그의 기묘한 몸은 그대로 날아가 뒹굴고 만다.

이미 몇 군데의 요혈을 제압당한 것이다.

다른 시체들처럼 누워있던 그 노인, 홍의소녀의 할아버지라던 그가 별안간 바닥에서 미끄러지듯 움직이며 비수를 날린다.

허공에 잔상을 남길 만큼 빠르게 이동한 유운일의 신형을 파악한 것은 그뿐이었던 것이다.

정확히 비수는 유운일의 목줄을 노리고 날았다.

번쩍하는 섬광이 운일의 눈앞에 일었다.

비수가 운일의 도에 부딪쳐 옆으로 퉁겨지는 순간 노인의 검이 그 틈을 파고들었다.

그 속도며 정확성이 짐승의 감각을 연상케하는 치명적인 공격이다.

노인의 검이 상대의 심장을 파고드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상대가 패도광협이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검이 심장을 파고들어 그 끝이 등뒤로 삐죽 튀어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상대는 그였다.

단신으로 천하제패를 노리는 유운일이란 사내였다.

노인은 자신의 공격이 실패했음을 직감했다.

이성보다 그 감각이 먼저 말한다.

자신이 찌른 것은 그저 허공에 불과했으며 이 순간 자신의 목줄에 느껴지는 서늘한 감촉이 상대의 도신이라는 것을.

모든 것은 홍의 소녀가 도약하는 순간에 시작되어 그녀의 몸이 다시 하강하기 이전에 끝나 있었다.

노인의 검을 슬쩍 비켜서는 정도로 피하며 동시에 그의 목줄에 도를 올려놓은 자세로 유운일은 소녀가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홍의 소녀도 만만치 않았다. 바닥에 내려섬과 동시에 바른 손을 자신의 왼쪽 어깨로 향했다.

그리고는 세차게 잡아당긴다. 찌익~하는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홍의 자락이 꽃잎처럼 허공을 날았다.

유운일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 이전에 이미 그의 망막에는 소녀의 하얀 나신이 도장처럼 찍혀있었다.

요사스런 웃음소리가 객잔 안을 울리며 사방으로 반향된다.

“깔깔깔– 눈을 감고 어떻게 싸우겠다는 거지?”

명주실처럼 가느다란 균열이 허공에 일었다. 강호에 나온 이후 운일은 처음으로 당황한 상태였다.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앞에 있던 노인의 가슴을 밀어낸다.

이윽고 유운일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와 3, 4장정도 떨어진 탁자 위에 여전히 나신인 채로 소녀가 웃음을 머금고 서 있었다.

가슴과 비경을 손으로 살짝 가린 모습에 땀방울이 하얀 피부 위로 몇 방울씩 구르고 있다.

보통 사내라면 보는 것만으로도 미칠 만큼 매혹적인 자태였다.

그러나 거기엔 아름다움뿐 아니라 날카로운 가시와 독이 숨어 있는 것이다.

유운일은 안색을 굳힌 채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목 아래부터 배에 이르기까지 군데군데 손바닥 정도 길이의 금빛바늘이 솟아 반짝이고 있었다.

한순간의 방심이 초래한 결과였다.

“독중지독을 마신 것은 그렇다 치고 요혈에 박힌 바늘은 어쩌실 꺼죠? 그리고 그 바늘이 보통 암기가 아니라 수라금침이라면……?”

소녀가 새액하고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말하자 유운일의 안색이 더더욱 창백해진다.

수라금침은 금강불괴의 파괴에 전문적으로 쓰여지는 암기였다.

만년한철을 특별한 방법으로 조제하여 약간의 내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금강불괴의 육체에 찔러 넣을 수 있으며 보통 강한 산공단 약제로 마무리되므로 일단 신체에 침투되면 내공을 고갈시키고 진기를 흐트러트리는 효과도 있다.

“믿어지지 않나요? 천하를 통틀어도 몇 개 존재하지 않는 수라금침이 내 손에 있다는 것이?”

소녀는 냉소를 머금으며 손을 들었다.

그 손가락 사이에 세 개의 금침이 끼워져 있었다.

“그럼, 몇 개 더 맛보여 드리죠.”

“아니.”

유운일의 고개가 천천히 저어졌다.

“이 정도면 충분해.”

그러며 운일은 손을 들어 금침을 하나씩 꼽아낸다.

마치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듯 자연스러운 손놀림이었다.

소녀의 얼굴에 놀람과 의혹의 표정이 떠올랐다.

단 한군데의 요혈이라도 제압당한 상태에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을 그녀는 아직 보지 못했던 것이다.

“무슨?”

그녀가 반사적으로 손을 드는 순간이었다.

몇 개의 빛줄기가 그녀를 엄습했다.

번쩍하는 그 순간 이미 그녀의 몸에 서늘한 한기가 타고 흐른다.

유운일의 손을 떠난 수라금침이 그녀의 양 귀밑으로 두 개, 양쪽 겨드랑이 밑으로 두 개씩 지나갔던 것이다.

머리 위로 들어올린 그녀의 팔이 힘없이 스르르 내려왔다.

그리고 소녀는 무너지듯 서서히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수라금침 외에 그의 다른 손에서 퉁겨진 지력이 그녀의 혈도를 제압한 것이다.

유운일은 아직 유일하게 혈도를 제압당하지 않은 노인, 아니 어느 틈엔지 인피면구를 벗은 차가운 인상의 중년 사내에게 고개를 돌렸다.

“더 하겠나?”

“…그만 두겠소. 당신은 내 능력 밖이요.”

노인으로 변장했을 때와는 백 팔십도 달라진 지극히 사무적이고 차가운 말투, 마치 기계가 돌아가는 듯한 그런 목소리이다.

유운일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자신의 어깨에서 망토를 떼어냈다.

그리고는 탁자 위에 주저앉아 멍한 표정이 된 소녀에게 다가갔다.

소녀의 고개가 문득 치켜들어졌다.

붉은 입술이 작은 원을 그리더니 그 안에서 작은 은빛 바늘이 몇 개 쏘아졌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듯 운일은 가볍게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는 것만으로 그것을 피했다.

소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빨리 죽여라!”

유운일은 표독스런 소녀의 말을 무시한 채 천천히 자신의 망토를 소녀의 나신 위에 감싼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소녀를 보는 그의 눈에 미묘한 감정이 흐르고 있었다.

“이… 이 자식아!”

돌아선 그의 등에 대고 발작적으로 소녀가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야. 이런다고 내가 감격이라도 할 줄 아니? 이 거지 같은 자식아. 네가 무슨 패도광협이냐. 계집의 몸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는 주제에!”

정체가 드러났을 때에도 ‘요’자를 꼬박꼬박 붙이던 말투가 아니었다.

아무런 꾸밈없이 바락바락 악을 쓰고 있다.

유운일은 다시 몸을 돌렸다.

“흥! 빨리 죽여라. 왜? 내가 여자라고 그러냐? 응? 너도 내 몸이 아까워?”

유운일이 천천히 그녀 쪽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아까우면 이리와. 나는 움직이지 못하잖아. 이대로 하면 되잖아. 안 그래?”

악에 받친 듯, 여염집 여자는 입에 담지도 못할 말을 그녀는 마구 해대고 있었다.

“이리와. 응? 사내자식이 그렇게 용기도 없니? 아니면 빨리 죽……?”

가까이, 움직일 수 있다면 손을 뻗쳐 만질 수도 있을 거리에 선 유운일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말을 잃었다.

그의 두 눈에 고인 커다란 물방울을 그녀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응시했다.

이윽고 그 따스한 액체는 그의 두 뺨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직 어린. 아름다운 것을 보고. 아름다운 생각을 해야 할 나이에… 어쩌다 그대는…….”

아무런 가식 없는 영롱한 액체가 이 강한 사내의 턱밑에서 방울지고 있었다.

소녀는 그의 손이 자신의 뺨을 스치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다.

‘지금… 이 손을 깨물 수도 있다. 고개만 돌리면……’

악을 쓸 때 약간씩 배어 나온 눈물을 그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문질러 낸다.

‘고개만 돌리면…. 고개만 돌리면 이 증오스런 사내의 손을 힘껏 깨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못했다.

어딘가 신경세포의 일부가 고장이 난 듯 그녀의 생각은 현실화되지 못한 것이다.

그의 손이 뺨을 떠나고 이윽고 그가 돌아설 때까지 그녀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입술이 조금씩 떨려오더니 이내 바들바들 떨기 시작한다.

“꺄-악-!”

비명이었다.

고개를 마구 양쪽으로 휘저으며 그녀는 비명을 지른다.

“네가, 네가 뭔데! 야 이자식아 네가

뭔데 날 동정하는 거야-!”

비명 반 울음 반인 목소리다.

문가로 걸음을 옮기며 유운일은 다시는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잠깐!”

노인으로 변장했던 냉냉한 기운의 사내였다.

“왜… 우리를 죽이지 않는 것인지 물어도 돼겠소?”

“…당신들도 아무도 죽이지 않았으니까.”

유운일의 그 말에 사내는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이 된다. 유운일 자신은 그렇다 치고 사방에 널부러진 시체를 놓고 아무도 죽지 않았다니… 그러나 뭐라 더 묻기도 전에 이미 유운일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가 시체들 쪽으로 눈을 돌렸던 그 순간이다. 감정이라고는 존재할 것 같지도 않던 사내의 얼굴에 문득 허망한 표정이 떠오른다.

그는 살수(殺手)였다. 그것도 사상 최고로 천재적인 살인자라는 평가를 받는… 정면 승부는 몰라도 암습과 찰라적인 기습 공격으로라면 세상의 누구라도 죽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런데 실패한 것이다. 물론 상대에게 이쪽의 의도를 어느 정도 들킨 점을 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시 한다 해도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내 이 손으로 그를 죽일 수 있을까?’

단 한 번의 실패… 살수는 자신감을 잃는 그 순간 이미 살수로서의 자격마저 잃는 것임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사라진 유운일이 그 전에 혈도를 풀어주었는지 꼽추 노인이 비틀대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 역시 맥이 빠진 모습으로 전신에 힘이라곤 없어 보였다. 잠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두 사내가 문득 소녀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울음 뒤끝인 듯 간간이 흑흑대며 숨을 삼키고 있는 소녀의 모습은 처음 유운일을 속이기 위해 연출했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한 아직은 어린아이…

오악산은 그다지 높은 산은 아니었으나 수십 개의 봉우리가 거미줄처럼 얽힌 계곡으로 연결되어 있어 일반인들은 섣불리 오를 엄두를 내지 못하는 산이었다. 산에 웬만큼 익숙한 이들도 길을 잃기 쉬운데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그 속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기에 알 수 없는 괴물이 살고 있다는 소문과 함께 산의 입구에는 산서성 관아에서 내건 출입금지 표찰이 붙어 있을 정도였다. 그 오악산 근처에서 나무꾼이 허공을 걷는 사람을 보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신선이 기거하는 곳이라 하여 더더욱 경외의 눈으로 보게 된 것은 두 달 정도 전부터이다.

험한 만큼 더욱 빼어난 절경을 자랑하는 오악산. 그 깊숙한 골짜기 중의 하나. 그곳에 거대한 폭포가 하나 있었다. 50여 장 높이에서 꽂히는 물줄기가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낸 웅덩이가 운동장처럼 컸고 그 속에 형형색색의 야생어들이 유유히 물살을 가르고 있었다. 폭포 주변에는 폭포운(暴砲雲)이 신비롭게 펼쳐져 실로 절경 중의 절경을 연출하고 있었으며 세인들이 말하는 신선이 있다면 바로 이곳에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폭포수 아래 커다란 바위 위에 결가부좌를 틀고 있는 존재는 분명 신선이 아니었다. 옷가지를 걸치지 않은 태초의 모습으로 앉아 있는 한 인간, 정확히 말하면 약관의 청년이었다. 만약 보통 사람이 그 폭포수를 맞는다면 단 일각을 버티지 못하고 가랑잎처럼 쓸려 내려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청년은 자신이 깔고 앉은 바위와 비슷한 무게의 물줄기를 태연히 받아내고 있는 것이다. 전신이 물줄기인 듯, 바위인 듯 자연과 하나가 되어 있는 이 청년… 바로 유운일이었다.

그가 오악산으로 들어선 것은 두 달 전. 나무꾼이 보았다는 신선은 다름 아닌 이 유운일이었다. 허공답보(허공을 내공의 힘으로 딛고 선다는 궁극의 경신술)를 펼친 것도 아니고 그저 높은 도약으로 이동한 것뿐이었으나 무지한 나무꾼의 눈에는 그가 하늘을 나는 것처럼 비쳤던 것이다.

쫓기듯 숨가쁘게 종횡하며 상대를 쫓아 다니던 유운일이 불현듯 오악산 깊은 곳에 틀어박힌 것은 홍의 소녀와 그 일행을 만났던 객잔을 나서고 얼마가 지나지 않아서였다. 홍의 소녀… 생전 처음 보는 그 이름 모를 소녀 앞에서 그는 진심 어린 눈물을 보였다. 비록 그 상황이며 입장은 그와 대치되는 것이었으나 그녀에게서 그는 자신과 같은 류의 슬픔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우울함, 그리고 그 전까지의 고뇌가 합쳐진 복잡한 심정이 그를 충동적으로 인적이 없는 곳을 찾게 했다. 그리고 발견한 이곳에서 그는 모든 것을 잊기라도 한 듯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두 달이란 시간 동안을 그 폭포수 아래에서 보냈다. 모든 것을 잊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 모든 것들과 부딪쳐 싸우며 연옥도 이상으로 힘든 시간을 그는 보냈다. 아니 연옥도에서의 세월보다 그 두 달간이 그에게 있어서 몇 배의 고통이었는지도 모른다. 미칠 듯 무공을 수련하며 잊을 수도 없었고 옆에는 그의 형, 태어나서 20년 동안 떨어져 본 일이 없던 형 유운호도 없었다. 홍의 소녀… 그녀의 망초꽃처럼 청순하고 귀여운 모습, 그리고 도저히 함께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또 다른 모습……

‘그녀는 그 어린 나이에 자신의 육체를 무기로 사람을 해치려 했다. 아니, 나 이전에 틀림없이 그녀는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살상했으리라. 아직 부모의 품에서 응석을 부려도 좋을 나이에… 그녀는 처음부터 그렇게 살고 싶었을까? 낯모르는 사내들 앞에서 나신을 드러내고 그로써 상대의 헛점을 찾는…. 그런 행동을 자연스럽게 할 수밖에 없는 인공의 자아……’

소녀에게 느꼈던 슬픔, 동질의 아픔은 그 것이었다.

‘나 유운일은 또 무언가. 그 이름 모를 소녀와 다른 점이 있는가? 지옥의 입구에서 발버둥치며 얻은 것은 오직 아버지와 선대의 유한을 풀기 위해 남을 쓰러트리는 능력뿐이 아니었던가?’

유운일의 눈앞에 신창의 식솔들이 떠오른다. 소중한 이를 잃고 울부짖는 그 처절한 모습……

한 순간, 숨쉬는 것만큼 자연스럽던 현천기공의 흐름이 역류하기 시작했다. 심마(心魔)가 드는 순간 그 흐트러진 마음처럼 그의 체내의 기운들이 제 위치를 잃은 것이다. 운기행공 중 심마에 빠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무를 닦는 이들 에게 가장 치명적인 주화입마에 빠질 수도 있다. 폐인 아니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것이다.

다음 순간, 울컥하고 그의 입에서 선열이 뿜어져 나왔다. 이어 그의 전신이 균형을 잃고 거센 폭포수에 밀려 바위 아래로 미끄러지고 말았다.

아차하는 순간에 그는 짙은 어둠, 심연의 공간에 떠 있었다. 마치 태초의 어둠처럼 짙고 한없이 깊은 어둠이었다.

‘이놈! 무얼 하고 있는 것이냐!’

‘아버지……?’

꿈결처럼 그의 선친의 모습이 그 어둠 속에 떠올랐다.

‘못난 놈… 너는 벌써 나와 선대의 유한을 잊었단 말이냐?’

‘아닙니다. 아닙니다 아버지 운일은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 놈이 이런 못난 꼴을 보이느냐? 이제 겨우 선대의 안배가 펼쳐지려는 순간이 아니냐.’

‘하지만… 하지만 아버지 그들은 뭡니까? 제 손에 죽은 그들은… 저는 제 손으로 저와 같은 이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 가문의 유한 때문에 다시 무수한 원혼을 만들어야 한다면… 그렇게 무가를 이룬다고 무슨 의미며 자랑이 있겠습니까

?’

‘운일아. 너는 나와 네 조부를 그렇게 작고 이기적이라 생각했느냐?’

‘그렇다면…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몇 대에 걸친 안배로 저라는 놈을 만들어낸 진정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리석구나. 너는 이제 시작한 것이 아니냐. 벌써부터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한다면 어찌되겠느냐.’

‘하지만 그건……’

‘가라! 가서 더 부딪치고 느끼거라. 나와 네 조부께서 문(文)이 아닌 무(武)를 네게 남긴 이유를 스스로 알아보거라.’

‘아버님……’

선친의 영상이 사라져 가면서 반짝하고 그의 의식이 되돌아왔다. 그제 서야 목구멍으로 꿀렁거리고 넘어가는 액체를 느꼈다. 바다, 연옥도의 만겁회에서 단련된 운일의 육체는 거의 기계적으로 물살을 가른다. 웅덩이 밖으로 기어 나온 그는 숨을 돌리자마자 다시 처음의 바위 위로 향했다.

‘하지만… 하지만 아버님. 어리석은 저는 아버님의 깊은 뜻을 아직 짐작도 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다만 두려운 것입니다. 저희와 같은 이들을 하필 제 손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선친의 유한과 그 동안의 회의 사이에서 고뇌를 거듭하며 그는 차츰 침식을 잊었다. 그러나 다시는 선친의 영상이 그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심마에 빠져 본 환영이 아니라 실제로 선친의 영혼이 잠시 다녀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대신 그 손에 죽은 천검이며 신창 등의 인물들이 끊임없이 그 앞에 나타났다. 때로는 그를 원망하는 모습으로, 때로는 한없는 냉소로써 그를 비웃는 모습으로… 그리고 그 사이사이 얼굴도 모르는 그들의 식솔들이 나타나 그를 저주하기도 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살짝만 건드려도 쓰러질 듯 심신이 쇠약해진 어느 날이었다. 그는 반가운, 너무도 그리운 이를 만났다.

‘운일아.’

‘혀… 형님?’

‘그래 나다. 호.’

‘호형님… 어떻게 여기에? 형님은 지금 연옥도에……’

운일은 이때 이미 환영과 현실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극도로 혼란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아우는 아주 태평하군 그래. 이 형은 아주 바쁜데.’

‘무슨……?’

‘아우에게 줄 근사한 신공을 연구중이지.’

‘형님 전……’

‘왜? 별로 흥미가 없는 모양이지? 아니면… 날 원망하고 있는 건가?’

‘왜 그런 말씀을, 제가 왜 형님을 원망하겠습니까?’

‘아니야 원망하고 있어. 내가 가문의 무거운 짐을 아우에게 모두 짊어지게 했다고……’

‘아닙니다. 운일은 그런 게 아닙니다.’

‘원망하고 있잖아. 장남이 모든 짐을 둘째에게 떠 넘겼다고.’

‘아닙니다. 아닙니다.’

갑자기 유운호의 환영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좀체로 보지 못한 호쾌한 모습이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거지?’

‘형님 전……’

‘뭘 그렇게 두려워하지? 천하의 유운일이?’

‘그건……’

‘그럼 하지마.’

‘예?’

‘하지 말라고. 가문의 유한 같은 거 신경쓰지 말고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데로 살면 되잖아. 안 그래?’

‘형님?’

환영인지는 몰라도 유운호의 표정은 결코 그를 비웃는 다거나 원망하는 것이 아니었다.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며… 그러면서도 기를 쓰고 남을 쓰러트리고 죽이기까지 하는 것이 결국 선대의 안배 때문이라면… 그게 싫었던 거 아니야?’

‘형님… 전……’

‘흐르는 데로… 느껴지는 데로 행동해. 그게 너 다운 거지. 그렇게 자유로운 영혼이 내 아우 운일이지… 하지 만 나도 알고 너도 알지… 처음부터 너는 자유로운 영혼……’

‘혀, 형님. 잠깐만…….’

사라지는 유운호의 환영을 향한 마지막 외침은 실제의 소리가 되어 운일의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그 자신의 목소리에 그의 의식은 반쯤 깨어나 있었다. 꿈결처럼 사라진 유운호의 마지막 말이 그의 머리 속에서 빙글빙글 원을 그린다.

‘너는 처음부터 자유로운 영혼……’

‘넌 뭐지 유운일? 넌 선대의 대리인생에 불과한 자인가?’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에게 다그친다. 그러나 이제 그는 망설이지 않는다.

“아니. 난 나 일뿐. 누구도 아니야.”

‘그러나 넌 지금 선대의 유한 때문에……’

“선대의 유한이 공맹을 논하는 학자였다면 나는 호형님에게 맡기고 달아났을 거야.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나 자신이 원하는 일이지… 안 그런가? 내 얄미운 자아여.”

‘넌 그렇다면 네 자신의 의지로 살인한 것이며 앞으로도 무수한 인간들을 죽일 것인가? 그럼 넌 악마로구나.’

두 번째 목소리는 달랐다. 그를 가장 괴롭히던 원혼의 목소리였다.

“악마라… 그럴지도 모르지.”

‘드디어 인정하는 것인가?’

운일의 입가에 특유의 냉소가 피어오른다.

“난 싸움이, 그대들처럼 강한 상대를 만났을 때 솜털 하나 하나까지 곤두서는 듯한 긴장감이 좋아. 그게 악마라면… 악마가 되어도 좋겠지.”

‘……’

유운일은 마침내 자신의 깊은 내면에 감추어져 있던 모든 것을 밝은 햇살 아래 내어놓은 것이다.

“이것은 나의 길… 선대의 안배에 의해 지니게 된 무공들… 형님이 지어준 패도광협이란 명호… 그러나 이제는 나의 것. 내가 가고 내가… 책임진다.”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나듯 그의 의식이 활짝 열리며 현실의 세계로 돌아와 있었다.

“형님… 형님의 말대로 였습니다. 아우는 지금껏 남에게 책임을 돌리는 못난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무의식중에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있었다. 내려 꽂이는 물줄기가 전신으로 느껴진다. 그의 머리며 어깨에 부딪히고는 눈앞에 아롱지는 물방울들과 모든 것이 너무도 신선한 감각을 주고 있다. 그의 머리 속은 거짓말처럼 맑고 뚜렷했으며 그 표정은 마치 새벽의 첫 햇살처럼 빛나고 있었다.

웅덩이 한 켠에 정갈하게 개어진 그의 의복은 그때까지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약간 엉겨오는 듯한 그 촉감에 그는 그것이 오랜 시간 이슬과 햇살과 모든 것에 노출되어 있었음을 느낀다.

‘얼마가 지난 걸까. 여기에 온 후 나는 시간의 흐름을 잊고 말았구나.’

“그동안 수고했네.”

혼잣말처럼 그렇게 유운일은 말했다.

“그만 나오게 친구.”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그는 아직도 환영을 보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었다.
유운일의 뒤쪽 숲이었다.
대낮에도 그 빛 때문에 생긴 그림자.
그 어둠 속에서 한 인영이 마치 유령처럼 떠오른다.
유운일이 천천히 몸을 돌리자 3-4장 정도에 냉막한 얼굴의 흑의 사내가 서있다.
일전, 홍의 소녀의 할아버지로 위장하여 그를 노렸던 그 살수였다.

“줄곧 호위를 서줘서 고마웠네.”

그의 말에 흑의 사내의 안색이 크게 일그러진다.

“당신이 진정 주화입마에 빠진 것임을 알았다면……”

“날 베었을 거란 말이지?”

사내의 안면이 움찔 경연을 일으킨다.

“내가 정말로 주화입마에 빠진 것인지… 반격할 여력이 있는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아 이제껏 거기에 있었단 말인가?”

문득 유운일이 피식 웃는다.
사내는 일순 참담한 얼굴이 되어 버렸다.
검신을 쥔 손목이 부르르 떨고 있다.

“내가… 살수로써의 자격을 상실한 것은 사실이오.
하지만 지금의 당신이라면 벨 수도 있소.”

유운일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진다.

“그럴 수도 있겠지. 내 육체는 지금 최악….
그대의 일검이나 받을 수 있을는지…….”

사내는 입술을 깨문다.
검신을 쥔 손, 아니 전신을 가늘게 떨며 운일을 노려보고 있다.

“한번 해 보게.”

유운일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사내의 검이 폭발적으로 뽑혔다.

“으아아~!”

사내는 단발마적인 괴성을 앞세우며 유운일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조금 전까지 운일이 있었던 허공으로 그의 일검이 그어졌다.
그리고 이 검, 삼 검이 마구 그 뒤를 따른다.
삼류 무사의 그것처럼 단순하고 의미 없는 몸짓이었다.
허공에서 살짝 원을 그리던 유운일의 신형이 한 줄기 지력을 쏘아 그의 등 뒤 견정혈을 친다.
사내는 무너지듯 앞으로 스러져 버렸다.
그의 뒤쪽에 선 유운일은 작게 혀를 찼다.

“살수로써 그 능력에 대한 회의 때문인가?”

쓰러졌던 사내가 검을 지팡이 삼아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있다.

“아니면… 그대의 주인이었던 자에 대한 충성심,
그의 원한을 풀 수 없다는 좌절감 때문인가?”

사내가 비틀거리는 몸을 간신히 가누며 그를 향했다.

“둘 다요…. 당신에게 패해 죽음을 당한 사마지존은 사파의 절대자.
나는 실패했지만 모든 사파인이 언제까지고 당신의 목숨을 노릴 것이오.”

“이상하군. 왜지?”

“왜…냐? 그 이유를 지금……”

“사마지존은 강했어. 그렇지만 내가 조금 더 강했지.”

“…….”

“자네도 조금만 더 빨라지면 날 죽일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니… 조금 더 해 보라구. 친구.”

말을 마친 유운일은 그대로 돌아서 발걸음을 떼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은 순식간에 숲 사이로 미끄러지며 작아지고 있었다.

‘무탄력 경공? 아니 어쩌면 전설의 육지비행술(陸地飛行術)인지도……’

살수계의 일류 중 일류로 꼽히는 이 염동수란 인물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고 멍하니 유운일이 사라진 쪽을 보고 서있었다.
자객… 살수의 능력에 있어서 목표에 대한 추종술은 살상수법만큼이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는 물론 그 방면에도 타에 추종을 불허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객잔을 나선 이후 일체의 흔적도 없이 사라진 유운일을 이 오악산 깊은 곳에서 찾아낸 것은 열흘 전이었다.
공교롭게도 유운일은 운기행공 도중 심마에 빠진 상태임을 알 수가 있었고 일검이면 그의 숨통을 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당금 최강으로 꼽히는 패도 광협을 자신의 손으로 해치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갈등했다.

객잔에서 지예수에게 보인 그 터무니없을 정도의 인간적인 모습…
바늘 끝 하나 들어갈 틈도 없어 보이는 철인의 모습에 여인네 같은 감성,
그 극과 극을 한 몸에 가지고 있었다.
어느 쪽이 진짜일까…
어느 쪽이 이 인물의 진면목이란 말인가.
물론 강호에는 별의별 기인이사가 다 존재하며
그 성격의 괴이함을 이해하기란 그 당사자도 불가능할지 모른다.
문제는 그런 그를 죽이는데 왜 자신이 망설이고 있어야 하는 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었다.

“조금만 더 하면… 되겠다고?”

중얼거린 염동수는 유운일이 사라진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염동수는 조금만 더 그에게 가까이 가볼 생각이 있었다.

숭산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그리 넓지 않은 외길 반대편은 이리 저리 갈라져
그 하나 하나가 중원 여기저기와 연결되어 있지만
지금 유운일이 접어든 이곳은 그 끝에 오직 숭산으로 오르는 길 하나 뿐이었다.
천축의 달마대사 이후 천하 무림의 본산으로 얘기되는 소림사가 위치한 바로 그 곳이다.

‘사마지존…. 중원 출두 이후 가장 힘든 상대였던 그가 바로 소림 출신이라 했다.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세간의 얄팍한 소문만을 믿고 이 소림을 무시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유운일이 연옥도에 들기 이전부터 이미 이백 몇 십년 동안을 소림은 침묵하고 있었다.
본래 무림의 역사 속에서 당시의 천하제일인을 꼽을 때
세인들은 아예 소림의 고승들은 제외시켜 따로이 천외천으로 추앙했었다.
그 고승들은 하나같이 유명한 달마역근경을 일부나마 채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일부의 달마역근경의 위력이 강호의 인물들에게 실로 엄청난 것이었단 탓이다.
그런 소림이 이미 삼백 년 가까운 세월을 침묵하고 있었다.
여기엔 여러 가지 원인을 들 수 있으나
근원적인 것은 달마역근경이라는 그 희대의 기서(奇書)와 소림의 인재 부재에 있었다.
달마대사가 불문의 진리와 무의 근원을 합쳐 기술했다는 역근경은
그 해석이 어찌나 어려운지 일반무인은 물론 엄두를 낼 수가 없었고
불법에 능한 고승들도 극히 일부나 혹은 아예 이해를 하지 못한다는 것.
다시 말해 지난 삼백 년이 가까운 세월 동안 그 일부의 채득이 가능한 재능의 승려조차 나타나지 못한 셈이다.
차츰 소림의 권위는 상실되어 갔고
50년 전 ‘밀궁’ 이라는 세외의 방파가 일으킨 혈난 때는
장문인 이하 수많은 승려가 몸으로 떼우다시피 막은 장경각 만이 제 모습을 남겼을 뿐
거의 전 소림이 불타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이후 무림맹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옛 모습을 회복하긴 했으나
그것은 겉모양이었을 뿐, 속으로는 이미 무림성지로서의 권위는 땅바닥에 떨어진 지 오래였다.
거기다가 소림에 뒤늦게 나타난 인재가 오히려 소림의 쇠락을 부채질할 줄이야.

그 인재라는 것이 바로 나중 사마지존이라 불리게 된 현무였다.
22세라는 다소 늦은 나이에 소

림에 입문하였으나
그 후 불과 7년 만에 소림의 나한동 18관문을 모조리 돌파한
그의 무에 대한 천재성은 일찍부터 주목받았다.
그러나 불자로 대성할 그릇이 못된다 하여
달마역근경은커녕 나이 삼십을 넘기고 입문 10년이 넘도록
자신이 돌파한 18나한의 자리조차 정식으로 얻지 못한 그는
거기서 역심을 품었고 결국 어느 야심한 밤에 장경각에 침투하기에 이르렀다.
발각되어 쫓기기 시작한 그의 품에는 이미 역근경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회수하기 위해 바쳐진 소림 무예승들의 희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당시 그는 개개인으로 보면 이미 소림 무승들 중 최 정예라 할 수 있는 18나한들은 물론
당시 장문인이었던 지명대사조차 일축할 정도의 무공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 18나한과 동시에 맞닥트린 그는
108나한진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18나한진에 걸려 큰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18나한진도 그를 완전히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혈전을 치루는 동안 그의 품에서 떨어져 나온 역근경을 회수한 것만으로 만족하며
나한승들은 도주하는 현무의 뒤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때 이미 나한승들 중 7인이 그의 손에 죽음을 당했으며
나머지 인원도 각각 큰 부상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3년, 끈질기게 무승들을 보내 그를 찾던 소림의 원로들은 뜻밖의 소식에 경악해야 했다. 파견된 무승들이 결국 관서의 오지에서 그를 찾아낸 것까지는 좋았으나 놀랍게도 추리고 추렸던 무승 35인이 그 한 명에게 순식간에 전멸을 당한 것이다. 완전히 회수되었다고 믿었던 역근경의 위력이었다. 이 천재의 머릿속에 이미 그 내용이 복사된 역근경 72수 중 33수가 그의 손에서 펼쳐졌음을 전해 받은 소림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는 당시 소림의 장로 중 한 명이자 그 현무를 처음 거두었던 사진선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 만으로도 짐작이 갈 것이다. 어쨌건 현무가 이후 사파의 거두들을 하나씩 제압하고 급기야 스스로를 사마지존이라 칭하고 사파의 절대자가 된 이 사건으로 소림의 명예는 한번 더 흑탕물 속에 뒹군 셈이었다.

‘그 사마지존 현무… 그가 역근경의 수를 쓰기 이전에도 그는 강했다. 그 것만으로도 그는 이전까지 내가 상대했던 고수들과 자웅을 겨룰 만한 고수였다. 첫 상대였던 천검을 베었던 것은 내가 실전 경험이 없었던 탓이었다. 그 이후부터는 상대의 목숨을 앗기 전에 굴복시키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현무에게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유운일은 사마지존과의 힘들었던 대결을 떠올렸다. 팽팽하게 호각을 이루던 승부, 서로가 서로의 무공에 감탄하며 더더욱 전의를 불태웠고 눈 깜짝할 사이 3000여 초를 겨루었다. 갈수록 땀에 절은 전신에 그 광기를 더해가던 현무가 역근경 33수를 펼침으로서 승부의 균형이 깨어지던 그 순간, 그 순간을 회상하며 유운일은 자신도 모르게 전율한다.

‘그때… 그 절대절명의 순간에 아직 채 완성하지도 않았던 마황파천도의 11식, 괴룡승천과 생사금마도결의 제5결을 응용한 임기응변의 수가 먹히지 않았다면 그 갈대밭 위에 싸늘히 뒹군 것은 나였을 것……’

현무와의 일전은 그전까지의 상대에 의해 조금씩 자라던 자만이란 치명적인 독초를 그의 마음속에서 몰아낸 계기가 된 것이다. 거기다 그 이전부터 그를 괴롭히던 심마까지 극복한 지금 그는 정신적으로 처음 연옥도를 나설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진일보한 상태였다.

그는 경공을 쓰지 않고 천천히 걷고 있었다. 조금씩 숭산이 자신 앞에 다가온다는 생각이 그에게 거센 투지와 함께 전신의 신경세포 하나하나까지 살아 꿈틀대는 기묘한 쾌감마저 주고 있다.

‘아무리 쇠락했다 입방아 질을 당하고 있다 해도 1000년 소림은 역시 소림. 기형적이나 어쨌든 현무라는 존재를 탄생시킨 천하 무예의 본산…. 거기에 내가 가고 있는 것이다.’

유운일의 굳은 입술이 비틀려지며 거기에 미소라 부르기도 어려운 야릇한 표정이 떠오른다. 광기…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기운이었다. 오악산에서의 깨달음으로 스스로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기 시작한 그의 타고난 전사로서의 기질인 것이다.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더더욱 불타오르는……

유운일이 소림의 무승들과 처음 맞닥트린 것은 그가 아직 경내로 들어서기 전이었다. 소림승들은 나는 듯이 비탈길을 달려 내려오고 있었다. 마주 올라오는 한 청년을 발견한 선두의 승려가 신호하자 10여 명의 승려들이 일시에 신형을 멈추어 섰다. 하나같이 젊은 장골의 무승들이었으며 그 눈빛이 영기에 차있어 소림의 젊은 기재들임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처음 신호했던 삼십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승려가 유운일에게 정중히 합장하자 유운일은 걸음을 멈추고 마주 합장한다. 어릴 적 그의 어머니를 따라 다녔던 사찰에서의 예의를 그는 잊지 않고 있었으며 그 태도의 자연스러움에 소림승들의 경계 어린 눈초리가 조금 풀어지고 있다.

“아미타불…. 실례하지만 시주께선 지금 어디로 가시는지요.”

“이 길은 소림으로 가는 길로 알고 있소. 내가 잘못 듣지 않았다면.”

유운일이 일견 병기를 메고 있어 경계했으나 정갈하고 준수한 용모의 청년인 데다. 그 전신에서 풍기는 기품을 느낀 그는 유운일이 명문무가의 도련님인 것으로 생각하고 자신도 새삼 태도를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소승은 나한장 우공이라 합니다. 시주께선…….”

그는 먼저 자신의 법명을 밝힌다. 그 지위까지 밝힌 것은 상대도 그렇게 하라는 암시인 것이다.

“오공 스님… 나는 유운일이란 사람이오.”

그가 이름만을 밝히자 나한장 오공은 약간 눈살을 찌푸린다. 그가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신분을 숨긴다고 생각한 것이다.

‘풍기는 기품으로 보아 결코 무명소졸은 아닐듯한데 신분을 밝히길 꺼리는구나.’

패도광협이란 이름은 모르는 이가 없었으나 그의 본명은 아직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던 탓도 있었고, 게다가 시종 잔잔한 미소를 띄우고 선 이 준수한 청년을 당금 무림에 새로운 공포로 떠오른 패도광협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소풍을 나온 청년처럼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운일은 그 앞에 늘어선 승려들을 본다. 오공의 뒤에선 젊은 승려들은 18나한의 관문을 연마 중인 자들이었다. 그들의 양손에는 처음부터 무거운 물통이 들려져 있었고 그 물통의 바닥은 연필처럼 뾰족한, 바닥에 놓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고 물통의 한쪽 면, 즉 그들의 몸쪽으로는 뾰족한 대창 같은 것이 붙어 있었다. 그것을 계속 들고 있으려면 양손을 수평으로 쳐든 자세여야만 하는 것이다. 오공과 운일이 대화하고 있는 중에도 그들은 흔들림 없이 그 물통을 들고 있었다. 물통에는 물이 가득했고 그들은 가파른 산비탈을 달려왔건만 흘린 흔적은 보이지 않고 있다. 그것은 유명한 소림승들의 육체 단련법이었으며 그 물의 남은 양이 이미 상당한 경지의 수련을 쌓은 승려들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시주께선 폐사에 무슨 볼일이 계신지요.”

오공이 묻자 운일은 한 걸음 더 그를 향해 떼며 말한다.

“내가 패도광협이란 사람이라면 무슨 일인지 짐작이 가겠소?”

패도광협. 그 명호를 말함과 동시에 대경한 오공의 신형은 퉁겨지듯 뒤로 물러선다. 그와 동시에 다른 승려들 역시 실색하며 몇 걸음씩 물러나자 운일과 그들의 사이에는 7, 8장 정도의 거리를 두게 되었다.

“저, 정녕 당신이 그 패도광협이란 말이오?”

오공이 소리치자 유운일의 얼굴에 빙그레 웃음이 떠오른다.

“다행히 내 명호가 이곳까지 알려졌구려. 무안을 당할까 걱정했는데…….”

오공은 순간적으로 믿기지가 않았는지 멍하니 있다가 유운일이 태연히 계단을 밟아 올라오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거칠게 일갈했다.

“나한반 승려들은 저 마두를 막아라.”

일단 나한반에 들고 수련 시간이면 한시도 물통을 놓지 않았던 탓에 승려들은 잠시 망설이다

가 조심스럽게 물통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그 모양을 보며 운일이 미소 짓자 오공은 더욱 크게 그들을 재촉한다.

“뭣들 하는 거냐. 저 마두를 막으라는데.”

그제서야 나한승들은 황급히 물통을 놓았는데 개중에는 팽개치듯 하는 자가 있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수십 개의 물통이 땅바닥에 구르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 소림에 원한을 진일이 없는데 이렇게 대해도 좋은 거요?”

계단을 굴러내려 오는 몇 개의 물통을 슬쩍 피하며 약간 굳어진 안색으로 운일이 말하자 오공은 가소롭다는 듯이 외쳤다.

“천검대협을 비롯한 수많은 정파인사들을 해친 마두가 무슨 할말이 있다는 거냐? 차제에 너를 징계해 무림정도를 세우겠다.”

킥! 하고 운일이 웃는다.

“무림정도? 소림의 떨어진 명성을 다시 세우고 싶으신 거 아니오?”

오공은 그 말에 약간 찔끔한 기색이더니 더욱 대노하여 자신이 먼저 신형을 날리며 일갈했다.

“이 마두. 감히 그런 망발을……!”

그 공세를 올려다보는 운일의 입가에 기묘한 미소가 지어진다. 흥미로운 일을 시작한 어린아이의 표정이었다.

아래의 소동을 짐작도 못한 채 숭산 소림은 보통 때와 별다른 것이 없는 일상이 흐르고 있었다. 숭산 중턱에 자리잡아 그 넓이를 측정키 어려울 정도로 많은 전각과 마당이 존재하는 소림사 내에서 가장 크고 눈에 띄는 곳이 있다. 그 크기가 거대한 성문을 연상케 할 정도로 큰 입구 양쪽에는 불가의 수호신을 표현한 돌 조각이 세워져 있었고 그 옆에는 돌 조각을 닮은 인상의 건장하고 늠름한 기상의 승려가 한 명씩 긴 봉을 들고 서 있었다. 그들 머리 위의 현판에 뚜렷히 새겨진 세 글자는 대웅전(大雄展). 숭산 소림의 중심부이자 성지인 대웅전인 것이다.

그 대웅전의 입구에 몇 명의 인영이 나타난다. 한 명은 흰 수염과 눈썹이 가슴까지 내려온 중후한 인상의 노승이었고, 또 한 명은 그보다 수염이 짧으며 회색인 강한 인상의 중년 승려였다. 그리고 어딘지 기묘한 인상의 노파 한 명이 그들의 약간 뒤쪽에 따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노승의 옆에 걸어나오고 있는 젊은 여승…….

그녀는 비구니임에도 특이하게도 면포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가 지닌 매력을 감추지는 못했다. 면포 위로 드러난 두 눈은 마치 밤새 내일 백설 위에 놓여진 한 쌍의 보석 같았고 그 속에 강한 신념과 꿈꾸는 듯한 감성의 빛이 어우러져 있었다. 백의 정장으로 감싸져 있으나 그 몸매가 극히 빼어남은 누구나 알 수 있었으며 걸음걸이며 작은 몸짓 하나하나가 조용하면서도 기품이 있어 보기가 좋았다. 다만 그 안색, 면포 위의 눈가가 그다지 밝게는 보이지 않았는데 그것은 지금 그들이 나누고 있는 대화의 내용에서 기인한 듯하다.

젊은 비구니는 대웅전을 나서자마자 어떤 이야기를 꺼냈는데 조용히 그것을 듣던 두 승려, 소림 내의 지위가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는 이들이 중간중간 놀라움을 표하더니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점점 더 안색이 창백해지는 것으로 보아 의 얘기가 심상치 않은 것인가 보다.

“두 분께선 이 일을 어찌 보시는지…….”

이윽고 얘기를 마치고 그들의 의견을 묻는 여승의 목소리는 흡사 명공의 악기에서 연주되는 음악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역시 밝지는 않았다.

“…신니의 말대로라면 그들이 다시 야욕을 드러내고 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 같구려.”

노승의 안색은 지극히 창백했으며 목소리가 떨려 나오고 있었다. 가라앉은 한숨을 몰아쉬던 노승이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대웅전의 반대편에 서있는 웅장한 모습의 불상 쪽을 보았다. 그 시선이 침통한 빛을 띠며 초록빛의 불장을 쥔 오른손에 힘이 들어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 악마의 무리들이 소림을 피로 더럽히던 때가 이미 50여 년이 흘렀으나 빈승의 눈에는 어제 일처럼 선하기만 하오.”

노승은 그가 아직 젊었던 당시가 회상되는지 불심에 가득 했던 두 눈에 노기와 울분의 빛을 띄우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스스로의 마음에 거리낌이 있는지 한 손을 들어 불상을 향해 염불을 외었다.

“아미타불…….”

그런 노승을 보며 주위의 인물들의 표정이 더더욱 무거워진다. 이 노승의 오른손에 들려진 녹색의 불장…. 그것은 바로 전 소림 제자들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신물, ‘녹옥불장’이었다. 이 노승이 바로 소림의 제 29대 장문인인 몽인 대사인 것이다. 그 옆의 중년 승려, 현원이란 법명의 승려는 생각했다.

‘그때의 참상이 얼마나 참혹했으면 불심 깊은 방장께서 저런 반응을 보이신단 말인가……’

현원의 안색 또한 그만큼 어두워졌다.

“그때는 강호의 수많은 문파들이 같은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했지요.”

약간 뒤에서 따르던 노파였다. 노파는 약간 앞으로 나서 일행과 마주하더니 말을 이었다.

“……본파 또한 예외는 아니었지요.”

몽인 대사와 현원은 고개를 끄덕인다. 백발에 쭈글쭈글한 주름이 잔뜩 잡혀 있는 데다 그 눈빛이 날카로워 일견 흉칙해 보이기도 하는 이 노파를 두 사람은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아미파의 놀라운 무공과 살신성인이 없었다면 싸움의 형세는 장담할 수가 없었을 것이오. 빈승은 항시 아미의 전대 장문인과 사령파파께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 있소.”

노파는 몽인 대사가 합장하며 말하자 문득 그 얼굴에 부드러운 기색을 만들며 마주 고개를 숙였다.

“대사께선 아직도 본녀를 그렇게 부르시는군요. 이미 60년이나 전에 버린 이름이거늘…….”

노파가 웃으며 말하자 몽인 대사는 큰 실례를 했다는 표정으로 사과한다.

“용서를, 파파께선 이미 오래 전에 사를 버리고 정을 취하신 분인데 빈승이 그만…….”

“별말씀을, 용서라니오. 명호가 무어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오랜만에 들으니 감회가 새롭긴 합니다만 앞으로는 그냥 전노파라고만 불러주시지요.”

“아미타불…….”

몽인 대사보다 훨씬 고령으로 보이는 전노파는 본시 칼칼한 목소리인 듯 했지만 지금은 음성에 부드러움이 섞여 있었고 표정도 달관한 듯 초연해 보였다. 이 전노파는 본래 보통 인물은 아니었다. 한때는 사령파파라는 별호로 악명을 떨친 바 있는 희대의 마녀였는데 60년 전 아미파의 자령신니에게 굴복하고 감화되어 이후 악행을 멈춘 것은 물론이고 밀궁의 혈난 때는 아미파와 함께 정의 편에 섰던 것이다.

“밀궁주 마후혈신의 마공은 그야말로 전대미문… 본파의 선대 장문께서 동귀어진의 수를 썼음에도 그를 죽이지 못했으니…….”

전노파도 그때를 회상하자 감정이 동하는지 눈가가 가늘어지며 침통한 목소리를 낸다.

숭산 소림의 장문과 사령파파가 되살리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동요하는 기억… 그것은 사실 강호의 전대 고수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끔찍한 악몽이었다. 전노파가 언급한 마후혈신이란 인물… 그가 바로 무림 역사상 최강의 세외 세력으로 평가되는 밀궁의 주인이었다.

50년 전, 세외에 난립하던 세력들을 일통하며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밀궁은 그야말로 파죽의 지세로 전 중원을 유린했었다. 말 그대로 시산혈해… 시체로 산을 이루고 피가 바다를 이루었다는 표현에 한치 어긋남이 없는 참상이 그들 손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지금도 지옥의 악마로 대변되는 밀검대가 지나간 자리에는 통곡의 울음소리조차 남지 못했다고 하며 밀궁주 마후혈신의 가공할 마공 앞에 쓰러진 전대 고수들은 셀 수조차 없었다. 사마외도와 정파의 연합, 그 유래없는 연합이 아니었더라면 그때 중원은 속절없이 밀궁의 손아귀에 떨어졌을지도 몰랐다. 그때… 밀궁이 세외에 바탕을 둔 집단임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그를 동류로 여기어 침묵하던 대다수의 사마외도가 중원맹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뭉쳐지며 전세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다 아미파의 장문인이 죽음으로 밀궁주에게 입힌 부상은 밀궁 전체에 치명적이었다. 부상으로 무공마저 상실한 마후혈신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채 결국 세외로 도망쳐가기에 이르렀다. 중원에 피보라를 그리던 밀궁인들 도 대부분 이때 땅속에 매장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로부터 50여 년이 흐른 지금 다시 그 밀궁의 부활에 대한 얘기가 나온 것이다.

“…아미파의 혜안이 없었다면 여전히 중원은 그들의 부활조차 모르고 있었을 것이니 실로 부끄럽고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현원이 나서서 현 아미파의 대표인 청명신니에게 감사를 표했다. 무공은 물론이고 불심과 학문이 깊어 차기 장문의 물망에 올라있는 승려 현원은 그녀의 시선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고 차분한 표정이었다. 면포에 가려져 얼굴 중 두 눈망울만이 보이는 그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강호에 나타난 이후 숫한 사내들의 홀린 듯한 시선을 의식해야 했던 청명신니는 그런 현원의 태도에 일종의 감명을 받고 있었다. 그녀는 면포 안에서 한번 살짝 웃는다.

‘무공 또한 현 소림의 최고라 들었는데… 차기 장문으로 이런 인물이 있다는 것은 소림의 역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반증……’

“본파는 비록 마후혈신 묘금황이 무공을 잃었으며 대부분의 세력이 괴멸되었다고 하나 완전한 멸절은 아니라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항시 세외의 동태를 관찰하고 있었지만…….”

청명신니가 말꼬리를 흐리자 전노파가 그 뒤를 이었다.

“밀궁의 부활은 오랜 세월 감시하던 본파의 시각에도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은밀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이 이미 이 중원 깊숙이 침투해 있음을 안 것도 고작 몇 개월 전이니…….”

그녀들의 말에 몽인, 현원 두 승려는 더욱 침중한 표정이 되었다. 소림을 포함한 전 중원은 그 처절한 기억을 너무 빨리 역사의 뒤편으로 밀어냈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청명신니는 드러나지 않게 주위를 살피더니 한숨을 몰아낸다.

“밀궁은 과거의 실수를 거울삼은 듯 이번엔 지극히 교활한 계략을 획책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가 알아낸 바에 의하면 이미 상당수의 밀궁 고수들이 강호에 침투해 있습니다. 저희는 무림맹 내에도 암약하는 자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의 현원에게 청명신니는 냉정하게 덧붙인다.

“솔직히 저희는 지금 아무도 믿기가 어렵습니다.”

“그 말씀은 이 소림에도 불순한 자가 있다는……?”

“꼭 그렇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50년이란 세월은 결코 짧지 않다는 것이지요.”

청명신니는 약간 샐쭉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 말에 두 승려가 얼굴을 붉히자 전노파가 끼어들었다.

“신니의 말씀은 그만큼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지난 세월동안 강호의 여러 문파들은 너무 안일한 자세로 지내왔습니다. 밀궁이 완전히 괴멸되었다고 믿은 탓이겠지만…. 이 소림을 찾을 때도 우리는 수없이 숙고했지요. 그 것을 기분 나쁘게만 생각하시렵니까?”

“…두 분이 빈승들을 부끄럽게 만드시는구려 빈승들이 아직 부족한 탓입니다.”

두 고승이 정중히 합장하자 그녀들도 마주 답례한다.

“두 분 대사님께 실례를 범했습니다. 용서를…….”

“아미타불…….”

두 승려는 말 그대로 강호의 말학 후배인 청명신니의 태도에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선재로다.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이토록 생각이 깊고 차분하니……’

사실 맞는 말이었다. 미리 경계하고 찾는다 해도 각파며 무림맹에 소속을 원하는 자들의 신분을 완전하게 파악하는 것은 쉽지가 않을 것이다. 하물며 50여 년의 세월동안 별다른 경계의식 없이 지내온 강호에 어느 정도의 인원이 숨어들었는지 알아낸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미파가 밀궁 부활을 예측했으면서도 무림맹에 섣불리 알리지 못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별다를 것이 없는 소림을 위험을 무릅쓰고 찾은 데는 따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대사께서는 최근 등장한 정체불명의 고수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문득 생각났다는 듯 청명신니가 묻는다.

“최근 등장했다면….?”

“무적검왕과 무당의 서우진인, 신창 경학원…….”

“아!”

청명신니가 몇명의 이름을 대자 현원이 가벼운 탄성을 울렸다.

“그… 패도광협이란 자를 말씀하시는군요.”

“그렇습니다. 불과 수개월동안 단신으로 강호를 종횡하며 그런 절정의 고수들을 쓰러트린 수수께끼의 고수지요.”

“그렇다면 설마 그자가 밀궁의……?”

“아직 속단할 수는 없습니다. 마검인 월문, 사마지존 등 사마외도의 인물들까지 제압하는 행각에서 의심이 가긴 합니다만.”

그녀의 말에 두 승려는 고개를 끄덕여 공감을 표한다.

“더구나 폐사의 반도인 현무는 역근경을 일부나마 채득한 자… 그를 일대일로 제압하는 것은 과거 마후혈신이라 해도 장담하기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마후혈신이 그동안 몇 단계 더 무공수위를 높였다면…….”

그 말에 청명신니가 고개를 젓는다.

“그는 알려지기로 불과 약관의 젊은이라 합니다. 적어도 마후혈신 본인은 아니지요. 본파가 조사한 바로 밀궁이 금단의 수법으로 키워낸 고수가 있다고 하니…….”

“금단의 수법이라면?”

“자세한 것은 저희도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정상적인 무공수련이 아니라 천륜을 거역하는 무서운 수법으로 만들어낸 인위적인 악마라고…….”

청명신니는 자신이 말하고도 약간 인상을 찌푸린다. 그것을 알아내어 간신히 귀환했던 아미파 제자의 처참한 몰골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아무튼 조만간 그를 직접 찾아 그 진위를 파악해볼 생각입니다. 다행히 그가 밀궁과 아무 관계가 없다면…….”

여기서 말을 멈춘 청명신니는 새삼스럽게 두 승려를 바라본다.
그 눈빛에서 두 사람은 그녀가 이제 본론을 꺼내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이 수 없는 숙고 끝에 소림을 찾았다는 말을 했을 때부터 두 사람은 어렴풋이 눈치를 채고 있었다.
인정하기는 싫어도 소림이 강호의 질서를 관장하던 황금기는 이미 아니었다.
그런 소림을 무림맹보다 먼저 찾았을 때는 나름의 뜻이 있을 것임을 짐작했던 것이다.

“이제부터 제가 하는 말을 오해 없이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아니나다를까 청명신니는 그렇게 조심스럽게 운을 띄운다.

“저희는 밀궁이 그런 악마를 만들어냈다는 것을 알고 난 이후부터 줄곧 한 사람과 하나의 기물을 찾았습니다.
저희가 알아낸 바에 따르면 그 악마는 이제까지 강호에 알려진 무공의 인식을 초월하는 가공할 존재였기에 본파나 강호의 어떤 인물도 그를 상대할 수가 없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입니다.
하여 본파에서는 오래 전부터 한 가지 체질의 여인을 찾고 있었는데… 그 건 바로 천품순음지체를 타고난 여인이었지요.”

“아, 그렇다면 설마……?”

청명신니는 불연 듯 두 승려에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두 분께서 짐작하시는 데로입니다.”

두 승려는 문제의 천품순음지체를 타고난 여인이 바로 청명신니라는 것을 깨닫고 합장하며 불호를 외웠다.
그로써 그들은 불심 깊은 자신들의 심기마저 흔드는 그녀의 마력의 근원을 알게 된 것이다.
천품순음지체, 말 그대로 전설로 내려오는 체질로서 근래 몇 백년 동안은 발견된 일이 없어 사람들에게 강한 인식으로 기억되어 있는 것은 아니나 기실 강호에 파란을 몰고 올 여지가 가장 많은 것이 이 체질의 여성들이다.
세상 음기의 정화를 그 한 몸에 지니고 태어나 스치는 모든 사내들의 영혼을 사로잡는다는, 마녀에 가까운 체질인데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초경이 시작되거나 혹은 그 전에라도 사내를 겪기라도 하면 그 마력이 부처조차 감당할 수 없으리 만치 급상승해 세상을 어지럽힌다는 것이다.
몇 백년 동안 그 예가 없다 고는 하나 당나라 때의 양귀비라든가 역사상 천하를 어지럽혔던 미인들이 그 체질로 의심을 받고 형편이었다.
또한 순품순음지체의 여인은 소림사의 대환단과 같은 극양의 영약을 복용함으로써 음기를 정화함과 동시에 일반 체질의 몇 배의 공력을 얻을 수 있다고 전해진다.

그때였다. 갑자기 들려온 타종소리가 청명신니의 말을 끊었다.

땡-땡-땡-!
단절 없는 연속 타종소리가 소림사 안 밖을 울리며 퍼져 나가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두 승려의 안색이 굳어지고 그것은 그녀들도 마찬가지였다.
소림의 위급 상황에 울리는 타종 신호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퍼퍼퍽-!
요란한 괴음과 함께 날아간 몇 명의 승려들이 땅바닥에 굴렀다.
쓰러진 그들은 꿈틀거리고는 있었지만 좀체 몸을 일으키지는 못한다.
대웅전에서 세 단계 정도 건너의 수련장이었다.
몇 수십의 승려들이 한 사내를 에워싸고 대치해 있었고 그 주위에는 그 수와 비슷한 승려들이 쓰러져 신음소리를 내고 있다.
포위를 당한 상태이나 지극히 여유로운 태도의 사내, 유운일은 시끄럽게 울리는 타종소리를 감상하듯 허공에 시선을 둔 채 그 입가에 미소마저 짓고 있다.

“너, 너…. 이 마두. 대체 소림에 무슨 원한이 있어 이런 짓을…….”

처음에 덤벼들었다가 몇 수 어울리기도 전에 일장을 맞고 쓰러졌던 나한장 오공이 간신히 몸을 가눈 채 그에게 외친 것이다.
그 말에 운일은 어이없다는 표정이 된다.

“원한? 내가 언제 그런 것이 있다고 했나?”

“그럼 도대체 왜 이런 난동을 피우는 것이냐?”

운일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더니 말했다.

“주객전도라더니 누가 먼저 시비를 걸었다는 건지 모르겠군.
하여간 이왕 이렇게 된 거 원하는 이상으로 상대해 주지.”

운일이 거침없이 한 발을 내딛자 승려들은 긴장하며 자세를 굳힌다.
이미 상대가 자신들은 물론이고 나한장인 오공까지 어린애 다루듯 하는 고수임을 본 그들이었다.
그러나 한 발도 물러서는 승려는 없었다.
그런 그들과 그 뒤에 서서 운일에게 울분에 찬 시선을 보내는 오공을 비교해서 보며 운일은 또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뭣들 하느냐. 소림의 명예를 걸고 저 마두를 제압하라.”

오공의 핏발 어린 명령에 승려들은 일시에 봉을 휘두르며 운일에게 육박한다.

“소림의 봉술은 천하제일……”

중얼거리며 운일은 신형을 움직여 스스로 어지럽게 휘둘러지는 봉들의 중심부로 뛰어들었고 그 직후, 따닥! 딱! 하는 소리가 얽힌다.
운일의 움직임에 유도된 탓도 있었으나 봉을 든 여러 명이 너무 한 점으로 몰려든 때문에 서로의 봉이 부딪쳐버린 것이다.

“헌데 어쩌다 이렇게 썩어버렸는가…….”

대경하여 황급히 물러나려는 승려들의 중심부에서 거센 장력이 사방으로 뻗쳐 나온다.
비명소리가 이어지며 서너 명의 승려들이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힘없이 땅바닥을 구른다.

“아니면… 아직 시작도 안 했는가. 소림이여…….”

중얼거리며 멈추어 선 운일에게 더 이상 덤벼드는 승려는 없었다.
200여 장 정도의 넓은 수련장에 있던 수십의 승려들 중 남은 것은 이제 오공과 단 두 명의 승려들뿐이었다.
그때였다. 여기저기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울린다 싶더니 수련장의 사방에서 우르르 소림 승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꾸역꾸역 주위로 몰려든 이들은 순식간에 수백, 아니 수천을 헤아릴 정도가 된다.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재미가 나지.”

비상사태라 하여 몰려들어 동료들이 쓰러져 있는 광경에 분노하던 승려들은 단신으로 웃고 서 있는 그가 제정신이 아닌 것으로 보였는지 이상한 시선을 주며 덤벼들지 않고 있었다.

운일은 무리의 한 부분이 갈라지며 몇몇 다른 분위기의 승려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그의 웃음이 멈추어진다.
그중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한 승려가 입을 열었다.

“….소승은 몽호라 하오. 시주는 어째서 폐사에 뛰어들어 소란을 피우는 것인지 밝히시오.”

“알고 보니 몽호 대사셨군요.”

운일이 별안간 정중히 합장하자 몽호는 마주 합장한다.

“선사님 속지 마십시오. 저자는 대마두입니다.”

오공이 대뜸 소리치자 몽호 대사는 약간 눈살을 찌푸린다.

“나한장 오공은 입을 다물라.”

엄한 목소리에 오공은 찔끔하여 입을 다물었다.

“제자의 경솔한 말이니 용서하시오.”

운일은 피식 웃으며 대꾸한다.

“그는 내게 먼저 시비를 걸었으나 때린 것은 나였으니 사과하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몽호대사의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떠올랐다.

“시주가 최근 강호에 등장했다는 패도광협이오?”

몽호대사의 물음에 놀란 것은 오히려 주위에 운집한 여러 승려들이었다. 아직 경내에 침범한 사람의 정체를 듣지 못했던 그들은 경악한다. 패도광협, 역근경의 사마지존을 쓰러트린 존재가 바로 자신들 눈앞의 젊은 청년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최근 들어 설치고 다니는 젊은 놈을 지칭하신 거라면 틀림없는 본인이지요.”

운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방의 승려들이 웅성거리며 동요하기 시작했다. 몽호대사가 손을 들고 주위를 상기하자 일순 안정되기는 했으나 불씨는 남아있었다.

‘제법 위치에 있는 승려로군’

운일은 그렇게 추측했고 사실 그는 장문인 몽인대사와 동문이자 소림 내에서 손꼽히는 영향력을 가진 고승이었다. 그는 주위를 진정시킨 후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시주의 신분이 그러할진대 도대체 무슨 의도로 폐사에 난입한 것인지 물어도 되겠소?”

“난입이라…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별로 듣기 좋은 표현은 아니구려.”

“시주! 시주가 아무리 패도광협이라는 이름으로 강호에서 행세한다 해도 이곳은 소림이오. 신중히 대답하지 않으면 폐사의 조치를 원망하지 못할 것이오.”

일순 운일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몽호대사를 똑바로 응시하며 냉냉히 대꾸한다.

“내 신분이 어떻고, 무슨 의도가 어떻다는 거요?”

그때까지 약간 빈정거리는 듯한 태도였던 운일의 목소리가 갑자기 달라져 있었다.

“내가 무슨 신분의 사람이든 그것이 소림사와 무슨 상관이지요? 또 불문을 찾은 것이 무슨 의도냐고 묻는 것은 뭐요. 소림은 불문의 사찰이 아니라다만 머리 깍고 승복 입은 것을 특징으로 한 세속의 문파였소?”

신날한 어조였다. 몽호대사는 뜻밖이었는지 잠시 말을 잃고 섰다.

“….그럼 시주는 폐사에 불공이라도 드리러온 것이란 말이오?”

“패도광협이란 놈은 불공도 못 드리게 하라고 부처께서 그러시던가요?”

“시주! 억지를 부리지 마시오. 폐사에 난입한 이유를 당장 대지 않으면…….”

“않으면! 어쩌시겠소. 몽.호.스.님.”

운일은 몽호대사의 말을 끊고는 그의 법명을 한자씩 힘을 주어 말한다. 그의 부릅뜬 두 눈은 몽호대사의 시선을 마주한 채 조금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다. 안색이 바래진 몽호대사가 뭐라 입을 열려 하는 순간이었다. 아직 약간은 웅성임이 남아있던 주위의 승려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집중되고 있었다. 몽호대사의 바로 옆 승려들이 다시 갈라서며 몇몇 인영을 위해 길을 텄던 것이다. 몽호대사와 일행은 황망히 몇 걸음 물러서며 나타난 인물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다.

“장문인께 인사드립니다.”

‘드디어 장문인의 등장이신가? …그런데… 뭐야?’

순간, 움찔하며 약간의 긴장을 보였던 운일의 표정이 이어 야릇한 빛을 띤다. 소림의 장문인이라는 노승의 뒤에 선 한 여승을 발견한 탓이다.

‘뭐야 소림사에 웬 여승이……’

운일의 의아한 시선이 청명신니의 두 눈동자와 만난다. 궁극의 강함을 추구하는 한 청년 영웅과 천품순음지체라는 희대의 체질을 타고난 여인이 처음으로 서로를 대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보이지 않는 공간에 무언가가 반짝 빛을 낸다. 두 사람 모두에게 낯설고도 이유 없는 설움이 그 속에 있었다. 그래서 그 순간 둘은 당황하였고 거의 동시에 서로를 외면한다.

‘무슨……?’

운일은 그 순간 오래된 기억 속에서 그의 어머니를 떠올린다. 그녀가 그의 어머니를 닮았는지 어쨌는지는 얼굴이 면포에 가리진 이상 알 수도 없다. 그래도 반사적으로 떠오른 것이다. 이유는 그도 알 수가 없었다.

“빈도가 소림의 장문을 맡고 있는 몽인이라 하오.”

운일은 몽인대사의 목소리를 들으며 문득 정신을 추스린다.

“빈도에게 중요한 것을 깨닫게 해준 것을 먼저 감사드리오.”

몽인대사의 말에 운일을 비롯한 모두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수많은 소림승들을 공격한 것도 모자라 몽호대사에게 괴변을 쏘아붙이던 그에게 감사라니…….

“…대사께선 지금 제게 감사한다 하신 것입니까?”

“그러하오.”

“장문인!”

몽호대사가 황망한 목소리를 냈으나 몽인대사의 손짓에 입을 다물고 만다. 처음부터 시비를 걸러 온 것이긴 했으나 경직되고 꾸민 듯한 승려들의 언행에 반발심을 돋우던 운일도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 대사…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몽인대사는 깊은 시선으로 그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폐사는 시주의 말처럼 불문의 사찰이 분명하오. 그런데도 강호의 무가들과 같은 행색을 하고 불문을 찾은 시주의 신분을 따졌으며 그 대답을 강요했소. 본래의 위치를 잠시 잊은 빈승들을 깨우쳐 준 점을 감사하며 장문의 자격으로 사과하는 바이오.”

그제서야 모든 승려들은 깨달음의 신음성을 흘렸으며 몇몇 승려들은 합장하며 조용히 ‘아미타불’을 외는 이도 있었다.

‘조금 다른 데? 장문인이라는 위치는……’

운일이 약간 멋쩍은 표정을 짓는데 몽인대사의 말이 이어졌다.

“시주는 소림에 불공을 드리러 오셨다고 했지요? 빈승이 불당으로 안내하리다.”

몽인대사는 말을 마치고 천천히 몸을 돌린다. 주위의 승려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서며 길을 만들었다.

“제길!”

운일은 욕지거리를, 그러나 악의보다는 체념과 가벼운 투정이 담긴 소리를 낸다.

“제기! 알겠소. 진짜 목적을 말하겠소.”

모든 승려들이 다시 경계의 자세를 취하는 가운데 몽인대사가 천천히 그를 향해 돌아섰다. 그 시선을 약간 비키며 운일이 말을 이었다.

“내 명호를 듣자마자 대뜸 덤벼드는 통에 좀 방식이 거칠어졌지만 이제 정식으로 부탁하겠소.”

운일은 몽인대사의 시선을 새삼 마주하더니 크게 외쳤다.

“나 패도광협 유운일은 소림의 백팔나한진을 견식하길 바라오.”

그 말에 주위의 모든 이들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떠올렸고 몽인대사 마저 뜻밖이었는지 놀란 빛을 보인다. 그의 말은 뜻밖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터무니없는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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