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1-1화 : 완전무장(完全武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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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부
1. 완전무장(完全武裝).(1)
빰빠라밤빠밤빠바아~~~~
응?
빰빰빠바아~~~
‘어-? 어랏~?’
나팔 소리가 손을 내밀어 내 몸을 흔들어 깨우기라도 한 듯 나의 상체는 어느 사이 퉁겨지듯 침상으로부터 일으켜져 있었다.
이어서 간신히 실눈 뜬 사이로 뿌옇게 흐린 시야에도 불구하고 기계적으로 잽싸게 침상의 모포를 개는 동작…을, 물론 지금은 할 필요가 없다. 나는 당연히… 다시 침상 위로 픽 쓰러져 누웠다.
빰빠라밤빠밤빠바아~~~~
이런 제기, 이 곳의 시간 흐름으로 제대한 지 벌써 1년이 넘었는데 이제 와서 또 저 군대 기상 나팔 소리로 잠을 깨야 할 줄이야!
“우이 쒸~! 내가 괜한 짓을 해 가지고……”
보드라운 비단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궁시렁대다가 결국 고개를 들어보니 창가의 탁자에 모닝 커피를 내려놓고 있던 미령이가 생글거리며 다가왔다.
“으응, 오늘도 너구나.”
“예, 곡주님. 후후~ 섭섭하셔도 할 수 없지요.”
“내가 뭐가 섭섭해? 임마.”
“미령이는 다 알지요. 대교 언니는 오늘 오후에나 복귀한답니다.”
뭐라 확실히 대꾸를 하고 싶었지만 그냥 혼잣말 비슷하게 그게 아니야…를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서고 말았다.
내가 아무리 현재 이 비화곡 내는 물론이고 강호의 모든 마인(魔人)들도 두려워하는 비화곡주의 신분이라지만 이 맹랑한 당돌 소녀 미령이는 좀 무섭다.
대교 자매들에게 강력히 실시한 ‘스스럼없는 사이 정책’이 미령이에게는 효과가 너무 좋았는지 요즘엔 이 녀석이 혹시 나 자는데 얼굴에 낙서라도 해 놓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오늘 첫 연초(煙草)는 어떤 것으로 하시겠습니까?”
“음… 오늘은 자가팔팔(自歌八叭).”
나는 그 동안 총관이 조달한 전국 각지의 담배 잎들 중 내 입맛에 맞는 몇 개를 골라서 최대한 우리 시대의 담배와 유사한 형태의 담배를 만들도록 했었다.
완성품 중 비교적 성공작이라 할 수 있는 것 하나에 내가 붙인 이름이 바로 자가팔팔… 본래 발음은 물론 ‘짜가 팔팔’이다.
담배 맛은 중간쯤 똑 부러진 담배를 수술(?)해서 기어이 피는 맛과 비슷하달까? 그래도 연초대(곰방대)로 피는 것보단 나았다.
부대에서 가지고 나온 진짜 군용 팔팔은 이미 거의 다 피고 딱 다섯 가치가 남았는데 그건 침상 밑에 잘 짱 박아 놨다.
[ 기상 직후의 흡연은 평상시보다 해롭…… ]
“닥쳐주라, 몽몽! 너… 갈수록 잔소리가 느는구나.”
[ 사용자의 신체 보호 관리는 저의 최상위 의무 사항입니다. ]
“…그려, 알긋다. 열심히 근무해라.”
[ 최근 30일 간의 주인님 흡연량이 30% 정도 늘었습니다. 주의하십시오. ]
흠… 내가 요즘 그랬나? 확실히 조금 자제하긴 해야겠군.
그나저나… 기왕 이렇게 눈 뜬 거, 모닝 커피와 함께 자가팔팔 한 대 피며 잠을 깨기에 어울리는 장소로 가봐야겠다.
비화곡주의 친위대인 혈랑대(血狼隊) 대주(隊主) 흑랑검마(黑狼劍魔) 정천우.
그 애꾸눈의 터프가이가 올린 건의서를 읽은 건 이틀 전이었다.
난 지난 번 출도 때 강호인들을 속이려 하고 요란한 가짜 곡주 행렬을 연출하는 와중에 혈랑대에게 대한민국 군가를 가르쳐 부르게 한 일이 있다.
혈랑대주는 이번에 새삼 그걸 혈랑대 정식 군가로 지정하고 싶다고 요청한 것이었다.
뭐 가사도 조금씩 바꿨겠지 별일 있으랴 싶어 무심코 허락했는데 그게 실수였다.
설마 그 당시 장난삼아 한 번 입으로 흉내내 보인 기상 나팔 소리까지 도입할 줄은 몰랐고, 더구나 그때 나는 한 가지 기본적인 사실을 깜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혈랑대 막사가 내가 사는 창천각 바로 옆이라는 사실을……
이 시간에 내 침실 반대편 방으로 가서 창문을 열면 조금 멀찍이 떨어진 혈랑대 연병장(?)에서 점호하고 있는 혈랑대 군바리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곧 그들이 부르는 우렁찬 군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아아~ 아침부터 이 무슨 대한민국 군대스런 분위기란 말인가.
게다가 이젠 그럴 필요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기상 나팔 소리에 반사적으로 잠에서 깬 건 물론이고, 연병장에서 점호하는 녀석들을 보고 있으니 나도 얼른 뛰어나가서 ‘좌로 번호! 뒤로 번호~!’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니… 몸에 밴(내 경우는 영혼에 밴.) 습관이란 참 무서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후후~ 혈랑대의 늠름한 기상은 항상 하늘을 찌를 듯하니 보는 것만으로도 믿음직하네요. 아, 오늘 식사는 이곳에서 하시겠습니까?”
“그럼 뺑이치는 사람 열 받지.”
“어머? 그럴리가요. 음… 하지만 역시 제 생각이 짧았네요. 식사하실 때 저런 살풍경을 권해드렸다니.”
요즘엔 뺑이 친다는 말도 알아듣게 된 미령이나
그 전문용어(?)는 몰라도 몸으로 늘 직접 그 용어를 실천하며 사는 혈랑대 녀석들이나
오직 예수, 아니 오직 곡주가 모토인 관계로 곡주가 뭔 짓을 한들 불만을 가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아침부터 미친 듯 산악 구보하고 있는 애들을 느긋하게 내려다보며 맛난 거 쩝쩝댄다는 건 인간적으로 할 짓이 아니지 싶었다.
아침식사를 마친 후 나는 오랜만에 오전 내내 침상에 누워 뒹굴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최근 몇 달간은 나름대로 좀 바쁘게 보낸 터라 오후의 중요한 일정을 위해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내 몸과 마음 양쪽 다 조금씩 더 긴장되고 한편으로는 소풍을 앞둔 어린아이처럼 들뜨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짓일까,라는 불안감도 불쑥불쑥 튀어 오르곤 했고
그러다가는 아냐 이건 선택이 아니라 필수야 필수~를 속으로 외치기도 했다.
간단히 말해, 머릿속이 복잡했다.
결국 난 복잡한 머리를 달래려 잠시 모종의 장소를 찾아 들었다.
사실 이 매우 개인적이고 비밀스런 장소는 아무리 천하의 비화곡주라도 자주 가면 피보는(?) 곳이긴 했지만
이번엔 다행히 때맞춰 몸이 따라 주었다.
자아~ 다시 자가팔팔 한 대 꼬스르며 명상에 잠겨 볼까나?
“저어~ 곡주님~?”
“어,야,야~!”
“아, 전 다만 어제 밤 보시던 잡서(雜書)가 밖에 있어서 전해 드릴까 해서요.”
어제 여기서 보다만 잡서라면 강호괴담(江湖怪談)인가?
그거 재밌겠…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다.
“지금 안 봐도 돼~! 너 또 여기서 말 걸면 진짜 화낼 거야~! 아니, 그냥 가서 기다려 좀~!”
“네에~!”
문밖에서 들려오는 대답에 조금 샐쭉한 음성이 섞여 있었지만 하는 수 없었다.
으… 또 지난번처럼 문 열고 들어올까 봐 조금 쫄았다.
맹랑한 계집애 같으니라구.
아무리 스스럼없는 사이라도 그렇지 지난번에 이 화장실에까지 불쑥 들어올 때는 너무 놀라서 나오던 게 도로 들어가는 줄(?) 알았었다.
좀 지저분한 얘기지만… 내가 원판과 바뀐 후 이곳에 와서 매우 곤란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화장실 문제였다.
이 창천각이라는 3층 짜리 건물 안에는 그 많은 이용 인원에도 불구하고 화장실이 극악전용 딱 하나이다.
1년 전 내가 처음 화장실을 문을 열고… 아니, 첨엔 문도 없고 화사한 커튼이 드리워져있을 뿐이었는데
그 커튼을 젖히고 들어섰을 때 나는 조금 급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한동안은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시대가 시대인 만큼 우리 시대와 같은 깔끔한 수세식 화장실을 기대한 건 아니었고
오히려 구식 퍼세식(?) 화장실을 예상했었는데 실제 상황은 다른 형태로 심각했던 것이다.
뭔지 모를 진한 향기가 감도는 실내에서 제일 먼저 눈에 뜨인 건 내 허벅지 정도 높이의 작은 탁자와
그 위에 놓여진 ‘요강’이었다.
화장실에 있으니까 요강이라고 알아봤지 그냥 방 같은 데 놓여져 있으면
화사하고 아름다운 용(龍) 문양이 새겨져 있는 고급 도자기라고만 생각했을 법했다.
그런 데다 소변을 보는 것도 상당히 부담스러웠지만 용요강(?)은 그 옆에 놓여진 물건에 비하면 약과였다.
용… 뭐라고 해야 할까? 결국 용(龍)변기…?
본래 중국인들이 용을 꽤 좋아하고 원판 극악이도 스스로 독각와룡(毒角臥龍)이라는 명호를 썼던 거로 보아
용 매니아인 건 짐작할 수 있었지만 용변기라니……!
용변기(用便器)나 용변기(龍便器)나 발음도 똑같고 용도도 같지만
극악전용 용변기는 정말 용이었다.
요강에는 표면에 용문양이 새겨진 거지만 용변기는 입체적인 조각상이었다.
정교하고 실감 나게 만들어진 명품이어서 정말이지 그 위에 엉덩이 까고 앉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숨을 폭폭 내쉬며 좁은 화장실 안을 서성대다가
결국엔 원초적 생리현상을 이기지 못하고 용변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휴지는 또 손수건 정도 크기로 잘라놓은 비단이었다.
초호화 마무리를 마치고 밖에 나와서 대기하고 있던 미소녀 시비(侍婢)가 들고 있는 작은 대야에 손을 씻으며
웬지 또 뭔가 찝찝하고 불길한 예감이 들었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 방으로 돌아가다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지극히 아름답고 우아한 자태의 여인네 한 명이 내가 사용한 용변기를 공손히 손에 들고 나오고 있었다.
뒤통수를 치고 온몸을 기어다니는 쪽팔림을 감추느라 내 X를 어디로 가져가냐고 묻지도 못하고
속으로 울고 있으려니까 한참 후 그 우아한 미녀가 면담을 요청해 왔다.
알고 보니 그녀는 의화각(醫華閣)에서 파견된 의녀(醫女)였다.
그녀에게 듣게 된 건 내 X를 분석한 결과 원판의 몸에 이러저러한 이상 증세가 추정된다,
그러니 이러저러한 음식을 삼가고… 뭐 그런 얘기였다.
“또한 일부 발견된 조각에 조금 의심가는 부분이 있어 정밀분석(?)에 들어갈까 합니……”
위의 대사까지 들었을 때 더는 참을 수가 없었었다.
“씨바~! 때려 쳐~! 쪽팔리게스리… 앞으론 내 X가지고 뻘짓거리 하면 다 죽어~!”라는 외침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걸 간신히 도로 넘기고,
그런 일 앞으론 안 해도 되니까 그냥 버리라고 심각하게 부탁(명령)했다.
근데 그때 내 뜻이 또 뭔가 잘못 전달되었었던 모양인지 그 의녀는 바로 지옥전(地獄殿)에 끌려갔다고 한다.
그녀의 이름은 ‘황예진’. 사내놈 X나 들여다보는 일하다가 엄한 누명으로 지옥으로 끌려간 의녀 황예진의 경우야말로
참 지독히도 X같은 신세라고나 할까?
뭐, 나중에는 그 황예진도 나름대로 기연(奇緣)을 만나서 X같은 운명에서 벗어나게 되지만…
하여간 그런 일들은 나중에 안 일이고 당시 나로서는 당장에 불편한 화장실 환경을 개선할 필요성을 느끼고
몇 가지 지시를 내렸는데, 그게 비화곡에 온 후 나의 첫 적극적인 활동인 셈이다.
내가 현재 앉아 있는 평번한 우리 시대 모양의 용변기가 그때 만들어진 건데
모양만 유사한 게 아니라 정말 수세식이다.
평소 물을 자동 보충해 손잡이로 작동하는 구조는 당시에 바로 만들어 내라고 하기 어려워
직접 양동이 같은 거로 물을 부어야 하지만 수세식 변기의 기본인 S자 배수로가 장착된,
이 시대에서는 그야말로 최신형 변기인 것이다.
문도 새로 해달은 다음 해우소(解憂所)라는 문패를 달았다.
3층 화장실에 서 직통으로 연결된 정화조도 건물 옆 지하에 만들어졌는데 그 모든 공사에 반나절도 채 걸리지 않았다.
비화곡 건축 전문가들의 작업 능력은 한국 공병대 못지 않은 듯하다.
그 이후로는 해우소로서의 맘 편한 화장실 사용에 있어 걸림돌은 흑주(黑蛛) 하나 뿐이었다. 그러나 원체 화장실이고 목욕탕이고 가리지 않고 붙어 다니는 녀석이었기 때문에 나도 차츰 익숙해져서 지금은 거의 인식되지도 않는다. 아, 그러고 보니 지금은 오히려 녀석이 없군.
흑주는… 지난 번 내 강호 행에서 내 경호에 실패가 많았다며 스스로 벌받기를 간청했었다. 애써 잘 달래 놓았더니 한동안 얌전했었는데 지난달에 갑자기 내게 뜻밖의 요청을 했었다. 형식은 한 달의 휴가 요청이어서 처음엔 이 놈이 드디어 자아(自我)를 찾아 가나 보 다 하고 기뻐했지만 아무래도 그게 아닌 것 같았다.
녀석은 내 곁을 떠나 고룡촌의 자기 사부들에게 돌아갔는데 거두마군(巨頭魔君)과 소살파파(笑殺婆婆)같은 마두들과 특급살수 흑주가 휴가나온 군바리와 그 가족의 애틋한 재회 장면을 연출할 것 같지는 않고…
역시 흑주는 사부부부에게 더 단련 받아 자기 자신을 업그레이드하려는 생각인 모양이다.
에구, 생각나니까 괜히 또 주변이 허전하고 보고 싶어지네. 한 달 이랬으니까 이제 돌아올 때가 되었는데… 쳇, 휴가가 아니라 어째 내가 아끼는 동생을 군대 보낸 기분이다.
거두마군과 소살파파라는 흉악한 조교들 밑에서 구르고 있을 녀석을 생각하니 영 맘이 편치가 않다. 한 이틀 정도만 더 기다려 보고 안 오면 복귀 명령을 보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