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1-2화 : 완전무장(完全武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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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2부 – 1-2화 : 완전무장(完全武裝)


  1. 완전무장(完全武裝).(2)

볼일 겸 명상 시간 후반부에 흑주 생각이 나서 조금 침체되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 것도 포함해서 긴장을 풀고 복잡한 심정을 정리한다는 목적을 어느 정도 이룰 수가 있었다. 물을 시원스럽게 부어 내리고 해우소를 나온 나는 다시 침상에 대자로 누웠다.

미령이는 옆에서 또 뭔가 말을 걸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무시하고 있었더니 얼마 후에는 얌전히 창가 테이블에 앉아 아까의 강호괴담이란 책을 읽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나는 조금씩 제대로 쉰다,라는 느낌이 들면서 눈앞 허공의 햇빛에 반짝이며 떠도는 먼지들의 움직임을 뜬금 없이 보았다. 미세한 먼지들이 마치 환하게 불켜진 어항 속의 작은 열대어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조금 더 가늘어진 눈꺼풀 사이로 어항 뒤편의 풍경처럼 흐릿하고 굴절된 기억들이 스쳐갔다.

4개월……

대교와 내가 적들로 가득한 강호 상에서 비화곡으로 복귀하는 데 성공한 후 어느 사이 그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복귀한 이후로도 대교의 생사가 걸린 일들 때문에 봄의 여신이 비화곡 안팎에 그려 놓은 수채화를 돌이켜볼 여유도 없었던 당시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어느 사이 계절이 바뀌어 창문으로 밀려들어온 햇빛이 강렬한 락 음악처럼 방안에 가득한 지금도 절혼무저갱에서 무사히 걸어나오던 대교의 아름다운 미소처럼 눈부시지는 않았다. 그녀를 영원히 잃을지 모를 순간에서야 나는 그녀의 존재가 내 속에 얼마만큼의 크기로 자리하고 있는지를 실감했던 것이다. 내가 그 전까지 고민하고 망설였던 일들의 방향을 ‘실행’으로 결정한 것도 그때였다.

사실 그전까지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항상 그녀에게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 대교가 아무리 사랑스런 소녀라 해도, 아무리 그녀와 함께 웃고 고민하며 의지하는 사이가 되었다 해도 역시 그녀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는 인식을 지울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인식은 그녀를 아직 어린 소녀로 보고 육체적 접촉을 자제한 개인적 도덕 관념보다도 근본적이며 강한 개념이었다. 물론 그 근본적인 개념… 두려움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마음은 대교와의 관계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내가 어릴 적 즐겨 읽었던 SF소설에서 내게 가장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용어가 하나 있다. 용어가 그… 타임 패러독스…던가? 타임머신을 이용해 시간을 초월한 여행이 가능해진 상황에서의 모순에 대한 SF적 논리였다. 아니, 아직 실제로 그런 일을 행하고 결과를 확인한 자가 없으니 ‘모순’이라는 표현은 적당하지 않으려나? 하여간 한 예를 들어보자.

한 인물이 과거로 이동, 과거에서 미래의 역사를 바꿀 만한 일을 벌였다고 치자. 구체적으로 그 자신의 부모가 자신을 낳기도 전에 죽어버리게 만들었다고 하자. 그럼 그 순간 그 인물은 애초에 태어나지 않은 존재가 되므로 소멸해 버리게 되는 걸까? 그렇다면 시간 속에서 소멸해 버린 그 인물이 그동안 시간에 관여한 모든 일들은? 그가 있음으로 인해서만 발생했던 모든 역사적 사실까지도 함께 사라지는 걸까? 아니면 그가 자신의 부모를 죽이는 순간 소멸하지 않고 그의 부모를 제외한 새로운 미래가 형성되어 그의 부모는 그가 죽인 자들이 아닌 다른 이들로 대체되어 그는 자신이 알고 있던 과거와 다른 과거를 가지게 되는 걸까? 혹은 위의 두 가지 가능성이 무작위로 선택되는 걸까……?

여기까지만 생각해도 단순한 타입의 두뇌 소유자들은 머리 속의 맷돌이 지나친 동작으로 스파크를 일으키며 무럭무럭 김을 피워 올릴지도 모른다. 나 역시 어릴 적이나 더 큰 다음이나 ‘타임 패러독스’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한계를 느끼고 어느 정도 선에서 포기해 버리곤 했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살면서 가끔씩 시간여행에 있어서의 여러 가능성을 생각해 보곤 한 건 순전히 상상하는 재미가 있어서였다. 그때는 어차피 내가 정말로 그런 상황에 처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으므로 흥미로운 상상일 뿐이었지만 막상 그 터무니없는 사태가 내게 현실로 다가온 이상 이건 재미 차원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타임 패러독스를 이론적으로 정리해 본 여러 가지 학설들 중에서 뭐가 진실인지 나는 모른다. 실제로 시간 속을 싸돌아다닌 미래 여자 ‘진’과 나중에 다시 만난다면 조금은 확실해질지도 모르겠지만, 몽몽도 실제 시간 워프 한 건 이번이 처음이어서 그 전에 입력된 것은 단편적인 데이터만으로는 확실한 결론을 도출할 수가 없다고 했다. 결국 지금의 난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고 일단은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이미 이루어져 있는 역사를 바꿀 가능성을 생각하여 최대한 주변에 영향을 미칠 일을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 기왕 이렇게 된 거 미래를 좀 손보고 싶다는 욕구가 있기도 했었다. 이 시대의 우리나라, 고려에 첨단 기술을 마구 전파한다던가 해서 잘 나가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만들어 버린다던가 하는 일 말이다. 그러나 그게 과연 옳은 일일까? 아니 옳고 그름을 떠나 과연 미래가 그렇게 만만하게 바뀌어 줄까? 내가 벌이는 일들이 과연 의도대로 좋은 쪽으로만 진행이 될까? 예를 든 첨단 기술 전파가 우리나라에 득이 되기만 할까?

결정적으로… 나는 그런 짓을 벌일 용기도 없었다. 설사 역사 조작이 가능하다고 해도 그럼으로써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원판 극악의 살인극은 비교할 수도 없는 대규모 회생이 생기기라도 하면 나는 도저히 그 죄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 주변에서 발생한 희생자들만 상기해도 잠 못 드는 미칠 것 같은 밤들이 많았다. 뻔뻔스럽게도, 내가 의도한 건 아니었다는 한 가지 변명으로 지금까지 버텨오고 있긴 하지만……

후우~ 제기랄~! 역시 이 문제는 생각할 때마다 수명이 깎여 나가는 것이 느껴질 정도의 극심한 스트레스를 준다. 에효~ 그래, 일부러 사고 친 건 아니라는 변명과 함께 내가 가진 가장 강력한 정신 방어의 무기를 꺼내자. 그건 바로… 살,아,남,겠,다,는 의지이다.

고백하거니와,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내가 희생하는 고고한 도덕군자가 못 된다. 일부러 남을 해치는 미친놈은 아니지만 누굴 위해서 대신 죽거나 다쳐줄 마음도 또한 없다. 다른 이들이 욕하고 돌을 던져도 할 수 없다. 이곳에 온 이후 수많은 불면의 밤 속에서 내린 결론이었다. 나는… 스스로 판단한 내 성격은, 그런 각오 없이는 이 시대 이 신분으로 얼마 못산다.

그래, 이건 소위 말하는 긴급상황이다. 아니, 전쟁이다.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생존 전쟁이 다.

살아남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나는 적군을 앞에 두기 전부터 나 자신의 정신을… 군기를 세워야 한다.

평시에 군기가 빠진 군인은 전시에 적군보다 무섭다.

나 대한민국 특공대 하사 진유준! 아직 제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자.

훈련으로만 구르는 생활을 끝내고 진짜 실전에 투입되었다고 생각하자.

“좋아…! 까짓, 싸워서- 이기자-!”

아… 차차~!

나는 힘차게 우리 중대 구호를 외치며 허공에 치켜 들었던 손을 어색하게 내려야 했다.

내가 딴 세계에 빠져있는 사이 대교가 방안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아… 뭐… 그냥… 언제 왔니……?”

대교는 상체를 약간 뒤로 젖히고 서 있는 자세와 표정으로 보아 꽤나 놀란 모양이었다.

명상(?)에 잠긴 듯 보이는 나를 살피려 발걸음 죽여 침상 옆으로 다가왔을 때 내가 느닷없는 고함소리와 함께 주먹을 휘두른 것이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곡주님의 명상을 방해한 모양입니다.”

“아, 아냐. 내가 미안해. 또 얼결에 널 때릴 뻔하다니 나도 참……”

그러고 보니 대교와의 첫 화끈한(?) 접촉은 박치기였다.

대교도 1년 전의 그 날이 생각났는지 배시시 웃으며 침상 옆 의자에 앉았다.

지금은 그 때의 화사하고 하늘하늘한 차림이 아닌 신설 비연대(飛燕隊)의 대주로써 비교적 단순한 디자인의 무사복을 입고 있지만 옷걸이는 오히려 한층 더 성숙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하긴 뭘 입히든 우리 이쁜 대교가 소화 못할 복장은…

에구, 대교와 있을 때면 진행되는 이 팔불출화도 좀 멈춰야 할 텐데 큰일이다.

“그러고 보니 어제부터 눈뜨시는 시간이 평소보다 이르셨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요즘 혈랑대가 이른 시간부터 너무 소란스러운 건 아닌지요.”

“응? 그건 별로… 아니 오히려 잘 됐는지도 몰라.”

사실… 본능적으로 짜증스러운 건 아침의 비상나팔 소리뿐이다.

잠이 다 깨고 나서는 군대 분위기도 그리 나쁘지 않고 오히려 난 아직도 그 분위기에 꽤 익숙한 상태라 심지어는 그립다는 마음이 고양이 눈곱만큼 드는 때도 있었다.

더구나 나는 지금 스스로 군기를 잡으려고 하고 있으니 더욱 알맞은 환경인 셈이다.

“그보다,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군. 오늘 일의 진행은?”

일에 대해 묻자 대교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상황 보고하는 부관의 자세를 취하며 입을 열었다.

“예, 말씀하신 장소를 며칠 전부터 마극파천대(魔極破天隊)와 비연대(飛燕隊)가 완벽하게 확보해 놓은 상태이고 지시하신 지점의 수목(樹木) 제거 등은 현재 교대 투입되고 있는 혈랑대가 실시할 예정입니다. 늦어도 한 시진(時辰. 약 두 시간.) 후면 모든 준비가 완료되리라고 생각합니다.”

한 시진이라… 그럼 점심 먹고 출발하면 대충 예정대로 시간이 맞겠다.

아니, 기분이 고조되었을 때 그냥 밀어붙이는 것이 더 나으려나?

준비되는 모습을 봐두는 것도 좋을지 모르겠고 말이다.

“좋아. 일정을 앞당겨 한 식경(食頃. 약 30분.) 후에 바로 출발한다. 식사는 거기서 할 수 있게 준비시키도록. 아, 그리고 출발 전까지 대교 너 외에는 아무도 이 방에 출입할 수 없도록 한다. 실시!”

“실시!”

‘존명’이라는 말을 금지 시켰더니 대답할 때마다 자매들이 좀 허전해하는 것도 같아서 약식 복명복창을 대치시켰었다.

좀 딱딱한 기분은 들지만 공식적인 명령을 내릴 때를 그렇게 구분 짓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시간이 없으니 나도 서둘러 준비해야겠다.

우선 창문을 모두 닫아 버리고 침상 밑에서 더블 백을 꺼냈다.

더블 백에서 꺼낸 얼룩무늬 군복을 오랜만에 입자 그 것만으로도 마음은 이미 반쯤 군대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원판의 몸에 내가 입던 군복이 잘 맞을 리는 없었지만, 군대가 본 사람은 다 알고 있듯, 원래 몸에 딱 맞는 군복을 지급받는 사병은 별로 없다.

몸을 군복에 맞추는 짓이 바로 대한민국 군바리가 익혀야 하는 초기 적응 능력인 것이다.

그건 군화의 경우도 마찬가지라서 행군을 시작하기도 전에 몇 번이고 발에 물집이 생기고 살이 벗겨지는 과정이 일반적이지만…

지금 와서 그 짓을 다시 하긴 싫어 군화는 생략하기로 했다.

대신 미리 준비시켜 놓았던 끈 달린 가죽 장화로 군화 기분을 냈다.

이렇게 군복을 입고 보니 원판과 나의 체형 차이가 새삼 확연히 느껴진다.

상의의 품은 예상대로 매우 헐렁하여 윗 주머니가 거의 배까지 내려왔고 하의 허리도 커서 뒤나 옆으로 잔득 주름이 잡혔다.

근데… 이런 제기, 길이는 조금 짧았다.

전체 키는 나와 비슷했지만 원판 놈이 훨씬 롱다리인 모양이다.

어쨌든 조금 움직여보니 그럭저럭 활동에 불편함은 없었고 거울 앞에 서보니 예상외로 그림이 나왔다.

원판의 병색 완연한 계집애 같은 얼굴에서 느껴지는 나약함을 얼룩무늬 군복의 삭막함이 커버해 주듯 했고 뒤로 묶어 내린 장발도 의외로 군복과 잘 어울렸다.

대한민국 군바리라기보다는 외국의 어느 용병부대 같은 느낌이랄까?

아니, 실제로는 용병들도 짧은 머리라고 하니 영화나 만화에나 등장하는 용병 부대원의 이미지라고 해야겠지?

암튼 여기다 이마에 띠 하나 질끈 묶고 얼굴에 위장 칠도 좀 하고 그러면 정말 만화 등장 인물 중에서나 찾아 볼 수 있을 냉정하면서도 날렵한 이미지의 용사 같아 보일지도 모르겠다.

잠시 혼자 군복 패션 쇼를 벌이던 나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더블 백에서 휴가 때 선물 받았던 맥가이버 칼을 꺼내 들었다.

웬지 한숨이 나왔지만 나는 결국 결심을 굳히고 상의 가슴에 붙어 있는 개구리마크(전역마크)에 조심스럽게 칼날을 댔다.

2년 6개월의 군 생활 동안 그렇게도 원하던 끝에 달게 된 제대 군인의 상징을 스스로 떼어내고 그 것을 상의 주머니 안에 넣었다.

그 간단한 작업이 이루어지는 시간 동안 나는 나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있었다.

침상 밑에서 다시 세 가지 물건을 꺼냈다.

가로세로 길이와 높이도 30센치 조금 넘는 크기의 나무 상자 두 개와 보통 007 가방 모양의 가죽 가방 하나를 꺼낸 나는 그중 가죽 가방만을 테이블로 가져가 열었다.

가방은 가죽 안쪽에 얇은 판을 대어 만든, 우리 시대의 007 가방과 거의 유사한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내 지시에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 용도는… 개인 화기 보관 및 운반.

“몽몽, 시간 체크해.”

나는 몽몽의 카운터가 시작됨과 동시에 가방 안에 완전 분해되어 있는 K2 소총을 재빠르게 결합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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