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4-4화 : 흑주(黑蛛)의 과거 (4)
- 흑주(黑蛛)의 과거 (4)
내가 그 동안 계속 듣고 싶어했던 얘기라 그런지,
아니면 거두마군의 입담이 생각보다 좋아서 그런지 몰라도
나는 어느 사이 과거의 이야기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천인군도는… 아름다웠다.
쪽빛 바다에 감겨있는 크고 작은 보석처럼 푸른 섬들은
과거로부터도 그랬지만, 두 사람이 다시 찾은 그 때는 더 아름다웠다.
천인군도에서 가장 흔한 분홍빛 난초화의 향기가 바닷바람에 실려
군도 전체에 흐드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찾아들기 시작한 초라한 인간들 때문에
천인들의 땅으로 낙인찍힌 불운의 낙원… 그 것이 천인군도였다.
빨려들 듯한 그리움의 향기와 회한에 잠시 취해있던
거두마군과 소살파파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들이 지고 있는 임무의 무게를 깨닫고
무거운 걸음을 옮겨야 했다.
그들의 임무는 비화곡주가 ‘비밀’을 특별한 강조한 사안이었기 때문에
천인군도의 정예가 몰린 곳을 기웃거릴 수는 없었다.
만약의 경우 거기에서 인재가 발견된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목격자들을 모두 죽여 없애야 하기 때문이다.
거두마군과 소살파파 두 사람의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향한 곳은
그들이 지배했던 지역 중의 한 섬.
두 사람이 젊은 시절 처음 만난 장소여서
남몰래 인연도(因緣島)라는 이름을 멋대로 붙여 놓았던
작은 섬이었다.
예의 인연도가 두 사람이 떠난 30여 년 동안 변한 것은
단지 그들의 본단 건물이 사라졌다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들이 도착 후 지나온 다른 섬들처럼
섬 곳곳에 낮고 작은 움막들만이 흩어져 있었고
그 움막들 몇 군데를 돌아보는 한 식경 정도의 시간 동안
두 사람은 여섯 번이나 습격을 받았다.
움막 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문을 여는 순간
창을 찔러오는 초보적인 수법부터
제법 경지에 이른 은신술로 땅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 수법까지
기술도 다양했고 상당히 능숙한 살인의 움직임이었지만
공통점은 습격자들이 모두 10대 초반의 어린 소년들이라는 점이었다.
처음엔 천인군도의 어떤 세력이 키우는 소년 살수들이 아닌가 생각했으나
일단 시비를 걸어오는 상대가 누구라도
곱게 용서해 줄 거두마군과 소살파파가 아니었다.
자신들의 본래 임무를 새삼 떠올리며 살생은 삼갔으나
결국 섬을 샅샅이 뒤지며 무수한 소년 소녀들을 잡아 끌어내었다.
한 나절이 지났을 때…
거두마군과 소살파파는 수십 명의 아이들이 쓰러진 채
흘리는 신음소리를 즐기듯 내려다보다가
그 중 두 사람이 모질게 잡아 놓은 혈도의 고통에도
신음 소리를 내지 않는 여섯 명의 아이들을 주목했다.
두 사람은 그 여섯 명의 아이들의 근골을 새삼 정밀하게 조사했다.
결국엔 두 명의 아이를 제외시켰으나 두 사람은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세상에…! 5년의 세월 동안 그토록 중원의 곳곳을 누볐어도
보이지 않던 근골의 인재들을 이곳에서 네 명이나 찾아 낸 것이다.
선택한 네 명의 아이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아 13, 4세 정도로 보이며
근골도, 강렬한 눈빛도 가장 인상 깊은 소년이
두 사람을 노려보며 뿌드득 이를 갈았다.
“흥~! 드디어 어느 섬에선가의 거물이 나타나신 건가?
그래봤자 소용없어. 날 굴복시키려면 날 죽이는 수밖에 없을 걸?”
“그 말… 네 놈들이 이 곳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뜻이렷다?”
“물론이다. 이 소악도(少惡島)는 나 ‘소악종’의 섬이다.
비록, 비록… 오늘 재수없이 늙은 귀신들에게 패했지만
누구도 날 구속할 수 없다.”
악을 쓰는 소악종의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보면서
소살파파는 빙글거리고 웃었다.
“그래…? 과연 그렇구나. 아깝지만 할 수 없지.”
다음 순간 그 광경을 지켜보던 어린 살수들의 입에서
잠시지만 고통의 신음 소리까지 멎었다.
소살파파가 빙긋이 웃는 표정 그대로
소악종의 머리를 반으로 쪼개 놓았기 때문이다.
“호호~ 혹시 들어봤는지 모르겠다.
본녀가 바로 과거 30년 전까지 이 천인군도의 여섯 살신(殺神) 중의 일인이었던 소살파파니라.”
“맙…소…사…! 그, 그럼… 저 사람은 당신과 함께 이 부근을 지배하던 거두마군……?”
황망한 표정의 다른 소년이 더듬거린 것처럼
다른 아이들도 모두 공포에 질려 떨고 있었다.
“홋호호…! 여보, 아무래도 우리 두 사람의 위명이
아직 살아있긴 한 모양이에요.”
“…쯧~ 이제와서 그게 무슨 소용… 헛-!”
거두마군이 놀라 숨을 삼킨 다음 순간
소살파파는 재빠르게 신형을 뒤로 날려 피했다.
그러나 이미 그 전에 한 줄기 차가운 빛을 발하는 검 끝이
소살파파의 가슴 한 복판을 파고들었다.
경악한 소살파파는 더욱 다급하게 경공을 전개했고
검과 그 주인은 더 이상 따라붙지 못하고 멀어져갔다.
습격한 적으로부터 단숨에 10여 장이나 멀리 떨어진 소살파파는
식은 땀을 흘리며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검 끝이 채 깊숙이 파고들지 못해서 대단한 상처는 아니었지만
지난 수십 년간 본 일이 없던 자신의 몸에서 흐르는 붉은 피가
소살파파의 웃음마저 앗아가고 있었다.
“카핫핫~! 해냈다. 흑주닷~! 흑주는 해낼 줄 알았어!”
한 소년이 외쳐대자, 다른 소년 소녀들도
공포와 고통을 잊고 환호성을 질러댔다.
“흑주……?”
소살파파는 거두마군의 손에 혈도를 잡혀
축 늘어져 있는 매우 작은 몸집의 아이에게 천천히 다가섰다.
다른 아이들과 조금 다른 점이라면
검고 낡은 천의 한쪽을 목에 묶어 어울리지 않는 망토처럼 걸치고 있다는 정도…?
그 외에는 다른 소년 소녀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내인지 계집인지 모를 정도로 지저분한 머리카락이 늘어진 사이로
작고 앳된 얼굴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고
조금 전까지 이 흑주란 아이는
소살파파의 눈앞에서 다른 아이들처럼 고통에 못이겨 신음하며 울고 있었다.
소살파파는 흑주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얼굴이 보이도록 들어 올렸다.
조금 전까지 애처롭게 눈물을 흘리던 모습은 이미 흔적도 없었고
마치 인형처럼 살아있지 않은 두 눈동자만이
소살파파를 올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