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4-5화 : 흑주(黑蛛)의 과거 (5)
- 흑주(黑蛛)의 과거 (5)
순간, 어린 흑주의 늘어진 한 손이 움찔,
했고 소살파파는 다시 온몸을 긴장시켰다.
이 어린 아이가 이미 혈도를 잡혀 전혀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조건 반사였다.
거두마군과 소살파파는 다른 아이들의 근골을 확인할 때와는 다른 전율과도 같은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두 사람은 처음엔 소살파파가 그들의 수장인 소악종을 잔인하게 죽이는 광경을 목격했기 때문에 어린 흑주가 분노로 자신을 잊고 무작정 덤벼들었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어린 흑주가 사용했던 검, 두 사람의 날카로운 이목으로도 발견하지 못했던 그 것은 어디에서 나타났을까?
어린 흑주의 발 밑 땅에 남아있는 흔적이 그 답을 말해주고 있었다.
자신이 끌려올 자리에 미리 검을 묻어 놓았다…? 아니, 두 사람은 다른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 다 자신들 중 누구도 어린 흑주를 어디에서 잡아 왔는지 기억에 없었다.
두 사람이 각자 행동하며 어린 습격자들을 하나 둘씩 잡아오는 와중에 스스로 그 사이에 끼어 든 것이다.
소살파파와 거두마군이라는 초고수들의 이목을 따돌리고 자신의 동료들이라는 숲에 무기와 자신이라는 나무를 숨겼다.
그리고 기회를 노렸다.
소살파파는 섬의 수장인 소악종 소년을 참살함으로써 모두에게 급격한 동요와 거역하기 힘든 공포를 뿌렸지만 그와 동시에 소살파파 자신도 강자로써의 여유, 마음의 헛점을 드러냈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만약 거두마군이 미리 알아채지 못했더라면 소살파파라는 천인군도 역사상 최강의 여살수가 이 작고 어린아이에 의해 심장이 꽤 뚫렸을지도 모른다.
거두마군과 소살파파는 새삼 찬찬히 어린 흑주를 살폈다.
어린 흑주는 보통의 여염집 아이들보다는 훌륭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조금 전 두 사람이 선택한 네 명의 아이들과 비교하자면 오히려 범인의 근골에 불과했다.
두 사람은 잠시 갈등했다.
보석과 함께 주운 돌맹이가 발하는 미묘한 광채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오래지 않아 두 사람은 방법을 결정했다.
과거의 천인 군도에서 간혹 사용했었던 잔인한 보석 골라내기……
“이 것은… 과거 우리 부부가 즐겨 쓰던 독(毒)으로, 단몽혜(短夢惠)라고 한다.”
거두마군이 자신이 꺼내든 독단의 이름을 밝히자 인연도, 아니 소악도의 아이들은 모두 공포에 질려 잘 움직이지도 못하는 몸을 버둥거리며 피하려고 애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두마군과 소살파파는 울부짖는 아이들의 입에 하나도 빠짐없이 억지로 독단을 집어넣고 삼키게 했다.
마지막으로 어린 흑주에게도 저주의 독단을 먹인 후에야 거두마군과 소살파파는 아이들의 혈도를 모두 풀어 주었다.
“우리 부부에게 살수를 펼쳤을 때 너희들은 이미 모두 죽은 목숨이었다. 이제 너희들에게 아주 짧은 꿈을 꿀 수 있는 은혜를 베풀었으니… 어떤 꿈을 꿀 것인지는 너희들의 자유다. 단, 내게는 이제 하나의 해약(解藥)이 남아있구나.”
단 하나의 해약!
거두마군의 악마처럼 잔인한 선언이 소악도 아이들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제일 먼저 움직인 것은 거두마군이 두 번째로 선택했던 짧은 머리의 다부진 인상의 소년이었다.
소년은 땅바닥에 떨어져 있던 어린 흑주의 검을 재빨리 거머쥐고는 머리 위로 치켜 올렸다.
이미 혈도가 풀렸음에도 움직일 생각도 않고 앉아 있던 어린 흑주가 고개를 들어 소년을 올려다보았다.
“흐, 흑주… 나, 난… 난……”
소년은 울고 있었다.
어린 흑주의 두 눈을 들여다보며 오열하던 소년은 별안간 비명 같은 고함을 지르며 거두마군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소년의 검을 쥔 팔이 잘려져 허공을 날며 선혈을 뿌렸다.
아이들의 시선이 허공의 피빛 무지개보다 땅에 떨어진 검에 몰려드는 것을 거두마군은 냉혹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너희들의 짧은 꿈도 하루는 갈 터, 그 전에 돌아오겠다.”
거두마군과 소살파파가 팔이 잘린 소년의 악바친 욕설과 비명을 뒤로한 채 돌아섰고 망설이던 몇몇 아이들이 검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루’라는 시간을 의식한 다른 아이들은 재빨리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생존을 위한 처절한 투쟁을 시작한 아이들과 달리 어린 흑주는 아직도 움직일 생각을 않고 있었다.
소살파파는 만약의 경우 최후의 몇 사람까지 동귀어진(同歸於盡)하여 한 명도 남지 않는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하여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고자 했지만 거두마군은 고개를 저었다.
“악연도 인연, 우리의 인연이 여기에 있다면 그 것은 스스로 그 인연을 만드는 자가 될 것이오.”
“곡주님……?”
“…아, 이런, 이런……!”
거두마군이 말을 끊고 날 부르는 바람에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손에는 빈 술병이 들려 있었고 술잔에는 술이 넘쳐흘러 탁자를 타고 흐르고 있었다.
“하핫~! 얘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말야… 정말… 재미… 있네?”
“……”
“악연도 인연, 인연을 만드는 자와 인연을 맺겠다? 하핫~! 정말 멋져, 멋지다구!”
나는 마음속으로는 이미 몇 번을 거두마군의 머리 위에 부어 버렸던 술을 내 입에 털어 넣었다.
지독히 독한 술이 식도를 타고 흐르고 넘어가자 나는 콜록거리며 기침과 공연한 웃음을 토했다.
“곡주님……”
대교가 옆에서 걱정스럽게 불렀지만 손을 저어 접근을 막았다.
누구라도 지금의 날 건드리면 폭발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렇게 소악도의 아이들을 서로 싸우고… 죽이게 했더니… 살아 남은 게 저 흑주란 말이지?”
내가 키득대며 묻자 거두마군은 대답에 앞서 흑주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 때, 어린 흑주는 인연도… 아니 소악도의 한 가운데 홀로 서 있었지요.”
하루가 조금 못미처 지났을 때 다시 섬을 찾아 온 거두마군과 소살파파는 섬 곳곳에 쓰러져 숨져있는 아이들의 시신을 하나하나 확인했다고 한다. 처음 독을 먹인 장소에 이를 때까지 시신들 속에는 이미 그들이 선택했던 뛰어난 인재들도 모두 포함되어 있었고 홀로 남은 것은 그들보다 작고 가냘픈 체구의 어린 흑주… 그는 처음 거두마군에게 팔을 잘렸던 이름 모를 소년의 시신 곁에 피투성이의 모습으로 서있었다고 한다. 그 과정은 두 사람도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소악도의 유일한 생존자는 어린 흑주였다.
“말이… 없었지요. 그 때도 흑주는. 동료들을 모두… 그 것도 서로를 죽이게 끔 만든 우리를 향해서도 한 방울의 눈물도 한 마디의 말도 비치지 않았지요. 단지… 우리에게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것뿐이라고 여긴 듯 조용히 자리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을 뿐……”
다시 한 병의 술을 따서 나발을 불었다. 평소 대교 자매 외의 사람들 앞에서는 악착같이 숨기던 진유준으로서의 행동을 이번엔 감추기가 어려웠다. 힐끔 바라본 흑주에게서는 여전히 아무런 동요의 모습이 없었다. 갑자기 비이성적인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견디기 어려울 만큼.
“썅~! 그래서! 그래서 당신들은 흑주에게 무엇을 약속했지? 응? 말해 봐! 그렇게 저 인간을 데려 오면서 무엇을 주겠다고 했냐고-!”
“주긴 뭘 줍니까? 어차피 거기서도 살수로 자랄 아이였거늘.”
“버리지 않겠다고 했소이다.”
거두마군의 말에 나는 이제야말로 노인네고 뭐고 술이라도 끼얹기 위해 채웠던 잔을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우리 부부가 거둔 이상… 하늘이, 세상 모두가 저 아이에게 등을 돌려도 우리 부부만은 결코 저 아이를 버리지 않겠다고… 그렇게 맹세했소이다.”
“…쓰파… 뭐야, 그게.”
“우리 부부도 놀랐었지요. 설마 곡주께서도 같은 말을 흑주에게 하실 줄이야.”
“응? 내…가?”
“그렇습니다. 그날, 처음 흑주를 데려온 날 그러셨지요.”
당근 내가 아닌 원판 녀석, 녀석이 그랬다고? 저 늙은 살수부부에게는 흑주를 키우는데 4년의 시간을 주겠다고 한 다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흑주에게도 말을 걸었다고……?
“…날 봐라. 나와 네가 별로 다를 것이 없다는 거… 알겠나? 네가 내 곁에 있겠다면 허락하겠다. 네가 다시 온다면… 절대로 널 버리지 않겠다. 내 목숨을 하늘에 돌려 줄 때까지……!”
…뭐야, 쓰바… 원판 녀석. 역시 온갖 개폼은 다 잡았군. 빌어먹을 자식! 그런 말을 주절거리고도 정작 4년 뒤 흑주가 뺑이치고 다시 돌아왔을 때는 쳐다도 보지 않았단 말야? 뭐 그딴 새끼가 다 있어? 버리지 않겠다고? 그럼 다야? 그게 끝이야~?
“야, 임마! 흑주! 넌 존심도 없냐? 그거 하나로 그… 아니, 날 여태까지 어둠 속에서 지켜왔다고? 그게 뭐야~ 임마!”
말 실수가 섞인다는 위험 신호가 들려오는 것 같았지만 술기운 때문인지 좀처럼 감정이 조절되지 않았다. 원판… 아니, 나 진유준은 더더욱 흑주에게 화를 낼 자격이 없다는 자각이 웬지 더 더러운 기분을 부추기고 있었다. 어떤 사연으로 맺어진 인연이든,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건 간에 그걸 끊어 버린 건 바로 나 자신이 아닌가. 저 지랄같은 인생을 살아 온 흑주녀석의 주인을 사라지게 하고 그 자리를 꽤 차고 앉은 나는 대체 뭐냐. 나 같은 뻔뻔한 녀석은 흑주에게 화는커녕 고개를 들 면목도 없어야 정상이 아닌가 말이다.
“…너… 그거… 복면 한 번 벗어 볼래?”
“곡주님?”
거두마군이나 소살파파가 나서서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나 자신이 먼저 고개를 저었다. 대체 뭐지, 진유준? 왜? 흑주의 맨 얼굴을 보면서 고백하고 사과라도 하려고? 나 주인 아냐. 그 자식 나하고 교대(?)하고 사라졌다구. 그런 얘길 하려고? 아님 그냥 새삼 궁금해서? 이 시국에? 대체 뭐냔 말이야, 진유준 이 자식… 제기, 흑주 넌 또 왜 그래? 왜 이런 때는 명령을 따르려고 하냔 말이야.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복잡한 심경으로 지껄인 내 말에 따라 흑주가 천천히 복면을 풀어 맨 얼굴을 드러냈고 나는 그 순간 술기운이 확 날아가 버리는 기분이었다. 대교가 옆에서 작은 신음소리를 냈다. 복면 밑 흑주의 얼굴은 그간 내가 머리 속에 떠올렸던 어떤 모습과도 달랐고 언젠가 몽몽에게 시켜서 그려 본 얼굴과도 달랐다. 아니, 어쩌면 얼마 전까지는 몽몽이 스캔한 데이터의 초상화와 비슷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녀석은 화상으로 흉칙하게 그을려 마치 공포영화 속의 괴인 가면을 뒤집어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일 정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짙고 길며 부드러워 보이는 흑발이 바람에 날리는 모습은 오히려 더 처절해 보일 뿐이었다.
술기운이 밀려 난 머리 속으로 흑주에 관한 일련의 상황들이 퍼즐조각처럼 짝 맞추어 완성되고 있었다. 살수로써의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사부의 다리를 자르고 얼굴까지 버리는… 그런 과정이 필요했다는 건가…? 이젠 영원히 사람들 앞에, 밝은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거야…? 날… 원판을 위해서…? 15년이란 세월동안 자신을 돌아보지도 않는 잘난 주인님을 위해서……?
난 나도 모르게 다시 술병을 잡아들었고 흑주는 그런 나를 향해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괴물 같은 얼굴… 그러나 내 착각일까? 두 눈만은… 거기에 품고 있는 것은 어린 시절 소악도에서 소살파파에게 보였던 그 생기 없는 눈동자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흑주가 나에게 내민 검은 천의 조각을 받아들였다. 거기에는 노란 색의 실로 섬세하게 몇 개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