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5-1화 : 기피대상 1호의 등장.(1)
- 기피대상 1호의 등장.(1)
“…그리하여… 어쩌구저쩌구가… 이러저러한 관계로… 우린 ##를 ***한 다음 XX하는 방안을……”
회의 중인 각부서 간부들의 소리가 귓전에서 맴돌다가 가끔씩 단편적인 단어가 의미 없이 기어 들어왔지만 곧 반대편 귀로 빠져나갔다. 즉… 난 다른 사람들 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다.
그동안 나는 오늘처럼 이렇게 가끔 대청각(臺廳閣)에 나와서 공식적인 업무를 볼 때 나름대로는 열심히 보고나 회의 내용을 경청했었다. 알아야 면장을 한다고, 면장… 아니 곡주씩이나 되는 위치를 날로 먹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런 그동안의 노력 덕분에 비화곡의 대내외 활동도 어느 정도 감 잡았고 요즘은 가끔 내가 적극적으로 회의를 주도할 때까지 있었다.
“…곡주님! 이상과 같은 1급 거민 관리에 있어 저희 내당의 방침에 대해 다른 말씀이 있으신지요.”
“…없어.”
“그렇다면, 이 안건을 한 달 후부터 실행하도록……”
“니 맘대로 하세요.”
내 시큰둥하고 싸가지 없는 대꾸에 내당당주(內堂堂主) 상천검귀(霜天劍鬼)는 기계적으로 존명!을 외치고 다시 자리에 앉는다. 다른 간부들이 서로 뭔가 눈빛을 교환하는 것 같더니 이후 내게는 별로 말을 안 걸기 시작했다. 역시 눈치 까는 거 하난 참 빠른 사람들이 다.
후우~ 그동안 열심이던 내가 오늘은 왜 이렇게 성의 없이 업무에 임하고 있냐하면… 요 며칠 전 매우 골치 아픈 일이 생기는 바람에 요즘 온통 그 생각뿐이기 때문이다. 그전에도 흑주의 과거 캐기가 장기전으로 들어가는 것 같아 다소 초조하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흑주의 일은……
천의 제조지, 혹은 제조자 조사.
천에 새겨진 답파화미인이라는 글귀의 의미 탐색.
천인군도의 소악도에 조사팀 파견.
등등의 방법을 병행해서 이미 한 달 반 정도를 투자했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단서가 너무 작다고는 해도 이만한 인력과 초과학력(몽몽)을 동원하는데도 뭐 이래…?라고 꿍시렁 대기 시작한 내게 갑자기 엉뚱한 곳으로부터 태클이 들어온 건 3일 전이다.
내가 이 시대에서 가장 만나기 꺼리고 있던 인물이 다시 강호에 등장한 것은 물론이고 날 보러 오겠다고 비화곡에 면회 신청을 해 온 것이다. 도착 날자는 한 달 정도 후… 이걸 별 이유도 없이 거절하기도 그렇고 그냥 만나는 건 너무 위험한 것 같았다. 원판이 아닌 나 진유준이 가장 꺼리고 있는 그 인물은 다름 아닌…
‘수라혈불’이다.
수라혈불은 원판에게 각종 주술을 전수했다는 이 시대 최고의 고스트 헌터…! 그의 능력에 대한 소문을 과연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원판이 사용했던 주술의 효과를 생각해보면 확실히 사이비 주술사가 아닌 건 확실할 것이다. 요괴나 귀신 등의 초자연적 존재를 사냥하는 전문가라는 건 곧 ‘영혼’을 보는 능력이 있다는 건데… 그런 인간을 만났다가 만약 내 정체, 원판의 몸을 꽤 차고 있는 엄한 놈…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 그동안의 내 생존 게임은 땡땡~! 종치고 물 건너가는 거다.
뭐… 딱 잡아떼면 지가 어쩔 것인가,라는 생각도 든다만 그럴 경우 뭔가 이상한 술법으로 내 영혼을 뽑아낸다거나 하는 짓을 할 가능성도 있고… 그대로 다시 내 본래 육체로 돌아가게 해준다면 그 자체는 고마운 노릇이지만, 역시 그 후의 생존은 종치는 거겠지? 내게 아무리 K-2와 수류탄 등의 20세기 무기가 있다지 만 지들 곡주를 해치고(그렇게 생각하겠지?) 사칭한 자를 향한 비화곡 마인들의 분노를 감당할 자신은 없다. 더구나 내가 대교나 흑주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상황 같은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빌어먹을~! 수라혈불인지 수라상인지, 한 번 짱 박히면 5년이나 10년은 우습게 안 나타난다고 하더니 이번엔 왜 달랑 1년 만에 나타나고 지랄인지 모르겠다. 으… 차츰 줄이고 있던 욕이 저절로 막 나오네. 썅~ 여기 오기 전에 미리 확 제거해 버려?
에효… 차마 그럴 순 없으니 일단 내 쪽에서 피할 수밖에 없는 건데… 전에 그렇게 친하게 지냈다는 주술사부의 면회 요청을 아무 이유도 없이 거절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무공도 못하는 놈이 갑자기 폐관 수련한다고 짱 박히기도 좀 그렇고… 다른 핑계를 대고 와룡 전(臥龍殿)이나 성지에 짱 박힌다고 해도 만약 그 인간이 금방 안 가고 뭉개고 있으면 거기서 뭐하고 지낼지도 걱정이다. 전에도 한 두어 달 있다가 갔다고 하고… 음, 우선 손님이 온다고 했는데도 갑자기 짱 박힐 핑계거리도 마땅치가 않다.
여러모로 아예 비화곡 바깥으로 튀어 버리는 게 가장 확실한 피난일 것 같지만 그럴 핑계 역시 현재는 없고… 한 번 나갔다가 그 난리를 치렀던 강호에 다시 나가는 것도 좀 껄끄럽다. 하긴, 이번에는 내가 나가는 걸 적들이 미리 알지도 못하고 이 나라의 삼태자 조명환과 그의 누이 동생인 신수성녀 조예린. 이 둘과의 친분(상당히 찝찝한 이유지만.) 덕에 전처럼 정파인들 도 마구잡이로 덤비지는 못할 것이다. 흐음… 역시 밖으로 튀는 게 가장 나으려나……?
“아, 잠깐!”
“예, 예? 제가 무슨… 실수라도……?”
혼자 딴 세계에 가있던 내가 느닷없이 끼어 들어 묻자 외당당주(外堂堂主) ‘고시리’는 깜짝 놀라 조금 버벅댄다. 저 인간… 본래는 꽤 넉살이 좋은 성격이었는데 두어 달 전에 오림비 대회에서 망가진 이후 아직까지 그 후유증이 있는 것 같다.
“그게 아니라, 방금 뭐라고 했지?”
“아, 예… 저희 외당에서 이번에 강남의 몇 개 파를 일시 관리해야 한다는……”
“아니, 그거 말고 그 전에 한 보고 말야.”
“…강호에 곡주님을 사칭하는… 그런 자가 있다는 보고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 얘기! 감히… 어떤 놈이 날 사칭한다는 거지?”
“아, 그건 아직 정확히 확인된 사항이 아닙니다. 소문이 있기에 곧 조사할 예정… 핫, 죄송합니다. 당장 철저히 조사하겠습니다-!”
간만에 맘먹고 꼬나보니까 고시리 당주는 물론이고 대청각 안의 분위기 자체가 급격히 얼어붙고 있었다.
모두에게 다소 미안했지만… 나는 그 동안 가끔 거울 보며 연습까지 했던 원판 극악 모드의 시니컬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별로… 중요한 사항이 아니라고 생각했나?”
“그, 그렇지 않습니다. 감히 곡주님의 위명을 더럽히는 자가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서… 곧 찾아내어 척살하겠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야. 그런 간 큰 자가 있다면 내 눈으로 직접 보고싶은 걸?”
“옛! 빠른 시일 내에 포획하여 끌어오겠습니닷!”
쳇, 내가 직접 찾아가겠다는 말을 자연스럽게 꺼내려 하고 있는데 저 인간이 자꾸 앞서 가서 초를 치는 군.
“음… 그보다 누가 무슨 목적으로 그런 짓을 하는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 사람들을 속이는 지… 그걸 먼저 자세히 알아봐. 내가 차후 지시를 내리기 전에는 손대지 말고. 알겠나?”
“존명!”
뭐… 어느 시대건 대중에게 지명도가 높은 유명인들은 그를 사칭하는 가짜들이 많기 마련이고, 어디다가 확인전화를 해본다거나 하기도 어려운 이 시대는 더 가짜들이 설치기 쉬운 환경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남을 속이고자 하는 사기꾼들이 뭐는 사칭하지 못하겠는가마는 현실적으로 강호에서 ‘비화곡주 독각 와룡 진하운’을 사칭하는 가짜는 드물 수밖에 없다.
정부고관… 혹은 큰맘먹고 대통령의 친인척을 사칭한다던가 해서 ‘그린벨트 풀릴 예정 지역을 알려주마. 그러니 좀 짭짤하게 내놔봐~!’라는 식으로 사기를 치는 경우는 있을지 몰라도 ‘나 대통령인데 돈 내놔~!’라는 식으로 설치는 정신나간 사람은 없는 것처럼 이 시대 밤의 대통령 진하운은 그 신분만으로도 사기꾼들에게 있어 엄청 난이도가 높은 대상이다.
더구나 원판 본인도 비화곡 바깥으로 외출할 때는 최소한 혈랑대 같은 특수부대를 통째로 끌고 다녀야 할 정도로 살벌한 웬 수들이 많은 판국에 그런 인물 행세를 하겠다고 나서는 용감무식에 과감실성한 사기꾼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 정상일 것이다.
물론, 어느 시대나 비정상인 자는 존재해서 지금까지 가짜 극악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닌 모양이지만 당근스럽게도 알려진 예는 모두 끝이 조금(?) 좋지 못했다고 한다.
뭐 좀 챙기거나 하여간 원하는 바를 이루기도 전에 눈치 챈 강호의 조폭들이나 눈치 못 챈 정파인들의 칼침, 도침, 기타 각종 흉기 침 맞은 후 파묻혀 버렸다는 얘기다.
이번에 나타났다는 가짜… 어디의 누군지는 모르지 만 파이팅~이다.
그 놈이 날 화나게 할 정도로(화난 척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꽤 크게 사기치는 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속으로 계속 ‘가짜 극악 파이팅~!’ ‘힘내라 힘~!’ 그렇게 외쳤다.
물론 겉으로야 ‘쓰불… 어떤 XX인지 아작을 내 주겠 쓰~!’라는 표정을 그리며……
가짜 극악에 대한 외당의 추가보고는 4일 후에 있었는데, 다행히도(?) 이번 가짜는 뭔가 좀 다른 것 같았다.
“그러니까… 조사차 침투한 외당 요원으로부터 연락이 끊겼다, 이거지?”
“그, 그러합니다. 곧 1급 고수들을 보내 해결하도록……”
“됐어. 고시리 당주… 당신 요즘 일처리가 좀 희미해진 것 같아.”
“요, 용서를!”
털썩 무릎을 꿇는 카사노바 고시리 당주. …실은 내가 미안해.
“뭐… 감히 비화곡주를 사칭하려드는 자가 그 만한 준비도 없었겠나. 쓸데없이 더 사람 보내지마. 내가 직접 가겠어.”
“헉~! 고, 곡주께서 직접…? 요, 용서해 주십시오. 속하가 무능하여 그만……”
에이~ 이 친구 왜 또 바닥에 머리를 박고 난리야. 한층 더 미안하게스리.
“그만 하게. …쓴 소리 하긴 했지만 실은 난 자네의 예전 모습을 더 좋아한다네. 자넨 아무래도 지난 번 오림비 대회 이후 너무 기가 죽어 있는 것 같아. ‘대체 회장 김우용’ 같은 인간의 아랫사람으로 있으려니 오죽했겠는가 마는… 앞으론 부디 힘내게.”
“곡…주님……!”
더 깨지기는커녕 격려의 말을 듣게 되자 감격에 겨운 표정이 된 고시리 당주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아아~ 이건 이거대로 또 웬지 미안하다. 다 큰 남자 하나를 치고 어르고… 에구, 이렇게 자꾸 원판화되지 말아야 하는데……
고시리 당주가 나간 후에도 내가 더 복잡한 심정이 된 것은 이번 일로 이미 외당에 ‘행방 불명자’가 나왔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번 경우는 내가 명령을 내려서 시기가 조금 빨라졌을 뿐, 언제든 희생자가 발생할 예정(?)의 일이긴 했다.
그렇다고 해도 문제는… 내가 비록 순간이었지만 행방불명 된 요원이 있다는 말에 ‘기쁨’을 먼저 느꼈다는 점이다.
나 진유준의 원판 극악화… 이건 앞으로 내가 가장 경계하고 항상 싸워야할 ‘적’이라는 생각이 새삼 더 강해지고 있었다.
저녁 무렵 우리의 강호 재 출도 준비에 대해 상의하려고 부른 대교는 대강의 상황을 듣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확실히 보통 일이 아니군요. 감히 곡주님을 사칭하는 데다 그걸 조사하던 외당에서 행방불명자까지 나오다니… 하지만 굳이 곡주님께서 직접 출도하실 정도의 사안은 아니라고 봅니다만… 주제넘은 참견이었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아니, 니 말이 맞아. 이건 그냥 핑계야.”
“예?”
“난 그냥 너 하고 여행이나 다니고 싶어서 이러는 거야. 어디 가보고 싶은 곳 있으면 말해 보렴.”
“아… 곡주님… 저… 전……”
“농담이야. 아무렴 천하의 비화곡주가 그냥 놀러 다니려고 곡을 나설까.”
“예, 예~?”
대교답지 않은 오버. 내가 함께 여행을 가자고 한 순간 살짝 붉어졌던 얼굴이 이번엔 다른 의미로 더욱 타오르고 있었다.
“실은… 난 요즘 굉장히… 위,험,한 일에 빠져있어.”
나는 정색을 하고 말하며 귀를 가까이하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새삼 긴장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몸을 숙여 내 입가로 귀를 가져오는 대교……
“그건 말이야. 요즘 들어 난… 대교라는 소녀를 놀리는 게 너무 재밌어.”
나는 곁눈질로 대교를 살피며 키득거리기 시작했고, 대교의 동그랗게 뜬 두 눈과 민망해하는 표정이 너무 재밌어서 한동안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큭,큭… 간만에 한 건(?)했다.
“과, 과연… 정말 위,험,한 일에 빠져 계시는군욧~!”
오홋~? 드물게 뾰족한 음성이 들려오는 군. 소령이 수준으로 독한 술을 나발 불기라도 한 것처럼 붉을 대로 붉어진 얼굴과 실룩이는 입술로 미소를 지으려 애쓰던 대교는 마침내 그 표정 그래도 눈만을 살짝 가늘게 하며 생긋 웃었다.
“더 이상 놀리실 생각이시면… 소녀는 이만 물러갈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곡주님의… 최근 건강 상태가 우려되니 ‘약주’와 ‘연초’를 금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으잉~? 누, 누구 맘대로!”
“흑주님처럼 비연대 대장인 본녀도 곡주님의 ‘건강’을 위해서라면 약간의 강압적인 수단도 불사할까 합니다만……”
헉~! 상상을 초월한(?) 엄청난 반격이다.
“대교야.”
“예, 곡주님.”
이제는 제대로 생글거리고 있는 대교에게 난 탄식을 섞어 말했다.
“그냥 여행가자,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