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9-2화 : 절화행(折花行)
2-1. 절화행(折花行)(2)
“어, 잠깐. 그럼 이 천에 답파화미인이라는 글귀를 꼭 그 이가장의 주인, ‘이인경’이라는 사람이 썼다는 보장이 없잖아.”
“듣기로, 이인경은 부인을 끔찍이도 아끼는 사람이었다고 해요. 그래서 당시 태조께 답파화미인이라는 호칭은 자신의 부인만이 쓸 수 있도록 간청해서 허락을 받아냈다고 하더군요. 음… 그 동안 누군가 몰래 사용했는지는 몰라도 저는 아직 그런 예를 들어보지 못했어요.”
누군가 몰래… 라, 하긴 그런 변수까지 따지자면 끝도 없겠지? 나는 진하연의 대답에 복합적인, 그러나 주로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고 진하연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숨을 돌린 다음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만으로도 알 수 있겠지만, 개국 공신들 중 이인경에 대한 태조의 총애는 대단했다고 해요. 거대한 장원과 수 백 명의 하인, 그리고 수십 명의 대월 미녀들까지 하사했다고 전해지는데, 이인경은 그 중 장원과 장원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하인들만을 받았다고 하고… 그렇게 시작된 이가장의 역사는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처럼 보였지요. 그것은 이인경의 드높은 학문세계를 질시하던 세력들까지도 끝내 마음으로 감탄하여 스스로 입을 닫았을 만큼 겸손하고 중후한 그의 인품 때문이었는데……”
자기 얘기하는 것도 아니면서 진하연의 음성에는 왠지 점점 감정이 섞이는 느낌이 들었다. 정작 답파화미인의 유력한 용의자(?)인 그의 부인에 대한 이야기보다 이인경에 대한 전설적인 일화들을 더 많이 늘어놓고 있어서 나로서는 대충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갔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흑주가 열심히 듣고 있을지 모를 이야기를 중간에 끊기 싫어서 참고 듣고 있자니 아무래도… 해동선생(海東先生, 그의 명호) 이인경이 그만큼 많은 여인들에게 시대를 초월한 멋진 남자의 상징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용모부터 상당한 미남이었던 모양인데다 20대 중반 정도의 나이에 이미 권력의 중추에 선 엘리트 청년… 거기다 지적이기까지 하셔서 시서화(詩書畵)에 모두 신의 경지, 또한 거문고 같은 악기를 다루면 학들이 날아와 댄스를 춘다고 할 정도… 정치가는 일단 빼고라도, 우리 시대 표현으로 ‘젊은 박사 학위 다량(?) 소유자에 초 베스트셀러 시인(詩人) 겸, 인기 화가 겸, 정상급 연예인’이었던 셈이랄까?
뭐… 여기까지는 독각와룡 진하운에 비하면 일반적인(?) 수준이라 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추가되는 그의 가장 빛나는 업적, 아니 ‘진짜 매력’은 바로 ‘일편단심 민들레’라는 점일 것 같다. 무수한 미녀 팬클럽이 아무리 유혹을 해와도 오직 한 여자만을 사랑하고 바라보는 순정남이라는 점이 여자들이 꿈꾸는 ‘이상형의 왕자님’ 이미지를 완성하지 않았을까?
암튼… 나는 참을 성 있게 얘기를 듣다가 진하연이 다시 잠깐 차로 목을 축이는 틈에야 내가 현재 가장 궁금한 점을 물었다.
“…그 대단한 이인경과 부인 사이에 자식들은 몇 명이나 되었지…? 당시 나이는?”
“그게… 실은 이인경 부부가 대월을 떠난 이유, 이가장의 역사가 어이없이 짧게 끝난 것이 바로 그들의 자식들 때문이었어요. …본래 그 부부 사이에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어요. 첫째가 아홉 살이 되던 해에 둘째가 모든 이들의 축복 속에 태어났고… 헌데, 그 다음 해에 바로 이가장에 커다란 비극이 찾아온 거지요. 당시에 저희 대월에는 전국적으로 무서운 돌림병이 돈 일이 있는데, 그 때 그들 부부는 손쓸 틈도 없이 큰아들을 잃었어요. 그리고… 그 충격에서 채 벗어나기도 전에 비극은 연속으로 찾아왔다지요. 바로 남은 한 아들마저 원인불명의 병으로 위독한 상태에 빠져 버린 것이에요.”
진하연도 말 사이에 가끔씩 살짝 한숨을 몰아냈지만 듣는 내 기분은 그보다 더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가장 듣고 싶었던 부분이었지만, 그게 그렇게 행복했던 한 가정이 너무도 허무하게 망가져 버리는 얘기라니……
전국적으로 간신히 잡혀가는 기존의 돌림병도 아닌 새로운 원인불명의 병에 걸려버린 아이를 안은 채 이인경은 태조 앞으로 나아가 비통하게 울부짖었다고 한다.
‘전하의 성은을 죽을 때까지 갚기로 맹세한 저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 남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 저는 대월을 떠나야 합니다. 막으시려거든 저희 부자를 이 자리에서 함께 죽여주소서!’
그렇게… 이가장의 주인 부부는 처음 올 때와 달리 비참한 슬픔을 안고 대월을 떠나갔다고 한다. 과거 비슷한 증세의 환자를 고쳐낸 의원이 있었다는 유일한 희망의 장소, 이인경이 대월에 오기 전에 부인을 만났던 장소이기도 하며 중원 출신인 부인의 고향을 향해… 그리고 그 후 그들 부부는 영영 대월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그 이 후 그들 부부와 아이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진하연도 모른다고 하지만… 아직까지는 ‘가설’이지만 만약 그들 부부의 자식이 바로 흑주라면… 그렇다면 일단 그 아이는 병마에서 벗어나 목숨을 건진 것이 된다. 그리고… 일단 부인의 고향에 도착하여 아들을 치료하기는 했는데 그 후에 또 어떤 사고나 뭐 그런 일을 당해 다시 아이를 잃어 버렸다는 건가? 대월이 나중 사람을 보내 아무리 그들 부부를 수색해도 발견할 수 없었다는 건 역시 그 사고 때 흑주의 부모는 모두 사망……?
제기, 지금까지 흑주의 과거를 꼭 좋은 쪽으로만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실마리가 잡혀서 유력한 이야기를 알게 되니 내가 괜한 짓을 벌인 건 아닌가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이러저러해서 니 부모는 모두 이미 비참하게 죽었단다. 자아~ 어쨌든 과거를 알긴 알았으니까. 앞으론 계속 혼자 잘 살아 봐~’라는 게 말이 되는 건가?
나는 흑주가 어둠 속에서 ‘지금 약 올리냐? 씨바~’라고 하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선을 천장에 보내지 못하고… 아니, 아예 바닥에 깔고 몹시도 불편한 표정으로 공연히 방안을 왔다갔다하는 내게 진하연은 또 매우 흥미로워하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대교가 눈치 빠르게 진하연의 옆구리를 찔러 함께 방에서 나가고 나서야 나는 천장을 향해 몇 마디를 던졌다.
“음… 일단은 미안해, 흑주. 하지만… 지금까지의 얘기… 조금 있다가 다시 하자.”
나는 침상으로 가서 베개를 끌어안고 엎드린 자세로 다시 찬찬히 진하연에게 들은 이야기를 되새겨 보았다. 일단 소위 ‘답파화미인’의 고향으로 찾아가 모든 일을 재확인해 봐야겠지만 이미 내 머리 속은 이인경 부부가 흑주의 부모라는 쪽으로 의식을 굳혀가고 있었다. 어떤 대상에 대한 일편단심적인 분위기도 그렇고… 흑주 녀석에게 결국 나와 같은 민족의 피가 섞였구나라는… 아, 두 번째는 근거가 아니라 그냥 동질감에 대한 ‘희망사항’이려나…?
암튼, 시간상으로 보아도 이인경 부부가 대월을 떠난 것이 25년 정도 전이니까, 지금까지 추정했던 흑주의 나이와도 얼추 맞고… 음… 그리고 조금 전까지는 이인경 부부가 겪었던 비극 때문에 나쁜 쪽으로만 생각이 흘렀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흑주 입장에서는 어차피 없는 것으로 치고 살아 온 부모의 새삼스런 사망 확인보다는 그 부모가 ‘훌륭한 인물’이었다는 ‘새롭고 구체적인 인식’ 자체, 그리고 혹시 이번에 아직 살아있는 외가 친척들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 역시 비화곡주 외의 사람들과 흑주를 이어주는 훌륭한 끈이 되어 줄 수 있지 않을까?
후…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을 정리되어가자 나는 기분이 반전하여 천장을 향해 몸을 돌려 누웠다.
“야, 흑주…! 곧 우린 답파화미인의 고향으로 가게 될 건데……”
나는 그렇게 불쑥 말을 떠냈다가 말을 맺지 못하고 슬며시 말꼬리를 흐렸다. 공연히 희망적인 말만 늘어놓았다가 결과가 썰렁하면 더 미안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든 때문이었다.
“에… 그건 뭐 일단 가보기로 하고… 아, 그보다 너, 아니 우리 ‘수화’… 아니 ‘암호’ 새로 정하자.”
하던 말 얼버무리려고 뜬금없이 다른 화제로 돌리는 내 나쁜 버릇이 전에 잠깐 생각했었다가 미루고 있었던 일을 이제야 실행하게 된 셈이다.
그 동안, 녀석 목소리가 듣고 싶어 억지로 말을 걸어보긴 했지만 만약 앞으로 녀석이 다시 입을 연다 해도 사실, 흑주에게는 말하는 것 자체가 너무 어려운 일이다. 어려서 앓은 병 때문인지 아니면 환경적으로 하도 오랜 세월 동안 말을 안 하고 살아서 그런지 몰라도 흑주는 목소리 내는 것만 간신히 할 뿐 단어 하나 말하는 것도 힘들어하는 상태이다. 게다가 흑주는 현재 거의 문맹(文盲)이라 필담(筆談)도 힘들고… 결국, 좀 더 배우고 쉬우면서도 다양한 언어 구사가 가능한 ‘우리 시대의 수화(手話)’는 내가 녀석과 언제고 진짜 ‘대화’를 하려면 필수적인 요소였다.
나는 몽몽이 제공하는 자료에 따라 천천히 수화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몽몽에게 스캔시켜 보니 역시 흑주는 새로운 암호 체계라는 내 말에 의심 없이, 부지런히 내 손짓을 따라해 보며 ‘배울 의지’를 나타내고 있어서 나는 신이 나서 한참을 열올리며 수화 교육에 열중했다. 전의 원판 녀석과는 죽여라, 기다려, 나중에 죽여 등의 편협하고 적은 수의 일방적인 ‘암호’만 교환했었다고 하던가?
얼마가 지났을까, 1차 수화 교육을 마치고 흑주에게는 ‘복습’을 지시해 놓은 내가 혼자 차를 마시고 있을 때 마침 대교가 돌아왔다. 흑주 과거 탐색의 급속도 진전, 그리고 그에 대한 긍정적인 자체 평가, 흑주에 대한 수화 교육 등의 이유가 복합되어 꽤 기분이 좋아진 내게 대교는 보고서 하나를 내밀었다. 밀봉된 겉에 ‘특급 기밀’을 요하는 문장이 새겨져 있어 나는 조금 긴장한 채 펴들어야 했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쓴 입맛을 쩍 다시며 보고서를 툭, 던지듯 내려놓았다.
“…무슨 좋지 못한 소식이라도 있습니까?”
“이거… 금포사신(錦袍死神)으로부터의 전갈이야.”
“아, 그럼 혹시……”
“응, 흑주의 천을 분석하고 조사한 결과 드디어 제조 지역을 알아냈다고… 나보고 ‘기뻐하시라’는군.”
“그 사람… 결국 한 발 늦었군요.”
“맞아. 설아가 말한 부인의 고향과 같아. 뭐… 어쨌든 이걸로 ‘재확인’은 된 셈이니까 수고했다고 답신 보내 줘. 아, 잠깐……”
나는 금포사신에게 보낼 답신의 끝에 넣을 글자 두 개를 지정해 주고 그 단어(?) 사이에 ‘ㅅ’이란 모양을 끼워 넣도록 지시했다. 대교는 대체 그게 무슨 뜻인가 궁금해했지만 나는 혼자 피식거리며 몰라도 된다고만 했다. 내가 추가한 단어는 ‘후(後)ㅅ고(鼓)’였다.
금포사신… 당신 ‘뒷북 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