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10-3화 : 묘랑(苗琅) 진하연이란 여자.(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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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2부 – 10-3화 : 묘랑(苗琅) 진하연이란 여자.(3)


2-2. 묘랑(苗琅) 진하연이란 여자.(3)

우리의 오늘 숙영지, 아니 숙영지는 장소 전체를 말하는 거고…

잠잘 숙소인 소위 폐사찰은 폭포에서 조금 상류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규모로 보면 그냥 작은 암자라고 할 수 있겠고 호젓한 주변 경관이나 근처에 폭포로 향하는 맑은 물줄기가 흐르고 있는 분위기는 전원별장이다.

암튼, 류혼을 데리고 그 전원 암자로 들어가자 안에서 진하연이 티타임 준비가 완료된 테이블 앞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실내가 전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은 암자형 카페(?) 정도의 분위기랄까? 말끔히 청소가 된 것은 물론이고 저 고급스런 테이블과 의자의 셋팅, 그리고 벽마다 진하연이 좋아하는 흰색과 붉은 색의 천이 교차되어 걸려있고 방구석 구석에 배치된 고급 촛대 위의 촛불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풍기는 등… 훗-! 이미 몇 번을 봤는데도 웬지 고개가 저어진다.

어디를 다니든 ‘후줄근한 곳에서는 절대 못 지낸다’는 저 녀석의 공주병 때문에 우리 행렬에는 물건만 실은 마차가 한 대 더 있다.

아참…! 녀석은 공주병 걸린 게 아니라 공주 맞군. 대월의 진짜 공주님!

“아까는 실례가 많았어요. 소녀 때문에 먼 걸음을 하신 분께……”

말은 그랬지만, 진하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류혼을 맞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의 태도와 음성에서는 ‘당신이 저를 슬프게 했어요. 하지만 용서해 드리겠어요.’라는 의미가 함축된 느낌이 절절히 전해진다.

“소, 소인이야말로 송구스럽습니다.”

황망히, 그리고 습관적으로 포권하며 고개를 숙이는 류혼의 반응은 좀 아까 내게 도움을 요청하던 때보다 는 조금 약해 보인다.

그러나 그건 동작의 크기 차이일 뿐 질적으로는 그보다 더한 느낌이다.

아까는 자신이 모시는 주인님을 위해 사과한 거였다면 지금은 자기 자신이 진하연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듯한 분위기라고 할까?

진하연이 권한 자리에 앉은 류혼은 우리와의 티타임 자체가 불편한 듯 처음엔 어색한 표정으로 시선처리조차 애를 먹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결심한 듯 입을 열려는 순간, 진하연이 먼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 때처럼… 여전히 급하시네요. 여자의 마음을 헤아리려면 조금은 여유를 가지는 편이 좋을 거예요.”

“아, 예……”

진하연의 말에 얌전히 찌그러져 다시 차를 홀짝이는 류혼…

근데, ‘그 때처럼 급하다’라는 건, 혹시 전에 내가 삼태자 조명환에게 칠절지독을 먹였을 때의 상황을 말하는 건가?

오호~ 역시 대단해. 아까부터 말로만 들어 알고 있는 얘기를 마치 지가 겪은 일처럼 대화 중에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저 응용력!

그리고 티타임에는 수다 떨기 바쁜 본래의 모습을 뻔히 알고 있는 내 앞에 서의 저 뻔뻔한 내숭!

음… 아직까지 나도 간단히 무릎을 꿇긴 싫지만, 역시 나보다 한 수위의 불여우… 응…?

근데 나 아까 ‘저 불여우가 류혼과, 그리고 저 먼 곳의 삼태자 조명환을 어떻게 구워 삼을지 궁금해지는군.’이란 생각을 했었지?

‘불여우’란 단어와 ‘구워 삼는다’는 표현은 각각 별 뜻 없이 쓴 건데 가만 생각해보니 아귀가 맞네?

불여우니까 불로 상대를 구워 삼는다…? 그거 나름대로 말 되는……

“저, 곡주님!”

“응?”

또 영양가 없는 생각에 빠지려는 참에 불러줘서 고맙긴 한데… 류혼은 내게 뭔가 재촉하는 듯한 표정으로 살짝 인상을 긁는다.

훗-! 짜식. 자기는 도저히 말을 걸 엄두가 안 나니 나보고 설득이든 뭐든 해달라 이 거지?

“크흠! 음… 설아야. 이거, 말인데……”

나는 조심스럽게 화월홍을 꺼내 들며 진하연의 눈치를 살폈다.

진하연과 나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우리 사이에서는 마치 초고속 무선통신망처럼 빠르게 무언의 대화가 오갔다.

‘야, 빨리 ‘바톤터치’해야지! 나 더 할 말 없단 말야.’

‘알겠어요. 오라버니!’

‘잘해야 한다, 응?’

‘걱정 말아요. 내가 누구유?’

이런 구체적인 대화가 약 0.5초 사이에 오갔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최소한 ‘바톤터치 요청과 수락’이라는 데이터 송수신은 제대로 오간 것 같았다.

어쨌든 명색이 쌍둥이 아닌가.

진하연은 자신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를, 긴장하며 지켜보는 류혼 앞에서 의외로(류혼에게만) 순순히 내게서 화월홍을 받아들었다.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아~! 하는 반가움의 탄성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류혼…

그러나 진하연은 손에 들었던 화월홍을 이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어째서 돌려주지 않으셨지요, 오라버니?”

나는 다시 실망하는 류혼을 슬쩍 살피며 대답했다.

“험, 그야… 삼태자께서 애써 보내 주신 선물인데 이대로 물리는 건 너무 결례가 아니겠느냐.”

“오라버니께선, 이 화월홍의 내력을 모르십니까?”

“…들은 바는 있다. 그만큼 인세에 드문 귀물이라는 얘기가 아니냐.”

내 말에 진하연은 낮게 한숨을 몰아내며 고개를 저었다.

“모르고 그러시지는 않을 터, 오라버니께선 진정… 소녀와 삼태자님이 어울리는 한 쌍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허허~ 삼태자께서 비록 일반인들이 감히 쳐다보기 도 어려울 지체라고는 하나 너와 나의 신분도… 웃~!”

진하연이 갑자기 눈에 띄게 당황한 태도로 손을 뻗어 내 입에 손가락을 대는 바람에 나도, 아니 나는 더 당황하여 입을 다물며 황급히 머리를 굴렸다. 뭐지? 얘가 왜 갑자기 이러 지?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한 건가?

“오라버니, 지금 저의 신분을 밝히시면 곤란합니다.”

“으, 응……”

진하연의 신분은 묘랑…! 현재 중원과 별로 사이가 안 좋은 ‘대월’의 공주라는 신분이 밝혀지면 확실히 상황이 어찌 변할 지 모른다. 하지만… 이 녀석 정말 신분이 밝혀질까 봐 이러는 걸까? 내가 분명 ‘신분’ 운운 했지만 구체적인 얘기를 할 생각도 없고 실제로 내가 한 말의 흐름이 그걸 밝히려는 과정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그건… 음,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예로부터 중원이 묘강을 가벼이 여기기는 했지만 너는 사실……”

“아아~ 오라버니, 어쩌자고 그 얘기를……”

음, 녀석이 오버하는 거 보니 확실하군. 녀석은 오히려 내가 지 신분을 밝히기를 원하는 거다. 만약 정말 비밀을 지키고 싶어했다면, 녀석은 여기서 그냥 본색을 드러내어 류혼을 쓱싹! 제거하는 것으로 상황 종료하려고 들었을 것이다. 뭐… 어쨌든, 이미 류혼은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는 진하연에게 새삼스러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이제 와서 뭘 숨기겠는가. 설아는 본래 당연히 나와 같은 중원인이나 사연이 있어서 묘강에서 자라게 되었었지.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묘강, 아니 대월에서 ‘묘랑’이라 불리고 있다네.”

“묘랑이라 하면 대월의 황제가 가장 총애한다는 공주…? ‘묘강제일미’이자 놀라운 지략으로 여제갈(女諸葛)이라고도 불린다는 그……”

뭐, 그렇다고는 하더군. 근데 이 친구, 나도 진하연을 만나기 전에는 잘 모르던 얘기까지 잘 아네? 응…? 왜 자리에서 일어나지? 뭐야~? 또 한 쪽 무릎을 꿇으며 인사를 하네?

“일국의 공주를 몰라 뵈었습니다.”

흠… 야만국의 공주라고 시비를 걸기는커녕 제대로 공주 대접을 하는군. 적어도 조금 떨떠름한 반응 정도는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 기색도 없군 그래.

“그만 일어나서 자리에 앉으세요.”

오늘 우리 만난 이후 계속 고개 숙이느라 바쁜 류혼이 다시 자리에 앉자 진하연도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중원인들은 과거 오래도록 우리 대월의 땅을 지배했었기 때문에 평소 우리를 가벼이 여기고, 최근 갈수록 대월의 국력이 융성해지는 것을 못마땅히 여긴다 들었거늘……”

진하연의 말에 류혼이 대뜸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일부 좁은 소견을 가진 자들이 있는 지는 모르겠으나 대월은 엄연히 독립된 이웃의 왕조인데 어찌 함부로 여길 수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그 분께서는 평소 자주 대월과 저희 대송(大宋)은 한 배의 형제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류혼의 말투에 약간, 미미하지만 흥분 같은 것이 느껴진다. 진하연은 그런 류혼에게 기쁘게 웃어 보이며 다행이라는 듯 말했다.

“아~ 그랬었군요. 저는 그런 것도 모르고……”

모르고…? 그게 아니라 이 불여우는 이미 거기까지 꽤 차고 있었던 것이다. 일부러 생쇼를 보이며 모르고 있던 척을 해서 더 극적으로 ‘자신에게 잘 보일 길’을 제시해 준 것이다. 과연… 류혼은 삼태자 조명환이 본래 대월에 매우 호의적이라는 사실을 자기가 진하연에게 알리게 된 것을 몹시 기뻐하는 눈치였다.

“진소저께서는 괜한 걱정을 하셨습니다. 그 분께서 진소저가 바로 묘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오히려 더욱 기뻐하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제 말은 결코 거짓이 나 그냥 하는 말이 아닌……”

내친 김에 더 점수를 따기 위해 애쓰는 류혼을 진하연은 손을 저어가며 막았다.

“그런 얘기까지 듣고 싶지 않습니다. 삼태자님의 뜻은 여러모로 감사하지만, 지금은… 그래요. 지금의 소녀에게는 그 분이 보내신 이 화홍월이 너무 부담스럽기만 할 뿐입니다.”

기집애, 한 번 슬쩍 풀어 줬다가 다시 원점으로 돌리는군.

“아시다시피, 화홍월과 흑태양 두 개의 팔지는 장래를 약속한 남녀가 나누어 가지는 것. 저는 그 뜻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진소저, 아니 묘랑!”

부르긴 재라고 불러놓고 또 날 본다. 쯧~! 이 친구야. 재하고 나하고 한 통속이야.

“흐흠~! 이제 걱정했던 신분상의 문제도 해결된 것 같거늘, 왜 또 그러느냐, 응?”

“오라버니, 제가 또 같은 말을……”

“설아야!”

강한 음성으로 진하연의 대사를 막은 것은, 사실 별 뜻은 아니고… 단지 현재의 상황이 나도 점점 갑갑하게 느껴졌고 계속 실상을 모르고 놀림받고 있는 류혼이 좀 안되었기도 해서 어떻게든 빨리 마무리를 짓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아니 내가 누구보다 더 네 마음을 아는 사람이다. 그러나 오라비로서 이런 훌륭한 혼처를 놓치고 싶지 않은 심정도 사실이고… 후우~ 우리 이 일은 미리 선을 그어 놓지 말고 좀 더 시간을 두고 결정하자 구나.”

“하지만 오라버니.”

“어허~! 네가 계속 내 뜻을 무시할 셈이냐?”

“……”

음… 어째 대사칠수록 ‘사극’에 출연한 기분이 되어 가는군.

“일단, 이렇게 하자. 이 화홍월은 당분간 내가 가지고 있으마.”

“하지만 소녀는……”

“나는, 네가 언제고 마음을 돌려 이걸 찾아갈 때를 기다리겠다.”

안 돌리면 그냥 내가 먹구…라는 대사는 속으로만 하며 나는 류혼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이번엔 삼태자께 이 정도 소식밖에 전하지 못하겠네. 화홍월은 우리 ‘남매’가 일단 받았으나 조금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그렇게 전해주게.”

쳇~! 좀 떨떠름한 표정이네? 그냥 좀 더 진하연이 주도하도록 놔둘 걸 괜히 내가 결론을 내려버렸나? 어디, 진하연은… 음, 저 녀석이야 현재 변신 모드이니 표정으로 감 잡긴 어렵겠지만 일단 별다른 대사가 안 나오는 걸 보니 녀석도 더 이상 다른 방향을 제시할 마음은 없는 모양이지?

대충 마무리는 되었다고 해도 깔끔하지는 않은 것 같아, 나는 여동생을 엘리트이며 권력 2세(말이 되나?)와 맺어주고 싶어하는 오빠의 모습을 연출하느라, 그간 가끔 알아보았던 삼태자에 관한 얘기를 좋은 내용만 골라서 진하연에게 해주기 시작했다. 진하연도 ‘삼태자가 괜찮은 남자라는 건 나도 인정한다.’ 식의 긍정적인 태도로 맞장구를 쳐줘서 그나마 류혼의 표정이 조금 나아진다 싶었을 때, 불현듯 밖에서 대기 중이던 대교가 들어와 나를 찾았다.

“곡주님. 곡으로부터 중요한 연락이 와 있습니다.”

“그래? 무슨 일이지?”

“그게, 기밀을 요하는 일인지라……”

대교의 말에 류혼이 눈치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자 진하연도 삼태자에 대해 뭔가 물어볼 것이 있다며 함께 일어선다. 나는 녀석들을 다시 자리에 앉히고 계속 티타임 가지며 얘기하라고 하고 내 쪽에서 대교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내키지도 않는 연기를 장시간 하려니 조금 지겨워져서 어차피 바람이라도 좀 쐬고 싶던 참이었다. 나는 그 사이 어둠이 섞이기 시작한 맑은 공기를 심호흡으로 들이켜며 시원한 물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비화곡에서 온 기밀을 요하는 연락이 궁금하기는 했지만 먼저 입을 열지 않고 조용히 뒤에서 따라오는 대교의 태도로 보아 그리 급하고 또 나쁜 소식 같지는 않았다. 나는 금방 더 어둑해진 계곡물 근처에서 아까 봐두었던 바위 위에 자리잡아 앉고 나서야 소위 ‘중요한 연락’의 내용을 물어보려고 대교에게 고개를 돌렸다. 날 따라 옆에 앉은 대교가 웃음을 앞세워 먼저 입을 열었다.

“후후~ 곡주님도 그렇지만, 과연 곡주님의 동생… 아가씨도 정말 대단하시네요. 소령이는 아까 아가씨와 진유준님의 사연을 곧이 듣고 자기 일처럼 어찌나 슬퍼하던지… 훗-! 우리 소령이는 너무 순진해서 탈이에요.”

“하핫! 그건 그래.”

“헌데, 아가씨께서는 저 류혼이란 사람에게 무엇을 알리시려는 거죠?”

“응? 알아…낸다고?”

“예. 아닌가요? 곡주님이 저를 이용해 자리를 피하신 것도 다 그런 이유로……”

윽-! 대교의 말이 실팍한 몽둥이가 되어 내 뒤통수를 치는 기분이었다. 어째 중요한 연락에 대한 얘기는 꺼내지도 않고 딴 소리만 하나 했더니, 그건 그냥 날 불러내기 위한 핑계…? 진하연이 대교에게 ‘내 명령’이라고 하며 그렇게 시켰던 모양인데… 저 불여우 진하연, 처음부터 ‘일단 결론’이 나면 그때부터 날 따돌리고 단독으로 뭔가 또 할 생각이었다 이거지? 으… 제기, 이미 거리가 너무 멀어서 몽몽으로 도청하기도 어렵고… 빌어먹을, 막판에 당했나?

“곡주님…? 제가 무어 잘못 드린 말씀이라도……”

“아냐, 그런 거 없다. 단지… 설아가 내 의도대로 잘 하고 있는지 걱정이다.”

내 말에 대교가 웬지 묘한 표정으로 쿡쿡 웃는다.

“왜, 그래?”

“…죄송합니다. 후후, 저희들이 보기에 아가씨는 설사 상대가 악마라 하더라도 오히려 유혹하여 이용할 수 있는 분… 헌데 곡주님이 보시기에는 미덥지 못한 모양입니다.”

대교의 말에 난 인정한다는 의미를 가장한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진하연이 차라리 걱정해 줘야 할 타입의 동생이었으면 나도 좋겠지만… 아무래도 저 녀석을 상대로는 나 자신이 걱정이다. 제기, 상황은 무지 궁금한데 당장 다시 카페(?) 안으로 돌아가면 진하연이 나중에 핏대 낼 것 같고… 근처에서 서성댈 핑계도 마땅치 않고… 에이, 모르겠다. 그 녀석이 대체 개인적으로 뭘 노리는 건지는 몰라도 설마 지 오빠 말아먹을 짓을 하진 않겠지?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애쓰며 착잡한 기분으로 앉아서 막 떠오르기 시작한 달을 바라보며… 달… 음… 달, 거 밝네? 오늘이 보름이었나? 어… 대교가 슬며시 어깨를 기대온다…? 음… 난 지금 착잡한… 착잡한 건 착잡한 건데… 둥근 달은 둥근 달이고… 모르겠다. 나 중에 착잡하자.

[주인님. 주인님! 정신차리십시오!]

이쒸~ 뭐야 몽몽. 한참 분위기 좋은데……

[금일 숙소에서 진하연과 류혼, 두 명이 나오고 있습니다. 참고로, 현 장소로 이동 후, 경과한 시간은 58분 34초입니다.]

응…? 뭐야? 잠깐 몇 마디 나눈 것 같은데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났어?

“곡주님… 이만 돌아가시렵니까?”

대교 녀석, 중요한 손님인 류혼이 있으니 당연히 돌아가 봐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섭섭함이 배어 있는 음성을 내는 걸 보니 얘도 시간 가는 줄 몰랐던 모양이다. 물론 나도 무지 아쉬웠지만… 이미 진하연이 우릴 찾는지 미령이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제기, 이 여러 가지로 얄미운 여동생 같으니라구!

돌아가 보니 류혼은 이미 자신에게 배정된 개인 막사로 갔다며 진하연이 혼자 날 기다리고 있었다.

“야, 너, 나까지 따돌리고 대체 뭐한 거냐?”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진하연은 잠시 키득대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라면… 이미 짐작하셨을 텐데요?”

“글세, 이 나라 황실의 비밀이라도 알고 싶었냐?”

짐작이 틀릴 걸 대비해 반 농담식으로 대꾸했지만 진하연은 두 손 모아 박수를 치며 웃었다.

“과연, 오라버니! 후후~ 제 입장에서는 중원 황실의 동정을 살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래, 류혼이 순순히 현재의 황실 상황을 말해 주든?”

“후후~ 제 녀석이 어쩌겠어요. 자기 주인이 제 눈밖에 나는 걸 막으려면 무얼 묻든 숨김없이 밝힐 수밖에……”

어쩐지… 삼태자의 청혼을 원만하게 넘기는 본래 목적치고는 지나치게 지루할 정도로 같은 패턴을 반복한다 했더니, 계속 치고 어르며 류혼의 진을 뺀 건 그런 목적 때문이었군. 이 녀석이 대월의 2인자 격인 묘랑으로서, 이웃 강대국 정부에 대한 정보를 확보해두고자 하는 건 이해가 간다만, 결국 그걸 겨우 몇 시간 투자해서 해 냈다 이거지?

음… ‘마타하리’…던가? 어렸을 때 본 책의 내용대로라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여자 스파이였던 이 마타하리는 수많은 연합군 측 고위 간부들을 유혹하여 중요한 정보를 빼냈고, 결국 연합국이 그녀 하나로 인해 입은 피해를 추정해 보면 10만 명이 넘는다고 하던데… 이거 중원 황실도 그 짝 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훗~! 생각해보니 연극이 아니라, 정말 삼태자에게 시집가는 건 어떠냐? 삼태자 만한 남편감도 없을 테니 너도 좋고, 양국의 우호에도 도움이 될 텐데……”

“어머…? 오라버니는 아까도 연극이 아니었나 봐? 흥~! 다시 말씀드리지만, 오라버니의 설아는… 시집 안 가요.”

“야, 니가 애냐? 지금 나이가 몇인데……”

“후후~ 그럼 시집 안 간다는 말은 취소! 하지만 역시는 지조를 잃고 싶지 않아요. 꼭 시집을 가야 한다면 정·혼·자에게 가야지요.”

“너… 설마.”

“흐응~ 뭐가 설마에요? 진유준님이 소녀의 정혼자라 고한 건 오라버니면서.”

“야, 그건……”

내 반응에는 아랑곳없이 진하연은 문제의 화홍월을 들고 만지작거리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흥~흥 가능하면~ 흑태양도~ 입수해야지~ 흐응~ 우리~ 유준님께~ 드리려면

아아- 불쌍한 우리 삼태자 조명환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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