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18-1화 : 천가장(天家莊)의 후계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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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2부 – 18-1화 : 천가장(天家莊)의 후계자.(1)


원판이 특별히 자신만의 공간으로 만들어 놓은 와룡전.

여기엔 너무나 당연하게도 비상시 탈출로가 있다. 전체적인 구조를 보면 비화곡 본단 지하의 성지보다도 더 요새화된 형태인데, 결정적인 차이는 흑쌍살이나 아수라백작 같은 지킴이들이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약 40분 전. 나는 부비트랩 설치 후 이곳 예의 비상 통로의 입구로 왔는데, 그 사이 대교는 혼자서 그 많은 짐을 다 옮겨 놓은 상태였다. 물론 대교는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지만 당금 사마외도의 새로운 여신으로 추앙받기 시작한 대교가 단순 막노동을 하면서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지… 역시 ‘너무나 자상했던 곡주님과 달리 이 인간은 아주 못됐어’라던가… 음… 그래도 지금은 어쩔 수가 없다. 원판몽몽의 지시대로 사갈새끼의 잔당을 추적 중인 부하들과 합류하기 전까지는 나나 대교나 직접 뛰는 수밖에…….

암튼, 솔직히 이 길고 어두운 탈출로를 대교와 손 꼭 붙잡고 걸으며 옛정을 되살리는… 그런 여정을 은근히 기대하기도 했었지만, 역시 현실은 가혹했다. 짐 챙겨서 출발한 지 불과 40분 만에 대교가 슬며시 내 눈치를 살피며 물어왔던 것이다.

“진대가… 잠시 쉬었다 가시겠습니까?”

“아, 아니… 괜찮아. 너야말로 힘들지… 않니?”

“전 아직 괜찮습니다만… 진대가께선 아직 건강이 회복되지 않아 걱정입니다.”

“하핫~! 그래도 이 정도쯤이야… 헥, 헥……!”

에구구, 쪽팔리게 호흡 조절에 실패했다. 기집애… 왜 말을 걸고 그래. 힘들어 죽겠구만.

“어멋-! 제 신에……”

뜬금없이 신발 속으로 돌이 들어갔다며 걸음을 멈추는 대교… 에구, 기특한 것.

“그, 그럼 잠시 쉬었다… 헥…! 갈까……?”

제기… 역시 항상 난 자존심 때문에 자폭의 길을 걷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자잘한 짐 모두 더블백에 몰아 넣어서 혼자 매는 것이 아니었는데… 으… 어깨의 감촉으로 보아 아무래도 전투력 측정 때의 40킬로그램 군장보다도 무거운 것 같다. 이제 와서 대교더러 매라고 하기는 죽기보다 싫고… 또, 대교와 함께 들고 가야 하는 상자도 꽤 묵직하고… X됐다.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 와룡전… 아니 비화곡을 벗어날 수 있을까요?”

“글쎄. 전에는 하루가 꼬박 걸렸었는데… 지금은 짐이 있으니 더 걸리겠지.”

“그 짐… 저와 교대로 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 그래!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나는 그걸 억지로 다시 밀어 넣었다.

“아니야. 난 후반에 강한 타입이라구. 체력 단련도 되고 좋지 뭐.”

으… 역시 자폭… 그러나 후반에 강한 운운은 아주 빈말이 아니었다. 난 군대에서 행군할 때도 100킬로미터를 넘긴 후까지도 혼자 팔팔하곤 했고 그래서 ‘행군 체질’이라는 소리를 듣곤 했었다.

행군 체질, 나 진유준 하사… 음… 다행히 이번에도 그 명성(?)에 흠이 가지는 않을 것 같았다. 계속 땀에 절은 채 걷다 보니 점점 몸이 풀리는 것이 느껴지더니 본래의 내 리듬, 50분 행군에 10분 휴식을 반복하는데 무리가 없었다. 그런 내 저력(?)에 대교가 보내는 감탄 섞인 시선도 맘에 들고…….

그나저나… 처음엔 힘들어서 잘 몰랐는데, 이 탈출로도 사실은 비화곡의 성지 못지 않게 분위기 참 썰렁했다. 아마도 기본적으로는 자연적으로 생성된 동굴인데, 꽤 많은 인력을 동원해 몇 군데를 뚫어 연결시키는 등 확장 공사를 통해 완성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공사를 했던 사람들… 그들이 아직도 가끔씩 모습을 드러냈다. 당연히, 뼈만 남은 시체로 말이다.

귀신의 집을 몇백 배로 확장해 놓은 듯한 탈출로를 얼마나 걸었을까… 좀 지겹다 싶으면 나타나는 원판의 진법 덕분에 그리 심심치는 않았지만, 제기… 역시 대교와 단둘이 걷는 데이트 코스치고는 최악인 셈이었다.

“대교… 힘들겠지만, 조금만 더 참아 다오. 이제 반 정도는 지나 왔으니까.”

행군 체질답게 이젠 오히려 격려를 해 주기까지 하는 나를 향해 대교가 오랜만에 싱긋 웃어 보였다. 음… 갑자기 기운이 나는… 오워어~ 걷자. 막 걷자.

대교의 미소 파워에 기운이 났다고는 해도 역시 힘든 건 힘든 거인 탓에… 우리는 중간에 한 번 야영을 하며 쉬어야 했고… 결국 우리가 목적지에 도착한 것은 출발한 후 자그마치 30시간이 넘었을 때였다.

드디어 나타난 두꺼운 철문… 그것을 옆으로 밀어 열면 다시 커다란 재단의 뒷부분이 우리 앞을 가로막는다. 조심스럽게 재단을 돌아 앞으로 나선 대교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실내를 살폈다.

“이, 이곳은… 설마……”

결국 재단에 새겨진 글까지 읽은 대교가 믿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긴, 나도 처음 여기에 와봤을 때는 좀 놀랐었다. 탈출로가 연결된 곳은 인적 없는 산 속 같은 데가 아니라, 대교도 잘 알고 있는… 제법 유명한 가문의 조상님을 모신 장소인 것이다.

“천가장(天家莊)이라 하면 당대(唐代)부터 많은 인재들이 관직에 올랐던 유서 깊은 가문… 설마, 설마… 천가장이 곡주님의 안배였을 줄은…….”

대교는 당장에 ‘역시 우리 곡주님은 멋져~!’ 모드로 들어갔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뭐, 이 천가장이 비화곡주의 숨은 세력이라던가, 그런 건 아니고… 그저 약간의 친분이 있는 사이랄까… 그런 정도인 모양이야. 이 출구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것도 현재 장주인 ‘천수영’이란 사람뿐인 것 같았고 말야.”

흠… 내 설명에도 대교의 감동이 별로 줄지는 않는 것 같구먼. 하긴… 이만한 대비도 대단한 거긴 하지만…….

“아, 누군가 이 쪽으로 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음… 일단, 숨자.”

몽몽의 스캔으로는 지난번에 잠깐 만났었던 점잖은 학자풍의 천수영 장주와 또 다른 누군가, 두 명인데… 음… 나도 아직 이 집의 어느 선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니 일단 상황을 살피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나와 대교가 재단 뒤로 숨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면의 문이 열리고 두 명의 사내가 실내로 들어왔는데, 이어서 들리는 소리와 몽몽으로 스캔되는 영상으로 보아 천수영 장주와 그의 아들이 조상님께 문안 인사를 드리러 온 것 같았다.

음… 어쩐다? 아들까지는 괜찮으려나……?

“흠… 아무래도 선조께서 납신 것 같지는 않은데… 어쩔까요?”

“허허~ 손님 놀라시겠다.”

…엑! 뭐냐, 이 대화는…! 에구, 나로군. 정말 더러워서… 나도 빨리 무공을 익히든지 해야지 원.

“험, 험…! 실례…했소이다.”

내가 어색한 태도로 슬쩍 모습을 드러내니, 천수영 장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껄껄 웃음을 터트렸고, 그 옆의 아들내미(내 또래로 보이는)도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곡주께서 다음에는 의 형제분이 오실지 모른다고 하더니… 응……?”

천수영 장주와 아들내미의 눈이 거의 동시에 휘둥그레지고 있었다. 물론… 내 뒤에 추가로 등장한 절세미녀 때문이었다.

“하핫~! 이거야, 선조께서도 놀라 눈을 뜨시겠습니다.”

약간 경박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아들내미의 옆구리를 쿡 찌른 천수영 장주가 험험, 헛기침을 했다.

“흠… 저는 이 천가장의 장주 해인(海印) 천수영이라 합니다. 이쪽의 모자란 놈이 제 자식놈, ‘천우신’이라 부르시면 됩니다.”

천우신… 나이는 나와 비슷해 보이고, 약간 가벼워 보이는 인상이긴 했지만 웬지 그리 불쾌한 느낌은 들지 않는 청년이었다.

“저는 비화곡주의 의형제, 하사 진유준이라 합니다. 이쪽은 비화곡주 호위대의 수장인 대교입니다.”

음… 약간 화기애매하긴 했지만, 일단 이 두 부자는 확실히 우리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화곡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지만 대대로 서로 터치하지 않고 지낸다는 이 천가장… 설마 대천마도 우리가 이쪽으로 튀어나오는 건 예상 못했겠지…….?

우리가 천가장을 나선 것은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나지 않은 후였다. 천장주는 며칠 쉬다 가기를 권했지만, 그럴 여유는 없었기에 우린 부탁한 마차가 준비되자마자 바로 굿바이 인사를 해야 했다. 천가장은 본래 강호인들의 다툼에는 끼어들지 않는 방침이라 앞으로도 함께 싸우는 전우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천장주는 원판에게 꽤나 호의를 가지고 있었는지 우리에게도 무척 친절했고 좀 더 뭔가 해주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했다. 물론, 그 전에 원판의 죽음을 알게 되자 무척 비통해 하기도 했고…….

음… 예상은 했지만, 역시 아직은 원판의 죽음이 외부로 알려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비화곡주의 죽음이라는 특급 사건이 이후 강호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 처리 순서일 것이다. 우리로써는 대천마가 완전히 비화곡을 접수해 버리기 전에 튈 만큼 튀어 두는 편이 좋겠고… 음… 지금은 물론 묘강으로 가서 진하연의 보호막 아래 들어가는 것이 최고 안전한 길일 것이다. 그러나 역시 사갈새끼의 잔당을 먼저 처리하지 않고서는…….

“저어… 진대가.”

마차 안에서 대교가 조금 곤란한 태도로 말을 걸어 온 것은 또 다른 문제 때문이었다.

“저 분… 어디까지 따라올 생각인 걸까요?”

“그, 글쎄… 도움을 받는 처지이니 자꾸 가라고 하는 것도 그렇고… 참.”

천가장의 후계자, 천우신. 이 남자가 우리의 새로운 문제였다. 우리끼리 보내기는 너무 불안하다며 거절하기도 전에 자기가 먼저 말고삐를 잡고 마부를 자처하기 시작한 저 친구… 뭐, 대교만은 못해도 무공이 상당한 것 같았고 천가장의 후계자라는 신분이 우리의 도피행에도 큰 도움이 되기는 했다. 그래도 대교는 이번 일에 외부인이 뜬금없이 끼어든 자체가 불만인 것 같았고, 나도 저 쾌활한 청년의 동행이 그리 편치가 않았다. 저 인간, 자기 아버지와 달리 원판과 그리 친분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아무래도 눈치가 대교에게 필이 꽂힌 거 아닌가 싶었다.

천가장을 나선 후 열흘 정도가 지났을 때. 진유준의 몸으로 시작한 강호행은… 허무할 정도로 아무 일도 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게다가 열흘째 되는 날 대교가 애초 동생들과 약속한 장소라는 곳에 남겨진 춘전(春典, 암호)을 발견하여 우리의 여정은 곧바로 방향이 정해지게 되었다.

“음, 제가 참견할 일은 아니지만… 두 분의 현재 형편 상, 비화곡의 춘전을 연락 수단으로 쓰는 것은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천우신이 그렇게 끼어들자, 대교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 동생들도 그리 아둔하지는 않습니다. 전에 동행했던 묘강 무사들의 춘전을 사용했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아, 그랬었군요.”

감탄했다는 표정으로 조금 과장되게 껄걸 웃던 천우신은 슬며시 내게 물었다.

“아가씨께서… 어째 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려.”

“…천공자께선 겨우 열흘 정도의 시간 동안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거 아닐까요?”

음… 나도 너 별로 안 좋아해. 라는 뜻이…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났을까? 어쨌든 우리에게 엄청 도움을 주고 있는 사람에게 너무했나 싶어 사과를 할까도 했지만… 천우신은 그런 우리의 반응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또 혼자 껄껄댄다. 음… 도움도 도움이지만… 이 친구는 과장된 웃음이나 기타 행동도 어째 그리 어색하거나 밉상이 아니라고 할까…? 좋은 친구라는 느낌이 들 때마다 한편으로는 괜히 불쾌해지는 건 역시, 대교 때문일 것이다. 성격 좋고, 가문 좋고, 같은 남자가 봐도 꽤 괜찮은 마스크… 에이~ 설마, 대교가 그렇게 지조 없는 소녀도 아니고… 에구, 정신 차리자 진유준. 너 답지 않게 무슨 질투냐, 질투가!

우리가 찾아 나서기 시작한 장소는 고룡포(孤龍浦)라는 곳이었다. 난 처음 듣는 지명이다 싶었지만, 지도를 잘 살펴보니 우리와 꽤 인연이 깊은 곳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남해오신룡(南海五新龍)… 혈의승 사건 때 날 구해 주었던 그 귀염둥이들의 고향인 와용촌(渦溶村)… 그 바로 옆 동네가 고룡포였던 것이다. 음… 그러고 보니 남해오신룡들이라면 엄청 막강한 전력이 되어 줄 텐데… 아니, 아니다. 아무리 아쉬워도… 본래 내가 은혜를 베푼 것도 아닌데 그 애들까지 위험하게 할 수는 없었다. 쳇… 녀석들이 보고 싶긴 하지만… 참자, 참어.

고룡포에 도착한 것은 다시 오일이 더 지났을 때였는데, 어디선가 바다 내음이 풍기는 것이 느껴질 때쯤… 드디어 대교가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천공자… 지금까지 입은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곡주님의 원한을 씻고도… 만약 소녀가 살아 있다면, 반드시 은혜를 갚도록 하겠습니다.”

“허허~ 이거야. 너무 살벌한 말씀만 하시는구려. 하지만, 그 약속 잊지 마시오. 내게 은혜를 갚으려면 반드시 살아 돌아와야 할 것이니 말이오. 그리고… 본인은 기왕에 집을 나섰으니 조금 더 세상을 돌아볼까 합니다. 부디 좋은 소식이 들려오길 기대하지요.”

천우신은 특유의 매력적인 웃음과 함께 돌아섰는데, 그 전에 내게는 ‘다음엔 꼭 술 한잔 같이 합시다’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동안은 그에게 다소 쌀쌀맞게 대한다 싶었던 대교지만, 막상 떠나가는 천우신에게는 진심 어린 감사의 표정으로 새삼 고개를 숙였다. 음… 역시 좋은 친구 같은데… 속 좁게 군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제대로 친해지지 못한 것이 섭섭하기도 하고… 하지만… 왠지 반드시 또 만날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군. 그때는 정말 마음을 비우고 술 한잔 나누는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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