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18-2화 : 천가장(天家莊)의 후계자.(2)
약간 의외다 싶을 정도로 깔끔하게 돌아선 천우신이 멀어져 가자, 나와 대교는 웬지 멋쩍은 기분이 되어 그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소녀가 저 분께 너무 많은 실례를 범한 것 같습니다.”
“그야, 나도… 음… 비화곡을 나선 후 우리가 너무 마음의 여유를 잃었었나 보다. 사람의 호의를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내 말에 대교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렇다 치고… 대교 같은 경우, 천가장을 나서기 전에 대천마에 대한 사실을 들은 이후 더욱 신경이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본래 대교도 어느 정도 대천마를 의심하고 있었던지 생각보다 격렬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일단 적이 확실해지자 나름대로 더 긴장되고 생각이 많아진 모양이었다.
배신자가 다름아닌 대천마… 음… 내가 자꾸 천마 대장로를 대천마라고 하는 건, 그의 본래 명호가 대천마였기 때문이다. 원판의 사부에게 처음 패했을 때, 스스로 대(大)자를 뚝 떼어 버렸다나…? 암튼 그 대천마가 적이 되었다는 건 나도 사실 원한을 떠나 좀 무섭다. 대천마는 말하자면 원판의 사부의 강력함에 원판의 두뇌가 합쳐진 느낌의 인물이랄까…? 뭐… 양쪽 측면 다 최고가 되지는 못했으니 짝퉁이랄 수도 있겠지만, 문제의 원판 사부와 원판이 사라진 이상 사실상 현 시대의 가장 무시무시한 마인(魔人)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약점이라면 ‘나이’를 들 수 있겠지만 자기 말대로 무지 정정해서 질기게 살 것이 분명한 분위기이고…….
생각해 보면… 야후 장로, 그 단순 무식의 상징 같은 야후 장로도 실은 혼자 똑똑한 체 하던 나보다 현명했었던 것 같다. 그 노인네, 내가 수라혈불(修羅血佛)을 피해 강호행을 택했을 때… 뜬금없이 날 찾아와 월영당주의 고향에 가고 싶다고 한 건… 아무래도 대천마의 움직임을 감 잡았던 모양이다. 문제는 나도 이미 그걸 알고 있을 거라는 판단 하에 내 역시 내 쪽에서 대천마를 정리하려고 드는 것으로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말하자면… 그날 밤 야후 장로가 내게 허락을 구한 것은 ‘입장 난처하니 난 잠시 피해 있고 싶소.’였던 것이다. 난 영문도 모르고 ‘총관까지 일가족이 다 피해 있으쇼.’라고 한 셈이고 말이다.
“대교, 너 소진광 장로… 아니, 월영당주의 고향이 어딘지 아니?”
“소장로님과 같은 사천의 어느 지방이라는 정도밖에는…….”
월영당주는 정보 조직의 짱답게 그녀 자신에 대한 정보도 거의 극비로 다루어졌었다. 물론 극악..이었을 때의 내가 알려고 들면 못 알 것도 없었겠지만, 그 때는 그녀의 신상이 그리 궁금하지가 않았으니… 음… 역시 야후 장로 일가족을 찾으려면 우리 쪽에서 소문을 내는 방법이 가장 빠르려나? 그러려면 지금 당장은 곤란하고… 역시 묘강으로 짱 박힌 후가 좋겠지? 아니, 아니… 내가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는 걸까…? 아무리 우리와 인연이 깊은 일가이긴 해도 그들이 꼭 우리편이 되어 주리라고는…….
“다른 장로들 중에서 소장로께서는 반드시 우리 힘이 되어 주시겠지요. 평소에도 천마 대장로를 탐탁치 않게 여기는 분이었고……”
대교의 말에 나는 무심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겠지. 하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너무 실망하지는 마. 대천마의 음모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도 비화곡을 배신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야.”
쳇…! 괜히 비관적인 얘기를 했나? 안 그래도 요즘처럼 어울리지 않는 우울함으로 무장한 대교는 싫은데… 에이~ 말 돌리자.
“일단은 가까운 곳에 있는 이들과 먼저 합류한 다음에 생각하자. 최대한 빨리 사갈의 잔당들을 정리하는 것이 순서니까 말야.”
“알겠습니다. 아마도… 그들이 먼저 우릴 찾아낸 것 같군요.”
역시 대교로군. 나야 몽몽이 좀 전에 알려줘서 알았지만, 대교는 진작부터 저 고룡포란 항구 마을의 상공을 날고 있는 ‘매’를 주목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물론 대교나 몽몽이 아무리 시력이 좋아도 창공의 매가 진하연의 심복 무사 중 한 명인 천응(天鷹)이 부리는 매 부대의 대원(?)들이라는 것까지 알아보기는 힘든 노릇이지만, 이번엔 그 증거 내지는 보충 설명(?)이 달려오고 있었다. 천응… 저 아저씨, 자기 주인 곁을 떠나서도 참 열심히 일하는 타입인가 보다.
대교와 내가 천응의 안내를 받아 소교 이하 생존자들과 재회한 것은 그로부터 두 시간 정도가 지난 후였다. 이번 강호행 멤버들은 일부 정찰 나간 인원을 빼고는 모두 고룡포 외각에 위치한 산 속의 동굴(또 동굴이다.)에 짱 박혀 있는 상태였는데, 속으로야 무지 반가운 나였으나 티를 낼 수는 없었고, 사실 기쁜 티를 낼 엄두가 나지 않기도 했다. 녀석들의 분위기는 비통 + 분노 + 허탈 + 증오… 뭐 가지가지 감정이 뒤엉켜서는 같은 편인 나도 말 걸기가 어려운 분위기에 쌓여 있었던 것이다.
“이 분이 바로 곡주님이 말씀하시던 하사 진유준님이시다.”
대교의 내 소개에 잠시 기대와 반가움으로 일렁이던 모두의 분위기는 곧 ‘어째 좀…’식의 미심쩍어 하는 반응으로 흐려지고 있었다. 노골적인 불만의 표현은 없었지만… 그래도… 내, 더러워서 정말! 잠깐이라고는 해도 내가 너희들의 주인이었던 극악… 본인이었으며, 지금은 그 극악의 형님이잖아. 근데 이 불손한 반응들은 뭐냐, 응? 죽을래? 전부 대가리 박앗~!
철모 위나, 치약 뚜껑 위에 대가리 박아 시키고 한강철교에 김밥 말이 등등 온갖 방법으로 굴려서 군기를 잡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긴 했지만… 나는 점잖게 참아 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오히려 저 살벌한 녀석들에게 칼침 맞고 밟히는 연속기로 당할 것 같아서… 음… 으… 빌어먹을! 극악으로써의 권력은 거의 물 건너갔으니 내 기필코, 저 것들을 압도할 무공을 익히고야 말리라~!
대교와는 달리 살기로만 똘똘 뭉쳐 있는 녀석들에 대한 반작용이었을까…? 난 상당히 오버해서 권력과 힘에 대한 향수를 느끼며 손에 든 독각포를… 응…? 아, 나도 이게 있긴 했지? 흠… 저것들이 나 자체보다 내 얼룩무늬 군복과 개인 화기들에 더 주목하는 것도 조금 불쾌하긴 하지만… 그래도 일단은 이 정도로 시작하는 수밖에 없겠지? 저것들에게 제대로 인정받으려면 대교 때처럼 목숨 건 군기 잡기가 필요할 테고… 에구, 내 팔자야.
녀석들과의 재회는 그렇게 무지 춥게 시작되었지만, 한 명 한 명이 내게 신고하듯 인사를 하는 과정… 거기서 나는 일단 ‘권위 세우기’를 조금이나마 이룰 수 있었다.
“혈랑대(血狼隊) 백인장(百人長) ‘백상’이라 합니다.”
“알아. 아우는 자주 자네 칭찬을 했었지. 혈랑대의 인재들 중에서도 늘 주목하게 된다고 말야.”
“아~! 고, 곡주께서…”
“혈랑대 백인장 ‘오진우’라 합니다.”
“흠, 혈랑대에서 가장 권각(拳脚)에 능하다 들었네.”
“부, 부끄럽습니다.”
뭐… 대충 그런 식이었다. 아무래도 하늘같은 곡주가 자신들 하나하나의 신상에 모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에 새삼 감격하는 거겠지만, 곡주가 그걸 일일이 얘기해 준(?) 나에 대한 평가도 따라서 상승하는 건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그렇다곤 해도… 쳇…! 눈물 난다, 진짜, 진유준.
우째 되었든……
처음 내가 극악 신분으로 강호로 나올 때 데리고 나온 인원은 대교 자매를 제외하면 총 40명이었다. 지금까지의 희생자들을 정리해 보면… 일단, 혈랑대 백인장 다섯 중 한 명 사망. 그 이하 십인장 및 일급 무사들이 이십오 명 중 일곱 명 사망… 즉 혈랑대는 총 22명이 생존했다. 생존자들 중에도 다섯 명 정도는 꽤 깊은 부상을 입고 있는 것 같으니 정상적인 동원 가능 혈랑대는 열일곱인 셈이다.
비연대 쪽은… 소교의 부관 격인 소녀 한 명 사망. 미령이 수하 세 명 전멸. 소령이 수하 세 명 중 두 명은 사망, 나머지 한 명인 ‘호초’는 배신 땡김…! 음… 호초, 그 계집애… 소령이와는 개인적으로도 꽤 친해 보였었는데… 니가 그러고도 어디 잘 사나 보자.
흐음… 정상적인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을 만한 전력이 총 이십사 명이라… 이 정도면 일단 사갈새끼의 잔당들을 소탕하는 데는 충분하려나…? 거기다가 나, 진유준. 무장 군바리 하나 추가에 묘강의 지원병 천응도 추가하고… 음… 근데, 우리 소령이를 전력에서 빼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게 좀 걸리는군.
그날 밤.
나는 혼자 늦게까지 천응과 혈랑대의 합동 보고를 검토하며 지금까지의 사건 진행 정리와 사갈 잔당 소탕 작전 수립에 몰두했다. 극악 시절에 스스로 초호화과장광고(?)를 해 놓았던 효과도 있겠고, 대교도 모두에게 직접 접해 본 나에 대해 따로 잘 설명을 했는지 차츰 모두의 시선에 ‘믿음’이 깃들기는 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앞으로 이 쌈장 부대를 잘 지휘하려면 이번 싸움에서 뭔가 보여 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난 피워 놓은 모닥불 너머의 대교와도 거의 상의를 하지 않고 아득바득 혼자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는데… 근데 제기, 그런 고민하기도 바쁜데… 왜 밤이 깊어질수록 자꾸만 동굴 한 쪽 구석으로 신경이 분산되는 건지 원…
“끄음~! 정신 산란해서 안되겠다. 어이~! 소령아…! 너 이리 좀 와 볼래?”
낙룡파에서 헤어지기 전에 봤던 모습에서 그리 변하지 않은… 살짝 넋이 나간 것 같은 소령이는 들릴락 말락 한 대답과 함께 부시시 일어서고 있었다.
“미령아! 가서 술 좀 받아 올래?”
나는 나도 모르게 막내 미령이에게 그런 명령을 내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