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19-2화 : 급청객(急請客) OR 불청객(不請客).(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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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2부 – 19-2화 : 급청객(急請客) OR 불청객(不請客).(2)


“이봐, 대교 너어…….”

순간적인 분노와 기타등등(?)의 감정을 애써 가다듬고 있자니까, 대교가 슬며시 꼬리를 아니 고개를 내렸다.

“죄, 죄송합니다. 곡주님처럼 진대가께서도 그런 남새… 아, 아니… 하여간 그런 정상적이지 못한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혐오하신다는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내가 극악이었던 시절에 무슨 얘긴가 끝에 대교와 동생들이 내 앞에서 소위 야오이에 대한 잡담을 늘어놓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이미 나에게 익숙해지고 있던 대교 자매들이 모두 놀라 눈물을 글썽일 정도로 열 받은 모습을 보인 일이 있었다. 아마 대교는 그 일을 떠올린 모양인데… 음… 나는 그런 계통 본래도 싫어했지만, 이 시대로 와서 더 그런 얘기에 민감하게 신경질적이 되곤 했다. 그건 당근… 얼마 전까지의 내 임시 육체의 용모가 바로 그런 얘기의 소재로 각광받는 슈퍼야오짱자극꽃미청년겸전직꽃미소년(이런 표현 간만이군.) 그 자체였었기 때문이다. 뭐… 비화곡주에게 반한 미녀들에 대한 이야기들은 그냥 들을 만했었지만, 원판을 향한 또 다른 절세 미남들 혹은 호걸(?)들의 구애 행각에 대한 여러 일화(주로 원판이 소년 시절에 많았다고 한다.)들은 상당히 듣기 거북한 얘기가 많았다. 뭐… 결국 원판에 의해 이 시대 중국의 그 쪽 계열 스타(?)들의 숫자가 현격히 감소했다는 전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판도 나처럼 절대 그 쪽 취향은 없었던 모양이지만… 전에 진하연으로 변장하고 다닐 때 내게 쏟아졌던 시커먼 사내놈들의 시선을 생각하면… 같은 남자라는 걸 알면서도 그런 시선을 보내는 놈이라면… 으… 괜한 기억을 떠올렸다. 대패 어딨냐, 대패~!

“공연한 말로 진대가의 심기를 어지럽혔습니다. 소녀가 잘못했습니다.”

이어지는 대교의 표면적인 사죄의 말보다도… 나는 녀석이 눈빛으로 호소하는 ‘아아~ 어떻게 해, 용서하지 않으시면 어떻게 하지…?’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윽고… 내 머리 속 계산기는 철컥철컥(?) 소리를 내며 상황 분석을 시작했다.

철컥! 순전히… 내가 오버였다. 내가 죽일 놈이다.
철컥, 대교는 달리 사심이 없다.
철컥, 대교는 단지 관찰한 결과를 들은 얘기와 조합했을 뿐이다.
철컥, 철컥… 띠리링~!
결론 – 대교는 유리처럼 투명하고 백지처럼 깨끗한 소녀다. 당근이지.
결론2 – 쓸데없는 정보 난입이 문제였다. 암.
철컥, 띠리링- 띵띵~!
최종 결론 – 두고보자, 이 못된… 비취각주(翡翠閣主) 취음란!

웬지 삐딱하고 팔불출스러운 도출 과정이었던 것 같지만… 하여간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마음을 정리한 나는 비로소 피식, 가벼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아냐, 내가 좀 오버했다.”

“오버… 훗…! 곡주께서 즐기시던 말입니다.”

“그, 그래. 원조는 나지만… 그건 그렇다 치고… 사실 네가 말한 건 꽤 중요한 정보인데 공연히 논점을 흐린 건 오히려 내 쪽이지. 내가 아직도 정신 수양이 모자라서 그래.”

“너무 겸손하신 말씀입니다.”

대교는 어느 사이 다시 자연스럽게 밝으면서도 깍듯한 표정의… 응…? 깍듯하고 예의 바른 분위기?

“그럼… 진대가께서 모든 변수를 염두에 두고 계심을 믿고 앞으로도 충실히 따르겠습니다.”

“어, 그래…….”

뭐냐, 좀 전에 사과할 때의 그 ‘애잔한 소녀 모드’가 이렇게 순식간에 사라질 수도 있는 거냐? 아니… 그러고 보니, 애초에 대교가 내게 벌써 예전의 모습을 보일 리가 없었다는 것이 더 당연한 건가……?

“천공자가 급청객(急請客, 소나기. 반가운 손님이라는 의미가 있음.)인지… 불청객(不請客, 이건 우리 시대와 의미 같음.)인지… 어쩌면 그 것이 이번 일에 있어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되겠군요.”

방금 다 일임한다고 해 놓고는, 슬며시 한 번 더 강조하고서야 대교는 깔끔한 표정으로 등을 돌려 동굴 바깥으로 나갔다. 다른 이들처럼 임무 수행을 위해 출동하는 비연대장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쓴 입맛을 다져야 했다. 이거 아무래도… 내 쪽에서 ‘다뤄지고’ 있는 것 같지……? 비취각주 취음란의 수제자가 잠깐 드러낸 여시모드에 대한 내 상념은 그리 길지 못했다. 그 직후 교대하듯 동굴로 돌아 온 천우신 때문이었다.

“오~ 드디어 복수전이 시작되는 건가요?”

조용하면서도 활기차게 돌아가기 시작한 우리측 움직임에 대한 천우신의 감상은… 역시 ‘매우 흥미롭다’인 것 같았다. 좀 전의 대화 때문에 괜히 찜찜한 마음이 남아 있긴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사실 나도 다른 사람의 시선에는 민감한 편이다. 이 천우신 도련님이 뭔가 불순한 마음으로 날 바라보았다면 내가 그걸 못 느꼈을 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대교, 이 앙큼한 것이 내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서 충격 요법을 쓴 모양이지 싶었다. 과연 저 도련님이 급청객 또는 불청객일지는… 흠… 지금까지는 확실히 가뭄으로 논바닥 쩍쩍 갈라질 때 주룩주룩 내려 준 소나기 쪽인데……. 예의 소나기 도련님께서 아까 나가서 지금에야 돌아온 이유는 부상이 깊어 계속 동굴에서 대기 중인 병력들을 위한 약을 구해 오기 위함이었다. 몽몽이 스캔한 바로는 지금 막 그가 부상자들에게 지급한 약은 확실히 이 시대 의약품 중에서도 매우 고급품(특히 가격 면에서)인 모양이었다.

“계속 이렇게 은혜를 입으니 나중 어떻게 감당할지 두렵소이다.”

“하하~ 별 말씀을! 평소 아버님께서 천하 호걸들의 본산이라 칭찬을 아끼지 않던 분들을 돕게 되어 제가 오히려 영광이지요.”

비화곡이 ‘호걸’들의 본산이라고…? 그거 혹시… 호걸이 ‘{호}환 마마 보다 무서울 {걸}…?’의 약자 아냐?

“헌데… 정말 걱정이오. 아무리 진대협과 다른 분들이 일기당천의 고수들이라 하지만 적들의 세력 또한 저리도 강대하니…….”

“천공자… 공자께선 무림인이 아닌데도 이런 일에 관심이 많군요.”

내가 조금 노골적으로 묻자, 천우신은 역시 하하~ 웃음을 먼저 앞세운다.

“검을 손에 쥔 자 중에 무림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제가 비록 나름대로는 강호의 친구들도 많이 사귄 편이긴 하나… 이런 놀라운 경험은 처음입니다. 정말 흥분되는군요.”

호오~ 이 것이 어영부영 자신이 본래 우리 일행인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하는구먼.

“하핫! 설마, 천공자께서는 앞으로도 우리와 행동을 같이 하실 생각은 아니겠지요?”

내가 마주 웃으면서도 즉각 딴지를 걸자 천우신 역시 바로 눈치를 까고 배시시(?) 웃었다.

“그야… 부디 부탁드립니다. 절대 방해가 되지는 않겠습니다.”

내가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자 천우신은 새삼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진대협, 본인은 평소 아버님과 달리 천하에 이름 높은 비화 곡주와 친분을 맺지 한 것이 한이었소. 이제야 운이 트여 그 비화 곡주조차 고개를 숙였다는 진대협과 여러 호걸들을 만났으니 이런 행운을 어찌 가볍게 넘길 수 있겠소. 이렇게… 머리 숙여 부탁이니 부디 여러분들의 무용을 가까이 지켜볼 수 있게 허락해 주시오.”

아~ 저런 명문대가의 후계자가 스스로를 이토록 낮추고 상대를 한없이 높이니 나 역시 감탄하여 마음으로부터 수긍을… 할, 턱,이,없,었다. 아무리 뭔가 부탁할 때는 상대방을 높이기 마련이라지만, 이 건 너무 오버인 것 같았다. 저 친구의 아버지, 원판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던 천가장의 장주도 저런 표현까지는 안 했다.

“감당할 수 없소이다. 저도 그 것만은 허락할 수가 없습니다. 더 이상 천공자를 위험에 빠트렸다가는 나는 다시 천공자의 아버님을 뵐 면목이 없을 것이오.”

“진대협. 나 역시 이 한 몸 건사할 능력이 있으니 그리…….”

“아니, 아니오. 천공자 일신상의 무예가 누구보다 출중한 것은 알고 있으나 이런 다수의 전투… 특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마외도의 싸움이란 그 진행을 예측할 수가 없소이다. 천공자께서는 부디 내 입장을 헤아려 주시오.”

“그, 그…….”

에… 솔직히 말해서 여기서 한 마디만 더 따지고 들면 못 이기는 척, 그냥 니 맘대로 하세요,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물러서는 기색일세? 음… 짜식… 무지하게 처량맞은 표정으로 한숨은…….

“천공자. 나 역시 어찌 천공자의 능력이 아쉽지 않겠소. 하지만… 이번 싸움은 내 의동생의 원한을 푸는 일…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손을 빌어서야, 어찌 나중 형의 도리를 다했다 하겠소.”

“…정히 그러신다면 저도 더 이상 조를 수가 없겠군요.”

“대신, 나중에는 반드시 대교와 함께 천공자를 찾아 밤새 술을 마실 것이니 그 때가서 박대는 말아 주시구려.”

“훗…! 내 어찌 두 분의 방문을 마다하겠습니까. 그럼… 아쉽지만 이번에는 이 곳에서 두 분의 무운을 비는 수밖에 없겠군요.”

이거 어째… 이 친구에게는 계속 미안한 상황만 반복되는 것 같다. 먼저 의심하고 거리를 둔 다음, 일단 보내고 나면 후회하는… 에효… 나나 대교나 낙룡파에서 뒤통수 맞은 후로 지나치게 예민해진 건 아닌가 모르겠다.

섭섭함을 감추지 못하는 천우신을 뒤로 두고 나는 착착 작전을 진행시켜 나가기 시작했다. 백골단이 얼마나 이 고룡포에 얼마나 오래 전부터 암약하며 작전을 펴왔는지는 몰라도 현재의 우리에 대한 감시는 피상적일 수밖에 없었다. 여차하여 우리에게 감시 자체를 들키면 우리의 행동이 어떻게 바뀔지 알 수가 없을 테니 말이다.

천우신이 순순히 동행을 포기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문제는 일단락 지어진 셈이었지만… 근데… 근데, 빌어먹을……! 작전 짤 때까지는 이게 잘 먹힐까만 걱정이었는데… 정작 작전 실행이 가까워져 갈수록 나는 작전 외의 요소들 때문에 복잡하고 혼란스런 심정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건… 예상 이상으로 심각했다. 천우신에 대한 막연한 의구심… 대천마라는 거대한 적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두려움… 적의 음모를 분석한 판단 자체에 대한 자신 없음… 이번에야말로 나 자신이 먼저 살인을 하기 위해 나섰다는 사실에 대한 자책감… 그런 여러 가지 감정들이 반복해서 새록새록 솟아나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제기…! 나 자신의 죽음으로써 정당방위, 혹은 정당한 분노에 의한 살인에 대한 감정은 확고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과연 정당한 복수라는 게 있기는 한 건지 모르겠지만…….

“진대가, 모두 제 위치에서 대기 중입니다.”

나는 대교의 최종 보고를 들으며 눈을 감았고, 그러자 지금까지 쌓여 있던 감정과 의심들이 일제히 자기 가 먼저라고 나서며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정당한 보복’이라는 개념이 가장 먼저 큰 소리를 치고 있었다. 세상에 그런 건 없으며 또한 복수는 복수를 낳고… 등등의 말들… 그러나, 나는 곧 눈을 뜨며 중얼거렸다. X까!

나는 복수심에 불타고 있는 대교와 다른 녀석들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모두, 지금의 감정에 충실해라. 후회하지 마. 후회하는 놈은 용서하지 않겠다.”

의미를 완전히 아는지 모르는지, 일단 모두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건 나 자신에게 한 소리였다. 나는 다시 모두에게, 나 자신에게 명령했다.

“이제… 가자. 갚아 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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