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31-3화 : 두 명의 공주.(3)
4-7. 두 명의 공주.(3)
가명과 함께 엄하고도 썰렁한 명호를 대니 녀석은 잠시 혼란스러운 눈치였다.
“아, 알고 보니 김진 선생이셨군요. 본인은 무림맹의 사천지부를 맡고 있는 장두균이라 합니다.”
흠… 그래도 신중하게 나오는 걸 보니 남해오신룡의 윗사람인 것 같다는 쪽에 무게를 더 둔 모양이다. 확실히 재수 없는 놈이긴 해도… 현재의 내 처지에 비적이나 시정잡배도 아니고 무림맹 지부장씩이나 되는 놈을 건드리기는 좀 그런가? 게다가 애비라면 몰라도 이놈은 아직 내게 직접 손해를 끼친 적은 없고 말이다.
“무림맹 사천지부장 쯤 되는 분이 어째서 내 아우들과 시비가 붙었는지 모르겠구려.”
“아, 그건……”
“그자는 지난 날 일지 누님께 무례를 범하더니, 오늘 또 우리를 모욕했습니다. 오늘은 결코 곱게 보내지 않겠습니다.”
대오가 종소와 함께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는데 두 녀석 다 빡 돈 기색이 역력했다. 객잔 안을 얼핏 살펴보니 이미 꽤 많은 일반인들이 흥미진진 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어허~ 난 그저 지난번에 본의 아니게 일지 여협에게 상처를 입힌 것을 사과하려 했을 뿐인데 억지가 너무 심하군.”
장두균의 뻔뻔스런 발뺌에 대오의 살기가 더욱 치솟았다.
“흥! 일지 누님은 그날 몸이 좋지 않았을 뿐이다. 네놈 따위에게 당할 누님이 아니다.”
“후훗- 본 공자의 절월십이검(切月十二劍)이 비록 천하제일은 아니나 여자나 애송이 한 명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 인정하기 싫다면 어디 네가 한 번 시험해 보려무나.”
발끈하여 칼을 뽑으려는 대오에게 나는 그만 진정하라는 전음을 보냈다. 대오는 분을 참기 어려운 듯 호흡이 매우 거칠었지만 그래도 내 말을 따라 조용히 칼자루에서 손을 떼었다. 장두균은 그런 대오에게 짧게 비웃음을 날리고는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헌데… 본 공자는 아직 견식이 짧아 귀하의 그… 긴 명호를 들어 본 적이 없소이다. 대체 누구이며, 저 소룡들과는 어떤 관계요?”
<나, 그 사람 싫어요.>
뜬금없이 전음을 날려 온 것은 종소였다. 일단은 무시하고 장두균에게 입을 열었다.
“말했듯, 난 얼마 전에야 강호에 나온 천하제일도객막강철각무적금강신비공자…라고 하오. 사실 남해오신룡을 만난 건 얼마 안 되지만 다섯 명이 모두 의협심이 강하고 정의로운 성품이라 친동생들처럼 아끼고 있지요.”
“허허- 생각보다 남해오신룡은 인복이 많은가 보군요. 얼마 전에는 ‘흑룡(黑龍) 주아’라는… 산적 사냥꾼을 업으로 하는 여걸이 합류했다고 하더니… 이제는 귀하처럼 대단한 분도 만난 걸 보니 말이오.”
<나, 그 사람 싫어요.>
“남해오신룡이 비록 명성은 높으나 강호 경험이 적어서 그런지 처신에 신중치 못한 면이 있어서 걱정이었는데 귀하처럼 대단한 명호를 가진 분이 함께 하니 이제야 안심이 되오. 천하제일도객막강철각… 음… 하여간 대단한 명호요. 후후~ 진정 감탄했소이다.”
<나, 그 사람 정말 싫어요.>
“사실, 일지 여협과의 일도 사소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오. 본 공자는 단지 남해오신룡의 명성을 생각해서 친절을 베풀었을 뿐인데 마치 날 치한 취급했으니… 하지만 다 이해합니다. 그 나이의 여자들은 남자의 호의를 쉽게 착각하곤 하니 말이오.”
<나, 그 사람 정말, 정말, 정말 싫어요.>
<알았다, 알았어.>
종소의 압력도 압력이지만… 나 역시 더 이상은 조용히 웃으며 들어주기가 힘들어졌다.
“그러니까… 일지에게 ‘내 처소에서 단 둘이 술을 마시자’라고 한 것도 단지 친절이었다, 이거요?”
“아니, 누가 그런……”
“‘적어도 내 관할인 사천성 내에서는 산적 소탕을 못하게 하겠다!’라고 한 것도 일지의 수고를 덜어 주고자 하는 ‘친절’이었다 이거죠?”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요?”
장두균은 그제야 놀라서 버럭 고함을 질렀지만 이미 늦었다. 일부로 높인 내 목소리를 들은 구경꾼들이 일제히 술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상해공자께서는 참으로 친절한 분이구려! 일지가 화를 내자 곧 ‘술에 취해서 한 소리’라는 변명만 하지 않았어도 더 좋았을 것을!”
“닥치시욧! 난 그날 술을 마시지도 않았소!”
“술을 마시지는 않았다? 그럼 역시 멀쩡한 정신으로 그런 말을 했단 말이군!”
사실 난 일지와 장두균 사이의 일을 구체적으로 들은 바가 없다. 방금 말한 건 전부 내가 즉석에서 소설 쓴 거지만… 알게 뭐냐.
“닥쳐랏! 그런 식으로 날 음해할 작정이냐?”
“음해? 음해는 당신이 남해오신룡에게 한 것이 아니던가?”
뒤늦게 장두균의 수하들까지 맞고함을 치기 시작했지만, 난 모두 무시하고 불쑥 몸을 돌려 구경꾼들에게 소리쳤다.
“여러분들은 지금부터의 일에 증인이 되어 주시오! 무림맹의 장두균 나으리께서는 우리 둘째 일지의 미모에 혹해 수작을 부리다가 실패하자, 앙심을 품고 항상 남해오신룡을 비방하고 다닌다 하오. 남해오신룡을 아끼는 나로서도 더는 참을 수가 없어 오늘 결판을 내려고 하오!”
말을 마치고 스윽 훑어보니, 그 사이 더 모여 든 관객들은 대부분 우리 측 긍정의 분위기였다. 예상대로… 무림인들이라면 몰라도 일반인들에게는 자신들과 별 관계없는 무림맹 간부보다는 서민들에게 해를 끼치는 해적과 산적들 소탕으로 쌓아 온 남해오신룡의 인기가 더 좋았던 것이다. 뭐… 당장 눈앞에 보이는 미청년 대오와 미꼬맹이(?) 종소의 외모가 장두균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준 높은 것도 큰 요인인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장두균은 자신의 특기인 ‘비방하기’로 반격당한 것이 분한지 이를 부드득 갈았다.
“…남해오신룡이 갈수록 협의를 잃고 재물을 탐낸다는 소문이 돌더니 이제는 강호의 정의를 지키는 무림맹까지 우습게 여기게 되었군.”
“남해오신룡이 욕심 없이 사람들을 돕는다는 것과, 상해공자 장두균이 미룡 일지에게 흑심을 품고 있다는 것은 지나가는 개한테 물어봐도 알 것이오.”
“좋…소이다! 정히 본 공자를 욕보이려거든. 어디 내 검을 꺾고 계속해 보시지!”
“그러지 뭐.”
“흥! 당신이 패하면 사람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날 음해한 것을 사과해야 한다. 아니… 그 전에 내 검의 이슬로 사라질지 모르니 유언으로 남기는 것은 어떤가.”
“내가 패하면 나뿐 아니라 남해오신룡 전원이 네 앞에 무릎을 꿇을 거야. 대신, 네가 지면 반대로 남해오신룡에게 무릎을 꿇고 사과할 것이며 또한 사람들 앞에서 내게 패했다는 사실을 열 번 크게 외쳐야 할 거야.”
“…좋아. 밖으로 나가지.”
내 생각 이상으로 장두균의 기세는 당당했다. 사실… 사람들은 과거 오대세가(五大世家)에 버금가던 해남파가 근 백년 이상 ‘떨거지들’로 전락해 있던 중요 원인을 절월십이검의 유실로 꼽는다. 과정이야 어쨌든 결과적으로 현재 그런 절기를 차지하게 된 장두균이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종소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는지 다시 전음을 보내왔다.
<조심… 하세요. 그 사람 싫지만… 강해요.>
<걱정마라, 종소. 난 더 강해. 것두 아주 많~이!>
종소의 애매한 응원(?)과 함께 밖으로 나가자 장두균은 이미 겉옷을 수하들에게 맡기고는 나름대로 폼을 잡고 서 있었다. 문득, 사랑하는 남자 오상의 앞에서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며 눈물을 흘리던 구월화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의 강요된 희생을 딛고 출세의 길을 달린 장두균의 얼굴 위로 원조 재수없음 장명의 얼굴이 겹쳐졌다.
“쳇…! 같은 필름 두 장 겹친 거 같네.”
“지금 뭐라 하셨소. 자칭 천하제일신비공자……!”
“몰라도 돼. 그보다 곧 내 명호를 똑바로 외우게 될 거야.”
“흥! 어디 두고 보자!”
장두균은 비로소 검을 뽑아 달려들었다. 과연… 비대한 몸에 비해 지극히 빠르고 정교한 검법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이기선풍검(二氣旋風劍)!”
본래 해남파 검법의 특징은 쾌검이다. 잘해야 한 호흡 정도를 몇 개로 쪼갠 쾌검이 일시에 급소 두 군데를 파고들었다. 그러나 난 전부터 기억하고 있던 보법 하나를 펼쳐 간단하게 피해 버릴 수가 있었다. 흠칫 놀란 장두균이 연이어 몇 개의 검법을 더 쏟아냈다.
“백사인침(白射引浸)! 야차검(夜叉劍)! 상해폭우(上海暴雨)! 광염오……”
귀에 거슬리는 외침과 동시에 어지러울 정도의 검광이 벌떼처럼 내 몸을 에워싸고 있었다. 순간의 방심이 끔찍한 칼침으로 이어질 급박한 상황이었지만 방어에 나선 내 동작은 지극히 여유로웠다.
“적당회피(的當回避)! 대충막기(對沖邈氣)! 대략무시(大略無視)! 심심풀……”
누구든 진짜 그런 방어 초식명이 있냐고 물으신다면… 그저 웃지요.
어쨌든 장두균은 백여 초의 공격을 쉴 새 없이 퍼붓고도 조금의 이득도 얻지 못하자 제풀에 뒤로 물러났다.
“뭐야. 벌써 끝인가?”
내가 코웃음 소리를 내며 성큼 다가서자, 기가 죽는 것 같던 장두균의 작은 눈이 다시 반짝 빛을 발했다. 그 직후 치명적인 쾌검이 내 옆구리 쪽을 파고들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초식명을 외치지도 않았으며 알아도 피하기 어려운 쾌벽참(快霹斬)이란 절기였다. 그러나 장두균의 검은 내 몸 바로 앞에서 정글도에 막혀 겁먹은 듯 파르르 떨고 있을 뿐이었다.
“어, 어떻게……”
“훗~! 네 공격은 너무 단순해서 다음이 빤히 보여.”
내 비웃음에 장두균의 두꺼운 볼 살이 꿈틀 경련을 일으켰다.
“닥쳐랏!”
악바친 고함과 함께 더욱 맹렬한 공세가 시작되었지만, 내 대충막기 신공(?)은 여전히 유효했다. 절월십이검은… 분명 장난 아닌 수준의 검법이다. 그러나 연옥도에서 천우신이 천지파멸식(天地破滅式) 못지않게 ‘강호의 재앙’으로 걱정했던, 연옥서생 사부가 남긴 파해식에는 절월십이검의 데이터도 있었다. 천우신 때문에 나도 대부분 눈여겨보지 않았지만, 웬일인지 절월십이검의 파해식 만큼은 뚜렷이 기억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비겁하다! 언제까지 피하기만 할 셈이냐?”
“아, 미안.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그만……”
싱긋 웃으면서 대꾸해 주자 안 그래도 일그러져 있던 장두균의 얼굴이 더욱 처절해지고 있었다. 그 순간 장두균의 보법이 흐트러지며 파해식을 쓸 것도 없을 정도의 헛점이 드러났다. 나는 상체를 옆으로 돌려 가슴으로 찔러오는 검을 피하며 성큼 녀석의 등 뒤로 다가섰다. 화들짝 놀란 장두균이 다급하게 오른쪽으로 몸을 틀며 검을 돌려 잡았지만, 나는 녀석의 예상과 달리 도가 아니라 발을 써서 엉덩이를 걷어차 버렸다.
장두균은 “억!” 하는 신음과 함께 앞쪽으로 비틀대면서도 다급하게 봉도식(封刀式)이라는 초식을 펼쳐 방어에 나섰다. 해남파의 봉도식은 정교하면서도 현란한 검로가 일품이지만, 시작되고 칠 초가 되기 전까지는 머리 위가 무방비. 내가 허공으로 몸을 날려 정글도 끝으로 놈의 어깨 급소를 찍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장두균은 팔의 고통으로 검을 놓치자 그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정글도의 날을 목 줄기에 겨눈다던지 하는 마무리 샷은 불필요할 것 같았다.
“…마, 말도 안 돼. 어찌… 어찌 이런 일이……”
내 정글도는 작두처럼 끝이 평평하기 때문에 장두균의 몸에는 피 흘리는 상처 하나 생기지 않은 셈이다. 그러나 그는 마치 내 정글도에 손발이 떨어져 나가기라도 한 듯 절망적인 표정으로 온몸을 떨고 있었다. 조금 불쌍해 보일 정도여서 뭐라 위로의 말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치 들기도 했지만 일단은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상당히 어수선한 관객들의 웅성임 속에서 장두균의 수하들이 다급하게 지들 두목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그들과는 대조적으로 환한 얼굴이 된 대오와 종소가 다가와 내 승리를 기뻐해 주고 있었지만, 난 그저 싱겁게 웃을 뿐이었다. 저 놈이라도 손봐주면 속이 시원할 줄 알았는데… 웬지 그냥 무덤덤했다. 오히려 장두균에 대한 미안함이 조금씩 더 커져서 다시 고개를 돌려보니 장두균은 부하들의 손을 뿌리치고 내 쪽으로 걸음을 옮겨오고 있었다.
약소 문파의 일원으로 태어난 설움을 풀고자 아비와 자식이 한 마음으로 힘을 모아 온갖 더러운 짓도 마다 않고 저지르면서 차지한 비급이니 만큼 그에 대한 애착과 믿음은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것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을 게다. 그러니 자신의 검법이 너무나 허무하게 무너진 충격 또한……
“하하핫~! 이거 제가 오늘 하늘 바깥의 하늘을 보았소이다. 절세의 고수를 몰라봤음을 용서해 주십시오!”
충격 또한… 쳇, 드럽게 빨리도 회복한다.
“귀하의 명호는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진정 감탄했소이다.”
장두균은 조금 전의 결투가 친선 시합 정도였다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빙긋이 웃고 있었다. 그러더니 약속도 기꺼이 지키겠다며 자진해서 대오와 종소의 앞에 무릎을 꿇고는
“이 장모가 모두 잘못했소.”라고 크게 세 번을 외쳤다.
“천하제일… 아, 죄송합니다. 대협의 명호를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천하제일도객막강철각무적금강신비공자”
“이 장두균은 천하제일도객막강무적금강신비공자에게 패했습니다. 이 장두균은……”
“잠깐!”
“예?”
“중간에 두 글자 빠졌어.”
녀석은 입가를 씰룩이며 애써 뭔가를 참아냈다. 그리고 결국 사람들 앞에서
‘나는 천하제일도객막강철각무적금강신비공자에게 패했다.’를 열 번이나 외쳐 대야 했다.
“다행이야. 생각보다 강한 사람이었군.”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장두균은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전형적인 비굴 모드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장두균은 조금 전의 내 말을 잘못 해석했다. 나는 결투가 끝났으니 예의를 갖춘다는 의미로 장두균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면서 슬며시 전음을 보냈다.
<그 강인한 정신력이 마음에 들어. 앞으로 두고두고 괴롭힐 보람이 있겠어.>
그의 비굴 모드 뒤편의 앙심 품은 눈빛이 혼란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 대체 왜 내게……”
뭐지? 우연한 만남이 아니었나? 뭐야? 내가 언제 이런 놈의 원한을 샀었나? 대충 그런 식의 의혹이 생긴 모양이지만, 나는 녀석의 질문을 무시한 채 다시 눈에는 살기를, 입가는 씨이익~ 형태 모호 의미불명의 미소만 날려 주는 것을 끝으로 돌아섰다.
난 얼마 안 가 어떤 형태로든 중원을 떠날 거니까 너 혼자 계속 찜찜하게 살아봐라…라는 쬐금 치사한 어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