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40-3화 : 소림사와 미래 여자.(3)
5-7. 소림사와 미래 여자.(3)
대충 모든 걸 결정한 나는 대교가 사영과 뭔가 얘기를 나누는 사이 소교를 따로 불렀다. 비록 얼결에 결정을 하긴 했지만 엄연히 남은 본대의 지휘관이 된 그녀에게 지휘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사항들, 구천보룡대 멤버들에 대한 얘기 같은 걸 해주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소령이 단속을 부탁하고… 그렇게 공적인 대화가 끝나자 소교는 내게 물었다.
“소림사에까지 가서 구해내야 하는… 여자 분에 대해 물어도 되겠습니까?”
“어- 그거 천우신에게도 말한바 있지만, 난 정말 다시 만나기 싫은 여자야. 하지만 내게 꼭 필요한 걸 가지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구해줘야 한다구.”
“…그렇군요. 곡주님께 전에 들은 바 있습니다. 진하사님께서 심한 부상을 입고 무공까지 잃은 상태에서 투병생활을 하셨던 것이 어떤 여자의 흉계에 빠져서였다고……”
“아, 내가… 아니 아우가 너희들에게도 얘기했었구나.”
싸가지 진에 대해서는 내가 그렇게 얘기 해 놓고도 오래 전이라 깜박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여러모로 비연대장과 단 둘이 가시는 것은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역시 처음엔 최소한의 인원으로 가는 편이 좋아. 소림사와 정면 충돌을 하게 되면 어차피 여기 병력을 다 끌고 간다 해도 해결될 수가 없잖아? 뭐… 만약의 경우에는 신호를 보낼 테니 지정된 장소로 와줘야겠지만 말야.”
조용히 해결하려면 처음부터 목야평(沐野平)의 결전에서 소림사 고승들 몇 명에게 얼굴이 팔린 대교도 안 가야 하는 게 옳지 않느냐…는 질문이 나올 줄 알았는데 웬일인지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부디 무사히 뜻한 바를 이루시기 바랍니다.”
“그래 고맙다, 소교. 그리고 천우신 말인데… 훗-! 소령이 일에만 간혹 총기를 잃을 뿐, 대단한 친구니까 만약의 경우에는 큰 힘이 되어 줄 거야.”
“…알고 있습니다. 천공자가 대단한 분이라는 거.”
소교가 갑자기 불쾌한 빛을 띄었다고 느낀 것은 그저 착각이었을까? 난 소교를 보내고 나서 잠시 더 생각을 해봤지만 딱히 소교가 화낼 만한 근거를 찾을 수는 없었다. 젠장. 머리 속 복잡해 죽겠을 때 하필 소교까지 왜 이러는지 모르겠군.
소교가 가고 난 후 20분 정도가 지났을 때, 대교가 내게 다가왔다.
“저는 이제 준비가 끝났습니다만……”
“나도 그래. 헌데… 출발하기 전에 잠깐 할 얘기가 있다.”
대교가 조용히 웃으며 내 말을 기다리는 가운데 나는 천천히 깊게, 아주 깊게 숨을 들이마신 다음 단숨에 내뱉었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속에 있는 고민까지 함께 나와 줄 리가 없었다. 나는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은근히 우리 쪽을 주시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마음속으로 깊이 그리고 ‘미리’ 사과했다. 조금 전 소교가 보인 태도의 의미 같은 건 솔직히 더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다. 이제 곧 가야 하는 소림사에서 만약의 경우 내가 생각하는 최악의 경우가 발생한다면… 그 때 나는 어쩌면… 이 시대에서 내가 아는, 나를 믿는 모두를 배신해야 할지도 모른다.
“대교. 출발하기 직전까지도… 넌 함께 구출해야 할 여자가 누군지, 그런 것조차 묻지 않는구나.”
“…곡주님께서는 모든 일에 진하사님의 지시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저는 그리 할 뿐입니다.”
제기! 나와 함께 무얼 하든 오직 그 이유밖에 없다라는 건가? 아직…도? 아아~ 대교 니가 이러니까 난… 난 더욱 고백을 못 하겠단 말야. 내가 너의 곡주님과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 그리고 지금의 내가 본래의 모습이라는 진실을… 그런 걸 말하려고 해도 너에게 있어 둘 사이의 갭이 이렇게나 크니… 난 도저히 말할 엄두가 안 난단 말이다.
“제가 특별히 알아야 할 사항이 있습니까?”
“…없어. 됐다.”
나는 결국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난 본래 기회를 봐 진실을 밝힌 후 만약 대교가 날 거부하면… 물론 그렇다 해도 끝까지 설득하고 어떻게든 마음을 돌려 볼 생각이었다. 얼마나 오랜 세월이 걸린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만약 오늘 여기서 최악의 경우를 만나 도저히 싸가지 진을 소림사 밖으로 구해낼 수 없게 된다면… 그럴 경우에는 싸가지 진과 함께 바로 본래의 시대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대교에게 진실을 밝히고 납득시킬 시간이 없게 되는 것이다.
“대교. 내 생각에는 말야. 소림을 얕보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의 경우에라도 우리 둘이라면 어떻게든 소림사의 금역까지 뚫고 들어갈 수는 있다고 생각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른 곳도 아닌 소림이니, 다시 나오는 것은 쉽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만……”
“그래. 그게 문제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만약 네가 오늘 부로 이 세상과 영원히 단절되는 처지가 된다면… 그렇다면 넌 나를 원망하겠지? 아주 많이……”
대교는 내 말에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저도 어쩔 수 없는 무림인입니다. 언제라도 강적의 손에 이슬이 되는 순간을 각오하며 살고 있습니다. 더구나 곡주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과정이라면 더욱 누굴 원망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빌어먹을!
“그, 그래도 말야. 넌 앞으로 너와 너의 곡주가 함께 행복해 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잖아!
그게, 그런 행복이 갑자기 날아가 버리는 거란 말야!
그래도 그렇게 태연할 수 있겠어?”
내가 갑자기 격정적으로 묻자 대교도 당황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대교는 곧 잔잔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 저도 그런 것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곡주님이라면 결코 저를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을 것입니다.”
“미, 믿는다고? 그런 일이 결코 없게 할 거라고!
너의 곡주를… 그렇게 철저히 믿고 있는 거라고……?”
“그러면… 안되나요?”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틀렸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동안 내가 가장 치열하게 고민해 왔으면서도 결국 가장 안일했던 게 바로 대교에 대한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건 세월과 함께 어찌어찌 되겠지의 수준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하지…? 대체 난……
“진하사님…? 제가 무슨 실언이라도……”
“아니, 넌 그런 거 없어. 그냥 갑자기… 내가 해야 할 일이 명확히 진 것 같아서 말야.”
씨앙~! 좋아. 난 오늘 분명히 최선을 다 할 거다.
소림사에서 싸가지 진을 구출하고 다시 나와서 내가 벌여 놓은 일들 때문에 날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돌아간다.
그러나 만약 내 모든 것을 다했는데도 안 된다면… 그렇다면 난 떠날 거다.
대교의 가족들이고, 진하연이고, 천우신이고, 비화곡이고, 지하무림이고 할 거 없이 전부 배신하고 우리 시대의 내 가족에게 가버릴 거다.
난 본래 모두의 영웅 따위가 아니고 자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이기적인 인간일 뿐이다.
난 여기에서 만난 사람들 모두를 좋아하지만 나의 부모님과 형제에 비할 수는 없는 거다. 그러니 난 가버릴 거고, 그리고 그럴 경우 반드시 대교 너… 널 데려갈 거다.
알겠냐 대교? 난 널 우리 시대로 ‘납치’해 버릴 거란 말이다.
나는 씨익- 웃었고 대교는 겁을 먹은 듯 흠칫 몸을 떨었다.
그래 나도 이제 다른 사람들, 특히 대교 네가 상처받을까 봐 하나하나 모든 일에 고민하고 괴로워하는데 지쳤다.
썅-! 여차하면 막가는 거다. 이 녀석을 잃느니 차라리 악마가 되자!
“가자, 대교.”
그래. 우리에게 어떤 운명을 줄지 모를 문제의 소림사로!
소림사!
이 시대에 많이 익숙해진 나라도… 역시 이 소림사가 있는 숭산 소실봉을 내 발로 오르고 있는 현실에는 남다른 감흥이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어렸을 적부터 무협물을 읽거나 보면서 막연히 동경하던 무림 세계… 그 속에서도 소림사는 시대를 초월해 항시 최고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천하 무예의 본산이 아닌가.
그런 곳을 나는 방학 때 중국 관광코스의 하나로 가는 수준이 아닌… 정말로 전성기 때의 이곳을 오게 된 것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일단 완전히 결정을 해 버리고 나름대로 마음을 비운 상태여서 그럴까? 내 의식은 소림사를 상대할 생각에 좀 더 집중되어 갔고… 차츰 걱정보다 호기심과 흥미가 앞서기 시작했다.
그런 내 앞에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돌계단이 끝이 없을 것처럼 길게 위쪽으로 뻗어 있었다.
…몇 백 년 전 패도광협 선배가 서 있던 곳에 나 역시 섰다.
또한 같은 길을 밟으며 소림사로 향하고 있다.
이유와 목적은 달라도… 손끝의 가는 떨림은 정글도를 쥔 손에 힘을 주어 멈추고, 미친 듯 두근거리는 심장의 박동을 즐기며… 천하 모든 무예의 본산인 소림으로 한 발, 한 발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어느 순간인가부터 나는 거센 투지와 함께 전신의 신경세포 하나하나까지 살아 꿈틀대는 기묘한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내 굳은 입술이 비틀려지며 거기에 미소라 부르기 어려운 야릇한 표정이 떠오른다.
광기… 그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기운이었다.
연옥도를 거쳐 마군황에 오르기 위한 시련을 거치면서 깨어난 나의 전사로서의 기질인 것이다.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더더욱 불타오르는……
“진하사님!”
“……”
“이 길이 맞는 걸까요?”
“응? 그, 글쎄…? 나도 언제 와봤나, 뭐.”
“흐음-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소림사 정문으로 가는 길에 이렇게 가파른 돌 계단이 있다는 얘긴 못 들어봤거든요.”
“…아까 거기서 오른쪽으로 가는 게 맞았을려나?”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숭산의 모든 길은 결국 소림사로 통할 테니 일단 계속 가보죠.”
내가 머뭇대는 사이 대교가 앞서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소림사 내부 구조는 여러 자료를 구해서 몽몽에게 입력해 놨지만 정문으로 가는 길은 뻔한 줄 알고 신경 껐던 게 실수였다.
…쳇! 분위기 팍 깨졌네. 패도광협 선배 분위기로 기분 좀 내 볼까 했더니… 여기가 아닌가벼.
“아, 누군가 마주 내려오고 있습니다.”
호오~ 이 길로도 패도 선배 때처럼 소림사의 무승들이 수련용 물통을 들고 달려오네?
그리고 우리 앞에서 일제히 신형을 멈추고……
“아미타불…. 소승은 운수장 ‘영우’라 합니다. 실례지만 시주들께서는 지금 어디로 가시는지요.”
이야- 선두에서 무승들을 이끄는 대빵 스님의 40대쯤으로 보이는 나이와 대사까지 비슷하다.
하긴… 전에 몽몽에게 시켜 쓰게 했던 유기산인지 뭔지 하는 작가 모드의 ‘패도광협’이란 소설 속의 장면들은 엄연히 전해져 오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거였다.
어쨌거나 그렇다면 이제라도 패도 선배처럼 쿨한 분위기로 목소리를 깔고……
“이 길은 소림으로 가는 길로 알고 있소. 내가 잘못 들지 않았다면.”
“…갈림길에서 잘 못 드셨군요. 다시 돌아가셔야 합니다.”
“에? 이 길도 결국 소림으로 통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숭산에 어찌 소림사로 통하는 길만 있겠습니까. 일반 신자들의 예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서둘러 돌아가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아미타불~!”
영우 스님은 소림사 정문으로 가는 길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는 바로 가던 길을 재촉했고, 벌쭘하여 서 있는 우리를 무승들이 우르르 지나쳐 갔다. 그들 사이에서 작게 ‘남자의 복장이 괴이하군’, ‘젊고 예쁜 여시는 차라리 안 왔으면 좋겠어’, ‘그래 밤잠 설치게 되면 곤란해.’… 그런 식의 잡담들이 들려왔다. 대교는 지금 인피면구(人皮面具)를 써서 변장하고 있는데도 이쁜 걸 알아보다니 과연 소림사 승려들다운 안목… 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대교… 숭산의 모든 길은 결국 소림사로 통한다며?”
“애, 애초에 갈림길에서 이쪽을 택한 건 진하사님이셨습니다.”
“그거야 이 쪽 길 경치가 더 그럴 듯해 보여서… 암튼, 대교 너도 동의했었잖아.”
“진하사님이 먼저 앞장을 서셔서 전 그냥……”
우린 민망함을 감추느라 쓸데없는 말씨름을 하면서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갈 수밖에 없었다. 아이 쒸- 뭔 소림사 가는 길이 이래?
잠깐 엉뚱한 길로 빠지는 바람에 다소 맥이 빠지기는 했지만 길을 되짚어 소림사 정문을 향하다 보니 다시 조금씩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사실 패도 선배 때의 기분을 내 보려 한 것은 그냥 재미였고,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 현실적으로는 가급적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면담을 진행해야 하므로 패도 선배와 같은 전철을 밟아서는 곤란한 것이다.
얼마나 더 산길을 올랐을까, 드디어 소림사의 정문이 우리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나와 대교는 짐짓 태연하게 정문 앞까지 갔지만 결국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우리 둘은 미리 소림사의 구조를 철저히 익혀 놓았음에도, 그림으로 보는 것과는 너무나 다른… 웅장하고 신비로운 기운이 넘치는 위용의 진짜 소림사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정문 양쪽의 내 키의 두 배는 될 것 같은 높이의 돌사자 상이 당장에라도 난폭하게 울부짖으며 달려들지 모른다는 엉뚱한 기분까지 들었다. 이건 건물 크기나 구조물의 수준 문제가 아니라 거기 거주하는 사람들이 뿜어내는 기운이 그만큼 특별한 거라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지 잠시 말도 못하던 대교가 갑자기 긴장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진하사님……!”
대교가 놀란 것은 산문 안 쪽으로부터 갑자기 손에 긴 봉을 든 무승들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바로 우리 앞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일반(?) 무승들은 분명하게 우릴 대상으로 경계하며 진형을 취했 고 곧 이어 산문에서 나온 두 명의 젊고 늙은… 한 눈에도 높은 지위로 보이는 승려들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거, 이거… 우리가 저 순수해 보이는 스님께 당한 모양이다.”
“그러게 말입니다.”
나와 대교의 말에 두 승려들을 안내해 나오던 운수장 영우… 친절하게 길을 가르쳐 주던 승려가 살짝 얼굴을 붉혔다.
“아미타불~ 딱히 시주들을 속일 의도는 없었소이다. 지나고 나니 시주의 복장이 소문으로 듣던 하사 진유준의 복장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오.”
하긴 뭐, 미리 아나 조금 늦게 아나 큰 차이는 없겠지만……
“…소승의 법명은 ‘청아’라 합니다. 시주가 진유준이 맞다 하면, 그 쪽의 여시주는 마봉낭자(魔鳳娘子) 대교… 맞습니까?”
흐음- 오자마자 문제의 청아 대사를 먼저 만나게 되는 군. 천우신이 말한 일화 말고도 무승이 된 과정부터… 평균 12년이 걸리는 소림사의 무예 수련기간을 단 7년에 끝내고 그 직후 무지하게 빡세다는 목인항(木人巷) 등의 여러 가지 관문을 단숨에 돌파한 것으로 유명한 소림사의 현 간판스타인 분이다.
“뭐, 이미 다 알고 계신 듯 하니 숨길 것도 없겠군요.”
나는 순순히 인정하고 대교에게 인피면구도 벗도록 했다. 대교가 본래의 얼굴을 드러내자 청아 대사 옆의 훨씬 더 늙은 승려가 오-하는 탄성을 발했다.
“아미타불- 과연 목야평(沐野平)에서의 비화곡 여시주가 확실하오.”
그러고 보니 나도 목야평에 온 소림사 대표 중에서 저 늙은 승려를 본 것도 같은데, 오늘 우리가 올 걸 알고 확인 차 나온 모양이다.
“전 비화곡주 독각와룡의 의형으로 그에 못지 않은 악명을 떨치고 있는 진시주… 진시주께서는 최근 패도 광협과 같은 마군황의 자리에 오르셨다죠? 그리고 역시 독각와룡의 측근으로 마중제일녀(魔仲第一女)로 불리는 대교시주… 두 분이 오늘 본사를 찾은 연유가 궁금합니다.”
쯧-! 목소리는 온화한데 내용에 가시가 돋혀 있군. 이건 역시……
“…누군가 미리 저희들의 오는 것과 내력을 낱낱이 알려준 모양이군요. 그 누군가가 우리들의 방문 목적까지는 말하지 않던가요?”
“말씀대로 누군가 두 분의 방문을 알려 주었습니다만, 이름이 적혀있지 않은 서찰이 온 거였습니다.”
청아 대사는 잠깐 말을 끊고 잔잔하게 한 번 웃더니 말을 이었다.
“그 서찰에는 진시주가 과거의 패도광협 시주의 전 인이며, 그 자격으로 오늘 본사의 백팔나한진을 제압할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써 있었습니다.”
이럴 줄 알았다. 여기에도 대천마의 수제자 마도랑 군 녀석이 미리 손을 쓰긴 쓴 모양이지만, 녀석은 내 진짜 목적을 모르고 있었다.
“…그건 잘 못된 얘기입니다, 청아 대사.”
나는 청아 대사와 마주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전 백팔나한진을 상대하여 명성이나 어떤 것을 얻고자하는 뜻이 전혀 없습니다.”
내가 패도 선배의 전인이라는 것 때문에 틀림없이 같은 목적으로 왔다고 생각했었던 모양이다. 다른 승려들은 물론이고 청아 대사까지 의혹에 찬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몇 달 전, 이 곳 소림사에서는 한 여인을 잡아 구금한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전 그녀를 돌려 받기 위해 온 것입니다.”
다들 생각보다 많이 놀라는 것 같다. 특히 청아 대사는 이상할 정도로 놀라서 안색까지 변했는걸?
“아, 물론 그녀가 소림사에 약간의 죄가 되는 행동을 했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자신이 ‘미래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요녀(妖女)를 말씀하시는 군요.”
에…? 뭐?
“당시… 그녀는 알 수 없는 물건을 이용해 만들어낸 광선(光線)으로 탑림(塔林. 역대 승려들의 무덤과 석탑이 잔득 있다는 곳.)을 훼손하였고, 소승의 손에 잡혀 구금된 후에도 경내에 수시로 귀신을 불러들이는 등… 참으로 전례가 없을 정도로 해괴한 요녀입니다. 진시주는 그런 요녀를 풀어달라 하는 말씀입니까?”
으아~ 미치고 환장해서 뭐 먹고 돌아가시겠네! 난 그토록 이 시대에서 튀는 일 안 하려고 노력하고 고민했건만, 이 여자는 오자마자 서슴없이 그런 짓들을 한 것도 모자라 자신이 미래에서 왔다고 떠벌리기까지 했단 말야?
“그, 그게 말입니다. 그녀는 사실 광증이 있어 헛소리를 곧잘 합니다. …미치기 전에 어떤 요술사로부터 몇 가지 재주를 배웠던 것을 잊지 않고 있어서… 그러니까 실수로 그런 난동을 피게 되었을 겁니다. 물론 소림사의 탑림을 훼손한 것과 하필 부처님을 모신 곳에서 부린 패악이라는 대죄를 어찌 사죄해야 할지 저도 난감합니다. 본래 그녀와 난 같은 고향사람인데 딱 한 처지가 된 것을 알고 한동안 보살펴 주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얼마간 자리를 비운 사이 그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전부… 제가 소홀한 탓이었으니 죄를 물으려면 저에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미리 준비해 온 변명이지만, 과연 먹히려는 지 모르겠다. 일단 나 정도 신분의 인물이 초 저 자세로 나가니까 상대도 난감해 하는 것 같긴 한데……
“아미,타불~ …진시주의 뜻은 저도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역시 그녀가 저지른 죄는 너무 무겁고… 또한 그녀에 대한 진시주의 말들이 과연 어디까지 진실인지 저로서는 알 수가 없군요.”
쳇! 역시 만만치 않군. 여기서부터는 다들 잘 들리도록 목소리를 조금 키워볼까?
“제 말을 믿지 못하신대도 할 수 없겠지만… 분명히 그녀는 광증의 ‘환·자·’입니다. 그 점을 감안해 주셨으면 하고… 또한 그녀 화선은 ‘여자’입니다. 그 것도 젊고! 미모의! 여성입니다! 그런 그녀가 청정한 승려들의 곁에 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세인들의 입과 귀는 가벼워서 혹시 소림의 명예에 누가 되는 헛소문이라도 날지 그 누가 알겠습니까.”
으음- 너무 노골적인 협박이었나? 하지만 난 분명 현실을 정확히 알려 준 거다. 그래… 그렇게 다들 동요 하라구. 그리고 빨리 그 골칫덩어리를, 사실 나도 싫지 만 하여간 돌려 달라구-!
“…실은 이번 일에 대한 전권을 장문방장(掌門方丈)께서 소승 청아에게 맡기신 바 있습니다.”
과연 이 청아 대사가 강력한 차기 소림사 대권(?) 후보라는 소문이 맞는 모양이군.
“그런 소승의 판단으로는… 역시 요녀 화선은 진시주에게 넘길 수 없겠습니다.”
으잉~? 갑자기 그런 단정적인 결론을?
“…역시 소승은 극악서생 같은 자와 의형제를 맺은 진시준의 말을 전부 믿기가 어렵습니다. 혹시 요녀 화선의 이상한 힘을 나쁜 곳에 이용하려는 의도는 아닌지요.”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인정할 수는 없겠지?
“그렇다면… 일단 화선과 저를 만날 수 있게 해 주시겠습니까? 그녀가 절 대하는 태도를 보면 우리가 어떤 사이인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것도 불가합니다. 금역에 갇힌 자는 죄를 용서받아 나오기 전까지는 외부인과 접촉할 수 없습니다.”
제기, 더럽게 빡빡하게 구네. 이거 혹시 천이단의 정보대로 이 양반이 싸가지 진과 그렇고 그런 관계여서 나의 합리적인(?) 요구에도 불응하고 싸가지 진을 내놓지 않으려는 거 아냐?
“하아- 불가의 분들이 사람의 말을 이렇게 믿지 못한데서야……”
“믿을 만한 인물일 경우라면 어찌 믿지 못하겠소. 또한 소림의 명예에 관해 말씀하셨는데, 본사의 오랜 불명예라면 진시주의 선대 어른과 있었던 일 이상 가는 불명예가 어디있겠소.”
이런 젠장-! 이 양반 갈수록 왜 이래? 옆의 늙은 승려가 난감한 기색으로 말리려는 걸 무시하면서까지……
“물론…! 패도광협 이후로는 소림이 사마외도의 마두(魔頭)따위에게 유린당한 일이 없었고 앞으로도 결단코 없을 것이오!”
어랏-? 이 양반 뭐라는 거야? 지금 패도 선배를 마두라고 표현 한 거야?
“이거… 뜻밖인데? 소림사는 결국 자비로운 불심을 설파하는 사찰이 아니라 싸움에 패한 걸 잊지 못해 앙심을 품은 시정 방파에 불과 했었군!”
내가 결국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말자, 대교도 자신의 청명검(淸明劍)에 손을 가져가며 냉냉하게 외쳤다.
“진하사님은 예의를 갖추고 진심으로 부탁을 했는데도 계속 시비라니, 참으로 옹졸한 화상입니다!”
우리의 반응을 본 청아 대사가 갑자기 비열한 표정으로 웃기 시작했다.
“하하핫-! 이제야 마두(魔頭)들이 본색을 드러내는 군.”
돌아가시겠네. 정말 본색을 드러낸 건 청아, 당신이잖아! 성승(聖僧) 사건 때문에라도 가급적 스님들에게는 죄를 짓기 싫었는데… 뭐 이런 이중인격자가 다 있어?
“마두들답게 칼로 어찌 해볼 생각이겠지만, 이미 전 소림승들이 대비하고 있으니 당신들은 금역의 근처도 구경하지 못할 것이오.”
“…해 봐야 알지.”
나는 등뒤의 정글도를 풀어 들고는 칼날을 덮고 있는 교룡피 집을 뺄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하하- 결국 일이 이지경이 되었으니, 진시주는 차라리 선대의 전철 밟아 보는 건 어떻겠소.”
“뭐…요?”
“만약, 당신들이 본사의 백팔나한진을 감당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내 권한으로 요녀 화선을 만나게 해줄 수도 있소.”
빌어먹을! 굳이 받아 줄 필요가 없는 소린데… 썅-! 근데 열 받아서 못 참겠다.
“흥-! 깨 주지, 그 잘난 백팔나한진!”
나는 이를 악물며 대꾸해 준 다음, 이 청아인지 뭔지 고승의 탈을 쓴 제 2의 싸가지를 따라 소림사 안으로 들어갔다. 무지하게 넓은 소림 경내를 말없이 따라 들어가다 보니 드디어 유독 넓은 공터가 등장했고, 그 한 쪽에 세워진 건물의 입구에는 나한전(羅漢殿)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그 앞에 얼추 백팔명인 듯 싶은 무승들이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걸로 보아 이 더럽게 호전적인 무림화상들은 첨부터 무조건 우릴 이런 식으로 대할 생각이었던 거다. 난 나한승들이 동시에 뿜어대고 있는 안광과 기운을 살피며 대교에게 전음을 보냈다.
< 대교 넌 빠져. >
< 예? 정말 혼자 백팔나한진을 감당하실 생각이십니까? 진하사님의 무공을 낮춰 보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백팔나한진을 깨는 건 패도광협 유운일님이 살아 돌아온다 해도 불가능한 일인지 모릅니다. >
< …알아. 백팔나한진이 그 때보다 보강되어 더욱 완벽해 졌다는 거. 하지만 어떻게든 최대한 시간을 끌어 볼 테니 그 사이 넌 틈을 봐서 금역으로 침투해서 화선이란 여자를 구출해. 아, 그 여자 본명은 외자로 ‘진’이니까 알아두도록 해. >
< 제가 화선이란 여자를 구출한다 해도 진하사님은… 어쩌시려는 겁니까. >
< 난 설사 백팔나한진에 패하더라도 죽지는 않을 자신이 있어. 그리고 나 혼자라면 어디에 갇히든 반드시 탈출할 자신 또한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너 먼저 피하란 말야. …급할 때 소교에게 신호해서 지원 요청할 신호탄은 잊지 않았겠지? >
< 물론입니다. 하지만…… >
< 왜 그래, 대교답지 않게? 내 모든 지시에 군말없이 따르라고 너의 곡주가 말했다며. >
< 그, 그렇지만…… >
웬지 대교의 태도가 이상한 것 같았다. 막상 내가 무모한 짓을 하려는 걸 보니까 조금은 동정심 같은 게 생기기라도 한 건가?
< …오늘 소림사 화상들의 각오가 보통이 아닌 듯 합니다. 부디… 부디 조심하세요. >
뭐야…! 자신의 곡주가 무사할 수 있다면 나 같은 거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식이었잖아. 지금 갑자기 왜 태도가 바뀐 거냐? 왜 그렇게 안타까운 눈으로 날 보며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거냐, 응? 나는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나한전 공터 바깥으로 나가고 있는 대교를 보며 후욱- 숨을 들이켰다. 어떤 식으로든 대교의 나에 대한 시선이 바뀌었다면 그 것만으로도 나는 백팔나한진 앞에 홀로 선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리고… 비겁이고 나발이고 반드시 여기서 살아남아 준다.
< 몽몽…! 부탁한다. 분석 들어가. >
[ 예, 주인님! ]
나한전 현판 앞에서 이 쪽을 내려다보고 있던 청아 화상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나한승들은 즉시 백팔나한진을 준비하라!”
백팔명의 나한승들이 명령에 따라 순식간에 내 앞의 공터에 진형을 갖춰 서기 시작했다. 비화곡 성지, 지하 무림 서고, 천이단의 조사정보 등등 여기저기서 자료를 찾아보기는 했지만 좀처럼 실체를 알 수 없었던 무림 최강의 진법이 나 한 사람에게 펼쳐지려는 순간인 것이다.
“한가지. 패도광협의 전인인 당신만은 알아두어야 할 진실이 있소.”
청아 화상은 희미한 미소를 띄운 채 나를 향해 말했다.
“삼백 년 전의 당시… 패도광협 유운일은 결코 백팔나한진을 깨지 못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