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41-1화 : 천년지애(千年之愛).(1)
5-8. 천년지애(千年之愛).(1)
패도광협 선배가 사실은 백팔나한진을 깨지 못했었
다고……?
“그런 말을 지금… 나보고 믿으라고 하는 거요?”
내 어처구니없어하는 반문에도 청아 화상의 여유로운 표정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믿고 안 믿고는 시주의 마음. 허나… 세인들에게 알려진 것과 달리 당시와 조금도 변하지 않은 백팔나한진을 겪어보면 알게 될 것이오.”
뭐야… 패도 선배! 저 화상의 말이 사실이야? 당신의 빛나는 업적 중에 백팔나한진 격파는 거짓뿌렁이었어? 정말 그런 거야?
들을 리도 없는 패도 선배에게 마음속으로 외쳐보는 사이 드디어 백팔나한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18명으로 구성된 소나한진(小羅漢震)이 각기 여섯 방향에 포진하는 것뿐인 것 같았지만 일단 발동되자 모든 나한진의 구성원들이 신기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하나의 흐름으로 섞여 들어가고 있었다.
[주의하십시오, 주인님! 진식의 에너지 흐름과 순간 집중력이 저의 사전계산보다 최소한 50% 이상 높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몽몽의 경고가 아니라도 나 역시 그 동안 해 온 모든 훈련 속의 나한진과는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스스슥- 움직이는 나한들의 발걸음 소리가 나비처럼 가벼웠다. 108개의 기다란 봉이 회전하는 것과 216개의 발이 밟는 보법이 하나의 거대한 흐름이 되어 홍수가 난 강물처럼 날 덮쳐오는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108명이나 되는 인원이 이렇게까지 일체화를 이룰 수 있을 줄은 몰랐기에 어쩔 수 없는 섬뜩함을 느껴야 했다. 이윽고 그 거대한 기의 강물에 위협적인 파도가 일기 시작했다. 난 내게 몰려오는 파도에 삼시전결을 던져 넣어 보았다. 섬광의 화살 세 개는 허무하게 파도 속으로 사라져갔다.
나한승들의 움직임… 진식의 변화가 삼시전결보다도 빨라…? 말도 안돼!
나한들의 봉이 일으키는 파도가 각기 전혀 다른 방향에서 연달아 날 덥쳐왔다. 나 역시 공공보법을 펼쳐 피하며 다시 사방으로 도기를 날려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마치 거대한 강물 속에 조약돌 몇 개를 던져 강물이 변하길 바라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면 최소한의 파문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큰 바위를 던진다면…? 생사금마도결 중 가장 커다란 바위라면… 역시 월광절화결? 혹은 전력을 다한 삼시전결?
아니, 아니다. 승부를 거는 것은 대교가 이 자리를 벗어나고도 한참이 지난 후라야 한다. 지금은 우선 다른 방법으로 모든 승려들의 신경을 이쪽으로 모아야 한다. 그러자면……
“이야아앗~!”
나는 의미없는 기합소리를 지르며 진식의 생문(生門)을 향해 몸을 날렸다. 예상대로 생문이 순식간에 사라지며 사문(死文)으로 바뀌었지만 나는 고집스럽게 멈추지 않았다. 곧바로 날 에워싸는 나한승들의 기가 일순 주변의 상황이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두텁고 거셌다. 그리고 다음 순간, 팔방에서 작은 회색의 점들이 일제히 엄습해왔다. 결국엔 여러 개의 봉이 동시에 찔러 들어오는 것뿐이라는 생각과 함께 거세게 몸을 회전시키며 팔방폭우(八方爆羽)라는 초식을 펼쳤다.
쿠아악-!
요란한 기의 폭발음이 일며 나한승들의 봉이 동시에 뒤로 퉁겨져 나갔다. 그러나 곧바로 더 많은 수의 공격이 내게 퍼부어지기 시작했다. 내 팔방폭우 역시 연속기였지만 그걸 전부 막아내기에는 무리였다. 급기야 퍼억- 퍽! 각각 등과 왼팔에 타격을 받고 말았다.
“이익-!”
고통을 참으며 도기를 날리고 동시에 공공보법을 펼쳐 간신히 포위망을 벗어났다. 호신강기로 대비했음에도 타격의 정도가 예상보다 큰 것은… 역시 백팔나한 진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 공격이나 방어와 만나는 순간 그 접점에 일시적으로 열 명 정도의 나한승들 내력이 합쳐지는 건 예사고 그 반대의 변화도 너무나 순식간이었다. 대교에게 ‘살아남을 자신이 있다’고 한 말을 과연 지킬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강력한 공격이라면 공격자들에게 살기가 있고 없고는 문제가 아니었다.
<몽몽… 분석, 아직 멀었냐?>
[죄송합니다. 데이터가 너무 부족합니다.]
나는 다시 날 에워싸고 덥쳐오는 나한승들의 눈을 보았다. 공공보법을 써서 피하며 나도 모르게 ‘틀렸다’라고 중얼거렸다. 그들의 시선과 공격 방향은 일치하지 않았다. 이어지는 공격을 이번에는 오행미종보(五行迷踪步)를 펼쳐 흘려보내며 간신히 작은 생문, 순간적으로 진식의 흐름이 끊긴 곳을 찾아 들어갔다. 아주 잠깐 생긴 여유에 나는 재빨리 대교 쪽을 살폈다. 녀석은 꼼짝도 않고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제기. 기껏 일부로 사문으로 들어가 두 방이나 맞아 주었는데… 그래도 대교가 탈출할 수 있을 만큼 모두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었나? 응? 나한승들이 갑자기 뒤로 물러선다…?
“비첨주벽(秘 走壁)!”
청아 화상의 새로운 명령이 떨어지자 즉시 진식이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 뒤쪽의 나한들이 일제히 앞쪽의 나한들 어깨를 밟고 위로 날아올랐다. 공격이 좀 더 격해지면서 다양한 괘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걸 오행미종보로 간신히 피해 나가던 나는 어느 순간 보법을 공공보법으로 변화시켜 앞으로 뛰쳐나갔다.
난 이를 악물고 월광절화결 중 하나인 살인 초승달, 청섬백(靑纖魄)을 펼쳤다. 섬뜩한 푸른빛의 반원… 청섬백을 뒤따라 달려가며 남은 내공을 거의 다 끌어올려 다음 초식을 준비했다. 나한승들이 청섬백에 놀라 진식의 흐름을 벗어난 움직임을 보일 때 반격의 실마리를 잡을 생각이었다. 최소한 대교가 이 자리를 벗어날 틈이 생길 정도의 화끈한 격전을 벌여야만……
“만쇄금백(萬鎖禁魄)!”
청아 화상의 외침과 함께 나한들이 청섬백 앞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움직임…? 지하무림도 모르던 청섬 백을 이들은 안다…?
설마, 하는 내 눈앞에서 하늘 아래 존재하는 모든 것을 자를 수 있다는 청섬백이… 나한승들 18명의 내력이 집중된 강기의 벽 앞에서 스르르 사라지고 있었다. 생각도 못했었다. 아무리 미완성이라고는 하지만 일단 펼쳐진 청섬백이 이렇게 허무하게 막힐 줄은……
당황한 내 등 뒤에서 후웅-하고 묵직한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몸을 비틀어 후위의 공격을 막아 낸 다음 그대로 땅을 박차 신형을 날렸다. 달려가던 방향으로 뛰었으므로 그쪽에서 청섬백을 막아냈던 나한승들의 치명적인 반격을 각오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공격도 받는 일 없이 그들의 머리 위를 넘어 반대편에 착지할 수가 있었다.
“대교! 왜 끼어 든 거냐?”
나는 어느 틈에 뛰어들어 위기를 넘기게 해 준 대교에게 오히려 버럭 고함을 질렀다. 대교는 대꾸도 없이 계속 나한승들을 상대하고 있었고 나는 청섬백이 먹히지 않았던 순간보다 더한 허망함과 분노에 사로잡혀야 했다.
“대체 뭐 하자는 거야?”
나는 대교 쪽으로 달려들어 그녀 주위의 나한승들에게 미친 듯이 정글도를 휘둘렀다. 어느 순간, 나한승들이 일제히 공격을 멈추고 우리 두 사람으로부터 물러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진식의 기본적인 위치로 돌아간 나한승들 너머의 청아 화상이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처음부터 두 시주가 힘을 합치……”
“왜 뛰어 든 거야? 내 명령을 벌써 잊었나?”
청아 화상이 뭐라고 지껄이는지 들리지도 않았다.
“말해봐! 왜 뛰어든 거야! 응?”
“…청섬백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저 화상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대교의 침착한 태도와 대답이 더 거슬렸다.
“패도광협도 이 백팔나한진을 깨지 못했었다는 말? 그게 사실이면 뭐 어쨌다고! 네가 끼어 든다고 달라지는 게 있을 줄 알아?”
“물론 저 한 명이 합세한다고 백팔나한진이 흔들리지는 않을지도 모르지만……”
“알면서 왜! 왜 내 명령을 따르지 않은 거야!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여? 나 진유준이 자기 몸 하나 스스로 지키지 못하는 놈인 줄 알아? 난… 너의 그 잘난 곡주와 달라! 알겠나?”
대교의 안색이 흠칫 굳어졌다. 내 유치한 분노와 외침은 대교를 화나게 해 다시 나가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역시 솔직한 내 진심이었다.
“돌아가. 넌 네가 진짜 있고 싶은 곳으로.”
빌어먹을! 이건 진심이 아니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대교 네가……
“…지금은 여기가 제가 있고 싶은 곳입니다.”
“…그러는 것이, 곡주의 뜻이라 이거지?”
“그렇습니다.”
으아아-! 정말 미치겠네!
“가란 말야! “
“싫습니다!”
대교가 버럭 맞고함을 쳤다. 어이가 없었다.
“이번에는 진하사님의 명령을 따를 수 없습니다!”
“…그럼. 곡주의 명령이라면……?”
“예?”
“내 명령이 곧 곡주의 명령이라면? 아니, 내가 바로 너의 곡주라면?”
아아~ 이게 아닌데… 이런 식으로 말하려고 이제까지 숨겨온 게 아니었는데……
“수라혈불의 주술은… 일부, 성공했어. 알겠니? 내가 바로 진하운이며 또한 진유준이야. 그래, 믿을 수 없겠지? 하지만 너 지금까지 단 한 번이라도 진하운과 진유준이 함께 있는 거 본 적이 있니? 진하운과 너만이 알 수 있는 일들… 둘이 나눈 대화를 말해 볼까?”
나는 OFF 스위치가 고장난 기계처럼 정신없이 지껄였다. 대교가 믿어 주든 믿지 못하든 모든 걸 망쳐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난… 난 대체 무슨 소릴 지껄이고 만 걸까?
“그, 그걸… 그걸……”
대교의 안쓰러운 어깨가… 살짝 떼어진 입술이… 젖은 눈동자가… 풀잎처럼 떨고 있었다.
“대교야 난……”
“이제야 말해 주었군요.”
뭐? 대교가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이… 천하의 무정한 사람! 왜! 왜 이제야 말해요!”
대교는 내 품에 뛰어들어 두 손으로 내 가슴을 치며 부르짖기 시작했다.
“계속 기다려 왔는데! 당신이 직접 말해 주시길! 계속! 계속! 계속! 계속…!”
난 나를 원망하며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어깨를 감히 감싸 안을 수가 없었다.
“아, 알고… 있었던 거야? 대체 언제……”
“그게 뭐가 중요해요! 말했잖아요, 당신의 영혼이 어떤 육체에 머물든 변하는 것은 없다고! 그런 제 마음은… 제 사랑은 그 어떤 현실에도, 심지어 저 자신의 의지로도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순간, 내 머리 속에는 과거의 어느 날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지금 내가 들은 것은 흑주가 태어났던 주직촌의 현가장… 그 아름다운 저택의 연못가에서 대교가 내게 들려주었던 얘기였다.
“그, 그럼 왜 지금까지 아무 것도… 모르는 척을 하고 있었던 거지?”
“왜 절 의심하고, 왜 절 속이고, 왜 제게 감추고 있었죠?”
대교의 거듭되는 반문에 난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숨길 수밖에 없었던 그 어떤 이유나 그에 따른 고민도 대교가 내 고백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느꼈을 고통에는 그저 하찮은 변명밖에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난 대교가 어떤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 채 그녀가 내 마음을 몰라준다며 투정을 부리고 있었던 것이다.
“난… 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지만 역시 뭐라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가슴속에 가득했던 질투, 분노, 자존심 등의 응어리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대신 대교에 대한 순수한 감정만이 남아… 그게 너무나 뜨거워서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대교는 그런 내 가슴에 살짝 이마를 대고 기대왔다.
“이제… 이제 다시는 절 속이지 않을 거죠?”
“그래.”
“이제 다시는… 다시는 그렇게… 말없이 제 곁을 떠나지 않을 거죠?”
“그래. 결코!”
“이제 더 이상은 제게 숨기는 것이 없는 거죠?”
“……”
대교가 천천히 이마를 떼고 얼굴을 들었다.
“…실은 한 가지 더 있어. 지금 당장 말해 줄 수는 없지만……”
“또오-!”
대교의 눈동자에 노기가 떠올랐고, 난 다급하게 말했다.
“이번엔! 이번엔 잠시만 참아 줘. 우리 둘 만이 있을 때, 그때 말해 줄 테니까 말야.”
확실히 아직 대교도 모르는 비밀이 하나 더 있지만 이제는 그걸 대교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가 두렵지 않았다.
“대교… 윽!”
갑자기 내 복부를 팔꿈치로 쿡 찌른 대교는 혀를 날름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여전히 눈물로 젖은 눈이었지만 이젠 웃고 있었다.
“못된 사람!”
“그래 난 너무나 못된 사람이야.”
나는 손을 뻗어 대교의 눈가에 남은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녀의 맑고 커다란 눈동자 속에 진실한 내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이대로 서로 아무 말도 없이 먹지도 잠들지도 않고 언제까지 바라보고만 있고 싶었다. 그러나……
“갈(喝)~!”
엄청난 사자후였다. 나와 대교가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청아 화상이 홍시처럼 붉어진 얼굴로 우릴 노려보고 있었다. 그 얼굴에 ‘이 것들이 보자보자 하니까!’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불심 깊은 고승답게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두 시주간에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제 그만 시주들이 처한 상황을 직시하는 것이 어떻겠소.”
으웃-! 그러고 보니 우린 지금 천하의 소림사 백팔나한진에 포위된 위험한 상태였지? 그 것도 그렇고….. 나와 대교는 무지하게 민망한 기분으로 서로 물러선 다음 조심스럽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남다른 수행을 거친 나한승들이어서인지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보이진 않았지만 웬지 아까에 비해 눈빛 속에 살기가 섞여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대교… 아무래도 우리가 솔로부대 앞에서 너무 염장질을 했나 보다.”
“예? 솔로라면… 혼자라는 의미? 어쨌든 부끄러워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대교는 새삼 어쩔 줄 몰라하며 곱게 노을진 얼굴을 들지 못했다. 나도 마찬가지 기분이었지만 수습은 해야겠기에 청아 화상을 향해 포권으로 사의를 표했다.
“크흠~ 음… 이거 실례가 많았소이다. 싸움 도중이었음에도 사정을 봐서 기다려 주셨다니… 청아 대사를 필두로 한 소림승들은 진정 천상천하 비할 존재가 없을 정도로 깊은 불심과 자비를 몸소 실천하는 생불이시오.”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에 다소 길게 칭찬을 늘어놓았지만 청아 대사는 여전히 딱딱한 표정으로 별다른 대꾸 없이 백팔나한진을 재발동시켰다. 사실… 상황이 호전된 것은 전혀 없었다. 백팔나한진의 진정한 무서움은 백 팔 명의 몇 배나 되는 적을 만나도 오히려 압도한다는 응집력인데, 그걸 상대해야 할 우리는 한 명에서 달랑 한 명이 더 늘었을 뿐인 것이다.
[ …아직 분석에 필요한 데이터가 너무 부족합니다. ]
< 좀 더 시간을 끌어 볼께. 후후- 몽몽, 난 지금 상대가 백팔이 아니라 백만 나한진이라도 지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