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2부 – 42-1화 : Time is as almighty as God is.(1)
구름 한 조각의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하늘이었다. 밤새 함께 있었던 대교가 새벽에 가족들에게 돌아간 후로도 나는 계속 불꺼진 모닥불 옆에 누워 날이 환하게 밝을 때까지 하늘을 보고 있었다. 한 번도 잠들지 않았음에도 계속 꿈속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 주인님……! ]
몽몽이 다른 이들의 접근을 알렸지만 나는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꿈에서 깨어 뭔가 수습에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이 아쉬웠던 것이다.
“…곡주…님?”
소교가 대표로 날 불렀지만 천천히 일어나서 보니 대교와 함께 자매들 세 명도 모두 나와 있었다.
“…그래. 얘기 들었구나.”
내가 대답하자. 미령이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면서도 바싹 다가와 새삼 내 얼굴을 들여다보기 시작했고, 소령이는 아직 어리벙벙해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소교는……
“진정… 진정 그리 된 일이었습니까?”
“그래. 그동안 속여와서 미안하다. 하연이가 되살려 놓았다고는 해도… 어차피 오래 유지될 수 없는 몸이라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
지난 밤 나와 대교는… 내 완전한 정체를 아는 것은 대교만으로 족하기에 진하운+진유준이라는 사실만 밝히기로 했고, 그 또한 대교의 가족들에게만 전하기로 했었다.
“그러니까… 야, 미령이 너 갑자기 표정이 왜 그래?”
“뭐예요. 정말 본래의 곡주님으로 돌아가시지 못하는 거예요?”
“그, 뭐… 쳇! 그래서 불만이냐?”
“흐응- 뭐 지금도 그리 나쁘지는 않지만……”
우이 쒸- 그리 나쁘지 않다는 놈 표정이 그게 뭐야? 어쨌거나 이 녀석은 적응이 빨라서 좋긴 하군. 그에 비해 소교는 아무래도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 어? 뭐야? 그렇다고 갑자기 몸을 돌려 달아날 것까지는 없잖아? 게다가 저 애 지금 눈물을… 뭐야, 소교 너 너무 오버하는 거 아냐? 미령이도 아니고 설마 소교 네가 가장 원판의 용모에 집착하고 있었던 거냐?
대교는 달아나는 소교의 뒤를 쫓아갔고, 남겨진 소령이는 울상을 하고 그 쪽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미령이가 어린 것 답지 않게 한숨을 푹 내쉬며 탄식했다.
“하아~ 불쌍한 소교 언니…! 어쩌자고 항상 가질 수 없는 사람만 좋아하게 되는 건지……”
소교가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었다고? 그럼 설마 어제 소림사 가기 전에 나와 얘기하다 화를 낸 이유가… 아, 그런 건가? 소교가 천우신을…? 난 천우신을 소령이와 맺어주려 하고 이젠 내 정체가 거역할 수 없는 곡주라면… 으- 이거 골치 아프게 됐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건……”
이 골치 아픈 삼각관계의 축, 문제의 소령이가 말문을 연다.
“오래 묵은 소홍주의 향기에 끌리듯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역시 주당 소령이 다운 비유로군.
“하지만 소령 언니. 소교 언니는 왜 항상 손에 닿지 못할 곳의 사람이냐구! 두 번째 사랑도 하필… 하필……”
응? 미령이 너 왜 날 노려보고 그래? 나 아냐! 천우신이라구!
“하지만 어차피 더 잘 된 건지도 몰라. 상대가 진하사님 아니 곡주님이라면 소교 언니도 더 이상은……”
소령이 넌 또 뭔 소리냐?
“하긴… 곡주님은 애초에 대교 언니의 사람이었으니까.”
엥? 미령이까지?
“아니, 저기- 너희들 대체 무슨 소리하고 있는 거야? 소교가… 누굴 뭐 어째?”
“아이 참! 곡주님은 아직도 모르셨어요? 소교 언니는 곡주님, 아니 진하사님을 좋아한다구요!”
“뭐? 그럴 리가…? 대교는 그렇다 치고, 소교는 내 정체를 모르고 있었잖아. 그런데 왜 날 좋아해?”
“나참-! 진하사님이 곡주님이란 걸 몰랐으니까 좋아했죠.”
미령이는 그 동안 내가 몰랐던 소교의 속마음을 내게 털어놓기 시작했는데……
물론 나도 소령이나 미령이보다 소교가 더 오래도록 날(원판) 여자로서 좋아했었다는 건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도 역시 사랑보다는 동경에 더 가까운 감정일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전자까지 발전했었던 모양이다. 소교는 대교 때문에 그런 감정을 티 내지도 못하면서 계속 속병을 앓아왔고, 그러다가 느닷없이 곡주는 살해되고 대신 나타난 것이 바로 나 진유준 하사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소교가 내게 첫눈에 반했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언젠가 동생들에게 나를 ‘나처럼 아픈 사랑을 하는, 나와 같은 남자’라고 표현했다는 것으로 보아 동병상련의 정 같은 것을 느끼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여자들은 그런 쪽의 눈치가 빠른 건지 진하운에 이어 진유준도 대교를 좋아한다는 걸 일찌감치 눈치 깠다는 얘기다.
원판은 ‘동경’에서 사랑으로 변하는데 내 경우는 왜 ‘동정’에서 시작하는 건지… 이제 와서 새삼 따지기도 그렇지만… 어쨌든 관심을 나 진유준으로 애써(?) 돌린 참에 대교 전용(?)의 곡주 진하운까지 덜컥 부활하니 진유준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셈이라 이제 줍기만… 아니 하여간 소교로서는 패자부활전의 기회인 셈이었는데… 그런데 세상에… 이 놈도 그 놈이었던 것이다.
“으으…음! 사실 난 소교가 내 친구 천우신을 좋아하는 줄 알았어. 소교는 웬지 천우신… 그러니까 천우신이 다른 사람 좋아하는 걸 질투하는 것처럼 보였거든.”
내 일부 이의 제기에 미령이는 소령이의 눈치를 힐끗 살피더니 고개를 저었다.
“굳이 말하자면, 소교 언니가 질투한 것은 천공자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천공자예요.”
“뭐?”
“진하사님이 저희들과 헤어진 이후 연옥도에서의 모든 고난을 함께 하며 피를 나눈 형제처럼 신뢰로 맺어진 천공자…! 물론 두 분이 남녀 관계 같은 애정으로 이어진 건 아니라지만, 진하사님은 소교 언니 앞에서도 항상 천우신, 천우신- 이건 이 친구를 믿어라, 저것도 이 친구가 해 준 말- 늘 그랬잖아요.”
“…여자들은 남자들의 우정도 질투하니?”
“보통은 안 하죠. 하지만 소교 언니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따듯한 말 한마디, 눈길 한 번 받아 본 적이 없으니 그렇죠.”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으~ 역시 아무리 나라도 여자들의 심리는 너무 어렵다.
“…대교 언니도 오늘에야 소교 언니 마음을 알고 많이 놀랐어요. 낙룡파 사건 이후로 지금까지 대교 언니는 반천복화 활동도 그렇고 하여간 정신이 없어서 소교 언니와 지낸 시간이 적었거든요.”
그래서 대교가 좀 전에 얘들과 다시 왔을 때는 표정이 그리 밝지 못했었나 보다. 동생의 사랑을 두 번이나 빼앗은 셈이 되었으니 말이다.
“아~ 소교 언니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 받아 마땅하고 또한 실제로도 그러한데 어쩌다가……”
미령이와 소령이는 새삼 안타까운 표정으로 소교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말도 그 말이다. 소교는 비화곡 시절부터 대교와 맞먹을 정도의 인기… 아니 남자들 대상으로는 대교 이상의 인기를 차지하고 있는 아이돌 스타이고, 맘만 먹으면 그 어떤 사내라도 수중에 넣을 수 있을 텐데 왜 하필……
“…쯧! 하는 수 없지. 어쨌든 나로서는 달리 어찌할 방도가 없으니 너희 둘이서 소교를 잘 위로해 주도록 해.”
“…예.”
미령이와 소령이는 내게 뭔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결국 입을 다물었고 나 역시 더는 복잡해지고 싶지가 않았다. 에효~ 알고 보니 소령이가 아니라 내가 바로 ‘삼각관계의 축’이었다니……
“…개인 문제로 너무 꿀꿀하다. 전쟁이다.”
“예?”
“아니… 그건 농담이고, 어쨌든 가서 다들 떠날 준비하고 대기하라고 해. 각 부대 지휘관들은 어제의 호숫가 정자로 모이라 하고.”
“예, 곡… 아니 진하사님!”
으음~ 역시 난 빨리 권력을 놓고 집으로 돌아가야 할 놈인가 보다. 아무리 농담이라도 무심결에 미친 독재자 흉내라니……
아무래도 걱정인 소교… 정신적인 충격 때문에 참석을 안 할 줄 알았는데, 녀석은 기어이 출발 전의 보스 회의에 참가했다. 어쨌든 공무는 봐야겠기에 명령을 하달하기 시작했지만 역시 도중에 자꾸만 소교에게로 시선이 옮겨졌다.
“…그러니 정대주 휘하의 혈랑대는 보천구룡대와 긴밀한 협조체제를 유지해 주고……”
역시 시선을 이쪽으로 줄 생각을 않는다.
“…전 비연대와 전 혈랑대로 이루어진 깍두기 부대(고룡포 전투 때의 전우들)는 그대로 직접 호위를……”
대교 쪽도 안 보고…..
“…이번만은 암천주와 지하무림 간의 정보 교환 및 공유도 부탁하고……”
으- 저러고 얌전히 있는 게 더 무지 신경 쓰이네.
“…이상과 같다. 의문 사항 있나?”
…없는 모양이군. 역시 독재국가 회의 분위기로군. 나는 그렇게 회의를 마치면서 소교를 따로 불러 뭔가 직접 얘기를 들어봐야 하는 건지 망설였다. 헌데……
“아- 쓰바! 빡 도네!”
윽! 소교 저 녀석… 이번엔 꼭 그 주문(?)의 진짜 의미를 알고 쓴 것 같은 분위기다.
“오~ 그건 비화곡주의 고리아 교 주문이로군요.”
쓸데없이 끼어드는 군, 천우신.
“천공자, 아니 암천주께서도 아시는 군요.”
“하하- 당근빠따! 제가 저 친구와 함께 ‘뺑이 치고’ 다닌 지가 벌써 몇 년인데요.”
“…과연 ‘럭셔리한’ 분이로군요.”
“어…? 그건 저도 잘 모르는 표현인데……”
“전 암천주님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진하사님…과 곡주님을 모셔 왔는걸요.”
“하하핫! 진유준 쫘식은 정말 이상한 말을 많이 쓰죠. 그럼 ‘비행기를 태우다’ 같은 표현도 아시겠군요.”
“그, 그건… 그럼 암천주 쫘식께서는 ‘X탱구리’라는 말을 아십니까?”
이봐, 이봐들! 대체 무슨 경쟁을 하기 시작하는 거야? 으- 왜 대교는 말리지 말라는 전음을 보내는 거지?
“암천주 쫘식께선 연옥도에서 ‘졸라 빡세게 뺑이치다’라고 들었는데……”
“예, 정말 ‘뷰티플’, ‘X같은’ 경험이었습니다.”
으으~ 정말 듣기 괴롭네. 천우신은 그렇다 쳐도… 소교의 고운 입에서 저런 소리들이 나오게 만들다니… 내가 죽일 놈이지.
“‘난장깐다’를 매일 하셨겠군요.”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졸라 삐리’ 상어들이 많아서 식량은 걱정없었습니다만……”
나는 결국 포기하고 얌전히 자리에 앉아 두 남녀의 대화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가 더 지나자 처음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듣고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 나가고 결국 나와 대교만 남게 되었다.
“그래서 암천주 쫘식께서는 ‘생까고’ 이곳에 ‘꼽사리끼는’ 이 되었군요. ‘골 때린다’입니다.”
“…어? 지금 하신 표현들은 뭔가 나쁜 뜻이었던 것 같은데… 이봐, 유준 그렇지?”
에구- 나도 모르겠다, 이제.
“…아니. 소교는 자네가 우리들과 함께 있으며 도와줘서 고맙다…라고 표현한 거야.”
“음… 그런가…? 역시 고리아 교와 특공가의 표현들은 너무 어려워. 대체 자네 가문에서는 왜 이런 표현들을 쓰는 건가?”
“굳이 만든 게 아니라 그냥 생긴 거라고 했었잖아. 좀… 복잡한 사연이 있지만 더는 묻지 말아 주게.”
아무래도 천우신은 뭔가 눈치챈 것 같았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 다행히 소교도 더 할 마음이 없는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소교만 여기 잠시 남아 줄래?”
나는 대교와 천우신이 정자 밖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간 후에도 잠시 더 뜸을 들인 다음에야 겨우 입을 열 수가 있었다.
“소교야, 난… 난 정말 몰랐어. 미안해.”
“모르셨던 게 당연하죠. 숨기려고 많이 노력했는걸요.”
“그래도……”
“후후- 이제 괜찮아요, 전.”
확실히 소교는 이제 웃고 있었지만… 그게 더 서글퍼 보여서 가슴이 아팠다.
“곡주님과 진하사님 두 분에게 배운 주문이며 말들을 계속해서 그럴까요? 왠지 가슴이 후련해진 것 같습니다.”
정확한 의미도 모르고 썼으면서 무슨……
“..소교야. 전에도 얘기했었지만 그 말들은……”
“이제 쓰지 않을 거예요.”
소교는 다시 웃음을… 자기 딴에는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내게 다가왔다.
“쓰면 쓸수록 두 분을 더욱 생각나게 할 테니까요.”
나를 곡주와 진하사 ‘두 분’으로 표현하며 소교는 처음으로 내 얼굴을 오래도록 응시했다.
“대교 언니는… 어릴 적부터 저희들을 위해 희생하며 살아 왔어요. 반드시… 행복하게 해주세요.”
“…그래. 그럴게.”
“훗~ 이상해요. 훨씬 분하고 슬플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지 모르겠어요.”
“……”
“한 번만, 안아 줄래요?”
나는 천천히 두 팔을 내밀어 소교를 품안에 끌어당겼다. 어린 새처럼 안쓰러운 어깨가 파르르 떨고 있었다. 내 가슴에 얼굴을 감추고 흐느끼기 시작한 소교의 입에서 마지막이라는 말과 함께 계속해서
“아 쓰바 빡도네, 아 쓰바 빡도네…”
라는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처음으로 내 귀에도 그것은 너무나 슬픈 주문으로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