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14-1화 : 꿈속의 남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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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3부 – 14-1화 : 꿈속의 남자.(1)


2-5. 꿈속의 남자.(1)

통통~!

유리벽을 짚고 있는 내 손바닥에 노크하듯 두드리는… 작은 개구리가 뛰어 노는 듯한 소리와 진동이 느껴졌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대교가… 그녀의 얼굴이 바로 내 눈앞에 있었다. 대교는 내 쪽으로 상체를 기울인 채 커다란 두 눈을 깜박이지도 않고 밤하늘처럼 까맣고 깊은 눈동자로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섬세하게 그려진 것처럼 붉은 입술이 조금 떨리는 가 싶더니 어느 순간,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두근…! 나도 모르게 심장의 박동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도토리처럼 귀엽고 하얀 치아가 반짝였고, 두근두근~ 내 심장의 박동 소리가 겨울 삭풍을 뚫고 밤하늘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마치 첫 키스의 그 순간으로 돌아 간 듯한… 아, 대교의 입술이 더욱 벌어지며 하아아아~ 뜨거운 숨결을 토해낸다.

에…? 뭐, 뭐야? 왜 갑자기 눈앞에 희뿌연 안개가…

아… 맞다! 난 지금… 그녀와 같은 방안에 있는 게 아니었지? 으… 순간적으로 착각을 하고 말았다.

이 추운 겨울, 실내의 대교가 바깥 유리에 대고 입김을 불면 유리에 김이 서리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유리에 일부로 김이 서리게 하고 이어서 하는 거라면 보통 그 위에 손가락으로 낙서를… 음, 대교 너도 결국 그러려고 유리에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던 거냐? 우쒸~! 헷갈리게 왜 하필 내가 얼굴을 대고 있는 곳에…

윽~! 게다가 뭐냐? 지금 대교가 유리에 쓴 글자는…….

< 바, 바보? >

손을 들어 내 자신을 가리켜 보이자, 그 사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난 대교는 약간 과장되게 입술을 삐죽이며 으흠~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그, 그야. 지금 내 행동이 네 눈에는… 그러니까 좀 이상하게 보일지도… 그건… 에… 그게… 역시 바보같아… 보였나? >

어색하게 중얼대는 내게 대교는 거듭 크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더니 다시 한 발 다가섰다.

  • 뭐예요,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알 수 없는 행동과 말만 할 건가요?

가볍게 화를 내며 따지는 말투. 그러나 웬지 미움받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서 나는 나도 모르게 가핫-(?) 애매한 소리를 내며 웃고 말았다. 그러나 대교는 여전히 엄한(?) 표정으로 팔짱까지 터억 끼고 야단을 치기 시작했다.

  • 무슨 일인지 몰라도… 용서는 한 번! 으음… 못 써요! 무슨 남자가 여자 앞에서 그런 얼굴을… 아무튼! 남자가 진심으로 고개를 숙이는 건 한 번으로 족하다구요! 알겠어요?

< 그래. 그럴게. >

  • 다시는 제 앞에서 그런 얼굴을 보일 생각 말아요! 알겠어요?

< 예! 마님! >

에구! 안심이 되자마자 또 무심결에 장난 모드가 발동해 버렸다. 대교의 마님 모드가 정말 화를 내면… 으음… 다행히 그럴 것 같지는 않군.

  • 나참……!

결국 풀썩 웃고 마는 대교.

임마, 대교…! 대교 네가 있어서… 앞으로 원판 놈이 내게 그 어떤 짓을 하더라도… 그래, 네가 있는 한… 난 끝까지 나일 수 있을 것 같아.

< …고맙다, 대교. >

  • 훗~! 알 수 없는 사죄에, 이번에는 알 수 없는 감사인가요?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젓고 있지만, 어쩐지 전과 같은 거부감을 보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 실은, 전에 당신이 한 말에 대해 묻고 싶었던 건데… 아무래도 대답을 들을 것도 없을 것 같네요.

< 무슨… 말? >

  • 지난번에 이 방에서 만났을 때… 당신은 제게 천년… 자그마치 천년 전에 이미 저를 만났었다고 했었어요.

믿거나 말거나~ 식이긴 했지만 분명히 말하긴 했다.

  • 전 그 말을 진심으로 한 거냐고 묻고 싶었던 거예요.

< 진심……? >

그 말의 내용이 진실이냐도 아니고 진심으로 말한 거냐고…? 역시… 천년 전 얘기자체는 터무니없는 소리라는 걸 전제로 하는 건가?

  • 역시 환생… 같은 얘긴가요? 당신과 제가 천년 전의 전생부터 알던 사이라는……?

< 조금… 달라. 난 환생한 게 아니거든. >

이 얘기까지는 괜찮겠지? 원판 녀석 얘기만 빼면……

< 난 어떤 사고로 인해 그 시대로 날아갔던 거야. 소위 시간여행이란 걸 하게 되었던 거지. 그리고… 난 거기서 몇 년을 보내며… 한 소녀를 알게 되었지. 우린… 함께 이 시대로 돌아올 예정이었는데… 그런데… 그러지 못했어. >

문득… 대교의 지금 모습 위로 시간이 뿜어대는 섬광 속의 대교가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나 자신까지 그 때 그 순간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전… 가는 것이 허락 받지 못한 건가요?”

크지 않은 대교의 음성이 너무나 또렷하게 들려왔던… 난 그 때 그녀를 위해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의 대교에게만은……

  • 사랑…했었군요. 그 소녀를.

지금의 대교가 하는 말이 번득, 날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그 소녀가 바로 자기 자신을 말한다는 걸 모를 리가 없다. 굳이 선을 긋는 다는 건……

< 그래… 과거에도. 지금도… 난 대교라는 소녀를… 사랑해. >

밤하늘에 하아- 짧게 숨을 토해내며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

예상했던… 몇 번이고 각오했던 일이다. 그래… 진유준. 넌 지금의 대교가 기억에도 없는 전생의 일을 간단히 인정하고 그 때의 대교로 돌아가는 일 같은 거…

그런 기적은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잖은가.

누구든… 천년 전 과거에서의 만남 운운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를 미친 사람 취급을 하는 게 오히려 정상적인 반응일 것이다. 지금 대교의 지극히 신중한 반응은… 기본적으로 대교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말을 삼가는 성품이라서 그렇기도 할 테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나의 심상치 않은 무공이나 신분(화이트 가문과의 관계)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물론… 다른 가능성도 없는 건 아니다.

< 대교. 넌 이런 시간여행이나 환생 같은 얘기… 전에도 듣고 공감한 적이 있니? >

내 질문에 대교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 그런데 넌 왜 내 얘기를 이렇게 자연스럽게… 아니 자연스러울 정도는 아니더라도,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걸까? 대교… 너 역시 구체적으로 기억은 못해도 무의식중에 뭔가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

  • 제가… 당신의 얘기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것 같나요?

< …그럼 아닌가? >

대교는 내 반문에 대답하기에 앞서 조금 전의 나처럼, 아니 그보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 물러나더니 테이블로 돌아가 찻잔을 들었다. 나는 그녀가 이미 식은(아마도) 차를 마시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그녀는 비로소 다시 입을 열었다.

  • 전… 어렸을 적부터 꾸던 꿈이 있어요.

< 꿈……? >

  • 그래요. 매번 비슷한 장소와 사람이 반복되는 이상한 꿈이죠. 어릴 적 이후로는 거의 꾸지 않았었지만… 실은 오늘밤에도 오랜만에 그 꿈을 꾸고 깨어나… 웬지 더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방을 나왔던 거예요. 그리고… 창 밖에서 당신을 보았죠.

대교는 조금 쑥쓰럽다는 듯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 그 꿈을 꾸기 시작했을 때의 저는 아직 어렸는데… 그런데 꿈속에서의 저는 이미 지금처럼 성장했을 때의 모습이었어요. 그리고 항상… 어떤 남자 앞에서 웃고 있죠. 제 노래를 그 사람에게 들려주는 것이 너무 기뻐서… 견딜 수 없을 만치 행복해서 밤새도록….

아아~ 역시… 기억하는 거냐? 나와의 시간을……?

< 그, 꿈속의 남자… 그의 얼굴은… 기억하지 않아? >

나의 떨리는 전음에… 대교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 이상하게도 얼굴만은 보이지 않아요. 때로는 그 손길… 숨결까지도 생생하게 느껴졌었는데… 왜인지 얼굴만은 한 번도……

나는 몇 년을 별러 구한 명작 영화 DVD를 보다가 결정적인 장면에서 싹둑싹둑 가위질한 흔적을 발견한 영화광보다도 허무한 분노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으아~ 쓰파! 대체 뭐냐! 타임씨 당신! 그래, 당신이지? 당신이 대교 꿈속까지 검열(?)한 거지? 대교가 애써 간직하고 있는 나와의 기억을… 그 것도 하필 얼굴만을 모자이크 처리한 거냐? 누구 약올리는 거야,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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