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16-2화 : 환생사태의 원흉.(2)
“으으~ 허, 억~ 으우우우어~”
참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내 입을 비집고 새어 나오는 신음성…! 지극히 능수능란한 그녀의 손길은 일부러 날 괴롭히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거침없이 문지르고, 당기고, 조여왔다.
“끄으으~ 흑!”
내가 다시 낮은 신음과 함께 숨을 삼키자 그녀… 미령이는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뭐예요. 촉의 관운장은 화살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으면서도 바둑을 즐겼다고 했는데 당신은 엄살이 너무 심하군요.”
“야 임마! 너도 총 한 번 맞아 봐라. 그 딴 소리가… 윽!”
미령이 이 자식, 또 험하게 붕대를 당기더니 이제야 마무리를 한다. 제기… 역시 이 녀석에게 치료를 받는 게 아니었는데… 원판의 아파트를 떠나 집으로 돌아온 내가 소령이와 미령이의 방을 먼저 들렀던 건, 물론 지금처럼 이 녀석들에게 상처 치료를 받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본래의 용건을 얘기하던 중 녀석들에게 내 부상을 들킨 것은 소령이 때문이었는데… 음, 그 녀석이 처음 싫은 냄새가 난다고 킁킁댈 때도 설마 내 상처의 피 냄새를 맡았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었다. 거참, 무슨 강아지도 아니고…
암튼, 다소(?) 거칠기는 했지만 그건 아무래도 나에 대한 반감 때문인 것 같고, 실제 소독 처리나 붕대 감은 거나 상당히 야무지게 잘한 것 같았다. 미령이 녀석… G.M.에서 의무병 교육도 확실히 받은 모양이다.
“음… 난 관운장이 아니니 바둑은 못 둬도 소령이와 게임 한 판 정도는……”
내 말에 소령이가 반색을 하며 게임기와 팩 몇 개를 들어 보였다. 나도 농담으로만 한 얘기는 아니었지만……
“저기, 난 그런 최신 게임들은 한 번도 못해 봤는데… 좀 옛날 게임 없냐? 둠2나 삼국지3 같은 거… 아니면 더블 드래곤이라도……”
웬 석기시대 얘기를 하냐는 표정이 되어 게임기를 내려놓는 소령이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스쳐갔다.
“에- 그럼 스타는 어때?”
요즘 게임 세대와 나의 유일한 접점이 될 수도 있는 비장의 카드라고 생각했지만, 소령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소령인 그 게임 싫어요.”
으음~ 아무래도 이 녀석은 주로 현란하고 스피디한 슈팅 게임만을 좋아하고 복잡한 전략이 들어가는 건 싫어하는 모양이다. 어… 근데, 이 녀석 방금 소령인~
어쩌구하며 자기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화법을 썼지? 전엔 안 그러더니……
“아, 근데. 오빤 왜 이렇게 다쳤어요?”
나와 게임하는 건 포기했는지, 말을 돌려버리는 군.
“총상… 맞죠?”
“어, 그게… 간밤엔 일이 좀 많았거든. 무장한 특수 부대와 싸우게 되질 않나… 새벽엔 어떤 여자가 은혜를 갚겠다고 뜬금없는 육탄 공세를……”
아차, 무심결에 괜한 얘기까지 꺼냈다.
“육탄 공세에~? 그래서요? 그래서요?”
이 녀석, 무장한 특수 부대와의 혈전보다 그런 얘기에 더 눈빛을 번쩍이는군. …어쨌든.
“이걸로… 쫓아 버렸어.”
난 정글도를 들어 보이며 대답했고, 소령이는 내 얼굴과 정글도를 몇 번 번갈아 보더니 불쑥 혀를 내밀어 보였다.
“에~ 거짓말! 말해 주기 싫으니까!”
“아냐, 임마. 난 정말……”
그랬다. 대교를 생각하고 남자의 정절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란과 원판에 대한 거부감 때문인지 난 아까 원판의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에서 정말 정글도를 휘두르면서까지(?) 란의 육탄 공세를 저지했었던 것이다.
그런 나의 오버성 태도에 깔깔대고 웃던 란의 모습… 결국 장난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전까지의 그녀를 생각하면 역시 단순한 장난이나 놀림에서 나온 행동이었다고 여기기에는 좀… 음… 근데, 소령인 그렇다 쳐도 미령이 저 녀석은 또 왜 노골적으로 냉소를 띠고 있는 거야?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아까 하던 얘기나 계속해 봐요.”
쳇…! 여전히 쌀쌀 맞은 녀석이군. 이제 슬슬 지 언니처럼 귀엽게 굴면 어디 덧나나?
아… 그보다, 과연 이 녀석들… G.M.에게 대교의 일을 의뢰해도 되겠는가… 하는 점은 좀 더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 원판 놈과 얽히면… 아니… 역시 상관 없으려나? 원판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일만 아니면 그 놈도 특별히 시비를 걸지는 않을 것 같고… 이 녀석들에게 피해가 오는 일은 없겠지…? 사실 이미 얘들은 하은이와 금동이 문제 때문에 원판의 DP와 갈등이 생긴 상태이기도 하고……
“…뭐, 처음에 얘기했던 대로야. 난 너희들을 고용하고 싶어. 대, 아니 주가혜와 관련된 일 전부에 대한 의뢰랄까……?”
“흐음~ 당신 정말 가혜 언니 스토커였군요.”
“뭐라고 해도 좋으니까, 그냥 접수해 줘. 그리고… 내가 원하는 정보를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녀에게 위협이 될 만한 모든 요소’. 특히, 삼합회의 여옥이란 여자 측의 움직임은 작은 변화라도 즉시 알려 줄 것!”
“위협이 될 만한 모든 요소…? 그리고 마녀 여옥에 대해서……?”
미령이는 비로소 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표정이 되었지만, 곧 고개를 갸웃했다.
“당신도 당신의 조직이 있지 않나요? 어째서 우리에게 따로 의뢰를 하는 거죠?”
“그야, 아무래도 너희들 조직이 더 믿음직하니까 그렇지. 내 조직이란 게 생긴 지 얼마 안 된 거라… 사실 아직 많이 부족하거든.”
내 솔직한 고백에 미령이는 새삼 내 표정을 지긋이 살피며 물었다.
“설마… 그 조직, 가혜 언니를 위해서 만들어진 거라는… 그런 얘기는 아니겠죠?”
“맞는데, 왜? 그럼 안되냐?”
대답을 하자마자 소령이가 와아~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유준 오빤, 역시 대단한 스토커!”
“임마, 그 소리 좀 그만해라.”
내가 장난기 가득한 소령이 녀석의 이마에 꿀밤을 먹여주는 제스처를 하는 사이, 미령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불과 몇 시간 만에 우리 GM의 존재까지 알아낸 조직이… 단 한 가지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설마 그런……”
“사인회 말고, 가혜 언니와 직접 만난 적 있죠? 얘기해 본 적 있죠! 네? 사인은! 사인은 받았나요?”
미령이는 그렇다 치고, 직접적인 질문 공세를 퍼붓기 시작한 소령이는… 도무지 G.M. 같은 비밀결사 요원의 모습이 아니었다. 뭐, 녀석이야 평소에도 그렇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야 최근 몇 번… 음, 너희들은 아직 직접 만난 적이 없는 거냐? 너희들도 팬클럽 회원이라면서?”
“대신 받아줘요, 사인! 사인!”
소령이는 내 반문에는 아랑곳없이 자기 가방을 뒤지더니 대교의 최근 앨범 CD를 찾아 내밀었다. 그걸 받아들며 미령이를 돌아보니, 녀석은 다소 어색한 태도로 내 시선을 피한다.
“우, 우린 클럽 활동할 시간도 별로 없고……”
“그럼 일 핑계 대고 만나보면 되잖아. 너희 GM의 힘이면 아무리 인기스타라도……”
“말도 안 돼요! GM을 당신 조직처럼 개인적인 일로 움직일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해요? 그리고 그 딴 사인쯤 GM의 힘이 아니더라도 벌써 받은 적이 있다구요.”
“그럼 미령아, 이번 사인에서는 네 이름 뺄까?”
“그, 그건……”
단호하게 거절 못하고 난감해하는 저 태도… 훗~! 모처럼 녀석의 귀여운 모습을 보게 된 것 같군.
“어쨌든, 공과 사는 구분해야겠지? 오늘의 의뢰는 정식으로 접수해줘. 내 연락처는 이미 알 테고, 의뢰비는 너희들이 지정하는 은행에 즉시 입금… 그 정도면 됐지?”
내가 그렇게 말하며 일어서자, 미령이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당신은 대체… 가혜 언니와 어떤 사이인 거죠? 우리의 정보망에도 당신과 그녀의 접점은 발견되지 않았어요. 불과 며칠 전의 사인회에 당신이 난입할 때까지만 해도… 그런데 당신은 어째서 그렇게까지 그녀에게 집착할 수가 있는 거죠? 아무리 광적인 팬이라 하더라도……”
“난, 며칠 전에 처음 그녀를 만난 게 아니야. 너희들, 아니 그녀도 기억하지 못할 뿐… 난 오래 전 그녀와 함께……”
거기서 말끝을 흐리니 미령이의 의문이 더욱 증폭되는 것 같았지만……
“뭐… 내 말의 진위나 더 구체적인 일은… 그건 너희들 힘으로 알아내도록 해. 알아내는 거야말로 너희들 특기 아니냐.”
이런 식으로 말을 끊고 언급을 피하는 건… 원판 스타일이려나? 쯧…! 무심결이지만 괜한 생각을 다했군. 이 정도를 원판 놈이 특허 낸 것도 아니거늘……
“어쨌든, 사인은 꼭 받아다 줄게. 미령이 네 이름도 빼먹지 않고… 후훗~! 치료비라고 생각해.”
나는 어깨의 상처 부위를 가리켜 보이며 몸을 돌렸다.
“자, 잠깐! 한 가지만 더 물을게요. 당신… 당신은 정말 가혜 언니에게 해를 끼칠 사람은 아닌 거죠? 그렇죠?”
녀석들이… 이 시대에서는 아직 개인적으로 친해질 기회도 없었던 대교를 이렇게 좋아하는 건… 역시 전생에 ‘친자매’였다는 인연 때문일까……?
“당연하지.”
짧지만 확실하게 대답해 준 후, 녀석들의 방을 나왔다. 대교에 대한 내 마음을 더 길게 설명하기도 뭐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는데, 잘 전달되었는지는……
음… 근데 생각해 보니, 두 녀석 다 나의 지난밤 행적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대교가 나에 대해 의뢰한 이상 GM의 감시도 항상 어디선가 번득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쟤들이 내 행적을 모른다는 건… 챈이 나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직접적인 감시는 철수시켰다거나… 아니면 내부인들끼리도 다른 업무로 분류된 사항의 정보는 공유되지 않는다거나… 으음… 최악의 경우는 저 애들이 다 알면서 시치미를 뗀 경우지만… 소령이와 미령이, 특히 소령이가 원판 급의 음흉함을 지녔다는 상상은 아예 하고 싶지도 않군.
내가 소령, 미령 자매의 방을 나와 3층으로 올라간 것은 이미 점심 시간이 가까워진 때였다. 간밤에 집을 나서기 전, 식구들에게는 친구와의 약속이 있다고만 말해 두었었다.
“음… 왔냐, 방탕한 아들!”
부엌에서 점심 준비를 하시다가 날 맞이한 어머니의 인사말.
“에이- 다 큰 남자가 밖에서 하루 밤 세고 올 수도 있지 뭘 그러세… 윽!”
으… 금동이 녀석이 달려들어 매달리는 바람에 부상 입은 걸 티낼 뻔했다. 다행히 아무도 날 주목하지 않은 순간이었고, 직접 접촉한 금동이 녀석만이 눈치 빠르게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채고는 얌전히 내 어깨에서 내려왔다.
“에효~ 쟤가 요즘 이렇단다.”
어머니께서 짐짓 한탄하시자 식탁에서 커피 잔을 앞에 두고 앉아있던 하은이가 피식 웃으며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친구가 아니라… 애인 만나고 왔나 보죠, 뭐.”
“애이인?”
“호호호~ 그 왜, 오빠 방의 그 사진 있잖아요.”
“아, 그… 중국 연예인이라는 아이 사진?”
어머니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어디 재주 있으면 그런 애 한 번 데려와 봐라.”
“진짜…요? 정말 데려 올까요? 걔, 진씨 집안 며느리 감 맞는데……”
내 진담에 어머니는 무지하게 웃긴 농담을 들은 소녀처럼 깔깔대고 웃으셨고, 식탁의 하은이만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미소 짓고 있었다.
“음… 하은이 너, 나 좀 잠깐 보자.”
하은이는 얌전히 내 말에 따라 일어섰고, 어머니께서 날 돌아보며 물으셨다.
“아, 너 ‘준엽’이한테 뭐 빌린 거 있었니?”
준엽, ‘이준엽’이라는 녀석은 내 고등학교 때부터의 친구이다.
“글쎄요. 걔가 그래요?”
“컴퓨터 게임…이라던가? 하여간 오늘 찾으러 오겠다고 전화 왔었다.”
게임…? 음…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같다. 내 두 달 남짓한 ‘메멘토 기간(?)’에 마지못해 불려나갔었던 동창들과의 자리에서 준엽이 녀석이 내 시큰둥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굳이 주머니에 찔러 넣어 주었던 것이 게임 CD였었던 모양이다.
방에 들어와 기억을 더듬으며 책상을 살펴보니, 과연… 못 보던(?) 시디 한 장이 나온다. 미스터리 아일랜드 3…? 이건 내가 가장 좋아했던 미스터리한 사건 풀이 게임의 최신판이 아닌가. 이게 벌써 나왔을 줄은… 아니, 그보다 준엽이가 이걸 정품으로 샀었단 말인가? 그 녀석은 이런 게임은 싫어했었는데… 몇 년 사이 취향이 바뀌었나?
“오빠!”
“응? 아… 미안, 내가 불러 놓고… 음……”
“후후~ 괜찮아. 그보다 정말 지난밤에 주가혜와 함께 있었던 거야?”
“뭐, 잠깐은 그랬지.”
“잠깐은……?”
“그래, 나야말로 그보다… 너. 나 없을 때 아래층 애들과 다투진 않았겠지?”
“나참~ 날 뭘로 보고… 내가 그런 철부지 애들과 직접 티격대기라도 할 것 같았어?”
“철부지 애들이 아니란 거… 그리고 보기보다 위험한 세계의 애들이란 건 너도 알잖아. 나야… 너도 만만치 않다는 게 더 걱정이기도 하고……”
“흐음~ 우리 유준 오라버니께서는 대체 누구 편인 걸까?”
“어제도 얘기했지만… 난 누구의 편도 아니라고 했지? 굳이 말하자면… 금동이 편이라고 말야.”
“우~ 비겁해! 그런 식으로 발을 빼다니.”
“암튼… 너도 다시 생각해 봐. 나니까 네 편도 들어주는 거지, 누가 봐도 금동이는 걔네들에게 돌아가는 게 맞는 거라구.”
“글쎄… 난 다시 생각해 봐도 마찬가지인걸?”
하은이 녀석은 새삼 금동이를 꼬옥 껴안으며 새액- 웃는다.
“난 이 아이를 보낼 생각 없어. 이 아이가 스스로 떠난다면 몰라도……”
하은이의 지나치게 강한 포옹에 다소 불편하다는 표정이 되는 금동이. 아니, 그 전에 하은이가 비행기를 탈 때마다 가방 속에 갇혀 다녔었던 것도 그렇고… 갑갑한 걸 싫어하는 금동이가 왜 저렇게 하은이에게 붙어 있는 건지 잘 이해가 안됐다. 어제 소령, 미령 자매와 잠깐 어울렸을 때만 생각해봐도 그 애들과 있을 때 더 즐겁고 활기에 차 보이는 것 같았는데……
“뭐, 니 뜻이 그렇다면 지금은 어쩔 수가 없겠지. 하지만 니가 정말 금동이를 위한다면……”
“오빠!”
“응?”
“오빤 GM들이 정말 순수한 의도로 금동이를 되찾고 싶어한다고 생각해?”
“그건 무슨……”
“그 정도 수준의 비밀 결사 조직이 원숭이 한 마리 때문에 조직의 사활을 걸고 쫓는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조직의 사활을 건다…는 표현은 상당히 과장된 거겠지만, 사실 좀 너무 심각하게 나오는 건 사실이지 싶었다. 아무리 조직의 상징물이고 장로의 양녀들이 사랑하는 동물이라 해도 DP와 정면충돌을 불사할 정도라는 건……
“난… 그들이 금동이를 이용해 뭔가 불순한 음모를 진행시키고 있었다고 생각해. 2층의 꼬마 계집애 두 명은 어떤지 몰라도 다른 자들은 틀림없이……”
“…야. 그건 좀 오버다. 넌 지금 너무 니 멋대로 상황을 해석하는 거야. 나도 그들의 반응이 일반적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너라면 누가 너의 자신의 자존심이 걸린 존재를 빼앗아 간다면… 그럼 가만있겠니?”
“금동이가… GM의 자존심이란 얘기야?”
“뭐… 말하자면 그렇다는 건데… 조직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거라면 오히려 그 이상의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지.”
“아니……”
하은이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오빤, 상황 판단은 잘하는 것 같은데… 결론이 너무 약해. 역시 순진…하다고 할까? 후후~ 언젠가는 오빠도 알게 될 거야, GM 인간들의 추악함을.”
이런 제기…! 아침엔 오래비가, 점심엔 여동생이… 이 극악남매가 교대로 날 씹네 그려?
“…그래. 니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이 순진한 사람 눈에는 소령이나 미령이에 비하면 네가 더 불순한 의도로 금동이를 놓아주려 하지 않는 것 같아 보여. 과연… 내가 순진하고 단순해서 그렇게밖에 못 보는 걸까?”
내 반론에 하은이는 가타부타 의미를 판단하기 어려운 미소를 희미하게 피어 올렸다. 한편으로는 내게 섭섭해하는 표정인 것 같기도 하고……
“크흠~ 음… 암튼, 난 어디까지나 중립이다. 내가 바라는 건 이 다툼 때문에 누구라도 상처받지 않는 거야. 정신적, 육체적인 어떤 상처라도… 그리고 금동이를 포함한 누구라도 말이야. 그러니 만약 불미스런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 애들은 물론이고 너도 내게 단단히 혼날 각오해.”
“음… 어떻게 혼낼 생각인데?”
윽! 이 자식, 갑자기 이렇게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반문을 하다니…! 오래비가 기껏 심각하게 경고하는데 이런 반응을 보이면… 쳇! 여동생이 생기니 이것도 큰 문제구나. 버릇을 고치고 싶은 마음은 개발도상국 공업단지 굴뚝같아도… 이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부서질 것 같은 애를 내 무식한 손으로 줘 팰 수도 없고… 그 흔한 용돈 동결 같은 경제봉쇄 정책을 쓸래도 이 녀석은 다른 집안 대기업의 공주님이라는 이중 신분… 아니 애초에 내가 용돈 준 적도 없나? 으~ 정말 없는 건가, 이 녀석을 적당히 혼내 줄 방법이?
“후후~ 엄마는 종종 회초리로 내 종아리를 때리곤 했었지만 오빠는 과연……”
이모님께서는 미국에서도 그런 고전적인 체벌을 하셨던 건가…? 음, 그럼……
“나도 못할 거 없지. 마침 회초리 감도 있고 말야.”
나는 침대 밑에서 싸리나무 가지 다듬어 놓은 거 하나를 꺼내 휘둘러 보였다. 이건 정글도와 달리 다른 사람들 눈에 그리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는 무기를 생각하던 와중에 만들어 본… 글로 치자면 낙서에 불과한 물건이었지만, 막상 꺼내고 보니 그야말로 회초리로 딱이다.
“오빠가 정말… 그런 걸로 날 때리겠다고?”
“니가 잘못했을 때는 오래비로서 당연히! 그리고… 또 당연한 거지만, 그 만약의 경우에는 금동이도 압수야!”
흐음~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금동이가 바로 가장 훌륭한 위협 수단이라는 걸 깜박했군. 어디…
“금동아!”
나의 부름과 손짓에 금동이는 즉각 반응하여 하은이의 품을 빠져 나와 내 오른쪽 어깨 위로 뛰어 올랐다. 금동이에 대한 내 우위까지 새삼 증명해 보이자 하은이는 비로소 두 손을 들며 항복의사를 표명했다.
“알았어요, 무서운 오라버니. 앞으로는 그 애들과 싸우지 않도록 노력할게요.”
음, 아무래도 아직 그리 절실한 느낌이 들지는 않는군. 뭐… 그래도 장난으로 맞장구치는 것 같지는 않지…? 게다가……
“좋아.”
당장은 달리 더 생각나는 것도 없어서 마무리하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역시 너무 약하다 싶었다. 그래서 더 ‘오래비로서 여동생을 따끔하게 혼낼 방법’을 생각해 보고 있자니까, 하은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날 부른 건 지금 얘기 때문이었어? 어제도 비슷한 얘기했으면서… 그렇게 내가 못미더운 거야?”
“그야… 아니, 실은 너에게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 음, 그 얘긴 조금 있다가 하자.”
내가 말을 끊은 것은 문밖에서 어머니 외의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내력을 귀 쪽으로 조금 더 돌려 보니… 낯익은 목소리가 둘…! 훗~! 준엽이 혼자 올 리가 없지. 녀석과 단짝인 성원이, 강성원이도 함께 왔군.
“여어~ 유준!”
넉살 좋게 날 부르며 들어오던 성원이가 흠칫, 아니 거의 허걱~! 하는 표정으로 굳어졌다.
“유준아, 그 게임 다 깼……”
준엽이 녀석 역시 잠시 돌부처 모드로 돌입.
“왔냐? 아… 얜 미국에서 온 내 사촌 동생. 하은아 인사해라, 오빠 친구들이야.”
“하이~”
“어허~ 회초리 맞아 가며 배웠다는 한국식은 어따 팔아먹었어?”
내가 짐짓 야단을 치자, 앉은 채 손만을 들어 보였던 하은이 녀석은 아차차, 하는 표정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다시 녀석들에게 꾸벅 정중하게 상체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 후, 하은이가 긴 머리를 찰랑이며 우아한 자태로 두 녀석들 사이를 지나 방을 나가자… 그제야 어버버- 모드에서 벗어난 녀석들이 앞다투어 내게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흥분했을 때 곧잘 그랬듯 두 놈이 번갈아 가며 숨가쁘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지, 진짜 니 동생이냐?”
“예스!”
“니 여친…이거나 그런데 장난치는 거 아니고?”
“진짜 이모님 딸이야.”
“며, 몇살?”
“아직 어려. 음… 미국 나이로 열여덟이라니까 우리 나이로는… 가만, 하은이 생일이……”
내가 언젠가 들어 본 것 같은 하은이 생일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보려는 순간, 두 녀석이 동시에 내 손을 부여잡고 외쳤다.
“매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