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29화 : 마녀(魔女)를 초대하다.
3-10. 마녀(魔女)를 초대하다.
내가 생각하는 여자…라기 보다 소녀는 소령이었다.
가까운 애를 그냥 갖다 붙인 게 아니라 나름대로는 근거가 있는 추리라고 할까…? 우선 챈은 처음 만났을뿐인 내가 전설의 계승자라는 사실만으로도 무조건 호의를 가질 만큼 ‘암천주와 마군황의 친구 먹기 전설’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스스로는 ‘난 그럴 주제가 못된다’라고 하지만 사람이란 아무래도 자기가 좋아하는 스토리의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을 하기 마련이다. 그가 암천주 천우신에게 자신을 대입하면… 그 상대역(?)인 히로인은 당근, 소령이다.
음… G.M.본부의 정보창고에는 천년 전 소령이의 초상화라던가… 그런 것도 있겠지? 물론 옛날 초상화 가지고 실제로 사람 얼굴 구분하기는 대빵 어렵다지만…
분위기라던가, 분명히 닮은 점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설사 그런 초상화는 없다고 쳐도, 특정 대상에게 빠진 사람이라면 누가 그 대상과 이름이 같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역할 대입(이런 심리학 용어 있나?)이 될 가능성이 높겠…지? …그런 철저하고도 델리케이트하며 아우가상학적 논리로서 챈이 소령이를 연모하고 있다는 학설 성립!
이거… 이거, 확실히 문제로군. 물론 내 생각이 맞을 경우일 때 뿐이긴 하지만 자매들 간의 삼각관계처럼 난감한 것도 드문데… 으음~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파고들 구석이 아주 없는 건 아닌 듯도 하군. 당사자인(일수도 있는) 소령이는 정작 아무 생각도 없는 것 같으니 말이다.
아직 소령이에게서는 그… 뭐랄까, 이성에 대한 사랑을 알게 된 소녀가 뿜어내는 오오라…라고 할까? 그런 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훗~! 방금 표현은 좀 오버인 것 같기도 하다만, 하여간 예전부터 소령이는 그런 쪽에 특히 무지해서 만약 변화가 있다면 바로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된다. 그러니 챈 역시 짝사랑에 불과하다는 거고… 그럴 경우에는 챈을 줘 패서라도… 아, 아니 그건 아니고… 하여간 마음을 바꾸게 해도 상처받을 사람이 없다는 결론이다.
“음… 그렇다면……”
[ 예? ]
< 아, 아냐. 그냥 혼자 생각 좀 했다. >
[ 음… 제가 한 번 조사해 볼까요? 그 남자가 누굴 좋아하고 있는지? ]
< 네가? 어떻게? 그런 일이 전산상에 기록될 일이냐? >
[ 그거야, 그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와 메일을 주고받은 게 있다던가…… ]
< 어? 그런가? >
으음- 그러고 보니 요즘은 그런 것까지 디지털화되어간다고 했지? 우리 때만 해도 종이에 쓰는 펜팔이 유행이었는데 요즘 세대들은 연애 편지조차 거의 메일로만 주고받는다고 하니……
[ 후후~ 그러니 제가 한 번 알아볼게요. ]
< 그, 글쎄? 그건 좀… 대교와 직접 관계된 일도 아닌데 남의 사생활까지 조사한다는 건…… >
[ 왜 관계가 없겠어요? 주인님이 계속 미령님에게 미움받으면 또 지금처럼 정신이 산만해지실 테고, 모든 일에 능률이 떨어져서… 결국에는 대교님을 지키는 일에도 지장을 줄 거라고요. ]
< …음, 너도 갖다 붙이는데 많이 능숙해졌구나. >
[ 그럼요! 제가 누구 밑에서 컸는데요? ]
< 훗! 어이~ 수제자! 솔직히 말해 봐. 너 지금 그런 정당한(?) 이유로 챈의 뒤를 캐겠다는 거 아니지? >
[ 천만의 말씀…은 아니고… 헤에~ 솔직히 재밌을 것 같아서…… ]
< 그런 줄 알았다, 이 녀석아. 나도 솔직히 말해서 남들 연애사 만큼 재밌는 건 드물다고 생각하긴 한다만…… >
[ 그쵸? 그쵸? ]
< 하지만… 그래도 참아야지. 너무 명분이 약해. 남의 연애편지까지 뒤적거리기에는 말야. >
[ 흐응~ 시시해라. 우리 주인님은 가끔 너무 고지식하시다니까? ]
< 짜쉭…! 암튼 그렇게 알고, 이 일은 좀 더 두고 보기로 하자. >
[ 알겠습니다요. 그리고… 자룡대주가 돌아오고 있네요. ]
< 음, 그렇군. >
내가 요몽과 노닥거리는 사이 자룡대주는 내가 지시한 일을 모두 처리한 모양이었다. 나는 곧 병원을 떠나 공항으로 향하게 되었다.
올 때 타고 온 ‘미스 화룡’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일반 비행기의 VIP석도 꽤 탈만 했다. 뒷좌석이 없어서 의자를 뒤로 완전히 젖힌 다음 결가부좌를 틀고 있기가 수월했고 음식도 무지 맛있었다. 하루 종일 거의 굶다시피 했던 몸이라 순식간에 3인분을 먹어 치웠고, 그 덕에 스튜어디스 아가씨들의 어색한 미소를 보게 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 몽몽. 지금 먹은 음식들은 괜찮냐? >
[ 콜레스테롤과 기타 부정적인 수치 변화에 영향을 주긴 하겠지만,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
< 음… 그래. 안 그러면 더 먹고 싶은 거 참고 소스도 뺀 샐러드만 추가시켰던 보람이 없지. >
기본 식 3인분에 샐러드만 5인분 정도 더 먹었으니까… 음, 그럭저럭 하루 분 영양 보충은 되겠군. 사실은 천년 전에 가까울 정도로 자연의 기가 풍부한 해저 연옥도나 하다 못해 해신묘에서 더 머물며 몸을 회복시키고 싶었는데… 남겨두고 온 녀석들이 있으니 어쩔 수가 없다.
나는 아쉬움을 달래며 다시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소교를 구하러 서둘러 갈 때는 여유가 없어서 몰랐지만… 하늘을 나는 비행기 안에서 하는 운기조식도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주인님. 주인님! ]
< …음, 뭐냐 몽몽. >
[ 진하연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
< 그래…? 어… 지금 우리 어디쯤 온 거지? >
[ 이미 한국의 영해로 접어들었습니다. 약 7분 후 출발하셨던 김해공항에 도착할 것입니다. ]
< 다와 가는 군. 좋아, 연결 해. >
나는 눈을 뜨고 창 밖을 바라보며 하연이의 전화를 받았다.
“아… 유준 오빠?”
“그래, 나다. 새벽인데… 아직 안 자고 있었던 거야?”
“후후~ 사랑하는 우리 오라버니께서 행방불명인데… 잠이 올 리가 있나.”
…쳇! 걱정한다는 녀석이 내 친구들과 술 퍼마시고… 아니 그 전에 전화 달랑 한 번 해보고 말았나?
“으음… 이제 돌아오고 있는 거야?”
“뭐?”
“화이트 오빠가 그랬어. 지금쯤 유준 오빠가 돌아오고 있을 거라고……”
치이- 그럴 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기분 더럽네. 역시 내 행적은 원판 놈에게 철저히 감시당하고 있다 이거지?
“하핫! 그리고 정말이야? 오빠가 어제 홍콩에서 있었던 인질극을 해결했다는 거?”
“…그 인간이 너한테 그런 얘기도 하디?”
“다앙연 하지! 화이트 오빠는 나한테 모든 걸 다 말해 준단 말씀!”
“…너 술 마셨냐? 아니… 설마 지금도?”
“으음… 미령이, 고 계집애가 얘기했구나?”
“누가 얘기했든! 준엽이…는 그렇다 치고, 성원이 녀석은 술이 꽤 쎈데… 대체 같이 얼마나 퍼 마셨기에 두 놈 다 뻗은 거야? 넌 무슨 여자애가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시냐? 응? 게다가 아무리 내 친구들이라지만 나도 없는 자리에서 그렇게……”
나는 나도 모르게 잔소리를 시작했고, 그러자 갑자기 녀석은 웃음을 터트렸다. 꽤 한참을 아하하~ 거리던 하연이는 문득 진정하는 기색이 있은 후에도 여전히 웃음기를 담아 말했다.
“오빠, 그 거 알아? 세상에서 나… 나 진하연! 이 그레이스 화이트 크라우드를 어린 애 취급하는 사람은… 화이트 오빠와 유준 오빠, 두 사람뿐이라는 거.”
“…원래 오빠들은 다 그래, 임마.”
솔직히 난 오빠 노릇 초보라 진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런…가? 그런 거야?”
“그래 임마.”
“후후~ 그래, 그렇구나.”
“야! 너 아무래도 안 되겠다. 그만 자라, 응?”
“으응~? 어디서? 오빠 친구들이 내 방에 퍼져 있는걸?”
윽~! 이 자쉭들이 감히……!
“그럼 우리 방에서……”
“잠겼어, 그 방은. 오빠 친구들 바지 주머니 뒤져서 열쇠를 찾기도 좀 그렇고……”
“젠장. 그럼 소령이와 미령이 방에서 자던가. 물론 좀 껄끄러운 사이라는 건 알지만……”
“후후… 우리 화해했어, 쬐금.”
“응? 진짜?”
“같이 술 한잔하면서… 의외로 귀엽더라구, 걔들.”
‘쬐금 화해했다’는 말이 좀 애매하긴 하지만……
“그, 그래? 그럼 잘 됐네. 걔들하고 함께……”
“그 애들도 문 잠그고 자. 벌써.”
“으~ 진작에 같이 들어갔어야지! 아, 아니. 지금이라도 주인 아주머니에게 얘기해서……”
“지금… 나 걱정해 주는 거야?”
“당연하지, 임마! 빨리 문을 열어 달라거나 해서……”
“우후후후훗~! 알았어요. 그냥 그만 끊고 자야겠네. 그냥 이 방에서… 맘에 드는 사람 팔베개를 하고……”
“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바이~ 바이~ 내일 봐요오-!”
“야! 야아!”
[ 끊겼습니다. ]
우이 쒸~! 뭐야, 이 녀석!
나는 몽드폰을 들어 하연이의 전화 번호를 눌러 봤지만, 신호가 아무리 가도 녀석은 받지 않았다.
[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인님. 발신지 추적 결과, 진하연님은 현재 신불산이 아니라 울산의 한 호텔에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호텔 측 컴퓨터에도 진하연님의 전화 예약과 픽업 요청 처리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
< 그, 그래? 이 녀석, 이런 장난을…… >
어쨌거나… 과연 재벌가의 아가씨답군. 쉴 곳이 마땅치 않자 주저 없이 호텔로 가버렸다 이거지?
< 음… 근데 실제로 거기 혼자 있는지… 그것도 확인 가능하냐? >
[ 객실 안까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복도와 로비의 CCTV 녹화 분을 확인하면…… ]
< 아, 아니다. 됐다. 이 녀석… 장난 한 걸 거야. >
젠장! 그 정도는 뻔한 건데도 걱정이 되니… 이게 여동생을 둔 자의 업보(?)란 말인가? 에효~ 미령이도 그렇고… 차라리 초거대 백상어와 싸우는 게 낫지, 여자애들 상대하는 건 정말이지 힘든 것 같다.
얼마 후, 김해공항에 도착한 나는 내 차 키트 1호를 찾아서 신불산 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연이 때문에 약간 깨긴 했지만… 힘든 작전을 무사히 끝마치고 달려가는 새벽길은 무지하게 상쾌했다.
< 아참. 너희들이 녀석들에게 전화해줬다고 했지? 근데… 뭐라고 했냐? >
[ ‘박하사’가 아프다고요. ]
< 응? 그게 뭔 소리냐, 요몽? >
[ 박음직 하사라고… 부산에 군대 동기가 있지 않으세요? ]
< 에? 박은식 하사? 그래. 있지. 하지만…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았냐? 내가 언제 그 친구 얘기도 했었냐? >
[ 박은식 하사…? 박음직 하사가 아니고요? ]
< …그건 별명이고, 박은식이 맞아. >
[ 으응… 하여튼 전 몰랐어요. 전 준엽님 핸드폰에 전화를 걸면서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었는데… 우선 급한 일로 부산에 내려왔다고만 했더니, 그 분이 먼저 그러더라구요. 박하사, 박음직 하사 만나러 간거냐고요. ]
내 군대 동기 박은식 하사가 부산에 살며 휴가 때 그의 집으로 놀러 간 적이 있다는 얘기를, 녀석들에게 해 준 적은 있었지만 준엽이가 그걸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역시… 별명이 특이해서 그런가?
[ …그래서 일단 그렇다고 맞장구를 친 다음에요, 사건이 언제 풀릴지도 모르고 해서… 그 분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지요. ‘가까운 사람의 친척을 사망시켜라!’ 그게 ‘인간사회에서 시간을 벌기 위한 요령’… 맞죠? ]
< 나 참~! 그 딴 건 또 어디서 배웠냐? >
[ 최근 제가 검색했던 수많은 문헌에서요. ]
대체 어떤 문헌을 말하는 건지, 그리고 이걸 칭찬해줘야 하는 건지 어쩐지 모르겠지만……
< …담에는 그런 방법 쓰지 마라. 그래도 일단은… 이번에는 잘했다고 해주마. >
[ 헤에~ 오랜만에 칭찬 받았다! ]
나는 이미 수십 년 전에 돌아가셨을 박음… 아니 박은식 하사의 증조 할머니를 생각하며 그 분의 명복을 다시 한 번 빌었다. 차는 계속 달렸고, 신불산이 가까워지면서 연옥도 해역을 벗어난 이후 흐려져만 가던 기가 다시 점점 강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가 이틀 전 아침에 출발했던 신불산의 민박집에 복귀한 것은 출발했던 시간보다 한두 시간쯤 빠른 새벽이었다. 대충 46, 7시간 정도의 모험이었던 거지만…
나로서는 그보다 훨씬 긴 기간동안 가출했다가 돌아온듯한 기분이었다. 추락… 인질범들과의 사투에 상어 추격전… 해저 연옥도… 그야말로 별의별 일을 다 겪으며 생사의 고비도 몇 번이나 넘겼으니… 으음… 근데, 이게 뭐야? 대대적인 귀환 축하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이건… 이건 좀 심한 거 아냐?
규모는 훨씬 작지만, 무림에서 몇 년을 뺑이 치다 복귀했을 때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그 때처럼 시간여행이라도 하고 돌아 온 듯… 그러니까, 마치 여기는 출발하기 전처럼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은 느낌이랄까? 다들 깊이 잠이 들었는지 마당에서 차 소리가 요란해도 (오래된 차라…) 누구하나 불을 켜고 내다볼 생각을 하지 않았고, 먼저 하연이 방에 가보니 두 놈은 엉망으로 취해서 코를 고느라 내가 불을 켠 것은 물론이고 발로 툭툭 차도 꿈적도 않는다.
응…? 그래도 성원이는 조금 반응이 있네?
“야!”
“으, 으응… 뭐, 뭐야……”
“야, 강성원! 형님 복귀하셨다!”
“몰라… 너도 암 대서나 자……”
우이 쒸~ 이 것들… 내 걱정은 고사하고 내가 없는 걸 알기는 했던 거야?
나는 웬지 심술이 나서 놈들 발가락에 불침이라도 놓을까 하는 충동이 일기도 했지만, 그건 결국 그만 두기로 했다. 이 놈들은 어머니께 고용된 정보원이니 괜히 자극해서 좋을 건 없다는 생각…도 있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문득… 나 자신이 이렇게 변함이 없는 것에 오히려 안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무림에서 돌아왔을 때처럼, 내가 오래도록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왔을 때도 내 자리와 사람들이 변함없다는 건… 그건 물론 다소 섭섭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반갑고 기쁜 일이지.
나는 결국 그렇게 생각을 바꾸며 녀석들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방을 나왔다.
[ …주인님. 친구 분들 핸드폰의 통화기록을 검색해보니 이틀 전 오후 4시와 어제 오후 6시 경 주인님 댁으로 전화를 한 기록이 있습니다. ]
…그랬군. 정보원들답게 어머니께 내 행적을 꼰지른… 아니, 그런 개념보다는… 이번에도 어머니께 전화 한 통 못한 나 대신 안심하시라는 연락을 해 줬던 거겠지?
나는 조금씩 먼동이 터 오기 시작하는 하늘을 향해 새삼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켜며 생각했다.
그래… 오늘은 친구들과 여동생들… 녀석들과 시간을 보내자. 계곡에서 고기도 굽고, 술도 적당히 한잔하면서… 그렇게 함께 하는 여행을 즐겨 보자.
“겨울 산에서… 이 추위에 계곡에서 고기 꿔먹자고? …니가 가라, 계곡.”
우이 쒸~ 강성원, 이 자식! 해가 중천에 떠서야 부시시 일어나더니 한다는 게 어설픈 영화 ‘친구’ 흉내냐?
“…그래. 그건 좀 아니다.”
이준엽, 네 놈까지… 쳇! 내 딴엔 기껏 친목 도모의 시간을 가지려고 꺼낸 말인데……
“어… 근데 박하사, 큰 일은 같이 잘 치렀어?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응? 이 녀석 ‘증조’라는 말은 잘 못 들었었나? …하긴, 웬만큼 친한 사이가 아니면 증조할머니 장례까지 이틀 동안 도와줬다는 변명은 좀 무리이기도 하다.
“…그래. 그럭저럭.”
증조 할머니에 이어 3년 전쯤 가셨다는 할머니까지 또 보내드리는 구나. 미안하다 박하사!
“야, 야! 성원아! 그만 일어나서 우리 방에 가서 자자. 하연씨가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니……”
역시 준엽이 녀석이 하연이를 신경쓰…는 게 문제가 아니잖아?
“야! 니들, 또 잔다구?”
“어… 우리 어제 너무 과음했어. 하연씨도… 그래서 호텔로 달아난 거겠지.”
준엽이의 말에 성원이가 불쑥 상체를 일으키며 인상을 긁었다.
“우쒸~ 준엽이 넌 술이 약해서 진작에 뻗었지만… 나야말로 장난 아녔어. 야, 유준아. 니 동생… 진짜 대단하더라. 너도 알다시피 난 다른 사람 잔을 세는 타입이잖아. 근데… 어제는 니 동생 페이스에 말려들어서 그 애는 물론이고 나도 대체 얼마나 마셨는지 감을 못잡겠어. 우- 오늘은 기필코……”
“…야, 강성원! 너 오늘도 하연이하고 또 그렇게 퍼마시겠다는 거냐?”
“당연하지! 내가 딴 건 몰라도 술로 지는 건 못 참지!”
“너, 나한테 지잖아.”
“…넌 빼고! 그리고 여자잖아, 갠! 여자한테 술로 지고 참으라고?”
“에효~ 이 친구야.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다. 여류고수에게 자꾸 개기지 말고 정신 차려, 좀!”
나는 성원 녀석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아 주고 일어났다.
아무래도 두 녀석 다 한동안 비실비실 인간구실(?) 못 할 것 같아서 이번엔 아래층의 자취 소녀들… 소령이와 미령이의 방에 가보았다.
그러나… 그곳 역시 문이 잠긴 채 고른 숨소리만 희미하게 들려올 따름이었고, 실내를 스캔한 몽몽이 충격적인 보고를 했다.
[ …두 분 역시, 음주 후의 부작용으로 수면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다소 시간이 걸릴 듯합니다. ]
으~ 이 녀석들까지…? 대체 얼마나 마셨기에 소령이까지……
나는 마당으로 나오며 이번에는 하연이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녀석도 아직 퍼 자고 있었는지 전화벨이 한참을 울린 다음에야 겨우 잠에 취해 신경질적인 음성이 들려왔다.
“누구야아-!”
“나다, 임마!”
“우웅~ 힝~ 유준 오빠야? 근데 왜에~”
“우쒸~ 너 이 시간까지 뭐 하는 거야?”
“괜차나아, 이틀 계산해써.”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고……”
“…언제는 자라더니……”
“그건 임마. 니가 주정을… 어? 야? 야!”
[ 끊으셨는데요? ]
“알아, 요몽. 제기!”
이 녀석은 한 술 더 뜨는구나. 누가 진하연 아니랄까 봐 늦잠 자려고 아예 이틀 숙박비를 지불해 놨다 이거지?
그나저나… 아아~ 신이여! 한, 미, 중… 3국 젊은이들의 문화가 이토록 음주에 찌들어 있었단 말입니까?
나는 그렇게 하늘을 향해 소리 없는 절규(?)를 해야 했다.
기껏 복귀해서 오전 내내 기다려 줬음에도 졸지에 왕따를 당하게 된 나는 얼마간 혼자 민박집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산책 아닌 산책을 해야 했다.
쳇~! 이렇게 되면 나도 삐뚤어져 버릴까?
이 녀석들이 정신을 차릴 때쯤, 이번에는 내가 먼저 코가 삐뚤어지게 마셔버리고 나 혼자 모두를 왕따 시키는… 쯧!
유준아, 진유준아! 지금 뭔 생각을 하는 거냐?
난 순간적으로 떠오른 바보 같은 생각을 바로 지웠고, 대신 좀 더 건전한 방향으로 마음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려… 난 얘들을 탓할 자격이 없지. 나 자신부터 예전에는 어디로 놀러 가든 부어라 마셔라 죽자… 그런 음주문화의 선두주자였으니 말이다.
뭐, 난 지금 먼저 어느 정도 갱생한 몸이니 앞으로는 다른 얘들도 건전하고 적당한 음주문화를 즐기도록 선도하는 것이……
[ 주인님! 구양대주로부터의 전화입니다. ]
< 어, 그래? >
“여보세요?”
“아, 천주! 서둘러 돌아가셨는데… 일행 분들과는 다시 잘 만나셨는지요.”
“음… 그게, 지나치게(?) 잘 있더군. 좀 더 천천히 와도 될 걸 그랬나 봐. 구양대주와 이번 일에 수고해준 사람들 모두와 식사라도 같이하고 말이야.”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조금 전 전경하로부터 연락이 왔었습니다.”
“전경하…? 그가 왜?”
“이번에 천주께서 구해주신 소녀가 천주를 뵙고 싶다고 하는 모양입니다.”
음- 소교 얘기로군. 하긴 나도 소교를 그런 상황에서만 보고 와서 좀 찜찜하긴 했다.
“자룡대주의 말에 의하면, 천주께서 그 소녀… 여수혜를 ‘동생’이라 하셨다던데……”
“어… 그건 그냥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그만큼 아끼는 아이라는 얘기지 뭐. 그게, 사연이 좀 있어서… 그 아이는 또 나를 잘 몰라.”
나와 대교는 그렇다 치고, 소교의 환생 얘기까지 알려 줄 필요는 없겠지?
“역시 그랬었군요. 천주께선 한국에 가족이 있으신 것으로 아는데 그런 얘기가 나와서 의아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수혜의 요청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나중에 내가 연락하겠다고 전해 줘. 이젠 걔 핸드폰 번호도 아니까 말야.”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전 이번 일로 알게 되었지만… 그 소녀의 어머니가 바로 살막파(殺幕派)의 보스인 여옥이더군요.”
그걸 어떻게… 아, 맞다. 제임스가 일백마군 중의 한 명이었지?
“참고 삼아 말씀드리자면, 여옥과 그녀의 조직은 삼합회 내에서도 평이 그리 좋지 못합니다. 수단이 교묘하여 누구든 적으로 삼으면 성가신 여자지요.”
“…알고 있어. 딸인 소교… 수혜는 얘가 참 착한데 우째 엄마는 그런 지……”
쳇~! 잠시 잊고 있었는데 여옥 문제도 소교 때문에 상당히 곤란해져 버렸다.
내가 여옥을 어찌 해버리면, 나는 그렇다 치고 소교가 대교를 미워하게 되는 일로 번질 가능성도 있고… 아, 그러고 보니 사영은 또 소교를 아껴 준다고 했던가?
그건 물론 탁한에게 들은 말들로 추정한 것뿐이지만…
아무래도 사영과 대교 부녀, 여옥과 소교 모녀, 이 네 사람 사이에 내가 모르는 어떤 사연이 숨어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서로의 애정과 증오 관계가 이렇게 복잡할 리가 없다.
이거 아무래도… 무력보다는 대화를 먼저 시작해야 겠는걸?
“구양대주. 아무래도 조만간 한 번 더 홍콩 행 비행기를 마련해 줘야 할 것 같군. 수혜와 여옥… 두 사람 다 만나고 싶어 졌어.”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만… 여옥은 조직의 일로 내일 본토에 들어갈 것이며 앞으로 한 달 정도는 머물 예정이라고 합니다.”
“어? 그래? 내일?”
이런, 그럼 여옥은 한 달 후에나 만날 수 있게 된 건가?
물론 난 원래 중국 본토고 어디건 간에 여옥을 찾아 처리하려 갈 생각이긴 했지만… 가만있자, 대화로 풀어나가려면 역시 지금… 내가 소교를 구해 준 은인이라는 인식이 강한 지금이 가장 좋으려나?
“그럼, 당장 소교에게 연락해 줘. 내가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를 함께 오늘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싶다고 말야. 장소는… 홍콩에서 구양대주가 적당히… 그러니까 ‘대화’에 적당한 곳으로 골라줬으면 좋겠어. 물론, 내가 거기에 가야 할 항공편도 또 부탁해야겠군.”
“…알겠습니다. 모든 일을 차질 없이 준비토록 하겠습니다.”
하아~ 돌아온 지 몇 시간 만에 또 홍콩으로 날아가야 하다니… 날 백수 진유준이 뭐 이리 바쁜 몸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먼저 또 퍼질러 자고 있을 친구들에게 남길 메모를 썼다.
그다음 소령이와 미령이의 방 창틀에는 녀석들에게 주려고 했던 선물(상어 이빨)을 올려놓았다.
하연이에게도 핸드폰 메시지를 남길까 했지만, 녀석에게는 원판이라는 소식통이 있으니 난 생략해도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사소한(?) 몇 가지 일을 끝낸 후, 나는 다시 정글도를 잡았다.
소교를 생각하면 이걸 쓸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과연 어떻게 될지는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상대는 마녀(魔女)이니 말이다.